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4. 3. 30. 22:58

목마른 세대

(출애굽기 17:1-7)

 

<목마른 사슴> 찬양으로 시작

 

출애굽해서 광야로 나왔던 이스라엘 신광야라는 곳을 지나면서 르비딤이라는 곳에 장막을 쳤다. 그러나, 이들에게 중대한 문제가 발생했다. 물이 없었다. 물은 생명에 필수품.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것이 없으면 사람들은 거칠어진다.

 

그래서, 이들은 모세와 더불어 다퉜다.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에게 위기가 닥쳐왔다. 그래서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한다. “내가 이 백성을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일강을 치던 그 지팡이로 호렙 산에 있는 반석을 치라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장로들을 모아놓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반석을 치니, 거기에서 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것은 단순히 물 사건이 아니다. 그래서 그것의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고 불렀다. 그 뜻은 다투다이다. 이스라엘의 목마름은 단순히 물 없음에서 온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들의 목마름은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 데서 온 것이다.

 

얼마 전 설교에서, 현대인들이 얼마나 을 안 먹고 사는지, 그래서 몸에 심각한 탈수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을 말한 적이 있다. 몸에 탈수현상이 일어나면 건강을 헤칠 뿐만 아니라, 대인관계에서도 문제가 생긴다. 짜증이 자꾸 나기 때문에 원만한 대인관계를 맺기 힘들다.

 

미국 중고등학교에서 지금 차차 실행하는 것이 있는데, 아이들 등교시간을 한 시간 늦추는 것이다. 실제로 등교시간을 한 시간 늦추고, 아이들이 잠을 더 잘 수 있도록 했더니, 학생들의 학교생활이 훨씬 더 부드러워져서 수업성취도도 좋고, 친구들 간의 다툼도 줄어들었다고 한다.

 

우리 인간은 인간으로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요소들이 충족되지 않으면, 거칠어지게 되어 있다. 힘들고 짜증나니까,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관심이 줄어들고, 오히려 사소한 일에 대해서 다투고 마음 상하게 된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부족했던 것은 식량이나 물이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영적 빈곤함이 가장 큰 문제였다. 목마름 중에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이 가장 심했던 것이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 같은, 가장 큰 사회적 문제다. 영적인 목마름. 배고플수록 아무거나 집어 삼키듯이, 영적인 목마름이 심할수록 아무거나 집어삼킨다. 공수부대요원들 산악훈련하면서 아무것도 못 먹고 며칠 굶으면, 지나가는 뱀이 그냥 음식으로 보인단다. 영적인 목마름이 심하니까, 요즘 이단사이비, 미신이 판을 친다. 영적으로 목마르니까, 아무거나 막 삼키는 거다.

 

우리 인생 가운데, 목마름을 채워야 할 것이 많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을 채우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이 영적인 목마름을 어떻게 채워야 하는지 모르는데 있다.

 

구약의 출애굽기 말씀과 함께 읽어야 하는, 서신서의 말씀은 로마서인데, 로마서5장에 보면 그것이 잘 나와 있다. 51절과 2절 말씀을 그대로 읽어본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고픈 배를 채우고 나면, 즐거워진다. 마른 목을 축이고 나면 즐거워 진다. 우리 인간은 기본적으로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것들을 채우고 나면, 즐거워지게끔 창조되었다.

 

그런데 인간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영적인 존재이다. ,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이 채워지지 않으면, 즐거울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잘 모르는 것 같다. 고픈 배도 채웠고, 마른 목도 축였고, 갖가지 욕망들을 다 채웠는데도 여전히 목마른 자기 자신을 보며 당황해 한다. 온전한 즐거움에 이르지 못하는 자신을 보며 어쩔 줄 몰라 한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오늘 다른 말씀과 함께 보기로 되어 있는, 복음서에서 본다. 그 유명한 사마리아 여인이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목마른 여인이 나온다. 이 여인도 자신의 삶에 닥친 여러 가지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서 부단히 애썼던 여인이다. 이 여인의 개인사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보면, 이 여인에게는 과거 다섯 명의 남편이 있었고, 현재 어떤 남자와 동거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것은 이 여인의 윤리적인 문제를 지적한 것이라기보다는, 이 여인이 얼마나 인생에 대해서 목말랐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살아보려고 안간힘을 쓴 것이다. 그런데, 이 여인의 삶은 전혀 즐겁지 않았다.

 

인생이 목말랐던 이 여인, 남의 눈을 피해 마른 목을 축이러 우물가에 와서 물을 길었다. 그리고 마셨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의 목마름을 전혀 채워주지 못했다. 그러다, 한 유대인 남자를 만났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난 뒤, 자신의 인생에 깊이 베어있는, 그러나 해결할 수 없었던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 외쳤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삶이 즐거워졌다. 참 신비로운 일이다.

 

지금 이 시대는 목마른 세대다. 물 대신 마실 것이 너무 많아, 그것을 물로 착각하고 마시다, 심한 탈수증에 시달리는데, 그런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세대다. 자신의 짜증이, 자신의 불만족이, 자신의 어려움이 어디에서 오는지도 모른 채, 그저 눈에 보이는 것을 좇아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살아가는 세대다.

