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다 새로우니2020. 5. 29. 08:45

아침묵상 시편 38편 - 함구의 영성

https://youtu.be/6vDloOdTKWQ


오늘은 시편 38편을 묵상하면서 하루를 열어봅니다.

 

설상가상이라는 말이 있죠, ‘엎친데 덮친다는 말과 같은 뜻인데요, 어려운 일이 겹쳐서 오는 형편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런 일을 마주할 때면, 인생은 짓궂은 귀신의 장난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차마, 짓궂은 하나님의 장난이라고는 말하지 못하겠네요. , 알 수 없는 일이죠.

 

시편 38편의 시인이 지금 딱 그런 처지에 놓여 있는데요, 1절부터 10절까지의 내용을 보면, 시인은 지금 거반 죽을 병에 걸린 것 같습니다. 그 병 때문에 너무 괴로워하고 있는데요, 얼마나 괴로운 지,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픔 중에 다니나이다라고 고백하는데,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지경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1절부터 22절의 내용을 보면, 시인은 가까운 사람들을 잃었을 뿐 아니라, 원수들의 음모와 음해에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삼중고를 겪고 있는 것이죠.

 

시편 38편은 다윗의 고백이 아니라, 마치 욥의 고백처럼 느껴지는데요,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 보면, 고통을 대하는 결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욥기에서 보듯이, 욥도 병을 얻고, 가까운 사람들을 잃었죠. 특별히 가장 가까운 욥의 아내는 욥에게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저주의 말까지 듣습니다. 그리고 친구들이 찾아와 아픔을 같이 해주는 듯하였으나, 시간이 지나자 친구들은 욥을 몰아붙이며, 욥을 정죄합니다. 친구가 원수로 변한 것이죠.

 

시편 38편의 시인도 욥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시인도 병이 걸렸고, 가까운 사람들을 잃었고, 원수들의 조롱을 받습니다. 그런데, 욥과 시인에게는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습니다. 욥은 자신의 의로움을 결코 굽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정죄하는 원수 같은 친구들과 당당하게 변론을 펼칩니다. 욥의 원수 같은 친구 엘리바스, 빌닷, 소발과의 변론이 욥기서의 주된 내용이죠. 욥기서에는 아주 지루한 논쟁이 길게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욥과는 달리 자신의 의로움을 전혀 주장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처음부터 자신이 병이 걸린 이유는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욥과는 달리 원수들과 전혀 논쟁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조롱과 악한 일에 눈과 귀를 닫고, 입도 일체 열지를 않습니다. 무반응으로 대응합니다.

 

시편 38편은 사무엘하 16장에 나오는 다윗을 향한 시므이의 저주 일화를 생각나게 하는데요, 다윗이 셋째 아들 압살롬의 역모에 의해 예루살렘 왕궁을 떠나 피신을 갈 때, 사울 왕의 친족 중 한 사람인 시므이는 피난 가는다윗 왕을 향하여 돌을 던지며 저주의 말을 퍼붓습니다. 시므이의 저주를 듣다듣다 못참은 아비새 장군은 명령만 내려주시면 가서 시므이의 목을 베겠다고 합니다. 그때, 다윗 왕은 아비새와 휘하 장수들에게 이렇게 말하죠.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의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삼하 16:10-12).

 

여기에 나타나는 다윗 왕의 심정이 시편 38편에 고스란히 묻어납니다. 시인은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바라보려고 합니다. 시인은 자신이 이렇게 병든 것은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고백하는데요, 요즘 사람들이 바라보는 질병에 대한 태도와는 사뭇 다르죠. 요즘에 누가 병들었다고 그것이 자신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시인의 관점을 구시대적 유물로 폄하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발생하는 일을 너무도 작은 관점에서, 사소하고 사사롭게 바라보고 마는 시대에 살고 있는데요, 그렇게 작은 관점에서 어떠한 일을 바라보면 죄책감도 안 들고, 머리가 복잡해지지 않아 좋다는 생각을 갖게 될 지 모르지만, 그렇게 작은 관점에서만 문제를 바라보고 말면, 우리의 인간성은 성숙해지지 못할 가능성이 너무 큽니다. 다른 말로, 어떠한 일을 큰 관점에서 바라보지 못하고 작은 관점에서만 바라보게 되면, 결국 우리가 사는 사회는 정의와 도덕이 사라진, 매우 혼란스러운 사회가 되기 십상인 것이죠. 그런 점에서, 우리는 시인이 자신의 문제를 큰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는 삶의 자세를 반드시 배워야만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시인이 원수들의 음모와 악행을 향해서도 큰 관점에서 무대응, 함구의 정책을 쓰고 있는 것도 눈여겨봐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관용과 용서보다는 다툼과 투쟁이 너무도 많습니다. 한국 사회도 변호사가 많아지면서 점점 그러한 현상이 확산되고 있습니다만, 미국에서는 이미 다툼과 투쟁이 아주 합법적으로 생활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죠.

 

미국은 변호사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생활전반에 걸쳐 변호사의 도움을 아주 쉽게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변호사들은 아주 사소한 것까지도 법적 투쟁을 걸어, 의뢰인에게는 금전적 보상을 안겨주고, 자신은 수임료를 챙기죠. 생활의 모든 요소 하나하나가, 모두 법적 투쟁을 통한 돈벌이 수단으로 바뀐 지 오래입니다. 그래서 미국 사람들은 앞에서는 웃지만, 뒤에서는 소송을 걸죠. 이는 모두 자신의 삶에 벌어지는 일들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큰 관점으로 보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작은 관점에만 머물기 때문입니다. ‘가 삶의 중심이니, 세상의 중심, 신 같은 에게 해를 끼친 자는 결코 용서할 수 없는 것이죠.

 

함구의 영성. 억울하고 분한 상황 앞에서 입을 다무는 일.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죠. 인생의 모든 일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큰 관점에서 볼 줄 아는 사람만 가질 수 있는 영성입니다. 자기 자신의 자그마한 죄에도 민감하여 과감하게 자신의 죄를 고백할 줄 아는 사람, 무엇보다 먼저,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부끄러워할 줄 알며, 죄책감을 가질 줄 아는 영적 민감성을 지닌 사람, 그리고, 시인이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바라고, 하나님이 응답하실 것을 믿는 신실한 사람, 이런 사람이 아니라면 감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죠. 함구의 영성이라는 게 말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일에 입을 닫고 있으라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에는 시인이 보여주는 것처럼 함구의 영성이 있지만, 욥이 보여주는 것처럼 저항의 영성도 있습니다. 언제 입을 닫아야 하고, 언제 입을 열어야 하는 지 아는 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이겠지요. 함구의 영성을 가진 사람은 저항의 영성도 더불어 가지고 있을 겁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서 발생하는 모든 일을 큰 관점에서 바라볼 줄 아는 영성을 끊임없이 키워야 한다는 것이죠. 이러한 영성을 지닌 자의 간구는 너무도 간절하고, 너무도 절박하여, 하나님의 심장을 뛰게 할 것입니다. 그 순간, 구원이 임하는 것이겠죠. 그렇다면, 우리도 시인처럼 이렇게 고백해 볼까요?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21-22).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