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1. 11. 16. 02:02

사도적 복음

(요한일서 4:1-6, 7-8 11-12)

  

1. 본문을 읽으면서 무슨 생각이 들었는가? 잘 이해가 안 가거나, 아니면 너무 뻔한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는가?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는 말씀을 보면서, 무슨 영들을 말하고 있는지, 도통 모르겠다고 생각했을 수 있고, 진리의 영은 뭐고, 미혹의 영은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7절 이하부터, ‘서로 사랑하라’고 말하는 요한의 이야기가 너무 뻔한 이야기라, 왜 이렇게 ‘사랑하라’고 계속 반복해서, 잔소리하듯이 말하는지 이해가 안 될 수도 있다.

 

2. 현재 21세기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에 가장 위협이 되는 사회적 요소는 무엇인가? 아마도, 자본주의(신자유주의), 반지성주의, 그리고 기후위기 등일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신앙에 위협이 되는 이유는 이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을 왜곡할 뿐 아니라, 인간의 삶(또는 인간성)을 형편없이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지금 ‘살기 힘들다’고 한숨을 내쉬게 하는 원인들이다. 현재 우리의 신앙을 위협하는 요소들은 손쉽게 거부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본문에서도 ‘분별’이라는 말을 통해 ‘영들을 분별할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듯이, 우리도 최선을 다해서 우리의 신앙을 교묘하게 위협하는 것들을 분별해야 한다.

 

3. 초대교회, 특별히 본문과 관련하여 요한일서의 회중들을 집요하게 괴롭힌 문제는 ‘영지주의’였다. 기독교 신앙이 생기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3세기까지 200여년 동안 기독교 신앙을 집요하게 괴롭힌 것이 영지주의였다. 요한일서에서 말하고 있는 ‘적그리스도’는 영지주의에 현혹되어 요한 공동체를 떠난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교회는 근본적으로 사도의 가르침 위에 세워졌다. 사도의 가르침이란 성육신 하신 하나님(말씀/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신앙을 말한다. 2절에서 말하는 것과 같다.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4.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셨다(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다.)’는 고백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 고백이다. 우리는 이것을 ‘성육신(Incarnation)’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사도의 가르침이고, 사도적 복음이다. 사도들은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 즉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먹고 마시고 자고 복음을 전했다. 그리스도의 육체성,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교회에 영지주의자들이 들어와 그리스도의 육체성을 부인하기 시작했다. 즉, 사도적 복음을 거부한 것이다. 그들을 가리켜 요한 사도는 ‘적그리스도’라고 부르고 있다. 그들은 사도적 교회에 들어와 예수 그리스도를 영지주의적인 방식으로 가르쳤다. 이것은 사도적 복음이 아니라 영지주의적 복음이었다.

 

5. 영지주의의 가르침을 우습게, 또는 가볍게 여기면 안 된다. 영지주의의 가르침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그 당시 많은 이들이 사도적 복음 대신 영지주의 복음에 미혹 당하여 사도적 교회를 떠나 영지주의 교회에 입교했다. 아마도 우리가 그 당시에 신앙생활을 했다면, 우리 중 대다수도 깜빡하는 사이에 영지주의자들의 가르침에 미혹 당하여 사도적 교회 대신 영지주의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되었을 지 모른다. 그만큼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면, 성경에서 영지주의 복음을 가리켜 ‘적그리스도’라는 이토록 강력한 언어를 사용하여 비판하지 않았을 것이다.

 

6. 성경 이외의 초대교부들의 문서, 특별히 2세기와 3세기에 활동했던 교부들의 문서는 거의 모두 영지주의와 대결하는 사도적 복음이다. 그 중 영지주의와 집요한 대결을 통해 초대교회를 위협했던 영지주의자들(영지주의 사상을 통해서 기독교를 해석했던 사람들)을 사도적 교회에서 몰아내는 일에 헌신했던 교부로 이레나이우스와 오리게네스가 유명하다. 이러한 교부들의 노고를 통해 교회는 사도적 복음을 지켜내고 교회에서 영지주의자들을 몰아내는 데 성공을 한다. 우리는 영지주의와 싸웠던 교부들의 저술들을 통해서 영지주의의 사상이 무엇이었는지, 영지주의 복음이 무엇이었는지, 그 요점을 충분히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왜 영지주의와 한 판 대결을 벌일 수밖에 없었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 (이와는 별도로, 영지주의 기독교의 문헌을 담고 있는 ‘나그함마디 문서’가 1945년 이집트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7. (영지주의를 모르면 요한일서에서 말하고 있는 복음이 무엇인지 이해를 못하게 된다. 그리고 기독교의 사랑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구체성을 알지 못하게 된다.) 기본적으로 영지주의는 기독교보다 더 오래된 사상체계다. 영지(gnosis)’는 ‘신에 대한 지식을 획득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상체계이다. 그렇다 보니, 기독교인들에게 매력적인 사상이 아닐 수 없었다. 기독교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획득하는 것’이므로, 영지주의와 같은 목표를 지닌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영지(gnosis)는 기독교 사상과 똑같이 ‘계시(revelation/신이 자기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심/인간이 획득하는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수여하시는 지식)’에 근거를 둔 지식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식은 인간의 두뇌를 쓰는 지식이 아니다. 이 지식은 하나님이 계시로 인간에게 선물로 주는 지식이다. 그러므로 영지는 구원하는 지식이다.

