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1. 1. 14:30

엎드림

(여호수아 7:1-10)


오늘 말씀은 여리고 성 전투에 이은 아이 성 전투 이야기이다. 여리고 성 전투와 아이 성 전투 이야기는 동전의 양면 같은 이야기이지만 그 결과는 매우 다르다. 그래서, “라는 질문을 불러 일으킨다.

 

여리고 성 전투는 이 노래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여호수아 성을 쳤네 여리고 여리고 여리고

여호수아 성을 쳤네 여리고 성이 무너졌도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6일 동안 매일 한 바퀴씩 여리고 성 주위를 돌았고, 마지막 7일 째 7곱 바퀴를 돈 뒤, 나팔 소리가 나면 모든 백성이 큰 함성 소리를 질렀다. 마지막 7일째 내려진, 하나님의 명령은 다음 세 가지였다.

 

1)    제사장들의 나팔 부는 소리가 들리면 큰 소리로 외치라

2)    라합과 그 가족을 살려주라

3)    전리품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다’ (헤렘법)

 

외양적으로 보면, 여리고 성 전투는 완벽한 것처럼 보인다. 여리고 성 전투를 전하고 있는 6장 말씀은 이렇게 끝난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와 함께하시니 여호수아의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니라”(6:27).

 

그런데, 아이 성 전투를 전하고 있는 7장 말씀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졌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7:1).

 

아직 아이 성 전투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아이 성 전투 이야기를 읽는 독자들은 아이 성 전투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불길한 예감에 휩싸이게 된다. 아이 성 전투가 어떻게 될 것 같은가?

 

사실, 이 부분은 스토리 기법의 전문 용어로 서스펜스라고 한다. 연극이나 영화에서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사용되는 기법인데, 이야기 속 등장인물 중 적어도 한 명 이상이 모르고 있는 사실이 관객에게 누설될 때 아이러니가 발생하고, 그로 인해서 서스펜스가 형성된다. 이는 모두가 감춰져 있는 그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인식) 서스펜스가 발생하여 스토리에 몰입한 관객들은 가슴 졸이며 지켜보도록 만드는 강력한 도구다.

 

영화 감독 중, 서스펜스의 대가로 불리는 이가 있다. 알프레도 히치콕이다. 히치콕이 어느 강연에서 서스팬스와 서프라이즈의 차이를 명쾌하게 설명하여 정의 내린 적이 있다. 우리가 사소한 잡담을 나누며 앉아 있는 식탁 밑에 폭탄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다가 갑자기 쾅 하고 폭탄이 터지면 관객들은 깜짝 놀라게 된다. 이것은 서프라이즈다. 아무도 모르다가 갑자기 어떤 일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스펜스는 이와 다르다. 누군가 폭탄을 설치하는 장면을 관객들에게 미리 보여 주었다면, 관객들은 폭탄이 언제 터질까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보면서 사소한 장면에도 몰입하게 된다. [김정희, 스토리텔링이란 무엇인가, 52쪽]

 

아이 성 전투 이야기를 다 안다고 생각하며 설렁설렁 말씀을 듣지 말고, 서스펜스 기법에 몰두해서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말씀을 들어보시라. 특별히 라는 질문을 마음 속에 품는 게 중요하다. 왜 아이 성 전투는 이렇게 허무한 결과를 가져왔는가?

 

아이 성 전투는 여리고 성 전투와는 매우 대조적이다. 여리고 성 전투나 아이 성 전투를 비교해 보면, 정탐하는 것은 똑같다. 오늘 2절 말씀도 보면, 아이 성 전투는 정탐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에서 사람을 벧엘 동쪽 벧아웬 곁에 있는 아이로 보내며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올라가서 그 땅을 정탐하라 하매 그 사람들이 올라가서 아이를 정탐하고”(2).

 

그런데, 명확히 다른 것이 있다. 아이 성 정탐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없다. 여리고 성 정탐은 매우 어려웠다. 정탐꾼들이 죽을 뻔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기생 라합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다. 아이 성 정탐은 상대적으로 쉬웠다. 정탐하면서 어떤 일이 전혀 벌어지지 않았다. 매우 순조로웠다. 그러나 거기에는 아무런 하나님의 역사가 없었다.


