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1. 2. 2. 05:20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요

(고린도전서 8:1-13)

 

“이제 개신교라면 지긋지긋합니다!” 지난 주 인터넷 뉴스 매체를 달군 헤드라인이다. 광주 IEM 국제학교(IM 선교회) 발 바이러스 전파를 두고 한 일반 시민들의 반응이다. 그 사람들이 ‘지긋지긋하다’라고 말할 때, 저렇게 콕 찍어서 “이제 ‘개신교’라면 지긋지긋합니다”라고 말했을 리는 없다. 그냥 “이제 교회라면 지긋지긋합니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기자가 옮기면서, 교회 대신 ‘개신교’라는 단어를 넣었을 것이다. 이게 참 재밌는 현상인 거다. 예전 같으면, 그냥 ‘교회’, 또는 ‘기독교’라고 했을 텐데, 이제 아주 명시적으로 ‘개신교’라고 하는 이유는 기독교 내에 여러 종파가 있기 때문인데, 아마도 다른 종파(예를 들어 가톨릭)와의 구분을 두기 위해서 일 것이다.

 

개신교가 자꾸 바이러스 전파의 진원지가 되는 이유는 ‘친교문화’ 때문에 그렇다. 우리는 단순히 ‘친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신경에 명시하고 있듯이, ‘성도의 교제를 믿는다.’ ‘친교, 교제, 코이노니아’는 신앙의 원리 중 하나다. 그래서 교회에는 친교의 문화가 깊숙이 들어와 있다. 친교(교제, 코이노니아)는 좋은 것이다. 요즘 시대에 어디서 이러한 친교를 나눌 수 있겠는가. 같이 밥 먹고, 서로의 삶의 문제를 놓아두고 위로해 주고, 함께 기도하고, 이러는 것은 참 좋은 것이다. 그런데, 개신교인들은 이렇게 좋은 신앙의 원리가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고린도교회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발생했다. 문제를 일으키는 정황은 다르지만 문제의 성격은 같다. 고린도교회가 자리한 고린도라는 도시는 헬라도시였다. 헬라사회는 다신교 문화였기 때문에, 발달된 도시에는 여러 신전들이 있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옛날에는 종교행사를 중심으로 ‘feast(축제)가 열렸다. 지금처럼 먹을 것이 충분하지 않았던 그 당시, 종교행사를 중심으로 열리는 축제는 모든 이들에게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신에게 바쳐진 음식은 종교행사가 끝난 뒤 그 축제에 참여한 사람들의 몫이었다. 그리고 그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지금 막 제사를 드린 그 신을 섬긴다는 뜻이기도 했다. (우리 기독교인들도 그렇게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다. 그것을 먹는다는 뜻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뜻이다.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 있다면, 다른 이방신들은 우리가 제물로 드린 음식을 신이 먹지만, 기독교에서는 우리가 신의 몸을 먹는다.)

 

고린도교회가 처한 현실은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어떻게 해야하는가’를 놓아두고 고민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지금 현재 우리의 시대에 그리스도인이 이 문제를 놓아두고 고민하는 사람은 없다. 고대사회처럼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제사를 드리는 종교도 없을 뿐더러, 우리는 그러한 문화를 가진 곳에 살고 있지도 않다. 그리고 설사 그렇더라도, 우리는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아주 맛있게 먹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도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전달하고 있는 ‘지식’을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4절).

 

이런 것을 보면, 우리는 분명히 ‘지식의 진보’를 이루었다. 우리는 더 이상 우상의 제물을 꺼림칙하게 생각하거나 ‘우상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아주 놀라운 진보이다. 그러나 고린도교회 당시의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그런 문화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여전히 우상은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 교인 중에는 ‘복음’을 들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긴 했지만, 여전히 그들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습관대로 우상의 제물을 먹을 때 우상에게 바쳐진 것으로 인식하면서 그 음식에 깃든 우상의 힘을 의식하며 두려운 마음으로 그 음식을 먹는 교인들이 있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 서로 다른 태도를 지닌 사람들의 갈등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갈등이 발생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지식(그노스)’ 때문이었다. 이 지식은 다른 지식이 아니라 신앙의 지식이었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5-6절).

