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사색2011. 3. 30. 22:25

시편 19

계시: 해와 율법과 그리스도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질문한다.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고,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기본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없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 능력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파악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는가? 그건 하나님에게 달려 있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배타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당신 스스로 계시해 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자신을 계시하실까? “계시(Revelation)”는 자신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어떻게 드러내실까?

 

시인은 두 가지를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다. 하나는 자연이고, 다른 하나는 율법(토라)이다. 자연이 하나님을 드러낸다고 하는 인식은 창세기의 천지창조 기사와 맞닿아 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천지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낸다. 물론 자연에게는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다”(3). 말을 해야 존재가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마음이 통하고 서로의 존재를 가슴 속 깊이 느끼듯이, 피조물은 조물주의 사랑을 말 없이 드러낸다.

 

특별히 시인이 주목하는 피조물은 해이다. 해를 통해서 시인은 자연의 질서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사랑을 본다. 시인은 아침이 되어 해 뜨는 장면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이라고 표현한다. 하나님께서 해를 위해 하늘에 장막(텐트, )을 지어 주셔서 밤새껏 해가 쉴 수 있는 거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보금자리에서 밤새껏 쉬다가 아침이 되어 떠오르는 해는 얼마나 큰 기쁨을 전해주는가! 아침에 떠오른 해는 저녁이 되어 질 때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온 세상에 나누어 준다. 그 열기, 그 사랑에서 피할 자는 아무도 없다!(6)

 

시인은 다음으로 율법에 주목한다. 시인에게 율법은 단순히 지켜야 할 어떤 규율, 법이 아니다. 율법은 영혼을 소성시키고’,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고’, ‘마음을 기쁘게 하고’, 눈을 밝게한다. 율법 자체에 그러한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 계시되고 있는, 율법에 드러나고 있는 하나님 때문이다. 이러한 능력을 베풀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 밖에 없다. 이 세상 그 무엇이 우리의 영혼을 소성시키고, 참된 지혜를 주며, 참 기쁨과 의로움을 가져다 줄 수 있는가! 그래서 시인은 율법을 사모한다. 그것은 순금보다 더 귀하고, 꿀보다 더 달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자연과 율법에서 하나님을 발견한 시인이 십자가 사건을 보았다면 무슨 고백을 했을까? 이런 고백이 아니었을까?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다!”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드러남은 모두 여기에 모아진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한 하나님의 계시, 드러남이 아니라, 궁극적인 계시, 즉 하나님 스스로를 세상에 보이신 절대적인 사건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이상, 자연도 율법도 그 빛을 잃고 우리의 모든 존재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계시, 드러남 그 자체이시다. 이것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