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2. 12. 08:58

위로

(이사야 40:1-11)


우리는 대림절을 보내고 있다.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다. 여러분은 무엇을 기다리는가? 대림절을 보내면서도 각자 기다림의 내용은 다를 수 있다. 어떤 이는 건강의 회복을 기다리고, 어떤 이는 자녀를 기다리고, 어떤 이는 합격(입학, 입사)을 기다리고, 어떤 이는 당첨을 기다리고, 특별히 아이들은 산타 할아버지를 기다린다. 우리는 각자 처한 상황에서 가장 절박한 것을 기다린다. 물론 그 절박한 것이 실제로 삶에 유익이 될지 안 될지는 모른다.

 

오늘 말씀은 위로하라는 명령으로 시작한다. 이 말씀은 바벨론 포로 상황에 놓인 사람들에게 주어진 말씀이다. 이 강력한 말씀을 들으면서도 가슴에 와 닿지 않는 것은 우리가 포로 생활에 놓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포로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를 뿐더러, 포로가 되고 싶은 사람도 없다. 우리는 그저, 우리가 지금 포로생활을 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고, 그것에 감사하고 만족하며 산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그리스도인들은 대림절을 보내면서 메시아를 기다린다.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우리가 메시아를 기다리는 이유는 그가 우리에게 복음(기쁜 소식)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복음(기쁜 소식)을 들었고, 믿는다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지만, 실제로 우리의 삶의 내용을 들여다 보면, 복음을 안 들은 사람처럼 살아간다.

 

이것은 도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기다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성경이 증거하는 복음은 구원의 길에 대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기 전까지 구원의 길은 묘연했다. 무엇이 구원의 길인지에 대하여 명확히 몰랐다. 그나마 유대인들은 율법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그 율법을 잘 지키면 구원 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는 율법이 자기 의를 증진시킨다는 데 있다. 율법을 지키다보니까, 율법을 지킨 자기 의가자기를 구원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들은 율법을 잘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경멸했다. 복음서에서 대표적으로 등장하는 사람들이 바리새파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시장 어귀에서 서서 크게 기도했다. “주여, 저는 율법을 잘 지키지 않는 저들(세리와 창녀)과 같지 않습니다!”


요즘으로 따지면, 이것은 부자가 가난한 자를 경멸하는 것과 같고, 권력을 쥔 자가 권력 없는 자를 경멸하는 것과 같고, 많이 배운 자가 못 배운 자를 경멸하는 것과 같고, 좋은 직장(직업)을 가진 자가 그렇지 못한 자를 경멸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율법은 구원에 이르는 강력한 길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새로운 구원의 길을 여셨다. 아니, 새롭다기 보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인정하시는 올바른 구원의 길을 여셨다.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한 구원의 길은 자기 의(업적 의)’가 아니라, 믿음이다.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사실 그리스도교 신앙인이면서도 믿음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보면 우리가 얼마나 믿음이 무엇인지 모르는지를 알 수 있다. 믿음은 칭의를 말한다. 칭의란 어떠한 업적을 쌓아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과는 상관 없이 은혜로 구원 받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는 일상에서 은혜로 구원 받는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은 여전히 자기 의(업적 의)’의 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 이 세상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이 구원 받아야 할 이유를 스스로 증명하라고 요구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끊임없이 평가를 받아야 하고, 그 평가에 도달하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쓴다. 고등학생들은 수능평가를 받는다. 그 평가의 결과를 통해서 갈 수 있는 대학이 정해진다. 고등학생들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 코피 터지도록 공부한다. 그 일에 성공한 학생은 기뻐하지만, 그 일에 실패한 학생은 실망하거나 심지어 자살까지 한다.

 

대학을 입학 한 후에 청년들은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스펙을 쌓는다. 자기를 증명하지 못하면 원하는 직장, 선망의 대상인 회사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래서 청년들은 청춘을 반납하고 스펙을 쌓느라 여념이 없다.


요즘 청년들은 결혼을 포기한다. 단순히 혼자 사는 게 편하고 좋아서가 아니다. 결혼을 하려면 남자는 여자에게, 여자는 남자에게 평가를 받아 합격해야 하는데, 서로가 가지고 있는 평가 기준을 넘어서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결혼정보 회사가 분류한 등급을 보면, 그 평가기준에 인간은 없고 외모, 학력, 직장, 집안 등스펙만 있다. 그러한 평가기준을 뛰어넘어 행복한 결혼에 도달할만한 청춘이 얼마나 될까.

 

삶의 곳곳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의(업적의)’를 통해 구원에 이를 것을 요구 받는다. 그리고, 우리는 평가기준을 통과해서 구원에 이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한다. 자기의(업적의)가 증명되어서 구원에 이르면, 우리는 하나님이 자신을 도와주셨다고, 자신을 구원해 주셨다고 기뻐하며, 그런 하나님의 위로를 칭송한다.