 

우리가 지금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영적 지식’이지만, 그 당시 이것은 최근에 드러난 아주 신비한 지식이었다. 지금 바울이 다시 진술한 ‘지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드러난 하늘의 지식이었다. ‘우리에겐 한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고, 모든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한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고 또한 만물이 그에게서 났다’는 이 지식은 현재 고린도 지방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자칭 신과 주님이라고 불리는 우상에 대한 숭배행위를 일소에 부정하고 무너뜨리는 엄청난 ‘하늘의 지식’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지식(그노스)’을 알게 된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에게서 발생했다. 이 지식을 알고 난 후의 그들의 행동이 문제였다. 그 문제점은 1절과 2절에서 지적된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1, 2절). 위에서 진술한, 그 하늘의 지식을 알게 된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교만해졌다. 교만의 특징은 자기를 높게 여기고 다른 이들을 낮추어 보는 것이다. 고린도교인들 중에는 ‘우상의 제물에 관한 지식’을 알고 나서 교만해진 사람들이 있었다. 본인이 무슨 위대한 사람이 된 것처럼 행동을 했고, ‘우상의 제물에 관한 지식’을 아직도 모르고 우상의 제물 앞에서 쩔쩔매는 사람들을 깔봤다.

 

여기서 우리는 그 당시 교만했던 고린도교회 교인들과 요즘 문제를 일으키는 한국 교회의 교인들 사이의 공통점을 발견한다. ‘우상의 제물에 관한 지식’을 안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우쭐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그들은 그 지식을 가지고 있음으로 해서, ‘구원받았다’는 자기 확신 안에 거했다. 이것은 그 당시 굉장히 유행하던 ‘영지주의적인 생각’이다. 영지주의의 특징 중 하나는 ‘그노스(특별한 영적인 지식)’를 통해서 구원받는다는 생각을 가진다는 것이다. 어떤 지식을 소유함으로 인해 그들은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을 했다. 교만한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가졌던 영적 지식(그노스), 그래서 그들이 구원받았다고 확신하게 만들었던 그 영적 지식이 바로 6절에서 진술되고 있는 그 지식이다.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6절).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것은 분명하다. “아니다! 그 지식(그노스)을 가지고 있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그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구원받았다고 확신하며, 다른 이들을 배려하지 않는 것은 구원받은 사람의 행동이 아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지식(그노스)’이 아니라 ‘사랑(카리타스)’이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2절). 이것은 매우 매우 중요한 기독교 신앙의 원리이다.

 

우리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가졌던 ‘지식’, 그러나 그것을 모든 사람들이 갖지 못하고 일부 사람들만 가졌던 것보다 훨씬 더 진보했다. 이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우상의 제물에 관한 지식”을 잘 알고 있다. 우상의 제물을 먹으며 그 우상을 두려워하며 먹는 그리스도인은 한 명도 없다. 엄청난 지식의 진보를 이룬 것이다. 그러나, 요즘 보여지는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면, 지식은 진보했으나, 사랑이 없는 것은 2000년 전 교만했던 고린도교회 교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지식은 진보했으나, 사랑의 진보는 없는 것이다.

 

‘우상의 제물에 관한 지식’으로 발생한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놓은 사도 바울의 해법은 ‘사랑’이다. ‘지식(그노스)’이 왜 매력적이냐면, 어떤 지식을 갖게 되면 그 지식으로 인하여 자유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억압받던 옛날 부모님들이 그렇게 자식을 가르치려고 온갖 노력을 다 했던 이유가 뭔가. 몰라서 억압당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그렇다. 중세 때 일반 교인들이 교회와 사제들로부터 억압당한 이유가 무엇인가? 모든 성경과 예배는 라틴어로 되어 있었는데, 라틴어를 몰라서 그랬다. 그래서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면서 행했던 일차적인 작업은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것이었다.

