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2. 5. 6. 08:11

우리들의 십계명

(출애굽기 20:1-17)

 

1. ‘말씀’이라는 말에 주목해 보자. 인간이 인간인 가장 중요한 요소는 ‘말(word)’ 때문이다. 다른 말로, 언어라고 할 수 있다. 말씀, 언어는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 구분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서 소통을 한다. 그런데 이 소통이 단순한 소통이 아니라 아주 깊은 차원의 소통이다. 일상적 소통뿐 아니라 도덕적 소통도 한다. 다른 피조물에게는 이런 능력이 없다. 그들도 소통을 하긴 하지만, 언어를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무엇이 선하고 악한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 이런 도덕적 관념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말씀, 언어를 통해서 그런 도덕적 관념을 갖는다.

 

2. 말씀이라는 것, 언어라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정체성 그 자체이다. 존재 그 자체이다. 언어가 없으면 인간은 인간으로서 존재하지 못한다. 그래서 하이데거 같은 철학자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약성경, 특별히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로고스)’라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말씀, 언어가 인간의 존재 근거라고 한다면,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들이 존재 근거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존재 근거다.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고백한다. 이것은 개인적 신념이 아니라 보편적 지식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존재의 근거로 알고 이해하고 믿고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3. 본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우리와 소통을 하신 거다. 그런데, 말씀으로 말씀하셨다는 말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해 보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는 뜻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나는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그냥 문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 입혀진, 하나의 인격이다. 말씀이 문자가 아니라 인격으로 다가올 때, 우리는 비로소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4. 출애굽기 20장은 십계명을 담고 있는 곳이다.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들에게 십계명은 너무도 익숙하다. 그런데, 십계명에 대한 친밀도와 관심도는 교회 오래 다닌 사람일수록 떨어진다. 왜 그럴까? 십계명을 그저 고리타분한 율법으로, 잔소리로, 그냥 문자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것처럼, 십계명을 하나의 인격으로 받아들인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인격을 가진 존재로서 십계명이 우리에게 다가온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십계명을 그냥 남몰라라 무시할 수 없다. 존재를 무시하는 행위가 가장 나쁜 행위이다. 존재에게는 무시가 아니라 환대가 필요한 법이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5. 말씀은 단순한 언어가 아니다.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인격이 된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와 사귐을 가지신다. 그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모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인격이다. 그 인격적인 말씀이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하나님의 과거, 현재,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우리에게 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인격적으로 대할 때, 우리 안에는 두려움과 떨림이 있기 마련이다. 어마어마한 일 앞에서 두렵고 떨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6. 하나님의 말씀이 인격으로 다가오는 이 어마어마한 일이 환대가 되려면, 우리는 그 말씀을 향해 온 마음을 다해 우리의 존재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살면서 가장 마음 상할 때가 언제인가. 환대 받지 못할 때이다. 환대 받지 못하는 곳에 머물고 싶은 사람은 없다. 나를 환대 하지 않는 사람과 사귐을 갖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고, 불쾌한 경험이고,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경험이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에게만 환대의 마음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볼 일이다. 언뜻 보기에 하나님의 말씀(인격)이 우리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그 말씀을 환대하지 않는다. 사실, 우리가 살면서 십계명을 환대하지 않은 이유도, 십계명이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7. 십계명, 여기에서 인격을 다 제거해 버리고 나면, 고리타분한 꼰대가 하는 잔소리 같다. 사실 우리는 십계명과 반대로 살아간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고 살며, 온갖 우상에 둘러싸여 그 우상을 좇으며 살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만들며, 안식일을 하찮게 여긴다. 부모님의 인생에 관심이 없고,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 증거는 우리 안에 만연해 있고, 우리는 온갖 탐욕 가운데 살아간다. 십계명이 인격이라면, 우리는 그 인격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랑이 뭔가, 정말 미워하는 것처럼 살아간다. 그게 우리 삶의 형편이다.

 

8. 그러나, 우리가 십계명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그것이 우리에게 인격적으로 다가오면, 십계명의 부드러운 손길을 통해서 우리의 삶이 완전히 달라지게 될 것이다. 십계명은 10가지의 계명으로 되어 있지만, 이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계명을 고르라면, 제4계명이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십계명은 성경에 두 군데 나온다.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이다. 출애굽기와 신명기에 나오는 십계명은 똑같다. 그런데, 다른 부분이 딱 한 군데 있다. 그게 바로 제4계명이다.

 

9. 출애굽기 20장에서 제4계명을 말할 때,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쉬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명기에서는 그 이유가 다르다. 신명기에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야 하는 이유는 출애굽 사건, 즉 구원 사건 때문이다. 출애굽기의 십계명은 창조를 강조하고, 신명기의 십계명은 구원을 강조한다. 우리는 이 두 개가 다른 것으로 인식하지만, 실은 창조와 구원은 다른 게 아니다. 하나이다. 하나님의 창조 사건은 곧 구원 사건이고, 구원 사건은 곧 창조 사건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놀라운 일(창조)인 동시에 선한 일(구원)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우리의 삶을 돌보아 주신다.

