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1. 7. 26. 13:33

신인류의 사랑 (Love of New Human Race)

(에베소서 4:1-16)

 

바울은 1장부터 3장에 걸쳐 신학적인, 이론적인,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를 했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십자가, 부활, 승천)이 가지고 있는 영적인 의미를 설명했다. 그것은 계시로 주어진 것이기에 믿음으로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은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난 사건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사랑(믿음)으로 받을 수밖에 없다. 에베소 교회는 이방인 교회였다. 이방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 유대인들과 함께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새로운 인류가 되었다는 것은 복음 그 자체이다. 그리고 새로운 인류 간의 교제는 필연적으로 교회를 낳는다. 그러므로 교회는 새로운 인류의 공동체이다.

 

한국에는 이런 농담이 있다. 남자와 남자 군인과 여자 셋이 걸어가면, ‘남자 둘, 여자 한 명이 걸어간다’라고 말하지 않고, ‘남자와 여자와 군인’이 걸어간다’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군인은 남자와 여자에 끼지 못하는 제 3의 존재로 인식된다는 뜻이다. 에베소서의 신학에 의하면, 이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의 있다. 남자와 여자와 그리스도인. 기독교가 탄생하고 나서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매우 유별난 부류로 여겨졌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라벨이 따로 붙었다. 로마인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은 ‘무신론자’라고 불렸다.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의 신들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처음 기독교 신앙이 생겨난 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기도 하고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지금은 종교와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는 다원주의 사회이지만, 그 당시만 해도 다른 사람들과 이질적인 종교와 사상을 갖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기의 목숨을 내어놓아야 하는,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것은 영광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 당시 신앙 때문에 ‘순교’ 당하는 것은 굉장히 고귀한(noble)한 일이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그러한 인식이 별로 없어서 ‘순교’가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 잘 알지 못한다.

 

에베소서 4장부터 바울의 권면이 시작되는데, 권면은 단순히 해도 되고 안 되도 되는 옵션(option)이 아니다. 지금은 개인의 자유가 가장 큰 미덕인 시대이고, ‘자유’라고 하는 개념이 매우 사사화되어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라는 개념으로 그 의미가 매우 축소되었지만, 신학적 설명 다음에 나오는 권면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옵션’이라기 보다는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눈에 보이지 않는 것)가 실제로 이루어지게(눈에 보이게) 하는 결정적인 실천을 말한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사역을 통하여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막혀 있던 담을 허물어 그 둘이 ‘하나’되게 하셨다는 복음을 선포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눈으로 보는 게 아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놓여 있던 담은 눈에 보이는 게 아니다. 그것은 영적인 담이다. 그런데, 바울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 담이 허물어져서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은 ‘하나’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면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이 에베소 교회를 이루어서 해야 할 일은 그들이 실제로 ‘하나’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럴 때, 바울이 선포한 복음의 진리가 확증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권면’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옵션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를 알게 된 이들이 필연적으로 들어서는 삶의 모습인 것이다.

 

여기서 다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하나 됨’은 그들의 노력으로 생성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선포했듯이, ‘하나 됨’은 그들이 노력해서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은혜로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지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3절에서 “힘써 지키라”라는 말은 헬라어 ‘테레인’을 옮긴 말인데, 이것은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또는 파괴되지 않도록 지키는 것’을 말한다. ‘하나 됨’은 이미 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서로 받아들이고 사랑의 교제를 나눔으로써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하면서 하나님께 받은 ‘하나 됨’을 지켜야 한다.

 

이것을 권면하면서 바울은 매우 위트 있는 이미지를 사용한다. 1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주 안에서 갇혀 있다”라고 말하는데, 감옥에 갇힌 죄수에게 채워진 차꼬를 3절의 “평화의 매는 줄”과 대비를 이루어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어떻게 ‘하나 됨’을 지켜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감옥에 갇힌 바울은 쇠로 된 차꼬(매는 줄)를 발목에 차고 감옥에 매여 있지만,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평화로 된 차꼬(매는 줄)를 발목에 차고 ‘하나 됨’에 매여 있어야 한다.

