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4. 8. 25. 02:06

참 나의 건강이 인생을 좌우한다

(에스겔 37:1-10)

 

<죽은 시인의 사회> 마지막 장면 상연.

 

페르조나(persona)’라는 용어가 있다. 심리학자 융이 도입한 개념으로, 자아의 편에 서서 외부세계와 협상하는 의식의 일부분을 말하는 것인데, ‘연극의 가면을 의미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한다. 이런 입장에서 어떤 사람은 인생은 연극이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인생은 연극인가? 그렇기도 하도 그렇지 않기도 하다. 우선 인생이 연극인 것은 인간은 살아가면서 여러 개의 페르조나를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나의 자아는 하나이지만, 그 자아가 표출되는 사회적 방식은 여러 가지다. , 나는 나의 직위나 직책, 또는 직함 등의 모습으로 사회에 표출된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일생을 살면서 약 1천 개 정도의 페르조나를 경험하는 것으로 보고 되고 있다.

 

일차적으로 결혼한 사람은 집에서 남편으로, 아내로, 아버지로, 엄마로 살아간다.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은 사장으로, 종업원으로, 또는 그 중에서도 말단 사원으로, 과장으로, 부장으로, 회사 임원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우리는 누군가의 친구로, 누군가의 선배로 또는 후배로 살아간다. 물론, 교회에서는 목사로, 권사로, 집사로, 또는 무슨 부장으로, 회장으로 살아가기도 한다.

 

얼마 전 죽은 로빈 윌리암스는 배우로서 세상에 표출되었다. 그런데 그것은 그 사람의 한 가지 페르조나에 불과하다, 물론 그 사람에게 있어 배우라는 페르조나는 그 사람의 자아와 거의 동일시 될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다.

 

고등학교 때,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를 보고 어린 나이에 세상을 깨달은 듯한 뿌듯함을 가진 기억이 난다. 책상 위에 올라 학생들에게 '꿈과 희망'을 역설하던 선생님의 모습이 생생하다. 그 역할을 로빈 윌리암스가 맡았었다. 그때부터 로빈 윌리암스는 내 마음에 좋은 이미지로 남았다. 그 이후 로빈 윌리암스가 출연한 영화는 대부분 봤다. 그 중 <굿 윌 헌팅>이나 <패치 아담스> <죽은 시인의 사회>처럼 코끝이 찡한 감동을 준 영화로 아직까지 내 마음에 남아 있다.

 

그런데 로빈 윌리암스가 우울증 때문에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수많은 영화를 통해 사람들에 감동을 주고 꿈과 희망을 안겨준 그가 우울증으로 자살해 죽었다는 소식은 충격 그 자체였다. 배우로서는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주었지만, 생활인으로서 그는 매우 힘들었던 모양이다. 무엇이 그를 그토록 죽음으로 몰아갔는지 잘 모르겠지만, 달처럼 빛나는 부분도 있지만 그 반대편은 어둠이 도사리고 있듯이 빛과 어둠으로 성겨 있는 인간의 삶을 생각할 때,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하지만 때로는 빛이 어둠에 밀려버리는 '불안'의 상황을 어떻게 견뎌낼 것인가도 중요한 문제 같다.

 

우리는 살면서 참 나에 대한 질문을 자주 던져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때, 계속해서 들여다 보아야 할 것은 내가 쓰고 있는 가면즉 페르조나가 아니라 그 가면을 벗었을 때 그 안에 들어 있는 진짜 나의 모습이다. 그 진짜 나의 모습을 영혼(soul)이라는 말로 표현해 볼 수 있다.

 

우리는 나 자신에 대해 들여다 볼 때 영혼의 모습을 보기보다 그 영혼이 걸치고 있는 페르조나의 모습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 보니 인생의 희비가 엇갈리기도 한다. 어떤 사람의 페르조나는 세상에서 인정 받고 부러움을 사는 페르조나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페르조나는 세상에서 인정 받지 못하고 내세울 것이 못 되는 페르조나일 수 있다. 그렇게 자신의 영혼이 걸치고 있는 페르조나와 자기 자신을 동일 시 하다 보니, 인생의 희비가 엇갈린다.

 

분명한 것은, 내 영혼이 걸치고 있는 페르조나와 내 영혼은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동일시가 심한 사람일수록 인생의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높다. 일례로 군복무를 하면서 계급이 장군까지 올라간 어떤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 사람은 자신이 장군인 것을 자랑스러워했을 것이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도 그 사람의 직위를 부러워했을 것이다. 그러나, 장군으로서 삶을 사는 것은 그가 군대에서 군인으로서 일 할 때까지만이다. 전역하고 나면 그는 그냥 생활인으로 되돌아 온다. 바로 그때 자기 자신이 장군으로 있었을 때 자기 영혼에 걸쳐 있었던 페르조나인 장군과 자기 자신을 너무 동일시하는 사람은 더 이상 장군이 아닐 때 인생의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높다. 전역하고 나면 현역으로 있을 때만큼 장군 대우를 받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은 자기를 장군으로 생각하는데 더 이상 사람들이 자신을 장군 대접해 주지 않을 때, 그 안에서는 분노가 차 오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인간관계가 정말 힘들어 진다.

