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4. 8. 14. 07:38

이삭과 리브가에 대한 진실

창세기 31

(창세기 27:5-23)

 

상황이 매우 급박해 보인다. 장자 에서에게 축복을 내리려는 이삭과, 그에 맞서 이삭의 축복을 야곱이 받게 하려는 리브가의 대립이 그려진 것처럼 보인다. 이야기 전체의 흐름 속에서 보면, 이삭은 그릇된 일을 하고 리브가는 옳은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신앙의 문제와 결부해 보면, 이삭은 신앙이 없어 보이는 것 같고, 리브가는 신앙 안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이삭은 다음의 하나님 말씀에 맞서는 행동을 하는 것 같고, 리브가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25:23).

 

이런 질문을 한 번 던져 볼 수 있는 상황이다. 왜 이삭은 에서를 축복하고자 했을까? 그리고 이런 질문도 던져볼 수 있다. 왜 리브가는 야곱에게 집착하는 것일까? 이삭이 리브가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위의 말씀을 몰랐을 리 없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 신실한 신앙을 물려 받은 사람이다. 그런데, 야곱을 축복하지 않고 굳이 에서에게 축복하려는 것을 보면 신앙을 잃어버린 듯한 인상을 받는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그리고 반대로 리브가는 같은 자식인데 에서에게는 마음과 눈길도 주지 않는 못된 어머니 같고, 그저 쌍둥이 작은 아들 야곱에게만 집착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이렇게 같은 배에서 같은 시간에 태어난 쌍둥이 아들을 차별할 수 있단 말인가?

 

우선, ‘왜 이삭은 에서를 축복하고자 했을까에 대한 문제부터 살펴보자. 첫째,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는 측면에서 이삭의 마음을 들여다 보자. 이삭은 하나님의 뜻, 즉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게 될 거라는 것을 몰랐을 리 없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을 인간이 어떻게 뒤집을 수 있겠는가! 그것을 알았던 이삭은 에서에게 측은지심을 느꼇던 것 같다. 형 에서가 장자권을 갖는 것이 이치상 맞지만, 이상하게 이 쌍둥이에게는 그 이치가 뒤집어졌다. 이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어차피 장자권은 야곱의 것이다. 장자권을 가지고 있는 이상 야곱이 받을 축복은 정해져 있다. 그는 하나님의 축복을 이미 그 삶 안에 담지하고 있는 아들이다. 그러나 에서는 무엇인가? 에서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아버지 이삭은 마음은 장자권을 빼앗긴 에서를 보며 안타까울 뿐이다. 그래서 이삭은 측은한 마음으로 에서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마음껏 축복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둘째로,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심정을 엿 볼 수 있다. 축복 쟁탈전이 일어나기 전, 에서의 결혼 기사가 나온다.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에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니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되었더라”(26:34-35). 에서는 이방인 아내를 얻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이삭도 자신의 혈통을 지키기 위하여 먼 곳 하란 땅에 가서 리브가를 데려왔다. 이는 배타적인 민족성을 형성하기 위한 조치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순수 신앙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다.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한 몸이 된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하는 것은 한 존재(문화)와 한 존재(문화)가 충돌하는 것과 같다. 정현종의 <방문객>이라는 시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사람이 온다는 건

사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의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시인의 말처럼 사람이 온다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의 과거, 현재,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을 자신의 존재 영역 안으로 맞이하는 일은 우주와 우주가 충동하는 것처럼 엄청난 폭발을 일으키는 일이다. 많은 에너지가 들고, 또는 또다른 에너지가 생성되는 일이기도 하다.

 

에서가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것은 이방 여인이 지니고 있던 이방 문화를 함께 수용하게 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물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흔들 수 있는 촉발점이 될 수 있다. 이방 여인은 분명 자신들이 섬기던 신에 대한 신앙을 함께 가지고 에서에게로 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삭과 리브가는 이것을 걱정했다. 그래서 이러한 에서의 행동, 즉 이방인과 결혼한 에서의 행동이 마음에 걸렸다.

 

어떻게 보면, 에서의 이러한 행동이 결국 장자권을 상실하고 축복권을 상실했다는 외적인 증거가 되는 지 모르겠다. 이삭은 그것을 알았던 것 같다. 장자권과 축복권을 담지한 장자 답게 행동하지 못하고, 이미 그것을 빼앗긴 사람처럼 행동하는 모습을 보고 이삭의 마음은 답답했을 것이다. 그래도 에서는 이삭의 장자가 아닌가! 그런 장자를 이삭은 손놓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삭은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심정으로 그토록 애써 에서를 축복하려 했다.

 

셋째, 이삭은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뜻을 시험(test)하고자 했던 것 같다. 사시 시대의 기드온처럼 정말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알아보고자 했던 것이다. 이삭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것이 정말로 하나님의 뜻인지 시험해 보고자 했다. 정말로 장자권과 축복을 야곱이 다 가져가는 것일까? 정말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일까? 이삭은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싶어 했다. 정말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자기가 아무리 에서를 축복한 들 하나님의 축복이 에서에게로 가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방법을 통해서라도 당신의 뜻을 이루시지 않겠는가?

 

‘왜 이삭은 에서를 축복하고자 했을까에 대한 위의 세가지 추론을 통하여 결국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삭의 성품이다. 이삭은 원래 온유한 사람이다. 온유한 사람이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하든 상대방의 마음을 다치게 하거나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강압적인 방법을 쓰지 않는다. 예수의 아버지 요셉처럼,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을 알았을 때 가만히 끊고자했던 것처럼, 이삭도 에서의 마음을 최대한 다치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정해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서 그것이 폭력처럼 군림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신앙의 측면에서 보자면, 이삭의 신앙은 온유함이 가득 베어 있는 신앙이었던 것이다. 온유함은 이처럼 그 누구도 다치지 않게, 그리고 폭력적이지 않고 섭리에 맞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끔 한다.

