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4. 9. 27. 03:22

약속의 성취

창세기 23

(창세기 23:1-2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90:10, 12).

 

사라가 죽는다. 돌아보면 수고와 슬픔뿐인 삶을 127년 동안 살다 죽는다.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종속된 존재로 산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도반(길벗)으로서, 그리고 돕는 배필로서, 또한 아브라함과 함께 언약을 받은 만국의 어머니로서 세상을 살다 죽는다.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 아브라함과 함께 언약의 담지자라는 것을 말해 주는 징표는 다른 누구의 태가 아닌 바로 사라의 태를 통하여 약속의 자녀 이삭이 태어났다는 것이다.

 

사라는 어머니다. 사라는 여자를 대표하고, 언약의 통로이다. 언약은 하나님의 창조의 약속인데, 하나님의 창조는 어머니 사라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는 마치 대지에서 새로운 싹이 돋아나는 것과 같다. 대지가 없으면 생명이 없고, 대지가 오염되면 생명이 위태로운 것처럼, 어머니 사라가 없으면 하나님의 창조도 없고, 그의 믿음이 오염되면 약속도 위태롭다. 그녀가 없으면 약속의 성취도 없다. 그래서 사라는 생명과 창조의 통로인 어머니요 대지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창조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두 가지, 자손과 땅이었다. 창세기 21장에서는 두 가지 약속 중 자손에 대한 약속의 성취를 보았고, 22장에서는 언약의 위기를 보았고, 23장에서는 또 하나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본다. 그런데 두 가지 약속이 모두 사라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눈 여겨 볼 필요가 있다. 눈에 보이지 않던 약속의 자식 이삭이 어머니 사라를 통해서 아브라함과 사라의 인생에 들어왔다. 이제 눈에 보이지 않던 약속의 땅이 사라의 죽음을 통해서 창조된다.

 

아브라함에게 있어 아내 사라의 죽음은 통렬한 것이었다. 사라가 숨을 거둔 장소는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이다. 이곳이 바로 마므레인데, 이곳은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헤어진 뒤 하나님으로부터 땅에 대한 약속을 받고 처음 옮겨간 곳이다(13:18). 그때만 해도 아브라함은 땅에 대한 약속이 바로 그곳에서 이루어지게 될 거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이처럼 우리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 하나님은 이미 우리 안에서 당신의 일을 준비하시고 계신다. 지금 당장은 막막해 보여도 날마다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 살다 보면 믿음(하나님의 약속)이 형상화되는 날이 온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의 죽음을 마냥 슬퍼하고만 있을 수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망자(죽은 자)를 예우하는 일은 죽은 시체를 잘 매장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 흙에서 온 인생이 흙 속에 잘 묻히지 못한다면 그것만큼 비참한 인생도 없다. 그래서 옛날에는 극악무도한 죄를 짓고 죽은 자들은 땅 속에 묻지 않고 땅 바닥에 놓아 들짐승들의 밥이 되게 했다. 그것은 인간이 당하는 수치 가운데 가장 큰 수치 중 하나였다. 열왕기상에 나오는 아합과 이세벨 이야기에서 엘리야가 그들에게 전한 예언이 그런 것이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개들이 이스르엘 성읍 곁에서 이세벨을 먹을지라”(왕상 21:23). 아합과 이세벨이 행한 극악무도한 죄의 심판으로 그들은 엘리야의 예언대로 그렇게 비참하게 인생을 마감한다.

 

아브라함은 평생의 도반(길벗)이자 돕는 배필이었던 아내 사라의 삶을 예우하기 위해서 그녀의 죽음 앞에 슬퍼만 하지 않고 일어나 그녀의 무덤을 마련하고자 한다. 그리고 현재 살고 있는 지역을 다스리고 있는 헷족속에게 가서 죽은 아내를 매장할 땅을 줄 것을 요청한다. 이제 아브라함은 헷족속과의 긴장감 도는 흥정을 시작한다.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

 

우선 아브라함은 헷족속 앞에 서서 자기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입니다”(4). 이것은 자기 자신을 낮추는 겸손이다. 지금 아브라함에게 필요한 것은 아내 사라를 매장할 수 있는 땅이지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목적에 집중하는 사람은 그 나머지 것에 신경 쓰지 않는다. 목적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낮출 준 안다. 아브라함은 자기 자신을 이렇게 낮추면서 헷족속과 교감을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곧바로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핵심을 말한다. “죽은 제 아내를 장사 지낼 수 있게 여러분들의 땅을 제게 좀 나눠 주십시오”(4).