 

8. 영지주의의 사상체계의 근간은 플라톤주의, 특별히 신플라톤주의에 있는데, 이들은 철저하게 이 세상을 이원론적으로 해석한다. 이는 육신(물질세계)은 기본적으로 악(bad/evil)하고, 영혼(비물질세계)은 기본적으로 선(good/holy)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영지란 신적인 지식(신이 계시로 준 지식)을 통해서 영혼이 악한 물질 세계, 특별히 몸(물질)을 벗어나서 본래의 선한 세계인 비물질세계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영지는 곧 구원인 것이다.

 

9. 이러한 영지주의의 생각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획득하는 것과 구원을 받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기독교 신앙과 같이 공유하는 것 같으나, 기독교 신앙을 완전히 왜곡하기도 한다. 특별히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것은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정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하나님(말씀/성자)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성육신은 영지주의자들에 의하면 발생할 수 없는 일이다. 선하신 하나님이 악한 육신을 입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정한다. 성육신을 부정하는 그들의 교리를 일컬어 ‘가현설(Docetics/ ~인 듯하다, 혹은 ~인 것처럼 보이다라는 뜻의 헬라어 ‘도케스’로부터 유래)이라고 부른다. 예수님이 육신을 입은 것은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지, 실제로는 육신을 입은 게 아니라는 뜻이다. 결국,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의 육체적 죽음과 육체적 부활을 부정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10. 영지주의의 이러한 생각은 마치 이 세상에 하나님이 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구약의 창조의 하나님과 신약의 구원의 하나님, 이렇게 두 개의 하나님에 대하여 말한다. 그래서 영지주의 교회에서는 구약의 하나님은 악한 하나님, 저급한 하나님이고, 신약의 하나님은 선한 하나님, 높으신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들은 이 악한 물질 세계를 창조한 구약의 하나님을 거부하기 때문에 구약성경을 기독교 경전에서 제외시켰다. 이들에게 성경은 오직 신약성경 외에는 없다. 신약성경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만이 선한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11. 영지주의 교회의 이러한 도전은 기독교 윤리 영역에서도 도전을 불러왔다. 영지주의 교회는 두 가지 윤리 영역에 빠지게 되었다. 하나는 엄격한 금욕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육신, 또는 물질은 악한 것이므로, 육신의 일을 최대한 억압하거나(식욕, 성욕 등의 기본적인 인간의 육신이 가지는 욕구), 물질적인 것과 최대한 관계를 맺지 말하야 한다는 것이다. 육신을 살찌우거나 건강하게 하기 위하여 좋은 것을 먹고 살찌우는 것을 죄라고 생각을 해서 금식을 밥 먹듯이 하고 육신에 계속해서 고통을 가했다. 그리고 물질에 대한 집착은 죄악이라 생각하여 가난한 삶을 추구했다. 어떻게 보면 매우 경건한 것 같으나, 그들의 근본적인 생각, 육신(물질)은 부정한 것, 악한 것이라는 생각으로부터 발생한 윤리이기 때문에 사도적 교회는 이들의 이러한 극단적인, 엄격한 금욕주의를 인정할 수 없었다.

 

12. 영지주의 교회가 빠지게 되는 다른 하나의 윤리 영역은 반율법주의였다. 이것은 엄격한 금욕주의와 반대되는 생각인데, 물질은 영혼과 관계가 없기 때문에, 영지를 통하여 이미 영혼의 구원을 받은 사람은 물질(육체, 몸)과의 관계가 어떠하든 구원에 아무런 영향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윤리적 방종을 낳기 쉬웠고, 다른 사람의 육신(육체, 몸)을 무책임하게 취급하고, 아무렇게나 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다른 사람의 신체적 아픔에 무관심하게 되고, 다른 사람의 육신(몸)에 폭력을 가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본인은 이미 영지를 통하여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13. 사도적 교회(요한 공동체/요한일서 교회)는 이러한 영지주의 교회의 가르침을 ‘적그리스도’라고 부른 것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육체로 오신)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2-3절). 즉, 사도 요한이 말하고 있는 영들은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영지의 영과 사도적 복음이 말하고 있는 진리의 영, 즉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다. 영지주의의 영은 미혹의 영이고, 성령은 진리의 영이다.

