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5. 4. 9. 03:39

화해는 은혜다

(Art of Reconciliation)

창세기 51

(창세기 42:21-28)

 

인간에게 일어난 일 중 가장 불행한 일은 사랑의 능력을 상실한 일이다. 인간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은 대부분 서로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얼마나 불행한가!

 

한국 사회는 또다시 토막살인사건의 충격에 휩싸여 있다. 시화호에서 발견된 시신의 몸통 부분과 그 인근에서 발견된 손과 발의 신원을 확인해 본 결과 중국여성동포의 것으로 밝혀졌다. 신원확인을 토대로 범인이 검거되었는데, 범인은 다름 아닌 남편이었다.

 

남편이 밝힌 범행의 이유는 중국에 있는 계좌로 돈을 부치라는 잔소리 때문에 부부싸움을 했고 홧김에 집에 있던 둔기로 아내를 내리쳐 죽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범행을 숨기기 위해서 자신의 집 화장실에서 아내의 시신을 훼손해서 유기했다고 한다. 머리와 팔, 다리를 몸통에서 분리시켰고, 팔과 다리에서 다시 손과 발을 분리시켰다. 손과 발에서 지문을 채취하지 못하게 하려고 한 것 같다. 그렇게 훼손한 아내의 시신을 자전거로 여러 번에 걸쳐 이곳 저곳에 유기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팔, 다리를 유기하려다 잠복 중인 경찰에게 긴급 체포되었다. 아내를 죽이고 시신을 훼손 한 뒤, 태연하게 직장에 출근까지 했다고 한다. 무엇이 이 사람을 이렇게 괴물로 만들었을까?

 

거의 20년 가까이 부부로 살아온 이들의 삶이 이렇게 처참한 비극으로 끝난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바로 사랑의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사랑의 능력 상실은 이렇게 비참한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다는 데 그 위험성이 있다.

 

이것은 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 사회는 중국 동포 사회에서 이런 문제가 일어난 것 때문에 중국 동포 사회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지만, 그들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그들과 거리를 두는 것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문제가 계속 발생되고 있는 중국 동포 사회를 끌어 안아야 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 한국 정부도, 한국 교회도 발벗고 나서야 한다.

 

이런 문제가 연속해서 발생하고 있다는 것은 그들(중국 동포)의 삶이 얼마나 고단한가를 보여주는 극단적인 모습이다. 먹고 살기에 바빠 서로에 대한 배려와 사랑을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이고, 돈 버는 기계로 전락한 자신의 신세를 존재는 한 없이 한탄하며 울고 있다는 뜻이고, 메말라 버린 정서를 어쩌지 못해 신음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가 어디 중국 동포에게서만 일어나는 일이겠는가.

 

인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은 돈을 많이 벌었을 때도 아니고, 좋은 직장에 들어갔을 때도 아니고, 명문대에 합격했을 때도 아니다. 인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은 사랑할 때, 그리고 사랑 받을 때이다. , 사랑의 능력을 발휘할 때 인간은 가장 행복하다.

 

사랑의 능력을 상실하면 다툼이 일어나고 불화가 일어나지만, 사랑의 능력이 회복되고 발휘되면 화해가 일어나고 평화가 일어난다.

 

야곱의 아들들 가운데 사랑의 능력이 상실되었을 때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가? 시기, 질투, 미움이 일어났다. 그래서 형들은 동생 요셉을 죽이려 했다. 르우벤의 반대와 유다의 만류로 요셉을 죽이지는 않지만, 그들은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인 행동, 즉 요셉을 애굽의 노예로 팔아버린다.

 

본문에는 사랑의 능력이 상실된 가운데 죽음과 같은 일이 벌어질 때, 그 일을 당한 당사자 요셉의 감정이 나타나 있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21). 여기서 괴로움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차라인데, 이것은 극단적인 상황을 나타내는 데 주로 쓰이는 단어이다. 시므온과 레위가 세겜성을 전멸한 후, 야곱이 그 지역 사람들이 보복할까 봐 두려워 떨면서 자신의 심정을 드러낼 때(34:30) 쓰였고,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섬긴 것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에게서 얼굴을 숨기심으로 그들이 당할 고통을 나타낼 때도 쓰였다(31:17).

