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1. 17. 10:26

들을 귀

(마가복음 421-29)


오늘 말씀에는 두 가지의 비유가 나온다. 등불비유와 부지중에 자라는 씨 비유다. 앞에서 예수님은 비유를 사용하는 이유를 감추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안 된다.

 

22절 말씀은 번역을 어렵게 했다.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이것을 쉬운 말로 옮겨 보면 이런 뜻이다. “무엇이든지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무엇이든 감추어진 것은 나타나기 마련이다.” 조금 역설적이긴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숨겨져 있는 것 같고, 감추어져 있는 것 같으나, 결국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오늘 말씀은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드러나는 경우를 말한다. 두 문장이 그것을 밝히고 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그리고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이다. , ‘들을 귀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나라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귀 없는 사람은 없다. 특별한 문제를 가지고 타고난 사람이 아닌 이상, 모두 귀가 있다. 그런데,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뜻이 무엇인가?

 

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는 무슨 말인지, 잘 이해 안 된다. 쉬운 말로 옮기면 이런 말이다. “너희는 듣는 말을 새겨들으라. Take care what you listen to”. 우리의 일상을 보면, 우리가 얼마나 건성으로 듣는가 알 수 있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듣고 싶은 말만 듣는다. 듣더라도 새겨듣지 않는다.

 

기독교 전통의 영성훈련에 기도어린 경청(Prayful listening)”이라는 말이 있다. 영성가들이 한결 같이 강조하는 것은 영성훈련의 처음이자 마지막은 자기의 마음과 귀를 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라고 한다. ‘기도어린 경청이란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때 기도하는 심정으로 듣는 것을 말한다. 기도어린 경청을 한다는 것은 상대방이 어떤 이야기를 하면, 자기의 자아를 죽이면서 듣는 것을 말한다. 기도어린 경청이란 것은 상대방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이라기보다도, 타자가 오롯이 나에게로 다가 올 수 있도록 나의 전 존재를 온전히 개방하는 것을 말한다. <에큐메니안, <너희가 영성을 아느냐?③> ‘기도어린 경청김오성 목사>

 

성경은 계속해서 예수님의 말씀에 기도어린 경청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의 모습을 보여 준다. 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들이다. 이들은 그 당시 최고의 종교지도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권위와 지식에 예수님의 말씀을 비추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계속하여 거부한다. , 그들은 자신의 존재를 예수님께 온전히 개방하지 못했다.

 

성경에서 말하는 들음은 단순히 귀를 상대방의 입에 가져다 대고 듣는 것이 아니라, 말하고 있는 상대방에게 자신의 존재를 여는 행위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예수님 안에서 지금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이것을 그림을 보면서 설명하면 좀 더 잘 이해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다음 그림은 Giovanni Battista Caracciolo(지오반니 바티스타 카라촐로)가 그린 <The Young Saint John in the Wilderness, 광야의 젊은 세례 요한>이다. (그림)



요한복음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the Lamb of God)이로다”(1:29).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했다. 이것은 라틴어로 “Ecce Agnus Dei”(Behold the Lamb of God)라고 한다.

 

그런데, 이 그림을 보면, 젊은 세례 요한은 “Ecce Agnus Dei”라는 글자가 써 있는 지팡이를 발 앞에 내팽개치고, 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 원래 세례 요한의 영성은 이 한마디로 표현된다. “그는 흥하여야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3:30). 세례 요한의 손가락 또는 삶은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존재여야 한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 그림에서는 세례 요한의 손가락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지 않고, 자기 자신을 가리킨다.

 

이것은 배교나 다름없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이 그림을 보고 추적하기 쉽지 않지만, 오늘 말씀에 비추어 보면, ‘들음에서 멀어지면 바로 이와 같은 상황이 발생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열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언제나 자기 자신의 세상에 갇혀 산다. 자기 자신의 세상에 갇혀 사는 자들은 정의와 평화, 사랑과 생명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지 못하고, 그 나라가 자신의 삶에 임하게 되는 것을 기대하지 못한다. 그는 그렇게 멸망 당하고 만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열고 그 나라를 받아들인 자들에게는 구원이 임한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비유는 부지중에 자라는 씨 비유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부지불식 간에 씨에서 싹이 트고 이삭이 나고 곡식이 맺히는 것처럼 부지불식 간에 그 나라를 사모하는 자의 삶 속에서 임한다. 농부의 수고에도 불구하고, 싹이 자라고 열매가 맺는 것은 전적으로 땅의 힘에 달려 있다. 그처럼, 하나님 나라가 그 나라를 사모하는 자들의 삶에 임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달려 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더 하나님만을 사모하게 된다.

 

자기 자신에게 갇혀 있는 자에게 무슨 소망이 있는가? 우물 안 개구리에게 무슨 소망이 있는가? 그러나, 마음을 열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자신의 삶 속에 임하는 소망을 꿈꾼다. 하나님 나라는 종말론적이기도 하지만, 현재적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사역은 그것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지금 여기에 임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귀신을 내어쫓고, 죄를 사하시고, 병자를 고쳐주셨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지금 나의 삶에 임하기를 소망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축귀와 용서, 그리고 치유의 역사가 우리의 삶 가운데서 이루어질 것을 기대해야 한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떠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대하는가? 예를 들어, 1) 암 병 환자는 암 병이 없는 몸을 기대할 것이다. 2) 마음이 아픈 자는 눈에 눈물 나는 일이 없는 세상을 기대할 것이다. 3) 가난한 자(돈이 없어 고통 받는 자)는 가난에서 벗어나기를 기대할 것이다(돈 때문에 고통 받지 않았으면 할 것이다). 4) 이런 저런 이유로 차별 받는 자들은 차별 없는 세상을 기대할 것이다. 5) 어린 자식을 잃은 부모는 죽어서라도 그 자식을 다시 만나기를 기대할 것이다. 6) 땀흘려 일군 농작물을 빼앗기는 가난한 농민에게는 자기가 땀흘려 일군 농작물을 누군가에게 빼앗기지 않고 가족들과 배부르게 먹는 것을 기대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것(하나님 나라, 물론 우리의 좁은 생각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지만)이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귀 있는 자만 그의 말씀을 듣고 이러한 소망을 품고 살 수 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열어야 한다. 존재를 열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시고, 그 안에서 기대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 거라고 하는 기대를 가질 수 있다.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기대하지 않는 것은, 매우 불성실한 태도다.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기대를 품고 희망 가운데 사는 자와 자기 자신에게 갇혀 아무런 기대도 없고 희망을 갖지 못하는 자의 삶은 같을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소망이 가득하길 바라신다. 소망이 가득한 삶, 생명이 가득한 삶의 첫 발걸음은 들을 귀를 갖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도어린 경청을 꼭 실천하고 실현하여, 하나님에 의하여 부지중에 반드시 임하는 하나님 나라를 각자의 삶 속에서 경험하며 사는 신실한 주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소망해 본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믿음이 있다는 것  (1) 2016.11.30
최고의 감사  (0) 2016.11.22
주님께 비스듬히 기대기를 간구하는 기도  (0) 2016.11.13
비스듬히  (0) 2016.11.13
우리는 성도입니다 (만성절)  (1) 2016.11.09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