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0. 2. 21. 02:57

위의 것을 찾으라의 의미

(골로새서 3:1-17)

 

왜곡된 율법주의와 헬라 철학의 이원론이 만들어낸 헛된 사상과 가르침은 사람들로 하여금 종교적 금욕주의와 그릇된 겸손에서 비롯된 자기 폄하를 가져왔다. 이것의 문제는 율법이 그리스도를 대신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구원하는 게 아니라,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종교적 금욕이 자신을 구원하게 된다는, 이상한 구원론에 빠지게 된다.

 

이것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킨 바울은 골로새 교회 지체들에게 위의 것을 찾으라고 권면한다. 1절에서는 위의 것을 찾으라고 하고, 2절에서는 위의 것을 생각하라고 한다. 이 두 개의 말을 종합해 보면, 위의 것을 생각하고 추구하라는 뜻이 된다. 그러면, 여기서 위의 것이란 무엇인가?

 

언뜻 보면, 2절 말씀에서처럼, ‘위의 것땅의 것과 대비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땅의 것을 하찮고 저등한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 여지가 높다. 이러한 잘못된 생각이 2장에서 나오는 자기 폄하로 이어지게 될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다. ‘자기 폄하는 몸의 학대로 이어진다. 금욕은 몸의 학대가 아니라, 몸을 살리는 일어야 한다. 그런데, 잘못된 생각은 몸을 살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몸을 학대하게 된다. 이 점을 늘 조심해야 한다.

 

바울(실제 저자는 바울이 아니라고 본다. 그것을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므로, 그냥 저자를 바울로 쓴다.)의 의도는 단순히 하늘과 땅을 공간적 의미로 대조하는 게 아니다. ‘라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다스림이 실현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표현이다. 그것은 영적인 것이기에, ‘라는 말로 표상하는 것이다. 반면에, ‘땅의 것이라는 말도 영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땅의 것이란 하나님 나라와 대조되는, 하나님의 주권과 다스림이 실현되지 않는 영적 세계를 말한다.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왜 위의 것을 찾으라고 하는 지에 대한 것이다. 그에 대한 실마리는 1절과 3절이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 그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존재이다.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는 말은 정말 위대하고 신비로운 이야기다. ‘감추어져 있다라는 말은 헬라어 크륍토의 완료 수동태를 번역한 것인데, 이것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분명히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게 된 것을 뜻하는 동사이다.

 

우리의 생명은 위에 계신하나님 안에 숨겨져 있다. 그렇기에, 땅에 속한 자들(, 하나님의 통치 안에 머물지 않는 자들)은 볼 수 없고, 해할 수도 없다. 이그나티우스를 비롯한 초대교부와 순교자 유스티노스 같은 순교자들은 이것을 아주 잘 알았던 것 같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생명이 하나님 안에 있기에, 그들은 이 땅에서의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실제적으로 느끼는 지에 대한 여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지금 이렇게 생명이 하나님 안에 숨겨져 있다라는 말을 설명하고 있는 나도 이것을 설명하고 있으면서,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 예전에, 오히려 공부가 덜 됐을 때는 그것이 무엇인지 별 생각 없이 안다고 생각했으니, 이제 공부를 좀 더 한 지금, 오히려 그 신비를 잘 알지 못하겠다. 아마도, 그것이 신비인 것을 깨달은 것 같다. 신비를 안다고 말하는 게 교만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는 것과, 우리의 생명이 진짜 무엇인지 아직 잘 모른다. 여기서, 우리는 생명에 대한 동경과 함께,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게 된다. 종말이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름 타고 다시 오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생명의 실체가 밝히 드러나는 때를 말한다. 그래서 바울도 4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나는 우리 인생의 소망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매우 혼란스럽고, 생명에 대한 신비가 풀리지 않은 상태라, 무엇이 참된 생명이고, 참된 삶인지 잘 모른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은 고독한 것이고, 때론 방황하는 것이고, 아프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는 너무도 아는 게 없다. 그렇다고 알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생명은. 그것은 하나님이 종말에 자기 안에 품고 계신 우리의 생명을 그리스도와 함께 계시(revelation)’해 주셔야 아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너무 조바심을 내지 말고, 인생을 살아가면서 좌우충돌하더라도, 그리고 너무 절망스럽더라도, 참고 인내하며,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견디는 게 중요한 것 같다. 인생은 견디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은 전쟁터 같다. 차라리 전쟁터이기 때문에 살아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 아는 게 아닐까 싶다. 바울은 말한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5). 이것은 굉장히 영적인 말이다. 몸을 학대하라는 말이 아니다. 땅에 있는 지체에 대한 구체적인 것은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욕심, 탐심등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어떤 실체가 있는 게 아니다. 마음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들이다.

 

보이는 것과 싸우는 것은 오히려 쉽다. 보이지 않는 것들과의 싸움은 쉽지 않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들과의 싸움이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것들과 싸워서 이기지 못하면, 보여지는 삶이 엉망이 되기 때문이다. 바울은 보이지 않는 것들과 싸워서 이기지 못할 때 나타나는 현상들을 나열하고 있다.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8-9).

 

보이지 않는 것들과의 싸움에서 지면, 실제로 보이는 삶은 망가진다. 무엇보다, 인간 관계가 깨진다. 인간을 가장 잘 이해하고 보듬어야 할 인간이 인간의 가장 큰 적이다. 인간의 생명을 가장 심하게 훼손하는 것은 인간의 악독한 말이다. 보이지 않는 것들과의 싸움에 진 사람의 말은 독을 뿜어낸다. 독사가 따로 없다. 그래서 그 말로 사람을 죽인다.

 

바울은 보이지 않는 것들과의 싸움에서 이긴 사람, 즉 하나님의 주권과 다스림 안에 사는 사람, 위의 것을 생각하고 추구하는 자의 삶을 이렇게 말한다.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12-14). 이것은 위에서 말한,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8-9)는 것과 완전한 대조를 이룬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위의 것과 땅의 것이 뒤죽박죽 섞여 있다는 것이다. 그 현실이 바로, 우리를 더욱더 위의 것을 생각하고 추구하며, 갈망하게 만든다. 삶이 혼란스럽고, 고통스럽고, 힘들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생명의 신비를 다 알지 못하고 있다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고, 그 생명의 신비가 온전히 드러나, 모든 고통 속에서 해방될 날을 간절히 바라게 되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지금 우리가 삶을 살면서, 이러한 저러한 일들로 혼란을 겪고 고통스럽더라도,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희망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기에, 그리고 그 생명은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드러날 것이기에, 삶이 힘들고 어렵더라도, 한 번 잘 견뎌내 보자. 우리가 실수하고, 죄를 짓고, 우리의 삶이 뒤죽박죽이더라도, 우리의 생명을 품고 계신 주님께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실 것이다.

 

이러한 희망이 비록 거미줄처럼 가느다랗게 보일지라도, 그 희망이 우리를 살릴 것이다. 구원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을 숨기고 계신 하나님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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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