 

이에 대한 헷족속의 반응이 참 다행스럽다. 헷족속은 자기 자신을 낮춘 아브라함을 높여준다. “내 주여, 들어 보십시오. 어른께서는 우리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입니다. 우리 묘지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골라 돌아가신 부인을 장사 지내십시오. 어른께서 돌아가신 부인을 장사 지내신다는데 우리들 가운데 그 누구도 자기 묘지라고 해서 거절할 사람이 있겠습니까?”(6). 이는 아브라함이 나그네와 거류민으로서 약속의 땅에 살면서 얼마나 덕망 있는 삶을 살았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자성어에 덕불고필유린(德不孤必有隣)이란 말이 있다. 이는 덕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이웃이 있다, 따르는 무리가 있다라는 뜻이다. 누구를 대할 때 나 자신이 조금 손해 보며 대한다면 반드시 많은 이웃이 생겨 복된 삶을 누리게 된다. 또한 나 자신보다 약한 자를 돌봐주고 훈훈한 인정을 베풀면 서로 평화스러운 마음으로 바라 보게 되므로 어찌 외로울 있겠는가. ‘()’이란 자기 희생이다. 덕을 쌓는다는 것은 자기 희생, 즉 사랑을 통해서 쌓는 것이다. 덕은 용서하고 용납하고 이해하고 희생하는 것을 통해 쌓는 것이다. 이렇게 덕스러운 마음은 근본적으로 마음을 허탄한 데 두지 않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만 둔 자들에게 오는 자연스러운 마음이다.

 

아브라함은 헤브론에 살면서 그곳을 다스리고 있던 헷족속과 충분한 교감을 가졌다. 덕스러운 말과 행동으로 충분한 교감을 갖는 것은 참 중요하다. 충분한 교감이 없는 가운데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교만과 욕심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충분한 교감을 쌓은 후에 말하는 것은 서로의 것을 나누는 사랑의 행위가 된다. 서로에게 유익을 주고 기쁨을 주는 사귐의 행위가 된다.

 

여기까지 보면 헷족속이 아브라함에게 사라를 매장할 땅을 무상으로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땅 값을 충분히 지불하고자 한다. 제 값을 지불하고 합법적이고 영구적인 소유권을 갖기 원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약속한 땅이라고 공짜로 얻기를 원하거나 헐 값에 땅을 사고자 하지 않는다. 그에 정당한 대가를 충분히 지불하고자 한다. 이것은 십자가에서도 나타나는 대가의 완전성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위한 대가를 완전히 지불하시고 세상을 구원하신다. 하나님이기 때문에 구원을 싼 값에 이루시거나 헐값에 이루지 않으신다. 대가를 정당하게 지불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굉장히 중요한 개념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은혜인 이유는 값싸게 구원을 이루셨기 때문이 아니라, 대가를 온전히 지불하셨기 때문이다. 온전한 대가를 지불한 구원은 그 어떤 것으로도 보상할 수 없는 신적 능력이다. 그래서 본 회퍼 같은 신학자는 하나님의 구원을 값비싼 은혜(teure gnade)’라고 부른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은 윤리를 넘어선 신앙의 행위이다. 그러나 교회에서 벌어지는 현실은 그런 신앙의 행위와 동떨어질 때가 많다. 거룩한 노동을 '헌신과 봉사'로 탈바꿈시켜 노동력을 착취하는 교회의 비루한 행동은 멈추어야 한다. 담임목사가 부교역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뿐만 아니라, 교인들이 목회자의 노동력을 '헌신과 봉사'로 착취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때로 교회에는 도대체 인권이라는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교회는 노동력을 착취하면서 그것을 훈련으로, 헌신으로, 봉사로 미화시킬 때가 많다. 노동력과 '헌신과 봉사'는 구분되어야 한다. 교회 안에서의 헌신과 봉사는 감사와 찬미로 주님께 영광 돌리는 신앙 행위이지만, 교회 안에서의 노동력은 그 대가를 정당하게 지불되는 것으로 주님께 영광 돌리는 신앙 행위이다.

 

