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4. 9. 15. 05:13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

- 그리스도의 빛에서 보기 -

(삼상 17:41-51)

 

사무엘상 17장은 다윗의 용맹성에 대해서 묘사되어 있다.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사무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고 역사에 등장하게 된 다윗은 정신적 병 때문에 고통 받던 사울의 수금 타는 자로 왕궁에 입성하게 된다. 그때 다윗을 수금 타는 자로서 사울에게 소개한 자는 다윗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내가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을 본즉 수금을 탈 줄 알고 용기와 무용(a mighty man of valor)과 구변이 있는 준수한 자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더이다”(삼상 16:18). 여기서 소개되고 있는 것처럼 다윗의 용기와 무용은 골리앗과의 대면에서 증명된다.

 

사무엘상 14장에서 보았던 것처럼, 사울 왕의 장남 요나단의 기지로 인해서 블레셋을 물리치고 한 동안 블레셋과의 전쟁은 소강상태에 있었다. 시간이 지나 블레셋은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다시 일으킨다. 그런데 이때 블레셋은 골리앗이라고 하는 거인 같은 장수를 앞세워 이스라엘을 위협한다. 4절에 걸쳐 묘사되고 있는 골리앗의 위용은 압도적이다(삼상 17:4-7).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킬레스를 보는 것 같다. 골리앗의 위용에 주눅이 든 이스라엘 군사들은 아무도 그와 대적하기 위해 나서는 자가 없었다. 골리앗은 그런 이스라엘 군사들을 조롱했고, 이스라엘 군사의 심리를 무너뜨리기 위해 급기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까지 모욕한다. “내가 오늘 이스라엘의 군대를 모욕하였으니 사람을 보내어 나와 더불어 싸우게 하라”(17:10).

 

싸움을 돋우는 자골리앗의 모욕을 한 창 당하고 있을 무렵, 다윗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대치하고 있는 엘라 골짜기에 오게 된다. 다윗의 큰 형 셋이 그 전쟁에 참전하고 있었기에 아버지 이새가 형들의 안부를 살피고 오라 했기 때문이다. 다윗이 전장에 도착했을 때, 때마침 골리앗이 싸움을 돋우기 위해 이스라엘의 군대와 여호와 하나님을 조롱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골리앗과 싸우려고 나서는 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아무도 나서는 자가 없는 가운데 그들은 서로 이런 말만 주고 받았다. “(골리앗)를 죽이는 사람은 왕이 많은 재물로 부하게 하고 그의 딸을 그에게 주고 그 아버지의 집을 이스라엘 중에서 세금을 면제하게 하시리라”(17:25).

 

다윗은 이 상황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골리앗이 여호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골리앗과 상대할 의사를 내비친다.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거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17:26). 그리고 다윗은 자신이 골리앗과 상대하기 위해 나서려고 하는 이유를 상금 때문에 아니라 신앙 때문임을 밝힌다.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17:26).

 

다윗은 무엇보다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가 모욕 당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이것은 그가 얼마큼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지에 대한 증거이다. 마음 속 깊이 진실되게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자는 그것이 진실된 행동으로 나타난다. 어린 아이가 아무리 힘이 없어도, 사랑하는 부모님이 누군가에게 모욕을 당하고 있는 것을 보면 가만히 있지 않는 것과 같다.

 

다윗의 이런 마음은 사울 왕의 귀에까지 들어간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던 사울 왕은 다윗을 불러 참전 의사를 확인한다. 그리고 다윗은 이렇게 담대하게 말한다. “(골리앗)로 말미암아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17:32). 다윗의 이러한 용기는 가상하지만 그래도 골리앗과 싸우는 것이 무리하고 생각한 사울 왕은 다시 한 번 묻는다.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울 수 없으니리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라”(17:33). 이에 대해 다윗은 자신이 그저 소년이 아니라, 양을 치면서 양을 잡아 먹으려 하는 사자나 곰 등을 물리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골리앗과 싸워 볼만한 무용을 갖춘 자라는 것을 호소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사자나 곰을 물리친 것은 단순한 용맹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켜주셨기 때문이라고 신앙고백 한다.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이리다”(17:37).

 

다윗의 용맹과 신앙을 확인한 사울 왕은 다윗에게 나가서 골리앗과 싸울 것을 허락한다. 그리고 다윗에게 자신의 갑옷과 칼을 내어준다. 그만큼 다윗에게 신뢰를 보낸다는 뜻이다. 그러나 다윗은 갑옷과 칼이 불편하다고 말한 뒤, 자신이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물매와 돌 다섯개를 손에 쥐고 출전한다.

 

골리앗은 갑옷을 걸치거나 칼을 차지 않은 상태에서 물매만 가지고 자신을 상대하기 위해 나온 다윗을 보고 기가 막혀 한다.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왔느냐?”(43). 그러면서 다윗을 저주한 뒤 다윗을 공격하려 한다. 그때 다윗은 담대하게 이렇게 외친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45).

 

싸움은 굉장히 싱겁게 끝난다. 그토록 이스라엘 군대를 숨막히게 했던 골리앗이 다윗의 물매 돌 하나에 쓰러지고 만다. 골리앗은 이 싸움에서 칼 한 번 제대로 휘둘러 보지 못하고 죽는다. 앞에서 전개된 이야기에 비해서 허무하게 결말이 맺어진다. 그렇게 골리앗은 다윗의 물매 돌 하나에 인생을 마감하고 만다. 그리고 다윗은 골리앗을 사자나 곰보다도 못한 개 한 마리 쓰러뜨리듯이 쉽게 쓰러뜨린다. 골리앗을 앞세워 전쟁에 나섰던 블레셋은 골리앗의 죽음과 함께 사분오열되어 도망친다. 그리고 전쟁의 승리는 이스라엘의 것이 된다.

 

우리는 통쾌해 보이는 이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를 통해서 무엇을 생각해 보아야 하는가? 골리앗과 같은 문제가 우리 앞에 놓여져 있다 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두 물리쳐야 한다? 골리앗과 같은 문제가 우리 앞에 놓여져 있다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하나님을 모욕하는 자는 가만히 놔두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 전쟁은 여호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까, 그 분을 믿기만 하면 우리 삶에 있는 전쟁은 모두 해결될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무조건 이긴다?

 

위에서 열거한 것들도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를 통해서 엿볼 수 있는 교훈일 수 있겠으나, 나는 그것을 넘어서 위의 열거된 교훈의 위험성을 말하고자 한다. 구약성경을 읽는 데 있어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에서 읽어야 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시 말해, 성경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빛 아래서 성경을 읽지 않으면, 자칫 잘못하다간 성경이 오히려 폭력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보듯이, 그리스도는 폭력을 끝내신 분이지 폭력을 조장하신 분이 아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폭력은 정당화 될 수 없다.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에서 조장되고 있는 폭력의 메커니즘을 한 번 보자. 거기서 허용되는 폭력의 메커니즘은 바로 이 문구에서 온다.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느냐?”(17:26). 여기서 다윗은 블레셋 사람 골리앗은 할례 받지 않은이라고 존재를 상대화시킨다. 이것을 전문 용어로 타자성(otherness)’이라고 한다. 상대방에 대한 폭력은 몇 가지 절차를 걸쳐서 이루어지는데, 가장 먼저 행해지는 것이 바로 상대방을 타자로 만드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할례 받은 사람들의 집합이다. 이스라엘이라는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 할례를 않았다면 그는 이스라엘의 울타리 밖으로 내몰린다. 상대방에게 폭력을 가하려면 일단 울타리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 그래야 폭력이 행사되더라도 죄책감에 시달리거나 폭력행사에 대한 거부감을 없앨 수 있다. 지금 다윗이 골리앗을 그야말로 취급하며 한 방의 폭력으로 물리칠 수 있는 것은, 골리앗을 자신들의 울타리 밖에 있는 할례 받지 않은사람임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이 기독교의 경전으로 읽혀지기는 하지만, 구약성경은 유대인의 고유한 역사 속에서 형성되어 온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고유한 역사의식과 하나님 인식에 대한 이해를 갖지 않고 보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에 큰 위협을 가할 수 있다. 그래서 예로부터 기독교 역사는 구약성경을 신약성경의 빛에서, 즉 그리스도의 빛에서 봐야 한다고 늘 강조해 왔다.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를 표면적으로 읽으면, 승리는 폭력에 의해서 쟁취된다는 결론을 얻는다. 비록 다윗이 골리앗보다 외적으로 보기에 왜소했지만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골리앗을 이길 수 있었다는 논리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이긴다는 것이 맞기도 하지만 틀리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이기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폭력의 극대화를 통해서 승리를 쟁취하게 하시지는 않는다. 폭력을 통한 승리는 결코 그리스도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구원한 것은 이 세상의 공중권세 잡은 자들과의 폭력적인 전쟁을 통해서가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희생과 사랑을 통해서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것은 폭력이 아니라, 비폭력이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자들, 즉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철저하게 폭력에 저항하고 그리스도처럼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희생과 사랑을 통한 승리의 은혜를 누리는 것이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밖으로 소외되는사람은 아무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두가 안에 있는형제자매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자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3:28). 여기서 더 나아가, ‘죄인까지도 밖으로 소외시켜서는 안 된다고 성경은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기때문이다(5:8).

 

우리는 상대방에게 폭력을 행사하기 위해 너무도 쉽게 그들과 우리를 구별 짓는다. 폭력을 행사하기 위해 그들을 울타리 밖으로 내쫓는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폭력을 행사한다. 오히려 그들은 폭력의 희생자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진실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라면, 우리의 삶 속에 일어나는 그 어떠한 폭력도 용납해서는 안 된다. 폭력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 어떤 사람도 우리의 울타리 밖으로 밀어내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원수라 할지라도 사랑의 띠로 꼭 묶어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품고 있어야 한다.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는 그저 다윗의 용기와 무용을 보여주기 위한 에피소드 정도로만 읽은 것이 좋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성군으로서 유대인들이 다윗을 위대한 인물로 만들기 위한 장치였다는 것을 놓치면 안 된다. 다윗의 폭력 행위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모범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다. 다윗이 우리의 주님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님이다. 그리스도인은 폭력을 조장하는 자들이 아니라, 폭력에 저항하는 자들이다. 그리스도의 빛이 우리의 삶을 언제나 비추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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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9. 7. 23:03

신앙이란 무엇인가?

(고린도후서 12:7-10)

 

빌 포터 동영상 상영 --> https://www.youtube.com/watch?v=Sk9RR3JajC4

 

신앙은 한 마디로 규정할 수 없다. 다각도에서 살펴봐야 한다. 오늘 신앙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신앙은 이런 것이다라고 신앙의 모든 것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 신앙의 일부분을 말하는 것이다. 신앙의 세계는 깊고도 넓다. 신앙은 어떤 실체로서 우리가 정복할 수 있는 어떤 것, 손에 넣을 수 있는 어떤 것의 개념이라기 보다, 신앙은 길(Journey)이다. 신앙은 여정이다. 일평생 한 걸음 한 걸은, 꾸역꾸역 걸어야 하는 인생의 여정이다.

 

스페인에 있는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해서 들어보셨는가?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 순례길(Camino de Santiago) 또는 산티아고 순례길, 성 야고보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야고보가 복음을 전하려고 걸었던 길이다. 9세기 스페인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에서 성 야고보의 유해가 발견되고 성 야고보를 스페인의 수호 성인으로 모시게 되면서 오늘날 순례길이 생겼다고 한다. (출처: 위키디피아)

 

 

 

 

여러 갈래길 가운데 가장 알려져 있고 흔히 거치는 길로 '프랑스 길'이 있는데 절대 만만한 코스가 아니다. 프랑스 남부국경에서 시작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 산티아고 콤포스텔라까지 이르는 800km 여정이다. 하루에 26여 킬로미터씩 한 달을 꼬박 걸어야 하는 거리다. 마일로 고치면, 500마일, 하루에 16마일 정도를 한 달 동안 매일 걸어야 하는 거리다. 16마일이면, 5시간 정도 걸어야 하는 거리다.

 

신앙이란 이런 순례길을 걷는 것처럼, 인생의 순례길을 걷는 것과 같다. 신앙이 이렇게 순례길을 걷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신앙은 짧은 순간에 얻게 되는 쾌락이나 어떤 소유물이 아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어느 시점에서 시작하여 산티아고 대성당까지, 목적지가 나올 때까지 그 길을 그냥 걸어가는 것처럼, 신앙이란 삶의 여정을 그냥 그렇게 걸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길을 걸으면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 위해 오는 사람들은 대개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 온다. 그들이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고자 한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그들의 현재 인생이 힘들고 어렵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리고 인생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이 인생을 값지게, 의미 있게 사는 것인가? 우리는 이 질문을 늘 하게 된다.

