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0. 2. 25. 03:34

따뜻한 마음따뜻한 공동체

(레위기 19:9-18)

 

레위기가 법률이라는 것을 알면매우 차갑고 재미 없을 것이다라는 선입관이 생긴다. 물론 레위기 앞쪽에 나오는 제사법(제의)에 대한 부분은 현재 지구 상 어디에서도 실행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어차피, 레위기의 제사법은 성전의 파괴로 인하여 더 이상 제사를 드리지 못하게 된 바벨론 포로기 때, 그리고 제사를 경험한 적이 없는 많은 이들을 상대로 쓰여진 것이다.

 

인간에겐 다른 동물이 가지고 있지 못하는 능력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상상력이다. 인간은 경험을 하지 않아도, 상상력을 통해 무엇인가를 경험한 것보다 더 훌륭한 것을 생각하고 창조해 낼 수 있다. 구약성경을 관통하는, 성경 공동체의 상상력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이상적인 사회이다. 16세기, 종교개혁시대에 영국에서 살았던 토마스 모어는 성경의 이러한 이상적인 상상력을 자신만의 필치로 옮겨 적었는데, 그것이 그 유명한 <유토피아>라는 책이다.

 

유토피아는 그리스어의 없다라는 뜻의 ‘ou’와 장소라는 뜻의 토포스가 합쳐진 말이다. 그래서 유토피아없는 장소라는 뜻이다. 사실, 어디에도 없는 장소이기 때문에 인간은 그러한 장소를 경험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경험할 수 있다. 그 경험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상상력이다. 인간이 가진 능력 중에, ‘상상력이 없었다면, 이 세상은 그저 동물의 왕국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이렇게 문명 사회를 찬란하게 이룬 이유는 모두 상상력덕분이다.

 

상상력이 없으면, 일차적으로 경제생활이 불가능하다. 경제라는 구조를 유지해주고 지탱해 주는 제1 요소는 이다. 그런데, 이라는 것은 실체가 있는 게 아니다. 돈은 상상력의 산물이다. 지금 여기에 ‘100짜리 지폐가 있다고 생각해 보라. 우리는 이것이 100불이라고 굳게 믿고, 100불을 향해 탐욕을 내지만, 실상, 이 지폐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것이 100불이라는 상상력을 부여하고, 그 모든 상상력을 우리 인간이 공유하며, 거기에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성막 안에서 벌어지는 레위기의 제의(제사법)는 엄청난 상상력의 산물이다. 이 상상력이야 말로 신적인 능력이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제의(제사법)을 통하여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강력하게 증언하고 있다.

 

레위기에서 계속하여 상상하는 세계는 에덴동산이다. 에덴동산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통하여 참된 생명을 얻는 그러한 세상이다. 무지막지하게 비참한 현실 속에서 고통 받고 있지만, 이스라엘은 상상력을 통하여 그러한 비참한 현실 속의 고통을 넘어서고 있다. 지금 그들은 죽음의 영역에 던져져 버린 부정한 존재처럼 여겨지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며,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통하여, 죽음의 영역에서 건짐(속량)을 받아, 생명의 영역으로 옮겨질 것(속죄)를 굳게 믿는다.

 

이러한 믿음은 상상력 없이 절대 불가능하다. 두 눈으로 자신들의 처해진 상황만을 보고 말았다면, 그들에게는 더 이상 살아갈 소망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두 눈으로 보이는 현실만 본 것이 아니라, ‘에덴동산을 상상하고 갈망했다.

 

이스라엘이 상상한 에덴동산은 거룩한 세상이다. ‘거룩이라는 말은 굉장히 신학적인 용어이다. 속된 것이 제의를 통해서 정결해지는 것이고, 정결해진 것이 하나님의 성별을 통해서 거룩해진 것이다. ‘거룩하다라는 말은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뜻이다. 거룩한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다. 하나님이 그 품 안에 그의 생명을 감추고 있는 사람이다.

 

레위기의 전반부, 그리고 절정을 이루는 레위기 16장은 죽음의 영역에서 비참한 삶을 사는 인생들이 어떻게 제의(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생명의 영역으로 옮겨지는 지, , 거룩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께 속한 인생으로 바뀔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레위기의 후반부, 레위기 17장부터는 하나님께 속한 인생이 어떻게 생활 속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라는 책이 있다. 니코마코스는 아리스토렐레스의 아들의 이름이다. 그래서 이 책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에게 헌정한 책이거나, 아니면, 그의 아들에 의해서 편집된 책으로 여겨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책에서 많은 이야기를 한다. 그 중에서 도덕적인 미덕에 대하여 말하는 부분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말한다. “도덕적인 미덕은 습관의 산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습관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데, 시중에 나와 있는 습관에 대한 모든 책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바탕으로 쓰여진 것이라 보면 된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저서는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 좋은 삶/행복한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증이라고 보면 된다.

