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2. 4. 5. 09:25

세상은 망해가는데 나는 사랑을 시작했네

(출애굽기 16:1-3, 17:1-4)

 

1. 천국은 어떤 곳일까? 사람마다 다르게 묘사될 것이다. 가난하게 산 사람은 더 이상 가난이 없는 곳이 천국일 거고, 부자로 산 사람은 계속해서 부자로 살고 싶은 욕망을 담아 천국에는 금은보화가 가득하다고 믿을 것이다. 인생을 너무 고통스럽게 산 사람에게 천국은 더 이상 눈물이 없는 곳이라 믿을 것이고, 행복하게 인생을 마감한 사람들은 그 행복이 천국에서도 이어지기를 바랄 것이다. 가슴 사무치게 그리운 존재가 있는 사람이라면 천국에 가서 그 존재를 만나게 되리라는 믿음을 가질 것이고, 살면서 정말 꼴 보기 싫은 사람이 있었다면 그 사람이 있는 곳이 천국이라면 그곳에 가고 싶지 않을 거라 말할 것이다.

 

2. 요한계시록은 천국을 이렇게 묘사한다. 요한계시록에는 ‘천국’이라는 말 대신에 새하늘과 새땅이라고 표현한다. 새하늘과 새땅, 즉 천국(하늘나라/하나님나라)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는 곳,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는 곳이다. 그런 곳은 어떤 곳일까? 요한계시록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3. 우리는 천국이라는 것을 상상할 때, 우선 그곳에는 더 이상의 고통이 없을 것이라 믿는다. 왜 그럴까?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고통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사는 게 고통이다. 삶 자체가 고통이다. 그렇다 보니, 인간은 계속해서 인생이 무엇인가를 묻는다. 왜 살아야 하는가? 이렇게 고통스러운 인생인데, 여기에서 어떠한 의미를 찾고 살아야 하는가? 인간은 묻고 또 묻는다. 그렇게 인간에게 천국이란 더 이상의 고통이 없는 곳을 의미한다.

 

4. 그런데 나는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고 싶다. 우리는 고통이라는 문제에 너무 몰입해서 사는 것은 아닐까? 고통이라는 문제에 너무 몰입하다 보니, 천국이라는 것도 고통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설계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의문이 들었다. 이렇게 질문해 보자. 아이들에게 집이란 어떤 곳일까? 아이들에게 집은 고통이 없는 곳일까? 배불리 먹을 게 있는 곳일까? 게임기가 있는 곳일까? 친구들이 있는 곳일까? 침대가 있는 곳일까? 도대체 아이들에게 집이란 어떤 곳일까? 아이들에게 집이란 사랑하는 엄마/아빠가 있는 곳이다. 엄마 아빠가 있는 바로 그곳이 집이다.

 

5. 본문은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난 지 한 달 정도 되었을 때 발생한 일을 다룬다. 그들은 시내산으로 가기 위해 엘림을 떠났는데, 엘림과 시내산 중간 쯤에 있던 신 광야에 도착한다.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달 십오일이라”(16:1). 우리 달력으로 1월 15일쯤 애굽에서 나와 2월 15일쯤 신 광야에 도착했다는 뜻이다. 신 광야에 도착했을 때 이스라엘은 모세와 아론을 향해서 원망을 쏟아낸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16:3).

 

6. 목마르고 배고프다 보니 현타(현자 타임)가 온 것이다. 현타의 사전적 의미는 이렇다. “열성적으로 무언가에 몰입하며 행동하다가 급 현실을 깨닫고 조금 전까지 계속됐던 자신의 모습을 후회하거나 수치스러워하며 힘이 쭉 빠지는 순간.” 애굽에 있을 때 이스라엘은 애굽 왕과 애굽 사람들에게 억압과 폭력에 시달리면서 살았다. 그래서 그들은 매일 같이 고통받으며 살았다. 그들은 구원을 갈망했다. 하나님은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모세를 보내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었다. 그런데 출애굽 한 지 한 달 정도 지나서 신 광야에 이르러 자신들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모세와 아론에게 원망을 쏟아내고 있다. 다 좋은데, 목마름과 배고픔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7. 목마름과 배고픔의 현실 앞에서 이스라엘은 갑자기 출애굽의 목적과 의미를 상실해 버린다. 이들이 출애굽한 목적은 무엇인가? 단순히 고통스러운 삶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출애굽의 목적은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삶”이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으며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굿 라이프’를 살아가는 것을 위해 이들은 출애굽을 했다. 그런데, 이들은 목마름과 배고픔의 현실 앞에서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는 인도해 내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이 광야’라는 말에는 모세와 아론을 향한 이스라엘의 심리적 비아냥거림이 가득 들어 있다.

