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4. 4. 10. 06:27

이삭 - 구원의 웃음

창세기 21

(창세기 21:1-7)

 

드디어 약속의 아들 이삭을 얻게 된 아브라함과 사라, 얼마나 기뻤을까요? 아마도 세상이 달라 보였을 겁니다. 하나님에 대한 수많은 의심의 장막도 걷혔을 것이고, 하나님을 의심했던 부분이 있었다면 오히려 하나님께 죄송한 마음도 들고,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도 느꼈을 겁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더욱 공고해졌겠죠.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보면 신앙이란 단 번에 성취할 수 있는 어떠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인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아들을 주시겠다고 한 약속의 성취까지 아브라함에게 얼마나 많은 시련이 있었습니까? 사실 그 약속의 성취까지 보장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약속 자체는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확실하지만, 그 약속이 실제로 성취되는 과정은 그야말로 고되고 지난한 훈련과도 같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겠죠.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나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3:12-14).

 

믿음을 경주로 표현하는 바울의 말을 빌리자면, 믿음이란 끊임없는 자기와의 싸움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한 가지 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과 그 약속의 성취를 위해서 경주하는 동력 또한 믿음의 속성임을 볼 수 있는 것이죠. 믿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다층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수주대토(守株待兎) 라는 고사성어를 만든 일화가 믿음에 대한 좋은 예시가 되는 것 같습니다: ()나라에 어떤 농부가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토끼 한 마리가 뛰어오다가 밭 가운데 있는 그루터기에 부딪쳐 목이 부러져 죽는 것을 보았습니다. 덕분에 토끼 한 마리를 공짜로 얻은 농부는 농사일보다 토끼를 잡으면 더 수지가 맞겠다고 생각하고는 농사일은 집어치우고 매일 밭두둑에 앉아 그루터기를 지키며 토끼가 오기만 기다렸습니다.[守株待兎]  그러나 토끼는 그곳에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으며 농부 자신은 송()나라 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밭은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 농사를 망친 것은 물론입니다.

 

여기서 믿음에 대한 속성을 발견할 수 있는데, 우선 농부의 믿음은 그루터기를 지키면 그루터기에 부딪쳐 죽는 토끼를 다시 얻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겁니다. 불가능할 것 같은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아브라함에게 아들이 주실 거라는 약속을 믿는 그 믿음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농부가 한 가지 놓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 약속의 성취를 위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가 믿음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범하기 쉬운 오류가 여기에 들어 있습니다. 약속이란 무미건조하고 일방적인 선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약속)을 맺으셨다는 것은 인격적인 사귐 가운데 거하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서로 간의 깊은 신뢰가 없으면 약속(언약)은 아무런 효력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언약)하신 것은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포가 아니라,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특별한 관계가 맺어졌다는 것을 뜻하는 겁니다. 농부가 범한 실수는 이런 것이죠. 농부가 그루터기에 부딪쳐 죽는 토끼를 기다리는 것은 아무런 인격적인 관계가 없는 겁니다. 그의 일방적인 믿음에 불과한 것이죠. 거기에는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놓치기 쉬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너무도 일방적일 때가 많습니다. 믿음이란 인격적이고 상호관계적이고 사귐적인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특별한 언약적 관계에 들어갔다고 하면서도 결국 신앙의 내용을 들여다 보면 전혀 인격적이지 않고 사귐적이지 않고, 하나님과 배타적 관계를 맺고 있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사실 이런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우상이란 헛것을 의미하는데, 헛것인 어떠한 존재나 사물에게 마음을 두는 것을 우상숭배라고 하기도하지만, 그것보다 더 끔찍한 우상숭배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헛것취급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변에서 하나님을 헛것 취급하는 것의 대표적인 예는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만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고, 오히려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 자체를 불편하게 여기면서 살다가,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어떠한 문제를 맞닥뜨렸다던지 아니면 마음 속에 간절히 원하는 어떠한 욕망이 생겼을 때 하나님을 찾는 것이죠.

