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키즘]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보다 좀 더 급진적인 질문은 ‘국가는 필요한가?’이다. 근대(modernity)의 특징 중 하나는 ‘국가’의 실체가 또렷해지고, 국가가 모든 권력을 거머쥐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세속 권력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어거스틴이 서로마제국의 몰락을 목격하며 그의 저서 <하나님의 도성>에서 지상의 도성과 하나님의 도성을 나누고 이 세상을 이원론적으로 사유한 이래로 국가는 지상의 도성을 대표하고 교회는 하나님의 도성을 대표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인간의 역사가 ‘근대’로 들어서기 전까지 인류의 역사는, 또는 기독교의 역사는 ‘지상의 도성’과 ‘하나님의 도성’ 간의 힘의 대결이었다고 말해도 틀리지 않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가 근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지상의 도성’이 ‘하나님의 도성’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주 현실적으로 나타났는데, 하나님의 도성인 교회가 이제 공공영역에서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 사태로부터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국가(세속적 힘)가 교회(영적인 힘)를 잠식해 들어가기 시작한 것은 분명 종교개혁 때부터였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진영 간의 합의한 아우크스부르크 평화협정(1555년)에서 ‘Cuius regio, eius religio(whose realm, their religion, 각자 자신의 통치하는 영역에서 자신의 종교를 정한다/군주의 종교가 곧 그 지역의 종교이다)의 원칙에 따라 세속 권력이 ‘종교’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교회가 국가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교회(종교/가톨릭이냐, 아니면 개신교냐)를 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이후 교회의 권력은 계속 쇠퇴하였고, 국가의 권력은 점점 커져만 갔다. 그러나 급기야 ‘근대국가’가 들어서면서 힘의 균형은 완전히 깨지게 되었다. 더 이상 국가 권력에 필적할 만한 권력을 지닌 집단이 역사에서 사라진 것이다. 근대 국가는 압도적인 힘으로 ‘폭력’을 독점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토마스 홉스 같은 경우는 국가를 전설적인 괴물 ‘리바이어던’에 비유하기도 했고, 마키아벨리는 국가 권력의 무제약성을 논하기도 했다. 이제 국가는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운명적인 힘, 폭력이 된 듯하다.

 

‘국가란 무엇인가?’를 묻는 사람들은 국가를 긍정하며 국가가 올바른 기능을 수행하도록 이끄는 사유를 한다. 그러나 더 급진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 ‘국가는 필요한가?’를 묻는 사람들은 국가를 부정하고, 국가는 없어져야 할 것으로 사유함과 동시에 국가가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스스로 삶을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한다. 바로 이렇게 국가가 없는 세상을 사유하는 사람들을 일컬어 ‘아나키스트’라고 부르고, 그들의 생각을 ‘아나키즘’이라고 부른다. 아나키즘의 어원은 그리스어 ‘아나르코스’이다. 이는 ‘선장이 없는 배의 선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선장이 없는 배의 선원, 당연히 배가 산으로 갈 위험이 있지만,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국가의 필요성을 물었다.

 

아나키즘은 오래된 미래이다. 한국에 아나키즘이 서구로부터 수입된 것은 1910년대 이후이지만, 동양사상은 이미 오래전부터 아나키즘을 품고 있었다. 묵가나 도가 사상에서 그 원류를 찾아볼 수 있는데, 예로부터 사상가들은, 또는 일반 민중들은 국가의 필요성을 질문했고,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국가’라는 것이 삶을 오히려 괴롭힐 뿐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것으로 파악하여 거부해 왔다. 물론, 국가를 거부하는 생각은 ‘불온한 생각’으로 여겨져 국가 권력으로부터 무수한 핍박을 받아왔지만 국가의 존재에 대한 거부는 지금도 끊이지 않고 사람들 사이에 퍼져 있다.

 

서구에서 아나키즘이라는 사상이 처음 등장한 것은 1793년 윌리엄 고드윈(William Godwin)의 저서 <정치적 정의와 그것이 보편적 미덕과 행복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고찰>에서부터 이다. 그 이후 ‘아나키즘, 또는 아나키스트’라는 용어를 세상에 널리 알린 인물은 프랑스의 사회주의 사상가 삐에르 프루동(Pierre J. Proudhon)이다. 그는 <소유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통해 아나키스트 용어를 매우 긍정적인 용어로 바꾸어 놓았으며, 아나키즘이 널리 사유되도록 기반을 놓았다. 아나키즘은 유럽과 러시아, 그리고 미국 등지에서 꽃을 피웠는데, 그 중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인물들은 프루동 이후에 등장한 미하일 바쿠닌(Mikhail Bakunin)과 표트르 크로포트킨(Peter Kropotkin)이다. 바쿠닌은 <국가주의와 아나키>를 통해서, 크로포트킨은 <빵의 쟁취>와 <상호부조론>을 통해서 각자가 가진 아나키즘에 대한 생각을 펼쳤다. 또한 미국의 머레이 북친 (Murray Bookchin)도 기억해야 한다. 그는 ‘사회생태론’을 주창하며 아나키즘을 더욱 심화시켜 사유했다. 최근에는 미국의 양심, 노엄 촘스키(Noam Chomsky)를 빼놓을 수 없다.