 

이번에는 왜 리브가는 야곱에게 집착하는가에 대한 문제를 살펴보자. 첫째로, 리브가는 말씀의 수호자의 역할을 자청하는 것 같다. 복중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던 리브가는 하나님께 나아가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물었다. 그때 받은 말씀은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다. 어떻게 이것을 지키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꼭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리브가가 보기에 자칫 잘못하다간 그 말씀이 어긋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 이삭이 엉뚱하게 행동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리브가는 말씀을 수호하기 위해서 남편을 속이는 일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그리고 그 뜻을 이루었다.

 

둘째로, 리브가는 힘 없는 자를 보호하고 있다. 성경은 장자 에서와 차자 야곱에 대한 모습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25:27). 쌍둥이였지만 정말 달랐다. 에서는 외향적이고 남자답게 힘이 셌다. 그러나 야곱은 내성적이고 힘이 약했다. 이 둘이 자라면서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다. 힘이 약한 야곱은 힘이 센 에서에게 늘 당하면서 컸을 것이다. 사실, 그러한 성장 환경이 야곱을 속이는 자로 만들었는지 모른다. 힘으로 정면 승부해서 이길 수 없으니, 속여서라도 승리를 쟁취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살아 남을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리브가는 늘 야곱에게 마음을 두었다. 그것은 세 번째 생각해 볼 수 있는 추론인 어머님의 마음과도 같다. 엄마의 마음은 늘 허약한 자식에게 가기 마련이다. 아버지는 장남에게 마음을 둔다. 그러나 엄마는 가장 힘이 약한 자식(또는 막내)에게 마음을 둔다. 리브가는 아주 생득적인 어머니의 마음을 갖고 야곱을 보호한 것이다.

 

리브가의 어머니의 마음은 다음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장자권 쟁탈전을 꾸미는 중에 허약한 야곱이 자신의 속임수가 들통나서 아버지에게 저주를 받을까 걱정할 때에 어머니 리브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따르고 가서 가져오라”(13).

 

이것은 어머니의 마음의 절정이다. 어머니는 자식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한다. 자신을 희생하더라도 가장 좋은 것으로 자식을 입히고 먹이고 싶어 한다. 모든 잘못된 저주는 자신이 담당하더라도 자식에게는 축복만 주고 싶어 한다. 이런 마음을 잘 담아낸 노래가 어머니의 마음이다. 양주동 박사가 작사하고, 이흥렬 씨가 작곡했다.

 

1: 나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를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 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오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없어라.

 

2: 어려선 안고 업고 얼려 주시고 자라선 문 기대어 기다리는 마음 앓을사 그릇될사 자식 생각에 고우시던 이마 위에 주름이 가득 땅 위에 그 무엇이 높다 하리오 어머님의 정성은 지극하여라

 

3: 사람의 마음 속엔 온가지 소원 어머님의 마음 속엔 오직 한 가지 아낌없이 일생을 자식 위하여 살과 뼈를 깎아서 바치는 마음 이 땅에 그 무엇이 거룩하리오 어머님의 사랑은 그지없어라

 

왜 리브가는 야곱에게 집착할까에 대한 위의 세가지 추론을 통하여 결국 확인할 수 있는 것도 리브가의 성품이다. 리브가는 신실한 사람이다. 신실하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자신의 맡은 바 임무를 성실하게 실행하고자 했다. 신실한 사람은 어떤 상황이 와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다. 엄마로서의 임무, 신앙인으로서의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한다.

 

신앙의 측면에서 보자면, 리브가의 신앙은 신실한 신앙이었던 것이다. 신실함은 이처럼 자신의 자리를 끝까지 지키는 원동력이 된다. 어머니로서 리브가는 끝까지 자신의 자리를 키셨고, 신앙인으로서 리브가는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했다.

 

얼핏 보면 이삭과 리브가는 대립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대립 행위가 아니라, 자신들이 고유 지니고 있는 성품의 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성품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자기 자신을 헌신했던 것이다. 이삭은 온유함으로 자식을 양육하고 인도했으며, 온유함으로 하나님을 섬겼다. 리브가는 신실함으로 자식을 양육하고 인도했으며, 신실함으로 하나님을 섬겼다. 이삭의 온유함과 리브가의 신실함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축복의 통로가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고유한 성품들을 지니고 살아간다. 어떤 성품이 어떤 성품보다 좋거나 나쁘지 않다. 이삭의 온유한 성품이, 리브가의 신실한 성품보다 좋다고 말할 수 없고, 리브가의 신실한 성품이 이삭의 온유한 성품보다 좋다고 말 할 수 없다. 그저 이삭은 온유한 성품을 타고난 것뿐이고, 리브가는 성실한 성품을 타고난 것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 타고난 성품으로 살아가면 된다. 다른 사람의 성품을 부러워해서 자기 자신의 고유한 성품을 미워하거나 버리려 애쓰지 말고, 그리고 자기 자신과 어울리지 않은 성품을 애써 표출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자신의 성품 안에서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려고 노력하면 된다. 그럴 때 우리는 가장 잘 할 수 있고, 가장 멋진 인생이 될 수 있고, 가장 행복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시며, 우리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이다. 있는 모습 그대로, 타고난 중심으로부터 생명의 꽃을 활짝 피워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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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