(10여년 전에 실제로 그러한 말을 하는 모 방송사 여자 아나운서의 신앙고백을 본 적이 있다. 몇 천 대 1의 경쟁을 뚫고, 당당하게 메이저 방송사의 아나운서가 된 그녀는 그 당시 사랑의 교회에 다니고 있었는데, 그녀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셨다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이루어주신다고, 하나님은 살아계시다고, 하나님을 믿으라고 간증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이 포로생활 하고 있는 자들에게 주시는 위로가 무엇인지 보라. 포로생활을 하면서 그 포로생활을 잘 견디고 이기라고 거짓 위로를 주지 않으신다. 예를 들자면, 미국의 흑인노예 제도가 있었을 당시, 흑인노예가 편만했던 미국 남부지역(특히, 조지아, 앨러바마)의 목사들은 주일 설교를 할 때, 흑인노예들에게 주인을 잘 섬기면 하나님께서 복 주실 것이라고 위로했다. 이것이 위로인가?

 

흑인노예들에게 진짜 위로는 노예제도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고, 그들이 다른 사람들(백인들)과 평등한 인간대우를 받는 것이다. 이처럼, 포로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에게 위로란 포로생활을 잘 하면 하나님께서 복 주실 것이라는 말씀이 위로가 아니라, 포로생활 자체를 끝내는 것이 위로이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그러한 참된 위로가 선포되고 있다.

 

우리가 이 대림절에 기다리고 있는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거짓 위로를 주시는 분이 아니라, 참된 위로를 주시는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자기의(업적의)’가 아니라, ‘칭의(은혜로 구원 받는다!’를 선포하시고, 그 길을 여신 분이다. 그 분의 선포는 이 세상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는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해 보라고 인생을 피곤하게 만드는 이 세상의 시스템에 대한 부정인 동시에, 우리를 참 자유케 하는 기쁜 소식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깊은 죄, 원죄는 자기 집중이다. ‘자기 집중이란 자기 스스로를 세상에 증명하려는 습성을 말한다. 자기의 존재 가치, 구원의 이유를 끊임없이 증명하느라 피곤한 삶을 산다. 그래서 우리는 열심히 공부해야 하고, 열심히 일해야 하고, 무엇이든지 우리는 열심히 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 충분히 지쳐 있다. 우리는 나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잔인한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포로생활을 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착각이다.

 

복음은 자기를 증명해야 하는 이 세상에서 자기를 잘 증명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가짜 위로가 아니다. 복음은 새로운 나라(하나님 나라)에 대한 선포이다. 하나님 나라는 자기를 증명하느라 생명을 피곤하게 할 필요가 없는 나라이다. 오늘 말씀은 그러한 하나님 나라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11).

 

이사야는 하나님을 젖먹이는 어머니로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엄마를 찾는 이유는, 세상과는 달리, 엄마 앞에서는 나 자신을 증명하느라 애쓸 필요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평생 엄마 품을 그리워 하는 것이고, ‘엄마라는 말만 들어도 위로가 되는 것이다.

 

평가기준을 정해 놓고 그 기준에 맞는 존재인지 아닌지 스스로 증명해 보라고 끊임없이 요구하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느라 지치고 피곤한 여러분! 자의든 타의든, ‘자기의(업적의)’에 사로잡혀 포로생활을 하느라 죽을 것같이 지치고 힘든 여러분! 오늘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을 들으시라. 우리가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는 날에는, 우리는 더 이상 우리를 증명하느라 지치고 힘들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 받은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형제, 자매이다. 그러니, 삶의 자리에서 스스로를 증명하느라너무 생명을 소진하지 마시라. 스스로 증명하라고 상대방을 다그치지도 마시라. 그저 사랑으로 감싸주시라. 은혜로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의 위로를 날마다 묵상하시라. 특별히 교회에서 스스로를 증명하느라 너무 힘들어하지 마시라. 있는 모습 그대로,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며 격려하고 위로하시라.

 

마지막으로, 최근 만난 멋진 문장 하나를 여러분과 나누며 말씀을 마치려 한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 힘으로는 닫지 못하는 문이 하나씩 있는데

마침내 그 문을 닫아줄 사람이 오고 있다.”

(이병률 시, ‘사람이 온다중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고 계신다.



기도문


주님, 우리는 주님을 기다립니다.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느라 너무 힘든 우리들,

세상의 요구에 스스로 증명하느라 생명을 소진하여 

피곤하고 지친 우리들,

하지만,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고 참된 위로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오고 계시기 때문입다.

더이상 우리 자신에게 집중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

더이상 스스로를 증명하느라 생명을 탈진시키지 않아도 되는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에게 가져다 주실 그리스도를 기다립니다.

어서 오셔서 우리에게 참된 평안과 위로를 주옵소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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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