 

본문의 주인공인 바울 이야기로 되돌아 가 보자. 바울도 인생을 값지고 의미 있게 살고 싶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그의 이름은 사울이었는데, 그때 그는 그의 삶을 그가 생각하는 나름의 의미 있는 곳에 헌신했다. 그것은 그가 그리스도인들을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죄하고 그들을 잡아 옥에 가두거나 처형하는 일이었다. 그것에 그는 열성적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의미 있는 일’, 즉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처단하려고 의기양양하게 가던 중, ‘길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것이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 길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울은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 히브리식 이름인 사울을 버리고, 헬라식(이방인) 이름인 바울로 불리며 새로운 삶의 여정을 걷게 된다.

 

사울이었을 때 그는 그 나름대로 신앙의 길을 걸으며 의미 있게 살았다. 그런데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정죄하고 감옥에 가두거나 그들을 처단하는 일이었다. , 우리는 모두 어떠한 길을 걷고 있지만, 그 길이 다 참된 인생의 길은 아니다. 사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바울로 바뀌어 새로운 인생의 길을 걷게 되는데,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걷게 된 신앙의 길은 이전의 길과 다른 길, 즉 생명을 살리는 길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길, 삶의 여정을 걸으면서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지를 보게 된다. 신앙의 길, 신앙의 여정, 삶의 여정에서는 생명의 일이 일어난다. 그렇다면, 생명의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무엇일까? 본문은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알려준다.

 

바울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다. 그런데 그 가시라는 것이 선척적으로 그가 몸에 지니고 있던 장애는 아니었다. 그는 먼 거리를 걸어서 전도다니던 전도 여행자였다.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그의 육체는 많이 지쳤고, 그리고 여러 지역의 풍토병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현재 바울이 지니고 있던 육체의 가시가 무엇인가에 대한 학문적 해답 중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그가 다닌 지역을 고려해서 낸 결과인데, 그것은 만성 말라리아의 한 종류의 병이라는 것이다. (첫 번째 바울의 복음, 마커스 보그 & 도미닉 크로산)

 

이 만성 말라리아는 계속해서 재발되는 병이었다. 그가 이렇게 만성 말라리아 때문에 고생한 이유는 그가 계속해서 이방지역을 순회했기 때문이다. 요즘 아프리카 지역에서 선교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위협이 되는 바이러스가 에볼라 바이러스인데, 그런 것과 같은 것이다.

 

바울은 신앙의 여정을 걸으면서 이렇게 힘든 일과 맞닥뜨렸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육체의 가시가, 그의 약함이 그의 신앙의 여정을 막지 못했다. 우리는 신앙이라는 것을 생각 할 때 한 순간에 얻는 그 무엇(구원) 정도로만 생각하고 마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신앙을 인생에서 만나는 어떠한 요행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신앙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신앙은 신적인 것을 통해 우리의 인간적인 것을 메우겠다는 얄팍한 심리가 아니다. 신앙이란 우리의 인간적인 것을 신적인 차원으로 끌어 올리는 존재의 고양이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본 <빌 포터>의 인생 이야기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빌 포터는 뇌성마비를 지니고 태어났다. 그래서 그의 행동과 말은 어눌했다. 만약 빌 포터가 신앙을 통해서 자신의 인간적인 것을 메우겠다는 얄팍한 심리를 가졌다면, 그는 우선 뇌성마비를 고쳐달라고 기도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우리의 부족한 것을 고쳐달라고, 채워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매우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식으로 자신의 가시에 막혀버리고 마는 데 있다.

 

빌 포터가 만약 신앙을 통해서 자신의 인간적인 것을 메우겠다는 얄팍한 심리를 가졌다면 그는 그의 가시를 통해 누군가에게 빌어 먹고 살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빌 포터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그의 인간적인 것, 뇌성마비의 가시를 뛰어 넘었다. 그는 자신의 가시 때문에 주저 앉지 않고, 그것을 뛰어 넘어 새로운 삶을 창조했다. 그는 도전했고, 노력했고, 결국 자신의 가시를 뛰어 넘어 값지고 의미 있는 인생을 만들어 갔다. 이것이 바로 신앙을 통해서 우리가 만들어 가는 창조사역이다. 신앙은 이처럼 인간적인 것을 신적인 차원으로 끌어 올리는 존재의 고양이다.

 

신앙은 그래서 또한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신앙은 창조사역이다. 신앙이란 내 삶에 일어날 것 같지 않았던 어떤 의미 있고 값진 일, 그리고 생명의 일이 생성되는 창조사역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의 여정, 그의 삶의 여정에서 일어난 일을 통해서 그것을 확인 할 수 있다.

 

마가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거라사 지방에서 군대 귀신을 축출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귀신 들린 사람은 공동체로부터 쫓겨나 무덤 사이에서 삶을 살았다. 공동체에서 쫓겨나 무덤에서 거주했던 그의 삶이 얼마나 비참했을 지 한 번 상상해 보라. 그는 자신이 귀신 들린 존재라는 육체의 가시 때문에 늘 괴로웠을 것이고, 사람들은 귀신 들린 그 사람을 늘 경계하며 그와 어떠한 교제도 나누지 않으려고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매일 같이 죽고 싶었을 것이다.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5:5).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돌보지 않고 늘 내쫓기기만 했던 그 사람에게 다가가서 그의 몸에 들어 있는 군대 귀신을 쫓아내 주신다. 그리고 그를 다시 공동체 안으로 돌려 보내주신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그의 신앙의 여정을 통해서 이루신 창조의 사역이다. 군대 귀신 들린 자에게 이런 날이 올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누구든지, 이 군대 귀신 들린 자는 그렇게 인생을 살다가 그렇게 비참하게 죽게 될 거라는 생각 밖에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 군대 귀신 들린 자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창조 사역이다.

 

성경은 온통 이런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범죄의 덫에 결렸던 사람들, 즉 세리처럼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이들에게 해를 입힌 사람들, 창녀처럼 돈을 벌거나 그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망가뜨린 사람들, 우리가 대부분 그러하듯 세상을 조금 더 얻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영혼을 잃어버리려(팔아버리려) 하는 사람들이 용서 받고 변화되었다”(배제와 포용, 111). 그냥 그렇게 살다가, 손가락질 받으며, 또는 죄책감에 싸여 인생을 자포자기하며 살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신앙을 통해서 일어나는 창조 사역이다.

 

여러분은 지금 길을 걷고 있는가? 여러분의 신앙은 어떤 신앙인가? 신적인 것을 통해 나의 인간적인 것을 메워보겠다는 얄팍한 신앙인가? 요행을 바라고 있는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나의 육체의 가시를, 나의 부족한 것을, 나의 인간적인 것을 신앙의 이름으로 그냥 정당화하면서 요행을 바라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신앙에 대해서 진지하게 묵상해야 한다. 신앙은 한 순간에 이루는 그 무엇이 아니라, 길고 지난한, 그러나 걸어야만 하는 여정이다. 길이다. 그리고 우리가 신앙의 길, 그 여정을 걷겠다고 용감하게 나선 것은 그 여정을 통해서 나의 인간적인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신적인 차원으로 끌어 올려지는 존재의 고양을 이루겠다는 결단이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는 도저히 우리의 인생에서 일어날 것 같지 않았던, 새로운 차원의 인생, 존재의 고양을 창조해 낸다.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신앙은 신적인 것을 통해 우리의 인간적인 것을 메우겠다는 얄팍한 심리가 아니다. 신앙이란 우리의 인간적인 것을 신적인 차원으로 끌어 올리는 존재의 고양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걷는 여러분의 신앙의 여정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일구어 가는 창조의 역사가 날마다 일어나기를 소망한다. 언제 우리 함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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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9. 4. 05:02

은혜는 은혜다

창세기 33

(창세기 28:1-9)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에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니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더라”(26:34-35).

 

이삭과 리브가는 에서가 가나안 여인들과 결혼한 것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축복 쟁탈전을 한 바탕 치르고 야곱에 대한 에서의 복수 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리브가는 이삭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며 야곱을 피신시킨다. “내가 헷 사람의 딸들로 말미암아 내 삶이 싫어졌거늘 야곱이 만일 이 땅의 딸들 곧 그들과 같은 헷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면 내 삶이 내게 무슨 재미가 있으리이까? I am tired of living because of the daughters of Heth; if Jacob takes a wife from the daughters of Heth, like these, from the daughters of the land, what good will my life be to me?”(27:46).

 

리브가는 야곱을 형 에서의 복수로부터 피신시키기 위해 다시 한 번 속임수를 쓴다. 물론 리브가가 며느리들 때문에 삶에 낙이 없다고 말한 것이 거짓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빌미 삼아 야곱을 멀리 떠나가게 한 것은 속임수였다. 야곱을 에서에게서 멀리 떨어뜨리려는 술수였다. 그런데 이삭도 리브가처럼 며느리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리브가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인다. 그리고 야곱을 불러 이 땅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고, 외조부와 외삼촌이 살고 있는 밧단아람에 가서 아내를 맞이하라고 당부하며 그를 떠나 보낸다.

 

이삭은 작은 아들 야곱을 떠나 보내면서 축복을 베푼다. 그런데 그 축복 내용을 보면 원래 야곱이 받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속임수에 의해서 야곱이 이삭으로부터 받은 축복은 원래 에서를 위한 것이었다. 거기에는 보편적인 현실의 복이 담겨 있는 반면에, 이제 고향을 떠나면서 야곱이 받는 복은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 즉 후손과 땅의 소유권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복이 담겨 있다. 사실 야곱과 리브가가 관심을 갖고 주의를 기울였어야 하는 복은 바로 이 복이었다.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내렸던 하나님의 특별한 복 말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주목해서 봐야 할 장면이다. 우리는 복 받기 원하지만 사실상 우리가 관심을 갖는 복은 하늘의 복이 아니라 이 땅의 복이다. ,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내렸던 하나님의 특별한 복, 하늘 나라의 복을 사모하기 보다, 오히려 이 땅에서의 보편적인 현실의 복을 추구한다. 이러한 경향은 우리의 삶을 자꾸 어렵게 만든다.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신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야곱은 선택 받은 자녀였다. 그는 형 에서처럼 이 땅에서의 보편적인 현실의 복을 추구하면 안 되는 거였다. 선택 받은 야곱이 추구해야 하는 복은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에게 내렸던 하나님의 특별한 복이었어야 했다. 그런데 야곱과 리브가는 엉뚱한 것을 탐냈다. 그 결과가 무엇인가? 가족 관계가 어그러지고, 어려움을 겪게 되지 않았는가?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신학적 관점과 구약성경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리스도인은 선택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이다. 그리고 기독론과 교회론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형제요, 새 이스라엘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하늘의 복은 세상 사람들과는 분명 다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한 확실한 자의식이 부족하다 보니, 결국 우리가 추구하는 복은 야곱과 리브가가 추구했던 것처럼 에서의 복, 즉 이 땅에서의 보편적인 현실의 복만 가로채려 드는 것 아니겠는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형제요, 새 이스라엘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복을 사모해야 한다. 그것은 마태복음 5장에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복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마태복음의 말씀을 그대로 옮겨 본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마태복음 5:3-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태복음 7:12)

 

특별히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우리가 평소에 추구하는 복과 여기서 제시되고 있는 복 있는 자들의 모습은 너무도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야곱과 리브가처럼 헛된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다름 없다. 우리는 에서에게 내려질 것을 어떻게 해서라고 빼앗으려 하는 욕심쟁이처럼 보일 때가 많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보편적인 현실의 복은 그들이 그냥 받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에서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이 받는 보편적인 현실의 복은 굳이 빌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은혜로 더해 주신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

 

야곱은 이제서야 자신이 빌고 받아야 할 복이 무엇인지 알았고, 아버지 이삭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 허락되었던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어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가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도 주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네가 거류하는 땅을 네가 차지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3-4).

 

에서는 저만치 서서 아버지 이삭이 동생 야곱에게 축복하는 장면을 모두 지켜 보았다. 에서는 그 장면을 보면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나는 왜 저렇게 아버지로부터 축복을 받지 못하는 것일까? 어떻게 하면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여 아버지로부터 축복을 받을 수 있을까?’ 참으로 처량하고 애처로운 장면이다. 살면서 이런 경험과 똑 같은 감정을 느낀 분도 있을 것이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인정에 대한 욕구가 있다. 인정 받고 싶어 하는 욕구는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 인정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된다. 자식이 부모로부터 인정 받고 싶은 마음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문제는 형제들로부터 비교되기 시작하면서 받는 인정에 대한 욕구 불만이다.

