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1. 8. 31. 12:10

낙심하지 않으려면

(고린도후서 4:1-18)

 

1. 요즘엔 개인주의적 문화가 하도 강해서, ‘보냄을 받았다’라든지, ‘부르심을 받았다’라는 말이 굉장히 구시대적인 말로 들린다. 자기의 인생은 자기가 주체적으로 결정해서 사는 것이지, 누군가에게 보냄을 받거나, 부름을 받는 것에 대해서 요즘 사람들은 굉장한 거부감을 가진다. 그렇다 보니, 현대인들은 ‘낙심’하는 일도 많다. 본인이 생각했던 대로 일이 잘 안 풀리면, 이내 풀이 죽고 낙심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못난 존재라는 자책감에 빠져 우울해 한다.

 

2. 요즘 한국 군대 문화를 보면 비인간적이었던 문화가 많이 바뀌고 군인들의 인권이 매우 존중 받는 군대문화가 정착되어 가는 것 같다. 참 좋은 일이다. 요즘 군인들에게 ‘나라의 부름을 받고 군대에 입대 했다’는 의식을 요구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 같다. 그래서 한국도 미국처럼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바꾸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모든 것이 개인의 자유, 개인중심적으로 돌아가는 사회가 심화되다 보니, 이제 한국도 전통적인 공동체성을 찾아보기 힘든 사회가 되었다.

 

3. “우리 시대의 소명은 자유주의를 증진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미국에 주어진 사명입니다. 우리가 중요시하는 자유는 모든 인류에게 권리와 능력이 되는 것임을 믿습니다.” 이것은 2003년 9월 6일,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조지 W. 부시의 연설이다. 미국의 정치이념은 이른바 ‘자유주의 패권(liberal hegemony)’의 추구다. 이는 “미국의 자유주의가 표적으로 삼은 나라들의 민족주의, 종교를 이길 수 있다”는 이상에 근거한다. 자유주의는 민족주의나 종교를 넘어서 그러한 것들 위에 군림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4. 우리가 사는 시대는 두 개의 ‘주의/ism’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자유주의(liberalism)와 자본주의(capitalism). 삶의 선택(조건)이 모두 자유와 자본을 바탕으로 돌아간다. 자기가 선택하되, 자본이 선택의 기준이 된다. 그래서 미국은 군대를 가는 것도 모병제로서 자기가 선택해서 가는 것이고, 군대를 가면 물질적 보상이 크기 때문에 그러한 선택을 하게 된다. 한국도 그러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 현재 한국은 징병제이지만, 그래서 자신이 선택해서 군대를 가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그렇다 보니, 군인들의 정신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자기의 선택이 아닌 불가항력적인 힘에 의해서 군인이 된 것이 전혀 마음에 와 닿지 않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사회에 살고 있으면서 군대를 강제로 간다는 것은 굉장히 모순된 삶의 모습인 것이다. 이는 자유주의 사회에 살고 있으면서 결혼하고 싶지 않은 배우자와 강제 결혼해서 사는 것과 같은 것이다.

 

5. 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모든 삶의 하부구조를 이루고 있는 사회에서 ‘보냄을 받은 삶’, ‘부르심을 받은 삶’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굉장히 어렵다. 이는 기독교가 점점 우리 사회에서 매력을 잃어가는 이유 중 하나이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기독교는 자유주의나 자본주의와 별로 썩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해서, 기독교는 개인의 선택보다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은혜가, 자본(돈)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중심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자유주의 사회,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게 쉽지 않다. 부대낌이 없다면, 기독교 신앙을 진지하게 살아내고 있지 못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6. 교회는 단순히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다. 내가 선택해서, 내 마음대로, 나오고 싶으면 나오고 나오기 싫으면 안 나오는, 그런 모임이 아니다. 교회를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매우 자유주의적인 생각인 것이다. 교회는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모임’이다. 교회(에클레시아)는 ‘부름을 받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교회는 기본적으로 관계적이다. 부르신 이가 있고, 부름에 응답한 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름을 받은 이들 간의 교제(fellowship)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의 구성원은 서로를 보면서 이렇게 인사해야 한다. “당신도 부름을 받았습니까? 저도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우리 부름을 받고 여기에 왔으니,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끼리 잘 해봅시다!”

 

7. 교회는 기본적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모임이면서 동시에 보냄을 받은 이들의 모임이다. 부르신 이께서는 동시에 우리를 보내신다. 부르심은 소명(calling)이라고 하고, 보내심은 사명(sending out/mission)이라고 한다. 우리는 소명과 사명의 사람들이다. 교회의 역동성은 바로 여기에 달려 있다. 교회에 모인 이들이 소명 받은 이들과 사명 받은 이들로 가득 찬다면 교회의 역동성은 아무도 못 말린다. 마치, 나라의 부름을 받고 왔다고 굳게 믿는 군인들이 가득한 군대와 마지 못해 군대에 끌려온 군인들이 가득한 군대의 사기가 다른 것과 같다.

