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4. 5. 25. 03:33

기드온 이야기가 주는 교훈

(사사기 9:46-57)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기드온 집안의 최후가 그려진 곳입니다. 요담의 저주, 즉 가시나무(아비멜렉)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은 세겜의 멸망과 결국 세겜으로부터 배신 당해 죽게 될 아비멜렉의 운명을 저주가 그대로 실현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드온은 므낫세 지파 사람으로 자기 자신을 소개하기를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6:15) 라고 합니다. 이렇게 자신감 없었던 기드온에게 하나님께서는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 치듯 하리라라는 말씀으로 위로해 주시며 사사로 들어 쓰십니다.

 

기드온은 성격이 꽤나 소심했던 터라, 자신의 소명을 확인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양털 시험을 통하여 확신을 얻습니다. 그리고 300명의 군사만을 데리고 나가 미디안 진영을 무너뜨리는 혁혁한 공을 세웁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자기 자신을 지극히 작은 자라고 고백한 것만큼 겸손하지는 못했습니다. 싸움터에 나서면서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들어내야 할 순간에 슬쩍 자기 자신을 끼어 넣었습니다. 미디안을 공격할 때 외쳤던 구호가 그것을 말해 줍니다.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다!”(7:20). 사실 여호와의 칼이다!”로 충분한 구호였지만, 기드온은 여호와 곁에 자기 자신을 슬쩍 집어 넣은 것이죠.

 

기드온은 소심한 성격 탓에 자기의 욕망조차 대놓고 드러내지 못하고 살짝 숨기는 유형의 사람이었습니다. 미디안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 왕이 되어 달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탁을 겉으로는 거절하는 듯 했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왕의 행세를 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기드온은 겉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8:23). 그러나 기드온은 백성들에게 왕이나 할 수 있는 요청을 합니다. 즉 미디안 전쟁에서 전리품으로 탈취한 것 중에서 금 귀고리와 초승달 장식들과 패물 그리고 미디안 왕들이 입었던 자색 옷 등을 자신에게 달라고 합니다. 특별히 금 귀고리는 천칠백 세겔(20kg)이나 걷혔습니다. 기드온은 그것을 가지고 에봇을 만들어 자신의 고향 집에 두었는데, 성경은 그 사건을 두고 이렇게 평가합니다. “기드온이 금으로 에봇 하나를 만들어 자기의 성읍 오브라에 두었더니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하게 위하므로 그것이 기드온과 그의 집에 올무가 되니라”(8:27).

 

기드온이 만약 정말로 왕이 될 마음이 없고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는 왕이라는 신앙고백 위에 굳건하게 섰다면, 그는 백성들에게 여러 가지 전리품을 요청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재물은 곧 그 사람의 마음입니다. 왕이나 요구할 수 있었던 전리품을 요구한 기드온은 속으로 자기 자신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그것은 그가 자식이 많았고(70), 그 중에서 아비멜렉이라는 이름의 아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드러납니다. 아비멜렉의 뜻은 나의 아버지는 왕이시다라는 의미입니다. 아들의 이름을 통해서 자기 마음을 드러낸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백성들이 기드온의 에봇을 음란하게 위했다는 것은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고 기드온에게로 향해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 백성의 진정한 지도자는 백성들의 시선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는 손가락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그런 점에 있어서 철저하게 실패한 것이죠. 기드온은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게 한 것입니다. 그 증거가 바로 기드온의 죽음 이후 보인 백성들의 행보입니다. “기드온이 이미 죽으매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서서 바알들을 따라가 음행하였으며 또 바알브릿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고 이스라엘 자손이 주위의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 자기들을 건져내신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을 기억하지 아니하며 또 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이 이스라엘에 베푼 모든 은혜를 따라 그의 집을 후대하지도 아니하였더라”(8:33-35).

 

기드온이 죽자 백성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우상숭배에 빠지고, 기드온의 집안을 기억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러한 백성들의 행보에 섭섭한 마음이 들었는지, 기드온의 아들 중 아비멜렉이 잃어가는 집안의 권력을 되찾으려고 일어섭니다. 그런데 그 행보가 정상적이지 않습니다. 아비멜렉은 기드온의 첩의 자식이었는데, 세겜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세겜으로가 세겜 사람들에게 정으로 호소한 뒤 기드온의 여러 자식 중 세겜 출인인 자기가 왕이 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설득합니다. 세겜 사람들은 아비멜렉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은 뒤, 그와 함께 기드온의 아들들, 자그마치 70명이나 되는 아들들은 모두 도륙합니다.

 

그런데 70명의 아들 중 막내 요담이 가까스로 살아남아 몸을 숨기고 있다가, 그리심 산 꼭대기에 올라 자신의 형제들을 무참하게 살해한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에게 저주를 퍼 붓습니다. 저주의 요점은 결국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이 서로 원수가 되어 서로를 죽이게 될 거라는 것입니다. 과연 그의 저주대로 될까요?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저주한다고 해도, 그 저주가 무슨 효력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복을 내리시고 저주를 내리시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몫입니다. 우리는 복을 빌 뿐이며, 때로는 서운한 마음을 표출할 뿐입니다. 사실 우리는 그저 서로 용서하고 용납하고 최선을 다해 사랑하며 살면 됩니다.

 

결과적으로 요담의 저주는 그대로 실행되는데, 그것은 요담의 저주 자체가 무슨 효력을 가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 다음의 말씀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영을 보내시매…”(9:23). 요담의 저주는 사실 한풀이에 불과합니다. 그런 한풀이가 효력을 발휘한 것은 하나님께서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을 심판하셨기 때문입니다. 요담의 저주는 뜻하지 않게, 하나님께 쓰임 받은 것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요담의 저주가 이루어지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세겜 망대의 엘브릿 신전 학살 사건이라 부를 수 있는 끔찍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자기를 배반한 세겜 사람들을 응징하기 위해서 아비멜렉은 잔인한 행동을 합니다. 세겜 망대에 모인 사람들을 도륙하기 위해서 아비멜렉은 나무를 베어 가지고 가서, 망대 주위에 나무를 펼쳐 놓은 뒤 거기에 불을 붙여 망대 안에 숨은 세겜 사람들을 불태워 죽입니다. 자그마치 남녀 천 명이 불에 타 죽습니다. “아비멜렉에게서 불이 나와 세겜 사람과 밀로의 집을 사를 것이라는 요담의 저주가 실현됩니다.

 

세겜을 멸망시킨 아비멜렉은 내친김에 영토확장을 위해 데베스라는 도시를 점령합니다. 데베스 사람들은 아비멜렉에 저항하기 위해 데베스 망대로 몸을 숨깁니다. 아비멜렉은 세겜 망대 때와 같은 작전을 펼치기 위해 나무를 가져다가 데베스 망대를 불사르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 줄 복선이 있습니다. “아비멜렉이 망대 앞에 이르러 공격하며 망대의 문에 가까이 나아가서 그것을 불 사려러고 하더니…”(9:52). 세겜 망대 때와 같은 작전이지만, 분위기가 다릅니다. “가까이 나아가서는 어두침침한 비극의 복선을 담고 있는 문장입니다. 바로 그때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 발생합니다. 데베스 망대를 불태우려고 망대에 가까이 다가선 아비멜렉의 머리 위로 맷돌 위짝이 떨어진 것입니다. 그 맷돌 위짝을 아비멜렉에게 던진 자는 다름 아닌 한 여인이었습니다. 매우 허망한 순간입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승승장구하던 아비멜렉이 한 순간에 무너집니다. 그것도 한 여인에게.

 

아비멜렉도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믿을 수 없는 듯, 자신의 무기를 맡은 청년에게 어서 칼을 빼어 자신을 죽이라고 합니다. 적어도 자신의 죽음이 사람들에게 비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게 아비멜렉은 세상을 뜹니다. 그리고 후대 사람들은 그의 바람과는 달리 아비멜렉의 터무니없는 비극적 최후를 입에 올리며 마구 비웃습니다. “여룹베셋의 아들 아비멜렉을 쳐죽인 자가 누구냐 여인 하나가 성에서 맷돌 위짝을 그 위에 던지매 그가 데벳스에서 죽지 아니하였느냐”(삼하 11:21). 이렇게 여인이 던진 맷돌 위짝에 아비멜렉이 죽었다는 불명예스러운 사실이 후대에 전해집니다. 요담의 저주처럼, 세겜에서 나와 아비멜렉을 살랐던 불(에쉬)는 여자(이샤)였습니다.

 

기드온은 소심한 성격 때문에 자신의 욕망을 감추며 살았지만, 결국 그의 아들 아비멜렉이 그 욕망을 분출합니다. 아비멜렉은 과도한 욕망의 소유자였습니다. 정치적 욕심은 사람들을 소유하고 지배하며 그들의 추앙을 받고 싶은 허영심을 불러옵니다. 결국 아비멜렉에게 욕망이 우상이 된 것인데, 우상숭배의 결말은 언제나 비극적입니다.

 

이 상황을 잘 나타내주는 말씀이 예레미야서에 있습니다.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17:5). 기드온의 집안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큰 일을 행한 뒤 큰 영광을 받았지만 결국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나살다가 결국 이렇게 패가망신을 당하고 맙니다.

 

예레미야 말씀은 여호와를 떠나 사는 사람들의 삶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17:6).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여호와에게 마음을 두고 사는 자들의 삶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17:7-8).

 

예레미야 179절의 말씀처럼, 아비멜렉은 심히 부패한 마음을 드러내 놓고 살다가 패가망신합니다.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는 말씀처럼, 아비멜렉은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고 살다가 결국 어리석은 자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의 마음 상태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쉽게 부패하는 우리의 마음에 빛과 소금인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뿌리며 살아야 합니다.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말씀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라는 말씀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기드온의 이야기를 통해서 너무도 극명하게 드러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의 결단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두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삶을 복되게 합니다. 믿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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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4. 18. 12:00

보답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

(룻기 2)

 

설교자로서 설교하기에 쉽지 않은 성경들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사사기입니다. 사사기를 단순하게 보면 영웅이라고 불릴 수 있는 사사들의 영웅담이어서 재미있는 것 같지만, 그 실체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굉장히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전체적인 내용과 흐름이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속된말로 짜증나게 합니다. 그래서 사사기는 설교하기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사기와 함께 룻기를 주셨습니다. 룻기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룻기는 사사시대에 일어난 일에 대한 기록입니다. 사사기는 이스라엘의 정치적, 종교적 몰락을 그리고 있는 반면, 룻기는 그러한 혼란과 어둠의 시대 가운데 저만치 혼자서 피어나는 제비꽃과 같이 희망과 빛을 그리고 있습니다.

 

사사기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여줍니다. 참 혼란스러운 세상입니다. 정치와 종교가 타락할 대로 타락해서, 거기에서 어떠한 희망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한숨만 나옵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희망입니다. “희망은 맨 나중에 죽는다라는 러시아의 속담처럼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려도, 희망만은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요즘 세상은 룻기서와 같이 희망을 주는 말씀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그냥 읽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지고 환해집니다. 예배 시간에 성경 읽기는 설교를 위해서 읽는 것이 아니고, 그것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중심으로 설교자는 설교할 뿐입니다. 설교말씀보다, 성경말씀을 더 사모하십시오. 그래야, 설교말씀이 귀에 들리는 법입니다. 성경말씀에는 관심도 없으면서, 설교말씀에만 관심을 두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들을 수도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그저 자기 자신만 증폭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이유는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당신과 일치시키기 위해서이지, 우리 인간을 증폭시키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일치를 통해서만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일치가 곧 구원입니다.