 

지금 세대가 겪는 가장 심한 탈수증은, 영적인 탈수증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너무 부족하다. 그래서 무엇을 해도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세대다. 광야의 이스라엘 세대처럼 하나님과 더불어 다투고, 하나님을 시험하는 세대다.

 

예수는 생명의 물이다. 영적인 탈수증세를 극복하는 길은 생명의 물인 예수는 마시는 것이다. 그 마시는 행위를 기독교적인 용어로, ‘믿음이라고 한다. 생명의 물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믿음을 둘 때,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넘쳐나고, 우리의 영적인 탈수증세를 극복할 수 있다. , 영적인 목마름을 채울 수 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만족함 가운데, 생명의 온전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예수를 생명의 물로 내어주어 마시게 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선포하는데도 예수를 생명의 물로 받들고 마시지 못하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는가? 예수를 생명의 물로 마시겠는가? 그렇다면 저와 함께 이 찬양을 부르자.

 

<우물가의 여인처럼>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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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3. 27. 05:54

마음의 문화

창세기 19번째 시간

(창세기 19:30-38)

 

소알로 피신한 롯과 두 딸, 그들은 거기에서 얼마 살지 못하고 산에 올라가서 살게 됩니다. 이는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롯이 소알로 가서 살겠다고 고집을 부렸던 것이죠.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롯은 자신의 뜻대로 소알 땅으로 가지만, 결국 못 버티고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산으로 쫓겨 갑니다.

 

롯이 살던 고대사회는 현재의 문명과 같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어디를 가나 사회적 안전망이 확보되어 있지만, 옛날 고대사회에서 사회적 안전망 같은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지금은 이사가 자유롭지만, 옛날에는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간다는 것 자체가 큰 모험이고 도전이었습니다. 이미 거기에 형성된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이미 소돔 땅에서 거주하던 롯도 겪은 바입니다. 문제가 발생하자, 소돔 사람들은 롯을 거류민으로 비하하면서 그를 헤치려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재물이 많은 상태에서 오랫동안 거주했던 소돔 땅에서조차 그럴 진데, 아무 것도 없는 빈털터리로 피난한 소알 땅에서 살아남기는 거의 불가능했던 것이죠.

 

공동체를 형성해 간다는 것과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이처럼 쉽지 않은 일입니다. 공동체 구성원 간에 무던한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롯처럼 이렇게 산으로 쫓겨 갑니다.

 

산으로 쫓겨간 롯의 가족에게 참으로 이상한 일이 발생합니다. 요즘 말로 19금 사건이 발생합니다. 지금도 이런 일이 벌어지면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바로 근친상간입니다.

 

근친상간 사건이 벌어지게 된 경위는 이렇습니다. 산으로 도망한 이들은 동굴 속에서 은둔하며 살게 됩니다. 소돔 땅에서 많은 재물을 내세워 떵떵거리며 살던 때와는 완전히 반대의 삶입니다. 거지를 넘어서 거의 짐승처럼 살게 됩니다. 그런데 롯의 두 딸은 이해하기 어려운 생각을 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늙으셨고 온 세상의 도리를 따라 우리의 배필 될 사람이 이 땅에는 없으니 우리가 우리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동침하여 우리 아버지로 말미암아 후손을 이어 가자”(31, 32).

 

물론 롯의 두 딸은 자신의 가족들에게 닥친 급작스런 일련의 일들 때문에 거의 패닉 상태에 빠져 있었을 것입니다. 엄마는 소금기둥이 되어서 죽었죠. 아버지는 소돔을 멸망시킨 재앙 때문에 벌벌 떨고 있죠. 약혼자들은 소돔과 함께 멸망했죠. 자신들이 누리던 풍요는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되어 버렸죠. 어디 하나 마음 둘 곳이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온 세상의 도리를 따라자신들의 배필을 구할 수 없다고 단정지었던 것 같습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가장 필요한 것은 정신 차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평소에 훈련되어 있지 않으면 막상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대처하기 쉽지 않은 법입니다. 그래서 평소에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그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마음을 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례로, 미국에는 곳곳에서 동물들이 자주 튀어나오는데, 여러분이 운전하다 사슴이 튀어나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만약 사슴이 튀어나오면 무조건 받는다라는 마음을 정해 놓지 않으면, 우물쭈물하다가 사고 날 가능성이 큽니다.

 

큰 일을 겪을 때 정신을 제대로 못 차리면 엉뚱한 결정과 함께 인생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바로 롯의 가족처럼 말이죠. 위기의 상황에서 잘못된 생각을 한 롯의 두 딸은 정말로 온 세상의 도리를 따르지 않고, 이방인들조차도 저지르지 않는 근친상간을 저지릅니다.

 

돌아가는 일을 보십시오. 두 눈 뜨고 보기에 참 민망합니다. 아버지와 동침하기 위해서 두 딸은 아버지에게 술을 먹입니다. 권력, , , 여색(남색) 등 사람에게 쾌락을 가져다 주는 것은 온통 죄 밖에 낳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들은 언제나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모습을 하고 있어 사람을 홀립니다. 창세기에도 그런 기사가 있지만, 영어로 된 문헌 중 가장 오래된 영웅 서시인 <베어울프>도 그런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이 서사시는 몇 년 전 안젤리나 졸리를 주인공으로 해서 영화로 만들어져 큰 인기를 끈 적이 있습니다. 어글리한 괴물 그렌델의 어미 역으로 안젤리나 졸리가 출연했었는데, 겉 모습은 정말 아름다운 여인이지만, 괴물 그렌델 보다 더 흉측한 모습을 감추고 있던 것이 그렌델의 어미였죠. 그렌델의 어미를 죽이러 갔던 영웅들은 그렌델의 어미의 아름다운 자태에 반해 결국 그렌델의 어미에게 오히려 농락을 당하고 맙니다. 그런 유혹을 이겨내고 결국 그렌델의 어미를 죽이는 영웅이 베어울프인데, 그 과정이 정말 힘겹습니다.

