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 2. 16:57

세례 요한의 죽음

(마가복음 6:17-29)


이것은 피에타 상이다. 어머니 마리아가 아들 예수의 시체를 안고 있는 조각상이다. ‘피에타는 라틴어로,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이다. 이것은 미켈란젤로가 25세 때 제작한 작품이며, 유일하게 그의 이름이 새겨진 작품이다. 그 후로, 그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도 세상 어디에도 그분의 흔적을 남기지 않으셨는데…”라며 자신의 작품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이 작품의 특징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보다 젊다는 것이다. 이는 신성한 처녀인 동정녀를 표현하기 위한 장치이다.

 

지금, 어머니 마리아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을 당했다. 자식을 잃었다. 피에타상을 바라보며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드리는 자들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을 당한 어머니 마리아에게 위로를 받으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개신교의 입장에서 보면 신학적으로 비판 받는 일이지만,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애처로운 마음이 드는 일이기도 하다. 인간은 누군가의 위로 없이는 살 수 없는 큰 슬픔을 저마다 안고 살아가는 가냘픈 생명이다.

 

죽음은 언제나 슬프다. 오늘 말씀도, 죽음이 등장한다. 세례 요한의 죽음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세례 요한의 죽는 장면을 볼 때다, 그의 탄생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면 더 큰 슬픔과 안타까움과 의문이 몰려든다. 물론, 마가복음에는 세례 요한의 탄생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래서 어쩌면, 마가복음만 읽은 사람들은 세례 요한이 죽는 이야기를 접하면서 덜 슬플 수도 있다. 그러나, 4개의 복음서를 받아 든 우리들은 누가복음에 기록된 세례 요한의 탄생 이야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뒤늦게 아들(늦둥이)을 얻는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얼마나 기뻤을지 상상해 보라. 금이야 옥이야 키웠을 것이다. 특별히, 사가랴는 요한의 탄생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 가운데 있다는 것을 고백하며, 아들 요한의 탄생을 놓아두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가까지 지어 불렀다. 그 중에서 아기 요한을 이렇게 말하는 장면은 가슴 찡하다.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니리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1:76-78, 80).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와 어머니 엘리사벳은 요한이 태어났을 때 너무 기뻤으며, 그가 매우 중요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 존귀한 자라고 믿었다.

 

세례 요한이 죽을 때, 물론, 나이 많은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먼저 세상을 떠난 뒤였기 때문에, 세례 요한의 죽음을 목격하지 못했다. 그런데, 만약, 요한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신들의 자식이 이토록 허무하게 죽는 것을 목격했다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 허무한 죽음을 보면서도, 여전히 요한이 태어날 때처럼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릴 수 있었을까?

 

세례 요한의 죽음은 허무하다. 그의 탄생과 그의 사역에 비추어 보면 정말로 그의 죽음은 허무 그 자체다. 장렬한 죽음을 맞이한 것이 아니라, 비참한 죽음, 참으로 허무한 죽음을 맞이했다.

 

말씀에 등장하는 헤롯은 헤롯 안티파스이다. 이 사람은 헤롯 대왕과 말타스 사이에서 태어난 자로,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의 분봉왕이었다. 이 사람에게는 큰 윤리적 잘못이 있었는데, 동생 헤롯 빌립의 아내였던 헤로디아와 결혼하기 위해서 그의 아내와 이혼했을 뿐만 아니라, 동생에게서 아내를 빼앗아 결혼했다.

 

이 일로 세례 요한은 헤롯 안티파스의 부도덕한 일을 비판하는데, 그것 때문에 그들의 사이가 별로 좋지 못했다. 그나마 헤롯 안티파스는 요한을 참 선지자로 생각하여 그의 메시지를 무서워했는데, 오히려 헤롯의 부인이 된 헤로디아는 요한에 대하여 이를 갈았다. 그래서 그를 죽일 명분을 쥘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헤로디아는 헤롯의 생일을 맞아 음모를 꾸민다. 헤롯의 생일 잔치에서 자신의 딸 살로메가 신명나는 춤을 추게 만든 뒤, 헤롯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여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는 약속을 받아 낸다. 이때를 기회로 삼아, 헤로디아는 살로메에게 주문하기를 헤롯 왕에게 세례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라고 지시한다.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큰 소리 뻥뻥 친 헤롯은 차마 자신의 체면을 구길 수 없어, 헤로디아와 살로메의 요구대로 세례 요한의 목을 소반에 얹어가져다 준다. 세례 요한은 이렇게, 자신을 미워한 한 여인의 음모에 의해 허무하게 죽는다.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본문에서 이 세례 요한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둘씩 짝지어 전도 여행을 보내신 이야기에 삽입되어 나온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최대한 가벼운 차림으로 전도 여행에 나설 것을 주문하신다. 사실 가진 게 많으면, 그거 신경 쓰느라, 본질을 놓칠 수가 있다. 제자들의 사명은 복음(하나님 나라) 전파에 있지, 잘 먹고 잘 사는 데 있지 않다. 물론 너무 없어도 그거 신경 쓰느라 본질을 놓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아굴의 기도를 날마다 드려야 한다.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잠언 30:8).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인생의 짐들을 최대한 간편하게 하는 게 좋다. 이게 좀처럼 쉽지 않겠지만,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순종한 자들은 복음 전파의 사명을 위해서 간편한 삶(simple life)을 추구하는 것이 기독교의 영성으로 여겨져 왔음을 기억해야 한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말라 고쳤다”.

