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8. 12. 11. 10:57

멈춤과 구원

(누가복음 3:1-6)


평화의 촛불을 켰다. ‘평화라는 단어는 매우 정치적인 용어다. 적어도 요즘 사람들은 그렇게 느낀다. 예수님 당시에도 평화는 정치적인 용어로 쓰였다. ‘팍스 로마나’. 로마의 평화. 로마가 일군 평화. 그런데, 그 평화는 온전한 평화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로마의 평화는 로마의 힘(무력, 폭력)을 통해 일궈낸 것이었기 때문이다.

 

참 아이러니 하지 않는가? 평화는 폭력이 없는 상태인데, 그 상태에 이르기 위해서 폭력을 써야만 한다는 것 말이다. 오늘 말씀도, 정치적인 상황을 언급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세례 요한이 광야(빈 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때는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레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

 

평화의 왕 예수 그리스도가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그 지역을 통치한사람들의 명단이 나열되고 있다. 디베료 황제, 본디오 빌라도, 헤롯, 빌립, 루사니아, 그리고 안나스와 가야바, 이 사람들은 나름대로 그 시절 평화를 지키지 위해서 노력했던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의 지도력을 통해 그 당시 세상은 나름 로마의 평화(팍스 로마나)’를 이루며 살았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위에서 나열한 지도자들과 요한을 대조시키고 있다. 팍스 로마나의 평화를 이루고 살던 사람들은 모두 나름 이었으므로, 궁전에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곳에서 세상을 통치하고 다스렸다. 그런데, 그들과는 달리 요한은 빈 들에서 살았다. 그리고 요한은 그 빈 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요한이 받은 말씀은 생뚱맞은 말씀이 아니었다. 그가 받은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내려온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 요한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인물, 그리고 다른 예언을 전하는 선지자가 아니라, 구약의 전통에 서 있는 정통 예언자라는 뜻이다. (구약은 신약의 예언이고, 신약은 구약의 성취다.)

 

요한이 받은 이사야의 책에 있는 말씀은 다음과 같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4-6).

 

이것은 이사야서 403-5절의 말씀이다. 골짜기의 메워짐, 산과 언덕의 낮아짐, 고르지 않은 곳의 평탄해짐, 거친 길이 평지가 되는 것은 모두 평화와 평등을 의미한다. 이것은 위에서 언급한 이 세상의 왕들과, 요한이 예비하고 있는 주님의 대조된 모습이다.

 

세상의 왕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평화를 이룬다고 하면서, 골짜기를 만들고, 산과 언덕을 만들고, 울퉁불퉁하고 거친 길을 만들었다. 나누고 쪼개고 탄압하고 착취하고 억압하면서 자신들이 생각하는 평화를 만들어 갔다. 그러한 평화가 얼마나 가짜 평화인가. 그리고 그 평화는 누구를 위한 평화인가.

 

그러나, 주님의 평화는 낮고 쉬운 평화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11: 28-29). 주님은 세상의 왕들이 만든 골짜기를 메우고, 산과 언덕을 평평하게 하고, 울퉁불퉁하고 거친 길을 평탄하게 하신다.

 

본문은 빈 들에서 말씀을 받은 요한의 사역을 전하는데, 그의 사역은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는 것이었다. ‘회개의 세례에서 세례밥티즈마라는 헬라어의 번역이다. ‘밥티즈마가 가진 원어의 뜻은 침수’, 물에 잠기다이다. 그래서 지금도 Baptist(침례교)들은 세례를 베풀 때, ‘침수를 원칙으로 한다.

