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0. 3. 11. 07:08

내어줌 – 종의 노래 4

(이사야 52:13-53:6)

 

이사야서에는 4개의 종의 노래가 있다. 종의 노래의 특징은 종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그 종의 생애를 통해 이스라엘의 꿈이 실현되며, 그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될 것 노래한다는 것이다. 종의 노래가 중요한 이유는 기독교에서 그 종을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이사야서에 나오는 4개의 종의 노래를 요약한 것이다.

 

종의 노래 1: 하나님의 종은 이스라엘과 이방에게 공의를 베풀 것이다 (42:1-4)

종의 노래 2: 하나님의 종은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사명과 이방에 빛을 비추어 구원을 베풀 사명을 위해 부름 받았다 (49:1-6)

종의 노래 3: 하나님은 그의 종에게 원수의 공격에 견딜 수 있는 지혜를 주실 것이다 (50:4-9)

종의 노래 4: 하나님의 종은 사람들의 죄 때문에 모욕과 멸시와 능욕, 고통을 받는 고난의 종이다 (52:13-53:12)

(출처: 대한성서공회 홈페이지)

 

종의 노래를 통해 보면, 기독교 신앙의 매우 독특한 특성을 발견한다. 한 사람에게 우리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 한 사람이 누구인가? 우리는 그 한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다.

 

이게 참 신비로운 거다. 성경은 아주 독특한 책이다. 우리가 대개 성경, 또는 성서라고 부르지만, 보수쪽에서 성경, 진보쪽에서는 성서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보수쪽에서는 하나님이라고 하고, 진보쪽에서는 하느님이라고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이런 것은 매우 말장난 같다. 성경의 풀 네임은 성경전서이다.

 

그런데, 성경은 그냥 보통 고전의 책이 아니다. 우리가 영어로 구약을 Old Testament라 하고, 신약을 New Testament라고 하는 것처럼, 성경은 궁극적으로 계약서이다. 법이다. 물론, 성령의 법이다.

 

이 계약이 성사되는 것은 믿음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고, 그것을 믿으면, 그것이 의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그대로 이루어진다.

 

네 번째 종의 노래인 오늘 말씀을 보면, 6절에 의 속성을 통해 우리 인간이 어떠한 본성을 지니고 있는지 말해준다. “우리는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6). 양은 자기의 먹이에 집중하느라 쉽게 길을 잃는 속성이 있다.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먹고사니즘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쉽게 길을 잃는가? 이게 나쁘다기보다, 우리의 연약함이다. 그래서 목자가 없으면, 살려고 먹으려다, 맹수에게 어처구니 없이 오히려 잡아 먹히는 꼴이 되고 만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 구원을 이룰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을 통하여 구원의 길을 여시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다.

 

네 번째 종의 노래는 이렇게 시작한다.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우리 나라 말로 형통하리니로 번역된 히브리어 야스킬이해하다, 성공하다, 지혜롭게 행하다, 헌신적으로 행동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우리 나라 말로 번역된, ‘형통하다라는 말을 보면서, ‘그래, 우리가 잘 믿으면, 우리의 삶의 형통할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의 말씀을 왜곡하여 자신에게 적용하는 전형적인 예이다.

 

형통하다라는 말보다, 더 정확한 뜻은 지혜롭게 행동하다이다. 종은 지혜롭게 행동함으로성공(형통)할 것이다. 여기서 지혜롭게 행동하다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뜻이다. 종의 형통은 순종이다. 여기서 순종은 내어줌을 뜻한다. 무엇에 대한 내어줌인가?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 자신을 내어줌을 뜻한다.

 

성경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에 내어줌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구약성경에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를 내어주는 이야기가 가득 차 있지만,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는 룻기서의 보아스 이야기이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의 지시에 따라 보아스와 가까워진다. 그런데, 보아스는 룻을 그냥 아무렇게나 아내로 맞이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온 룻을 향해 보아스는 이렇게 말한다. “참으로 나는 기업을 무를 자이나 기업 무를 자로서 나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있으니 이 밤에 여기서 머무르라 아침에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려 하면 좋으니 그가 그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이니라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리라 아침까지 누워 있을 지니라 하는지라”(3:12-13)

 