 

성경은 페르조나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성경은 오직 영혼에 관심을 갖는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관심을 갖는 것은 우리의 진짜 모습인 영혼이지 영혼이 걸치고 있는 페르조나가 아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이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또 이런 말씀도 있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62:5).

 

그리고 우리가 기도할 때 가장 범하기 쉬운 오류는 나의 영혼을 들여다 보며 나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기 보다, 그 영혼에 걸쳐 있는 페르조나를 위한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가령 이런 것이다. ‘주님, 제가 ~ 직분을 잘 감당하게 해 주시옵소서!’ 물론 이러한 기도가 나쁜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런 기도도 드려야 한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직분이 있으니까. 그러나, 우리의 기도는 늘 근본적인 것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영혼이 건강하지 못하면, 그 영혼이 걸치고 있는 페르조나는 오히려 나를 상하게 하고 남을 헤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심심치 않게 자살로 삶을 마감하는 사람들의 소식을 접한다. 겉으로 보기에 그가 쓰고 있던 페르조나는 사회적으로 성공을 가져다 준 것이고, 오히려 행복해 보인다. 그런데 그랬던 그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우리는 적잖은 충격을 받는다. 조심스러운 부분이기 때문에 어느 특정한 사람의 예를 들지는 않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페르조나에 대한 관심은 조금 거두고, ‘참 나(영혼)’에 관심을 더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페르조나의 화려함이 영혼의 초라함을 감출 수 있다. 아니, 영혼의 초라함을 감추기 위해서 사람들은 자신의 페르조나를 더 화려하게 내세울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이 오래 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어느 순간 자기 자신이 걸치고 있었던 페르조나를 벗을 날이 온다는 것이다. 그럴 때, 자신의 영혼이 만약 에스겔 서의 말씀처럼 뼈만 남은 송장 같은 모습이라면 스스로 그 모습에 놀라게 될 것은 뻔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은 늘 영혼(참 나)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그 속에 생기를 넣는것이어야 한다. 이것을 쉬운 말로, ‘영혼을 살찌우게 한다라고 말한다. 영혼이 말라 있으면, 그 영혼에 걸쳐지는 페르조나는 언젠가 거덜나고 만다. 더 이상 페르조나를 걸치고 있을 기력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가 인생의 허무를 느끼고, 인생이 힘들어지는 이유는 우리가 겉으로 걸치고 있는 페르조나의 역할을 잘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페르조나에 너무 집착하느라 자기 자신의 영혼을 잘 돌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례로 어머니들(여자)이 그런 인생의 허무를 많이 느낀다. 결혼해서 자식 낳고, 어머니로서, 그리고 한 남자의 아내로서 자신의 페르조나를 걸치며 살다 보니, 자신의 영혼(참 나)을 돌보지 못한다. 그러다가 자식이 품을 떠나고, 남편이 속 썩이면 자신의 페르조나가 벗겨져 그 속에 있는 말라버린 영혼을 발견하게 된다. 그럴 때, 어머니라는 페르조나를 쓰고 살아왔던 인생에 허무가 밀려오는 것이다.

 

교회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 그런 일이 일어나기 가장 쉬운 사람이 목사이다. 목사로서의 페르조나를 쓰고 살다 보면 그 페르조나 안에 있는 참 나(영혼)’을 돌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권사, 집사 등 교회의 직분자들도 마찬가지다. 교회의 중직일수록 그러한 문제가 많이 발생한다. 자기에게 입혀진 페르조나에 신경 쓰다 보니, 자기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지 못하고, 그저 페르조나의 역할에만 충실하다가 탈진할 때가 많다.

 

참 나(영혼)’의 건강이 인생을 좌우한다. 우리가 신앙을 갖는 이유를 착각하지 말기 바란다. 우리가 신앙을 갖는 이유는 참 나(영혼)’의 건강을 위해서지, 페르조나의 성공을 위해서가 아니다. ‘참 나(영혼)’가 건강한 사람은 어떤 페르조나를 걸치더라도 그 페르조나를 잘 소화해 낼 수 있다. 연기력이 좋은 사람은 어떤 배역을 맡더라도 잘 해내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연기력이 좋지 않은 사람은 어떤 배역을 맡아도 불안하게 마련이다. 이처럼, ‘참 나(영혼)’가 건강한 사람은 어떤 페르조나를 걸치더라도 잘 해낼 수 있다. 문제는 우리가 일평생 살아가면서 걸치게 되는 약 1천 여 개의 페르조나를 버거워 하는 이유이다. 우리의 중심이 어디로 향해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비록 페르조나를 걸치고 살아가지만, 우리의 중심은 늘 참 나(영혼)’에게로 향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참 나(영혼)’를 살찌우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라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페르조나를 살찌우게 하는 분이 아니라, 그 페르조나를 근본적으로 잘 감당하게 해 주는 우리의 참 나(영혼)’을 살찌우게 하시는 분이다. 우리의 영혼에 힘줄을 두시고 살을 입히시고 가죽으로 덮고 생기를 불어 넣어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라. 하나님 앞에 나올 때는 페르조나(가면)를 벗고 참 나(영혼)’를 보여드리고, 그 영혼으로 하나님과 대면하라. 페르조나로 인해 말라버린 우리의 영혼을 보시고, 우리 주님께서 다시금 살찌우게 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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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