 

롯의 두 딸은 이틀 상간으로 차례대로 술에 취한 아버지에게 들어가서 그와 동침을 한 뒤 아이를 생산합니다. 첫째 딸이 생산한 아들의 이름은 모압. 둘째 달이 생산한 아들의 이름은 벤암미. 이들은 이스라엘 주변에서 그들을 평생 괴롭혔던 모압과 암몬의 조상이 됩니다.

 

죽을 까봐 두려워 안전한 곳을 찾아 도시문명을 떠나 산으로 들어갔지만, 이들은 자신들이 살아오던 시대의 문화는 떠나지 못했습니다. 소돔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 이유는 그들의 타락한 문화 때문이었습니다. 두 천 사가 소돔 땅에 살던 롯의 집을 방문했을 때 소돔 사람들이 두 천사와 상관하기 위해서 어떻게 거칠게 나왔었는지, 우리는 이미 앞에서 보아 알고 있습니다. 문명은 눈에 보이는 것이지만, 문화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시대의 척도는 눈에 보이는 문명에 있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문화에 있습니다. 문명은 눈에 담지만, 문화는 마음에 담는 것입니다. 롯의 가족은 눈에 담았던 문명을 떠날 수는 있었지만, 그래서 산으로 갔지만, 이들은 마음에 담았던 문화는 버릴 수 없었던 것이죠. , 모름지기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가장 영향력 있는 것은 마음의 문화입니다. 이 마음 속에 무엇이 자리잡고 있는가를 살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문명이 발달했어도 문화가 타락하면 그 문명은 멸망하게 됩니다. 바벨론, 로마 등 역사상 세계를 호령했던 나라들이 모두 그런 절차를 밟았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아무리 겉으로 보이는 삶이 풍요롭고 남들의 부러움을 살지라도, 즉 개인의 문명이 휘황찬란해도, 보이지 않는 마음의 문화가 타락해 있으면, 개인이 파산 할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이죠. 우리는 그러한 기사를 종종 접합니다. 특별히 로또에 당첨되어서 일확천금을 쥔 사람들의 비참한 최후를 종종 접합니다.

 

너무나 잘 알려져 있어 식상한 것 같지만, 진리를 전하고 있는 잠언서의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언 4:23). 마음을 지킨다는 것은 이 마음 속에 이미 들어간 것을 지키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마음 속에 타락한 마음이 들어가 있는데, 그것을 지킨다는 것이 무슨 덕이 되겠습니까? 마음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래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지키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아주 구체적으로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로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2:5-8).

 

이 마음이 품은 것이 무엇입니까? 탐욕입니까? 두려움입니까? 그렌델의 어미처럼 흉측한 것입니까? 물론 자기를 마음에 품어 달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한 아름다운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기에 자꾸 걸려 넘어집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품으라고 핏대를 높여 말하는 것은 오히려 볼품도 없고 매력적이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음에 거리껴 하고 미련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과 동등되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은 그것과 정대입니다.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하고, 자기를 낮추고 죽기까지 복종합니다. 정말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는 것을 십자가의 길’, ‘좁은 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그래서 여전히 전쟁터입니다. 보이지 않는 마음의 문화가 우리의 인생을 좌우하는 것이기 때문에 한바탕 전쟁을 치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그 전쟁에서 어떤 문화가 승리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은 분명 그 운명을 달리할 것입니다. 어떤 이는 이미 사탄의 마음이 자리잡고 있어 전쟁이 없기에 오히려 마음이 평안한 상태일 것입니다. 어떤 이는 사탄의 마음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전쟁 상태에 놓여 있어 평안치 못한 상태일 것입니다. 어떤 이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자리잡고 있어 하나님의 샬롬(평화, 안식)을 누리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현재 어디에 해당되시는지요?

 

한바탕 마음의 전쟁을 치르는 것이 무섭고 귀찮아서, ‘살던 대로 살다 죽을래’, 그러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참 하나님이시고 참 인간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지 못한다면, 그 인생은 살아 있으나 죽은 인생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한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게 된다면, 그 인생은 죽은 것 같으나 살아 있는, 생명이 철철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니 보이지 않는 마음의 문화를 바르게 하십시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십시오. 오직 그리스도 예수로 인하여 마음의 평안을 누리시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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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14. 3. 22. 13:51

어린 왕자의 고백

 

애초부터 지구에서 태어난 인간은 없다

옆 집 사는 철수는 켄타우로스 별에서 왔다

그래서 걔가 좀 반신반인처럼 별난 데가 있는 거다

초등학교 때 짝꿍 영희는 어떻고?

