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4. 9. 18. 05:12

야곱의 하나님 경험

창세기 34

(창세기 28:10-22)

 

형 에서의 복을 가로 챈 뒤, 궁지의 몰린 야곱은 엄마 리브가의 권유대로 집을 떠나 하란 땅으로 향한다. 길을 떠나기 전, 다행히도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받고 가지만, 그 축복이 그의 인생에 어떻게 작용하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길은 멀고 험하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의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뒤에 나오는 야곱의 회상에 의하면, 그는 지팡이 하나만 의지한 채 집을 떠났다(32:10). 아무것도 걸치지 않을 채 엄마의 자궁을 통해 세상에 던져진 인생처럼, 그의 인생은 무(nothing)에서 시작된다. 그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지만, 마음 속은 번민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은 그가 길을 가다 날이 저물었을 때 어떤 집을 찾아가 유숙을 청하지 않고, 그냥 노숙하게 되는 것을 통해서 잘 드러난다. 이는 마치 창세기 1장에서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 모습과 유사하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1:1). 아무것도 없고, 혼돈과 공허만 가득한 상태, 바로 야곱의 삶과 같다. 이것을 볼 때, 인생은 혼돈과 공허만 가득한 빈 상태(nothing)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만들어져 가는 창조와 다르지 않다.

 

야곱은 어느 집에 들어가 유숙을 청하지도 못하고, 괴로운 마음에 짓눌려 그냥 거리에서 노숙한다. 몸과 마음이 지친 상태에서 잠을 청해보려고 주변에 있는 돌을 하나 가져다가 베개를 삼아 잠자리에 든다. 그리고 꿈을 꾼다. 꿈에서 야곱은 꼭대기가 하늘에 닿아 있는 사닥다리를 본다. 그리고 그 사닥다리를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본다. 이것을 무슨 현실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일까?

 

야곱은 지금 그 어디에도 연결되어 있지 않고, 그냥 세상에 내던져진 것 같은 비참한 상황이다. 그런데 그가 꿈 꾼 대로 사닥다리가 이 땅에서 저 하늘 꼭대기에 닿았다는 것은 그의 인생이 어디에도 연결되지 않고 버려진 것 같아도, 그가 보지 못하고 있을 뿐 결국 이 땅의 인생이 저 하늘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리고 사닥다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자들(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다는 것은 아무 의지할 데 없는 야곱을 하나님께서 보호 하고 계신다는 현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꿈에서 야곱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그것은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들었던 음성과 같은 것이었다.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13-14). 그리고 여기에 더 하여, 그의 고단한 삶의 여정 가운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까지 받는다.

 

잠에서 깨어난 야곱은 자신의 현실을 다르게 보기 시작한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고, 의지할 데 없는 것 같고, 온통 혼돈과 공허뿐인 것 같았던 인생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야곱은 하나님을 이렇게 경험하고 나서 인생을 다르게 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른 인생을 살게 된다.

 

그 동안 하나님이 늘 자신과 함께 했음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했던 야곱은 이렇게 고백한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16).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여기 계신다. 나와는 상관 없는 곳, 다른 곳에 계신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 계신다.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여호와께서 바로 여기에 계신 것을 깨달은 야곱의 첫 번째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이것은 그냥 두려움이 아니라 거룩한 두려움이다. 귀신 나올 것 같은 등골이 오싹한 기분 나쁜 두려움이 아니라, 우리의 막혀 있는 오감이 하나님을 향해 전부 열리게 되면서 느끼는 거룩한 두려움이다. 등골이 오싹한 기분 나쁜 두려움은 그 자리를 얼른 피하게 하지만, 거룩한 두려움은 바로 그 자리에 꿇어 엎드리게 한다. 야곱은 거룩한 두려움을 온 몸으로 느끼면서 바로 그곳에서 제단을 쌓는다. 자신이 베고 잤던 돌을 기둥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구별한 뒤, 그곳을 벧엘이라고 불렀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집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저 하늘에 있거나 어디 다른 곳에 있지 않다. 하나님의 집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을 만난 곳, 하나님을 만나 거룩한 두려움을 경험한 곳, 하나님을 만나 제단을 쌓는 곳, 하나님을 만나 예배 드리는 곳, 바로 그곳이 하나님의 집이다. , 하나님은 어디 다른 데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바로 지금 여기에 계신 분이다.

 

야곱은 거룩한 두려움 가운데 예배 드린 뒤, 하나님께 서원한다. 서원은 어떤 물리적인 힘에 의해서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난 신비한 체험에 뒤따르는 자발적인 감사의 행위이다. 야곱의 서원을 보면, 그는 어떤 조건 하에서 자신의 서원을 이행할 것처럼 보인다.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20-21).

 

그런데 이것은 어떤 조건이라기 보다, 이미 야곱에게 주어져 있는 은혜이다. 하나님은 이미 야곱과 함께 하셨고, 이미 야곱이 바라는 대로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고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게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야곱의 서원은 조건이 충족되면 성립되는 서원이라기 보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자발적인 응답이라고 보아야 한다.

 

물론 서원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소원을 아뢰고, 그 소원을 이루어주시면 어떻게 하겠다는 서원도 있다. 사사기에 등장하는 입다의 서원이 그 경우이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자신을 맞으러 나온 사람 중 첫 번째 나온 사람을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서원이었다. 사무엘상에 나오는 한나의 서원도 그러한 서원이었다. 아들을 주시면 그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서원이었다.

