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위기와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

 

현대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세기는 19세기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그리고 종교에 이르기까지 19세기는 '전환의 시대'였다. 왜 우리는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지, 현대 사회를 깊이 있게 이해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19세기를 연구해야 한다.

 

음악계도 마찬가지다. 음악은 19세기에 드라마틱한 발전을 이룬다. 그리고 그 중심에 베토벤이라는 인물이 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베토벤은 19세기의 모든 음악가들에게 '위기'를 안겨주었다. 베토벤을 모방하거나 넘어서지 않으면 음악 자체를 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베토벤을 넘어서야 하는 과제 때문에 브람스는 마흔 살이 넘도록 교향곡을 쓰지 못할 정도였다. 베토벤 위기는 어김없이 슈베르트에게도 닥쳤다.

 

베토벤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을 당시 슈베르트는 노트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베토벤은 우리의 독일의 가장 위대한 예술가이고 그의 음악은 비극성과 희극성, 유쾌한 것과 불쾌한 것, 장렬함과 비통함, 신성함과 익살이 결합된 기괴한 것이다."(프란츠 슈베르트, 68쪽)

 

19세기의 쟁쟁한 음악가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베토벤을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알아가는 것도 클래식 음악을 이해하는데 큰 즐거움을 준다. 대개는 베토벤을 모방하거나, 또는 베토벤을 능가하는 무엇인가를 '발명'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쓴다. 그런데, 슈베르트의 해결 방식은 꽤나 매력적이다. 그는 베토벤을 근본적으로 탐구한다.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있듯이, 슈베르트는 베토벤을 근본적으로 탐구한다. 그렇게 근본적인 탐구 후에 탄생한 교향곡이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이다.

 

브람스의 교향곡 1번을 들으면 브람스가 베토벤을 극복하려고 얼마나 안간힘을 썼는지 알 수 있다. 다른 말로해서, 브람스 교향곡 1번은 베토벤 교향곡의 철저한 영향 아래에 있다. (그냥 내 느낌이 그렇다. 클래식 평론가들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베토벤 교향곡을 듣다가 브람스 교향곡 1번을 들으면 마치 베토벤이 지은 것처럼 느껴진다. 그냥 내 느낌이다.) 그러나 브람스 교향곡 2번부터는 브람스의 숨결만 느껴진다. 더이상 그곳에 베토벤의 숨결은 없다.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에는 전혀 베토벤의 숨결이 없다. 매우 독창적이다. 낭만주의 음악 답게 선율도 너무 곱고 아름답다. 호른과 바이올린의 음향이 일품이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곡 자체의 아쉬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악장 밖에 완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만약, 네 개의 악장을 모두 완성했다면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은 베토벤의 교향곡처럼 천상과 지상을 이어주는 메시아적 음악이 되었을 것이다.

 

슈베르트는 음악가 최초로 '작곡으로만 먹고 사는 시대'를 연 사람이다. 그는 공공연히 이런 말을 하고 다녔다. "국가에서 나를 먹여 살려야 한다." 슈베르트는 괴테의 시에 곡을 붙여 독일어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알린 '가곡'의 대명사이다. 가곡 분야에서는 독보적이었지만 기악곡에서는 베토벤이라는 거성을 넘어서야 하는 과제를 안았던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과제를 풀기 위해 이 '전업 작곡가'가 시행한 일은 많은 영감을 준다. 위기를 주고 있는 바로 그것을 탐구하는 일, 그것이 위기를 극복하게 하는 열쇠라는 것이다.

 

우리는 참으로 '위기'의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는 왜 이렇게 위기 속에 던져지게 되었을까. 이 위기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이 위기는 어떻게 해야 극복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우리 시대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열쇠는 19세기에 있다고 믿는다. 우리에게는 19세기에 대한 깊은 탐구가 많이 필요하다. 그 탐구의 첫걸음으로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을 듣는 일을 하는 것을 어떨지. 슈베르트 교향곡의 아름다운 선율이 우리를 위로해 줄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