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서사의 붕괴, 신천지 천지, 그리고 기독교 신학의 재구성

 

클라이브 해밀턴(Clive Hamilton)은 그의 책 <인류세 Defiant Earth>에서 근대의 철학을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근대적 성격의 거대서사 지배질서와 권력관계 구조에 합법성을 부여했다면, 이제 인류세가 도래함으로써 합법성을 잃게 된다새로운 서사는 기득권을 위해 복무하지 않으며, 다만 그들의 완벽한 실패를 드러낸다”(132). 해밀턴이 주장하는 바는, 이 시대는 거대서사가 붕괴된 시대라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리오타르(J. F. Lyotard)를 통해 프랑스 68혁명 이후 세계가 포스트모던세계에 들어섰으며 거대서사가 무너지고 개인과 사소한 일상이 더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고선포된 사실이다.

 

거대서사(grand narratives)는 사람들을 모으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뿐 아니라 거대서사는 사람들을 통제하는 기능도 가진다. 그래서 위에서 해밀턴이 기술하고 있듯이, 거대서사는 지배층의 질서 유지를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 왔다. 서구 사회에서 거대서사의 중심은 기독교의 메시지였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왜 서구 사회에서 기독교의 붕괴가 그렇게 급속도로 이루어졌는지 궁금해한다.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거대서사가 더 이상 사람들에게 통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거대서사의 붕괴와 함께 중요해진 것은 개인과 사소한 일상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 이상 기독교의 거대서사 아래 자기 자신과 일상을 희생하며 교회에 모이지 않는다. 사람들이 가장 행복을 느끼는 시간은 더 이상 교회에 모여 거대서사의 메시지 아래 예배 드리고 기도하는 시간이 아니라 집에서 드라마 보며 쉬거나 밥 먹는 시간이다.

 

한국도 서구사회처럼 포스트모더니즘 사회로 진입한지 오래다. 한국 사회도 더 이상 종교적 거대서사나 민족적 거대서사가 통하지 않는 사회가 되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붕괴되고 있는 이유는 교회의 도덕적 타락이나 전도활동의 부재, 또는 사회적 영향력의 감소 때문이라기 보다는(물론 그러한 이유도 있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한국사회도 거대서사가 붕괴된 포스트모더니즘 사회로 깊숙이 진입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의아해하는 한 가지 현상이 더 있다. 왜 한국사회에 신천지 같은 이단이 판을 치는 지에 대한 궁금증이 그것이다.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그것도 21세기에 어떻게 전근대 사회에서나 있을 법한 집단 광기가 한 교주를 통해서, 그리고 한 이단 집단을 통해서 분출되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도 거대서사의 붕괴에서 비롯된다. 거대서사가 붕괴된 사회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불안과 두려움이 증가한다. 거대서사가 붕괴된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마치 삶의 목표를 상실한 것 같은 허탈한 마음을 갖는다. 그래서 그들은 오히려 더욱더 거대서사를 갈망한다. 이단 교주의 특징은 사람들의 그러한 마음을 잘 파악하여 그들에게 만족을 주는 거대서사를 만들어 낼 줄 안다는 것이다.

 

얼마전 사회적 무리를 일으켰던 신옥주의 타작 마당이나 피지섬으로의 집단 이주는 그가 얼마나 교묘하게 거대서사를 지어내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타작마당은 서로의 죄를 눈에 보이게 고백하고 속죄함으로써 눈에 보이는 거듭남을 안겨준다. 그리고 그렇게 속죄함을 받은 사람만이 에덴동산과 같은 피지섬의 집단 거주지로 들어갈 수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들에게 구원, 즉 거대서사는 실제적으로 작동하는 원리이다.

 

신천지는 그보다 더 큰 거대서사를 지어내어 사람들을 현혹시켰다. 그들은 성경의 요한계시록을 이용하여 거대서사를 만들어냈는데, 144,000명의 숫자와 이기는 자의 판타지를 결합하여 육체적현세영생의 거대서사를 전파했다. 거대서사의 붕괴로 인해 영적 허기를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은 신천지의 그러한 거대서사에서 영적 만족감을 채운다. 뭔가 자신의 조그마한 일상보다 큰 목적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한다는 것은 의외로 큰 희열과 만족을 주고, 무엇보다 초월감과 전능감을 가져다준다. 거대서사는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다.

 

기독교는 위기를 겪을 수밖에 없다. 기독교의 메시지는, 성경의 이야기는 주로 거대서사로 해석되고선포되어 왔기 때문이다. 거대서사의 붕괴는 기독교의 붕괴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현실 앞에서 클라이브 해밀턴은 매우 중요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던져준다. “포스트모더니즘 세계가 지식, 언어, 텍스트의 세계로 진입한다면, 인류세의 세계는 우리를 하고 지구로 되돌려 놓는다”(132). 거대서사를 붕괴시킨 포스트모더니즘 세계도 인류세 앞에서는 완전히 다른 사상의 체계를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거대서사가 붕괴된 이 시대에 기독교가 살아남으려면 그동안 거대서사로 해석하고 선포했던 성경의 내러티브를 어떻게 설득력 있게 전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런데, 계속 성경의 내러티브를 거대서사의 측면에서만 다룬다면 기독교가 살아남을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사람들은 아무리 거대서사를 새로운 방식으로 전해도, 거대서사 자체에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위에서 해밀턴이 주장하고 있는 대로, 기독교는 성경의 내러티브를 거대서사에서 하고 지구의 담론으로 전환해야 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그동안 기독교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늘만 쳐다보며 살도록 했다면, 이제는 사람들로 하여금 땅의 일(우리의 현실/특별히 기후변화와 불평등 문제)’에 관심을 갖도록 성경의 내러티브를 다시 해석하고 선포하는 일을 부지런히 해야 한다.

 

거대서사의 붕괴와 함께 기독교는 붕괴했고, 거대서사만을 진리로 외치던 교회의 설교자들은 자신들의 메시지가 더 이상 사람들에게 통하지 않는 현상을 보면서 당황해하고 있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시대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더 나아가 지금 우리가 들어선 세계는 인류세라는 것을 뼈저리게 인식하면서 기독교의 신학과 메시지를 재구성한다면, 거대서사가 붕괴되어 영적으로 허덕이는 이 시대 사람들에게 충분히 새로운 희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교회여,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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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