 

룻기의 1장 말씀은 나오미의 기구한 인생과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모압 여인 룻이 이스라엘의 베들레헴으로 오게 된 경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1장은 이렇게 끝납니다.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1:22).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라는 시간적 배경은 어떠한 일이 일어날 거라는 것에 대한 암시를 주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도착한 나오미와 룻은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서 이삭줍기에 나섭니다. 요즘에는 이삭줍기 같은 것이 없지만, 옛날에 이삭줍기는 가난한 자가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마지막 생계 수단이었습니다. 이삭줍기를 못하면 그야말로 거지 신세가 되어 빌어먹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이삭줍기는 가난한 자의 마지막 자존심인 셈입니다.

 

룻은 모압 여인이었습니다. 이방인이라는 뜻입니다. 이방인이었던 룻이 낯선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얼마나 마음이 조렸겠습니까? 미국에서 이민자로서 사는 저는 그 마음이 이해 갑니다. 차별 중에 가장 극복하기 힘든 차별이 인종차별입니다. 아무리 많이 배우고 아무리 부자가 되어도, 인종차별 앞에서는 무용지물입니다. 요즘 한국도 다문화 사회가 되어 가고 있는데, “완득이라는 영화를 통해서 다문화사회의 문제를 소프트하게 그린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터전에서 만나게 되는 다른 인종의 사람들이나, 다문화가정 친구들에게 잘해 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복을 내리실 겁니다. 이방인이고, 여인이고, 남편도 잃은 상태의 룻은 거의 무방비 상태로 세상에 놓여진 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안전장치 하나 없이 줄타기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세상에서 소외된 자 중에 가장 소외된 자였습니다.

 

그녀가 베는 자를 따라 이삭줍기를 하다가 우연히엘리메렉(룻의 시아버지)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들어가게 됩니다. 지형도 낯설고, 문화도 낯설고, 사람도 낯설었던 룻이 무엇을 알아서 보아스의 밭에 들어갔겠습니까? 게다가 베는 자를 따라 이삭줍기 하려면 허리를 숙이고 정신 없이 이삭을 주워 담아야 하기 때문에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삭 줍는 여인이 룻 하나 밖에 없는 것이 아니고, 가난한 자들 사이에서도 이삭줍기는 경쟁적으로 행해졌습니다. 얼마나 정신이 없었겠습니까?

 

우연히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지만, 이것은 말로 설명 안 되는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나타내 주는 말입니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필연적인, 그리고 감사와 탄성이 저절로 나오는 일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이 일어납니까! 그러한 우연, 즉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가 없다면 역사는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그저 거기에 우리는 감사하고 감탄할 뿐입니다.

 

룻은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보아스와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보아스는 엘리멜렉의 친족이고, 유력한 자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유력한 자라고 하는 것을 보니, 사회적 지위와 덕망이 있는 자였던 것 같습니다. 그의 모습을 한 번 보시죠.

 

보아스는 일터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일꾼들에게 이런 인사를 건넨닙다.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God be with you!” 보통 사람 같으면 일꾼들에게 이런 인사를 먼저 건네지 않을 것입니다. 잔소리부터 할 것입니다. 그런데 보아스는 일꾼들에게 복을 먼저 빌어줍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보아스의 축복을 받은 일꾼들은 거기에 복 비는 말로 보답합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God bless you!” 참 훈훈한 장면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 가운데 꼭 나타나야 하는 훈훈한 장면입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은 복을 빌어 주는 것입니다. 복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복이 최고의 복입니다. 여기에서 아멘안 하시는 분은, 그래도 복은 이 최고지, 생각하시는 분이죠? 복 중에서도 최고의 복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복입니다. 그래서 존 웨슬리 목사님도 마지막 숨을 거두시면서 이런 말을 했다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요즘 저는 영성신학자 안셀름 그륀의 책을 즐겨 읽습니다. 그의 책에서 배워 실천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누군가를 만나기 전에 그 사람을 위해서 복을 비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곳에 오기 전에, 여러분들을 위해 복을 빌고 왔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저를 통하여 하늘의 복을 받으셨습니다(안 받으시겠다는 분은 다시 돌려주십시오.). 저는 목사로서 하루의 일과를 어쩔 수 없이기도 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굉장히 힘듭니다만, 큰 특권이고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새벽기도 시간에 빼먹지 않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루의 일과를 생각하며 그날 만나게 될 사람들을 위해서 축복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주님, 오늘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 내려 주소서. 그들을 통하여 당신의 은혜를 입게 하소서!” 그러면 내가 만나는 사람은 그냥 일반 사람이 아니라, 나의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복 받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냥 일반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복덩이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앉아 있는 여러분들은 제 눈에 다 복덩이로 보입니다.

 

물론 그렇게 기도하고 만났는데도, 나를 들이받는 사람도 있습니다(지금 조시는 분, 또는 딴 생각 하시는 분!). 복이 둥글둥글하게만 올 거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우리의 착각입니다. 복은 때로 뾰족하게도 옵니다. 그러나 진실하게 복을 간구했다면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뾰족하게 오는 복덩이에게서 그 동안 알지 못했던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하십니다. 진심으로 기도하고 난 후에 오는 뾰족한 복덩이는 은혜입니다.

 

가정이든, 교회든, 어느 집단이든 구성원들 간에 어떠한 말을 주고 받는지 보면 그 공동체의 미래가 보입니다. 가정에서부터 부부 간에, 부모 자식 간에 서로 복 빌어주는 말을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특별히 부부 간에 의식적으로 복을 빌어주는 말을 잘 해야 합니다. 인간은 어느 한 곳에 머물러 있는 존재가 아니라, 계속해서 변해가는 존재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a becoming being, 즉 되어가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되어가는, 변해가는 상황 속에서 서로 노력하지 않으면 낭패를 보기 십상입니다. 사람은 그냥 그 자리에 결코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남녀의 관계(부부의 관계)가 참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서로에게 동화 속에 나오는 고운 말을 씁니다. “공주님, 왕자님, 나의 로테, 나의 네페르타리” “내 눈에는 그대가 천사로 보여, 내 눈에는 그대가 아름다워요, 내 눈에는 너 밖에 안 보여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언어가 매우 인간적으로 바뀐다. 가장 인간적인 말을 씁니다. “이 인간, 저 인간그러다 더 심해지면 언어가 동물적으로 갑니다. “XX, XX”. 그러나 끝에 가서는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 외계어를 씁니다. 그러다가 서로의 보금자리인 지구를 떠나게 되는 겁니다. 각자가 왔던 화성과 금성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죠.

 

제 생일이 36일인데, 얼마 전 생일 날, 케이크 자르고 밥상 차려주는 집사람이 고마워서,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며, ‘영숙이, 오빠 사랑하지?’라고 물어봤는데, 우리 집사람이 대답하기를 생일 날 죽고 싶어하더군요. ‘내가 애들 때문에 산다.’해서 한바탕 웃은 적이 있습니다. 연애할 때는 그렇게 내 몸에서 애기 냄새가 난다고 좋아하더니, 요즘에는 내 몸에서 독소 냄새가 난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침에 눈만 뜨면 해독 주스를 들이댑니다. 내 몸에 있는 독소를 빼내야 한다면서요. 그거 먹느라 정말 힘듭니다. 안 먹으려 하면 도끼눈 뜨고 바라봅니다.

 

50, 60, 70대 남자들이 모여서 대화를 나눴습니다. 50대 남자가 먼저 말을 꺼냈습니다. “형님들, 내가 오늘 아침에 집사람한테 밥 좀 차려 달라 그랬다가 죽는 줄 알았어요!” 그랬더니 60대 남자가 이렇게 말을 이었습니다. “동생은 아무 것도 아녀, 나는 오늘 집사람한테 어디 가냐고 물어 봤다 죽는 줄 알았어.” 가만히 듣고 있던 70대 남자가 입을 열었습니다. “동생들, 말도 마, 나는 오늘 아침 눈 떴다고 죽는 줄 알았어!”

 

서로 복을 빌어줍시다. 복을 빌어주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어요, 라는 마음이 들어도 복을 빌어줍시다. 말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서로 복을 빌어주는 고운말을 하면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독일의 실존 철학자 하이데거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말을 했는데, 말씀을 전하는 목사인 나에게는 이 말이 정말 실존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정말 언어는 존재의 집이 맞는 것 같습니다. 어떤 언어를 쓰느냐에 따라서 내 존재가 달라집니다. 목사의 특성상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게 되는데, 그 사람이 쓰는 언어를 가만히 들여다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쓰는 언어에서 그 사람의 됨됨이가 드러납니다. 정말 언어는 존재의 집입니다. 그런 점에서,  복을 비는 언어와 감사의 언어는 분명 하나님의 복을 불러오는 것 같습니다.

 

한 번 연습해봅시다. “주님, 오늘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을 내려 주소서. 그들을 통하여 당신의 은혜를 입게 하소서!” 부부끼리 복을 빌어주는 말은 이겁니다. “사랑해. 고마워.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힘내요. 내 맘 알죠?” 사실 최고의 복을 빌어주는 언어는 신체 언어입니다. 부부끼리는 뽀뽀가 최고의 복 빌어주는 언어입니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뽀뽀를 자주합니다(물론 언제까지 이럴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보십시오. 복을 빌어주는 행위가 입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말은 능력이 있기 때문에 손과 발이 실천하게끔 해줍니다. 보아스와 룻의 만남을 보시죠. 보아스는 룻에게 선대합니다. 보아스가 일터에 와서 처음으로 한 말은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입니다. 그런데, 그랬던 보아스가 이방 여인 룻을 보고, “저 여자는 뭐냐? 왜 남의 밭에 와서 허락 없이 이삭을 줍는 것이냐? 당장 내쫓아라!”라고 하는 것은 정말 우스운 일입니다. 복을 비는 말을 해 놓고, 복 없는 행동을 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보아스는 복을 빈 자답게 룻에게 선대합니다. 1) 보아스는 룻에게 자기 자신의 밭에 머물 것을 허락합니다. 다른 밭에 가면 어떠한 봉변을 당할지 모르니, 자신의 밭에서 계속해서 이삭줍기를 해도 괜찮다고 선대합니다. 2) 그리고, 부리는 일꾼들에게 룻을 보호해 줄 것을 명령합니다. 이방 여인이고, 과부고, 젊은 여자로서 어떠한 해를 당할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보아스는 그러한 위험으로부터 룻을 보호해줍니다. 3) 또한 마른 목을 축이게 해줍니다. 베는 자를 따라 허리를 숙여가며 이삭을 줍는 일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금방금방 목이 마르기 마련입니다. 옛날에는 물 먹는 일도 쉽지 않았습니다.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다가 먹어야 하는데, 물 한 모금 얻어 먹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이방 여인인 룻이 낯선 곳에서 물 얻어 먹는 일로 고초를 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보아스는 그러한 어려움으로부터 룻을 구해줍니다. 4) 마지막으로 보아스는 일 하던 중간에 룻의 배고픈 배를 부르게 해줍니다. 이삭줍기를 한다는 것은 가난하다는 뜻인데, 가난하다는 것은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다닌다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삭줍기를 하느라 얼마나 배고팠겠습니까? 아마도 배가 등가죽에 붙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보아스는 룻에게 선대합니다. 배부르게 먹여줍니다.

 

보아스가 이렇게 복을 빌어주고 실제로 사람들에게 선대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사는 경건한 자였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경건이란, 야고보서 127절에 나와 있듯이,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러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때가 사사시대 입니다. 사사시대에 이런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입니다. 사사시대는 한마디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이 옳은 대로 행하던때였습니다. 하나님이고 뭐고 다 필요 없고, 자기 자신의 생각이 미치는 대로 행하던, 하나님을 모르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하나님을 알았던 사람이었다는 것이죠.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11절과 12절을 보면, 보아스가 롯에게 선대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나옵니다. 롯이 이방여인임에도 불구하고,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이스라엘을 택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택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바로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경건입니다. ,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택한 룻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가 얼마나 예뻐 보였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보답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사는 자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는 뜬구름 잡는 것처럼 허황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복이 얼마나 구체적으로 임하는지 보십시오. 나락으로 떨어졌던 두 여인(나오미와 룻)의 삶이 점점 회복되고 있습니다.