 

8.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3대 논문 중 하나인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그리스도인은 전적으로 자유로운 만물의 주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다.

그리스도인은 전적으로 충실한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되어 있다.

 

이는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세속적인 ‘자유주의’ 이념과 다르다. 자유주의 이념을 따라사는 요즘 사람들을 보면, 마치 ‘자유’에 예속되어 있는 듯하다. 그래서 요즘 우리는 극단적인 개인주의를 목격하고, 극단적인 이기주의를 경험한다. 그 누구도 ‘나’를 건들 수 없다. 내가 하고싶은 대로 하고 사는 것이 최고의 이념이고, 이것을 벗어나면 살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요즘 시대의 자유는 자신이 만물의 주인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다는 것만 천명할 뿐이지, 충실한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되어 있다는 ‘공동체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9. 우리가 사는 시대에 사람들은 아주 쉽게 ‘낙심’할 수밖에 없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낙심한다.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한 책임으로 짊어지게 되는 것은 ‘낙심’ 뿐이다. 또한 자기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사나워진다. ‘자기’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자기가 살기 위해서 남을 짓밟고 죽이는 일은 너무 쉽게 발생한다. 삶이 전쟁터 그 자체다. 그래서 요즘 우리가 사는 시대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보고 싶은 ‘섬’이 있는 게 아니라, 그저 ‘경쟁’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요즘 사회는 우울한 사회다.

 

10. 고린도후서 4장에서 가장 많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어구는 “낙심하지 아니하고”이다. 우리는 수도 없이 낙심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데, 바울은 어떻게 ‘낙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가? 사실 바울은 낙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고린도교회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그를 낙심시키기에 충분했다. 죽을 고생을 해서 복음을 전했고 교회를 세웠는데, 자신의 사도직을 의심하고, 자신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고린도교회는 복음을 위한 자신의 수고를 알아주지 않았다. 얼마나 낙심되었겠나.

 

11.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선포한다.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낙심’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엥카케오’라고 하고, 영어로는 ‘lose heart’라고 한다. ‘엥카케오’는 ‘엔(~안에)’이라는 전치사와 ‘카코스(나쁜)’라는 낱말이 합해진 말인데, 이는, 마음이 나쁜 상태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이것만큼 살면서 두렵고 힘든 것도 없다. 사실, 우리가 살면서 마음만 늘 좋은 상태를 유지해도 어떠한 상황이 오든지 모든 것을 잘 이겨내고 극복할 수 있다. 그래서 잠언서도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그런데, 마음이 나쁜 상태로 들어가면, 아무리 상황이 좋아도 우리의 인생은 비극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12. AP News의 보도에 의하면 지금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어린이들이 엄청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이런 기사였다.

 

UNICEF says aid concerns are growing in Afghanistan.

UN agency for children expects the humanitarian situation in the country to worsen due to a severe drought, the onset of winter, and the Coronavirus pandemic.

The agency says 10 million children in Afghanistan already survive off humanitarian assistance and around a million are expected to suffer from life-threatening malnutrition this year.

It says some 4.2 million children, including 2.2 million girls, are out of school.

 

정치적 소용돌이 외에, 극심한 가뭄과 겨울철 진입, 그리고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 등의 삼중고로 인하여 1000만명의 아이들이 인도주의적 지원에 의해 연명하고 있고, 약 100만명의 아이들이 생명을 위협하는 영양실조로 고통받을 것이고, 약 440만 명의 아이들이 학교를 떠났다고 한다.

 

13. 풍요로운 미국의 주민들과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의 주민들 중 누가 더 낙심할까? 우리도 낙심하고 그들도 낙심하겠지만, 낙심의 이유가 정말 다를 것이다. 우리는 마음대로 하고 살다가(자유주의) 삶에 제약이 오니 그렇지 못하는 것 때문에 낙심하고, 그들은 생명 자체가 너무 위협을 받아서 낙심할 것이다. 낙심의 차원이 좀 다르다. 아마도 아프가니스탄 주민들이 우리들이 낙심하는 것에 대한 이유를 들으면 기가 막힐지 모르겠다. 낙심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미국에서는 약물(drug) 소비만 늘어가고, 아프가니스탄 주민들은 그러한 것조차 없어 그냥 굳건하게 맨정신으로 참고 있을 것이다.

 

14. 우리가 복음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낙심이 난무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를 선포해야 한다. 그런데, 그러한 선포는 단순히 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바울이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라고 선포할 수 있는 이유는 말 그대로 ‘복음’ 때문이다. 우선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7절).

 

15. 문맥에 따르면, ‘이 보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다. 바울은 그 보배가 질그릇 같은 자신들의 마음에 있다고 고백한다. 사실 여기에는 우리 시대가 최고의 가치로 삶고 있는 ‘개인(자유)’과 ‘자본’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우리 마음에 ‘나’나 ‘자본’이 들어 있는 게 아니라 ‘빛’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 빛을 품고 있는 자들이 행하게 되는 것은 다음처럼 바울이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10-11절).