 

‘우상의 제물에 관한 지식’을 가진 사람들은 자유를 얻었다. 그러나 그 지식이 없는 사람들은 아직 우상의 제물로부터 벗어나지 못해, 그 우상의 제물을 먹으며 두려운 마음에 사로 잡혀 있었다. 그들에겐 자유함이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지식’을 통하여 자유를 얻는 이들이 아직 자유함이 없는 이들을 시험에 들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에는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깊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이 문제를 풀 수 있을까?

 

사도 바울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놓은 해결책은 ‘사랑’이다. 지식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지만, 사랑은 덕을 세운다. 덕을 세운다는 말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 놓는다는 뜻이다. 지식은 사람들을 분열시키지만, 사랑은 분열된 사람도 다시 이어 놓는다. ‘우상의 제물에 관한 지식’은 믿음이 약한 자들을 시험에 들게 하여 교회공동체(그리스도의 몸)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즉 분열을 일으키게 만들지만, 사랑은 그 지식과 상관없이, 믿음이 약한 자들도 교회공동체(그리스도의 몸) 안에 머물게 한다.

 

사도 바울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사랑을 말하는 것은 ‘복음’ 때문이다.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11절).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자를 위해서만 죽으신 게 아니라 모든 이들을 위해서 죽으셨다. 모든 만물이 다 그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죽음은 몇 사람만을 위한 죽음이 아니라 만유를 위한 죽음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이들을 ‘형제자매’라고 부르고, 그리고 진실로 그들을 형제자매로 대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를 위한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없었다면, 이러한 생각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종교의 자유라는 법을 들이대며, 종교차별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세속적인 법에서 찾겠다는 뜻 밖에 안 된다. 세속적인 법을 통해서 차별을 받는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자신의 자유를 스스로 제한시킬 수 있어야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다. 자유를 제한시키는 근본적인 이유는 사랑 때문이다. 우리에게 예배할 자유가 있고, 모일 자유가 있고, 함께 밥 먹을 자유가 있고, 모든 게 다 자유롭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바이러스가 퍼져 이웃에게 피해가 갈 수 있는 상황이라면, 그 자유를 포기할 줄 아는 게 사랑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우리(믿음 있는 자들, 교회 안에 있는 자들) 뿐 아니라 그들(믿음이 없는 자, 교회 바깥에 있는 자들)을 위해서도 십자가에 달리셨기 때문이다. 그 십자가 사랑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나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요즘 교회가 일으키는 사회적 문제를 바라보면, ‘2천년이 지나서 지식의 진보는 이룬 것 같은데, 아직까지 사랑의 진보는 한 발자국도 이루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쓸쓸하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까지 든다. 우리는 여전히 성경에서 그렇게 배격하고 경고하던 ‘영지주의적 신앙’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지식’이 구원한다는 생각,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지식의 산물인 ‘백신’이 이 팬데믹으로부터 구원해 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백신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을 보라. 백신을 빼돌리고 일부러 훼손하는 일 뿐만 아니라, 백신 생산과 구매를 놓아두고 각 나라 간에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 백신이라고 하는 지식에 더해 사랑이 없으면, 결국 우리는 백신을 맞아서 ‘구원받기’ 이전에, 백신을 둘러싼 전쟁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고 죽음에 처해질 것이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사랑의 진보를 이루지 못할까? 지식이 구원하는 게 아니라고, 그렇게 경고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여전히 지식의 진보를 이루는 일에만 몰두할까? 구원하는 것은 결국 사랑이라고, 그렇게 성경은 외치고 있는데, 왜 우리는 그 외침에 귀를 기울이지 못할까? 우리는 결국 지식이 없어서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없어서 구원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문제를 해결하고, 구원을 바란다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덕을 세워주는, 즉 사람과 사람 사이를 따스하게 이어주는 사랑의 진보를 배워야 한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