 

아브라함은 적어도 이렇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수많은 실수를 범하고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길을 걸어가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그의 그러한 행동은 모두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그랬다는 겁니다. 실수를 범하고 반항을 하더라도,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그렇게 하면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모습을 긍휼히 여겨주시고 불쌍히 여겨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가정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자녀가 부모와의 깊은 관계 속에서 사고 치고 다니면 부모는 자녀의 그러한 모습에 화가 나긴 하지만 적어도 나 몰라라 하지는 않습니다. 반대의 경우도 발생합니다. 요즘엔 사고 치고 다니는 부모도 많습니다. 그런데 자녀와 부모 간에 인격적인 사귐이 바탕이 된 경우에 자녀든 부모든 사고 치고 다니는 것에 대해서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로의 지혜를 맞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부모와 자녀 간이라고 하더라도 그들 간에 어떠한 인격적인 관계가 형성되어 있지 않으면, 사고 치고 다닐 때 서로에게 어떠한 도움의 손길도 기대할 수 없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어구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약속의 성취라는 측면을 강조하기 위한 문학적 장치입니다. 이 말을 반복적으로 함으로써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죠. 한 마디로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기까지는 하나님의 돌보심이 가장 중요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깊은 속성입니다.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언약 안에서 당신의 의무를 온전히 수행하시는 분입니다.

 

약속이 성취되기까지 조마조마한 순간이 참 많았습니다. 그러나 약속이 성취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깊은 인격적인 사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을 우리를 눈 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 가운데 있었던 아브라함은 약속의 성취를 위해서 필요한 모든 제반 사항을 하나님의 돌보심 가운데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돌보심 가운데 아브라함은 죽을 위기에서 구원 받기도 하고, 육신의 생각이 낳은 것으로부터 깨달음을 얻기도 하는 등 끊임 없는 돌보심 가운데 약속의 성취라는 짜릿한 순간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약속의 성취인 아들 이삭은 그 이름의 뜻이 웃다입니다. 이 웃음은 단순히 창세기 18장에서 보았던 사라의 실소가 아닙니다. 이 웃음은 또한 단순히 기쁨의 웃음이 아닙니다. 이 웃음은 질적으로 다른 웃음으로 그 동안의 서러움과 고통을 말끔히 씻어주는 구원의 웃음입니다. 그야말로 약속의 성취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단순히 기쁘고 좋은 일이 아니라, 그냥 아들 하나 얻었다는 경사스러운 일이 아니라, 구원 사건이었습니다.

 

믿음이란 바로 이런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믿음을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고 하는 것이죠. 아들 이삭을 얻은 사라의 기쁨을 한 번 보십시오.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6). 이 웃음은 단순히 기쁜 웃음이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에게 아들이 생겼다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누군가에게 좋은 일이 생기면 좋은 일을 당한 당사자들만 웃고 맙니다. 일례로, 우리 아들이 하버드 대학에 들어갔다면 우리 집에는 참 좋은 일이지만, 그래서 우리 가정은 웃겠지만, 그 소식을 듣고 다른 사람들이 함께 웃어주는 일은 드뭅니다. 왜냐하면, 남이 잘 되는 것은 배가 아픈 법이니까요.

 

그런데, 믿음이란, 그 믿음이 인도하는 구원이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질투의 대상도 아니고 질투를 유발하지도 않습니다. 구원이란 남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남에게 부러움을 사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과 구원은 모두가 웃을 수 있게 해주는 보편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라에게 주신 웃음은 단순한 웃음이 아니라 구원의 웃음이었기 때문에 아들을 안아 든 그녀의 웃음 소리를 들은 주변의 모든 이들이 함께 웃을 수 있었던 겁니다. 이것이 바로 돌보시는 하나님이 이루어주시는 구원의 은혜고 역사인 것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십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이 있는 한 우리는 믿음의 길을 걸어가면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때로는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힘들고 어렵더라도 돌보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이끌어 주십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 가운데 있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이 믿음을 하나님께 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고 의무이고 권리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어떠한 믿음입니까?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사귐이 전혀 없는 빈 껍데기 믿음입니까? 아니면 비록 실수투성이고 때로는 아픔을 낳는 육신 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 가운데 있는 믿음입니까?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 처하든지, 하나님과 깊은 사귐 가운데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돌보십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은 우리를 기쁨으로 이끄실 텐데, 그 기쁨은 세상의 기쁨과 같지 아니한 구원의 기쁨이 될 것입니다.

 

웃을 일이 별로 없는 이 세상입니다. 한 번 한바탕 웃고 싶지 않으십니까? 한 바탕 웃고 나도 인생 그대로인 헛된 웃음이 아니라, 한 바탕 웃고 나면 인생이 달라지는 구원의 웃음을 웃고 싶지 않으십니까? 하나님만 믿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구원의 웃음을 안겨주실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품에 안은 이삭같은 바로 그 웃음을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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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