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1. 2. 7. 17:39

하나님의 존재의 크기와 우리의 존재의 크기

(시편 147:1-11)

 

외할아버지께서 내리신 우리집 가훈은 이렇다. “적극신앙 / 성실근면 / 평화위주 / 순종효도”. 여기에 ‘적극신앙’이라는 것이 없었다면, 이것이 기독교 집안에 내린 가훈인지, 아니면 일반 집안의 가훈인지 분간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외갓집이 유서 깊은 유교 집안이라 우리 집안의 기독교는 ‘유교적 기독교’였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지금은 할아버지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신 지 오래되었고, 아버지 대의 목사님들도 거의 은퇴를 하신 시점이라, 우리 집안의 기독교는 예전보다 유교적 색채가 많이 없어진 것이 사실이다. 이제 3대째 자녀들이 일선에서 한창 목회를 하고 있는 시대이고, 유교문화보다는 서구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아 서구적인 기독교의 색채가 많이 들어와 있다.

 

유교적 색채가 워낙 강했던 터라, 우리 집안에는 샤머니즘적인 기독교의 색체는 거의 없다. 물론 한국 기독교의 4대 부흥사 중 하나로 추앙받고 있는 이용도 목사와의 인연 때문에 ‘부흥사 기질’을 가지고 있는 면이 있지만, 그래도 대체적으로 유교적인 기독교 가풍에 의해서 집안의 목회자들이 모두 점잖은 편이다.

 

순수한 기독교는 없다. C. S 루이스가 <순전한 기독교 Mere Christianity>에서 기독교의 여러 전통이 있지만 그 가운데서 공통적인 신앙의 원리가 무엇인지를 변증하기는 했지만,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기독교는 없다. 어떤 토양에 복음이 전해졌는지에 따라서 기독교 신앙의 모양은 조금씩 다르다. 집안 내에서도 각 가정마다 신앙의 모양이 다르다. 친형 가정의 신앙의 모양과 우리 가정의 신앙의 모양도 차이가 난다. 심지어, 나와 우리 집사람의 신앙의 모양도 차이가 있다. 하물며, 한 교회를 섬기고 있는 우리들의 신앙의 모양도 각기 다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다양한 신앙의 모양을 갖는 것은 이상한 게 아니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오히려 축복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신앙이란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생명 현상도 마찬가지다. 생명이라는 것이 한 육체 안에 들어가면 그 육체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난다. 내 안에서 발생하고 있는 생명 현상과 내 자녀 안에서 발생하고 있는 생명 현상은 같지 않다. 아주 다르다. 그래서 우리는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배울 수 있는 것이다. 각 사람에게서 발생하는 생명 현상이 다르다는 것은 축복이다. 우리는 나와는 다른 상대방 안에서 발생하는 생명 현상을 통해서 생명의 넓이와 깊이를 배운다. 우리는 각자 생명을 받았지만, 모든 생명을 누리는 것은 아니다. 다만, 주어진 생명을 통해서, 그리고 이웃들의 생명을 통해서 생명을 조금 맛볼 뿐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우리가 우리의 모습을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본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생명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고백하는 기독교인들이 해야 할 일은 생명을 경외하는 것이다. 생명의 깊이와 넓이 앞에서, 아주 조그마한 생명 밖에 경험하지 못하는 존재로서 생명을 경외하는 일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위대한 일이다. 생명의 경외는 사랑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믿음 소망 사랑 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생명 전체를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명의 일부분만 경험하는 연약한 존재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다.

 

생명을 경외하지 않는 이들의 특징은 자신이 모든 생명을 알고 모든 생명을 경험해 본 것처럼, 그래서 자신이 생명의 주인이 된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이 가장 손쉽게 하는 일은 ‘남을 판단하는 일’이다. 자기가 경험하는 생명이 아주아주 일부 밖에 안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아주 무례하게 행동하기 일쑤다. 그런 사람들은 사람을 ‘차별’한다. 차별은 마치 자신이 생명의 주인인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의 대표 행동이다.

 

최근 AP 뉴스에 의하면, 디즈니가 그동안 인종차별 문제에 둔감했다는 비판을 받고, 작년에 미국 전역에서 일어난 인종차별적인 과거를 청산하는 운동의 일환으로 놀이기구 테마를 바꾸었다고 한다. 디즈니에 가면 Splash Mountain이라는 놀이기구가 있는데, 이 테마가 인종차별적 요소가 많이 들어 있는 영화 ‘Song of the South’에서 가져온 것인데, 이 놀이기구를 다시 재구성해서, 흑인 여성이 주연을 한 에니매이션 ‘the Princess and the Frog’를 테마로 바꾸기로 했다고 한다.

