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1. 22. 12:35

최고의 감사

(렘 23:1-6 / 23:33-43 / 1:15-20)

 

오늘은 추수감사절이기도 하지만, 교회력에 의하면 그리스도 왕 주일이기도 하다. 그리스도 왕 주일은 비교적 최근에 등장한 교회력인데, 반기독교 정권이나 세속적 정부에 의해 핍박 받는 교회를 위하여 제정된 교회력이다.

 

이라고 하는 개념은 현대 헌법적 민주주의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개념이다. 1789714일에 촉발된 프랑스대혁명 이후 급속도로 발전된 민주주의의 권력에 대한 기본 개념은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이다. 이 민주주의의 기본 개념을 받아들여 민주주의국가를 이룩한 나라에서는 더 이상 왕권의 개념은 없다.

 

민주주의의 개념이 발전되기 전의 왕권의 기본개념은 왕권 신수설이었다. , ‘왕권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이다. 이 사상을 근간 삼아 절대권력을 휘둘렀던 대표적인 왕이 프랑스의 루이 14세이다. 그런데, 이것은 민주주의의 권력개념과 정면으로 대치하는 개념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권력은 국민에게 있다. 국민은 대의제도와 선거제도를 통해 권력을 대표(President, 대통령)에게 양도한다. 대통령의 임무는 국민이 양도해준 권력으로 나라의 살림을 국가의 모든 국민이 만족하도록 운영해 나가는 것이다. , 대통령은 국민을 섬기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지 국민 위에서 군림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러한 헌법과 대의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왕권은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을 으로 고백하고 있는데, 우리에게는 당연한 것이 기독교 외부에 있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상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 기독교인들도 그리스도의 왕권을 세속적 왕권과 헷갈리면 안된다. 그리스도의 왕권은 세상에서 흔히 경험하는 타락한 왕권이 아니라, 예레미야서에서 증언하고 있는 것처럼 여호와는 우리의 공의이시다라는 고백을 담고 있는 거룩한 왕권이다.

 

예레미야는 유다의 왕들을 혹독하게 비판한다. 그들은 공직을 잡긴 했으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직을 수행하지 않았다. 부분적으로, 그들은 이방 신 숭배를 지속적으로 지원했다 (우상숭배 방관 및 조장). 이게 전부가 아니다. 왕은 모든 사람들, 특히 사회적 약자들이 정의에 접근 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는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정의 구현 실패). 그들은 자신의 삶이나 백성들의 삶 가운데서 의로운 삶을 보여주지 못했다(본이 되지 못했다, 성결 실패). 그들은 군사적, 정치적 수단으로 국토를 방어하는 데서 만 약간의 성공을 이루었지만, 하나님의 뜻이나 백성들의 유익보다 자신의 이익에 우선적으로 관심을 보였다. 이 왕들은 백성들을 돌보는 데 게을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백성들의 삶을 파괴하고 삼켜버렸다.

 

왕들이 자기의 의무를 제대로 감당하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의 안위에만 관심을 갖는 것 때문에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져들었고, 백성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자기의 의무를 제대로 감당하지 않는 왕들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동시에, ‘그들을 기르는 목자들을 그들 위에 세우겠다고 약속하신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본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23:5-6).

 

지도력의 부재로 인해 나라가 어려울 때,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에게 약속하셨다. 악행을 저지르는 지도자는 심판하시고, 대신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지도자를 보내주시겠다고! 우리가 어려운 가운데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이 약속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 외에 우리가 어디에서 희망을 가질 수 있는가!

 

누가복음의 말씀은 이 약속의 말씀이 성취된 것을 보여준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약속의 말씀이 나사렛 예수에게서 성취되었다고 믿고 고백한다. 예수는 다윗에게서 난 한 의로운 가지이다. 그를 통하여 유다와 이스라엘이 구원 받았고, 온 인류가 구원 받았다고 믿는다. 예수의 이름은 바로 임마누엘’,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는다.