 

그날, 룻이 보아스의 보리 밭에서 이삭줍기를 통해 소득 한 것이 보리 한 에바였습니다. 에바는 광주리라는 뜻입니다. 한 광주리를 얻었다는 뜻입니다. 대단한 수확입니다. 이삭줍기 해서 그 정도의 수확을 얻기는 정말 힘듭니다. 그뿐만 아니라, 룻은 일하느라 배를 굶어 배가죽이 등에 붙어 돌아온 게 아니라 오히려 배부르게 돌아왔습니다. 오히려 음식이 남아 그것을 챙겨 가지고 와, 하루 종일 굶었을 시어머니를 봉양합니다.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합니다. 음식을 구하는 것으로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나오미와 룻이 삶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그 당시 가족이라는 울타리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 결혼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께서는 보아스를 통하여 기업 무를 자(고엘법)’의 의무를 감당하게 하셔서, 룻을 보아스의 아내가 되게 하시고, 두 여인의 고단한 삶을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십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보아스는 다윗의 증조 할아버지입니다. 룻기서 마지막은 이렇게 끝납니다.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4:22).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혈통에서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아스와 룻, 그리고 다윗의 혈통에서 나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모든 피조물들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여기에 모여서 예배 드리는 이유가 아닙니까?

 

하나님께서는 룻의 아름답고 신실한 결단,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리다!”, 이것을 결코 그냥 넘기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 마음을 두고 살겠다고 다짐하는 자들을 결코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보답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인간의 순종이 만나면 역사가 만들어집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순종했고, 보아스는 하나님께 순종했습니다. 결국, 나오미와 룻과 보아스 모두는 하나님께 순종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말씀)와 인간의 순종은 역사를 바꿉니다. 우리는 그것을 십자가에서 분명히 보았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미련해 보이는 지혜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십자가 위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죽음만이 가득한 이 세상에, 생명의 희망이 일어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의 지혜를 믿으십니까? 그것이 십자가처럼 미련해 보일지라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 순종하십시오.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살아가십시오. 예수 믿는 자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 절대적인 마음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살아가겠다고 신앙의 결단을 내리십시오. 그 결단이 여러분의 언어부터 바꾸어 줄 것입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살아가는 자의 언어는 은총의 언어, 축복의 언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둔 마음이, 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축복의 언어가 여러분의 삶으로 하나님의 구체적인 복을 불러 올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과 함께 구원의 역사, 새창조의 역사, 희망을 만들어 나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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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4. 17. 06:00

신앙은, 패러독스다

창세기 22

(창세기 22:1-14)

 

패러독스란 모순되어 보이나 진리를 보여주는 어떤 것을 말합니다. 기독교 신학자 중에서 신앙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 본 사람들 중 으뜸은 키에르케고르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는 그의 책 <공포와 전율>을 통해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전개시키는데, 그것을 통해 신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는 그 책에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전개시키면서 다음과 같은 네 가지의 다른 상황을 설정하는 것으로 신앙을 풀어 나갑니다. 좀 길긴 하지만, 그 내용을 그대로 옮겨 보겠습니다. 키에르케고르의 글을 직접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신앙에 대해서 많은 통찰력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1)

이른 아침이었다. 아브라함은 일찍 일어났다. 그는 나귀 등에 안장을 놓고 이삭을 데리고 그의 장막을 떠났다. 사라는 그들이 계속을 내려가서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창문에서 그들을 전송하였다. 그들은 사흘 동안 묵묵히 나귀를 타고 갔다. 나흘째 되는 날 아침이 되어서도 아브라함은 역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눈을 들어 멀리 모리아산을 바라보았다. 그는 종들을 뒤에 남겨두고 이삭과 단 둘이서만 손을 잡고 산으로 올라갔다.

거기서 아브라함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나는 이 여행이 그를 어디로 이끌어 가는가를 이삭에게 숨기고 싶지가 않다.” 그는 조용히 섰다. 그는 한 손을 이삭의 머리 위에 얹고 그를 축복하였다. 이삭은 그의 축복을 받기 위하여 몸을 구부렸다. 아브라함의 얼굴 모습은 아버지의 사랑 그것이었고, 그의 눈 길은 부드러웠고, 그의 말은 엄하게 타이르는 듯한 말투였다. 그러나 이삭은 아버지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이삭의 마음에는 아무런 감동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무릎을 끌어안고 발아래 엎드려 애원하였다. 이삭은 자신의 젊은 생명을 위하여, 자신의 아름다운 희망을 위하여 애원하였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집에 있어서의 즐거웠던 일들을 아버지에게 회상시켰다. 이삭은 고뇌와 외로움을 회상시켰다. 아브라함은 자식을 붙들어 일으켜 자식의 손을 잡고 다시 걸었다. 아브라함의 말에는 위로와 격려가 충만해 있었다. 그러나 이삭은 아버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아브라함은 모리아산에 올라갔다. 그러나 이삭은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때 순간적으로 이삭은 아버지를 외면하였다. 그러나 이삭은 다시금 아버지 아브라함을 바라보았을 때, 아버지의 얼굴 모습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아버지의 시선은 험상궂었고, 모습은 소름이 끼칠 만큼 창백하였다. 그는 이삭의 가슴팍을 움켜잡고 땅 위에 내던지며 외쳤다. “어리석은 자야! 너는 내가 너의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있느냐? 나는 우상숭배자다. 너는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믿고 있느냐? 아니다. 이것은 나의 욕망이다!” 그때 이삭은 벌벌 떨며 불안에 싸여 부르짖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는 땅 위에서는 아버지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당신께서 저의 아버지가 되어 주십시오!” 그러나 아브라함은 조용히 혼자서 중얼거렸다. “하늘에 계신 주여, 저는 당신에게 감사드립니다. 이삭이 당신에 대한 신앙을 잃느니보다는 오히려 그가 나를 인간이 아니라고 믿는 편이 좋습니다.”

 

(2)

이른 아침이었다. 아브라함은 일찍 일어났다. 그는 그의 늙은 신부 사라와 포옹하였다. 그리고 사라는 자신의 치욕을 제거해 준 이삭에게, 그녀의 자랑이고 모든 후손들을 위한 소망인 이삭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그들은 묵묵히 나귀를 타고 길을 떠났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눈길은 땅 위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윽고 나흘 째 되는 날에 가서야, 그는 눈을 들어 멀리 모리아산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의 눈길은 다시금 땅 위로 돌아갔다. 그는 말없이 불을 지필 장작을 포개놓고, 이삭을 묶고, 말없이 칼을 뽑았다. 그때 그는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신 양을 보았다. 그래서 그는 이 양을 제물로 드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 이날부터 아브라함은 노인이 되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요구하신 사실을 잊을 수가 없었다. 이삭은 이전처럼 무럭무럭 자랐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눈이 흐려졌다. 그는 다시금 기쁨을 볼 수 없었다.

 

(3)

이른 아침이었다. 아브라함은 일찍 일어났다. 그는 젊은 어머니 사라에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사라는 그녀의 즐거움, 영원한 기쁨인 이삭에게 입맞춤을 하였다. 그러고 나서 아브라함은 생각에 잠겨 나귀를 타고 길을 떠났다. 그는 이전에 황야로 쫓아버린 하갈과 그의 자식을 생각하였다. 그는 모리아 산에 올랐다. 그리고 칼을 뽑았다.

조용한 저녁나절이었다. 아브라함은 홀로 나귀를 타고 나갔다. 그리고 모리아 산에 이르렀다. 그는 얼굴을 숙였다. 그는 이삭을 바치려고 한 사실, 아버지로서 아들에 대해 의무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사실에 대한 죄를 용서해 주십사 하고 하나님에게 애원하였다. 그는 여러 차례 나귀를 타고 혼자서 외로운 길을 다녀왔다. 그러나 그는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최선의 것, 그것을 위하여서는 자신의 생명을 수천 번이라도 기꺼이 내던져도 좋다고 생각하는 그런 것을, 하나님에게 바치려고 한 일이 어째서 죄가 되는가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만약 그것이 죄라고 한다면, 만약 그가 그렇게까지 이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그런 일이 용서받을 수 있는가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과연 이보다 더 무서운 죄가 있을 수 있을까?

 

(4)

이른 아침이었다. 아브라함의 집에서는 길을 떠날 모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사라에게 작별인사를 하였다. 그리고 충실한 종 엘리에셀이 그의 길을 인도하였으나, 그는 도중에 다시 되돌아갔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서로 의좋게 나귀를 타고 모리아 산까지 갔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조용하고 차분히 번제를 올리기 위한 모든 준비를 다하였다. 그러나 그가 뒤로 돌아서 칼을 뽑았을 때, 이삭은 아브라함의 왼쪽 손이 절망적으로 움켜쥐어져 있으며, 그의 전신에는 전율이 흐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브라함은 칼을 뽑아 들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사라는 달려가 그들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이삭은 신앙을 잃고 말았다. 세상에서는 이 일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이삭은 어느 누구에게도 그가 본 일을 말하지 않았고, 또 아브라함은 그 일을 어느 누가 보았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키에르케고르, 공포와 전율, 다산글방, 21-26>

 

우리는 창세기에 있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읽어 내려가다가 22장에서 이해하기 힘든 다음과 같은 문장을 만나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2). 성서기자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런 명령을 내리신 이유를 이렇게 밝힙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1).

 

우리의 일상에서 실제로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이것은 실정법 상 살인죄에 해당됩니다. 만약 이런 사람이 있다면, 사람들은 이를 제지할 것이고, 그를 일컬어 미친놈이라고 할 것입니다. 일상에서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어나면 분명히 손가락질 밖에 못 받을 이러한 일에 대해서 성경은 왜 기록하고 있을까요? 아들을 바친 아버지의 이야기를 조금 삐딱하게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신앙이란 미친짓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이렇게 미친짓 같은 신앙을 갖느니, 그냥 평범한 선한 양심대로 세상을 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시험하고자 하신 그 신앙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1절 말씀은 그 일 후에라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그 일이 무엇인지 좀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얻은 후, 하갈과 이스마엘 사건 때문에 한 바탕 어려움을 겪습니다. 가슴이 아프긴 했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 문제는 잘 해결된 듯 보입니다. 그리고 나서 아브라함은 블레셋 사람들과 평화조약을 맺습니다. 그 내용은 창세기 2122절부터 30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은 약속의 아들 이삭도 받았고, 집안의 불화의 싹이었던 하갈과 이스마엘 문제도 잘 해결되었고, 게다가 정착해 살고 있는 블레셋 땅의 주민들과도 평화조약을 맺어, 그야말로 여러 가지로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평화를 누릴 때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흐려지는 법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는 평안을 달라고 하나님을 그렇게 찾아대다가도 막상 평안에 이르면 그 평안을 가져다 주신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이 인간의 언약함입니다. 그렇다고, 늘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살겠다고 자신에게 평안이 이르는 것을 거부할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잠언 30장에 나오는 아굴의 기도처럼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를 묵상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최선인 듯 합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하나님께 구했을 때 그것이 내게 주어졌는데, 그것이 헛된 것인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인지 알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은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사모하게 되었느냐, 아니면 하나님을 금방 잊어버리느냐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시험은 매우 고무적인 겁니다.

