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9. 10. 26. 02:52

순례자를 위한 노래

(시편 121:1-8) 

 

시편 120-134편의 열 다섯개의 시편은 순례 시편이라고 부른다. 한 사람이 순례를 떠나는 이유는 120편에 나오는데, 그는 고달픈 삶에 지쳐 있어, 순례를 떠나 하나님을 만나 삶의 평안을 회복하고 싶어한다. 특별히 120편은 그 사람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는지를 보여준다. 사람들 때문에 마음 속에 큰 생채기 생기고 가시가 생겼다. 평화(샬롬) 가운데 살고 싶었으나,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샬롬을 잃어버린 그 사람은 순례를 통해 잃어버린 평화(샬롬)을 회복하고 싶어한다.

 

우리의 인생이 그렇다. 우리 모두는 고달픈 인생을 살고 있다. 삶이 고달프다고 손쉽게 생명을 놓을 수는 없다.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평화를 갈망하고 이룰 때 우리는 고달픈 인생을 이겨내며 앞으로 전진할 수 있다. 인생을 그냥 흘러가듯이 사는 사람과, 고달픈 인생이지만 인생을 순례라고 보며 인생의 길을 가는 사람의 인생은 같을 수 없다. 우리는 순례를 떠난다. 무엇보다, 하루하루, 하나님을 만나면, 그리고 그 길 가운데서 복 있는 사람을 만나면, 그래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평화를 이루면, 우리의 삶은 복된 삶이 될 것이다.

 

시편 121편은 혼자서 부른 노래가 아니다. 적어도 두 사람 이상이 주고 받는 노래이다. 순례자가 순례를 떠날 때, 어떤 다른 이가 그의 순례의 길을 축복해 주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제 순례자는 여장을 꾸리고 순례를 떠난다. 그는 순례의 여정을 시작하며 눈을 들어 앞에 있는 산을 바라본다. 대개 그 산은 하나님이 계신 시온산’, 예루살렘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가 눈을 들어 산을 바라보는 이유는 순례의 길을 가는 동안, 삶의 여정 가운데 도움(에제르)’를 찾기 위함이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1-2).

 

3절에서 시점이 바뀐다. 도움을 찾는 순례자에게 축복하는 또다른 사람이 등장한다. 순례를 나선 이에게 따뜻한 격려와 축복의 메시지를 건네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축복이다. 120편에서 말했듯이, 이 순례자는 삶의 자리에서 사람들 때문에 평화(샬롬)을 잃어버린 사람이다. 삶의 상처가 많은 사람이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에게 따뜻한 위로와 축복의 메시지를 건네줄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순례자에게 위로와 평안이 되기에 충분하다.

 

사람들 사이에서 받은 상처는 사람들 사이에서 치유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치유가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나 자신이 누군가에게 위로와 축복의 메시지를 건네 줄 수 있는 복 있는 사람이 되는 것도 중요하고, 위로와 평안이 있는 공동체를 세워 나가는 것도 중요하다. 순례의 길 가운데, 인생의 길 가운데 위로와 평안을 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 자신이 그러한 사람이 되는 것은 더 중요하다. 위로와 평안을 받는 자보다, 위로와 평안을 주는 자에게 더 큰 복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좋다. 주님, 인생의 여정에서 주님이 보내주신 이들로부터 위로와 평안을 받게 하시고, 더 나아가, 나 자신이 누군에게 위로와 평안을 주는, 주의 복된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순례자의 기도)

 

5-8절은 순례자를 향한 격려와 축복이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다. 언제나 축복은 구체적이어야 한다. 가장 중심이 되는 구절은 여호와께서 너를 지키신다는 선언이다. 그러면, 무엇으로부터 지켜 주시길 바라는 것일까? ‘무엇7절에 나오는 것처럼, ‘모든 환란’, 온갖 불행(-라아)’이다. 복을 빌어주는 사람은 순례자가 그 여정 가운데 만날 수 있는 온갖 불행으로부터 지켜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의 기도를 드리고 있다.

 

첫째, 하나님의 지키심은 그늘과 같다. 이것은 낮의 해와 상반되는 개념이다. 유대땅은 매우 건조하다. 건조한 기후를 일으키는 낮의 해는 사람의 목숨까지도 앗아갈 수 있다. 그래서 그늘이 매우 중요하다. 엘리야도 이세벨을 피해 도망치다가 로뎀나무 그늘에 앉아서 쉬었다. 로뎀나무는 별로 크지 않다. 아주 작은 그늘을 만들어 제공할 뿐이다. 그러나 건조한 사막 기후에서는 그 그늘이 사람의 생명을 건진다. 크고 시원한 그늘이 아닐지라도, 생명을 건질 수 있는 작은 그늘에도 감사하는 순례자의 모습을 본다.

 

둘째, 하나님의 지키심은 오른쪽에서 동행하시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오른쪽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되, 오른쪽에서 구원하시고, 오른손으로 구원하신다. 여기서 오른쪽에서 동행한다는 뜻은 적을 물리치는 든든한 수호자를 뜻하는 동시에, ‘법정 변호인을 뜻한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우리를 해하려는 수많은 적을 만난다. 그리고 억울한 누명을 쓰기도 한다. 그럴 때, 하나님은 오른쪽에 동행하시며 우리를 구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메타포적으로, 시시때때로 우리의 오른편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동행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 지금 제 오른쪽에 나와 함께 동행하시지요?”

 

셋째, 낮의 해와 반대되는 표현은 밤의 달이다. 그 당시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달 신이 사람들에게 재앙과 열병을 가져다 준다고 생각했다. 재앙이나 병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이 주는 벌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더 이상 재앙과 병을 신이 주는 벌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현듯 찾아오는 재앙과 병을 예측하거나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우리는 재앙과 병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오른편에서 동행하시며, 불현듯 찾아올지 모르는 재앙과 병을 막아달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지키심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너의 출입은 공간적 개념이고, ‘지금부터 영원까지는 시간적 개념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고백하는 신앙 위에서 베푸는 축복의 선언이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지키신다. 지켜주시는 특정한 장소와 특정한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존재하는 모든 공간과 모든 시간에 함께 하시며 우리를 지켜주신다.

 

이러한 축복의 말씀을 들으며 순례를 떠나는 순례자의 마음이 얼마나 든든했겠는가. 그리고 그는 이 축복의 말씀을 얼마나 간절하게 마음에 새겼겠는가. 이 축복은 매우 구체적인 축복이다. 우리도 우리의 삶의 여정 가운데, 구체적으로 필요한 하나님의 지키심이 있다. 그러한 것들을 위해서 서로 구체적으로 축복하며 순례의 길을 가는, 복 있는 순례자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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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