 

8. 애굽에서 떠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 지, 이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별로 없었다. 그렇다 보니, 이스라엘은 지금 자신들의 삶이 놓여 있는 ‘광야’를 ‘이 광야’라고 지칭하며, 자신들이 맞닥뜨린 현실을 향하여 냉소와 비난을 늘어 놓고 있다. 이들에게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믿음이 충만했다면 자신들의 삶의 자리를 ‘이 광야’로 지칭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다른 언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사무엘상 7장에 보면 사뭇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블레셋과의 전투를 위해 미스바로 온 이스라엘 회중을 불러 모은 사무엘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이긴 뒤 돌 하나를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우고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여기까지 도우셨다!” 그리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고 칭한다.

 

9. 출애굽기와 사무엘상 사이에는 시간적 간격이 있으므로, 출애굽기에서 보는 이스라엘의 모습과 사무엘상에서 보는 이스라엘의 모습은 사뭇 다르다. 그 시간 간격만큼 이스라엘은 성장한 것이다. 만약 이스라엘이 사무엘상에서 보여지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신 광야에서 가지고 있었다면, 신 광야를 ‘이 광야’라고 부르며 냉소와 비난을 쏟아 놓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오히려 ‘여기까지 인도하신’ 에벤에셀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과 찬송을 올려드렸을 것이다. 그러나 신 광야에 이른 이스라엘에게서 보이는 모습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현저하게 없는 모습이다.

 

10. 신 광야에서 발생한 이 일로 인해 전개되는 것은 우리가 잘 아는 만나와 메추라기 이야기다. 만나와 메추라기 이야기의 핵심은 광야에서 하나님이 기적 같은 일을 벌이셔서 이스라엘을 배불리 먹이셨다는 것이 아니다. 만나와 메추라기 이야기의 핵심은 12절이 담고 있다.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내가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 그리고 더불어서 이 말씀이 핵심이다.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16:28). 한 마디로, 만나와 메추라기 이야기는 이스라엘이 얼마나 하나님께 신뢰와 믿음을 두느냐, 두지 못하느냐를 시험한 사건이다.

 

11.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대하여 충분한 신뢰와 믿음을 두었다면 신 광야에 이르러서 배고픈 것을 두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애굽에서 고기와 빵을 먹으면서 종살이하던 때를 회상하며 그리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비록 자신들이 광야에서 배고픔과 목마름 가운데 있지만, 출애굽하여 여기까지 도우신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먹이고 입히실 것을 믿었을 것이다. 그들이 경험하는 현실은 그들의 현실일 뿐 하나님의 현실은 아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은 오히려 왜곡되어 있을 때가 많다. 진정한 현타는 내가 보는 현실을 보는 게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하나님이 베푸실 구원을 보는 것이다.

 

12. 신 광야에 이르러 이스라엘이 본 현실은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는 배고픔과 목마름이 가득한 현실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본 현실이 얼마나 협소하고 왜곡된 현실이었는지 만나와 메추라기 이야기를 통해서 드러난다. 그곳은 먹을 것이 없는 배고픔이 가득한 ‘이 광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저녁에는 메추라기로 아침에는 만나로 배불리 먹이시는 은혜가 넘치는 곳이었다. 무엇이 진실로 현실인가에 대한 깨달음은 이어지는 므리바 이야기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13. 이스라엘은 말 많고 탈 많았던 신 광야를 떠나 시내산으로 향하던 도중 르비딤이라는 곳에 도착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마실 물이 없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어서 배는 불렀지만 마실 물이 없어서 목이 말랐다. 식량과 물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수적으로 있어야 할 것이다. 물이 없어 목말랐던 이스라엘은 그곳에서 모세와 다툰다.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17:3). 르비딤에 이르러 이스라엘이 본 현실은 마실 물이 없는 현실이었다.