 

사람은 평화로울 때 또는 만사가 잘 풀릴 때 그 마음을 달아볼 수 없습니다. ‘시험의 때에 그 마음이 보이는 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실 때 그 시험은 아브라함의 마음을 달아보시는 시험이었습니다. 1절에서 쓰인 시험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의 니싸인데, 이것은 시험하다, 입증하다, 증명하다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야고보서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신다고 나옵니다만, 하나님의 시험은 누군가의 신앙을 잃어버리게 하고 사악한 의도를 가진 시험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을 달아보고 하나님께 더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은혜의 시험인 것입니다.

 

평화롭게 살아가던 아브라함에게 그야말로 시험이 닥쳤습니다. 100세에 얻은 귀한 아들, 정말 눈에 넣어도 하나도 아프지 않을 그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든 겁니다. 그냥 보기에도 참 불합리한 명령을 받아 든 아브라함, 한 번 저항해 볼만도 한데, 성서기자는 그가 어떠한 고민도 한 흔적이 없는 것처럼 아침에 일찍 일어나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번제 장소까지는 3일이 걸렸습니다. 그 삼일 동안 아브라함은 어떤 생각을 하며 갔을까요? 아마도 수많은 고통의 파도가 가슴을 요동쳤을 겁니다. 그러한 마음을 상상해서 옮겨놓은 것이 위에 있는 키에르케고르의 글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아브라함에게 감정이입을 해 그의 마음을 들여다 보고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신앙이란 불합리해 보이고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처럼 보입니다. 특별히 이러한 무지막지한 명령 앞에서 그것을 의연하게 실행한다는 것은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신앙은 패러독스인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삼일 길을 걸어가면서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려고 온 힘을 다 기울였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모리아 땅의 한 산에 도착했을 때, 그는 종들을 세워두고 아들 이삭과 단 둘이 산으로 올라가면서 이곳에 온 목적이 예배라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이것은 논리적으로 맞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명령을 온전히 준행할 목적이었다면, 여기서 우리가라는 말은 빠져야 합니다. 돌아올 때 이삭은 없고 아브라함만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에 대해서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1119절에서 아주 명쾌한 해석을 내놓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번제를 위해 불과 칼을 손에 들고 올라갑니다. 아들 이삭은 번제를 위해 나무를 지고 올라갑니다. 그때 이삭은 아버지에게 질문합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심장을 파고 드는 질문이지만, 아버지는 아버지다운 대답을 해줍니다.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그리고 장면이 바뀌면서 번제단을 쌓는 것이 동작을 나타내는 동사와 함께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은 그곳에 제단을 쌓은 것으로 시작해서, 나무를 벌여 놓고’, 이삭을 묶고’, 제단 나무 위에 올려놓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아들을 죽이기 위해 칼을 잡아 빼 듭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은 수많은 화가의 상상력을 자극시켰습니다.  그 중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의 그림이 가장 유명한데, 그의 그림을 보면 이삭의 표정이 압권입니다. 공포에 질린 표정을 너무도 잘 표현해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극도의 긴장감이 흐르는 바로 그때 여호와의 사자가 아브라함을 멈춰 세웁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이렇게 두 번 부른 것은 상황이 그만큼 긴박했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즉각 반응합니다. “제가 여기 있나이다!” 사실 이러한 반응은 보이기 쉬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마음을 두고 있지 않거나 깨어 있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모르는 자에게도 이러한 반응은 보기 불가능합니다. 사무엘도 엘리 제사장 문하생으로 제사장 수업을 받을 때 하나님의 부르심에 즉각 반응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죠. 엘리 제사장의 가르침을 받고서야 비로서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반응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늘 마음을 두고 있었습니다. 평화롭게 살고 있다고 마음을 허탄한 데 둔 것이 아니라, ‘죽은 자도 다시 살리시는 능력의 하나님께 집중하면서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모리아 산에서의 이삭 번제 시험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의 마음을 확인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삭 대신 숫양을 번제물로 바칠 수 있도록 준비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것을 일컬어 여호와 이레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 부릅니다. ‘조상은 불완전하지만 가장 핵심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는 것을 일컬을 때도 쓰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에게서 신앙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가장 핵심적인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신앙 자체는 굉장히 패러독스합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그렇습니다. 인간의 부족한 마음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깨달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 명확하게 보이는 것이 이상한 겁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깨달은 양 막무가내로 달려가는 사람들이 가장 위험한 사람들입니다.

 

또한, 신앙이란 패러독스해 보이지만, 온전히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능력입니다. 신앙 사건 중 가장 패러독스한 사건은 십자가 사건입니다. 말도 안 되는 사건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해 보이는 십자가 사건이 어떻게 구원 사건이 될 수 있다는 것인지요? 그것이 구원 사건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께서 끝까지 하나님께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죽어가면서까지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한 예수를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셔서 그를 의인으로 인정해 주시고, 우리의 주님으로 높여 주셨습니다.

 

명확히 이해되고, 기분 좋게 받아 들일 수 있는 것으로 하나님의 뜻이 임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신앙은 패러독스이기 때문에 불합리한 형태로 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영적분별력이 필요한 거고, 그 능력을 입기 위해서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와 기도하는 일이 필요한 겁니다.

 

아브라함은 영원하신 하나님을 유한한 것(아들)과 바꿀 수 없었습니다. 신앙 없는 우리는 자주 그런 실수를 범합니다. 유한한 것을 위해 영원하신 하나님을 희생시킵니다. 그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택할 때, 영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유한한 우리의 인생에게 필요한 것들을 여호와 이레로 준비해 주십니다. 그러나, 유한한 것을 위해 영원하신 하나님을 저버린다면, 그 유한한 것이 오늘 피었다 지는 들에 핀 꽃과 같은 우리네 인생들에게 무엇을 가져다 줄 수 있겠습니까?

 

패러독스로 다가오는 하나님의 뜻 앞에서 당황하지 마시고,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함으로 여호와 이레의 만복을 누리시는 신실한 주님의 백성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www.columbuskmc.org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4. 10. 06:27

이삭 - 구원의 웃음

창세기 21

(창세기 21:1-7)

 

드디어 약속의 아들 이삭을 얻게 된 아브라함과 사라, 얼마나 기뻤을까요? 아마도 세상이 달라 보였을 겁니다. 하나님에 대한 수많은 의심의 장막도 걷혔을 것이고, 하나님을 의심했던 부분이 있었다면 오히려 하나님께 죄송한 마음도 들고,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도 느꼈을 겁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더욱 공고해졌겠죠.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보면 신앙이란 단 번에 성취할 수 있는 어떠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인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아들을 주시겠다고 한 약속의 성취까지 아브라함에게 얼마나 많은 시련이 있었습니까? 사실 그 약속의 성취까지 보장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약속 자체는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확실하지만, 그 약속이 실제로 성취되는 과정은 그야말로 고되고 지난한 훈련과도 같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겠죠.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나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3:12-14).

 

믿음을 경주로 표현하는 바울의 말을 빌리자면, 믿음이란 끊임없는 자기와의 싸움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한 가지 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과 그 약속의 성취를 위해서 경주하는 동력 또한 믿음의 속성임을 볼 수 있는 것이죠. 믿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다층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수주대토(守株待兎) 라는 고사성어를 만든 일화가 믿음에 대한 좋은 예시가 되는 것 같습니다: ()나라에 어떤 농부가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토끼 한 마리가 뛰어오다가 밭 가운데 있는 그루터기에 부딪쳐 목이 부러져 죽는 것을 보았습니다. 덕분에 토끼 한 마리를 공짜로 얻은 농부는 농사일보다 토끼를 잡으면 더 수지가 맞겠다고 생각하고는 농사일은 집어치우고 매일 밭두둑에 앉아 그루터기를 지키며 토끼가 오기만 기다렸습니다.[守株待兎]  그러나 토끼는 그곳에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으며 농부 자신은 송()나라 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밭은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 농사를 망친 것은 물론입니다.

 

여기서 믿음에 대한 속성을 발견할 수 있는데, 우선 농부의 믿음은 그루터기를 지키면 그루터기에 부딪쳐 죽는 토끼를 다시 얻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겁니다. 불가능할 것 같은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아브라함에게 아들이 주실 거라는 약속을 믿는 그 믿음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농부가 한 가지 놓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 약속의 성취를 위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가 믿음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범하기 쉬운 오류가 여기에 들어 있습니다. 약속이란 무미건조하고 일방적인 선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약속)을 맺으셨다는 것은 인격적인 사귐 가운데 거하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서로 간의 깊은 신뢰가 없으면 약속(언약)은 아무런 효력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언약)하신 것은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포가 아니라,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특별한 관계가 맺어졌다는 것을 뜻하는 겁니다. 농부가 범한 실수는 이런 것이죠. 농부가 그루터기에 부딪쳐 죽는 토끼를 기다리는 것은 아무런 인격적인 관계가 없는 겁니다. 그의 일방적인 믿음에 불과한 것이죠. 거기에는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놓치기 쉬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너무도 일방적일 때가 많습니다. 믿음이란 인격적이고 상호관계적이고 사귐적인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특별한 언약적 관계에 들어갔다고 하면서도 결국 신앙의 내용을 들여다 보면 전혀 인격적이지 않고 사귐적이지 않고, 하나님과 배타적 관계를 맺고 있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사실 이런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우상이란 헛것을 의미하는데, 헛것인 어떠한 존재나 사물에게 마음을 두는 것을 우상숭배라고 하기도하지만, 그것보다 더 끔찍한 우상숭배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헛것취급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변에서 하나님을 헛것 취급하는 것의 대표적인 예는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만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고, 오히려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 자체를 불편하게 여기면서 살다가,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어떠한 문제를 맞닥뜨렸다던지 아니면 마음 속에 간절히 원하는 어떠한 욕망이 생겼을 때 하나님을 찾는 것이죠.

 

아브라함은 적어도 이렇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수많은 실수를 범하고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길을 걸어가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그의 그러한 행동은 모두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그랬다는 겁니다. 실수를 범하고 반항을 하더라도,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그렇게 하면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모습을 긍휼히 여겨주시고 불쌍히 여겨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가정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자녀가 부모와의 깊은 관계 속에서 사고 치고 다니면 부모는 자녀의 그러한 모습에 화가 나긴 하지만 적어도 나 몰라라 하지는 않습니다. 반대의 경우도 발생합니다. 요즘엔 사고 치고 다니는 부모도 많습니다. 그런데 자녀와 부모 간에 인격적인 사귐이 바탕이 된 경우에 자녀든 부모든 사고 치고 다니는 것에 대해서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로의 지혜를 맞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부모와 자녀 간이라고 하더라도 그들 간에 어떠한 인격적인 관계가 형성되어 있지 않으면, 사고 치고 다닐 때 서로에게 어떠한 도움의 손길도 기대할 수 없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어구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약속의 성취라는 측면을 강조하기 위한 문학적 장치입니다. 이 말을 반복적으로 함으로써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죠. 한 마디로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기까지는 하나님의 돌보심이 가장 중요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깊은 속성입니다.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언약 안에서 당신의 의무를 온전히 수행하시는 분입니다.

 

약속이 성취되기까지 조마조마한 순간이 참 많았습니다. 그러나 약속이 성취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깊은 인격적인 사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을 우리를 눈 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 가운데 있었던 아브라함은 약속의 성취를 위해서 필요한 모든 제반 사항을 하나님의 돌보심 가운데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돌보심 가운데 아브라함은 죽을 위기에서 구원 받기도 하고, 육신의 생각이 낳은 것으로부터 깨달음을 얻기도 하는 등 끊임 없는 돌보심 가운데 약속의 성취라는 짜릿한 순간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약속의 성취인 아들 이삭은 그 이름의 뜻이 웃다입니다. 이 웃음은 단순히 창세기 18장에서 보았던 사라의 실소가 아닙니다. 이 웃음은 또한 단순히 기쁨의 웃음이 아닙니다. 이 웃음은 질적으로 다른 웃음으로 그 동안의 서러움과 고통을 말끔히 씻어주는 구원의 웃음입니다. 그야말로 약속의 성취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단순히 기쁘고 좋은 일이 아니라, 그냥 아들 하나 얻었다는 경사스러운 일이 아니라, 구원 사건이었습니다.