 

요즘에는 자식을 많이 낳지 않는 세대고, 형제와 비교되며 자라는 것이 드물기 때문에 가정에서 이러한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오히려 이러한 현상이 더 큰 문제를 낳는 것 같기도 하다. 형제와 비교되지는 않지만, 남의 자녀와 비교 되기 때문이다. 형제와 비교되면 물로 그것도 마음 아픈 상처로 남지만 그래도 그것이 큰 사회적 문제를 일으킬 정도는 아니다(물론 사회적 문제를 일으킬 정도로 발전되는 경우도 있다.) 남의 자녀와 비교되는 것은 자녀에게도 곤욕이고 부모에게도 곤욕이다. 남에게 뒤지지 않는 자녀를 만들려고부모는 자녀를 닦달하고 자녀는 그 닦달에 인생이 피곤해 진다. 자녀 또한 남에게 뒤지지 않으려는 욕심에 부모를 닦달한다. 친구가 좋은 옷을 입으면 자신도 입어야 하고, 친구가 비싼 학원에 다니면 자신도 다녀야 하고, 친구가 어학 연수를 하면 자신도 어학 연수를 해야 한다. 그 비용을 모두 부모가 감당해야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요즘 부모는 인생이 없다. 자녀들도 인생이 없다. 모두 인생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에서는 자신이 아버지에게 축복 받지 못한 원인을 자신의 결혼에서 찾았다. 에서에게는 그 말만 들리고 그것만 보였다. 물론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할 때 에서가 봤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어야 한다. 그런데 에서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 그것이 에서의 한계였다. 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지 못하고, 자신의 현실적인 문제만 봤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을 보자. “에서가 본즉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고 그를 밧단아람으로 보내어 거기서 아내를 맞이하게 하였고, 또 그에게 축복하고 명하기를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라 하였고”(6). 그리고 자신이 본 것에 근거해서 자기 자신을 돌아 보았을 때 이것이 보였다. “에서가 또 본즉 가나안 사람의 딸들이 그의 아버지 이삭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지라”(8).

 

이처럼 에서가 본 것은 매우 육적인 것이었다. 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보지 못했다. 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이 야곱에게 임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이것은 또 다른 비극을 낳는다. 에서는 자신이 본 것에 근거해서 다음과 같은 행동을 한다. “이에 에서가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 본처들 외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라”(9). 에서는 부모님의 친척과 결혼하는 것이 부모님의 호의를 얻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참으로 안타깝고 애처로운 장면이다.

 

이스마엘이 누구인가? 물론 이스마엘은 아버지 이삭의 형이었다. , 자신의 삼촌이었다. 그리고 이스마엘도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후손이었다. 그러나 그는 약속의 아들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신학적 측면에서, 이스마엘은 선택 받은 자손이 아니었다. 그런데, 에서는 그것을 전혀 고려하지 못하고 그저 부모님의 친척과 결혼하기만 하면 부모님의 호의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이스마엘의 후손이며 자신의 동족인 마할랏과 결혼한다.

 

은혜는 은혜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 그래야 그것이 이해 가고, 그것으로 인해 헛된 욕망을 저버릴 수 있다. 야곱이나 에서나 모두 이 점에서는 부족했다. 야곱도 자신에게 임할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헛된 방법으로 축복을 차지하려 했다. 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했다. 야곱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에게 임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렇게 분노를 살 것도, 부러움을 살 것도, 그리고 억울해 할 것도 아니다.

 

은혜는 그저 은혜일 뿐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일 뿐이다. 내가 무슨 행동을 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은혜를 받았다면 그저 감사하면 되고, 은혜를 받지 못했다면 그것도 감사할 뿐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복음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절망하거나 희망을 잃을 필요 없다. 왜냐하면 그 누구 하나 예외 없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자들이 추구해야 할 복이 무엇인지 산상수훈의 말씀과 자신의 삶으로 보여 주셨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백성이지 이방인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자는 야곱처럼 에서처럼 이방인이 구하는 것들만 구하게 된다. 은혜를 은혜로 받지 못하고, 복을 쟁취하려 들고 하나님의 마음을 얻으려고 불필요한 행동을 하게 된다.

 

은혜는 은혜다. 은혜를 은혜로 받을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를 사는 그리스도인의 자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보편적인 현실의 복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자녀로서 마땅히 추구해야 할 복을 사모한다. 그것이 무엇인지 그리스도에게 들었거든, 여러분도 가서 그와 같이 하라.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마태복음 5:3-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태복음 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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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8. 28. 05:11

무엇이 복인가?

창세기 32

(창세기 27: 24-46)

 

* "무엇이 복인가?"는 질문이 아니라 반문입니다.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축복을 받기 위한 축복 쟁탈전에서 야곱과 리브가의 계략이 성공을 거둔다. 이삭은 에서로 가장해서 들어온 야곱의 별미를 먹고 야곱을 온 힘 다해서 축복해 준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축복해 줄 때, '그냥 축복해 주면 되지 뭐 이렇게 별미까지 요구하면서 축복해 줄까'에 대한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축복에 대한 중요성을 망각한 의문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세계에서 살다 보니, ‘축복이라는 것도 일종의 미신처럼, 그리고 매우 종교적이고 피상적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인의 영성이 고대인의 영성보다 못하다. 성경에 나오는 것처럼 고대인들은 축복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그것은 단순한 말 장난이 아니라, 인생을 실제적으로 받쳐 주는 보이지 않는 힘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축복은 일종의 축제였다.

 

이삭이 아들에게 축복을 빌어주기 전에 별미를 가져 오라고 한 것은 축복을 위한 축제를 벌이기 위함이었다. 그가 축복을 빌어주기 전에 먹은 음식을 보라. “내 아들이 사냥한 고기를 먹고또 포도주를 가져가매 그가 마시고…”(25). 이처럼 음식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축제의 한 의식이다. 이렇게 축복을 위한 축제의 의식이 진행되고, 그 축제의 클라이막스인 축복이 선포된다.

 

축복의 첫 번째 내용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다(28). 하늘의 이슬은 비를 의미한다. 가나안 땅은 척박한 땅이었기 때문에 비가 제때 내리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다. 구약 성경에 간간히 등장하는 이른 비’, ‘늦은 비가 바로 그것을 가리킨다. 이제 이삭이 아들에게 축복하는 것은 하늘의 이슬, 즉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비를 통해 척박한 땅이 기름 진 땅으로 변하여 많은 수확을 얻게 되리라는 것이다. 기름 진 땅에서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얻게 되리라는 축복이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단순한 축복 같지만 이것은 풍요로운 나라에서 먹거리에 대한 별 걱정 없이 사는 사람들이 염두에 두어야 할 대단히 중요한 축복이다. 현대 사회(소위 말하는 제 1세계 또는 산업이 발달한 나라들)는 사람들에게 불필요한 환상들만 주입시키고 있다. 사실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현대 사회의 환상과 욕망을 다 걷어내면, 결국에 남는 것은 생명의 가장 기초인 먹거리이다. 다른 말로 하면, 결국 우리가 가장 감사해야 할 것은 굶지 않고 먹을 것이 충분이 있다는 것이다. 먹을 것만 있으면 감사의 조건이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 먹을 것을 앞에 놓아두고도 불평하기 일쑤다.

 

그러므로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축복은 매우 애정 어린, 매우 근본적인 축복인 것이다. 우리가 만약 이러한 축복을 누리고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욕심 부릴 것도 없고, 더 이상 불평할 것도 없다. 감사함으로 삶을 누리면 된다. 그리고 이렇게 풍요로운 먹거리가 오염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현대 사회를 가장 위협하는 것은 기후 변화로 인한 식량난이다. 과학자들에 의하면, 머지 않아 지구별에는 식량 폭동이 일어날 거라고 한다. '현재 이렇게 잘 먹고 잘 살고 있는데 무슨 뚱딴지 같은 말이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재앙은 서서히 닥치지 않고 갑작스럽게 닥치는 법이다. 그런 경고를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된다. 범 세계적으로 머리를 맞대고 해결 방안을 강구해야 할 때이다.

 

축복의 두 번째 내용은 복을 받는 자의 사회적 관계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표현된 언어 자체로만 보면 그렇게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는다.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니리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29). 요즘 한국 사회에서 한창 문제 되고 있는 사회적 용어인 갑을관계의 측면에서 보자면, 이 축복은 의 위치에 올라서게 될 거라는 축복 같아 보인다. 물론 누구든지 갑의 위치에 서게 되면 좋아한다. 을의 위치에 있을 때 갑의 횡포에 이를 갈던 사람도 갑의 위치에 올라서게 되면 개구리 올챙이 적 기억 못하는 격'이 되고 만다.

 

지금 이삭이 축복하고 있는 것은 야곱이지만, 원래 이삭의 축복은 에서를 위한 것이었다두 번째 축복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이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삭이 야곱을 위와 같이 축복했지만, 야곱의 삶에서 그 축복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인가?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이 축복은 애초에 에서를 향한 것이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에서는 이삭의 장자이다. 두 번째 축복 내용을 보면 그 축복은 장자를 향한 축복이다. 이삭은 에서에게 장자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축복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것은 곧 사회적 관계의 질서를 말한다. 장자의 나라가 섬김을 받고, 장자가 아우들의 주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장자가 축복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장자에게 함부로 저주 할 수 없고, 장자에게서 축복을 받는 것은 질서이다. 이것이 뒤집히면 사회적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매우 불편하고 복잡해 진다. 그러므로 야곱의 축복은 갑을관계를 형성하는 폭력적인 축복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질서를 말하는 평화의 축복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이런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이삭의 축복이 애초부터 에서를 위해 준비되었던 것이라면, 야곱이 굳이 이렇게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이 축복을 받을 필요가 있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어지는 이야기를 살펴보면서 도출될 것이다.

 

축복의 축제 가운데 이삭은 마음껏 아들을 축복한다. 이삭은 마지막 힘을 다해 아낌없이, 남김없이 축복을 베풀었다. 그러나, 그 축제가 끝나자마자 비극이 시작된다. 이삭의 진짜 장남 에서가 사냥감을 가지고 별미를 만들어서 아버지 이삭에게 당도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 일어나서 아들이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31). 이삭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좀 전에 분명 에서가 해 온 별미를 먹고 에서를 축복했는데, 또 다른 에서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삭은 묻는다. “너는 누구냐?”(32).

 

지금 축복을 간구하는 이가 다른 이가 아니라 진짜 에서라는 사실을 알아챈 이삭은 부들부들 떤다. 그런데 이삭이 이렇게 부들부들 떠는 이유는 야곱이 못된 짓을 해서 에서의 축복을 가로채간 일 때문이 아니라, 축복의 진정성 때문이다. 이처럼 축제로서 진행된 축복은 매우 진지한, 현실이다. 지금 눈 앞에 진짜 에서가 나타났지만, 나타나서 자신에게 복을 빌어줄 것을 간구하고 있지만, 이삭은 좀 전에 속임수로 자신의 축복을 가로챈 야곱을 저주하거나 또는 그 축복이 무효라고 선언하지 않는다. 그만큼 그의 축복은 진지하고 실제적이라는 뜻이다. 이삭은 이렇게 말한다. “네가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그가 반드시 복을 받을 것이니라”(33).

 

이 말을 들은 에서는 오열한다. 그리고 아우 야곱의 부당함을 폭로하고 고발한다. 그러나 이삭의 축복은 거두어지지 않는다. 대신 오열하는 에서를 향해 에서의 바람대로 이렇게 축복해 준다. “네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멀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멀 것이며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39-40). 이것은 이삭이 속이는 자 야곱에게 내렸던 축복과 대척점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축복이 아니라, 차라리 저주처럼 보인다. 정말 그럴까? 정말 이것은 저주일까?

 

성서 학자들 사이에 이 부분에 대한 논쟁이 있는데, 그들은 이것이 번역의 잘못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멀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전치사는 인데, 이것은 두 가지로 번역 가능하다. 하나는 부정적인 번역으로 ‘~으로부터 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다른 하나는 긍정적인 번역으로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한글성경은 부정적으로 번역해서 멀다라고 했지만, 전체 문맥에서 볼 때 맞지 않는 번역이다. 그러므로 이 부분을 다시 번역하면, “너의 거주지가 그 땅의 기름진 곳에 있으며, 위로부터 그 하늘의 이슬이 있는 곳 중에 있을 것이다이다.

 

히브리어 전치사 멀다라고 번역하면, 에서에 대한 이삭의 축복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된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 아버지가 아들에게 축복을 빌어주지는 못할 망정 저주를 내리겠는가? 물론 야곱에게 내린 축복은 매우 진지하고 실제적인 것이었으므로 되돌릴 수 없는 것이지만, 원래 에서를 향해 기획되었던 이삭의 축복은 이제 원래의 주인에게 돌아가는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상황이 험악하게 돌아간다. “그의 아버지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으로 말미암아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41). 여기서 우리는 이 질문을 던져야 한다. 무엇이 복인가?