 

한국에서도 일제의 침략과 맞물려 독립운동이 발생하면서 ‘아나키즘’이 꽃을 피웠는데, 일제감정기 당시 대표적인 아나키스트로 신채호 선생이 있다. 그는 김원봉이 이끌던 아나키스트 단체 의열단의 부탁을 받고 1923년에 <조선혁명선언>이라는 책을 집필하여 식민지의 처참한 현실을 알리며 거기에 맞서 어떠한 나라를 세워 나가야 할지에 대하여 고민한다. (여담이지만, 초호화 캐스팅으로 성공을 거둔 영화 ‘암살’이 바로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나키즘은 혼란한 한국의 일제침략기에 독립운동을 하며 어떠한 나라를 세워나가야 할지 고민하는 사상가들이나 문이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아나키즘의 사상을 바탕으로 실제로 ‘이상촌’을 건설하려 했던 인물 중 김좌진 장군이 대표적이다. 일제 강점기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에서 벌어진 문학계의 ‘아나-볼 논쟁(아나키스트와 볼셰비키의 논쟁)’도 빼놓을 수 없는 아나키즘 논쟁이다.

 

‘국가 없는 삶은 가능할까?’ 현재 국가의 존재를 공기처럼 너무도 당연한 존재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 질문은 ‘부모 없는 삶은 가능할까?’ 또는 기독교인이라면 ‘신 없는 삶은 가능할까?’처럼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엄청난 질문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사실, 특별히 기독교인에게는 ‘국가’라는 개념은 생소한 개념이어야 한다. (물론 현실은 이와 반대이지만.) 구약성경은 근본적으로 ‘국가’의 존재를 부정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사무엘에게 가서 ‘(왕으로 대표되는) 국가’를 세워 달라고 요청했을 때 사무엘은 ‘국가’의 존재를 부정한다. 그리고 사무엘은 국가가 그들에게 자유를 주지 않고 오히려 폭력을 가져올 거라는 경고를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열왕기상하의 이야기는 ‘국가’로 인하여 고통당하다 결국 멸망하고 마는 이스라엘의 역사이다. 그렇게 성경은 근본적으로 국가의 존재를 부정한다.

 

신약성경도 마찬가지다. 예수의 복음은 근본적으로 국가(국가에서 확장된 제국)에 대한 거부이다. 국가에 대한 거부는 예수의 이 말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그리고 예수의 복음은 근본적으로 이 땅 위에서 ‘국가’ 없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잘 먹고 잘사는 법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이 다음 세상의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사는 이 현세의 세상에서 ‘국가’ 없이, 국가의 폭력을 당하지 않으면서, 국가의 폭력에 희생자가 되지 않으면서 어떻게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에 대한 ‘복음’이다. (하나님 나라를 이런 관점에서 보지 못하고 죽은 후에나 도달할 수 있는 유토피아로 생각하며 이 땅에서 고통만 당하고 그 고통의 근원에 저항하지 못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불행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사실, 기독교는 생득적으로 ‘아나키즘’이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생득적으로 ‘아나키스트’들이다.

 

잔인한 생존 경쟁으로 내몰리고, 국가의 강력한 통제 아래서 국가 폭력의 희생자로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아나키즘이 전해주는 전복적인 생각들은 이 시대의 어려움을 넘어서는데 큰 지혜로 다가온다. 특별히 아나키즘이 말하는 ‘직접 행동의 습관’, 즉 ‘우리’와 관련된 결정을 내리는 권한을 ‘그들국가/권력자들, 자본가들)’로부터 되찾아오는 습관을 형성하는 일은 너무도 중요하다. 또한 생태계의 위기 앞에서 아나키즘이 지향하는 ‘작은 공동체’를 이루어 스스로 자급하는 사회구조를 통해 국가와 자본의 집중화가 망쳐 놓은 이 세상의 생태계를 복원하는 일은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장 급한대로, ‘국가란 무엇인가’를 물으며, 국가가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살리는 일에 더 힘을 쏟도록 길을 제시하는 동시에, 장기적으로는 ‘국가는 필요한가’라는 급진적 질문을 통해 국가 없는 세상을 꿈꾸며 ‘작은 공동체’를 이루어 서로가 서로를 돕고 사는 생태적 지구공동체를 세워나가는 일도 해야 할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