우리는 여기서 기업 무를 자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보아스를 본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를 내어주었을 때에, 거기에는 구원이 발생했다. 룻과 보아스의 사랑은 축복 속에 이루어졌고, 룻과 나오미는 죽음과 같은 가난에서 구제 받았으며, 그들을(그들의 혈통) 통하여 다윗 왕이 세상에 왔다. 예수 그리스도도 그들의 혈통을 통해서 이 땅에 왔다.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 자신을 내어준 신약의 대표적인 예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이다. 누가복음은 그 기사를 이렇게 전한다. 어느 날 가브리엘 천사가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타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으니라”(1:30, 31, 37).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을 때, 마리아는 그 말씀에 자기를 내어준다.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리나”(1:38).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를 내어드리는 것이다.

 

요즘, 신천지 이단이 판을 치고 있다. 그들이 어떤 술수를 써서 사람들을 꾀어내는지,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형편 없는 교리를 가지고 사람들의 마음을 요동시키는지, 등에 대한 것들은 이미 레위기 성경공부 마지막 시간에 나누었다.

(어제 그런 것들을 더 보충하여, 재촬영을 했다. 이제 바깥에 돌아다니기도 힘든 시기가 오는데, 시간내서 한 번 들어보시라)

 

이단과 정통을 구분짓는 요소들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내어줌의 문제이다. 이단은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들을 내어드리지 않는다. 그들은 그러는 척 할 뿐이지,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을 착취한다. 그래서 거기에는 생명과 구원이 있지 않고, 오직 죄악과 죽음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선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를 내어드린다. 그 말씀에 자기를 내어드려, 그 가운데서 생명과 구원이 창조된다.

 

내어줌’, 순종은 강요가 아니라 하나님이 뜻하신 구원의 궁극적인 신비이다. 우리는 그것을 종의 노래를 통해 배운다. 외모(외적인 것)가 화려한 사람이 생명과 구원을 가져오는 게 아니다. 세상은 그렇게 가르친다. 외적인 것이 화려해야 사람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그러나, 그것은 거짓 가르침이다. 외적인 것을 화려하게 하는 것은 자기 만족에 대한 추구이고, 다른 생명에 대한 착취의 결과일 뿐이다.

 

종의 모습은 이렇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 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2). 그러다 보니,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으며, 간고(질병)을 많이 겪었으며, 질고(슬픔)를 아는 자라”(3).

 

그런데, 4절에서 반전이 일어난다. “실로”, 이것은 히브리어 아켄을 번역한 것인데, ‘진실로, 틀림없이, 참으로라는 감탄사이다. 예상치 못한 국면으로 전개되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4절 이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어떠한 예상치 못한 국면을 우리에게 드러내신다. 우리의 운명이, 우리가 멸시하고 귀하게 여기지 아니한 바로 그 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5).

 

징계우리의 평화’, 그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우리는 나음을 얻었다는 것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종의 고난과 그것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유익이 무엇인지 드러나고 있다.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나음을 얻은 이유는 이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 자신을 내어주었기 때문이다. 종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내어줌, 순종은 누군가에게 강요하는 덕목이 아니다. 내가 아무리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세요!’라고 말해도, 순종을 강요하는 것처럼 들릴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가 믿음을 깨닫고 받는다면, 내어줌, 순종은 하나님의 구원의 신비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의 내어줌, 순종은 아주 작은 것이다. 절대로 세상에 생명을 가져다주거나 세상을 구원할 수 없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만이 세상에 생명을 가져다 주고, 구원을 가져다 준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예배하는 것이다. 그분에게 집중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예수를 조금이라도 흉내내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조금씩 조금씩 한 번 나 자신을 내어드려 보는 것이다.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도우신다. 그러면, 우리의 자그마한 내어줌, 순종은 크게는 아니라 할지라도, 자그마한 파장을 불러 올 수 있다. 그래서 우리의 내어줌, 순종을 통해서 생명과 구원이 창조된다면, 그것만큼 우리의 삶을 보람차고 기쁘게 하는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 말씀에 따라 지혜롭게 행하면, 우리의 인생 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의 모든 것도,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될 것이다. 정말로 인생이 형통하길 바라는 자, 하나님의 말씀에 예수 그리스도처럼 자기 자신을 내어드려 보라. 순종해 보라. 그 삶이 형통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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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