 

야곱은 속임수를 써가며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축복을 받아냈다. 그런데 그가 받은 축복은 원래 이삭이 에서를 향해 기획된 축복이었다. 형에게 마땅히 내려져야 할 축복을 동생인 야곱이 갖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게다가 그렇게 형을 속여서 받아낸 축복이 야곱의 삶 속에서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다. 에서가 형을 섬기게 되지도 않고, 오히려 야곱이 에서에게 라고 고백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또한 야곱은 살면서 기근을 겪어 결국 애굽 땅으로 이주하게 된다. 무엇 하나 속여서 가로챈 축복이 야곱에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축복은 온 데 간 데 없고, 오히려 그것을 속여 받아 내려 했던 것 때문에 비극만 발생한다. 형 에서와의 관계는 틀어질 대로 틀어지고, 야곱은 형 에서의 낯을 피해 먼 곳으로 도망칠 수 밖에 없었으며, 사랑하는 어머니와 결국 헤어져 죽을 때까지 어머니를 다시 못 보게 된다. 도대체 무엇이 복인가?

 

우리는 여기서 복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복은 과도한 욕망을 채우는 수단이 아니다. 복은 그 말이 함의하고 있는 것처럼 복스럽게 흘러내려야 한다. 야곱처럼 복에 대한 과도한 욕망을 표출하는 것은 오히려 인생을 괴로움에 처하게 한다. 무엇이 복인가? 잘 먹고 잘 사는 게 복인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의 복을 받으면 무엇 하는가? 무엇이 복인가? 남들에게 섬김을 받으면 복인가? “만민과 열국이 너를 섬기고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면복을 받은 것인가? 무엇이 복인가?

 

오히려 그것보다, 먹을 것이 좀 없더라도 형제와 우애 있게 지내고 가족끼리 화목하게 지내고 사랑하는 어머니와 한 평생 사는 것이 복이 아닌가? 누구의 섬김을 받기 보다, 오히려 섬겨주고, 그 섬김 가운데 서로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싹트는 가운데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이 복이 아닌가?

 

우리는 살면서 복에 대한 과도한 욕망 가운데 살아간다. 아무리 좋은 것도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 복이라면 영혼까지도 팔아먹는 어리석은 욕망의 노예가 되지 말고, 무엇이 복인지에 대한 진지한 묵상이 필요하다. 복이 복스럽게 흘러내리도록 감사와 사랑과 평화의 가치를 생각하며 참된 복을 누리며 사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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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8. 25. 02:06

참 나의 건강이 인생을 좌우한다

(에스겔 37:1-10)

 

<죽은 시인의 사회> 마지막 장면 상연.

 

페르조나(persona)’라는 용어가 있다. 심리학자 융이 도입한 개념으로, 자아의 편에 서서 외부세계와 협상하는 의식의 일부분을 말하는 것인데, ‘연극의 가면을 의미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한다. 이런 입장에서 어떤 사람은 인생은 연극이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인생은 연극인가? 그렇기도 하도 그렇지 않기도 하다. 우선 인생이 연극인 것은 인간은 살아가면서 여러 개의 페르조나를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나의 자아는 하나이지만, 그 자아가 표출되는 사회적 방식은 여러 가지다. , 나는 나의 직위나 직책, 또는 직함 등의 모습으로 사회에 표출된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일생을 살면서 약 1천 개 정도의 페르조나를 경험하는 것으로 보고 되고 있다.

 

일차적으로 결혼한 사람은 집에서 남편으로, 아내로, 아버지로, 엄마로 살아간다.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은 사장으로, 종업원으로, 또는 그 중에서도 말단 사원으로, 과장으로, 부장으로, 회사 임원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우리는 누군가의 친구로, 누군가의 선배로 또는 후배로 살아간다. 물론, 교회에서는 목사로, 권사로, 집사로, 또는 무슨 부장으로, 회장으로 살아가기도 한다.

 

얼마 전 죽은 로빈 윌리암스는 배우로서 세상에 표출되었다. 그런데 그것은 그 사람의 한 가지 페르조나에 불과하다, 물론 그 사람에게 있어 배우라는 페르조나는 그 사람의 자아와 거의 동일시 될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다.

 

고등학교 때,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를 보고 어린 나이에 세상을 깨달은 듯한 뿌듯함을 가진 기억이 난다. 책상 위에 올라 학생들에게 '꿈과 희망'을 역설하던 선생님의 모습이 생생하다. 그 역할을 로빈 윌리암스가 맡았었다. 그때부터 로빈 윌리암스는 내 마음에 좋은 이미지로 남았다. 그 이후 로빈 윌리암스가 출연한 영화는 대부분 봤다. 그 중 <굿 윌 헌팅>이나 <패치 아담스> <죽은 시인의 사회>처럼 코끝이 찡한 감동을 준 영화로 아직까지 내 마음에 남아 있다.

 

그런데 로빈 윌리암스가 우울증 때문에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수많은 영화를 통해 사람들에 감동을 주고 꿈과 희망을 안겨준 그가 우울증으로 자살해 죽었다는 소식은 충격 그 자체였다. 배우로서는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주었지만, 생활인으로서 그는 매우 힘들었던 모양이다. 무엇이 그를 그토록 죽음으로 몰아갔는지 잘 모르겠지만, 달처럼 빛나는 부분도 있지만 그 반대편은 어둠이 도사리고 있듯이 빛과 어둠으로 성겨 있는 인간의 삶을 생각할 때,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하지만 때로는 빛이 어둠에 밀려버리는 '불안'의 상황을 어떻게 견뎌낼 것인가도 중요한 문제 같다.

 

우리는 살면서 참 나에 대한 질문을 자주 던져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때, 계속해서 들여다 보아야 할 것은 내가 쓰고 있는 가면즉 페르조나가 아니라 그 가면을 벗었을 때 그 안에 들어 있는 진짜 나의 모습이다. 그 진짜 나의 모습을 영혼(soul)이라는 말로 표현해 볼 수 있다.

 

우리는 나 자신에 대해 들여다 볼 때 영혼의 모습을 보기보다 그 영혼이 걸치고 있는 페르조나의 모습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 보니 인생의 희비가 엇갈리기도 한다. 어떤 사람의 페르조나는 세상에서 인정 받고 부러움을 사는 페르조나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페르조나는 세상에서 인정 받지 못하고 내세울 것이 못 되는 페르조나일 수 있다. 그렇게 자신의 영혼이 걸치고 있는 페르조나와 자기 자신을 동일 시 하다 보니, 인생의 희비가 엇갈린다.

 

분명한 것은, 내 영혼이 걸치고 있는 페르조나와 내 영혼은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동일시가 심한 사람일수록 인생의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높다. 일례로 군복무를 하면서 계급이 장군까지 올라간 어떤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 사람은 자신이 장군인 것을 자랑스러워했을 것이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도 그 사람의 직위를 부러워했을 것이다. 그러나, 장군으로서 삶을 사는 것은 그가 군대에서 군인으로서 일 할 때까지만이다. 전역하고 나면 그는 그냥 생활인으로 되돌아 온다. 바로 그때 자기 자신이 장군으로 있었을 때 자기 영혼에 걸쳐 있었던 페르조나인 장군과 자기 자신을 너무 동일시하는 사람은 더 이상 장군이 아닐 때 인생의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높다. 전역하고 나면 현역으로 있을 때만큼 장군 대우를 받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은 자기를 장군으로 생각하는데 더 이상 사람들이 자신을 장군 대접해 주지 않을 때, 그 안에서는 분노가 차 오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인간관계가 정말 힘들어 진다.

 

성경은 페르조나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성경은 오직 영혼에 관심을 갖는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관심을 갖는 것은 우리의 진짜 모습인 영혼이지 영혼이 걸치고 있는 페르조나가 아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이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또 이런 말씀도 있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62:5).

 

그리고 우리가 기도할 때 가장 범하기 쉬운 오류는 나의 영혼을 들여다 보며 나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기 보다, 그 영혼에 걸쳐 있는 페르조나를 위한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가령 이런 것이다. ‘주님, 제가 ~ 직분을 잘 감당하게 해 주시옵소서!’ 물론 이러한 기도가 나쁜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런 기도도 드려야 한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직분이 있으니까. 그러나, 우리의 기도는 늘 근본적인 것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영혼이 건강하지 못하면, 그 영혼이 걸치고 있는 페르조나는 오히려 나를 상하게 하고 남을 헤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심심치 않게 자살로 삶을 마감하는 사람들의 소식을 접한다. 겉으로 보기에 그가 쓰고 있던 페르조나는 사회적으로 성공을 가져다 준 것이고, 오히려 행복해 보인다. 그런데 그랬던 그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우리는 적잖은 충격을 받는다. 조심스러운 부분이기 때문에 어느 특정한 사람의 예를 들지는 않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페르조나에 대한 관심은 조금 거두고, ‘참 나(영혼)’에 관심을 더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페르조나의 화려함이 영혼의 초라함을 감출 수 있다. 아니, 영혼의 초라함을 감추기 위해서 사람들은 자신의 페르조나를 더 화려하게 내세울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이 오래 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어느 순간 자기 자신이 걸치고 있었던 페르조나를 벗을 날이 온다는 것이다. 그럴 때, 자신의 영혼이 만약 에스겔 서의 말씀처럼 뼈만 남은 송장 같은 모습이라면 스스로 그 모습에 놀라게 될 것은 뻔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은 늘 영혼(참 나)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그 속에 생기를 넣는것이어야 한다. 이것을 쉬운 말로, ‘영혼을 살찌우게 한다라고 말한다. 영혼이 말라 있으면, 그 영혼에 걸쳐지는 페르조나는 언젠가 거덜나고 만다. 더 이상 페르조나를 걸치고 있을 기력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가 인생의 허무를 느끼고, 인생이 힘들어지는 이유는 우리가 겉으로 걸치고 있는 페르조나의 역할을 잘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페르조나에 너무 집착하느라 자기 자신의 영혼을 잘 돌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례로 어머니들(여자)이 그런 인생의 허무를 많이 느낀다. 결혼해서 자식 낳고, 어머니로서, 그리고 한 남자의 아내로서 자신의 페르조나를 걸치며 살다 보니, 자신의 영혼(참 나)을 돌보지 못한다. 그러다가 자식이 품을 떠나고, 남편이 속 썩이면 자신의 페르조나가 벗겨져 그 속에 있는 말라버린 영혼을 발견하게 된다. 그럴 때, 어머니라는 페르조나를 쓰고 살아왔던 인생에 허무가 밀려오는 것이다.

 

교회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 그런 일이 일어나기 가장 쉬운 사람이 목사이다. 목사로서의 페르조나를 쓰고 살다 보면 그 페르조나 안에 있는 참 나(영혼)’을 돌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권사, 집사 등 교회의 직분자들도 마찬가지다. 교회의 중직일수록 그러한 문제가 많이 발생한다. 자기에게 입혀진 페르조나에 신경 쓰다 보니, 자기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지 못하고, 그저 페르조나의 역할에만 충실하다가 탈진할 때가 많다.

 

참 나(영혼)’의 건강이 인생을 좌우한다. 우리가 신앙을 갖는 이유를 착각하지 말기 바란다. 우리가 신앙을 갖는 이유는 참 나(영혼)’의 건강을 위해서지, 페르조나의 성공을 위해서가 아니다. ‘참 나(영혼)’가 건강한 사람은 어떤 페르조나를 걸치더라도 그 페르조나를 잘 소화해 낼 수 있다. 연기력이 좋은 사람은 어떤 배역을 맡더라도 잘 해내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연기력이 좋지 않은 사람은 어떤 배역을 맡아도 불안하게 마련이다. 이처럼, ‘참 나(영혼)’가 건강한 사람은 어떤 페르조나를 걸치더라도 잘 해낼 수 있다. 문제는 우리가 일평생 살아가면서 걸치게 되는 약 1천 여 개의 페르조나를 버거워 하는 이유이다. 우리의 중심이 어디로 향해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비록 페르조나를 걸치고 살아가지만, 우리의 중심은 늘 참 나(영혼)’에게로 향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참 나(영혼)’를 살찌우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라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페르조나를 살찌우게 하는 분이 아니라, 그 페르조나를 근본적으로 잘 감당하게 해 주는 우리의 참 나(영혼)’을 살찌우게 하시는 분이다. 우리의 영혼에 힘줄을 두시고 살을 입히시고 가죽으로 덮고 생기를 불어 넣어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라. 하나님 앞에 나올 때는 페르조나(가면)를 벗고 참 나(영혼)’를 보여드리고, 그 영혼으로 하나님과 대면하라. 페르조나로 인해 말라버린 우리의 영혼을 보시고, 우리 주님께서 다시금 살찌우게 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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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8. 17. 23:16

부르심과 새마음

(삼상 10:1-13)

 

프로테스탄트 윤리는 직업을 콜링(calling) 또는 보케이션(vocation)이라고 부른다. 보통 한국 말로 천직이라고 번역하는데, 이는 하늘이 내려주신 직업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프로테스탄트 윤리에서는 직업에 대해서 을 특별히 구분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에서 비롯된 직업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러한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의 독특한 신앙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르셨기 때문에 존재하게 된다는 신앙관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 즉 하나님의 은총이 있기 때문이고, 우리가 어떠한 일을 하게 되는 것도 그냥 우연히 그 일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도록 부르셨기 때문이다.