 

백인들이 인종차별을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이 경험하는 생명 현상이 다른 인종들이 경험하는 생명 현상보다 우위에 있다고 잘못 생각하기 때문이다. 백인이라는 바디(몸)에 들어가 있는 생명과 흑인이나 아시아인의 바디(몸)에 들어가 있는 생명이 다른가? 그렇게 생각하는 백인은 오히려 생명의 경험을 매우 좁게 하는 것일 뿐이다. 나는 미국에 와서 제일 불편한 단어가 'people of color(유색인종)'라는 말이다. 한국에 살면서 나는 한 번도 내가 '유색인종'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미국에 살면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냥 사람이다. 인간이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나를 '유색인종(people of color)'이라고 한다. 영어 자체에 인종차별이 들어 있다.

 

인종차별뿐 아니라, 성차별(젠더의 차별), 아동차별, 노인차별, 장애인 차별, 등 우리 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각종 차별들은 상대방 안에 들어가 있는 생명을 무시하는 행위이고, 마치 자신이 상대방보다 생명을 더 잘 경험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생명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다.

 

생명이라는 것이 그렇다. 그 생명을 몸에 품고 있는 내가 그 생명을 어떻게 향유하느냐에 따라서 생명의 가치가 달라진다. 주어진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고 풍성한 생명의 삶을 살면 그 사람이 보여주는 생명의 가치는 매우 크다. 그러나, 주어진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지 못하고 생명을 남용하면 생명은 매우 추악해 보인다.

 

부모가 자식에게 집착하는 이유는 부모는 자식을 통해 자신의 생명을 연장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이 잘 되면 자신의 영혼이 잘 된 것처럼 마음이 기쁘고, 자식이 좀 잘 되지 못한 것 같으면 자신의 영혼이 망친 것처럼 우울해 한다. 생명이라는 것으로 모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는 학생은 우울증이 심하다. 우울증은 병리적으로 일어나기도 하지만 사회적으로 일어나기도 한다. 병리적 우울증은 적당한 호르몬을 맞으면 극복이 된다(물론 극복이 쉽지 않고 안 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나 사회적 우울증은 호르몬을 맞는다고 되는 게 아니라 사회적 관계가 건강해져야 한다. 요즘,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사회적 우울증이 심하다. 사회로부터 왕따를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항간에는 기독교인들이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더니, 바로 그 차별금지법이 세워지지 않는 것 때문에 사회적으로 차별 받게 생겼다고 걱정한다.

 

가뜩이나 코로나 블루 때문에 우울한데, 사회적 우울증까지 겹쳐 기독교인들의 건강 상태가 매우 걱정된다. (반대로, 기독교인들이 사회적 우울증을 유발하여 사람들을 더 우울하게 만들고 있다는 비판도 받는다.)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인데, 사회적 우울증으로 인하여 생명이 축소되는 경험을 한다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기독교가 사회적 우울증을 유발한다는 것도 매우 불행한 일이다.) 기독교인들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릇된 신앙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을 잘못 배워서 그렇다. 기독교인들이 자주 범하는 잘못은 자신의 생명을 다른 사람들의 생명보다 우위에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구원을 잘못 이해하기 때문이고, 죄의 개념을 잘못 이해하기 때문이다.

 

가령, 기독교인은 자신이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았고 자기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구원 받은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차등을 둔다. 이러한 영적 차별은 생명 차별로 이어지는데, 예수를 믿지 않아 구원 받지 못한 이들을 자신보다 못한 존재로 인식한다. 그렇다 보니, 자칭 구원 받은 이들은 다른 생명을 차별하고, 판단하고, 무시하며, 상대방의 생명의 소중함을 인식하지 못한다. ‘너는 죄인이야. 너는 구원 받아야 할 불쌍한 존재야.’

 

또한 자기 자신을 매우 특별한 존재로 여기게 되다 보니, 자신에게는 어떠한 악한 일이 발생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특별히, 요즘 전염병과 관련해서 자신들은 전염병에 안 걸릴거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요즘 물의를 일으킨 선교단체의 선교사가 설교시간에 한 말이다. 그리고 어느 대형교회에서는 바이러스로부터 지켜준다는 ‘anti-covid 19 카드’를 팔려다 세간의 비난을 받고 철회한 일도 발생했다. 주님께서 지켜주실 거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믿음이 아니라 미신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기독교는 어떤 토양에 복음이 뿌려졌는지에 따라서 그 모양이 다르다. 유교적 토양에 뿌려지면 유교적 기독교가 자라고, 샤머니즘적 토양에 뿌려지면 샤머니즘 기독교가 자란다. 기복적 토양에 뿌려지면 기복적 기독교가 자라고, 냉소적 토양에 뿌려지면 냉소적인 기독교가 자란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모두 우리의 존재에 하나님의 존재를 맞추는 일과 같다. 그렇다 보니, 하나님의 존재가 우리의 존재의 크기만큼 밖에 안 자라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신앙의 왜곡현상이 일어난다. 그러한 기독교의 왜곡현상이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언제나 거꾸로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존재 안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 안에서 우리의 존재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그러한 생각의 방식을 시편에서 배운다. 그래서 성경이 중요한 것이다. 성경이 왜 중요하냐면, 무엇보다, 성경에 등장하는 신앙의 선조들은 자신의 존재 안에서 하나님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들여다보았다. 이것을 배우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편의 시인은 첫 구절부터 먼저 “할렐루야!”를 외치며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한다.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선함이여 찬송하는 일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1절).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은 선한 것이고, 그 일은 아름답고 마땅한 일이다. 그런데, 자신의 존재 안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을 선하거나 마땅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존재가 생각하고 계획한 대로 어떠한 일이 진행되어야만 그때서야 비로소 하나님을 찬양한다. 이것은 자기 중심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편의 시인은 정반대이다. 자신의 상황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존재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은 선한 일이고 마땅한 일이다.

