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5. 7. 16. 11:45

에브라임과 므낫세

창세기 62

(창세기 48:1-7)

 

유언을 남긴 야곱이 연로하여 병에 든다. 요셉은 이 소식을 듣고 그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대동하고 아버지 문병을 간다. 그런데 거기에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진다.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입양하게 된다.

 

물론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입양이 오늘날과 같은 입양 절차를 걸치는 것은 아니다.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입양하게 되는 것은 자식을 더 갖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입양하는 근거는 순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다.

 

야곱은 어떠한 결정을 할 때마다 자기 자신의 생각에 근거하지 않고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결정을 내린다. 요셉의 두 아들을 입양하려는 순간에도 야곱은 왜 그가 이러한 행동을 취하는 지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내어놓는다.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사 복을 주시며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3-4).

 

이것이 바로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입양하게 되는 배경이다. 야곱은 자신의 욕심에 근거해서 요셉의 두 아들을 자신의 아들로 입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받은 말씀을 근거로 그의 자손들에게 하나님의 복을 전달하기 위해 그러한 결정을 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인생을 살면서 선택의 기로에 섰거나, 무슨 일을 감행하게 될 때 무엇을 근거로 해야 복을 받는지에 대해 배운다.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을 입양하게 되는 경위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를 둔다. 특별히 이 구절이 끌린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사 복을 주시며 내게 이르시되.”

 

이 구절을 근거로 생각해볼 때, 야곱에게는 분명한 하나님 경험이 있었다. 그가 경험한 하나님은 우선 전능하신분이다. 여기서 전능하신이라는 뜻은 엘샤다이인데, 엘샤다이란 ‘자기 마음대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자신이 정한 말과 법칙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철저하게 지킨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엘샤다이의 하나님, 전능한 하나님이란 약속을 꼭 지키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야곱이 경험한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을 내릴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 행한 어떠한 일은 복이 될지 악이 될지 최종적으로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례를 들어, 어떤 부자가 가난한 자에게 그를 도와주기 위해 많은 돈을 기부했다고 치자. 부자의 기부는 가난한 자에게 이 될까?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부자의 기부를 통해 가난한 자에게 행복이 임할 수도 있고, 더 큰 불행에 처할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갖는 한계이며 연약함이다. 그래서 인간은 인간에게서 무엇인가 을 기대하면 안 된다. 그래서 이런 말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지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복이 복으로 작용하게 끔 할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 밖에 없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면 그것을 그대로 복이 된다. 반대로 하나님이 심판하시면 그것은 그대로 심판이 된다. 뒤바뀌는 일이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복을 내리신다는 것은 믿을 만한 것이다. 야곱은 일생을 통해 바로 그것을 경험했다.

 

또한, 야곱이 경험한 하나님은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이다. 결국 이 말씀 안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경험하는 인간의 말은 존재의 가벼움을 그대로 반영할 뿐이다. 입에서 나간 말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대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인간은 서로 말을 주고 받으면 그 말 대로 꼭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손가락을 걸기도 한다. 그런데, 정말로 그 말이 곧이곧대로 지켜지는가?

 

말이 얼마나 안 지켜지는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지,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충분히 알고 있다. 그래서 세상에는 법체계가 등장한 것이다. 법이라는 것이 복잡해 보이지만 사실 별개 아니다. 법이 생겨난 이유는 사람들끼리 서로 간에 한 말을 안 지키기 때문이다. 아무리 준엄하게 선서의식을 행해도 소용 없다. 약속이 깨지는 순간을 보면, 언제 그들이 준엄하게 선서의식을 행했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뒤 돌아보지 않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 인간의 사악함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다르다. 하나님이 하나님인 이유는 그의 말씀은 신실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대면하는 자에게 말씀을 주시는데, 그 말씀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말씀은 그냥 말씀이 아니라, 언약(Testament)이다. 그래서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복 주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면서 경험해야 하는 것 중에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것은 하나님 경험이다. 이 사회는 이런 저런 경험 내지 체험을 많이 한 인재를 요구한다. 경험과 체험이 많은 사람은 생각이 유연하고 문제 해결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험과 체험이 많은 사람은 유능한 인재로서 어느 집단에서나 인기가 높다.

 

요즘 젊은이들은 이러한 사회적 인재상에 부응하기 위하여 경험과 체험을 많이 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일에 도전한다. 공부만 열심히 하는 것으로는 모자라기 때문에, 어학 연수도 떠나고 여행도 떠나고 여러 군데 일터에서 인턴십도 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 사회의 인재상으로 빚어져 간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것은 공교롭게도 단 한 가지,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 것이다.