 

상상해 보라. 형들에 의해서 죽음의 위기에 처해졌을 때 요셉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라고 거룩한 심정으로 걸러서 보면 안 된다. 성경이 묘사하고 있는 이야기는 상상력을 동원해서 최대한 사실에 가깝게 재구성해야 한다. 그래야, 그것이 현실성 있게 다가 온다. 요셉은 그때 형들에게 간절히 애원했다. 그리고 요셉의 마음은 극심한 괴로움에 떨었다. 사실, 그와 똑 같은 상황에 처해보지 않는 이상 그 마음을 헤아리기는 힘들 것이다.

 

화해는 사랑의 능력을 회복하여 발휘하는 것인데, 화해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첫 번째로 동일한 경험에서 오는 연민(compassion)’이 필요하다. 현재 형들의 위치는 과거 요셉의 위치로 전락한 상황이다. 형들은 곡식을 구하러 애굽에 와서 정탐꾼으로 몰려 생명을 잃을 위기에 처하게 되자, 옛날 요셉이 겪었을 괴로움을 생각하며 거기에 빗대어 자신들의 괴로움을 토로하고 있다.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21). 형들이 요셉의 괴로움을 이해하게 된 것은 바로 자신들이 그러한 괴로움을 동일하게 겪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어떠한 사건이 일어나면 그 사건에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지만, 그것은 제 삼자들이 그렇게 보는 것일 뿐, 당사자들 간에는 누가 가해자인지 누가 피해자인지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기 십상이다. 사건이 일어나면 대부분 거기에는 피해자만 있지 가해자는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벌인 일에 대해서 시인하기 보다는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려고 들기 때문이다. , 인간은 자기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고 싶어 하지 않고 감추려 한다. 그래서 가해자는 자신을 가해자라고 드러내질 않고 오히려 자신이 피해자라며 자신을 감추려 한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온전히 구분되는 시점은 가해자가 피해자와 동일한 고통을 겪게 될 때이다. 가해자는 자신이 행한 극악무도한 일을 자신이 동일하게 당해보기 전까지 인식하지 못한다. 가해자가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한 뼈저린 반성을 하게 되는 시점은 피해자와 동일한 피해자의 입장에 처할 때이다. 형들이 동생 요셉에게 가한 일이 얼마나 잘못한 일인가를 깨닫는 순간은 바로 그들이 동생과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자 당하는 괴로움(차라) 때문이다.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21).

 

 

통역을 통해서 형들과 대화를 나누었지만, 사실 요셉은 형들이 하는 말을 모두 듣고 있었다. 그들의 괴로움도 들었고, 그가 알지 못하던 사실도 알게 되었다. , 큰 형 르우벤은 자신을 죽이는 음모를 반대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안타까운 것은 큰 형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어떤 해결책을 내놓기 보다는 동생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그 아이에 대하여 죄를 짓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더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으니라”(22).

 

자신과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을 들은 요셉은 그 자리를 벗어나 외딴 곳에 가서 운다. 여기에서 화해를 위한 두 번째 과정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눈물이다.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24). 여기서 울고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바카인데, 이것은 단순한 울음이 아니라 슬픔과 기쁨을 모두 포함하는 울음을 뜻한다.

 

큰 어려움을 겪은 사람의 마음은 폭풍이 치는 바다와 같다가도 평온함이 깃든 잔잔한 바다로 바뀐다. 이것이 반복된다. 이것을 정신의학적 용어로 조울증이라고 한다. 조울증이 깊어지면서 눈물이 마르게 되는데, 눈물이 마른 사람만큼 인생이 어려운 사람이 없다. 눈물은 영혼의 윤활유와도 같은 것인데, 눈물이 말랐다는 것은 영혼의 작용이 멈춘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요셉이 울었다는 것은 영혼의 작용이 되살아나고 있다는 뜻인데, 영혼이 되살아 나야 사랑의 능력이 회복되고 화해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므로, 화해의 과정에 서로에 대하여 눈물을 흘리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눈물은 카타르시스의 역할을 해주고, 영혼의 얼룩을 씻어주는 세정제 역할을 해준다.