걔는 전갈자리 별에서 왔다

그래서 걔는 독을 품고 있는 거다 건들면 죽는다

고등학교 때 학생주임, 일명 미친개는

사냥개자리 별에서 왔다

그래서 학생주임은 그렇게 물어댔던 거다

그래서 자기가 온 별이 보이는 북위 42도에만 가면

그렇게 하염없이 눈물을 흘려 댔던 거다

어제 안 사실인데

우리 집사람은 토끼자리 별에서 왔단다

어쩐지 가끔 귀여운 구석이 있더라 했더니

우리 집사람은 토끼풀이 그렇게 좋단다

토끼풀꽃반지 끼면 공간이동 할 태세다

 

애초부터 지구에서 태어난 인간은 없다

모두 엄마 자궁을 게이트 삼아

우주 공간에서 텔레포트해서 지구에 온 거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렇게 별난 거다

별의 별 사람 다 있는 거다

밤 하늘의 별만큼

별난 사람들이 모여 왁자지껄한 지구별을 만들다가도

샛별 같은 미련이 동터 올 때쯤

사경을 헤매는 아지랑이처럼 차르르 사라지는 것은

자기 별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 거다

 

나는 어느 별에서 왔는지 궁금하다고?

그건 비밀이다

물론 당신이 어느 별에서 왔는지 나에게 말해준다면

나도 내가 어느 별에서 왔는지 말해 줄 거다

그런데 그걸 꼭 말해야 아나?

별스런 내가 안 보이나?

그런 걸 물어보려는 당신도 참

까만 밤 한 구석에 팔랑팔랑 박힌 별처럼

총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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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3. 20. 04:03

소알 밴댕이 소갈딱지의 최후

창세기 18

(창세기 19:15-26)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갑니다. ‘긴박성은 성경의 큰 주제이기도 합니다. 어떤 일을 급하게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속성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감추어져 있는 것이 드러나는 것은 언제나 긴박성을 동반합니다. 세례 요한이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선포할 때도 그랬고, 예수님이 이어서 천국을 선포할 때도 그랬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는 온통 긴박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거기에 발맞추어 긴박하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동틀 때라는 시간 자체도 긴박성을 말해 줍니다. 사건은 두 다리 뻗고 잠든 한 밤 중에 일어나거나, 늘어지게 낮잠 자고 싶은 오후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건은 늘 긴박성을 동반하고 일어납니다. 동틀 때, 천사들은 롯을 재촉합니다. “일어나 여기 있는 네 아내와 두 딸을 이끌어 내라!” 그런데 문제는 재촉하는 천사들이 아니라, 거기에 반응하는 롯과 그의 가족들입니다.

 

우선, 생명이 죽고 사는, 이렇게 긴박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데도, 결국 롯의 사위들은 롯과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사건의 긴박성이 잘 전달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소통의 실패입니다. 소통의 실패는 계속해서 일어납니다. 천사들은 재촉하는데, 롯은 지체합니다. 천사들의 긴박성이 롯에게 잘 전달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것이 롯의 인생을 비극으로 몰아갑니다.

 

하나님은 롯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강권적으로 역사하십니다. 천사들은 지체하는 롯과 그의 가족들을 강제로 이끌어 냅니다. 천사들은 그들을 일단 성밖으로 이끌어 낸 후,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기도 하지만, 그 은혜를 온전히 받아들이려면 우리 인간 쪽에서의 책임적인 응답도 필요한 겁니다.

 

롯을 보면 그에게 비극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상황이 긴급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입었는데도 불구하고, 롯은 계속하여 자기 자신의 형편만 생각합니다.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라는 명령을 받아 들고 거기에 온전히 순종하기 보다, 자신의 요구를 말합니다. 이것은 당대 의인이라고 칭송을 받았던 노아의 순종과 비교해 볼 때 너무도 차이가 나는 반응입니다. 노아는 방주를 지으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방주를 지었는데, 롯은 방주를 지으라는 것도 아니고 산으로 도망치라는, 비교적 쉬운 명령인데도 불구하고 그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 롯에게 드리운 비극의 그림자들입니다.

 

롯이 천사들에게 부탁한 것은 이것입니다. “내가 도망하여 산에까지 갈 수 없나이다 두렵건대 재앙을 만나 죽을까 하나이다 보소서 저 성읍은 도망하기에 가깝고 작기도 하오니 나를 그곳으로 도망하게 하소서.” 그 성읍의 이름은 소알입니다. 소알의 뜻은 작다는 뜻입니다. 공교롭게도 우리나라 말이 그것을 잘 표현해 주는 것 같습니다. ‘자가 작을 자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사실 문자적으로 아무런 관련은 없습니다. 영어로 소알은 ‘zoar’로 표시합니다.

 

작은 도시 소알로 도피하고자 한 롯, ‘소알이라는 도시가 그의 마음을 나타내주는 그림언어(메타포)인 것처럼 보입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의 드넓으신 은혜를 담아내기엔 얼마나 작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온전하게 순종하지도 않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기도를 통하여 롯을 구원해 주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천사들은 롯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롯이 소알에 도착할 때까지 소돔과 고모라에게 내릴 유황과 불을 잠시 유보합니다. 그리고 롯이 소알에 도착한 것을 확인 한 뒤 비로소 유황과 불을 내려 소돔과 고모라를 다 엎어 멸하십니다.