 

믿음이란 바로 이런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믿음을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고 하는 것이죠. 아들 이삭을 얻은 사라의 기쁨을 한 번 보십시오.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6). 이 웃음은 단순히 기쁜 웃음이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에게 아들이 생겼다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누군가에게 좋은 일이 생기면 좋은 일을 당한 당사자들만 웃고 맙니다. 일례로, 우리 아들이 하버드 대학에 들어갔다면 우리 집에는 참 좋은 일이지만, 그래서 우리 가정은 웃겠지만, 그 소식을 듣고 다른 사람들이 함께 웃어주는 일은 드뭅니다. 왜냐하면, 남이 잘 되는 것은 배가 아픈 법이니까요.

 

그런데, 믿음이란, 그 믿음이 인도하는 구원이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질투의 대상도 아니고 질투를 유발하지도 않습니다. 구원이란 남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남에게 부러움을 사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과 구원은 모두가 웃을 수 있게 해주는 보편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라에게 주신 웃음은 단순한 웃음이 아니라 구원의 웃음이었기 때문에 아들을 안아 든 그녀의 웃음 소리를 들은 주변의 모든 이들이 함께 웃을 수 있었던 겁니다. 이것이 바로 돌보시는 하나님이 이루어주시는 구원의 은혜고 역사인 것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십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이 있는 한 우리는 믿음의 길을 걸어가면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때로는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힘들고 어렵더라도 돌보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이끌어 주십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 가운데 있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이 믿음을 하나님께 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고 의무이고 권리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어떠한 믿음입니까?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사귐이 전혀 없는 빈 껍데기 믿음입니까? 아니면 비록 실수투성이고 때로는 아픔을 낳는 육신 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 가운데 있는 믿음입니까?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 처하든지, 하나님과 깊은 사귐 가운데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돌보십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은 우리를 기쁨으로 이끄실 텐데, 그 기쁨은 세상의 기쁨과 같지 아니한 구원의 기쁨이 될 것입니다.

 

웃을 일이 별로 없는 이 세상입니다. 한 번 한바탕 웃고 싶지 않으십니까? 한 바탕 웃고 나도 인생 그대로인 헛된 웃음이 아니라, 한 바탕 웃고 나면 인생이 달라지는 구원의 웃음을 웃고 싶지 않으십니까? 하나님만 믿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구원의 웃음을 안겨주실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품에 안은 이삭같은 바로 그 웃음을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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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4. 7. 03:32

그리스도의 영은 생명의 영이다

(겔 37:1-6; 8:6-11; 11:39-44)

오늘 우리가 읽은 세 개의 본문 말씀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죽어 있는 것이 다시 살아나는 겁니다. 죽었다, 산다! 한 마디로, 부활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사실, 잘 믿어지지도 않습니다. ‘죽었다 살아난다는 것이 진짜 가능할까?’ 이런 의심이 먼저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생명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창세기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Nothing) 하나님께서 생명을 창조하시는 이야기로 시작하고, 요한계시록은 새로운 생명, 즉 새하늘과 새땅이 창조되는 이야기로 끝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일컬어, “생명의 책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숨쉬고 살고 있으면서도 생명, 즉 살아있다고 느끼기보다는 죽음, 즉 죽어 있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고 싶어서 별별 행동을 다 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카니발(사육제)입니다. 그 시간만큼은 자신의 생명이 소멸되어 간다(죽어간다)는 것을 잊고자 한 광란의 축제를 벌이는 것이지요.

 

또한 자신의 삶이 죽음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일수록 주목 받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생명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을수록 주목 받고 싶어합니다. 납득할 수 없는 행동과 말을 통해서라도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 있음을,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자살소동이나 자살도 사회학적인 의미에서 이러한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자신이 안고 있는 죽음의 상태를 알리고 싶은 것이죠.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것이 우리 인간 세상이 지니고 있는 아픔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에스겔서를 보십시오. 얼마나 죽음이 가득 차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환상을 보여주셨는데, 마른 뼈가 가득한 골짜기를 보여주셨습니다. 마른 뼈가 가득하다는 말은 죽음으로 가득 찼다는 말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현실상황을 전적으로 보여주는 환상입니다. 현재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나라가 망하고,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마른 뼈는 그들의 삶이 절망 자체요, 죽음 자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기까지 이들이 얼마나 큰 고통을 당했겠습니까? 자비나 인권 같은 것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고, 온통 죽음으로 가득 찬 이야기들뿐입니다.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했을 때 예루살렘 주민들은 배고픔과 두려움에 떨어야 했습니다. 삶의 보금자리가 파괴되고 사랑하는 이들을 잃고, 절망 가운데서 적군들에게 부끄러움을 당해야 했습니다. 성전이 파괴되고, 짐승처럼 남의 나라에 끌려왔습니다. 그 어디에서도 생명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온통 사방이 죽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바로, 마른 뼈의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냥 죽은 것처럼 누워 있는 것 밖에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의 말씀도 이와 비슷한 상황을 보여줍니다. 물론 에스겔이 본 마른 뼈 골짜기만큼 대량의 죽음은 아니지만, 한 사람의 죽음이라는 것이 온 우주를 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마른 뼈 꼴짜기에서 발견하는 죽음이나 요한복음의 나사로의 죽음이나 그 본질은 똑같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뭉뚱그려서 표현 할 수 없습니다. 말레이시아 여객기가 인도양에서 실종된 사건으로 239명의 생사가 확인되고 있지 않고 있지만, 그건 여객기 실종으로 인해 239명이 죽은 한 사건이 아니라, 239가지의 사연을 가진 239가지의 죽음의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2차 대전 때 아우슈비츠에서 일어난 유대인 대학살도 마찬가지 입니다. 6백만 명 정도가 학살되었다고 보고되고 있는데, 아우슈비츠라는 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6백만 가지의 죽음의 사건이 일어난 겁니다. 얼마나 죽음으로 가득 차 있는 사건들입니까? 우리는 TV 매체나 역사교과서를 통해서 이러한 일들을 접해서 남의 일 같아 별로 신경 안 쓰고 살아가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숨이 콱 막히는 사건입니다.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그 누구도 나사로의 죽음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나사로가 죽기 전에 예수님께서 나사로에게 오셨다면 나사로는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소망과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오지 않으셨고, 결국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나사로가 죽은 것이 예수님의 탓은 아니지만 오빠 나사로가 죽기 전에 오지 않은 예수님이 원망스러운 것은 사실입니다.

 

이들의 마음에 자리잡은 생각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살아 있을 때 죽지 않게는 할 수 있지만, 죽은 후에 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혹시 살아나더라도 마지막 날에, 즉 부활의 때에 살아날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만 지금 당장 죽음에서 다시 살아날 거라는 기대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은 후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방문해서 그들을 위로하며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마르다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부활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다른 상황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마르다의 입술에서는 엄청난 고백이 나옵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이 믿음의 고백 위에서 예수님께서는 나사로를 향해 엄청난 일을 행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나사로를 다시 살리는 일입니다.

 

나사로는 이미 죽었습니다. 죽은 지 나흘(4)이나 지나서 송장 썩는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육신을 가진 우리 인간들의 진짜 모습입니다. 아무리 꾸미고 아무리 향수를 뿌려도 가려지지 않는 인간의 본래의 냄새입니다. 죽음의 냄새가 얼마나 지독합니까? 사는 동안도 그 죽음의 지독한 냄새를 펄펄 풍기면서 살아가는 연약한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입니다. 살고 있으니까 생명 냄새를 더 풍겨야 할 사람인데, 그러지 못하고 죽음의 냄새를 더 풍기면서 사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생명보다 죽음과 더 가깝게 지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의 운명은 죽음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참으로 비통한 인간 현실입니다.

 

에스겔이 본 마른 뼈 골짜기 환상이나,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그의 동료들이 보고 있는 현실이나 모두 죽음만이 가득할 뿐입니다. 그래서 에스겔도 절망하고 있고, 마르다와 마리아도 눈물에 젖어 있습니다. 이렇게 인생이 끝나는 것 같습니다. 이게 인생이라고 허무에 젖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까지가 믿는 이들이나 믿지 않는 이들이나 똑같이 보는 우리 인간 세상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은 이 현실 너머의 것을 보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마른 뼈 골짜기를 보여주시면서 단순히 이것을 보고 너희의 현재 상태를 좀 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상태는 이렇게 마른 뼈가 가득한 죽음의 상황이지만,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이런 마른 뼈까지도 생명을 입히실 수 있는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 말라는 희망을 전해주고 계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마른 뼈 골짜기를 보여주시면서 질문하십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이에 대해 에스겔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성경이 점잖게 기록하고 있어서 그렇지, 에스겔의 대답은 점잖은 대답이 아닙니다. 절망과 공포가 가득 한, 그리고 짜증이 가득 한 대답입니다. 한 마디로 볼멘 소리입니다. “제가 어떻게 압니까?” 이렇게 볼멘소리 하는 에스겔 앞에서, 그가 똑똑히 보는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천지창조 때 그러셨듯이 마른 뼈에게 생명을 불어 넣어주십니다.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요한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죽은 지 사흘이나 되어 무덤에 누워 있는 나사로에게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마른 뼈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신 겁니다. 그랬더니, 나사로가 죽음에서 일어나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도대체 이러한 일들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우리의 능력으로는 도대체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식능력으로는 도대체 깨달아지거나 믿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마른 뼈에 살이 붙고 생기가 넣어져 살아나고, 죽은 자가 다시 일어나 무덤에서 나오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 막 일어납니다. 믿을 수 없는 일들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이에 대해 우리는 너무 쉽게 긍정해 버립니다. 성경에서 그런가 보다 하니까 그렇다고 생각하고 고민도 하지 않습니다. 믿음 있는 것 같지만, 믿음이 전혀 없다는 증거입니다. 죽음의 실제를 깨닫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죽음에만 젖어 있어, 생명을 간구하는 능력이 상실됐다는 증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 말씀에 눈이 번쩍 뜨여야 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증언을 한 번 보십시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은 죽음의 일 밖에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영의 생각을 하는 자들은 그 너머에 있는 생명과 평안을 봅니다. 그러면 육신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육신 너머에 있는 영의 일, 생명과 평안을 볼 수 있습니까?

 

오늘 말씀은 바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안에 품을 때 그러한 일이 일어난다고 증거합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8:11).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 즉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마른 뼈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보게 되고, 죽은 자가 다시 일어나 무덤에서 나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죽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온통 생명을 보게 됩니다. 온통 생명의 일만 보는 우리의 삶 속에는 당연히 기쁨과 감사가 넘쳐나게 되겠죠.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의 삶의 상황이 마른 뼈 같다고 실망(절망)하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참으로 고백하는 사람은 우리 삶 가운데 있는 죽음을 보지 않고 생명을 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절호의 기회 입니다.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하셨던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한 기회입니다. 마른 뼈와 같은 우리의 삶의 현실, 우리가 거기에 살을 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거기에 생기를 불어 넣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그냥 놓아두지 않으십니다.

 

어려우세요? 힘드세요? 죽겠습니까? 그럴수록 예수 그리스도를 붙드십시오. 그러면 생명이 보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보입니다. 감사와 기쁨이 넘칩니다. 생명을 보니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생명을 보니까, 더 이상 두렵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자처럼 생기가 넘치게 살아갑니다. 어깨를 좀 펴십시오. 마른 뼈와 같은 우리의 삶에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어 주시고 살을 붙이시고 생명을 주십니다.