 

오늘 누가복음의 본문에서는 예수에게 일어난 구원 사건을 믿지 않는 자와 믿는 자가 등장한다. 해골(골고다 언덕)이라는 곳에 십자가가 세 개 세워진다. 예수님은 가운데 십자가에 달리시고, 두 행악자 중 한 명은 예수님의 오른편에, 다른 한 명은 예수님의 왼편에 달린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위의 패에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글자가 써 있었다.

 

십자가 처형을 집행하던 관리들과 군인들은유대인의 왕이라 써 있는 패를 보면서 예수님을 희롱했다.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메시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 중 한 명도 예수님을 희롱했다. “네가 그리스도(메시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예수님의 왼편 행악자와 오른편 행악자 중 누가 이 말을 했는지 모른다. 다만, 우리는 오른편 행악자가 구원 받았다고, 다른 말씀을 통해 추측할 뿐이다. ( 25: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리고 함께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와 대화한 이야기도 누가복음에만 나올 뿐이다.)

 

이들은 여전히 세속적 왕권의 틀에서 예수님의 왕권을 바라보았던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구원은 힘의 구원이었다.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왕권의 개념은 로마 황제를 통해서 획득한 것이었다. 로마 황제는 그 당시, 하나님의 아들로 불렸고, 메시아로 불렸고, 왕으로 불렸다. 이 모든 것은 바로 힘과 폭력에 의해서 성취한 것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패를 보며 예수도 로마 황제처럼 힘과 폭력에 의해서 자기들과 자기 자신을 구원할 것을 기대하고 요청했던 것이다.

 

예수님의 왕권은 그들이 생각한 힘과 폭력에 의한 왕권이 전혀 아니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임한 하나님 나라의 왕권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잡아다가 십자가에 매달았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이유는 예수님의 양 옆에 달린 행악자들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한 명의 행악자의 입을 통해서 이렇게 증언한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23:41).

 

예수님의 죽음은 죄에 의한 죽음이 아니라, 죄를 위한 죽음이었다. 예수님의 죽음은 죄에 의한 폭력적 죽음이 아니라, 죄의 폭력을 심판하시는 공의의 죽음이었다. 우리는 그것을 누가복음 본문에서 확인한다. 예수님은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를 이렇게 구원하신다. 행악자는 예수님께 이렇게 간구한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예수님은 그의 간구에 이렇게 응답하신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23:43).

 

추수감사절을 맞아, 우리는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감사드릴 이유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다. 어느 초등학교에서 어떤 어린 아이가 빵을 주워 먹는 사진을 보여주며 이런 문제를 냈다고 한다. “다음 그림을 보면서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그림 속의 아이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5분간 그림을 보며 난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생각해 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이렇게 명쾌하게 대답한 아이의 답이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된 적이 있습니다. “남의 아픔을 보고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아는 것은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같이 아픔을 해결해 주려 하고 같이 잘 먹고 잘 살아야 될 것이다.” 정말 멋진 대답이다.

 

우리의 감사는 어떠한 감사인가? 생각해 보면, 우리의 감사는 다른 이와 비교해서, 비교 우위에 선 것에 대한 감사가 대부분이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심각한 경쟁사회이다. 그렇다 보니, 경쟁에서 이긴 것에 대한 감사를 당연하게 생각한다. 어떤 교회의 감사헌금봉투에 적힌 내용이다. 1) “수습 잘 끝내고 정식 계약하게 하심 감사합니다.“ 2) “그 크신 주님의 사랑과 은혜로 LG트윈타워 통합물류 입찰에 주님의 회사인 당사를 선정케 해주신 나의 주님께 감사 또 감사 드립니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런 문제 없는 자연스러운 감사이다. 그러나, 뒷면을 잠시 들여다보면 얼마나 심각한 감사인지 금방 알게 된다. 수습을 잘 끝내고 정식 계약을 하게 된 것은 감사한 일이나, 수습직원들이 이 사람 한 명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이 사람과의 경쟁에서 져서 정식 계약직을 얻지 못한 탈락자가 있을 것이다. 입찰 건도 마찬가지다. 이 회사가 독점 입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른 경쟁회사를 물리치고 입찰에 당선되었을 것이다. 자기 회사는 입찰에 당선되어 좋겠지만, 입찰 경쟁에서 진 회사는 회사 운영이 힘들어졌을 것이다.