 

그런데 소알로 도피하던 중, 롯의 가족에게 비극이 발생합니다. 사실 이것은 예견된 일입니다. 본문에 나온 말씀을 그대로 옮겨봅니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기둥이 되었더라”(26). 천사들이 이르기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롯과 그의 가족은 처음부터 천사들이 내리는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 결과, 롯의 아내는 하나님의 자비로부터 스스로 탈락하게 된 겁니다.

 

본문 마지막 절은 롯이 구원을 받은 것에 대해서 이렇게 진술합니다.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곳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29). 롯이 구원받은 것은 롯 자신 때문에 아니라, 아브라함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고 감사드릴 일이지만, 사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나 스스로가 하나님과의 깊은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구원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온전히 순종하는 가운데 온전한 구원을 이루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주체적으로 응답하지 못하면 롯처럼 아무리 긴급한 상황에 처해지더라도 그것을 온전히 인식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지체하게됩니다. 그것 자체가 스스로의 인생에 비극을 만들어 내는 것이지요.

 

긴박한 상황 속에서 그것이 얼마나 긴박한 상황인지 스스로 깨닫지 못한 채, 롯과 그의 가족은 천사들에 의해서 수동적으로 이끌려 나오면서 아무것도 챙기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을 겁니다. 욕심은 인간의 마음을 작게 만듭니다.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지 혼동하게 만들고, 결국에는 올바른 선택하는 것을 가로 막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그 은혜로 보전되는 생명입니다. 그런데 욕심으로 작아진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만으로 만족을 못합니다. 아니 그보다,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하고 큰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을 그 작은 마음이 담아내지 못합니다. 담아내지 못하니까 결국 그 작은 마음이 담아낼 수 있는 분량의 탐욕스러운 작은 것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겠죠.

 

구원의 장소로 롯이 택한 곳이 소알이라는 것은 참으로 우화적입니다. ‘작은 것이라는 뜻을 가진 소알로 목숨을 부지하러 달려가다 결국 작은 것에 대한 집착을 못 버리고 뒤를 돌아보아 소금기둥이 된 롯의 아내. 그녀만이 소금기둥이 되어 버렸지만, 그것은 롯과 그의 가족의 마음 속 깊은 곳을 보여주는 상징물이나 다름 없습니다.

 

이렇게, 소알 밴댕이 소갈딱지의 최후는 비극적이고 아프고 안타깝습니다. 밴댕이라는 물고기는 하도 성질이 급해서 사람에게 잡히자 마자 죽어버린답니다. 그만큼 속이 좁아서 스트레스를 받자마자 죽는 것이죠. 소갈딱지는 마음속의 속된 말인데, 밴댕이가 작은 물고기라 그 내장이 작은 데서 비롯된 말입니다.

 

이 속이 하늘처럼 드넓은 하나님의 은혜를 담아내지 못하면, 우리가 롯의 가족을 통해서 보는 것처럼 그 최후가 비극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썩어져 갈지라도, 그 마음은 하늘을 담아낼 정도로 드넓도록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긴박성을 갖고 있습니다. 준비하지 않으면 긴박하게 임하는 하나님 나라를 감당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마음에 임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긴박성을 말씀하십니다. 그때 거기서 예수님께서는 소알에서 있었던 롯의 가족 이야기를 예로 드십니다. 좀 길지만 중요한 말씀이니 그 말씀을 그대로 옮겨 봅니다.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그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롯의 처를 기억하라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17:28-33).

 

여러분은 어떤 마음을 지니고 살아가십니까? 긴박하게 임하는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일 수 있는 넓은 마음을 지니고 살아가십니까? 아니면 작은 것에 집착하느라 작아져서 드넓은 하나님의 은혜를 조금도 담아내지 못하는 소알과 같은 밴댕이 소갈딱지의 마음을 지니고 살아가십니까? 여러분의 최후는 무엇입니까? 무엇이 여러분의 최후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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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14. 3. 16. 02:56

영원

 

시를 읽지 않고 보낸 날들

그 날들을 생각하면

내 삶이 왜 시적이지 못한 지를 알겠다

무한으로 치닫는 삶

결국 죽음과 충돌하게 될 운명 앞에서

영원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건

내가 영원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이다

봄에 기어코 피어나는 잡초들도 아는 것을

나는 왜 모를까

그래서 나는 잡초보다 잘 난 것이 없다

 

따스한 봄날

햇살을 향해 가슴을 열어놓으니

엽록소가 알알이 들어와 박힌다

그리고 나는 시를 읽는다

이제 곧 광합성작용이 일어날 것 같다

그러면 마음이 푸르러질까?