 

우리가 주님으로 고백하며 믿고 섬기는 그리스도는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그리스도의 영은 귀신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헛된 영이 아니라, 우리에게 참된 생명을 가져다 주시는 생명의 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가운데 거하는 자에게 임하는 그리스도의 영은 우리가 어떠한 상황 가운데 있더라도 생명을 가져다 주십니다. 우리가 사는 현실 속에서 겪게 되는 마른 뼈와 같은 상황에서뿐만이 아니라, 진짜 우리가 죽음을 맞게 된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영이 결국 우리를 살리실 것입니다.

 

부활절이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은 마른 뼈와 같은 소식, 무덤과 같은 소식들뿐이지만, 그런 소식들 앞에서 절망할 필요 없습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오빠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막막하게 서 있는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하셨던 말씀과 질문을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하고 계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11:25-26). 여러분은 이것을 믿으십니까?

 

생명의 영이신 그리스도의 영을 이 안에 품고 사는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사람들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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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4. 3. 05:56

선지자 아브라함

창세기 20

(창세기 20:1-18)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이는 일이 또 발생합니다. 창세기 12장에서 일어났던 일인데, 그때와는 장소가 좀 다릅니다. 그때는 애굽에서 일어난 일이었고, 지금은 가나안 땅 남부지역인 네게브의 그랄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상황도 좀 다릅니다. 창세기 12장에 나오는 애굽에서의 일은 아브라함이 아직 자식에 대한 약속을 받기 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으로부터 확실한 약속을 받은 뒤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달라졌는데도, 여전히 같은 일을 벌이고 있는 아브라함이 좀 이상해 보이긴 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인간의 연약함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불완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 들기에는 인간의 마음이 부족한 것이겠죠.

 

그리고 이 사건은 이전 장에서 보았던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사건과의 연관 속에서 보아야 합니다. 그것과 매우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 소돔과 고모라는 아브라함의 중보기도에도 불구하고 멸망 당했지만, 이번 사건에서 아비멜렉 가문은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를 통하여 멸망을 피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아브라함이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게 되는데, 과연 아브라함이 감당한 선지자의 역할이란 무엇인지 들여다 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 등 족장들이 거주지를 자주 옮겨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고 우리는 좀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지만 오히려 아주 자연스러운 행동입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서 아직 거류민이었고, 게다가 그는 유목민이었습니다. 유목민이란 여기 저기 떠돌아 다니며 가축들을 키우는 사람을 말합니다. 가축들에게 꼴과 물을 먹이기 위해서 꼴과 물을 찾아 이리저리 떠도는 삶은 아브라함에게 자연스러운 삶의 형태였습니다. 아마도 마므레에서 네게브 지역으로 옮겨간 것도 새로운 목축지를 찾아 나선 것이겠지요.

 

유목민은 가는 곳마다 거기에 이미 정착해 살고 있는 사람들과 갈등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짐승도 자기 영역 침범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호랑이 같은 맹수는 자신의 영역을 돌면서 자신의 분뇨 같은 것으로 영역 표시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대적자가 있으면 가서 목숨을 내놓고 싸웁니다. 영역을 지키는 것은 곧 생명을 지키는 것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 일이 벌어집니다.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누군가를 순순히 받아 줄 사람은 없습니다. 묘한 긴장감이 일어나게 마련이고, 싸움이든 타협이든 어떠한 갈등을 통해서 서로 간의 공생점을 찾아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랄 지역으로 이동했던 아브라함과 그곳에서 이미 터 잡고 살고 있던 아비멜렉 간의 공생점은 사라를 아비멜렉이 차지하는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라가 일종의 화해를 가져온 것이죠. 이것을 요즘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성매매같은 것으로 보면 안 됩니다. 지금의 문화와 그 당시의 문화는 천지차이입니다. 그러한 문화적 차이를 전제해 두고 읽어야 고개를 갸우뚱거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일단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의 일촉즉발의 갈등은 사라를 통해서 잠재워지는 듯 합니다. 그런데,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취한 그날 밤,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셔서 일의 상황을 의롭게 드러내십니다. “[보라!]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을 것이다. 그녀는 남편이 있는 여자다”(3). 이에 대해서 아비멜렉은 억울함을 호소합니다.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4,5). 이러면서 아비멜렉은 자신의 순전함을 주장합니다. 순전함에 대한 아비멜렉의 주장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옳다고 인정하시면서 아비멜렉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일러 주십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아비멜렉은 즉시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래서 사라는 어떠한 욕도 당하지 않고, 아비멜렉으로부터 풀려납니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을 만나 크게 힐책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느냐 내가 무슨 죄를 네게 범하였기에 네가 나와 내 나라를 큰 죄에 빠질 뻔하게 하였느냐?”(9). 이에 대해서 아브라함은 두 가지 변명을 합니다. 첫째,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11)라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브라함의 착각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아내 때문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인해 그런 거짓말을 했다는 것인데, 위에서 살펴봤듯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생각과는 다르게 그들 가운데서도 일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믿는 우리가 흔히 범하는 실수 중 하나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모두 옳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니까 선하고, 믿음을 갖지 않은 사람은 모두 악하다는 일반화의 오류에 빠지곤 합니다. 이것은 심각한 영적인 교만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제한하는 교만입니다. 하나님께서 믿는 우리들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비밀한 방식으로 믿지 않는 자들 가운데서도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하여 우리 멋대로 제한을 두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영적 교만입니다.

 

두 번째로 아브라함은 실제로 그의 아내 사라가 그의 이복 누이라는 변명을 합니다. 사실 이것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본토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이방인으로서 살아갈 때 자신들을 지킬 지혜였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자기 자신을 지키는 지혜가 상대방에게는 멸망을 가져오는 치명적인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지혜는,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참된 지혜는 나도 살고 상대방도 사는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어느 한쪽이 멸망하고 마는 제로섬게임 같은 것을 조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겸손함 가운데 하나님의 지혜를 간구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합니다.

 

아브라함의 변명이 아비멜렉에게 수긍이 가는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비멜렉 측에서는 이 문제를 평화롭게 해결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아비멜렉은 이방인 아브라함에게 다음과 같이 후한 처분을 내려줍니다. “내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네가 보기에 좋은 대로 거주하라”(15). 이 뿐만 아니라, 이유야 어찌되었든 잠시나마 욕을 보였던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놓아주면서 사라의 수치에 대하여 그냥 넘어가지 않고 최대한 보상을 해줍니다.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사이에 있었던 갈등은 이렇게 마무리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일의 마지막 마무리를 아브라함에게 맡기십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아는 자가 누리는 특권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의 사람이란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 가운데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 가운데 있는 사람은 자신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아비멜렉은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하나님 앞에서 아비멜렉이 아브라함보다 더 의로고 온전함 모습을 보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브라함을 앞서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결국 일의 마무리는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에게 넘어갑니다.

 

아브라함이 일을 어떻게 마무리하는지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출산하게 하셨으니”(17).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아비멜렉 집안은 대가 끊길 위기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갈등이 풀리면서 그러한 위기에서 벗어나게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아브라함을 통해 하십니다. 앞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셔서 사라를 아브라함에게 돌려보내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해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7).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일컬어 선지자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를 선지자란 앞 날을 내다보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선지자란 신으로부터 메시지를 받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선지자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아브라함의 역할은 병 고치는 일이었습니다. 선지자의 역할이 좀 더 광범위해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선지자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를 지닌 믿음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에게 속한 자가 반드시 죽게 될 것이라는 말은 아마도 살해당할 것이다라는 뜻이라기보다는 대가 끊길 것이다인 듯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자식이 없다는 것은 곧 죽음을 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줬던 것이 선지자 아브라함의 중보기도였다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 줍니다.

 

선지자란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 있는 자를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 있던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번 일에서 아비멜렉 보다 의롭거나 완전하지 못했지만 갈등과 문제를 마무리 짓는 결정적인 주도권을 쥘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말할 수 없는 친밀한 관계 속으로 들어간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선지자라고 일컬음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대로 최선을 다해 의롭고 완전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려고 노력해야겠지만, 그러한 것과는 상관 없이 삶 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문제와 갈등의 마무리 방점을 찍는 특권은 그리스도인의 손에 쥐어져 있다는 것은 분명히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복음서에 있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생각나게 합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18:18).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깊은 사귐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은 그렇게 마냥 좋아할 일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막중한 책임이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문제와 갈등의 마무리에 방점을 찍을 권세가 주어졌다는 것은 희희낙락 거릴 상황이 아닙니다. 이것은 굉장히 두렵고 떨리는 상황입니다.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어떻게 잘 감당하느냐에 따라서 한 사람의 인생(생명)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기도가 한 사람의 생명(인생)을 좌지우지 할 수 있다는 것은 웃을 일이 아니라, 두려운 일입니다.

 

선지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 받아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이유는 바로 그가 오늘 말씀에서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비멜렉과 그의 집안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신실하게 기도했습니다. 그의 기도를 통해 아비멜렉은 멸망에서 벗어났습니다. 선지자 아브라함의 기도는 사람을 살리는 기도였습니다. 이렇게 아비멜렉 집안의 태를 여는 기도를 통하여 복의 근원이 된 선지자 아브라함, 그러나 정작 자신의 아내 사라의 태는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도대체, 사라의 태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이러한 궁금증과 함께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www.columbuskmc.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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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3. 30. 23:01

눈을 뜬다는 것

(요 9:1-12, 5:8-14)

 

레슬링 선수와 소방수가 싸우면 누가 이기는지 아십니까? 소방수가 이깁니다. 왜요? 소방수는 물불 안 가리니까요! 그러면 소방수와 눈 먼 사람(장님)이 싸우면 누가 이기는지 아십니까? 눈 먼 사람(장님)이 이깁니다. 왜요? 보이는 게 없으니까요!

 

50, 60, 70대 남자의 대화

50– 아내한테 배고파서 밥 차려 달랬다 죽는 줄 알았어요.

60– 아내한테 어디 가냐고 물어봤다 죽는 줄 알았어.

70오늘 아침에 눈 떴다고 죽는 줄 알았어.

 

도대체, 눈을 뜬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 말씀은 보지 못하는 자들보는 자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어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보지 못하는 자들은 어둠 가운데 있는 것이고, 보는 자들은 빛으로 나아온 겁니다.

 

요한복음에는 두 부류의 대조되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한 명은 나면서부터 눈 먼 자이고, 다른 사람은 바리새인들입니다. 눈 먼 자는 나면서부터 어둠 가운데 살았습니다. 눈 먼 것까지 힘겨운데,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죄인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살아야 했습니다. 눈멂은 이 사람에게 인생 전체에 새겨진 주홍글씨였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병이나 신체장애는 죄로부터 온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니 신체장애를 안고 태어나는 사람들은 나면서부터 죄인이 되는 것이죠. 참으로 불합리한 생각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러한 불합리하고 죄악된 생각을 예수님께서 뒤집으시는 이야기입니다.