 

이어지는 시인의 사유(생각의 방식)를 보라.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우시며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를 모으시며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도다”(2-3절). 모든 일의 주어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세우시고, 하나님이 흩어진 자를 모으시고, 하나님이 고치시며, 하나님이 싸매주신다. 사람의 일 뿐 아니라, 자연의 일까지도 모두 하나님이 주어이다. “그가 구름으로 하늘을 덮으시며 땅을 위하여 비를 준비하시며 산에 풀이 자라게 하시며 들짐승과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도다”(8-9절).

 

구름이 하늘을 덮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가? 비가 내릴 때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가? 산에 풀이 난 것을 바라보며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가? 우리는 들짐승과 우는 까마귀를 보며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가? 우리는 아마도 그럴 겨를이 없다고, 그런 것을 보면서 하나님을 생각하거나 찬양을 돌린 적이 한 번도 없을 것이다. 왜? 우리는 우리의 존재 안에서 하나님을 생각할 뿐이지, 하나님의 존재 안에서 우리의 존재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앙은 왜 나 자신의 존재의 크기까지만 성장하고 마는가? 왜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풍성하게,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의 크기를 벗어나서 훨씬 더 풍성하게 생명을 누리지 못하는가? 왜 우리는 조그마한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생명의 크기만큼만 생명을 누리고 마는가? 왜 한 발자국도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는가?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의 크기 안에서 우리의 존재를 생각하지 못하고, 우리의 이 조그마한 존재의 크기 안에 하나님을 가두어 두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는 말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10-11절). 자신의 말의 힘 안에서만 생명을 이야기 하는 자, 자신의 다리의 억셈 안에서만 생명을 이야기 하는 자, 곧 자신의 존재의 크기 안에서만 하나님을 생각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 즉 하나님의 존재의 크기 안에서 자기 자신을 생각할 줄 아는 자를 기뻐하신다.

 

우리 인간의 크기 안에서 지금 돌아가는 세상을 보면 답답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 자신의 크기 안에서 생명을 극복해 보려고 이런저런 안간힘을 쓴다. 그렇다 보니 위에서 말한 이런저런 미신 같은 일을 행하게 되는 것이다. 미신은 모두 자신의 존재의 크기 안에서 생명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인간적인 노력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의 크기 안에서 우리의 인생을 바라다볼 줄 안다면, 우리는 시편의 시인처럼 우리에게 발생하고 있는 일들에 압도당하지 않고, 그것을 하나님의 크기 안에서 보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오히려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시인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것을 가르쳐 준다. “우리 주는 위대하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시도다. 여호와께서는 겸손한 자들을 붙드시고 악인들은 땅에 엎드러뜨리시는도다”(5-6절). 우리의 존재의 크기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은 크신 분이다. 그는 위대하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지혜가 무궁하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크기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자(겸손한 자)들을 붙들어 주시지만, 자신의 그 조그마한 크기 안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바라보는 자(악인들)들을 땅에 엎드러뜨리신다.

 

자신의 크기 안에서 생명을 살아가니까 남을 차별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크기 안에서 생명을 살아가니까 물의를 일으키는 것이다. 자신의 크기 안에서 생명을 살아가니까 두려운 거다. “우리 주는 위대하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시도다.” 이 아름다운 말씀이 우리 귀에 들린다면, 우리는 당장 우리 존재의 크기 안에 하나님을 가두어 두려는 악한 일을 버리고, 하나님의 존재의 크기 안에서 우리와 세상을 바라보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우리, 악하게 살거나 미련하게 살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날마다 위대하고 능력이 많으시고 지혜가 무궁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을 찬양하며 아름다운 인생을 살자. 할렐루야!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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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안녕하세요, 이용도 목사 전집을 새롭게 기획, 출간 중인 도서출판 주의 것의 정재헌 형제입니다. 이용도 목사님에 관한 내용을 검색하던 중 목사님의 귀한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의 할아버님께서 이용도 목사님과의 '인연'이 있었다고 말씀해주셨는데, 참으로 궁금한 부분입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언제 전화나(010-4429-5578) 아니면 이메일(yesupeople@naver.com)로 한번 말씀을 들을 수 있을는지요. 이용도 목사의 자료를 계속 모아서 현재 새롭게 전집을 출간해가고 있는데, 귀한 내용이 있을 듯하여 이렇게 불쑥 연락드렸습니다. 편하신 때에 답장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재헌 형제 올림

    2021.02.09 18:47 [ ADDR : EDIT/ DEL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