 

잡초만큼만이라도 푸르러졌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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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3. 10. 05:02

지식과 생명의 일치를 향하여

( 2:15-17; 3:1-7)

 

지난 수요일, 참회의 수요일 (Ash Wednesday)을 시작으로 우리는 사순절에 들어섰습니다. 사순절은 40일을 의미합니다. 참회의 수요일부터 부활절 전날까지, 중간중간에 끼어 있는 주일은 빼고 40일 동안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묵상하며 그리스도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영적 훈련의 기간입니다. 여기서 중간중간 끼어 있는 주일40일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금식기도 할 때, 주일은 금식기도를 안 하는 것도 좋습니다. 금식기도는 주님께 집중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거나 자신의 공적을 쌓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활절은 어떻게 정해지는지 아십니까? 춘분이 지나 오는 보름달 후 첫 번째 주일이 부활절 입니다. 춘분은 대개 3 21일쯤 됩니다. 그 후 보름달이 얼마나 빨리 뜨느냐에 따라서 부활절이 빨리 오느냐 좀 늦게 오느냐 결정되는 것이죠. 올해 같은 경우는 춘분인 3 21일을 지나, 보름달이 뜨는 날이 4 14일이기 때문에, 보름달이 뜬 그 날 이후 첫 번째로 맞는 주일이 4 20일이기 때문에 부활절이 4 20일로 정해진 것이죠. 이 법칙만 알면 매년 부활절이 언제인지 스스로 계산해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참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해서 광야에서 보낸 시간이 40년이고, 예수님께서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 가셔서 금식하시며 하나님을 만난 기간이 40일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마귀의 유혹이 왔습니다. 교회가 40일을 정해 사순절로 지키는 이유는 예수님의 40일 간의 영적 훈련을 모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순절 첫 번째 주일을 지키면서 우리는 인류 최초의 유혹이 들어있는 창세기의 말씀을 보고,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 당하시는 부분을 읽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창세기의 말씀만 읽었고, 복음서의 말씀은 대부분의 분들이 너무 잘 아시는 이야기라 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창세기의 말씀과 복음서의 말씀이 엮여 선포될 것입니다.

 

창세기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들에게 복 주신 후 어떻게 우리 인간 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에게 불순종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사실, 죄는 미스터리입니다. 우리의 이성으로 온전히 파악할 수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 어떻게 죄가 들어오게 되었는지, 하나님께서 왜 죄가 당신의 창조세계에 들어오게 놓아두셨는지, 등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창세기가 이런 것들에게 대해서 정확하게 알려주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창세기의 말씀을 통해서 죄에 대해서 약간의 이해를 가질 수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창세기는 죄가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들어온 것은 미스터리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미스터리는 신비인데, 이는 우리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고, 감추어져 있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실체가 아직 파악되지 않았고, 파악되어 가는 중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드러날 것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신비는 종말론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보게 될 종말에는 모든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생명의 신비도 드러날 것이고, 죄의 신비도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니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현재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것이라고 무시하거나 등한히 할 것이 아니라, 인내를 가지고 그것에 대한 실체를 알아가도록 계속 노력해야 합니다.

 

창세기의 이야기와 복음서의 이야기는 같은 배경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결론이 완전히 반대입니다. 정황은 이렇습니다. 우선 창세기에서 보면 사탄이가 아담과 하와를 꼬드겨서 하나님을 거역하게 합니다. 뭔가 솔깃한 것을 인간에게 던져주어서 그것을 덥석 물게끔 합니다. 그런데 사탄이가 제시하는 솔깃한 것은 바로 하나님에게 정면으로 대항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는 굉장히 매력적인 것이죠. 그것이 바로 선악과를 따먹는 일이었습니다. 뱀의 형상을 한 사탄이가 아담과 하와에게 이렇게 말하며 꼬드깁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라.”

 

우리 인간에게 가장 크게 다가오는 유혹은 바로 하나님처럼 되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죄악은 바로 이 마음 때문에 생겨나는 겁니다. 피조물로 살기보다 인간은 스스로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삽니다.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은 뭔가를 좀 아는 것처럼 살게 된다는 겁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라.”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매우 매력적인 일입니다. ‘안다는 것은 히브리어의 야다라는 말인데, 부부관계에서 서로를 알듯이 훤히 알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그것이 얼마나 매력적입니까? 우리의 인생이 불안하고 답답한 이유는 우리는 한치 앞도 우리의 앞날을 내다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당이나 점집이 잘 되는 겁니다. 뭔가를 알고 싶어 하는 인간의 강렬한 욕구와 앞날을 알려주는 무속의 기능이 잘 맞아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었을 때, 그들은 정말로 무엇인가를 알게되었습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3:7a). 그런데 하나님처럼 되어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는 것 자체가 그렇게 낭만적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처럼 되어 무엇인가를 알게 된 첫 번째가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게 된 것인 것을 보면 말입니다.

 