 

그러나, ‘회개의 세례(침례)’에서 방점이 있는 곳은 세례가 아니라, ‘회개이다. ‘회개방향을 돌이키는 것을 말한다. 회개는 마음의 방향, 영혼의 방향, 발걸음의 방향을 돌이켜, 하나님께로 되돌아 가는 것을 말한다. ‘방향을 틀어 돌이켜 돌아가려면가장 먼저해야 하는 것은 가던 길을 멈추는 것이다. 멈추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는 책을 세상에 출간해서 유명해진 스님이 있다. ‘혜민 스님이다. 혜민 스님과 자주 만나는 사람들이 있다. 야구선수 박찬호와 스타강사 김창옥이다. 세 사람이 자주 만난다고 한다.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 출생년도가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 사람과 나의 공통점도 같다. 우리 모두 1973년 생이다. 기회되면 그들의 모임에 끼고 싶다. 그래야 구색도 맞는다. 혜민과 박찬호는 불자고, 김창옥은 그리스도인이다. 내가 거기 껴야 불자 2, 기독교인 2, 이렇게 구색이 맞는다. (이 글을 혹시 읽으시거든, 나를 불러달라.)

 

나는 이런 생각을 가끔 한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는 책을 내가 썼어야 하는데. 불교 승려가 멈추면, 비로소 보인다라고 말했지만, 사실, 멈춘다는 것은 기독교의 용어이기도 하다. 그게 바로, 회개이다.

 

위에서 언급한 세상의 왕들은 멈추는 법을 몰랐다. 그들은 팍스 로마나라는 명분 아래, 계속해서 폭력을 저질렀다. 그 폭력을 멈추지 않았다. 폭력을 멈추기 위해서 또다른 폭력을 저질러야만 했다. 결국 그들은 팍스 로마나의 명분으로 하나님의 아들까지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는 폭력을 저질렀다. 멈추지 못하고 끝까지 간 것이다.

 

요한이 빈 들로 간 이유는 멈출 줄 모르는 그 왕들과 다른 길, 다른 삶을 살기 위함이었다. 요한은 빈 들에서 모든 것, 생각하는 것, 행동하는 것, 세상의 풍조를 따라가는 것, 그 모든 것을 멈추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멈추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못한다.

 

멈추지 못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멈추지 못하니, 나 자신이 안 보이고, 멈추지 못하니, 배우자, 그리고 자녀들이 안 보이고, 멈추지 못하니, 이웃이 안 보이고, 멈추지 못하니, 하나님은 더더군다나 안 보인다. (나 스스로 회개 많이 했다. 아들이 20파운드 살이 빠지는 게 안 보였다. 얼마나 못된 아버지인가. 한동안 죄책감 속에 살았다. 그래서 이런 시를 썼다.)

 

죄책감

 

라면을 먹는다

면발이 꼭 눈물 같다

목구멍으로 칼칼하게 넘어간다

국물은 면발이 짜낸 눈물의 찌꺼기인가

맵고 짜다

마시면 탈이 날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냄비에 얼굴을 들이대는 무모함은

용기가 아니라 무지다

면발이 짜낸 눈물의 찌꺼기를 들이킨 바람에

몸은 하루 종일 퉁퉁 부어

죄책감을 끌어 안고 있다

(이 시는 라면에 대한 시가 아니라 나의 죄책감에 대한 시이다. 이런 게 시의 묘미다.)

 

세상이 만들어 놓은 골짜기를 오르내리느라 우리는 얼마나 멈추지 못하고 사는가. 세상이 만들어 놓은 산과 언덕을 넘느라, 울퉁불퉁하고 거친 길을 힘겹게 건너느라 우리는 얼마나 멈추지 못하고 사는가. 저 골짜기만 지나면, 저 산과 언덕만 넘으면, 저 거친 길을 건너면, 평화가 올 거야, 하면서 우리는 멈추지 못하고 산다.

 

평화는 질주하는 데서 오지 않고, 멈추는 데서 온다. 이 세상의 왕들을 따라가는 데서 오지 않고, 그들과는 다른 삶을 살겠다고 빈 들로 나가는 데서 온다. 그러한 행위 자체가 멈춤이고 회개이다. 멈추지 않는 자에게는 회개도 없고, 하나님의 말씀도 없고, 평화도 없고, 결국 구원도 없다.

 

멈추지 못하는 폭력을 거두라. 멈추지 못해서 자기 자신에게 가해지는 폭력, 멈추지 못해서 가족에게 가해지는 폭력, 멈추지 못해서 이웃에게 가해지는 폭력, 그 모든 것을 멈추라. 그리고, 요한처럼, ‘빈 들로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 우리의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볼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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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