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5. 4. 13. 05:15

오직 한 가지의 즐거움

(시편 33:1)

 

백지가 하나 있다. 여기에 무엇을 채우겠는가? 이렇게 생각해 보자. 여기에 백지가 하나 있다. 어떤 색깔로 이 백지에 칠하고 싶은가? 미술심리치료라는 분야가 있는데, 미술을 통해서 내면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보고 그것을 치료하는 심리치료의 일종이다. 주로 어린 아이들의 심리치료를 위해서 쓰이는데, 마음이 어두운 아이는 어두운 색깔을 써서 백지에 무엇인가를 그리고, 마음이 밝은 아이는 밝은 색을 통해서 자신을 표현한다.

 

우리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 그것은 눈에 안 보이지만, 우리의 마음의 눈은 그것을 본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못 보더라도 자기 자신은 본다. 물론 자기 자신도 못 볼 때가 있다. 자기 자신이 못 보는 경우는 으로 발전된 경우이다. 그래서 전문가를 만나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한 경우가 많다.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한 경우, 자기 자신은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것이 대부분이다.

 

인간은 내면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에 따라 인생을 산다. 겉으로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인간의 행복은 외적인 것에서 오지 않는다. 인간의 행복은 내면에 무엇을 품고 있느냐에 따라서 온다. 일례로, 어떤 부인이 남편에게 3캐럿짜리 다이아몬드를 선물 받았다고 하자. 그 부인이 행복하겠는가? 행복이 3캐럿짜리 다이아몬드가 가져다 주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 부부의 관계에서 온다. , 보이지 않는 이 마음이 서로를 향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면 아무리 3캐럿짜리 다이아몬드 선물을 주고 받더라도 그들은 행복할 수 없다. 이처럼, 인간의 행복은 이 안에 무엇을 품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여러분의 마음에는 무엇이 있는가? 여러분은 무엇으로 인해 즐거움을 삼고 사시는가?

고사성어에, 군자삼락(君子三樂)이라는 말이 있다.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는 뜻이다.

 

전국 시대, 철인(哲人)으로서 공자의 사상을 계승 발전시킨 맹자(孟子)는 이렇게 말했다.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君子有三樂(군자 유삼락)]. 첫째 즐거움은 양친이 다 살아 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요[父母具存 兄弟無故(부모구존 형제무고)]. 둘째 즐거움은 우러러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고 구부려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요[仰不傀於天 俯不作於人(앙불괴어천 부부작어인)]. 셋째 즐거움은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하는 것이다[得天下英才而敎育之(득천하영재 이교육지)]”. - 맹자(孟子) 진심편(盡心篇) -

 

맹자가 말하는 세 가지의 즐거움도 보면, 외적인 것이다. 부모형제의 무고,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는 삶, 그리고 제자를 키우는 것인데, 이것은 모두 외적인 것이다. 부모형제가 없는 사람은 불행한가? 사람들에게 인정 받지 못하면 불행한가? 자신을 따르는 자가 없으면 불행한가? 사실, 이런 것이 세상에서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는 항목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인간의 행복을 절대적으로 가르지는 않는다.

 

인간에게는 이것보다 더 근본적인 즐거움이 존재한다. 식량공급과 안보, 그리고 자녀가 그것이다. 이것은 모두생명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생각해 볼 수 있는 즐거움이다.

 

식량은 생명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식량공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인간은 즐거움을 모른 채 죽고 말 것이다. 먹는 것만큼 즐거운 일도 없다. 먹는 것이 얼마나 좋으면, “먹다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라는 말이 있겠는가? 인생의 반 이상은 먹는 즐거움에 산다. 그래서 반대로 가장 큰 불행은 굶는 것이다. 배고파서 죽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러한 식량공급도 안보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구약의 많은 이야기들이 이와 연관이 있다. 이스라엘이 사무엘을 통해 하나님께 왕을 구한 것도 결국안보때문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생명에 가장 기본적인 식량공급을 위해 힘쓰고 애쓴다. 그러나, 애쓰고 힘써서 얻은 식량을 누군가에 의해 약탈 당할 때의 허탈감이란 곧죽음과 같다.