교회의 일꾼(교회에서의 노동을 통하여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바치기로 서원한 고귀한 직분'이다. 그러나 그것을 빌미로 부당한 노동력 착취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헌신과 봉사'를 빌미로, 교회의 일꾼(담임이든 부담임이든, 전임이든, 파트타임이든, 교회 일반 사무직이든 관리직이든)의 노동력이 착취당하는 것은 부당하다. 그런 일이 교회에서 얼마나 공공연하게 일어나고 있는지 다 아는 사실 아닌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바치기로 작정했다'는 신앙적 결단이 곧 인권과 노동력을 아무렇지도 않게 유린당하고 착취당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의 매장지이자 하나님께 받은 약속의 땅을 매입하는 데 정당한 대가(상인이 통용하는 은 400 세겔)를 모두 지불하고 헷족속이 모두 보는 앞에서 그 땅이 자신의 소유지가 됐음을 선포한다. “성문에 들어온 모든 헷 족속이 보는 데서 아브라함의 소유로 확정된지라”(18). 헷 족속이 무상으로 주겠다고 제안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이렇게 약속의 땅을 한 켠 얻으며 정당한 대가를 모두 지불하려고 했던 것은 약속의 아들을 얻는 과정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정의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손에 대한 약속이 성취되기까지 아브라함이 지불해야 했던 대가는 매우 혹독했다. 약속의 자식이니까 어렵지 않게 낳을 수 있을 거라는 얄팍한 생각은 하나님 앞에서 허용되지 않았다. 모든 대가(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믿음이 모든 대가였다)를 지불하고 약속의 자식을 어렵게 얻었을 뿐만이 아니라, 얻은 자식을 지켜내는 일도 쉽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시험하여 100세에 얻은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까지 하셨다. 그 모든 시련과 시험을 믿음으로 이겨냈을 때 비로소 자식에 대한 약속이 성취된 것이었다.

 

아브라함이 마므레 앞 막벨라에 있는 에브론의 땅을 구입한 것은 땅에 대한 약속의 성취이다. 그러나 이것은 약속의 성취일 뿐이지 완성은 아니다. 이것은 성취의 시작일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하나님의 새창조에 대한 종말론적 성취요 비전인 것처럼, 사라의 매장지는 땅의 약속에 대한 종말론적 성취요 비전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비전이 무엇인지 알게 된 그리스도인이 이제부터 그 비전의 완성을 향해 달음질 해야 하는 것처럼, 사라의 죽음과 매장지의 구입을 통하여 이제 시작된 땅에 대한 약속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약속의 완성을 향해 달려야 하는 그들의 비전인 것이다.

 

사라의 죽음은 남편 아브라함에게도 아들 이삭에게도 큰 아픔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사라의 죽음이 아픔으로만 끝나지 않는 것은, 그의 죽음을 통하여 새로운 비전과 삶이 열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음은 비통한 것이기도 하지만 축제이기도 하다. 바로 아래의 시처럼.

 

축제

 

축제다

독수리 대여섯 마리의 흥분

날갯짓

쪼는 부리

통통통 구르는 발

 

그들의 축제는

아마딜로의 죽음에서 비롯된다

 

세상이 늘 그렇듯이

아마딜로의 죽음은

이중적이다

 

슬픔이며 기쁨이다

상실이며 기회다

곡이며 흥이다

 

피곤과 지루가 베어 있는 오후

무심한 햇살은

껍데기만 남은 독수리 한 마리가

아마딜로와 같은 운명으로

저만치 널브러져 있는 장면을

조명처럼 비추고 있다

 

저것은 또 누구의 축제 현장이었을까

(장준식 作)

 

과거에 나는 없었고, 미래에도 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오직 현재에만 존재한다. 그러나 내가 존재하는 현재를 시점으로 과거와 미래는 같을 수 없다. 내가 현재에 존재하면서 해야 할 일은 과거와 미래가 동일한 세상으로 남아 있지 않게 하는 것이다. 나로 인해 과거에는 없었던 그 무엇이 미래에 존재케 하기 위하여 아브라함처럼 기도하고, 사라처럼 헌신하고, 헷족속처럼 협력하는 이 땅의 나그네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 이전의 세상과 그리스도 이후의 세상은 같지 않다. 그리스도 이전의 세상은 약속의 세상이고, 그리스도 이후의 세상은 약속 성취의 세상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이후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약속의 성취 안에서 약속의 완성을 향하여 미래를 열어젖히며 살아간다.

 

이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있어 사라 죽음 이전의 세상과 그 이후의 세상은 같지 않다. 사라의 죽음을 통하여 열려진 미래가 그들 앞에 놓여 있다. 사라의 생명을 통해 존재하게 된 약속의 자식이 사라의 죽음을 통해 존재하게 된 약속의 땅에서 이제 약속의 완성을 향해 살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라의 죽음은 비통이 아니라, 축제로 승화된다.

 

이처럼 죽음은 단순한 존재의 소멸이 아니다. 죽음은 우리를 두려움에 떨게 하는 악마적인 그 무엇도 아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향해 믿음으로 끊임 없이 삶의 현실을 뚫고 나간다면, 어느 순간 틀림 없이 맞닥뜨리게 될 죽음은 단순한 사라짐이 아니라 미래를 열어젖히는 축제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삶의 토대를 마련하고 끊임 없이 거기에 집중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을 믿음이라 부르는데, 바로 그것이 철저한 현실인 죽음을 순간영원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삶의 정열 아니겠는가(키에르케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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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