 

14. 그렇다면, 우리는 비로소 왜 사도 요한이 사도적 복음에 근거하여 ‘서로 사랑하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지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은 철저한 육체성을 전제로 한다. 사랑은 말과 혀로 하는 게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것이다. 육체성에 대한 긍정이 없으면(육체/육신/물질을 선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사랑은 말과 혀로 하는 것에 머물 뿐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말과 혀로, 가현적으로 한 사랑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실제로 육체가 달리고 죽은, 육체성의 사랑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육체성의 사랑이어야 한다.

 

15. 그러나 생각해 보라. 육체성을 부인하여 극단적인 금욕주의에 빠지거나, 반율법주의에 빠지면, 도대체 사랑이 무엇인가? 다른 형제가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그들에게 밥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육체가 굶어 죽어가는 것은 좋은 것이라고, 그들에게 밥을 주기는커녕 굶는 것은 좋은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게 사랑인가? 어떤 이가 추위에 벌벌 떨고 있는데, 그렇게 육신이 추위에 벌벌 떠는 것은 너의 영혼의 구원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고, 오히려 악한 육체에 벌 주고 있는 좋은 일이라고 말하며 그에게 따스한 옷을 제공하지 않고 내버려 둔다면,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16. 또한 어떠한 형제가 자신은 영지에 의해서 이미 구원받아서, 자신의 육신은 이제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되었다고 자살을 하거나 자해를 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육신으로 방종한 삶을 산다면, 또한 다른 이들의 육신에 해를 가하고 있다면, 그를 가만히 놓아두는 것이 사랑인가? 부모를 돌보지 않고, 가정을 돌보지 않고, 형제자매를 돌보지 않고, 그냥 남몰라라 사는 것(육체성과 아무런 관련이 없이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자신이 영지의 의해서 구원받은 증거라고 자부하면서 살아간다면,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 세상은 내 집이 아니라고, 가정 내팽개치고, 사회적 관계 다 끊고, 주님만을 위해 산다고 교회가 좋사오니 교회에 초막을 짓고 살아가는 것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17. 요한일서에서 요한 사도가 말하는 사랑은 이렇게 영지주의자들의 가르침, 영지주의 교회에서 마치 그것이 복음인양 전한 것에 대한 철저한 반대의 사랑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사랑하셨으니 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할 때 이 마땅한 사랑은 육체성의 사랑을 말한다. 하나님은 가짜로, 마치 죽은 것처럼 그렇게 십자가에 달리신 게 아니라, 하나님은 실제로 육체성을 가지고 육체의 고통을 오롯이 겪으면서 그렇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다. 바로 그 육체성의 사랑으로 우리를 십자가 위에서 구원하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도적 복음이다.

 

18. 사도적 교회에서 쫓겨난 영지주의적 복음은 지난 2천년 동안 유령처럼 기독교 신앙 주위를 배회하고 있다. 요즘, 21세기에서 보자면 대표적으로 자본주의(신자유주의)에 기초한 소비주의와 그 때문에 발생한 기후위기(지구에 대한 파괴)를 남몰라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소중하게 여긴다면, 그 육체성(물질성)을 거룩하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사도적 복음에 따라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우리의 과욕과 불의의 때문에 망가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이 창조세계가 어떻게 되든,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으니, 어떻게 되든지 상관없고, 이 땅에 있는 동안 그냥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 자체가 사도적 복음에서 떠나 영지주의 복음에 근거하여, 또는 영지주의의 유령에 사로잡혀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다른 말로, 사도적 교회를 세우는 게 아니라 영지주의 교회를 세우는 일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현재 21세기의 모든 교회들은 회개해야 할 것이다.

 

19.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영지주의 복음에서 떠나 사도적 복음을 생각해야 하는 시절을 살고 있다. 영지주의 복음으로부터 사도적 복음을 지켜내기 위하여 치열한 싸움을 벌였던 초대교회와 교부들의 신앙을 본받아, 우리도 십자가 위에서 가짜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육체성을 지니고 죽으셔서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주신 주님처럼 육체성의 사랑을 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삶과 우리의 신체와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교회와 우리의 사회와 우리의 지구를 ‘말과 혀’(영지적)로가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사도적)으로 지켜나가는 것이 사도적 교회의 사랑이다. 우리는 사도적 복음을 붙들고 사도적 교회에 다니는 그리스도인인가, 아니면 영지주의의 유령에 미혹되어 영지주의 교회에 다니는 적그리스도인가. 분별하라.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