 

종교는 이처럼 폭력적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종교라는 이름으로 세상 곳곳에서 폭력이 저질러지고 있습니다. 종교적 폭력이 가해지면 사람들은 저항하지 못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눈먼 이 사람도 저항하지 못하고, 평생 자기 자신을 죄인 취급하면서 죄책감에 싸여 낮고 낮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사람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길 가시던 예수님은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이 사람을 돌아보셨습니다. 함께 가던 제자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예수님,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자기 자신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의 부모 때문입니까?”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 시대를 지배하고 있었던 종교적 관습에 젖어 있었습니다. 맹인으로 난 것은 본인이든 부모이든, 누구든지 그 사람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죠.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이 사람이 저렇게 맹인으로 난 것은 그 누구의 죄도 아니다! 저 사람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실 위대한 일을 보아라!” 예수님은 질병이 죄의 결과라는 그 당시의 통념을 뒤집으셨습니다. 물론 죄 때문에 그렇게 된 경우도 있지만, 모든 것을 그렇게 몰아 넣는 것은 불합리한 종교적 폭력에 불과합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혹시 질병에 걸렸거나 자기 신변에 우환이 생기면 우선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싸인인가?’ 그런 경우가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죄책감에 싸일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을 돌아보고 좀 잘못된 것이 있다 싶으면, 하나님께 나아와 자비와 긍휼을 구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벌을 내리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죄의 깊이보다, 우리의 죽음의 깊이보다,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는 말할 수 없이 깊습니다. 못 고칠 질병이 아주 없고, 용서 받지 못할 죄가 아주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눈먼 자를 통해서 다시 한 번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일컬어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이 전해주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이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빛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 빛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이건 예수님이 누구인지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의 행동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눈이 먼 사람은 예수님의 은혜로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발견한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갑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사람의 눈 뜸을 의심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부모까지 불러다가 확인을 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바리새인은 그 사람의 눈 뜸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했습니다. 눈 뜸에 대해서 인정하고 싶지 않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그의 눈을 뜨게 한 예수님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었던 겁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게 되어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자기가 듣고 싶은 대로 듣습니다. 보십시오. 맹인은 계속해서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바리새인들에게 진술합니다.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그래도 계속해서 바리새인들은 질문합니다. “그 사람(예수)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답답한 맹인은 이렇게 합니다.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이 말에 격분해서 바리새인들은 맹인이었다 눈 뜬 그 사람에게 욕을 하면서 말합니다.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랬더니, 눈 뜬 사람이 한탄하면서 말합니다.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그러면서 눈 뜬 사람은 그 사람, 예수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으면 이러한 일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을 증거하다가 바리새인들에게 쫓겨납니다.

 

이 일을 듣고 예수님은 그 눈 뜬 사람을 만나 위로해주십니다. 그를 당신의 제자 삼으시고, 진리를 드러내십니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맹인이었던 이 사람은 예수를 알아보았고, 눈을 뜨고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했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에게 질문합니다. 여러분은 눈을 뜨셨습니까? (웃을 때 눈 뜨고 웃으라!) 여러분은 보는 자들입니까? 아니면 보지 못하는 자들입니까? 이렇게 다시 질문해 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보이십니까? 예수님이 보이지 않습니까? , 우리가 말로는 예수님이 보인다 안 보인다 어느 쪽이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면 예수님이 보이는지 안 보이는지 알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이 장성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그 사람은 맹인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몸에 익히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8절 말씀에 보면 이 사람은 앉아서 구걸하면서 살았습니다. 그게 몸에 익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사람이 눈을 뜨면, 마냥 좋기만 할까요? 제가 지금 눈 뜨지 말고 그냥 맹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좋다고 말씀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눈을 떠야죠, 병이 나아야죠. 그건 당연한 겁니다. 그런데 이건 단순히 눈을 뜨고 병이 낫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가 보이느냐 안 보이느냐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예수님이 보인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이제 우리도 빛 가운데서 빛의 자녀들처럼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에베소서의 말씀입니다. 맹인이 눈을 뜨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눈을 떴는데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빛의 자녀로 살지 못할 거면 오히려 눈을 그냥 감고 사는 것이 낫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은 필연적으로 빛의 자녀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보이는데, 어떻게 안 그럽니까?

 

우리는 신앙생활 하면서 맹인이 눈을 뜬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에 찾아와 우리의 부족하고 연약하고 병든 것들을 고쳐주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지긋지긋한 질병도 좀 나았으면 좋겠고, 지긋지긋한 경제적 어려움에서도 좀 벗어났으면 좋겠고, 예수님의 은혜로 남편, 부인, 자녀 등 가족이 모두 잘 되었으면 좋겠고, 건강하게 잘 먹고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을 보기 원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을 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예수님을 이용해서 내 욕심을 이루는 것이 목적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맹인처럼 행동합니다. 어둠에 휩싸여서 어두운 일을 합니다. 비상식적이고, 비윤리적이고, 비인격적인 일들을 서슴없이 합니다. 왜요? 맹인이니까, 예수님이 안 보이니까 그렇게 삽니다. 마음이 어둡고 행동이 어둡습니다. 남을 헤칠 생각만 하고, 남을 헐뜯을 생각만 하고, 남을 미워할 생각만 하고, 자기 자신의 욕심을 채울 생각만 합니다. 자기 자신을 드러낼 생각만 하고, 사회(공동체)를 분열시킬 생각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보이면, 안 그럽니다. 예수님이 보이는데 어떻게 그럽니까? 내 눈 앞에 보이는 예수님이 거룩한 빛을 비추시는데, 어두운 마음이 들고 어두운 행동을 할 겨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보이면 안 그럽니다. 예수님이 보이면, 에베소서 5 9절 말씀처럼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열매를 맺습니다. 형제와 자매를 어떻게 도와줄까 만 생각하고, 형제 자매의 허물을 어떻게 덮어줄까 만 생각하고, 형제 자매를 어떻게 용서할까를 생각하고, ‘나는 무익한 종이로소이다하면서 자기 자신을 감출 줄 알고, 공동체의 일치와 화합을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할 줄 알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기 자신에게 끊임없이 질문해 보십시오. 나는 지금 눈을 뜬 것인지, 감은 것인지. 빛이신 예수님이 보이는 건지, 안 보이는 건지. 다른 무엇보다 삶의 열매를 보면 답이 나옵니다. 그리스도인하고 세상 사람들하고 싸우면 누가 이길까요? 당연히, 세상 사람들이 이깁니다. 그들은 눈 먼 사람들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게 없습니다. 물불 안 가리는 사람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 눈에 보이는 게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과 싸우지 마십시오. 어차피 집니다. 예수님도 눈에 보이는 게 없는 세상 사람들에게 십자가 처형을 당하지 않으셨습니까? 세상 사람들과 싸우느라 괜한 에너지 낭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보이면 어둠의 일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보고 있는데 어떻게 어둠의 일을 하겠습니까? 예수님이 보이면 빛 가운데 거해서, 빛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은 진리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눈을 뜨셨습니까? 예수님이 보이십니까? 그러면 빛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억지로 빛의 열매를 맺으려 하지 마시고, 빛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자연스럽게 빛의 열매가 삶 속에서 맺히게 될 것입니다. 눈 뜨시기를 소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비추이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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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3. 30. 22:58

목마른 세대

(출애굽기 17:1-7)

 

<목마른 사슴> 찬양으로 시작

 

출애굽해서 광야로 나왔던 이스라엘 신광야라는 곳을 지나면서 르비딤이라는 곳에 장막을 쳤다. 그러나, 이들에게 중대한 문제가 발생했다. 물이 없었다. 물은 생명에 필수품.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것이 없으면 사람들은 거칠어진다.

 

그래서, 이들은 모세와 더불어 다퉜다.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에게 위기가 닥쳐왔다. 그래서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한다. “내가 이 백성을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일강을 치던 그 지팡이로 호렙 산에 있는 반석을 치라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장로들을 모아놓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반석을 치니, 거기에서 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것은 단순히 물 사건이 아니다. 그래서 그것의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고 불렀다. 그 뜻은 다투다이다. 이스라엘의 목마름은 단순히 물 없음에서 온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들의 목마름은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 데서 온 것이다.

 

얼마 전 설교에서, 현대인들이 얼마나 을 안 먹고 사는지, 그래서 몸에 심각한 탈수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을 말한 적이 있다. 몸에 탈수현상이 일어나면 건강을 헤칠 뿐만 아니라, 대인관계에서도 문제가 생긴다. 짜증이 자꾸 나기 때문에 원만한 대인관계를 맺기 힘들다.

 

미국 중고등학교에서 지금 차차 실행하는 것이 있는데, 아이들 등교시간을 한 시간 늦추는 것이다. 실제로 등교시간을 한 시간 늦추고, 아이들이 잠을 더 잘 수 있도록 했더니, 학생들의 학교생활이 훨씬 더 부드러워져서 수업성취도도 좋고, 친구들 간의 다툼도 줄어들었다고 한다.

 

우리 인간은 인간으로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요소들이 충족되지 않으면, 거칠어지게 되어 있다. 힘들고 짜증나니까,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관심이 줄어들고, 오히려 사소한 일에 대해서 다투고 마음 상하게 된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부족했던 것은 식량이나 물이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영적 빈곤함이 가장 큰 문제였다. 목마름 중에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이 가장 심했던 것이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 같은, 가장 큰 사회적 문제다. 영적인 목마름. 배고플수록 아무거나 집어 삼키듯이, 영적인 목마름이 심할수록 아무거나 집어삼킨다. 공수부대요원들 산악훈련하면서 아무것도 못 먹고 며칠 굶으면, 지나가는 뱀이 그냥 음식으로 보인단다. 영적인 목마름이 심하니까, 요즘 이단사이비, 미신이 판을 친다. 영적으로 목마르니까, 아무거나 막 삼키는 거다.

 

우리 인생 가운데, 목마름을 채워야 할 것이 많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을 채우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이 영적인 목마름을 어떻게 채워야 하는지 모르는데 있다.

 

구약의 출애굽기 말씀과 함께 읽어야 하는, 서신서의 말씀은 로마서인데, 로마서5장에 보면 그것이 잘 나와 있다. 51절과 2절 말씀을 그대로 읽어본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고픈 배를 채우고 나면, 즐거워진다. 마른 목을 축이고 나면 즐거워 진다. 우리 인간은 기본적으로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것들을 채우고 나면, 즐거워지게끔 창조되었다.

 

그런데 인간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영적인 존재이다. ,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이 채워지지 않으면, 즐거울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잘 모르는 것 같다. 고픈 배도 채웠고, 마른 목도 축였고, 갖가지 욕망들을 다 채웠는데도 여전히 목마른 자기 자신을 보며 당황해 한다. 온전한 즐거움에 이르지 못하는 자신을 보며 어쩔 줄 몰라 한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오늘 다른 말씀과 함께 보기로 되어 있는, 복음서에서 본다. 그 유명한 사마리아 여인이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목마른 여인이 나온다. 이 여인도 자신의 삶에 닥친 여러 가지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서 부단히 애썼던 여인이다. 이 여인의 개인사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보면, 이 여인에게는 과거 다섯 명의 남편이 있었고, 현재 어떤 남자와 동거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것은 이 여인의 윤리적인 문제를 지적한 것이라기보다는, 이 여인이 얼마나 인생에 대해서 목말랐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살아보려고 안간힘을 쓴 것이다. 그런데, 이 여인의 삶은 전혀 즐겁지 않았다.

 

인생이 목말랐던 이 여인, 남의 눈을 피해 마른 목을 축이러 우물가에 와서 물을 길었다. 그리고 마셨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의 목마름을 전혀 채워주지 못했다. 그러다, 한 유대인 남자를 만났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난 뒤, 자신의 인생에 깊이 베어있는, 그러나 해결할 수 없었던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 외쳤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삶이 즐거워졌다. 참 신비로운 일이다.

 

지금 이 시대는 목마른 세대다. 물 대신 마실 것이 너무 많아, 그것을 물로 착각하고 마시다, 심한 탈수증에 시달리는데, 그런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세대다. 자신의 짜증이, 자신의 불만족이, 자신의 어려움이 어디에서 오는지도 모른 채, 그저 눈에 보이는 것을 좇아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살아가는 세대다.

 

지금 세대가 겪는 가장 심한 탈수증은, 영적인 탈수증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너무 부족하다. 그래서 무엇을 해도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세대다. 광야의 이스라엘 세대처럼 하나님과 더불어 다투고, 하나님을 시험하는 세대다.