 

10. 십계명은 대개 두 방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하나님을 향해 있고, 다른 하나는 이웃을 향해 있다. 그런데, 이 둘이 모두 제4계명으로 수렴된다. 안식일. 안식일은 쉬는 날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쉬는 날은 일을 더 열심히 하기 위한 준비의 날 정도로 이해된다. 회사가 왜 우리를 쉬게 하는가? 일 할 때 더 열심히 일하라고 그러는 것이다. 우리는 좀 더 효과적으로 착취 당하기 위해서 쉼을 강요당한다. 우리가 사는 사회가 그렇다. 그러나 십계명에서 말하는 안식일은 그런 의미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위에서 말했듯이, 십계명이 인격인데, 그것도 하나님의 인격인데, 하나님이 아무렴 우리를 더 효과적으로 착취하기 위해서 쉬도록 하실까.

 

11. 안식일에 대한 인격적 해석 중 가장 최고의 해석은 우리 시대 최고의 구약학자 중 한 명인 월터 브루그만이 말한 “안식일은 저항이다”가 아닐까 생각한다. 십계명이 하나님의 인격이라면, 하나님은 분명 우리를 도우실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도우실까? 우리가 엉뚱한 것에 우리의 생명이 빼앗기지 않도록 도우실 것이다. 우리의 귀한 생명이 엉뚱한 것에 의해 소모되지 않도록 도우실 것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우리의 생명을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모든 시도로부터의 저항으로 우리에게 인격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12. 우리가 왜, 우상을 만들어 섬기는가? 우리가 왜, 이웃의 것(무형이든, 유형이든)을 빼앗으려 하는가? 탐욕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를 계속해서 탐욕스러운 존재로 만든다. 그 끝없는 탐욕을 채우려다 보니, 자기 힘으로 안 되니까, 자기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니까, 우상을 만들어서 도움을 청하고, 나의 것이 아닌 남의 것을 훔쳐서 자신의 탐욕을 채우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쉴 틈이 없다. 탐욕은 우리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는다.

 

13. 나를 가만히 안 놓아두고 못 쉬게 하는 세상에 저항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름답게(토브) 창조하시고, 우리를 가장 선한 길로 인도(구원)하셨는데, 우리는 탐욕을 통해서 우리 스스로 우리의 아름다움을 파괴하고, 선한 길에서 벗어나 악한 길로 간다. 즉,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인간의 존엄성(dignity)을 짓밟아 버린다. 어떻게 할까?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아름다움과 선함을 지킬 수 있을까. 그 길이, 안식일에 있다.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이다.

 

14.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안식일 정신은 정치적으로 ‘시민 불복종 운동’으로까지 전개되었다. 일례를 들어, 우크라이나-러시아 간의 전쟁을 끝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이겠는가. ‘시민 불복종’이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다.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이다. 우크라이나도 기독교 국가고, 러시아도 기독교 국가다. 푸틴은 수세주일에 얼음을 깨고 강물에 들어갔다 오는 수세의식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런 기독교 국가 간에 서로를 죽이는 살육의 전쟁이 왜 발생하는 것일까? 안식일에 대한 말씀이 그들에게 인격적으로 다가서지 않아서 그렇다. 말씀을 인격으로 생각하는 신실한 신앙인이라면, 감히, 전쟁을 벌일 수 없다.

 

15. 민수기 22장에 보면, 아주 재미난 이야기가 나온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 한걸음씩 나아갈 때, 모압 평지에 진을 치고 있을 때, 모압 왕 발락이 이스라엘의 진군 소식을 듣고 심란해 한다. 그래서 모압 왕 발락은 선지자 발람을 불러 진군하는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 사주한다. 두둑한 복채를 받은 발람은 모압 왕 발락의 요구대로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서 길을 나섰다. 발람은 나귀 한 마리를 대동하고 갔다. 조금 가다가 황당한 일이 발생했다. 발람을 태우고 가던 나귀가 가다가 멈추고, 절대로 앞으로 나가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발람은 나귀를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 나귀에게 채찍질을 해댔다. 그래도 나귀는 꿈쩍하지 않았다. 열 받은 발람은 나귀를 막대기로 패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귀가 입을 열어 말했다.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 같이 세 번을 때리느냐!”

 

16. 나는 이것이 놀라운 시민 불복종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나귀는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상황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나귀는 그 자리에서 주인에게 불복종했다. 앞으로 나가면 죽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발람의 나귀만큼 안식일 정신을 철저하게 지킨 존재가 어디에 있는가. 아무 것도 하지 않기. 나귀는 발람의 불의한 일에 저항한 것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기를 통해서. 즉, 시민 불복종을 통해서. 다시 말해, 안식일을 지킴으로 인해서.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선한 일을 위해서, 동물도 이렇게 시민 불복종을 할 수 있는데, 동물도 이렇게 안식일 정신을 가지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데, 하물며 인간이 못 할 이유가 무엇인가? 인간이 이것을 못한다면, 동물보다 못한 존재인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 아닌가?

 

17. 십계명은 하나님의 잔소리가 아니다. 십계명은 우리를 위한 것이다. 십계명은 우리 인간의 존엄성을 보존하고 지키시기 위한 하나님의 인격적 사랑이다. 탐욕을 부추겨 우리의 생명을 갉아먹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우리의 존엄성을 지켜 나가는 일, 우리의 아름다움과 선함을 지켜 나가는 일은 우리에게 말씀으로, 인격으로 다가오셔서 우리의 삶을 보듬어 안으시는 주님의 말씀을 환대하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쉼을 통하여,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을 통하여, 우리를 한 순간도 쉬지 못하게 만드는 탐욕을 물리치고, 그 탐욕을 부추기는 사악한 세력들에게 저항하여, 우리의 아름다움과 선함을 지켜 나가는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우리에게 십계명을 주신 주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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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