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중엽, 청나라(중국)는 영국과 무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청나라는 발달한 옷감제조기술을 바탕으로 영국과의 무역에서 흑자를 내고 있었습니다. 영국 상인들은 이에 대해 아편 무역을 통해서 이윤을 창출해 보려고 했습니다. 육체 노동에 종사하는 청나라의 하층민들 사이에 아편은 매우 인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청나라는 아편 무역을 허용하지 않았고 영국 상인들을 홍콩으로 내쫓았습니다. 이것을 빌미로 영국은 청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고 결국 영국이 승리함에 따라 청나라는 영국의 여러 가지 요구들을 들어줘야만 했습니다. 일명 아편 전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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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사상가 칼 마르크스는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는 유명한 말입니다. 아편은 마약입니다. 고통을 잊게 해주는 진정제 역할을 합니다. 육체 노동에 종사하는 청나라의 하층민들이 아편을 찾았던 이유는 육체적 노동에서 오는 고통을 잠시나마 잊어보려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마약을 찾는 사람은 현재의 고통에서 탈출하려는 욕구 때문에, 그리고 쾌락을 추구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마약을 합니다. 고통에서 탈출한다는 측면에서 마약은 종교와 닮은 점이 있습니다. 종교가 타락하게 되면 마약 같은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아마도 칼 마르크스는 이 점을 염두에 두고 그런 말을 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때로는 감사를 강요당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내 삶은 변한 것이 아무 것도 없고 내 안에는 여전히 기쁨이 없는데 자꾸 감사하라고 합니다. 심지어는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을 믿고 미리 감사하라고 합니다. 감사를 강요합니다. 신앙이 폭력으로 다가옵니다. 신앙의 형태가 이쯤 되면 신앙이 아편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조작된 감사요, 거짓된 감사입니다. 뒤돌아 서면 금방 사라져버릴 감사입니다. 내 삶에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도 않고, 내 삶은 여전히 공허하고 피곤하고 힘들고 지칩니다. 그러다가도 교회 와서 박수 치면서 찬양하고 기도하면서 눈물 흘리고 나면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 같고 마음이 시원해 지는 것 같습니다. 고통에서 해방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나면 내 마음은 또 먹먹해 집니다.

신앙생활을 이렇게 아편 맞듯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실제로 신앙생활인지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건 신앙생활이 아니라 종교적 환각생활입니다. 감사는 은혜를 체험했을 때 나오는 것이지 강요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우리의 고단한 일상을 잠깐 잊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주는 것입니다.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않았는데 그것에 대해서 억지로 감사를 만들어 내는 종교적 아편에 손대지 마십시오. 정말로 내 삶을 변화시켜 영원한 안식에 거하게 하는 복음에 관심을 가지십시오. 신앙은 아편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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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