 

예수는 생명의 물이다. 영적인 탈수증세를 극복하는 길은 생명의 물인 예수는 마시는 것이다. 그 마시는 행위를 기독교적인 용어로, ‘믿음이라고 한다. 생명의 물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믿음을 둘 때,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넘쳐나고, 우리의 영적인 탈수증세를 극복할 수 있다. , 영적인 목마름을 채울 수 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만족함 가운데, 생명의 온전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예수를 생명의 물로 내어주어 마시게 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선포하는데도 예수를 생명의 물로 받들고 마시지 못하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는가? 예수를 생명의 물로 마시겠는가? 그렇다면 저와 함께 이 찬양을 부르자.

 

<우물가의 여인처럼>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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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14. 3. 27. 05:54

마음의 문화

창세기 19번째 시간

(창세기 19:30-38)

 

소알로 피신한 롯과 두 딸, 그들은 거기에서 얼마 살지 못하고 산에 올라가서 살게 됩니다. 이는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롯이 소알로 가서 살겠다고 고집을 부렸던 것이죠.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롯은 자신의 뜻대로 소알 땅으로 가지만, 결국 못 버티고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산으로 쫓겨 갑니다.

 

롯이 살던 고대사회는 현재의 문명과 같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어디를 가나 사회적 안전망이 확보되어 있지만, 옛날 고대사회에서 사회적 안전망 같은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지금은 이사가 자유롭지만, 옛날에는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간다는 것 자체가 큰 모험이고 도전이었습니다. 이미 거기에 형성된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이미 소돔 땅에서 거주하던 롯도 겪은 바입니다. 문제가 발생하자, 소돔 사람들은 롯을 거류민으로 비하하면서 그를 헤치려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재물이 많은 상태에서 오랫동안 거주했던 소돔 땅에서조차 그럴 진데, 아무 것도 없는 빈털터리로 피난한 소알 땅에서 살아남기는 거의 불가능했던 것이죠.

 

공동체를 형성해 간다는 것과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이처럼 쉽지 않은 일입니다. 공동체 구성원 간에 무던한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롯처럼 이렇게 산으로 쫓겨 갑니다.

 

산으로 쫓겨간 롯의 가족에게 참으로 이상한 일이 발생합니다. 요즘 말로 19금 사건이 발생합니다. 지금도 이런 일이 벌어지면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바로 근친상간입니다.

 

근친상간 사건이 벌어지게 된 경위는 이렇습니다. 산으로 도망한 이들은 동굴 속에서 은둔하며 살게 됩니다. 소돔 땅에서 많은 재물을 내세워 떵떵거리며 살던 때와는 완전히 반대의 삶입니다. 거지를 넘어서 거의 짐승처럼 살게 됩니다. 그런데 롯의 두 딸은 이해하기 어려운 생각을 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늙으셨고 온 세상의 도리를 따라 우리의 배필 될 사람이 이 땅에는 없으니 우리가 우리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동침하여 우리 아버지로 말미암아 후손을 이어 가자”(31, 32).

 

물론 롯의 두 딸은 자신의 가족들에게 닥친 급작스런 일련의 일들 때문에 거의 패닉 상태에 빠져 있었을 것입니다. 엄마는 소금기둥이 되어서 죽었죠. 아버지는 소돔을 멸망시킨 재앙 때문에 벌벌 떨고 있죠. 약혼자들은 소돔과 함께 멸망했죠. 자신들이 누리던 풍요는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되어 버렸죠. 어디 하나 마음 둘 곳이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온 세상의 도리를 따라자신들의 배필을 구할 수 없다고 단정지었던 것 같습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가장 필요한 것은 정신 차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평소에 훈련되어 있지 않으면 막상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대처하기 쉽지 않은 법입니다. 그래서 평소에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그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마음을 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례로, 미국에는 곳곳에서 동물들이 자주 튀어나오는데, 여러분이 운전하다 사슴이 튀어나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만약 사슴이 튀어나오면 무조건 받는다라는 마음을 정해 놓지 않으면, 우물쭈물하다가 사고 날 가능성이 큽니다.

 

큰 일을 겪을 때 정신을 제대로 못 차리면 엉뚱한 결정과 함께 인생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바로 롯의 가족처럼 말이죠. 위기의 상황에서 잘못된 생각을 한 롯의 두 딸은 정말로 온 세상의 도리를 따르지 않고, 이방인들조차도 저지르지 않는 근친상간을 저지릅니다.

 

돌아가는 일을 보십시오. 두 눈 뜨고 보기에 참 민망합니다. 아버지와 동침하기 위해서 두 딸은 아버지에게 술을 먹입니다. 권력, , , 여색(남색) 등 사람에게 쾌락을 가져다 주는 것은 온통 죄 밖에 낳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들은 언제나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모습을 하고 있어 사람을 홀립니다. 창세기에도 그런 기사가 있지만, 영어로 된 문헌 중 가장 오래된 영웅 서시인 <베어울프>도 그런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이 서사시는 몇 년 전 안젤리나 졸리를 주인공으로 해서 영화로 만들어져 큰 인기를 끈 적이 있습니다. 어글리한 괴물 그렌델의 어미 역으로 안젤리나 졸리가 출연했었는데, 겉 모습은 정말 아름다운 여인이지만, 괴물 그렌델 보다 더 흉측한 모습을 감추고 있던 것이 그렌델의 어미였죠. 그렌델의 어미를 죽이러 갔던 영웅들은 그렌델의 어미의 아름다운 자태에 반해 결국 그렌델의 어미에게 오히려 농락을 당하고 맙니다. 그런 유혹을 이겨내고 결국 그렌델의 어미를 죽이는 영웅이 베어울프인데, 그 과정이 정말 힘겹습니다.

 

롯의 두 딸은 이틀 상간으로 차례대로 술에 취한 아버지에게 들어가서 그와 동침을 한 뒤 아이를 생산합니다. 첫째 딸이 생산한 아들의 이름은 모압. 둘째 달이 생산한 아들의 이름은 벤암미. 이들은 이스라엘 주변에서 그들을 평생 괴롭혔던 모압과 암몬의 조상이 됩니다.

 

죽을 까봐 두려워 안전한 곳을 찾아 도시문명을 떠나 산으로 들어갔지만, 이들은 자신들이 살아오던 시대의 문화는 떠나지 못했습니다. 소돔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 이유는 그들의 타락한 문화 때문이었습니다. 두 천 사가 소돔 땅에 살던 롯의 집을 방문했을 때 소돔 사람들이 두 천사와 상관하기 위해서 어떻게 거칠게 나왔었는지, 우리는 이미 앞에서 보아 알고 있습니다. 문명은 눈에 보이는 것이지만, 문화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시대의 척도는 눈에 보이는 문명에 있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문화에 있습니다. 문명은 눈에 담지만, 문화는 마음에 담는 것입니다. 롯의 가족은 눈에 담았던 문명을 떠날 수는 있었지만, 그래서 산으로 갔지만, 이들은 마음에 담았던 문화는 버릴 수 없었던 것이죠. , 모름지기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가장 영향력 있는 것은 마음의 문화입니다. 이 마음 속에 무엇이 자리잡고 있는가를 살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문명이 발달했어도 문화가 타락하면 그 문명은 멸망하게 됩니다. 바벨론, 로마 등 역사상 세계를 호령했던 나라들이 모두 그런 절차를 밟았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아무리 겉으로 보이는 삶이 풍요롭고 남들의 부러움을 살지라도, 즉 개인의 문명이 휘황찬란해도, 보이지 않는 마음의 문화가 타락해 있으면, 개인이 파산 할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이죠. 우리는 그러한 기사를 종종 접합니다. 특별히 로또에 당첨되어서 일확천금을 쥔 사람들의 비참한 최후를 종종 접합니다.

 

너무나 잘 알려져 있어 식상한 것 같지만, 진리를 전하고 있는 잠언서의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언 4:23). 마음을 지킨다는 것은 이 마음 속에 이미 들어간 것을 지키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마음 속에 타락한 마음이 들어가 있는데, 그것을 지킨다는 것이 무슨 덕이 되겠습니까? 마음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래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지키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아주 구체적으로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로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2:5-8).

 

이 마음이 품은 것이 무엇입니까? 탐욕입니까? 두려움입니까? 그렌델의 어미처럼 흉측한 것입니까? 물론 자기를 마음에 품어 달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한 아름다운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기에 자꾸 걸려 넘어집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품으라고 핏대를 높여 말하는 것은 오히려 볼품도 없고 매력적이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음에 거리껴 하고 미련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과 동등되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은 그것과 정대입니다.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하고, 자기를 낮추고 죽기까지 복종합니다. 정말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는 것을 십자가의 길’, ‘좁은 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그래서 여전히 전쟁터입니다. 보이지 않는 마음의 문화가 우리의 인생을 좌우하는 것이기 때문에 한바탕 전쟁을 치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그 전쟁에서 어떤 문화가 승리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은 분명 그 운명을 달리할 것입니다. 어떤 이는 이미 사탄의 마음이 자리잡고 있어 전쟁이 없기에 오히려 마음이 평안한 상태일 것입니다. 어떤 이는 사탄의 마음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전쟁 상태에 놓여 있어 평안치 못한 상태일 것입니다. 어떤 이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자리잡고 있어 하나님의 샬롬(평화, 안식)을 누리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현재 어디에 해당되시는지요?

 

한바탕 마음의 전쟁을 치르는 것이 무섭고 귀찮아서, ‘살던 대로 살다 죽을래’, 그러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참 하나님이시고 참 인간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지 못한다면, 그 인생은 살아 있으나 죽은 인생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한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게 된다면, 그 인생은 죽은 것 같으나 살아 있는, 생명이 철철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니 보이지 않는 마음의 문화를 바르게 하십시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십시오. 오직 그리스도 예수로 인하여 마음의 평안을 누리시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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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14. 3. 22. 13:51

어린 왕자의 고백

 

애초부터 지구에서 태어난 인간은 없다

옆 집 사는 철수는 켄타우로스 별에서 왔다

그래서 걔가 좀 반신반인처럼 별난 데가 있는 거다

초등학교 때 짝꿍 영희는 어떻고?

걔는 전갈자리 별에서 왔다

그래서 걔는 독을 품고 있는 거다 건들면 죽는다

고등학교 때 학생주임, 일명 미친개는

사냥개자리 별에서 왔다

그래서 학생주임은 그렇게 물어댔던 거다

그래서 자기가 온 별이 보이는 북위 42도에만 가면

그렇게 하염없이 눈물을 흘려 댔던 거다

어제 안 사실인데

우리 집사람은 토끼자리 별에서 왔단다

어쩐지 가끔 귀여운 구석이 있더라 했더니

우리 집사람은 토끼풀이 그렇게 좋단다

토끼풀꽃반지 끼면 공간이동 할 태세다

 

애초부터 지구에서 태어난 인간은 없다

모두 엄마 자궁을 게이트 삼아

우주 공간에서 텔레포트해서 지구에 온 거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렇게 별난 거다

별의 별 사람 다 있는 거다

밤 하늘의 별만큼

별난 사람들이 모여 왁자지껄한 지구별을 만들다가도

샛별 같은 미련이 동터 올 때쯤

사경을 헤매는 아지랑이처럼 차르르 사라지는 것은

자기 별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 거다

 

나는 어느 별에서 왔는지 궁금하다고?

그건 비밀이다

물론 당신이 어느 별에서 왔는지 나에게 말해준다면

나도 내가 어느 별에서 왔는지 말해 줄 거다

그런데 그걸 꼭 말해야 아나?

별스런 내가 안 보이나?

그런 걸 물어보려는 당신도 참

까만 밤 한 구석에 팔랑팔랑 박힌 별처럼

총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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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