뭔가를 안다는 것은 이런 상황과 같은 것입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어느 농부가 시장에 가서 거위 한 마리를 사가지고 왔습니다. 다음날 거위가 낳은 알을 가져다가 요리 해 먹으려고 거위 집에 갔는데, 가서 보니 거위가 낳은 알이 그냥 알이 아니라 황금알이었습니다. 너무도 신난 농부는 아내를 불러서 그 기쁨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거위는 하루에 한 개씩 매일 아침 황금알을 낳았습니다. 그 덕분에 농부 부부는 점차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농부 부부는 서로 말하기를, 하루에 한 개씩만 황금알을 낳으니까 감질 난다는 겁니다. 한꺼번에 많은 황금을 손에 넣고 싶은 욕심이 생겼던 것이죠. 그래서 이들은 생각하기를 거위의 배를 가르면 거기에는 수 많은 황금이 들어 있을 거고, 그것을 차지하면 감질나게 하루에 한 개씩 황금알을 가질 필요 없이 한 번에 엄청난 부자가 될 거라고 믿었던 것이죠. 그래서 이 농부 부부는 칼을 가져다가 거위의 배를 가릅니다. 물론 거위는 죽었죠. 그러나 거위의 배를 들여다 보니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거위도 잃고, 황금도 못 찾고, 아무런 이득도 없이 그렇게 끝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에만 마음을 집중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야 합니다. 그 은혜가 족합니다. 한 눈 팔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삶에는 한 눈 팔게 하는 유혹들이 엄청나게 다가옵니다. 하나님에게서 눈을 떼고 다른 곳을 바라보게 합니다. 하나님에게서 눈을 떼고 다른 곳을 바라보는 바로 그 순간이 타락의 순간이고 죄악에 빠지는 순간입니다. 우리의 삶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순간입니다. 뭔가를 안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집중하지 못하게 하고, 자기 스스로 뭔가를 이룰 수 있다는 교만이 싹트는 순간인 것이죠.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광야 시험 이야기 나오는 사탄의 유혹도 매우 매력적입니다. 1. 돌을 떡으로 만들어라. 2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리라 그러면 천사들이 네가 땅에 닿기도 전에 너를 받들어 줄 것이다. 3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주겠다. 이게 다 뭡니까?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게 하고,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게 하는 교만한 마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실수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겁니다. 예수님 믿는다고 하면서 우쭐해지는 것이죠.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피조물로, 인간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지,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복에 의존해서, 그것으로 만족해서 산다는 뜻이지, 하나님처럼 스스로 복의 주인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로 유혹 받습니다. 스스로 대단한 존재가 된 양 행동하고 싶어 합니다. 뭔가를 아는 사람인 것처럼 살아가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인간이 되는 법, 그리고 하나님께만 의존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광야에서 시험 당하시는 것과 똑 같은 시험이 왔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는 유혹이었습니다. 남은 구원하면서 자신은 왜 구원하지 못하느냐고 하는 비아냥거림이 들려왔습니다. 우리 상식에서도 십자가에서 핵폭발과 같은 엄청난 위력을 지닌 사건, 그리고 십자가에서 무력하게 죽어가던 예수를 바라보면서 조롱하던 사람들이 알아듣고 볼 수 있도록 무슨 엄청난 일이 일어났으면 사람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알아보고 더 잘 믿었을 텐데 하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십자가에서는 그 어떤 신적인 힘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냥 한 인간의 무력한 죽음만이 십자가에 걸려 있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신 것입니까? 인간이 인간으로 사는 법을 가르쳐 주신 겁니다. 끝까지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복에 만족하는 법을 보여주신 겁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굉장한 겁니다. 지식과 생명의 일치가 어떻게 해서 일어나는지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처음 인간인 아담과 하와는 불순종을 통해 지식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지식이 그들에게 생명을 가져다 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벗고 있다는 부끄러움(shame)’만 맛보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식의 한계입니다. 우리가 가진 지식과 생명이 자꾸 일치되지 못한다는 것이 우리에겐 곤욕이고 아픔입니다.

 

일례로 노벨상의 제정한 알프레드 노벨이라는 사람은 자신이 가진 지식을 통해서 사람들을 이롭게 하고자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했습니다. 그러나 노벨은 자기가 발명한 다이나마이트가 새 문명을 건설해가는 어려운 공사에 이바지되는 것은 기뻤으나 전쟁에 이용되어 많은 사람을 죽이는 힘이 되는 것은 도무지 참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지식이 생명과 일치하지 못하고, 결국 생명을 헤치는 일에 쓰이는 것을 보고 절망한 것이죠.

 

우리는 내가 뭔가를 좀 아는 것을 가지고 삶을 꾸려갑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를 풍성한 생명으로 이끌어주지 못할 때 우리는 좌절하고 절망합니다. 참된 지식, 지혜는 우리는 생명으로 이끌어 주는데, 우리가 가진 지식은 생명으로 이끌지 못하는 것 같아 당황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사순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바로 이것을 훈련하는 기간입니다. 순종. 순종이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태도를 취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는 것은 어쩐지 생명으로 나를 이끌어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우리를 참된 생명 가운데로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의 지혜에 우리 자신을 맡기는 것, 그것이 순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그렇게 순종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는 한, 십자가를 피하는 것이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알량한 지식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께 순종했고, 하나님께 자기 자신을 맡겼습니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23:46). 그랬더니 거기에서 생명이 꽃처럼 피어났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우리를 생명으로 이끌어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안타깝게도 태초의 인류 때부터 그런 일이 인류에게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지식과 생명의 일치는 하나님께 순종할 때만 일어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그 일이 참인간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식과 생명의 일치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지식과 생명의 일치를 향하여 하나님께 순종하는 법을 터득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니리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4:13, 15).

 

www.columbuskmc.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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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3. 2. 23:10

텐트(장막) 치고 사순절 맞기

마태복음 17:1-9

 

예수는 누구인가? 사람인가? 신인가? 예수라는 이름은 지난 2천 년 동안 전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수많은 질문거리를 주었습니다. 기독교는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간단하게,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릅니다. 2천 년 전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났고, 나사렛에서 자랐으며, 갈릴리지역에서 주로 활동을 했고, 예루살렘에서 십자가 처형을 당한 예수라는 사람을 그리스도로 인정하고 믿습니다.