 

그것이 맞느냐 맞지 않느냐를 따지기 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체험한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의 삶은 질적으로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사실,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라는 것은 그렇다고 믿는 게 좋다라는 자기 합리화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라는 것은 신앙체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는 신앙체험이 인생 가운데 있다면, 그의 인생은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은 일차적으로 성경에서, 그리고 우리 주변에서 많이 만난다.

 

우선, 노아가 그런 경우다. 성경에서 노아는 당대의 의인이요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라고 소개되고 있다. 노아는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고 홍수심판을 대비해서 방주를 만들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일을 할 수 있었다.

 

아브라함도 그렇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경험은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가 무작정 길을 떠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 경험을 통해서 그곳으로의 부르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간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당신의 특별한 백성을 만드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은 그 일에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아브라함은 거기에 응답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었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모세도 그렇다. 모세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온통 하나님의 섭리로 가득 차 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 가운데 물에서 건져냄을 받고 살아나 이집트의 궁전에서 자라게 된다. 그리고 성장하여 자기 인식이 일어날 때쯤 하나님의 강력한 부르심을 받는다. 범죄자로 몰려 왕궁을 떠나 사막에서 은둔 생활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불러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출해 낼 것을 명하신다. 모세는 그러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뿌리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하나님 경험이 너무도 강력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것은 뭔가 대단한 일을 구경하는 것과는 다르다. 우리는 밤하늘의 은하수를 경험하거나, 북극에 가서 오로라는 경험하게 되면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느끼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나에게 어떠한 사명을 주지는 않는다. 그랜드 캐년이나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고 그 웅장함에 놀라 입이 딱 벌어지기는 하지만, 그것이 나에게 어떠한 사명을 주지는 않는다.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것은 이처럼 웅장한 자연을 구경하면서 받는 감동과는 다르다.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것은 웅장한 자연을 구경하면서 받는 감동 같은 것이 존재하긴 하지만, 하나님 경험은 그 이상이다. 거기에는 뭔가 부르심이 있게 마련이다. 그 부르심은 물론 사람마다 다르다. 그래서 하나님 경험은 획일적이지 않다. 각자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이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에 하나님 경험은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신약 성경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을 가장 극적으로 한 사람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인을 감옥에 투옥시키고 그들을 처형시키는 일에 열심을 냈던 사람이다. 그러나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 어떤 신적 경험을 한다. 그것을 통하여 그는 완전히 새사람이 되어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 그가 고백하고 있듯이 그는 하나님 경험을 통하여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았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그는 그 일을 하다가 순교 당한다.

 

본문의 사울은 우연히 사무엘을 찾아가게 됐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성경은 사울이 사무엘을 찾아가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이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성경은 사울의 아버지 기스가 암나귀들을 잃어버리고, 아들 사울을 보내 그것을 찾아오게 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 모두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 사울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부르심을 받았던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사울은 사무엘에게로 보냄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면, ‘내가 하나님께 부름 받았다라고 하는 것의 표지는 무엇인가? 다른 말로 해서, 내가 하나님을 경험했다는 것의 표지는 무엇인가? 나는 하나님을 경험했고, 하나님께 부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통해서 드러나는가?

 

본문은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지는 과정이 그려져 있다. 사울은 하루 아침에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세 가지의 절차를 걸쳐 왕으로 세워진다. 첫째, 사무엘이 사울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는다. 이것은 내적 소명이라고 할 수 있다. 기름 부음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뜻한다. 둘째, 사울은 백성들의 제비뽑기를 통하여 모든 이스라엘 백성 중에 왕으로 뽑힌다. 이것은 외적 소명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부르심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외적으로 확증해 주는 공동체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울이 암몬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이것은 열매이다. 내적 소명과 외적 소명을 통해서 왕으로 세워졌지만, 그가 실제적인 왕으로서의 권위를 인정받고 본격적으로 왕의 직위를 감당하게 되는 것은 열매가 맺혀진 후부터였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적 소명인데,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는 증거는 바로 새마음으로 나타난다. “그가 사무엘에게서 떠나려고 몸을 돌이킬 때에 하나님이 새마음을 주셨고 그 날 그 징조도 다 응하니라”(9). 사울은 하나님으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 새마음을 받았다. (God changed his heart.) 분명 사울은 그 이후로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것을 확증해 주는 사건이 그 다음에 나오는데, 그것은 사울이 예언을 하는 장면이다.

 

사울은 전혀 예언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고, 새마음을 부여 받은 사울은 예언을 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의 모습을 보고 놀라워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이것은 사울의 변화에 던지는 놀라움의 표현이다. 사울이 선지자들처럼 예언을 한다는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러나, 사울을 새마음을 받고, 새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신앙의 깊이와 차이는 여기에서 비롯된다. 어떤 사람은 신앙이 좋고, 어떤 사람은 신앙이 시원치 않은 원인은 바로 하나님 경험에서 비롯된다.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어떠한 사명을 받게 되는데, 즉 부르심을 받게 되는데, 그것이 삶의 열정으로 드러난다.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과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물론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이 큰 잘못은 아니다. 죄도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험했다고 해서 그것이 무슨 큰 벼슬이 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은 겸손히 섬긴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남을 헤치지 않는다. 남을 정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은 새마음이 되었고, 그냥 새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살아 움직이는 부드러운 마음이 되었기 때문이다.

 

에스겔서 36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곳에서 불러내시며그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있다.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36:25-27).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분명 새마음의 역사가 있다. 새마음은 돌아섬의 마음이다.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의 돌아섬의 마음이다. 새마음은 굳은 마음에서의 돌아섬의 마음이다. 새마음은 정결한 마음, 겸손한 마음, 섬기는 마음, 부드러운 마음, 온유한 마음, 즉 사랑의 마음이다.

 

우리는 그냥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냥 신앙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부르심, 신앙인으로서의 부르심이 있어야 한다. , 하나님 경험이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신앙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경험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그것에 대한 갈망이다. 예배도 기도도 찬양도 봉사도, 모두 하나님 경험을 위한 통로이다.

 

하나님 경험은 인생을 바꾼다. 성경은 온통 그 이야기뿐이다.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이 어떻게 인생이 바뀌었는가, 그리고 그렇게 인생이 바뀐 사람들이 어떻게 세상을 바꾸었는가.

 

하나님을 경험했는가? 그리고 하나님 경험을 통하여 새마음이 주어졌는가? 그렇다면, 부지런히 그 사명을 감당하시라. 아직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셨는가? 낙망하지 마시라.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만나고자 부르짖는 자를 만나주신다고 약속하셨.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33:3).

 

여러분, 믿으시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다. 그리고,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기 원하신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시라. 그리고 새롭게 되시라. 그래서 이 말씀을 믿고 나아가시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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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8. 14. 07:38

이삭과 리브가에 대한 진실

창세기 31

(창세기 27:5-23)

 

상황이 매우 급박해 보인다. 장자 에서에게 축복을 내리려는 이삭과, 그에 맞서 이삭의 축복을 야곱이 받게 하려는 리브가의 대립이 그려진 것처럼 보인다. 이야기 전체의 흐름 속에서 보면, 이삭은 그릇된 일을 하고 리브가는 옳은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신앙의 문제와 결부해 보면, 이삭은 신앙이 없어 보이는 것 같고, 리브가는 신앙 안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이삭은 다음의 하나님 말씀에 맞서는 행동을 하는 것 같고, 리브가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25:23).

 

이런 질문을 한 번 던져 볼 수 있는 상황이다. 왜 이삭은 에서를 축복하고자 했을까? 그리고 이런 질문도 던져볼 수 있다. 왜 리브가는 야곱에게 집착하는 것일까? 이삭이 리브가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위의 말씀을 몰랐을 리 없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 신실한 신앙을 물려 받은 사람이다. 그런데, 야곱을 축복하지 않고 굳이 에서에게 축복하려는 것을 보면 신앙을 잃어버린 듯한 인상을 받는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그리고 반대로 리브가는 같은 자식인데 에서에게는 마음과 눈길도 주지 않는 못된 어머니 같고, 그저 쌍둥이 작은 아들 야곱에게만 집착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이렇게 같은 배에서 같은 시간에 태어난 쌍둥이 아들을 차별할 수 있단 말인가?

 

우선, ‘왜 이삭은 에서를 축복하고자 했을까에 대한 문제부터 살펴보자. 첫째,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는 측면에서 이삭의 마음을 들여다 보자. 이삭은 하나님의 뜻, 즉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게 될 거라는 것을 몰랐을 리 없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을 인간이 어떻게 뒤집을 수 있겠는가! 그것을 알았던 이삭은 에서에게 측은지심을 느꼇던 것 같다. 형 에서가 장자권을 갖는 것이 이치상 맞지만, 이상하게 이 쌍둥이에게는 그 이치가 뒤집어졌다. 이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어차피 장자권은 야곱의 것이다. 장자권을 가지고 있는 이상 야곱이 받을 축복은 정해져 있다. 그는 하나님의 축복을 이미 그 삶 안에 담지하고 있는 아들이다. 그러나 에서는 무엇인가? 에서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아버지 이삭은 마음은 장자권을 빼앗긴 에서를 보며 안타까울 뿐이다. 그래서 이삭은 측은한 마음으로 에서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마음껏 축복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둘째로,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심정을 엿 볼 수 있다. 축복 쟁탈전이 일어나기 전, 에서의 결혼 기사가 나온다.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에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니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되었더라”(26:34-35). 에서는 이방인 아내를 얻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이삭도 자신의 혈통을 지키기 위하여 먼 곳 하란 땅에 가서 리브가를 데려왔다. 이는 배타적인 민족성을 형성하기 위한 조치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순수 신앙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다.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한 몸이 된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하는 것은 한 존재(문화)와 한 존재(문화)가 충돌하는 것과 같다. 정현종의 <방문객>이라는 시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사람이 온다는 건

사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의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시인의 말처럼 사람이 온다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의 과거, 현재,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을 자신의 존재 영역 안으로 맞이하는 일은 우주와 우주가 충동하는 것처럼 엄청난 폭발을 일으키는 일이다. 많은 에너지가 들고, 또는 또다른 에너지가 생성되는 일이기도 하다.

 

에서가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것은 이방 여인이 지니고 있던 이방 문화를 함께 수용하게 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물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흔들 수 있는 촉발점이 될 수 있다. 이방 여인은 분명 자신들이 섬기던 신에 대한 신앙을 함께 가지고 에서에게로 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삭과 리브가는 이것을 걱정했다. 그래서 이러한 에서의 행동, 즉 이방인과 결혼한 에서의 행동이 마음에 걸렸다.

 

어떻게 보면, 에서의 이러한 행동이 결국 장자권을 상실하고 축복권을 상실했다는 외적인 증거가 되는 지 모르겠다. 이삭은 그것을 알았던 것 같다. 장자권과 축복권을 담지한 장자 답게 행동하지 못하고, 이미 그것을 빼앗긴 사람처럼 행동하는 모습을 보고 이삭의 마음은 답답했을 것이다. 그래도 에서는 이삭의 장자가 아닌가! 그런 장자를 이삭은 손놓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삭은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심정으로 그토록 애써 에서를 축복하려 했다.

 

셋째, 이삭은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뜻을 시험(test)하고자 했던 것 같다. 사시 시대의 기드온처럼 정말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알아보고자 했던 것이다. 이삭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것이 정말로 하나님의 뜻인지 시험해 보고자 했다. 정말로 장자권과 축복을 야곱이 다 가져가는 것일까? 정말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일까? 이삭은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싶어 했다. 정말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자기가 아무리 에서를 축복한 들 하나님의 축복이 에서에게로 가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방법을 통해서라도 당신의 뜻을 이루시지 않겠는가?

 

‘왜 이삭은 에서를 축복하고자 했을까에 대한 위의 세가지 추론을 통하여 결국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삭의 성품이다. 이삭은 원래 온유한 사람이다. 온유한 사람이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하든 상대방의 마음을 다치게 하거나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강압적인 방법을 쓰지 않는다. 예수의 아버지 요셉처럼,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을 알았을 때 가만히 끊고자했던 것처럼, 이삭도 에서의 마음을 최대한 다치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정해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서 그것이 폭력처럼 군림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신앙의 측면에서 보자면, 이삭의 신앙은 온유함이 가득 베어 있는 신앙이었던 것이다. 온유함은 이처럼 그 누구도 다치지 않게, 그리고 폭력적이지 않고 섭리에 맞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끔 한다.

 

이번에는 왜 리브가는 야곱에게 집착하는가에 대한 문제를 살펴보자. 첫째로, 리브가는 말씀의 수호자의 역할을 자청하는 것 같다. 복중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던 리브가는 하나님께 나아가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물었다. 그때 받은 말씀은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다. 어떻게 이것을 지키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꼭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리브가가 보기에 자칫 잘못하다간 그 말씀이 어긋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 이삭이 엉뚱하게 행동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리브가는 말씀을 수호하기 위해서 남편을 속이는 일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그리고 그 뜻을 이루었다.