 

나를 경쟁에서 이기게 하시고 비교우위에 올라서게 하시는 분이 우리의 구세주이시고 우리의 왕이신가? 물론 힘과 폭력을 쓰는 로마 황제 같은 구세주와 왕이라면 그럴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왕은 그런 분이 아니시다. 우리가 믿는 우리의 왕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비교우위에 올라서게 하시고, 우리를 경쟁에서 이기게 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것 때문에 그분이 왕이 아니시다. 만약, 여러분 중 비교우위에 올라서게 하시고, 경쟁에서 이기게 하시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왕으로, 메시아(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믿는 분이 있다면 예수님을 완전히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초등학교에서 낸 문제 중에 이런 문제도 있었다. 1) “옆집 아주머니께서 사과를 주셨습니다. 뭐라고 인사해야 할가요?” 답은, “감사합니다.”이다. 그러나, 한 초등학생은 이렇게 답을 적었다. “뭘 이런 걸 다~” 2) “부모님은 왜 우리를 사랑하실까요?” 답은, “우리를 낳아주셨으니까.”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러나, 한 초등학생은 이렇게 답을 적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것은 요즘 사람들이 감사해야 할 것에 대하여 얼마나 온전히 감사하고 있지 못하며 사는지를 보여주는 풍자이다.

 

추수감사절을 맞아, 우리는 왜 감사하는지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다른 이와 비교해서 내가 우위에 올라섰기 때문에, 다른 이와 경쟁해서 내가 이겼기 때문에 주님께 감사하고 있다면, 그러한 감사는 우리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실 감사는 아닌 것 같다.

 

온전히 감사해야 할 것에 감사를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비교우위에서 떨어졌을 때, 경쟁에서 졌을 때, 우리는 어떠했는가? 그래서 감사한 적 있는가? 그럴 때 하나님께 감사하다며 감사헌금봉투에 감사의 이유를 적어 헌금을 드린 적이 있는가? 비교우위에 올라섰을 때, 경쟁에서 이겼을 때 감사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 비교우위에서 떨어졌을 때, 경쟁에서 졌을 때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무시당하고 핍박당하고 죽어도 괜찮다. 우리에겐 부활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는 우리의 왕 예수 그리스도는 쩨쩨하게 우리를 남과의 비교우위에서 올라서게 하시고, 경쟁에서 이기게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골로새서가 증언하고 있듯이,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고, 모든 왕권들과 주권들과 통치자들과 권세자들 보다 먼저 계신 분이고, 교회의 머리시며,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고,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신 분이시다. , 주님은 공의를 행하시는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왕은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모든 만물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케 하신 분이시다. 우리의 왕,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감사이시다. 이 최고의 감사를 모르면서, 이것에 대하여 감사할 줄 모르면서, 다른 감사가 어떠한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 최고의 감사이신 우리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해요~’라는 찬양이 저절로 나올 것이지만, 우리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최고의 감사로 알지 못하는 자들은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일로 인해 일희일비(자신이 생각하기에 좋은 일 있으면 막 감사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나쁜 일 있으면 절망했다)하며 감사를 모르며 살아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우리에게여호와 우리의 공의라는 이름의 왕을 주셨다. 그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가 바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만에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의 왕이신 것을 고백하고 선포한다.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하시는 우리의 왕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자는 구원을 받겠고 평안히 살 것이다. 이것은 주님의 약속이다. 우리의 왕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에게, 감사 또 감사가 넘치게 될 줄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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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