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노시스 - 겸손 - 그리스도의 마음]

 

"겸손은 자기를 낮추고 뒤에 세우며, 자기의 존재를 상대화하여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 배치하려는 것입니다"(담론, 72쪽).

 

신영복은 <담론>에서 주역의 궤를 설명하며 겸손이 무엇인지를 위와 같이 말한다. 주역의 '지산겸괘'는 땅 속에 산이 있는 형상인데, 덕목 중 겸손이 최고의 덕목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쾌이다. 그리하여 겸손은 군자의 완성이라 불린다.

 

기독교인이라면 자연스럽게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로 시작하는 빌립보서의 말씀이 떠오를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그리스도의 겸손을 케노시스라고 부른다. 주역의 괘를 통해 표현하면, 예수의 케노시스는 군자의 완성을 이룬 겸손과 같다. 그러므로 동양적으로 말하면 예수는 군자의 완성을 이룬 분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동양적 사고로 예수는 '성인군자'로 불려왔다.

물론 기독교 일각에서는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성인군자'라고 부르는 것에 마음이 불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격적 신이라는 개념이 부재한 유교적 사고 틀 안에서 '성인군자'라는 표현은 신적인 경지에 이른 인간을 뜻하는 것이므로 최고의 칭호가 아닐 수 없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당연히 케노시스의 마음, 즉 겸손의 마음이다. 그래서 겸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아는 게 중요하다. 겸손은 관계성의 문제이다. 겸손은 그냥 자기 자신을 낮추는 일이 아니라, 자기의 존재를 낮추고 상대화시켜 다른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재배치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기의 존재를 낮추고 상대화시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재배치하였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있었고,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내어놓을 수 있었다. 구원은 결국 겸손의 열매였던 것이다.

 

케노시스, 겸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자는 누구라도 구원을 창조할 수 있다. 구원은 그리스도의 전유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자라면 누구나 창조할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은 구원을 독점하지 않으신다.

 

우리 시대에 구원과 기쁨은 없고 폭력과 슬픔만 늘어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을 생각은 안 하고, 다시 말해 자기의 존재를 낮추고 상대화하여 다른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재배치하려는 마음은 없고, 그저 자기 자신을 우상화하여 다른 존재를 자기 앞에 무릎 꿇리거나 줄세우려는 욕망만 존재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결국, 우리는 구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이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