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다 새로우니2020. 5. 22. 05:25

아침묵상 시편 33편 - 새 노래

https://youtu.be/JajLVgcYe-k


오늘은 시편 33편을 묵상하면서 하루를 열어봅니다.

 

의와 정직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러므로 의로운 자와 정직한 자, 하나님의 성품을 간직한 자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간직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하다못해,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려고 노력하는 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인은 우리에게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주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우리가 하나님을 새 노래로 찬양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세 가지를 제시합니다. 이것은 매우 장엄하고, 위대한 통찰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때 유념해야 하는 아주 근본적인 찬양의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새 노래로 찬양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하여 시인은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누어서 서술하고 있는데요, 과거는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고, 현재는 하나님의 통치를 담고 있고, 미래는 하나님의 헤쎄드, 즉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창조신앙은 기독교인의 신앙에 있어 가장 기본이 되는 신앙입니다. 여기서 유념해야 할 것은 창조신앙, 또는 창조신학을 창조과학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주로 근본주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창조과학을 주장하고 있죠. 창조과학은 한 마디로, 성경의 진술을 가지고 과학을 풀어보려고 하는 것인데요, 주로 창세기에 나타나고 있는 창조설화를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이며, 지구의 나이를 6천년 정도로 보는 젊은 지구론을 주장합니다. 이는 지구의 나이가 45억년 정도 되었다고 하는 과학계의 주장과 대치를 이루는 주장입니다. 겉으로 보면, 창조과학을 주장하는 이들의 신앙이 무지 신실한 것 같으나, 한 번만 더 생각해 보면, 상식에서 벗어난 이야기를 할 뿐 아니라, 과학을 배척 함으로써 갈등을 조장하고, 기독교 신앙의 우경화를 기획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여 갈등을 조장하고 편 가르기 하는 일은 건전한 신앙이 아닙니다.

 

창조신앙, 또는 창조신학은 현대 과학과 적극적인 대화를 합니다. 신앙과 과학은 경쟁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협력 관계에 있는 것을 인정합니다. 신앙과 과학은 둘 다 진리를 추구한다는 공통분모가 있기 때문입니다. 창조신앙의 가장 중요한 원리는 모든 생명, 모든 만물을 존재 가능케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라는 고백입니다. 폴 틸리히 같은 위대한 신학자는 그래서 하나님을 아예 God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Ground of Being(존재의 근거)’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죠. 성경, 신앙의 용어를 철학, 문화의 용어로 바꾸어 세상과 적극적으로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소통하려고 했던 폴 틸리히의 노력은 현대 기독교인들이 따라야할 모범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현재적 통치를 말하고 있는데요, 이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당신의 창조물 안에서 역사(work)하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의 역사(history)는 창조주 하나님과 상관 없는 딴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역사는 창조주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현재적 통치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통치는 우리에게 구원으로 경험되기 때문에, 매일 발생하는 그 구원의 경험 속에서 우리는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죠.

 

시인은 미래의 소망을 노래합니다. 우리가 미래를 소망 가운데 노래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헤쎄드, 언약적 사랑 때문입니다. 20세기 최고의 신학자 중 한 명인, 그리고 현존하는 최고의 신학자로 불리는 몰트만이 쓴 20세기 최고의 신학서적 중 하나로 불리는 <희망의 신학>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최고의 수식어를 붙여서 화려하게 소개하는 이유는, 기독교인이라면 <희망의 신학>을 반드시 읽어봤으면 하는 바람 때문인데요, 아무튼, 그 책을 보면 몰트만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객관적인 시간이 진보를 이룩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활동이 미래를 만드는 것도 아니다. 미래는 그리스도 사건 자체의 내적인 필연성이다”(237).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냥 감정적인 사랑이 아니라, ‘언약적 사랑이라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감정적 사랑은 당연히 상대방이 나한테 하는 것 봐서 반응을 하는 사랑이겠죠. 상대방이 잘하면 나도 잘하고, 상대방이 못하면 나도 못하고, 대개 이것을 인과응보적 사랑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대게 이런 사랑을 하죠.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그러한 인과응보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헤쎄드입니다. 언약적 사랑입니다. 상대방의 행위에 따라서 달라지는 사랑이 아니라, 그것과 상관 없이 언약에 근거하여 신실하게 이루어지는 사랑입니다. 위에서 몰트만이 미래는 그리스도 사건 자체의 내적인 필연성이다라고 말할 때, 그리스도 사건은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에 근거한 사건이므로, 우리의 미래는 바로 언약적 사랑의 성취인 그리스도 사건에 그대로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미래는 희망 찬 것이죠. 우리 인간의 죄성과 연약함에 근거한 미래는 어둡지만, 우리의 미래는 그러한 것에 담보 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 안에 있기 때문에, 바로 신실하신 하나님 덕분에 우리의 미래는 소망으로 가득 찰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미래를 생각할 때,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죠.

 

창조신앙과 하나님의 현재적 통치,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 안에 있는 우리의 미래를 생각할 때, 우리는 소망과 기쁨 가운데, 하나님을 매일같이 새롭게 경험하며, 매일같이 새 노래로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아름답게 연주할지어다!” 우리가 신앙 안에 있다면, 시인이 선포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새 노래로, 날마다 소망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신실한 주님의 자녀가 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