 

요셉은 둘째 형 시므온을 붙잡아 두고 나머지 형들을 아버지 야곱의 집으로 돌려보낸다. 열 명의 형들 중 왜 시므온을 붙잡아 두었을까? 일단 큰 형 르우벤을 잡아 두려고 했다가 르우벤 형은 자신 해하려는 범죄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열외시켰을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둘째 형인 시므온을 붙잡아 두었을 것이다. 어떤 학자(Nahum M. Sarna)는 여동생 디나의 사건을 고려해 볼 때 시므온의 성격 상 그 범죄의 주동자일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한다. , 요셉을 죽이려 한 범죄를 주동한 것이 시므온이었기 때문에 그를 붙잡아 두었다는 것이다.

 

이유야 어찌됐든 시므온을 뺀 나머지 아홉 형제들은 풀려난다. 눈물을 흘리며 카타르시스를 한 요셉은 형들을 그냥 돌려 보내지 않고 부하들을 명해서 형들의 자루에 곡식도 채워주고, 그들의 돈을 다시 자루에 넣고, 길에서 먹을 양식까지 챙겨준다.

 

형들은 요셉이 챙겨둔 보따리를 메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여관에 유숙하게 되는데, 거기서 혼이 나서 떨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다름이 아닌 자신들의 돈이 도로 자루 속에 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자루 속에 돈이 고스란히 들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정신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면서 서로가 서로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28).

 

여기에서 화해의 세 번째 과정이 발견되는 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사랑의 능력을 상실하게 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창세기는 이것을 에덴동산 이야기를 통해서 묘사하고 있고, 누가복음은 이것을 탕자 이야기를 통해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성경과 기독교 신학이 제시하는 인간론의 기본이다. 그래서 기독교 신학에서는 이 상황, 즉 인간이 하나님과 분리된 상황을 일컬어 원죄라고 표현한다.

 

인간이 사랑의 능력을 상실한 이유는 단순히 인간의 감정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는 성경의 진술처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 존재의 본질이 사랑에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인간은 사랑하고 사랑 받을 때 가장 행복한 것이고,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 받지 못할 때 가장 불행한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므로 하나님을 떠나서는 사랑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존재이다. ,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은 하나님과 분리되어서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뜻이다.

 

하나님과의 연합을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인간이 사랑의 능력을 회복하고 발휘할 가능성은 없다. 요셉과 형들 사이에 화해가 발생하는 시점은 이렇게 형들이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이 있은 후였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요셉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 안에 있었다. 하나님 안에 있었던 요셉과 이제 하나님 안으로 들어온 형들 사이에 화해가 일어나는 일은 당연하다.

 

그렇기 때문에, 화해는 은혜다. 어떻게 보면 요셉의 인생은 진노 가운데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형들이 요셉의 일을 기억하면서 자신들이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거하게 되었다고 두려워하는 것처럼 그들의 인생이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거하게 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진노가 은혜로 바뀌는 순간은 바로 그들 모두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되는 그 순간이라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만물이 하나님 안에 거하게 하는 은혜의 상징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진노를 말하는 것 같으나,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진노에 의해서 죽임 당한 것 같으나, 그의 죽음은 진노의 죽음이 아니라 은혜의 죽음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십자가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하나님과 화해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화해는 인간이 사랑의 능력을 회복하고 발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은혜의 징표이다. 화해는 우선 동일한 경험에서 오는 연민(compassion)’이 있어야 하고, 그 다음에 찌꺼기가 껴서 움직이지 못하는 영혼을 맑게 해주는 카타르시스의 눈물이 있어야 하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깨닫는 일(하나님과의 합일)이 있어야 한다.

 

사랑의 능력을 회복시켜 주시고 화해를 이루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이 되시고(one of us), 눈물로 발을 씻도록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은 우리 인간에겐 그야말로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의 가장 큰 표지는 사랑의 능력을 회복하고 발휘하는 일이다. 사랑의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가? 화해가 일어나고 있는가? 행복한가? 화해는 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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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