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9. 12. 24. 02:22

Dangerous Memory

(마태복음 1: 1~25)

 

얼마전 슬픈 소식을 들었다. 독일의 신부이자 저명한 신학자, 요한 뱁티스트 메츠(Johann Baptist Metz)가 소천했다는 소식이었다. 여러분들에게는 생경한 신학자일지 모르겠으나, 신학을 좀 깊이 공부한 사람, 특별히 나처럼 정치신학을 전공한 사람들에게는 매우 특별한 신학자이다. ‘정치신학이라는 분야가 바로 이 신학자를 통해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메츠는 몰트만, 그리고 도로테 죌레라는 신학자들과 정치신학분야를 개척한 인물로 유명하다.)

 

요한 뱁티스트 메츠하면 떠오르는 말이 바로 ‘dangerous memory’이다. 한국말로는 위험한 기억이라고 번역하는데, 그렇게 마음에 와 닿는 번역은 아니다. ‘dangerous memory’라는 것이 무슨 존재론적 의미를 담고 있는지 설명하기 위해서 준비한 시가 있다.

 

꽃을 위한 서시

(김춘수)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이 젖어드는 이 무명의 어둠에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 밤 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이 될 것이다

 

......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여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라는 시구절이 지니는 심상을 상상해 보면, 메츠가 ‘dangerous memory’라고 말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마음에 와 닿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손길이 닿으면, 우리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여기서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가 된다는 뜻이다.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에 시방 위험한 짐승인 것이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프랑스의 클래식 작곡가 쥘 마스네(Jules Émile Frédéric Massenet, 1842 5 12 - 1912 8 13)의 오페라 <베르테르 Werther> ‘why do you wake me now’를 보는 듯하다.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바탕으로 제작된 이 오페라에서 베르테르는 로테를 향해 이렇게 노래한다. “why do you wake me now? 왜 나를 깨우셨나요?” 첫 가사가 이렇다. “Why do you wake me now, o sweetest breath of spring? 왜 나를 깨우셨나요? 오 나의 사랑스런 봄의 기운이여!”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위험한 기억(dangerous memory)’에 대한 기록이다. 네 개의 복음서가 각자의 방식에 따라 그 위험한 기억을 풀어놓고 있다. 그 중에서 마태복음은 그 기억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족보를 써내려가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 기억은 이렇게 시작한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1).

 

아브라함과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억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인물들이고,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하며 살아왔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과 다윗에게 주신 언약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민족적 정체성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너를 통해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 약속을 주셨고, 다윗을 통해 너의 씨앗을 통해 왕위가 영원할 것이다라는 약속을 주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러한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서 오신 분이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족보의 형태로, 누가 누구를 낳았다는 형태로 되어 있지만, 그것을 읽어 내려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족보에서 단순히 이름을 보지 않았다. 이 족보에 적힌 이름만을 불러가며 읽는 것은 1분 정도 밖에는 안 걸리지만, 그 이름이 간직하고 있는 내러티브(이야기)’를 풀어놓으면, 평생이 걸려도 그 이야기를 다 풀어놓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내러티브(이야기)' 공동체이다. 성경에는 족보가 많다.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고...' 그러나, 이 족보는 그냥 족보가 아니라 '내러티브'의 족보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누가 내러티브를 낳고, 누가 내러티브를 낳고..'하는 식이다. 마태복음의 족보도 마찬가지다. ‘누가 누구를 낳았다라는 족보가 아니라, ‘누가 어떠한 내러티브(이야기)’를 낳았는지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이렇게 끝난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16). 요셉과 마리아는 내러티브를 낳는데, 그 이름은 예수다. 그리고 예수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의 이야기는 범상치 않게 시작한다. 우리가 많이 들어서 아는 것처럼, 예수의 탄생은 여느 사람과 같지 않다. 요셉과 마리아는 약혼한 사이였으나, 아직 결혼한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동침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가 아이를 가지게 된다. 그런데, 마태는 아주 신비한 방식으로 마리아의 임신을 풀어낸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18).