우리는 여기서 무엇이 형통인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아무 일도 안 일어 나는 것이 형통인가? 아니면, 무슨 일이 일어나서 그 일 때문에 힘들어도 그 안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는 것(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형통인가? 우리를 힘들게 하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건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니, 살면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혹시 그 사건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라. 어떤 사건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 가장 힘들고 불행한 일이다. 물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어떤 어려운 일이 일어나기를 바랄 필요는 없다. 바라지 않아도, 우리의 삶은 사건의 연속이다.

 

아이 성 전투의 다른 점 또 하나는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이 없다는 것이다. 여리고 성을 치르기 전,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주었으니”(6:2). 그리고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명령을 주신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시고,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며 명령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백성은 여호수아의 음성을 들었다. 그런데, 아이 성 전투에는 그런 게 전혀 없다. 아이 성 전투에서는 정탐꾼이 여호수아에게 말하고, 여호수아는 그 말을 따른다. 정탐꾼과 여호수아의 음성만 있을 뿐, 하나님의 음성이 전혀 없다.

 

2016818, 인생의 중요한 사건을 놓아두고 기도하던 중 내가 쓴 짤막한 글이다.

 

일이 잘 안 되어서 고통 받는 것보다 일이 잘 되기를 기도하느라 고통 받는 것이 훨씬,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낫다. 일이 잘 안 되어 받는 고통은 아픔을 주지만, 기도하느라 받는 고통은 기쁨을 준다. 기도의 고통은 치유하는 능력과 감추어진 것을 보게 하는 능력이 있다. 온전해질 수 있고 무지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자기를 굴복시켜 기도의 자리에서 고통 받는 것이 얼마나 유익한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만 몰랐지, 7 1절의 말씀을 읽으면서 아이 성 전투에 임한 성경의 독자들은 모두 아이 성 전투의 결과를 짐작했다. 결국 아이 성 전투는 패배로 끝난다. 너무 허무하게 끝난다. 정탐꾼의 말대로 3천 명의 군사만 올려 보냈다가 별다른 전투도 해보지 못하고 36명의 전사자만 낸 채 허무하게 패배하고 만다. 그 허무한 전투의 패배로 인해, 여리고 성의 승리의 기쁨은 온 데 간데 없고,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큰 슬픔에 빠지고 만다.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같이 된지라”(5).

 

이에, 여호수아는 절망에 빠져 하나님 앞에 엎드린다.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쓰고 저물도록 있다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넘겨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쪽을 만족하게 여겨 거주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나이다 주여 이스라엘이 그 원수들 앞에서 돌아섰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6-8).

 

여리고 성 이야기와 아이 성 이야기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이야기이다. 여리고 성 전투는 외적인 전투의 이야기이고, 아이 성 전투는 내적인 전투의 이야기이다. 외적인 전투(여리고 성)를 아무리 잘해도, 내적인 전투(아이 성)에서 무너지면 결국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뿐만 아니라 부끄러움과 고통을 당하게 된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이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2-3).

 

사랑하는 여러분, 큰 일, 위대한 일을 이루려 하지 말고, 이 마음을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시는 데 전력을 다 하시라. 큰 일, 위대한 일은 내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신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헤렘법을 지키는 것이다. ,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아간으로 대표되는 이스라엘 백성이 실패하는 것은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것’(헤렘법)이다. 아이 성 전투는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 준다. 여호수아는 아이 성 전투 패배 뒤에, 하나님께 엎드린다’. 엎드리는 것은 기도의 자세이다. 민수기서에 보면 모세는 문제가 있을 때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렸다. 모세의 제자 여호수아는 모세에게서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 하나만은 확실해 배웠던 것 같다. 문제가 발생하니까 여호수아도 모세처럼 하나님 앞에 바짝 엎드린다.