 

가나안에 정착해서 살던 이스라엘은 열심히 식량공급을 위해 일했다. 그런데 추수가 끝나고 나면 어김없이 주변 나라의 폭군들이 쳐들어와 생명과도 같은 식량을 약탈해갔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그들의 여호와 하나님께 울부짖을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 안보를 강화시키기 위한 방책으로 그들은을 요구했던 것이다. 이것이 좋은 결과를 낳은 것은 아니다. 이들은 좀 더 근본적인 것을 잃어버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 이들은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왕을 의지하다, 결국 주변 나라 정세를 잘못 읽는 실수를 범해 나라가 망하고 만다.

 

이에 대해 예레미야 선지자는 시적인 수사법을 동원해 이스라엘의 잘못을 지적한다. 강하고 오래된 민족이 와서 그들의 삶을 피해하게 만들 것이라고 예언한다. “그들이 네 자녀들이 먹을 추수 곡물과 양식을 먹으며 네 양 떼와 소 떼를 먹으며 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열매를 먹으며 네가 믿는 견고한 성들을 칼로 파멸하리라”( 5:17).

 

이것을 통해서 예레미야가 파멸해가는 이스라엘에게 지적하고 싶었던 것은 이들이 이렇게 무력하게 무너지는 이유는 엉성한 군사대책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를 무시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무시했던 이스라엘이 당해야 했던 대가는 엄청났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즐거움인 식량공급, 안보, 자녀 등 모든 것을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고 말았다.

 

그러고 보면, 신앙이란 인간의 기본적인 즐거움을 보이지 않게 떠받치고 있는 기둥과도 같다. 우리는 단순히 식량공급, 안보, 자녀 등을 통해서 즐거움을 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을 보이지 않게 보장해 주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닫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결국 이것으로 끝난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시편 33:1).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시편 64:10).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하박국 3:17-18).

 

서양음악의 어머니라 불리는 헨델의 일화이다. 어느 날 헨델이 길을 가다가 가발을 잃어버렸다. 당시에 가발은 매우 중요한 물건이었다. 요즘에도 영국에서도 법관들이 재판을 할 때 가발을 쓴다. 가발은 어떤 권위를 가지게 해주는 물건과도 같다. 한참 동안 난처해 하고 있을 때 한 아름다운 아가씨가 그의 가발을 찾아주었다. 알고 보니 그녀는 근처 이발관에서 일하는 아가씨였다. 그 후 헨델은 고마운 마음에 그녀를 자주 찾아가게 되었다. 자주 보면 정드는 법이다. 그러나 보니 어느덧 그녀와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헨델은 사랑하는 여인에게 자신의 오라토리오 메시야의 친필 악보를 선물로 주었다. 헨델은 그녀와 결혼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헨델은 다시 그 이발관을 들렀다. 그 아가씨는 헨델이 온 줄 모르고 있었다. 이발을 하러 온 손님의 머리를 만지고 있던 그녀는 무심코 다른 이발사에게 머리를 말게 악보 몇 장만 갖다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헨델은 조용히 이발관을 나왔고, 그 후로 다시는 그 이발관에 가지 않았다고 한다.

 

헨델의 명작 메시아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여인처럼 많은 사람들이 정말로 무엇이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사실, 사람은 영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맨다.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 보자.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시편 33:1).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시편 64:10).

 

여기서 말하는 의인이란 옳은 일을 행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성경의 가르침은 분명하다. 성경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가치 있는 인생인가를 가르쳐 준다.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이것이 우리가 인생의 백지에 그려야 하는 삶이다. 이것이 보이지 않는 우리 내면에 채워야 하는 색깔이다. 여호와를 즐거워하는 자, 다른 무엇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이 마음에 가득 채우고 사는 자의 삶을 보라.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하박국 3:17-18).

 

아무것도 없었지만, 오직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살았던 한 분을 소개한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8:20, 9:58). 그러나, 이 분은 행복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어도 행복했다. 왜냐하면, 이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웠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처럼 우리의 것을 나누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즐거움의 원천이 오직 하나님에게 있지 않고, 내가 지금 소유하고 있는 그것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인데,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할 줄 아는 자들이다.

 

마음이 허전하거나, 혼란스럽다면,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다면, 인생이 행복하지 않다고 느껴진다면, 바로 지금이 여호와 하나님을 찾을 때이다. 그런 분은 그리스도께로 나와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으로 즐거워하는 인생에 대해서 배워야 한다. 그러면, 윤동주의 다음 시처럼,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처럼 우리의 인생을 가치 있는 일에 헌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쫓아오든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 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윤동주,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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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