 

14. 이 다툼으로 인하여 마음이 상한 모세는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는다. “내가 이 백성을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이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일 강을 치고 홍해를 갈랐던 지팡이를 잡고 호렙산에 있는 반석을 내리치라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이 본 현실은 물이 없는 현실이었지만, 하나님의 현실은 반석에서 물을 내시는 현실이었다. 우리가 보는 현실은 이렇게 왜곡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반석으로 가려진 물을 보지 못한다. 그것을 보지 못하니, 우리는 냉소와 비난을 쏟아 놓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현실은 다르다. 하나님은 반석에서 물을 내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눈이 보는 현실이 전부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현실을 보려고 노력하는가?

 

15. 만나와 메추라기 이야기나 므리바 사건, 즉 이스라엘 자손과 모세가 다툰 사건, 더 나아가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한 사건은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없어서 발생한 사건이다. 우리도 우리의 삶 속에서 매일 같이 경험하는 사건이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없어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는 삶의 이야기들 속에서 얼마나 많은 냉소와 비난을 쏟아 놓는가.

 

16.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사랑의 내용은 믿음과 신뢰이다. 서두에서 한 천국 이야기를 다시 끌어와 오늘 말씀과 연관을 시켜 보자면, 이스라엘에게 천국은 배불리 먹을 고기와 떡, 그리고 마실 물이 있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바로 그곳이다. 이는 아이들에게 다른 그 어느 곳보다 엄마 아빠가 있는 곳이 그들의 집이라는 말과 같다. 엄마 아빠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있는 아이들은 그곳에 고통이 있더라도 그 고통의 현실을 보는 게 아니라 엄마 아빠가 보여주는 믿음과 신뢰를 보기 때문에 고통에 매몰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계신 곳이 바로 천국이라는 것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굳건히 가진 신앙인은 고통의 현실을 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현실을 보기 때문에 고통의 현실 때문에 냉소와 비난을 늘어 놓지 않는다. 오히려 그곳에서 임재하시고 역하사실 하나님의 현실을 기대하며 묵묵히 그 길을 걸어간다.

 

17. 시 한 편을 나누며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려 한다. 정희성 시인의 <봄소식>이라는 시이다.

 

이제 내 시에 쓰인

봄이니 겨울이니 하는 말로

시대 상황을 연상치 마라

내 이미 세월을 잊은 지 오래

세상은 망해가는데

나는 사랑을 시작했네

저 산에도 봄이 오려는지

아아, 수런대는 소리

 

18. 사랑을 시작한 사람은 세상이 망해가는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사랑을 시작한 자에게 참된 현실은 세상이 망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망해가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지녔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고통이 가득한 세상, 망해가는 것 같은 세상을 향하여 냉소와 비난을 쏟아 놓지 않는다. 그는 사랑을 통해 세상을 보기 때문에 배고픔과 목마름이 겉으로 드러난 현실을 보는 게 아니라 그 배고픔과 목마름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현실/하나님의 사랑을 본다.

 

19. 우리 모두가 그러한 관계를 쌓아 나가면 좋겠다. 믿음과 신뢰, 즉 사랑은 겉으로 드러난 것 만을 현실로 인식하지 않게 하는 힘이다. 우리가 서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한다면,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현실만을 바라보며 냉소와 비난 가운데 살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서로 좀 더 보듬어 안으며 따뜻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을 망해가는 데, 나는 사랑을 시작했네.” 이 사순절기,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사랑이 더 깊어지길, 서로가 서로를 향한 사랑이 더 깊어지기를! 사랑의 눈으로 현실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되기를! 우리 모두 좀 더 힘을 내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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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