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1. 9. 8. 01:27

그리스도인의 갈망

(고린도후서 5:1-21)

 

시편 37편 4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참 따스한 말씀이다. 마음에 간절한 소원이 있는 사람일수록 이 말씀이 마음에 깊이 다가올 것이다. 우리는 모두 마음의 소원을 가지고 산다. 마음의 소원이 있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다. 힘든 삶이지만, 우리가 그래도 이렇게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마음의 소원이 있기 때문이다. 그 마음의 소원이 무엇이든, 그 소원이 이루어지길 기도한다.

 

그런데 시편 기자는 마음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그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라’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런 것을 보면, 우리가 소원하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달성할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대개 우리는 우리가 무엇인가 마음의 소원을 성취하면 자신의 노력으로 그렇게 된 거라고 생각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경쟁 또는 공정이라고 부른다. 우리 시대에 차별과 인간에 대한 무시(갑질)가 난무하는 이유는 마음의 소원이 성취된 것을 자신의 노력으로 된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반대로, 실의와 절망이 가득한 이유는 마음의 소원이 성취되지 못했을 때, 자신이 못난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자책감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가 사는 시대에 통용되는 상식과 매우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마음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당연히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을 해야 할 것이나, 그 마음의 소원을 이루는 결정적 요인은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에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기뻐하라!’ 이 명령문을 앞에 놓아두고 잠시 묵상해 본다. 하나님을 기뻐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을까?

 

어거스틴은 <고백록Confession>에서 이런 고백을 하면서 자신의 신앙 여정을 풀어간다. 당신은 우리 인간의 마음을 움직여 당신을 찬양하고 즐기게 하십니다. 당신은 우리를 당신의 향해서 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안식할 때까지 편안하지 않습니다.”(고백록, 선한용 역, 45쪽) 시편 기자가 말하는 “하나님을 기뻐하라”는 어거스틴이 말하는 “당신을 향하여”와 같은 말이다. 기뻐한다는 것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그 대상을 향한 ‘방향성’과 ‘욕망’을 동시에 표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볼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으며, 올바른 것을 욕망하고 있는가?”

 

바울은 2절에서 이런 말을 한다.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를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간절히 사모하다’를 두 자로 줄이면 ‘갈망’이다. 바울의 갈망은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며, 무엇을 욕망해야 하는 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안겨준다. 바울이 아주 멋진 말로 비유하고 있는데, 그가 그토록 갈망하는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란 ‘부활’을 말한다. 사실 우리는 ‘부활’이라는 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지만 그것이 가진 의미는 잘 알지 못한다.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을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은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 즉 ‘부활’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다.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다는 것은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의 생명이 무엇인지 완전히 알게 되는 것은 종말의 때이다. 기독교인의 믿음과 소망은 여기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이 온전히 드러나는 종말을 향해 가고 있다. 그래서 기독교인에게 종말은 파국이 아니라 안식이다.

 

바울은 육신의 생명을 벗어버리고자 한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까지 말하고 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8절). 이것을 ‘죽고 싶다’라는 말로 잘못 오해하면 안 된다. 육신 안에 있는 인간 생명은 ‘탄식(신음하고 애통하는 것) 뿐이다. 그러한 탄식으로부터 벗어나는 ‘안식’에 이르는 길은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를 덧입는 것, 즉, 하나님의 생명을 받는 것이다. 죽음 같은 일이 주변에 널려 있지만, 하나님의 생명은 그 죽음을 삼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갖는다는 것,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순례자(길 떠나는 사람)’이 된다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이끌려 성령을 따라 하나님의 생명을 갈망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성령은 우리가 그 갈망을 잃지 않도록 보전해주시는 하나님의 보증이다. 성령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이 무엇인지 보다 명확히 하고, 그 방향을 향해 걸어가도록 우리를 이끄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순례의 길을 걸으며 고난과 고통에 노출되더라도 낙심하지 않고 능히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다.