 

엎드림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무슨 일을 하기 전의 엎드림이고, 다른 하나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의 엎드림이다. 둘 다 중요하다. 그런데 무엇이 더 어려운 것 같은가?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 전투를 앞두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 전투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아이 성 전투를 앞두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지 않았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아이 성 전투에서 패배했다.

 

그런데, 신앙의 선조 여호수아의 위대함은 패배 후에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했다는 데 있다. 어떤 일을 앞두고 기도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그 일이 잘 되기 위한 간절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떠한 일이 잘 되지 않아 깊은 절망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일이 잘 되지 않으면 보통 사람들은 반발심이 일어나 하나님을 욕하고 부인한다. 엎드리기는커녕 고개를 쳐든다.

 

사랑하는 여러분,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거든, 계획처럼, 또는 기도한 대로 일이 잘 되지 않거든, 당황하거나 분노하지 마시고, 여호수아처럼 다시 한 번 엎드려 보시라.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 앞에 엎드린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10).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왜 아이 성 전투에서 패배하게 되었는지,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알려주신다. 벌써, 앞으로의 아이 성 전투가 어떻게 될 지 이 한 마디를 통해 예상이 되지 않는가?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

 

엎드리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기도는 고통의 자리이다. 쉽지 않다.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대개 사람들은 엎드리는 일, 기도하는 고통의 자리로 오지 않는다. 하지만, 위에서 말했듯이, 일이 잘 안 되어서 고통 받는 것보다 일이 잘 되기를 기도하느라 고통 받는 것이 훨씬,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낫다. 일이 잘 안 되어 받는 고통은 아픔과 부끄러움을 주지만, 기도하느라 받는 고통은 기쁨과 승리를 준다.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요즘 개신교의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개혁개혁을 외친다. 그러나, 개혁은 외적인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에서 오는 것이다. 외적인 전투(여리고 성 전투)에서 아무리 승리했어도, 내적인 전투(아이 성 전투)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울리는 꾕과리에 불과하다. 시끄럽기만 하지 열매가 없다.

 

우리 구주 예수님은 일을 앞두고(십자가) 엎드리는 일, 기도의 고통의 자리로 들어서는 일을 기꺼이 감당하셨다. 그랬더니,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패배)에도 불구하고, 부활의 승리를 온 몸으로 안으셨다. 이제 우리가 여호수아서 8장에서 보게 되겠지만(이것이 궁금하신 분들은 토요일 새벽기도에 나오시라!), 기도의 고통의 자리로 기꺼이 들어간 여호수아는 아이 성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나 아이 성의 큰 승리’, 부활의 승리를 온 몸으로 경험하게 된다.


부활의 승리는 믿는가?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금 어느 자리에 있는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크고 위대한 일은 우리 주님께서 이루어주신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크고 위대한 일이 아니라, 주 앞에 엎드리는 것이다. 오직, 주님께만 마음을 두라. 갈보리 언덕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엎드린우리를 일으켜 세우시며 우리와 함께 부활하실 것이다. 나는 그것을 믿기에, 오늘도 주 앞에 엎드린다.

 

엎드림을 간구하는 기도

 

주여, 엎드리게 하옵소서.

아이 성 패배의 아픔이 쓰라리고 부끄럽더라도

고개를 쳐들고 불평과 원망을 늘어놓지 말게 하시고

오직 주 앞에서 엎드려

주의 선하심을 간구하게 하옵소서.

여호수아가 위대한 신앙의 선조가 된 것은

그가 전쟁에 능한 용사이기 때문이 아니요

그가 크고 위대한 일을 이루었기 때문이 아니요,

그가 스승 모세에게 배운 가장 중요한 한 가지,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주 앞에 엎드린 것 때문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외적인 전투에서 아무리 큰 승리를 거두었어도

내적인 전투에서 패배하면 울리는 꽹과리처럼

시끄러운 쇳소리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셔서

이 마음이 오직 주를 향하여 엎드린

겸손한 주의 종이 되게 하옵소서.

주 앞에 엎드리는 고통을

기꺼이 감당하게 하옵소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기꺼이 엎드린 우리에게도

찬란하게 임하게 되는 줄 믿사옵나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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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