 

종착역이 좋은 직장이라면, 경험과 체험을 많이 해서 생각이 유연하고 문제 해결 능력이 뛰어난 인재로 성장해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마도,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 경험과 체험의 영역을 넓히는 사람은 놀부 같은 사람이지 않을까 싶다. 복 받기 위해 제비 다리를 일부러 부러뜨려 치료한 놀부에게 임한 것은 복이 아니라 재앙이었듯이, 좋은 직장을 위해 경험과 체험의 영역을 넓히는 사람에게 결국 무엇이 올까? 적어도 유연한 생각과 문제 해결 능력이 그들의 참된 인격으로 자리 잡지는 않을 것이다.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하나님의 존재성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를 경험할 때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기독교이다. 특별히 기독교는 나사렛 예수에게서 경험되고 있는 하나님을 전한다. 그 하나님을 만나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참된 평안과 안식을 누리게 된다고 말한다.

 

우리가 성경을 이토록 열심히 들여다 보는 이유는 거기에 어떠한 신령한 능력이 있어서 그것을 통해 복을 받기 위함이 아니다. 성경은 나침반이고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경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경이 가리키고 설명해 주고 있는 그곳을 바라보며 그곳에 계신 하나님을 내가직접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한 번 물어보자. ‘나에게 하나님 경험이 있는가?’ 이것은 참 도전적인 말이기도 하지만 위험한 말이기도 하다. 어떠한 사람이 정말로 하나님 경험이 있는지 아닌지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대체로 하나님 경험을 했다고 스스로 강력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단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래서 하나님 경험에 대한 검증을 위해서라도 신앙은 절대적으로 공동체성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 역사는 하나의 교회라는 개념을 통해 교회의 공동체성을 유지해 왔다. 물론 교회 안에는 여러 분파가 있을지라도, 그 분파들에게 공통되는 요소들이 존재한다. 서로가 서로의 신앙을 살피는 것이다. ‘목양이라는 개념도 이런 것이다. 그리스도의 울타리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울타리 역할을 해주는 목양을 해야 하는 것이다.

 

야곱에게는 분명한 하나님 경험이 있었다.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어떠한 말씀을 받는 것인데, 그러한 경험을 하고 나면 야곱에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 말씀에 매이게 되어 있다. 무엇을 하든, 어디로 가든, 어떠한 결정을 하든, 그 말씀이 근거가 되는 삶을 살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일이다. 이 세상에는 경험해보고 체험해봐야 할 것이 정말로 많다. 유연한 사고력과 문제해결 능력을 키우려면 다양한 경험과 체험은 기본이다. 그러나, 아무리 다양한 경험과 체험을 통해 유연한 사고력과 문제해결 능력을 키운다 할지라도 우리의 인생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야곱은 죽음을 앞두고 병이 들어 몸이 허약해진 상태였지만, 그런 중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행동을 취한다. 이게 정말 쉽지 않은 거다. 사람은 나이 들고 병들고 죽음을 앞두면 나약해지고 흔들리는 법이다. 그래서 엉뚱한 행동을 통해서 자녀들에게 또는 지인들에게 상처주기 십상이다. 하지 말해야 할 말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한다. 혼란만 가중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 나약한 인간의 말로이다.

 

그러나 야곱에게는 분명한 하나님 경험이 있었다. 그 경험은 끝까지 야곱을 붙들어 주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은 그가 끝까지 어떠한 행동을 취하는 데 기준이 되어 주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복을 그대로 전달하기 위하여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입양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이 요셉에게 내리신 복이기도 하다. 야곱의 12명의 아들 중, 첫째 아들인 르우벤이 장남으로서 다른 아들보다 두 배의 복을 받아야 했으나 르우벤 대신 요셉이 두 배의 복을 받게 된 것이다.

 

요셉이 이렇게 큰 형 르우벤을 대신하여 장자의 복을 받게 된 이유는 그가 진정으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데 헌신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당신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데 헌신하는 자를 결코 그냥 두지 않으신다. 두 배의 복을 내리신다. 이 사실만 알아도, 우리의 헌신은 결코 힘든 일이 아니게 될 것이다.

 

물론, 요셉이 그렇게 모진 고통 가운데서도 헌신할 수 있었던 것도 그에게도 하나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을 경험한 자들이 만들어가는 세상은 하나님의 복이 넘치는 세상이다. 우리도 하나님을 경험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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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