 

바울은 14절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도다.” 여기서 ‘강권하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쉬네코’인데, 이는 ‘통제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영어 성경은 ‘쉬네코’를 ‘control’로 번역한다. 우리의 삶을 통제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무엇이 우리의 삶을 통제하고 있는가? 무엇이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가? 대개 우리의 삶을 통제하는 것은 ‘돈’이나 ‘두려움’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제하는 것은 더 이상 돈이나 두려움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에 우리의 삶을 내어드린다.

 

우리는 ‘자유’를 지니고 있다. 더군다나 우리는 자유의 가치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대와 사회에 살고 있다. 누구도 우리에게 무엇인가 우리의 의지와 상반되는 일을 강요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인은 자유로 무슨 일을 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귀찮아도, 하고싶지 않아도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헌신한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기 때문에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미니스트리를 하는 사람들이다. 이윤이 목적이 아니라 구원이 목적이다. 하나님의 생명(사랑)을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다.

 

고린도후서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이 17절에 나온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을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주신다.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에 새로운 삶의 체계를 따라 산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자, 새로운 피조물은 사람을 죽이는 문자에 얽매이지 않고 사람을 살리는 성령으로 산다.

 

물을 길어 나르는 항아리가 있었다. 주인은 언제나 두 개의 물항아리를 물지게 양쪽에 걸어 먼 길을 오갔다. 그런데 어느 날 항아리의 몸에 이상이 생겼다. 허리를 찌르는 듯한 통증이 있더니 왼쪽에 금이 가고 말았다. 주인이 열심히 물을 길어 항아리에 넘치게 담아도 집에 돌아와 보면 절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도 주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 항아리를 계속 사용했다. 어느 늦은 봄 주인과 함께 물을 길으려고 가는 길에 그 깨진 항아리가 주인에게 부탁했다.

“주인님, 이제 저를 버리세요. 전 깨진 항아리라서 물이 다 새어 나가 버리니, 아무 쓸모가 없잖아요.” 그때 주인은 길가에 피어 있는 꽃들을 가리켰다.

“이 꽃들이 보이니? 이 꽃길이 너의 작품이란다.”

“저의 작품이라뇨? 무슨 뜻인가요?”
“너의 깨진 허리춤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새어 나간 것이 아니라, 꽃길에 물을 준 거란다. 너의 몸에 상처가 나던 그날 내가 길에 꽃씨를 심어 두었단다. 돌아오는 길에 네가 날마다 물을 주지 않았다면, 오늘 이렇게 아름다운 꽃길을 걷지 못했을 거야.”

(최병락, <부족함>에서)

 

부족한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께 어떠한 일을 행하실지 아무도 모른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저사람’을 통해서 어떠한 일을 행하실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부로 자기 자신에게 실망하거나, 함부로 다른 이들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헛된 것에 욕망을 두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의 삶을 통제하시도록 내어드리지 못하면, 우리는 쉽게 나 자신과 다른 사람을 향한 평안을 잃어버린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은 얼마나 괴로운가. 나와 ‘저사람’에게서 부족함을 느끼거든, 기도하라. 생명을 살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인생은 자신의 연약함 속에서도, 다른 이의 연약함 속에서도 하나님의 생명의 신비 안에서 ‘꽃길’을 만든다.

 

그리스도인의 갈망.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중세의 아가씨는 ‘면벌부’를 욕망했고, 현대의 아가씨는 ‘명품백’을 욕망한다. 하나는 과도한 종교적 욕망이고, 다른 하나는 과도한 세속적 욕망이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갈망해야 하는지 배운다. 우리는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 부활, 하나님의 생명을 갈망한다. 아니,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을 갈망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갈망이 바로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다. 그럴 때, 내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신다고 한 주님의 약속을 마음에 깊이 간직해 두기 바란다. 여러분의 마음의 소원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아름답게 이루어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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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