 

바울은 하나 됨을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한 덕목들 네 가지를 말한다. 겸손, 온유, 오래 참음, 그리고 사랑이 그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덕목들에 대하여 하도 많이 들어서 이제는 이러한 덕목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식상해 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덕목들을 갖추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쉬운 일이 아니다. 겸손(humility)은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의 가치를 인정하는 태도’인데, 이 용어는 유대교와 기독교 전통에만 등장하는 독특한 용어이다(NIB, 61). 우리는 보통 “I am better than you!”의 마음을 갖는다. 그리고 ‘경쟁’이라는 가치 아래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일상에서 이런 가치 가운데 살아가면서 겸손의 덕목을 갖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You are better than me.” 참 어려운 과제다.

 

겸손뿐 아니라, 온유, 오래 참음이라는 덕목들도 모두 마찬가지다. 실제 삶에서 실행하기 쉬운 덕목들이 아니다. 그것을 바울도 몰랐을 리 없다. 그래서 그는 매우 특별한 단어를 통해서 그러한 덕목들을 지킬 것을 주문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3절 마지막에 등장하는 동사 “힘써 지키라(스푸타존테스)”이다. ‘스푸타존테스’는 ‘온갖 노력을 다 한다’는 뜻의 아주 절박한 표현이다. 자식이 병에 걸리면 그 병을 고쳐주려고 부모가 절박한 심정으로 온갖 노력을 다하는 것 같은 상황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즉, ‘하나 됨을 지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하나 됨’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4절에서 6절에 걸쳐 말하고 있듯이,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고, 주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 됨을 지키는 것은 단순히 ‘교회에서 서로 싸우지 말고 잘 지내시오’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님은 한 분 밖에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신앙고백이다. 이 우주에 삼위일체 하나님 외에 다른 권세가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귀신(어떤 영적 존재)도 국가도 자본(돈)도, 그 어느 것도 권세를 지니고 있지 않다.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권세를 지니고 계시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만 두려워 한다. 귀신도 국가도 자본도 그 어느 것도 두려워 하지 않는다.” 이렇게 기독교 신앙은 매우 전복적이다.

 

본문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7절에서 10절 말씀이다. 바울은 8절에서 시편의 말씀을 인용하여 그리스도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은사’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바울은 시편 68편의 말씀을 약간 다르게 인용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은사’를 주신 분이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어떻게 다르게 인용했는지를 말하는 것은 조금 복잡한 논의이기 때문에 생략한다. 그것을 자세히 알지 못해도 된다. 다만, 시편 68편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은사를 주어 교회에 사역자들을 세우셨다는 것이다.

 