 

이것 자체가 아주 위험한 기억이다. 예수는 태어나면서 스스로 이렇게 외치는 것 같다.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하나님의 손길이 그에게 닿았고, 그는 지금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 태어났다. 마태는 그것을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예수는 태어나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이렇게 외치는 것 같다. “why do you wake me now? 왜 나를 깨우셨나요?”


마태는 예수의 무한한 가능성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21~23).

 

예수의 가능성은 가히 폭발적이다. 이렇게 방금 태어난 아기 예수는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이다. “why do you wake me now? 왜 나를 깨우셨나요?” 하나님이 예수를 봄의 기운(생명을 잉태하는 기운/성령)을 통해 깨우신 이유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계시다는 것을 확증하시기 위하여이다.

 

이렇게 방금 태어난, 그러나 아직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는 아기, 너무도 연약하여 어떻게 될지 모르는 아기, 그렇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이 아기 예수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무엇보다 마음이 조마조마 할 것이다. 과연, “성령으로 잉태된이 아기는 자신이 지닌 이 무한한 가능성을 잃어버리거나 빼앗기거나 꺾이지 않고 발현할 것인가, 아니면 도중에 그 무한한 가능성을 잃어버리거나 빼앗기거나 꺾이고 말 것인가.

 

다시 말해, 예수의 이야기, 즉 그가 지닌 무한한 가능성을 통해 천사의 예언대로자기 백성의 구원은 탄생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어떠한 방식으로 예수의 가능성이 펼쳐지며, 어떠한 방식으로 구원을 이루게 될지도 미지수이다. 이제부터, 예수의 이야기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펼쳐질 것이다. 싱거울 수도 있고, 대단할 수도 있다. 그러한 걱정과 기대를 품고 읽어 내려가는 예수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dangerous memory’이다.

 

내러티브가 더 이상 생산되는지 않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죽은 거나 마찬가지다. 만약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태어난 예수의 이야기가 더 이상 진전되지 않고 멈췄다면, 우리는 지금 이렇게 예수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 않을 것이고, 예수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이야기는 멈추지 않았고, 그의 이야기는 그 당시 사람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전개가 됐으며, 그들의 지혜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운 방식으로 구원이 탄생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의 구원에 참여한 사람들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의 이야기에서처럼 성령을 통하여’,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 예수 이야기 안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뜻이다. 예수의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 우리도 하나님을 향하여 이렇게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why do you wake me now? 왜 나를 깨우셨나요?” 그리고 이제, 우리는 예수 안에서, 우리들의 이야기를 낳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하는 모든 행동은 '내러티브'를 낳아야 한다. 거기서 다른 것이 탄생하면 안 된다. 내러티브가 탄생하지 않고 다른 것이 탄생한다면 그것은 '믿음'으로 한 행동이 아니라, 다른 '의도'로 한 행동이 될 뿐이다. 내러티브로 시작된 공동체(또는 신앙인의 삶)에 내러티브가 없다면, 정육점에 고기가 없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 보자. 나는 지금 어떤 내러티브를 낳고 있는가. 우리 교회 공동체는 지금 어떤 내러티브를 낳고 있는가. 내러티브는 하루 아침에 낳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아이가 열 달 엄마 뱃속에서 잘 양육 받다가 산고의 고통과 함께 탄생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교 내러티브도 믿음에 의한 양육과 고통 가운데서 탄생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뱃속에서 어떠한 내러티브를 잉태시키고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봄의 기운)’ 무한한 가능성을 지는 존재로 새롭게 태어난 자신의 그 ‘dangerous memory’를 절대로 잃어버리거나 빼앗기지 말라. “우리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채워져 있다. 예수가 연약하게 태어났으나, 그 무한한 가능성을 잃어버리거나 빼앗기지 않고, 인류의 역사 속에서 그 누구도 한 번도 탄생시키지 못한 부활을 탄생시킨 것처럼, 우리도 예수 안에서 그 누구도 한 번도 탄생시키지 못한 부활과 같은 역사를 이루게 될 것이다. 예수의 그 ‘dangerous memory’ 안에서 우리들의 삶에도 떡두꺼비 같은 내러티브가 탄생하길 소망한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