 

헬라어로, 습관은 Ethos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그런 미덕은 습관이라는 말을 조금 고쳐서 도덕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다”(니코마코스 윤리학, 62). , 그는 Ethos(습관)에서 Ethics(도덕/윤리)가 왔다고 말한다. 이것을 바탕으로 그가 주장하는 것은 도덕적 미덕은 어떤 것도 우리 안에서 저절로 생겨나지 않음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도덕은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습관을 통해서 형성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따라, 많은 이들은 습관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습관이 도덕/윤리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습관을 통해 형성된 도덕/윤리가 좋은 삶/행복한 삶을 가져온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과 레위기에서 말하는 좋은 삶/행복한 삶에 대한 생각은 많이 다르다. 레위기에서의 좋은 삶은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거룩한 삶은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습관의 산물이 아니라, 오히려 상상력의 산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끊임없이 습관을 기를 것을 강조하지만, 레위기는 끊임없이 상상할 것을 강조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방식으로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은 습관을 기를 것이다. 그들은 추수할 때 이삭을 많이 남겨놓는 습관을 기를 것이고, 도둑질 하지 않는 습관을 기를 것이고, 거짓말 하지 않는 습관을 기를 것이고, 거짓 맹세와 하나님 모독을 하지 않는 습관을 기를 것이고, 억압과 착취, 그리고 임금 체불을 하지 않는 습관을 기를 것이고, 장애인에 대하여 배려하는 습관을 기를 것이고, 불의하고 불공정한 재판을 하지 않는 습관을 기를 것이고, 비방과 원망을 하지 않는 습관, 그리고 원수를 사랑하는 습관을 기를 것이다.

 

그러나, 레위기를 따라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은 습관을 기르기 보다, 계속하여 상상할 것이다.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롭게 살아가는 삶에 대하여, 그리고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더 이상 아무런 걱정과 근심이 없고, 어떠한 욕심도 필요 없고, 절망과 눈물이 필요치 않는, 하나님 안에서의 생명력 넘치는 삶에 대하여 끊임없이 상상할 것이다.

 

무엇이 더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보듬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습관을 들이느라 고생하는 것보다, 상상력을 통해서 유토피아가 우리의 삶에 이루어지는, 그러한 거룩한 삶이 더 따뜻하고 창조적으로 보인다.

 

나는 이러한 상상력의 극치가 예수님의 산상수훈에 그대로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그 중에서 이 말씀을 보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로 더할 수 있겠느냐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6:25~34).

 

우리가 왜 가난한 자들을 위해 이삭을 남겨두지 못하는가? 우리는 왜 도둑질하고 거짓말을 하는가? 우리는 왜 거짓 맹세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가? 우리는 왜 다른 이들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임금체불을 하는가? 우리는 왜 장애인을 배려하지 못하는가? 우리는 왜 불의하고 불공정한 재판을 일삼는가? 우리는 왜 비방하고 원망하고 원수를 미워하는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내가 지금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아 에덴동산에서 살고 있다는, 바로 그것을 상상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하나님께 속한 자로, 거룩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상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나의 생명을 당신의 품 안에 감추어두신 것을 상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상상하지 못하고, 그저 두 눈으로 보이는 것들에만 현혹이 되어, 내 생명이 어떻게 될까봐, 전전긍긍하며, 자기의 생명을 자기가 어떻게 좀 살게 해보겠다고, 아등바등하며 욕심을 부리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전반에 흐르고 있으며, 레위기가 우리에게 강력하게 가르쳐 주고 있는 그 거룩한 상상력을 배우자. 그 상상력을 배우지 못한다면 우리에겐 레위기를 공부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레위기에서 상상력을 배운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속죄를 받아, 하나님에게 속한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염려하는 비참한 인간이 아닌, 우리의 생명을 당신 품에 감추어두신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누리며 사는, 좋은 인생, 행복한 삶을 사는 참으로 거룩한 사람이 될 것이다. 이러한 따뜻한 마음으로, 따뜻한 공동체를 세워 나가는 복된 인생이 되기를 소망한다. 이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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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