 

둘째로, 리브가는 힘 없는 자를 보호하고 있다. 성경은 장자 에서와 차자 야곱에 대한 모습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25:27). 쌍둥이였지만 정말 달랐다. 에서는 외향적이고 남자답게 힘이 셌다. 그러나 야곱은 내성적이고 힘이 약했다. 이 둘이 자라면서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다. 힘이 약한 야곱은 힘이 센 에서에게 늘 당하면서 컸을 것이다. 사실, 그러한 성장 환경이 야곱을 속이는 자로 만들었는지 모른다. 힘으로 정면 승부해서 이길 수 없으니, 속여서라도 승리를 쟁취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살아 남을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리브가는 늘 야곱에게 마음을 두었다. 그것은 세 번째 생각해 볼 수 있는 추론인 어머님의 마음과도 같다. 엄마의 마음은 늘 허약한 자식에게 가기 마련이다. 아버지는 장남에게 마음을 둔다. 그러나 엄마는 가장 힘이 약한 자식(또는 막내)에게 마음을 둔다. 리브가는 아주 생득적인 어머니의 마음을 갖고 야곱을 보호한 것이다.

 

리브가의 어머니의 마음은 다음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장자권 쟁탈전을 꾸미는 중에 허약한 야곱이 자신의 속임수가 들통나서 아버지에게 저주를 받을까 걱정할 때에 어머니 리브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따르고 가서 가져오라”(13).

 

이것은 어머니의 마음의 절정이다. 어머니는 자식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한다. 자신을 희생하더라도 가장 좋은 것으로 자식을 입히고 먹이고 싶어 한다. 모든 잘못된 저주는 자신이 담당하더라도 자식에게는 축복만 주고 싶어 한다. 이런 마음을 잘 담아낸 노래가 어머니의 마음이다. 양주동 박사가 작사하고, 이흥렬 씨가 작곡했다.

 

1: 나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를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 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오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없어라.

 

2: 어려선 안고 업고 얼려 주시고 자라선 문 기대어 기다리는 마음 앓을사 그릇될사 자식 생각에 고우시던 이마 위에 주름이 가득 땅 위에 그 무엇이 높다 하리오 어머님의 정성은 지극하여라

 

3: 사람의 마음 속엔 온가지 소원 어머님의 마음 속엔 오직 한 가지 아낌없이 일생을 자식 위하여 살과 뼈를 깎아서 바치는 마음 이 땅에 그 무엇이 거룩하리오 어머님의 사랑은 그지없어라

 

왜 리브가는 야곱에게 집착할까에 대한 위의 세가지 추론을 통하여 결국 확인할 수 있는 것도 리브가의 성품이다. 리브가는 신실한 사람이다. 신실하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자신의 맡은 바 임무를 성실하게 실행하고자 했다. 신실한 사람은 어떤 상황이 와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다. 엄마로서의 임무, 신앙인으로서의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한다.

 

신앙의 측면에서 보자면, 리브가의 신앙은 신실한 신앙이었던 것이다. 신실함은 이처럼 자신의 자리를 끝까지 지키는 원동력이 된다. 어머니로서 리브가는 끝까지 자신의 자리를 키셨고, 신앙인으로서 리브가는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했다.

 

얼핏 보면 이삭과 리브가는 대립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대립 행위가 아니라, 자신들이 고유 지니고 있는 성품의 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성품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자기 자신을 헌신했던 것이다. 이삭은 온유함으로 자식을 양육하고 인도했으며, 온유함으로 하나님을 섬겼다. 리브가는 신실함으로 자식을 양육하고 인도했으며, 신실함으로 하나님을 섬겼다. 이삭의 온유함과 리브가의 신실함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축복의 통로가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고유한 성품들을 지니고 살아간다. 어떤 성품이 어떤 성품보다 좋거나 나쁘지 않다. 이삭의 온유한 성품이, 리브가의 신실한 성품보다 좋다고 말할 수 없고, 리브가의 신실한 성품이 이삭의 온유한 성품보다 좋다고 말 할 수 없다. 그저 이삭은 온유한 성품을 타고난 것뿐이고, 리브가는 성실한 성품을 타고난 것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 타고난 성품으로 살아가면 된다. 다른 사람의 성품을 부러워해서 자기 자신의 고유한 성품을 미워하거나 버리려 애쓰지 말고, 그리고 자기 자신과 어울리지 않은 성품을 애써 표출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자신의 성품 안에서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려고 노력하면 된다. 그럴 때 우리는 가장 잘 할 수 있고, 가장 멋진 인생이 될 수 있고, 가장 행복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시며, 우리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이다. 있는 모습 그대로, 타고난 중심으로부터 생명의 꽃을 활짝 피워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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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8. 8. 06:41

미스바 대성회

(삼상 7:1-11)

 

여호와의 궤가 벧세메스에서 기럇여아림으로 옮겨진다. 에벤에셀에서 블레셋과의 전투에 패하며 빼앗겼던 여호와의 궤가 7개월만에 이스라엘의 벧세메스를 통해 되돌아 왔는데, 벧세메스 주민들의 경솔한 행동(법궤를 열어봄) 때문에 70명이 죽어나가는 일이 발생하자 벧세메스 주민들은 법궤를 감당하지 못하고 기럇여아림으로 보낸다.

 

법궤는 기럇여아림 주민들 중 아비나답의 집으로 간다. 사실 아비나답의 입장에서 법궤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대단한 결정이다. 빼앗겼던 법궤를 되찾아 온 일은 기쁜 일이었으나, 법궤가 블레셋 진영에 있던 중에 법궤를 통해 블레셋이 받았던 재앙과 경솔한 행동 때문에 벧세메스 주민들이 받았던 재앙들을 생각하면 법궤를 자신의 집으로 들이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자칫 잘못하다간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왜 법궤가 그 많은 마을 중 기럇여아림으로 가게 됐으며, 또 그 중에서 아비나답의 집으로 가게 됐는지에 대한 설명은 안 나오지만,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아비나답이 평소에 경건하게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비나답은 법궤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잘 알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법궤가 집으로 들어왔을 때 그의 아들 엘리에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법궤를 지키는 자로 세운다. 여호와의 궤 지키는 일을 잘 수행했는지, 시간은 그렇게 지나 20년이 지난다. 그리고 그 동안 등장하지 않았던 사무엘이 다시 등장한다.

 

사무엘의 등장은 다음과 같은 정황을 동반하고 일어난다.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2절 후반부). 여기서 사모하니라는 히브리어의 나하를 옮긴 말인데, 원래 뜻은 울부짓다, 신음하다, 애도하다등이다. 그래서 영어 성경은 나하를 주로 ‘lament(탄식하다)’로 옮기고 있다. 사모하다와 탄식하다의 의미를 모두 살려서 나하를 풀어보면 이스라엘은 여호와께로 마음을 돌리고 도우심을 간구하며 신음하며 울부짖으면서 여호와를 찾았다는 뜻이 된다. 이들은 왜 이렇게 간절하게 여호와를 찾았을까?

 

바로, 블레셋의 압제 때문이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에게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다. 사사기 후반부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압제 세력이 블레셋인데 사사기에서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압제 때문에 못살겠다고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에 대한 응답으로 사사 삼손을 보내신다. 블레셋의 압제 문제는 삼손 때에 이미 해결되었어야만 한다. 그러나 삼손은 그 문제 해결을 위해 나실인으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기질을 극복하지 못하고 감정 콘트롤과 여자 문제로 인해 사명을 그르치고 만다.  삼손은 그의 임무를 다하지 못하고 볼썽사납게 죽는다. 이처럼 한 사람의 리더가 또는 한 사람의 사명자가 자신의 임무를 온전히 수행하지 못하면 그 실패의 여파는 계속되는 법이다.

 

블레셋의 압제로부터 구원해 달라고 울부짖는 이스라엘 앞에 다시 등장한 사무엘은 거두절미하고 이렇게 외친다. “너희 마음을 여호와게 향해 그만을 섬기라!”(3). 그러기 위해서 이들에게 요구된 것은 그들 삶 가운데 있었던 이방신들과 아스다롯과 바알들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단순한 요구 같지만 이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단순하게 생각하기를, 여호와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고, 다른 신들은 우상이기 때문에 그들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삶과 관련 있고, 우상이 추구하는 것과 여호와 하나님의 속성과 관련이 있는 매우 복잡하고 심오한 문제이다.

 

이방신들과 아스다롯과 바알들, 단순하게 우상이라고 부르는 이러한 것들이 가진 문제점은 무엇인가? 왜 이러한 우상 숭배가 문제가 되는가? 우리는 이 문제를 배타적인 신앙의 입장에서 볼 것이 아니라, ‘우상숭배라고 불리는 것들의 현상의 측면에서 살펴봐야 한다.

 

한 마디로 이방신들은 비윤리, 부도덕, 인간파괴를 야기시켰다. 신앙의 대상이 이러한 문제를 야기시킨다면 그것은 아무리 고상한 것(심지어 하나님이라 불려도)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우상에 불과하다. 우상이란 헛것을 말하는데, 헛것이란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자신처럼 허망하게 만드는 것을 말한다. 우상은 생명을 우습게 만들고 파괴한다. 그러한 일들이 바로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 대신 붙들었던 이방신들, 아스다롯, 바알신들에 대한 신앙에서 나타났다.

 

이방신들을 섬길 때 나타나는 대표적인 헛것들은 성전 창기 제도와 자식을 제물로 바치는 풍습, 그리고 탐욕을 부추기는 신앙 형태이다. 가나안의 이방신들의 풍습 중 대표되는 것은 성전 창기 제도였다. 다산을 상징하는 바알신 등은 남녀의 정사를 통해서 위안을 받고 그 대가로 비를 내려 옥토를 풍요롭게 한다는 풍습에 따라 신전 창기 제도를 만들어 사람들을 현혹했다. 이는 당연히 성적인 풍기문란으로 발전할 수 밖에 없다. 한 번 상상해 보라.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가 섹스라니! 이것은 성에 대한 완벽한 왜곡에 불과하다. 타락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게다가 이방신들은 제물로 자식을 바칠 것을 요구했다. 어떻게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과 비슷해 보이지만, 그것은 신학적 함의가 다르다. 물론 하나님께서 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했는지에 대한 성경의 설명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기 위함이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모든 것을 설명해 주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에게 실제로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방신들의 풍습에서는 실제로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일들이 일어났다. 이것은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서도 증명되었다.

 

또한 우상 숭배가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의 탐욕을 끝 간데 없이 부추긴다는 것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채워야 할 욕구가 있다. 그러나 어느 이상 넘어가면 그것은 생명을 소멸시키는 악한 일로 전락하고 만다. 그래서 절제가 중요한 것이다. 우상 숭배는 인간의 탐욕을 부추겨서 결국 파멸에 이르게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 다른 존재(사람이든 사물이든)를 짓밟는 것에 대해서 면죄부를 던져 준다. 탐욕에만 정신이 팔린 우상 숭배자는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 거칠 것 없는 악마로 변하기 십상이다.

 

무엇이든지 비윤리와 부도덕, 그리고 인간파괴를 야기시키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결국 헛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이 그러한 우상들(이방신들, 아스다롯, 바알들)을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하는 이유는 정의와 사랑을 회복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시고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윤리와 도덕, 그리고 생명을 지향하신다. 하나님의 그 어떤 속성도 생명을 파괴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상들을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께로 되돌아 오라는 사무엘의 외침은 정의와 사랑에 대한 회복의 외침이었던 것이다.

 

사무엘은 이것을 위해 미스바 대성회를 연다. 미스바라는 곳에 이스라엘 지파의 대표들을 불러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의식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성별한다. 첫째, 이들은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는다. 물은 예나 지금이나 씻음의 상징을 갖고 있다. 더러운 것이 있으면 물로 씻으면 된다. 이들이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는 것은 그것을 통해서 자신들의 더러워진 마음, 즉 죄를 뉘우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두 번째, 이들은 금식한다. 금식은 탐욕의 제어를 말한다. 우상숭배로 인해 끝 간데 모를 정도로 부풀어 있던 탐욕을 금식을 통해 제자리로 돌려 놓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들은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라는 입술의 고백을 드린다.

