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사색2011. 3. 10. 12:12

시편 16

짬자신앙에서 벗어나기

 

이것도 내 것. 저것도 내 것, 다 내 것이야!” 우리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짬뽕도 먹고 싶고 자장면도 먹고 싶은 인간의 욕심이 짬자면을 만들어 냈다. 이것도 먹고 싶고 저것도 먹고 싶은 욕심이 뷔페식당을 만들어 냈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근본적인 죄는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지적하고 있고 어거스틴이 교만이라고 일컬은 원죄이다. 이것은 우주의 블랙홀과 같다.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 아무리 빨아들여도 만족함이 없다. 모든 것을 폐허로 만든다. 생명을 잉태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파괴한다. 이 교만은 하나님까지도 상대화시켜 자기 만족을 위해 이용한다.

 

시인은 이렇게 자기 집중에 사로잡혀 있는 교만한 자와 거리를 둔다. 시인은 우상숭배자들처럼 하나님을 상대화시키지 않고, 절대적인 하나님으로 고백한다. 그래서 시인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주님이시다. 하나님을 주님으로 모시지 않는 교만한 자들는 혼합주의에 사로잡힌다.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을 부요케 해줄 신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대하여 당신은 나의 주님입니다라고 고백하는 동시에 이방신들(우상들)에게 피의 전제를 드리며 그들의 이름도 부른다. 자기 자신에게 집중한 교만의 결과다. 교만이 만들어낸 짬자신앙이다.

 

시인이 이러한 짬자신앙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신앙이 종말론적이기 때문이다. 삶의 끝을 바라볼 뿐만 아니라, 죽음 이후의 삶까지도 바라볼 줄 아는 영적인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면서 내 삶을 지탱해주는 것들을 많이 만들어 내면서 산다. 성취할 일거리도 있고, 가족도 있고, 오락도 있고, 사회적 교제도 있는 가운데 하나님만이 나의 피난처라는 것을 실질적으로 오감적으로 느끼지 못하면서 산다. 오히려 이런 자에게는 신앙조차 취미생활로 다가온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인생의 마지막 날에 위에 열거한 것들, 지금 내 삶을 지탱해 주고 있다고 믿고 있는 그런 것들이 나의 피난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인은 지금 기쁘고 행복하다. 두 다리 딛고 살고 있는 땅이 척박하기로 유명한 팔레스타인 땅인데도 불구하고 자기의 기업()이 아름답다고 고백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의 삶이 오직 하나님께만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만을 피난처로 삼고 사는 시인은 하나님께서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구원해주셨을 뿐 아니라 충만한 삶으로 회복되었다고 찬송하고 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그리스도인들은 시인의 고백에 아멘으로 화답해야 한다. 시인이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성찬식을 통해 그리스도의 살(산업)과 피()를 마신다. 이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셨다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할 거라는 믿음을 고백하는 행위이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이 세상의 그 어느 것에 마음을 두거나 이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피난처를 삼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그리스도의 피를 마신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지 않는다. 나의 살은 그리스도의 살이고 나의 피는 그리스도의 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만 바라보셨던 것처럼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만을 피난처 삼아 하나님만 바라보며 산다. “짬자신앙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이것이 구원이다. 이것이 충만한 기쁨, 영원한 즐거움이다.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