 

여기서 회개하라고 전파한 것은 단순히, ‘회개하시오!’라고 말한 게 아니라, 복음을 전파했다는 뜻이다. 제자들의 선포는 예수님의 왕 되심과 예수님으로 인해 시작된 하나님 나라를 믿고 받아들이라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왕 되심과 하나님 나라에 관심을 두고, 그분을 따라 그 나라를 사는 자들은 삶이 간편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의와 평강과 희락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14:17).

 

하나님 나라의 의와 평강과 희락은 먹고 마시는 것’, ‘소유하는 것에서 오지 않는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주님이 주신 계명의 핵심이 여기에 다 들어 있다. ‘는 쉽게 말해, 하나님과 잘 지내는 것이고, ‘평강은 쉽게 말해, 이웃과 잘 지내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삶에 희락이 온다.

 

그런데, 하나님과 잘 지내고, 이웃과 잘 지낼 수 있는 길은 우리의 삶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드러나는 데서 온다.

 

세례 요한의 죽음과 관련하여 꼭 인지해야 하는 말씀은 다음 구절이다.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12-14).

 

복음을 전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친 것은 제자들인데, 이름이 드러난 것은 제자들의 이름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이다. 이것을 기독교적 도덕(미덕)으로 보지 말라. 제자들(우리들)의 이름은 없고 예수의 이름이 드러나는 일은 단순히 도덕적인 일, ‘미덕과 겸손이 아니다.

 

우리는 겉말로는, “우리의 사역을 통해 예수의 이름이 드러나기를 바란다고 하지만, 정작 속으로는 나의 이름이 드러나기를 얼마나 바라고 있는가? 내가 행한 사역을 통해서 나의 이름이 드러나지 않을 때, 우리가 그토록 가볍게 시험에 드는 것을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드러내고 싶으면 드러내라. 우리가 열심히 일하는데 좀 우리의 이름이 드러나면 어떤가! 괜찮다. 서로 이름을 드러내고 많이 칭찬해주시라. 지금 나는 기독교의 도덕(미덕)을 말하고 싶은 게 아니다. 이런 말씀, 너무 식상하지 않나? “집사님, 권사님, 집사님(권사님)의 이름을 드러내지 마시고, 예수의 이름을 드러내세요!” 이렇게, 예수의 이름과 나의 이름 드러내는 일을 경쟁이라도 하듯 동일선상에 놓고 말하는 것 자체가 가능한가?

 

예수의 이름이 드러나는 일은 단순히 겸양과 겸손이 아니다. 예수의 이름은 우리의 이름이 드러나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 우리의 이름이 드러나면, 우리는 겨우 우쭐해지고, 그것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 받는 것에서만 끝나지만,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 곳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드러나는 종말론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즉 예수의 이름은 구원 사건이다.

 

세례 요한의 죽음은 인간적으로보았을 때 매우 허무한 죽음이다. 그러나 복음서는 그의 죽음을 그냥 그렇게 허무하게 그린 것이 아니다. 세례 요한의 죽음은 예수의 이름이 드러남과 연관되어 묘사된다. 앞서 말했듯이, 세례 요한의 죽음 이야기가 제자들의 파송 이야기에 삽입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제자들의 사역을 통해서, 드러난 것은 예수의 이름이다.

 

예수의 이름, 즉 하나님 나라의 드러남 앞에서 우리가 더 이상 무엇을 바랄 수 있겠는가?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 어떤 죽음도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의 죽음은 인간적인 슬픈 죽음, 허무한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드러난 것에 대한 복음 증거의 죽음인 것이다. 인간적으로는 허무해보여도, 하나님 안에서는 가장 고귀하고 거룩한 죽음이다.

 

요한복음에서 묘사되고 있는 세례 요한은 자신에게 세례를 받은 예수에 대하여 증거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3:30).


제자도의 마지막 길은, 세례 요한의 고백처럼 예수의 이름은 흥하여야 하고, 나의 이름은 쇠하여야 하는것이다. 나의 이름은 아무리 드러나고 흥해 보았자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없지만, 예수의 이름은 세상을 구원하는 이름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구원하는 이름, 예수의 이름을 세상에 드러내는 일은 내 이름을 세상에 드러내는 일과는 비교되지 못한다.

 

우리는 누구의 이름을 드러내며 사는가?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 부름 받은 자들이다. 그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는가? 내 이름만을 드러내고 죽는 것만큼 허무한 인생은 없다. 내 이름이 비록 세상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나를 통하여 예수의 이름이 세상에 드러났다면, 그렇게 세례 요한처럼 죽음을 맞이한다면, 나는 예수의 이름으로 세상을 구원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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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