 

이들은 왜 이렇게 입술의 고백을 드리는 것일까? 어떠한 것을 말로(입술로) 고백한다는 것은 문제성을 인식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들이 바보라서 우상숭배를 통해 성전창기, 자식제물, 탐욕의 헛것을 추구한 것이 아니다. 그 속에 들어 가 있는 사람은 절대로 자신이 그 속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성전창기와 자식제물, 탐욕의 헛것에 빠진 사람은 그것이 자신의 실재이고 진리라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그러한 일들을 서슴없이 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해서, 우물 안 개구리는 자신이 우물 안에 있다는 것을 절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우물 밖으로 나와야 비로소 그때 자신이 우물 안에 있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를 혼낼 때 가장 유념해야 할 것은 지금 아이가 왜 혼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인식시키는 것이라고 아동 전문가들은 말한다. 아이가 혼나는 이유에 대해서 스스로 문제점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부모는 아이의 입술로 자신의 문제점을 말해보게 끔 해야 한다. 그래야만 아이를 혼내는 것에 대한 효과를 볼 수 있고, 아이는 문제점을 인식하고 되풀이 해서 그 문제를 일으키지 않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의 입술로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다. 자신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인식하지 못하면 미스바 대성회를 통해서 행한 일련의 퍼포먼스들은 그야말로 그냥 퍼포먼스로 끝날 뿐, 이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이들은 입술의 고백을 통해 자신들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인식했던 것이다.

 

이것은 신앙인으로서 굉장히 유념해야 할 경건훈련이고 영성훈련이다. 기도를 중언부언하지 말고 정확히 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무엇이든지 입술로 정확하게 고백하지 못하고 얼버무리고 말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변화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입술의 고백을 통해 무엇이 문제인지, 자기 자신의 문제점에 대해서 정확하게 인식하고 나면 훨씬 더 수월하게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해 갈 수 있다.

 

미스바 대회는 성공적이었는가? 이들은 정말로 미스바 대회를 통해 거듭났는가? 이들의 회개에는 진정성이 있었는가? 사실,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는 의식이나, 금식이나, 또는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라는 입술의 고백 자체를 통해서 그들의 회개가 진실한 것이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러나 미스바 대성회 이야기 다음에 이어 나오는 블레셋과의 전투를 통해서 미스바 대성회가 성공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이 미스바에 모여 집회를 갖고 있을 때 블레셋은 이들이 전투를 준비하는지 착각했는지, 이스라엘을 치기 위해 전투를 일으킨다. 그러나 결과는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다.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맨날 지기만 하던 이스라엘이 이렇게 승리한 이야기가 미스바 대성회 다음에 나오는 이유는 미스바 대성회의 진정성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진정성은 이렇게 열매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결국 이스라엘의 승리는 미스바 대성회에서 행한 이들의 회개의 열매였다.

 

미스바 대성회를 통해 이방신들, 아스다롯과 바알들을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온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 사무엘이 살아 있는 동안 블레셋은 더 이상 이스라엘을 괴롭히지 않았으며, 잃었던 땅(에그론부터 가드)을 회복했고, 블레셋 뿐만이 아니라 산간지역에서 살면서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또다른 적인 아모리 족속과도 평화롭게 지내게 된다. (삼상 7: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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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7. 27. 22:49

오래된 기도

(마태복음 6:5-13)

 

본문에는 예수의 산상수훈 중 기도에 대한 가르침이 나와 있다. 예수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 중 눈에 띄는 단어는 은밀함이다. 기도는 은밀해야 하는가? 기도를 은밀하게 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예수께서는 은밀한 기도와 대조되는 외식하는 자들의 기도에 대해서 말한다. 외식하는 자들의 기도의 특징은 사람에게 보이려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예수께서는 그러한 외식하는 자들의 기도를 경계하시며, 은밀한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6).

 

기도할 수 있는 골방을 만들어 기도할 때마다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면 은밀한 기도가 되는가? 도대체 은밀한 기도란 무엇인가? 외식하는 자들의 기도와 더불어 예수께서 경계하시는 기도는 이방인처럼 중언부언하는 기도이다. 중언부언의 특징은 말을 많이 하는 것이다. 미사여구를 잔뜩 집어 넣어 기도를 위한 기도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외식하는 자들의 기도나 이방인의 중언부언하는 기도나 알맹이는 없고 형식과 자기 자랑만 있는 기도를 경계하시며 은밀한 기도 할 것을 주문하신다.

 

외식하는 자들의 기도와 중언부언하는 기도와 견주어 볼 때 은밀한 기도란 핵심을 찌르는, 그리고 친밀한, 그리고 집중된 기도를 말한다. 형식에 치우친 기도가 아니고 외적인 모습에 치우친 기도가 아니고, 아빠되시는 하나님과 참된 사귐 안에서 하는 기도를 말한다. 그러니까 기도는 근본적으로 관계성이 근본이라는 뜻이다. 아빠되시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없는 기도를 경계하시는 것이다. ‘은밀한이란 바로 그러한 것을 담고 있는 메타포이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하는 기도는 외식하는 자들의 기도와 중언부언하는 이방인들의 기도가 된다. 당연하지 아니한가? 하나님에게 관심 없는 자들의 기도는 형식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고,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을 두는 이기적인 기도가 될 수 밖에 없다. 아버지와 전혀 친밀한 관계를 맺지 않은 자녀가 자기의 필요에 따라 아버지에게 용돈을 요구하는 것을 상상해 보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되어 있는 자녀는 아버지의 마음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그저 아버지가 자기의 필요만 채워주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예수께서는 외식하는 자들의 기도와 중언부언하는 이방인의 기도를 경계하시며, 은밀한 기도,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하는 기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본보기를 보여주신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예배 시간마다 외우는 주기도문이다.

 

주기도문은 어떠한 주문이 아니다. 주기도문을 주문처럼 외우는 사람도 있다. 물론 절박한 상황에서 어떠한 기도를 드려야 할지 모를 때, 그리고 전혀 말이 나오지 않을 때 주기도문을 통해서 마음을 표현하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그러나, 주기도문 자체에 무슨 특별한 효능이 있는 듯 주문 외우듯이 주기도문을 외우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주기도문의 특징은 먼저 하나님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해 놓고 계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9-10).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진정한 관심을 둔 자,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맺어진 자는 하나님의 이 뜻을 절대로 간과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임하는 것을 기뻐하고 그것을 위해서 헌신한다.

 

기도를 가르치시는 예수의 삶 자체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 땅 위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삶이었다. ,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 위에 오게 하시는 일에 헌신하셨다. 그 일을 하시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를 이 땅 위에 오게 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세상이 하나님 나라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자기 왕국을 세우고 싶어한다. 이것은 세상뿐만이 아니라, 각자의 삶 속에서도 꿈틀대는 현상이다.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자기 왕국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자들은 자기 왕국을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이 땅 위에 임하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헌신할 줄 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소박함을 지닌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11-13).

 

일용할 양식에 대한 간구와 용서에 대한 실천, 그리고 악에 대한 경계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갖는 소박한 마음이다. 하나님 나라가 오는 것을 거부하고 자기 왕국을 세우고자 하는 마음 자체가 탐욕이다. 탐욕적인 인간은 일용할 양식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많은 것을 축적하고자 한다. 탐욕은 필경 죄악을 낳는다. 죄악 중에서도 가장 추악한 살인을 낳는다. 자신의 탐욕을 위해서 생명을 앗아가는 일만큼 추악한 것은 없다. 살인, 강간, 강도, 유괴, 납치 등 강력 범죄로 분류되는 것들은 모두 남의 것을 탐하는 탐욕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용서의 나라이다. 불의를 눈감아주는 용서가 아니라, 불의를 용서하는 방식으로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다. 용서는 불의에 대한 눈감아 줌이 아니다. 용서는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이 스스로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도록 공간을 열어주는 행위이고, 자신의 부끄러움을 발견하고 다시는 불의한 행위를 저지르지 못하도록 이끌어주는 사랑의 행위이다. 그렇기 때문에 용서란 인간이 행할 수 있는 행위 중 가장 지혜로운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그 지혜를 십자가에서 본다. 바울 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유대인에게 십자가는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에게 십자가는 미련한 것이지만, 그리스도인에게 십자가는 결국 하나님의 참된 지혜이다. 십자가는 용서인데, 십자가를 온전히 바라보는 자들은 거기에서 무한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다시는 자기 왕국을 세우기 위해서 탐욕스러운 마음을 드러내거나 생명을 헤치는 일을 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참된 지혜인 십자가를 붙들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게 된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는 기도는 인간의 한계를 정직하게 인정하는 겸손함이 베어 있다. 우리는 시험에 든다. 여기에서의 시험은 유혹을 말한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받았던 유혹 같은 것을 말한다. 예수께서 사탄에게 광야에서 받았던 유혹 같은 것을 말한다. 그 유혹은 하나님 나라를 버리고 자기 왕국을 세우라는 매우 매력적인 유혹이다. 그래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 유혹에 넘어간다. 하루에도 수도 없이 하나님 나라를 등진다.

 

그리고 우리는 에 대해서 무력하다. 우리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우리의 생명을 제한하고 결국 빼앗아가는 악이 우리가 사는 현실 세상에는 모레알처럼 널려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질병과 죽음이다.

 

최근 한국의 연예인 유채영 씨가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다가온 질병, 그리고 죽음을 자신의 힘으로 어쩔 수 없었던 유채영 씨는 결국 죽음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가온 질병, 죽음 앞에서 무엇 하나 제대로 해 줄 수 없어서 속만 태우던 가족과 친구들은 허망하게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냈다. 다음은 사랑하는 딸을 보내고 사랑하는 딸에게 쓴 유채영 씨의 엄마의 편지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우리 딸에게. 채영아 사랑해. 이 현실이 받아들이기 너무 힘들어 꿈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마지막 순간까지 병마에 시달려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사랑하는 사람 곁 떠나기 싫어하던 모습 생각하면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진다. 너랑 같이 떠나고픈 마음이다. 아빠 없이 너와 함께했는데 나 혼자 남았구나. 정해진 운명의 날이 있는 줄 알았다면 더 많은 시간과 사랑과 행복을 나눴을 텐데 너무 안타깝다. 먼 훗날 우리가 다시 만나면 그 때는 우리 행복하게 잘 살자. 엄마가.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유혹과 악으로부터 지켜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우리의 인생은 나의 계획과는 상관 없이, 어느 때든지 유혹과 악을 통해서 내가 꿈꾸던 삶과는 다른 곳으로 어리석고 비참하게흘러갈 수 있기 때문이다. ‘유혹과 악에 너무도 무력한 인간이지만,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으로 들어간 하나님의 자녀는 유혹과 악으로 인해 멸망 받지 않고, ‘유혹과 악으로부터 구원 받는다.

 

세상이 너무 시끄럽다. 혼란스럽다. 도무지 하나님 나라를 찾아볼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계속되는 비행기 사고로 인해 수 많은 사람이 죽어나가고,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 그리고 미국과 러시아의 외교군사적 신경전, 또한 한국에서 일어난 세월호 사건 등을 생각하면 가슴이 탁 막힐 지경이다. 이 땅에 참된 평화가 어디 있고, 정의가 도대체 있기는 한 것일까 의문이 든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간구하고, 그 나라가 이 땅 위에 임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헌신하는 하나님의 자녀는 일상에 매몰되어서 현재 인간의 평화와 생명을 위협하는 일련의 일들을 남몰라라 할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하여 그 어느 때보다도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해야 한다.

 

기도는 일상에 묻히지 않고, 자신의 일상을 구원하는 것이다. 기도는 나의 경건을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과 주변 세계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는 우리의 일상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기도는 뭔가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라, 기도 자체가 일상이 되어야 한다. 다음 기도문은 기도가 어떻게 우리의 일상에 파고 들어야 하는지 잘 보여준다.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기만 해도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기만 해도

말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기만 해도

노을이 질 때 걸음을 멈추기만 해도

꽃 진 자리에서 지난 봄날을 떠올리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음식을 오래 씹기만 해도

촛불 한 자루 밝혀놓기만 해도

솔숲을 지나는 바람소리에 귀 기울이기만 해도

갓난아기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기만 해도

 

섬과 섬 사이를 두 눈으로 이어주기만 해도

그믐달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바다에 다 와가는 저문 강의 발원지를 상상하기만 해도

별똥별의 앞쪽을 조금 더 주시하기만 해도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해도

나의 죽음은 언제나 나의 삶과 동행하고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인정하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고개 들어 하늘을 우러르며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기만 해도

 

_이문재, 「오래된 기도」 전문, 『지금 여기가 맨 앞』

 

주님께서는 우리가 일상에 매몰되어 하나님 나라를 잃어버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심으로, 일상이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가 되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이 땅 위에 임하기를 바라며 그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도록 부름 받았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통하여 일상이 하나님 나라로 승화되도록 은밀한 기도, 친밀한 기도, 소박한 기도, 경건의 모양만 있는 기도가 아니라 삶을 실제로 바꾸는 능력의 기도, 오래된 기도를 쉬지 않고 해야 한다.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http://www.youtube.com/watch?v=mdZ6yMN109M

 

www.columbuskmc.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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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7. 21. 12:58

가정의 기쁨

(삼상 1:19-28)

 

매년제를 올리러 실로의 성전에 갔을 때 한나는 엘리 제사장이 술 취한 것으로 오해할 정도로 간절하게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자식이 없는 것 때문에 마음이 몹시도 아팠던 한나의 사정을 들은 엘리 제사장은 한나에게 축복을 빌어 준다.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삼상 1:17).