본문에 보면 ‘올라가셨다’, ‘내리셨다’, 이런 용어를 통해서 바울이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승천이다. 바울은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교회에 일꾼들을 주셨음 강조하고 있다. 사역자들은 단지 교회가 세운 사람들이 아니라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주신 ‘선물들’이다. 이것은 우리가 다시 한 번 환기시켜야 하는 중요한 말씀이다. 이것을 통해서 교회 구성원들이 무슨 목표를 가지고 교회를 세워 나가야 하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12절 이하에 보면, 주님께서 친히 사역자들을 교회에 선물로 주신 이유는 세 가지인데, 첫번째 것은 두 번째 것을 위해서 이고, 두 번째 것은 세 번째 것을 위해서이다. 사역자들을 세우진 첫 번째 이유는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기’ 위함이다. 온전하게 한다는 것은 적절하게 구비시키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위해 구비시키는가? 그게 두 번째 이유인데, 사역자들은 말씀 사역과 훈련을 통해서 성도들을 적절하게 구비시켜 봉사의 일을 하게 하는 것이다. 봉사(디아코니아)는 섬기는 일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섬기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는 먼저 섬겨주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속성(nature)이다. 섬김을 잃은 그리스도인은 짠 맛을 잃은 소금과 같아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섬김을 잃지 않도록 각별히 노력해야 한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왜 섬기는가? 그것이 세 번째 이유인데, 그리스도인은 말씀 사역과 훈련을 통해서 적절히 구비되어 봉사(섬김)의 일을 하는데, 그 섬김의 일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운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냥, 교회를 세우는 것을 말하는가? 교회의 몸집을 크게 불리는 것, 우리가 흔히 ‘부흥’이라는 것을 하는 것인가? 교회가 외형적으로 성장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운다고 말하는 것인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운다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주는 실마리는 13, 14절이 가지고 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13, 14절). 우리가 말씀으로 훈련 받아 봉사(섬김)의 일을 하는 이유는 어린 아이와 대조되는 ‘온전한 사람’, ‘성숙한 사람’에 도달하는 것이다. 바울은 온전한 사람, 성숙한 사람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쉽게 말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 우리가 교회를 다니는 이유, 우리가 말씀으로 훈련 받는 이유, 그래서 우리가 봉사의 일을 하는 이유는 서로가 서로를 세워 주어서,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영향력을 주어서, 그리스도께서 온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온전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의 장성한(성숙한/mature) 분량에 도달하는 것은 외적 성장이 아니라 내적 성숙이다. 어린 아이처럼 철부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성숙한 어른이 되는 것,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시대에 내적 성숙을 이룬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각 시대마다 내적 성숙을 이룬 그리스도인들은 그 시대의 가장 긴급한 문제들에 대하여 남몰라라 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헌신했다. 대표적인 사람이 존 웨슬리 목사님과 Methodist들이다. 존 웨슬리 목사님은 1703년에 태어나서 1791년에 세상을 떠났다. 전형적인 18세기 인물이다. 18세기 영국에서 발생했던 가장 큰 문제는 도시 노동자들의 빈곤 문제였다. 산업혁명이 일어난 영국은 농부들이 일터를 잃고 도시로 몰려와 도시 노동자로 전락을 하게 되는데, 도시에 몰려든 농부들은 늘 빈곤에 시달렸다. 그 당시에는 사회보장 제도나 노동자 법이 발달된 시대도 아니었기 때문에 도시 노동자들은 여러가지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었다. 바로 그들을 보듬은 사람이 존 웨슬리 목사님과 Methodist들이다.

 

우리가 사는 시대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기후위기 또는 기후재앙이다. 이 모든 것이 돈에 대한 탐욕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얼마전 가디언 신문에서 지금 가장 유능한 변호사가 필요한 것이 지구라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래서 뜻있는 국제 변호사들이 지구를 변호하고, 지구에 가하는 범죄를 법으로 정하여 처벌 받게 하기 위해 법제정을 촉구하는 성명을 내고 있다는 기사였다. 또 AP 뉴스에서 북극곰이 기후변화 때문에 어떻게 멸종해 가는지 말하면서, 인간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는 것을 들었다. “We are next!” 정말 섬뜩한 말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인류이다. 바울은 15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새로운 인류, 신인류는 무엇을 하든지 오직 사랑 안에서 한다.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간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우리는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늘 고민해야 한다. 사랑 안에서 서로를 섬김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간다는 것을 교회의 몸집을 불리는 것으로 축소시켜 생각하고 만다면, 우리는 말씀을 왜곡하는 것이고, 중요한 것을 놓치는 것이고, 성숙한 인간, 내적 성숙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냥 어린 아이의 상태에 머물고 마는, 철부지 교회가 되는 것이다.

 

신인류의 사랑은 어떻게 세상을 향하여 섬김으로 나타나야 할까? 어렵지 않다.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한 사람이 되었던 신앙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껴안는 것이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섬김의 일을 하는 것이다. 기후재앙을 만드는 일에 저항하며, 즉, 자본의 탐욕을 물리치며, 인간 생명의 젖줄인 지구를 지켜내는 것이 이 시대 신인류의 사랑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우리는 어떠한 섬김으로 기후재앙으로부터 지구의 모든 생명을 지켜낼 것인가,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 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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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