 

예레미야서에는 아주 특이한 서원이 나온다. 레갑 족속의 서원이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명하여 레갑 족속을 불러 놓고 그들에게 포도주 마실 것을 권하게 하신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예레미야는 레갑 족속을 불러 놓고 포도주를 권한다. 그런데 레갑 족속은 그 권유를 뿌리치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겠노라 레갑의 아들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와 너희 자손은 영원히 포도주를 마시지 말며 너희가 집도 짓지 말며 파종도 하지 말며 포도원을 소유하지도 말고 너희 평생 동안 장막에 살아라 그리하면 너희가 머물러 사는 땅에서 너희 생명이 길리라 하였으므로 우리가 레갑의 아들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령한 모든 말을 순종하여 우리와 우리 아내와 자녀가 평생 동안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살 집도 짓지 아니하며 포도원이나 밭이나 종자도 가지지 아니하고 장막에 살면서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령한 대로 다 지켜 행하였노라”(35:6-9).

 

레갑 족속의 서원은 매주 자발적인 서원이지만 그 성격에 있어서는 매우 고무적이고 의미심장하다. 레갑 족속의 서원은 지극히 준엄한 생활을 하면서 족장들의 간소한 생활방식의 모범을 배우려 한 것이다. 그것을 통해서 레갑 족속이 하고 있는 것은 가나안 문화에 대한 저항이었다. 가나안 사람들이 받아들인 농경문화는 부를 축적하고 그 안에서 온갖 타락한 모습을 보였다. 가나안의 농경문화는 성적타락은 물론이요 종교적 타락을 불러왔다. 그리고 모든 것을 그저 소비만 하는 문화였다. 과연 현재 소위 선진국들이 지향하고 누리는 소비문화와 다를 바 없다. 레갑 족속은 그러한 타락하고 소비적인 문화에 저항하기 위해서 서원했던 것이다. 소비를 위해 무분별한 자원 낭비를 조장하는, 그래서 지구온난화 문제로 생태계의 위기를 겪고 있는 현재의 지구적 위기를 돌아보면서 그리스도인들이 한 번 진지하게 이행해 볼만한 서원이다. 저항은 살기 위한, 생명을 위한 몸부림이다.

 

야곱의 서원은 이것이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해주시는 은혜에 응답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다이다였다(21-22). 여기에서 십일조가 나오는데, 이것을 단순히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당연히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로 읽으면 곤란하다.

 

십일조는 단순히 소득의 십분의 일을 떼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다. 십일조는 대표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십분의 일을 떼서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그 십분의 일 안에 자신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십분의 일은 단지 소유의 십분의 일만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전부를 드리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십분의 일을 떼어서 하나님께서 십일조 드리는 행위를 통해서 자신이 이행해야 할 의무를 다 했다고 말하는 것은 착각이고 교만이다. 그것은 전혀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 들어가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야곱이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한 고백은 하나님께서 야곱과 언제든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신 것에 응답하여 자기 자신도 언제든지 하나님과 동행하겠다는 신앙고백이다. , 야곱은 이제부터 하나님 안에서 삶을 살아가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제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안과 밖은 구분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현존 안에 있게 된 것이다. 야곱은 이제 하나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루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빚어져 가는 거룩한 인생을 살게 된 것이다.

 

야곱의 하나님 경험은 그를 구원으로 인도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신 땅과 자손에 대한 약속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구원의 약속이다. 고대인들에게 땅과 자손은 자신의 생명을 길이 잇는 영생이나 다름 없었다. 땅이 그들의 어머니였고, 자손이 그들의 생명이었다. 그래서 땅과 자손에 대한 약속은 곧 구원에 대한 약속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 경험은 구원의 경험이요,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는 거룩한 두려움의 경험이다.

 

야곱은 꿈에서 땅과 하늘을 잇는 사닥다리를 경험하고, 하나님께서 바로 여기에 계신 것을 깨달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도들의 증언을 통해서, 그리고 성령을 통해서 땅과 하늘을 잇는 사닥다리를 경험한다. 그 사닥다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 누구에게나 보이는 것은 아니다. 야곱이 꿈 속에서 하나님 경험을 통해 비로서 깨닫게 되었듯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닥다리가 우리의 현실에 놓여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단 깨닫고 나면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가져다 준 현실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알게 되고 거기에 대한 반응으로 그리스도의 제자(그리스도인, a follower of Christ)가 될 수 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뜻이 임마누엘이다. ,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 봄으로 눈에 보이는 현실, 공허와 혼돈이 가득한 현실 속에서 완전히 새로운 현실을 본다. 그 현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영생(하나님의 생명)의 현실이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현실은 죽음과 혼돈, 그리고 참을 수 없는 공허함이 가득한 것 같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은 새창조의 사역이다. ,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안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시며, 우리에게 무한한 생명의 나라를 안겨 주신다.

 

이것을 경험하는 자, 이것을 깨닫는 자는 하나님께 서원할 수 밖에 없다. 그 서원은 다름 아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나서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 구원이 있고, 거기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바로 여기에 계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현실을 경험하는 자, 하나님과의 일치되는 거룩한 두려움 속에서 영원한 생명(하나님의 영)을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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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