 

간절한 기도 끝에 제사장으로부터 축복의 선언을 들은 한나는 자신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었다는 확신을 갖고 그 일 때문에 더 이상 마음 쓰지 않기로 한다.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삼상 1:18).

 

간절한 기도에는 응답이 꼭 있다. 그리고 기도의 응답으로 얻게 되는 것은 마음의 평안이다. 옛날에는 성전에 가서 예배 드리는 것도 쉽지 않았다. 교통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성전에 자주 갈 수 없었다. 엘가나와 한나 가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년제를 빠짐 없이 드렸다. 교통 수단이 발달해서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로 성전에 와서 예배 드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하는 우리들을 부끄럽게 하는 대목이다.

 

예배가 너무 많다 보니 예배가 습관적인 타성으로 전락해 버린 이유도 있겠지만, 그런 중에서도 나의 예배가 습관적인 타성에 젖은 예배인지 아니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참된 예배인지를 구분할 수 있는 방법 하나는 바로 마음의 간절함이다.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소원을 하나씩 마음에 품고 예배 드리러 오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예배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행위이지만, 예배의 행위는 매우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그 무엇이기 때문에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어떠한 선물(은총)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다.

 

매년제를 드린 다음 날, 성전을 떠나면서 엘가나와 한나 가정은 또 한 번의 예배를 드리고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거룩한 합방을 갖는다. 무엇을 하든지 예배(Ritural)’ 의식을 먼저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어떠한 행위든지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귀한 일이기 때문이다. 한 번 생각해 보자. 내가 지금 행하려고 하는 일이 거룩함을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일인가 아닌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예배이다. 일례로, 예배 드린 후에 바람 피울 수 있는가? 예배 드린 후에 도둑질을 할 수 있는가? 예배 드린 후에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가? 예배 드린 후에 늙은 부모를 학대 할 수 있는가? 우리는 거룩하지 못한 일을 행할 때 오히려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고 든다. 어떤 일이든지 그 일을 놓아두고 예배 드릴 수 있는 것은 그 일이 거룩하다는 증거가 된다. 반면에 어떠한 일을 놓아두고 예배 드리는 것을 피하게 되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게 되면 그 일은 거룩하지 못한 것이라는 증거가 된다.

 

요즘 시대는 특별히 성(sex)이 구원 받을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가정을 허락하신 이유 중 하나가 성(sex) 때문인데, 이것이 타락하다 보니까 가정이 깨지는 이유 중 가장 큰 이유가 성 때문이다. 잠언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잠언 5:18). 엘가나와 한나는 아이를 생산하는데 있어서 을 거룩하게 승화시킨 좋은 예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예배 드린 후에 아이를 생산하게 되는데 거기에서 태어난 아기와 가정의 거룩함이 드러난다. “엘가나가 그의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 지라, 한나가 임신하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 함이더라”(19-20).

 

이렇게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행한 일은 기쁨을 낳는다. 사무엘의 탄생을 통해 엘가나와 한나의 가정은 기쁨이 넘쳤다. 그리고 단순히 그 기쁨은 그들의 가정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암울했던 사사시대에도 큰 기쁨이 되었다. 사무엘의 탄생은 길고 긴 터널을 지나던 사사시대에 빛을 던져주는 사건과도 같은 것이었다.

 

가정의 기쁨은 그냥 가정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것은 가정의 울타리를 타고 흘러 넘쳐 더 큰 기쁨을 생산해 낸다. 요즘 세상은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 분명한 것은 사회의 모든 시스템이 가족의 기쁨을 위해서 구축되지 못하고, 오히려 가족을 희생시키는 쪽으로 흘러가는 것 같다. 너무도 오랫동안 사회는 가족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해왔다. 그렇다 보니, 가족은 더 이상 혼자만의 힘으로 기쁨과 행복을 만들어 내기에는 역부족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가족이 해체되는 일이 너무도 많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가슴 아픈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전쟁 때문에 엄마를 잃은 이라크의 한 여자 아이가 고아원에서 지내면서 엄마가 너무 그리워서 땅 바닥에 엄마 그림을 그려 놓고 그 그림 위에서 곤히 잠든 모습이었다.

 

이렇게 사회적으로 가정의 행복을 무참히 짓밟는 폭력은 이 땅에 하루 빨리 추방되어야 다.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함께 노력해야 한다. 이렇게 큰 사회적 문제는 우리가 때로는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힘으로 가정에서 가정의 기쁨을 위하여 실천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놓고 한숨만 쉬고 있기 보다는,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실천함으로써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야 한다.

 

엘가나와 한나의 가정을 통해서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있는 가정의 기쁨을 한 번 살펴 보자.

 

첫째, 예배이다. 엘가나와 한나 가정은 매년 모든 가정이 실로에 있는 성전에 가서 예배를 드렸다. 이 가정이 매년성전에서 예배 드렸다는 것은 성실하게 예배 드렸다는 뜻이다. 온 가정(household)이 함께 예배 드리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요즘 가정 신앙의 트랜드는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아빠가 가는 교회가 따로 있고, 엄마가 가는 교회가 따로 있고, 특별히 자녀들이 가는 교회가 따로 있는 경우가 많다. 더 심한 경우는 아빠의 종교가 다르고, 엄마의 종교가 다르고, 자녀의 종교가 다른 경우도 있다. 가정 구성원 각 사람의 인격을 존중해 준다는 의미에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예배는 온 가정이 함께 한 교회에서 드리는 것이 좋다.

 

또한 공적인 예배에 온 가정이 함께 나와 예배 드리는 것 외에도 각 가정에서 자신들만의 특별한 예배(ritual)를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다. 요즘 영성신학에서 강조하는 것은 각자의 의식(rituals)’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물론 일상이 ritual에 매몰될 정도로 그럴 필요는 없지만, 일상이 너무 아무런 의미 없는, 그야말로 일상으로 매몰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간단한 ritual들은 우리 일상에 필요하다. 우리는 일상에 너무 매몰되어 있어 우리의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얼마나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있는 것인지 깨닫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므로 일상이 그냥 지루하고 권태로운 것이 아니라 온통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찬 경이로운 것이라는 깨닫기 위해 ritual은 중요하다.

 

예를 들자면, 가족 구성원의 생일에 예배를 드린다든지, 가족 여행을 갈 때 짧게 나마 기도를 드린다든지, 자기 전에 부모가 아이들에게 축복기도를 해준다든지 하는 것이다. 잠깐의 의식 행위를 통해서 먹는 것에서부터 자는 것까지 너무나도 당연한 일상이 그냥 의미 없는 일상으로 매몰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가정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매주 금요일 가정에서 성찬식을 행한다. 촛불을 켜놓고 모여 앉아 성찬식을 조촐하게 성찬식을 거행하면서 우리 가정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었음을 확인하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이유에 대해서 간단하게 메시지를 전한다. 그리고 각자 돌아가면서 서로에게 바라는 것이나 소원 또는 기도제목을 내놓고, 손을 붙잡고 기도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가정이 하나님의 무한한 은총 가운데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감사한다.

 

예배의 가치를 우습게 여기지 말라. 예배는 귀찮은 것이 아니라, 공식적(official)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요, 하나님의 이름의 높여지는 시간이요, 하나님께 무한한 은총을 받는 시간이다. 하나님과의 만남없이 피조물인 인간이 평안을 누릴 수는 없다. 가정의 기쁨의 초석은 예배 위에 놓여져야 한다. 가정에서 예배가 귀하게 여김을 받으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 가정에 기쁨과 평안을 선물(은총)로 주실 것이다.

 

둘째, 사랑이다. 사랑은 존중이라는 형태를 띨 때 그 가치가 가장 잘 드러난다. 한나는 하나님께 서원하여 사무엘을 얻었다. 매년 실로의 성전으로 예배를 드리러 간 엘가나의 가정은 사무엘의 탄생 이후에도 어김 없이 그렇게 했다. 그런데, 한나는 엘가나에게 이렇게 요청한다. “아이를 젖 떼거든 내가 그를 데리고 가서 여호와 앞에 뵙게 하고 거기에 영원히 있게 하리이다”(22). 이러한 한나의 요청에 엘가나는 동의하고 한나의 의견을 존중해 준다. “그대의 소견에 좋은 대로 하여 그를 젖 떼기까지 기다리라 오직 여호와께서 그의 말씀대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23).

 

그냥 보면 이것이 무슨 존중인가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민수기에 보면 남편은 아내의 서원에 대해 무효를 선언할 수 있는 법이 있다. “부녀가 혹시 그의 남편의 집에서 서원을 하였다든지 결심하고 서약을 하였다 하자 그의 남편이 그것을 듣고도 아무 말이 없고 금하지 않으면 그 서원은 다 이행할 것이요 그가 결심한 서약은 다 지킬 것이라 그러나 그의 남편이 그것을 듣는 날에 무효하게 되면 그 서원과 결심한 일에 대하여 입술로 말한 것을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나니 그의 남편이 그것을 무효하게 하였은즉 여호와께서 그 부녀를 사하시느니라”(30:10-12).

 

엘가나는 이 율법에 근거하여, 한나가 사무엘을 하나님께 나실인으로 바치겠다고 한 서원에 대하여 충분히 무효를 선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매년 모든 가족이 함께 가는 실로의 제사에 동참하지 않으려고 하는 한나를 꾸짖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엘가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나의 의견을 존중해서 한나의 뜻대로 사무엘을 하나님께 나실인으로 바치기로 한 서원이 거룩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랬다. 그리고 엘가나는 한나와 함께 사무엘이 젖 떼기까지 정성으로 양육했다.

 

사실 예배를 존중히 여기는 가정에서 가족 구성원 간의 존중이 으뜸 가치로 드러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가정의 기쁨은 가족 구성원 간의 사랑, 즉 존중의 가치가 드러나는 사랑이 흘러 넘칠 때 온다. 우리는 가족이기 때문에 너무도 쉽게 상대방을 존중하지 못할 때가 많다. 오히려 가족 아닌 사람은 존중하면서 가족 구성원은 무시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세상에서 가장 존중 받아야 할 사람은 가족이다. 자신의 가족 구성원을 존중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을 존중하려 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리고 가족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 다른 사람도 존중할 줄 아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개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은 십중팔구 가정에서도 가족을 존중할 줄 모른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는 속담처럼 말이다.

 

셋째, 감사이다. 한나는 하나님께 서원한 대로 약속을 이행한다. 하나님께 사무엘을 나실인으로 바치겠다는 서원뿐만이 아니라, 남편 엘가나에게 아이가 젖 떼면 자신이 직접 실로의 성전에 가서 사무엘을 바치겠다는 약속까지도 이행한다. 이것이 참 쉽지 않다. 흔히 시쳇말로 사람은 화장실 들어갈 때 마음과 화장실 나올 때의 마음이 다를 수 있다. 그리고 위에서 잠깐 살펴본 대로 율법이 서원을 철회하는 데 악용해서 쓰일 수 있다. 엘가나와 한나가 짜고 서원을 뒤집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한나에게는 감사가 넘쳐났기 때문이다.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다 보니, 서원한 대로 이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엘가나와 한나는 젖 뗀 사무엘을 하나님께 올려 드리러 성전에 나아가면서 다음과 같이 서원제 예물을 준비해서 간다. “수소 세 마리와 밀가루 한 에바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지고 실로 여호와의 집에 나아갔는데…”(24). 이것만 보면 이것이 무슨 감사인가 할 것이다. 그러나 민수기에 보면 서원제를 드릴 때 하나님께 드릴 제물이 이렇게 나와 있다. “번제로나 서원을 갚는 제사로나 화목제로 수송아지를 예비하여 여호와께 드릴 때에는 소제로 고운 가루 십분의 삼 에바에 기름 반 힌을 섞어 그 수송아지와 함께 드리고 전제로 포도주 반 힌을 드려 여호와 앞에 향기로운 화제를 삼을지니라”(15:8-10).

 

이것과 비교해 볼 때 한나는 율법에 나와 있는 것보다 세 배나 더 많은 예물을 준비해 가지고 가서 하나님께 바친다. 이렇게 가정의 기쁨은 감사로 표현된다. 감사가 넘칠 때 가정은 기쁨 충만한 행복한 가정이 된다.

 

예배와 사랑(존중), 감사는 기쁨이 넘치는 가정의 지표이다. 가정의 기쁨, 그 출발이 예배에서 시작하는 것에 마음을 두라. 예배하는 가정은 서로 존중하게 되고, 서로 존중 받을 때 감사가 넘치게 된다. 그리고 가정의 기쁨은 가정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가정의 담장을 타고 넘어 사회와 나라의 기쁨으로 번져나간다.

 

사철에 봄 바람 불어 잇고 (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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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