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사색2011. 11. 30. 02:38

시편에는 전쟁과 관련된 용어가 많이 등장한다. 그것으로 미루어볼 때 이 시편은 전쟁 제의에서 낭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전쟁은 고대사회에서 일상이라고 불릴 수 있을 정도로 늘 사람들의 실생활과 부딪히는 문제였다. 전쟁에서 지고 이기고는 곧 자신들의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였기에 전쟁을 하기 전에 드리는 제의(예배)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을 것이다. 이것이 전쟁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시편이라도 그렇게 큰 문제는 없다. 어차피 인생은 전쟁과 같지 아니한가? 요즘 시대는 총성 없는 전쟁의 시대이다. 전쟁터에서 전쟁하는 것처럼 사는 현대인들에게 일상은 곧 전쟁이다. 진짜 전쟁이 아니더라도 집을 나서기 전 이 시편에 기대어 기도한다는 것은 큰 의미를 지닌다.

 

자기 중심적인 삶을 가르치는 현대 문명에서 사는 현대 기독교인들의 기도는 다분히 자기 중심적이다. 기도를 안 하는 사람이나 기도에 몰입하는 사람이나 모두 기도의 중심에는 자신 밖에 없다.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기도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이 시편의 시인은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기도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가르침을 준다.

 

우선 시인은 회중들이 왕을 향해 어떻게 중보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사람들의 마음이야 다 똑 같은 것 아니겠는가! 왕을 향해 중보한다는 것은 왕의 운명이 곧 자신들의 운명이라는 자각에서 비롯되었다. 왕이 이기면 자신들이 이기는 것이고, 왕이 지면 자신들이 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독특한 방식으로 담아낸다. 독특하다기보다 매우 이스라엘스럽다. 그냥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에 기대어, 그리고 성소, 즉 시온에 기대어 중보한다. 왜 이들은 여기에 기대어 기도하는가?

 

그 이유는 중보기도를 드린 후 진행되는 선언에서 볼 수 있다. 선언은 단연 구원의 성취가 담겨있다. 이 구원의 성취는 매우 확고하다. 전쟁에서의 승리는 싸워봐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이미 이겨놓은 당상이라는 뜻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들은 자기 자신의 능력에 기대어 기도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그리고 성소(시온)’에 기대어 기도했기 때문이다. 기도의 중심에 가 들어 있지 않고, ‘하나님이 들어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승리는 확고하다.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 하리로다.”

 

우리는 기도할 때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무엇에 기대어서, 그러한 것들을 하나님께서 더 확고하게 해 주실 것을 기도한다. 그러한 기도는 어떤 사람이 병거, 말을 의지하는기도에 불과하다. 병거와 말처럼 유한하고 종국에는 썩어 없어질 것에 기대어 기도하는 것만큼 허망한 일이 어디 있는가? 자기성취에 기대어 기도하는 자는 결국 성취한 것을 잃고 나면 허무와 절망에 빠질 뿐이다.

 

시인은 우리에게 자기성취가 아닌, 영원하신 하나님의 이름에 기대어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 이렇게 되면 자기성취가 잘 되든 잘 되지 않든, 즉 일이 잘 풀리든 잘 풀리지 않든 그것에 연연하지 않게 된다. 되어지는 일에서 성취와 승리를 만끽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서든 나와 함께 하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에게서만 성취와 승리를 취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그것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만약 되어지는 일에서 하나님의 승리를 찾았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분명 패배요 절망이다. 십자가 위에서 되어졌던 일은 죽음이었지만, 거기에 임했던 하나님의 은총은 분명 승리요 소망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편에서 보여주고 있는 시인의 제의적 기도는 우리에게 너무도 중요한 신앙의 지표를 준다. 집을 나서기 전 기도하는 자의 기도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정확한 가르침을 준다. 하나님의 이름에만 기대어 기도하라. 이미 우리의 일상은 그 안에서 무한한 성취를 이루었고 승리하였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일상에서 그것을 나의 것으로 삼기만 하면 된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