 

16. 바울은 자신이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사용된 ‘죽음’이라는 헬라어는 완전히 죽은 상태인 ‘싸나토스’가 아니라 ‘죽어 가는 상태’를 나타내는 ‘네크로시스’이다. 이 표현은 굉장히 중요한 표현인데, 이 표현은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유대 당국에게 ‘넘겨주는’ 상황을 표현한 것이다. 예수님은 죽음에 넘겨졌다. 예수님의 죽음으로의 넘겨짐은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다 주시는 구원 사건이 되었다. 이처럼, 바울은 예수님이 죽음에 넘겨져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것처럼, 자신들도 죽음에 넘겨져 생명을 주는 일을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바울은 12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17. 이것은 ‘자기(개인/자유)’와 ‘자본’으로 꽉 차 있는 요즘 우리들의 삶과 너무도 다른 삶이다. 자기 뜻대로 안 되고, 돈을 벌지 못하면 쉽게 낙심하게 되는 요즘 사람들의 삶과는 달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다른 이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죽음에 넘겨주는 삶을 살기에, 사실 낙심할 겨를이 없다. 우리가 낙심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진 삶’, 즉 복음의 삶을 살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 될 것이다.

 

18. 여기서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낙심하지 않는 이유”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16절).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겉사람’과 ‘속사람’에 대한 이분법은 플라톤을 중심으로 한 헬라 철학/신앙이 말하고 있는 ‘영육 이원론’과는 다르다. 영육 이원론은 육체는 악하고 영은 선하기 때문에 악한 육체를 벗어나 영의 세계로 가야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지만, ‘겉사람’과 ‘속사람’의 구분은 시간을 어떠한 관점에서 보는냐의 문제이다.

 

19. 겉사람의 관점은 현세적 차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말한다. 현세적 차원에서 보면 우리의 겉사람은 늙고 병들고 죽는다. 그게 끝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현세적 차원에서 우리의 삶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 차원에서 바라볼 것을 말하고 있다. 바울이 낙심하지 않는 이유는 종말론적 차원에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종말’은 하나님의 창조가 완성을 이루는 시간이다. 그때는 모든 것이 새로워지고, 모든 것이 아름다움의 끝에 도달한다. 겉으로 보면(보이는 것에 의하면) 우리가 늙어가고 병들고 죽어가는 것 같지만, 속으로 보면(보이지 않는 것에 의하면) 우리는 그와 반대로 새로워지고 아름다워지고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20. 우리는 왜 낙심하는가? 우리는 왜 마음을 나쁜 상태로 몰아넣고 있는가? 개인과자본에 집중하게 만드는 체제는 끊임없이 낙심을 만들어 내고, 끊임없이 사람들의 마음을 나쁜 상태로 몰아넣는다. 그래야 그러한 사람들의 불안심리를 이용하여 이익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낙심하고 있으니, 마음이 나쁜 상태로 들어가고 있으니, 요즘 사람들의 삶이 기쁠 리 없다. 현대인들은 자기 마음대로 소비할 수 있을 때 기쁨을 느낄 뿐이다. 그래서 한동안 마음대로 소비를 못하다가 마음대로 소비하게 되는 현상을 ‘보복소비(revenge consumption)’라고 한다. 별말이 다 있다. 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용어이다.

21. 낙심하기 쉽고, 마음을 나쁜 상태로 몰아넣기 쉬운 이 시대에 낙심하지 않으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좀 더 복음에 집중해야 한다. 우리는 주님께 부르심을 받았다는 소명의식과 주님께 보냄을 받았다는 사명의식을 잃지 말아야 한다. 우리에게는 부르신 이와 보내신 이가 있기 때문에 일이 좀 우리의 마음처럼 잘 되지 않더라도 그렇게 낙심할 필요가 없다. 일이 잘 안 되면 우리를 부르시고 보내신 이께서 속상해 하실 일이지, 우리가 속상할 것은 없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부르시고 보내신 이의 뜻대로 예수의 죽음을 짊어지고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죽음에 넘겨주는 삶을 성실하게 살면 된다. 그러면 모든 것을 우리를 부르시고 보내신 이께서 돌봐주실 것이다. 이 얼마나 진정으로 자유한 삶인가.

 

22. 또한 답답한 현실만 바라보게 하는 이 땅의 시간에서 벗어나, 우리가 하나님의 시간, 즉 종말론적 시간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늙고 병들어 죽어가는 중이 아니라 더 새로워지고 아름다워지고 완성되어 간다는 것을 생각하며 낙심이 아니라 소망 가운데 살아갈 것이다. 한 마디로, 낙심하지 않으려면, 부르심을 받고, 보냄을 받은 자 답게, 복음에 붙들려 살면 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히 ‘낙심’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우리, 다시 복음을 믿음으로 굳게 붙들고, 나쁜 상태에 빠져 있는 마음을 좋은 상태로 구원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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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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