 

기독교 역사는 끊임없이 예수는 누구인가?”를 질문해왔습니다. 기독교회가 내린 최고의 결론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는 참 사람이고, 참 하나님이다. Vere Homo, Vere Deus. 이 말은 50%는 인간이고, 50%는 신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인물들 중에는 그런 존재가 많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과 차원이 다릅니다. 이 말은 100% 인간, 100% 신이라는 뜻입니다. AD 451년 칼케톤 공의회에서 확정된 교리입니다. 이후로, 이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모두 이단(정통이 아닌, not 나쁜놈)으로 낙인 찍혔습니다.

 

교회는 이것을 각각 성탄절기와 주현절기를 통해서 선포해왔습니다. 우리는 별로 생각 없이 성탄절기와 주현절기를 보내지만, 사실은 교회의 역사를 통해서 만들어진 교회력은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탄절기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즉 참 사람됨을 증거합니다. 어떻게 증명합니까? 예수는 여느 사람들처럼 여자의 몸에서 태어납니다. 여기에 물론 신성을 증명하는 요소가 가미됩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긴 태어나는데, 처녀의 몸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동정녀탄생이야기입니다.

 

예수의 인성(사람됨)이 성탄절기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처럼, 이제 예수의 신성(하나님됨)이 주현절기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주현절기는 동방박사의 이야기와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시작됩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세례식 때에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그리고 오늘, 주현절기가 끝나면서 우리는 하늘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또 듣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렇게 해서 주현절기는 이 음성을 듣는 것으로 시작해서, 이 음성을 듣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러니까, 예수의 신성이 희미하게 드러나는 이야기로 시작해서, 예수의 신성이 확실하게 드러나는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지요.

 

우리는 오늘, 산상변모사건을 전해주고 있는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의 신성, 즉 예수님의 하나님 됨을 깊이 묵상합니다.

 

마태복음 저자의 진술에 의하면, 오늘 사건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첫 번째로 수난 예고를 하신 뒤 엿새 후에 일어난 일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 중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따로 높은 산에 오르십니다. 이 장면은 분명히 구약의 두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오르는 장면과 그리고 엘리야가 모세처럼 시내산에 오르는 장면입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상대로 씌어진 복음서이기 때문에 늘 이런식으로 구약과의 연결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우리는 기억합니다. 모세는 시내산에 올라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 즉 율법을 받았습니다. 엘리야도 시내산에 올라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으로부터 새 힘을 얻고 새로운 사명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고, 엘리야는 선지자를 대표합니다. 예수께서 높은 산에 올라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는 장면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눈치챌 수 있습니다. 율법을 통하여서 전해진 하나님의 의와 선지자를 통해서 전해진 예언이 바로 예수에게서 성취될 거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그곳에 갔던 세 제자는 자신들의 눈을 의심할 정도로 희한한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변형되는 장면입니다.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그리고 갑자기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더불어 대화를 나누는 것을 봅니다. 이것을 제자들의 반응은 두려움이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은 신적인 영광을 체험하고 모두 두려워 떨었습니다. 모세도 그랬고, 에스겔도 그랬고, 다니엘도 그랬고, 신적인 영광을 체험하고 두려워 떨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두려움과 떨림 가운데 베드로는 횡설수설하면서 예수님께 제언을 합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우리도 중요한 장면, 놓치고 싶지 않은 순간은 비디오나 사진으로 담아두려고 합니다. 옛날에는 그러한 장치들이 없었습니다. 그저 그림을 그릴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풍습에는 그것을 저장하는 장치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절기(일종의 기억장치)입니다. 일례로 유월절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사건을 우리가 비디오나 사진에 담아두는 것처럼 담아둡니다.

 

이스라엘에는 장막절(초막절, 수장절)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들은 이 절기를 통해서 출애굽 이후 40년 동안 광야생활 한 것을 기념했습니다. 광야에서 텐트를 치며 생활했던 것을 기억하는 것이죠. 광야생활 동안 그들은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 그리고 위대하심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한 기간이었죠.

 

지금 베드로가 예수님께 초막을 셋 지어서 여기에 있자고 하는 것은 바로 장막절에 지었던 그 텐트를 의미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유대인의 3대 절기는 유월절, 칠칠절(초실절, 오순절), 그리고 초막절(수장절, 장막절)입니다. 이 유대인의 절기 중, 장막절(초막절)이 가장 큰 절기였는데, 이것을 통해서 베드로는 변모사건을 기념하고 싶었던 것이겠죠. 유대인이었던 베드로로서는 매우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주님, 기념 사진 하나 찍어 놓죠!” 정도가 될 겁니다.

 

이런 가운데 놀라운 일이 연속하여 벌어집니다. 갑자기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더니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구름은 신적표상입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실 때는 구름이 몰려듭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거기에 임했다는 뜻입니다. 구름 속에서,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진술하고 있는 겁니다.

 

제자들은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정신 못 차리고 있는데,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집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어루만지시며,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라고 하십니다. 모세도 사라졌습니다. 엘리야도 사라졌습니다. 그들 눈 앞에 여전히 서 계신 분은 예수님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도 임마누엘이신 예수님을 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고, 우리 곁에 계시며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죠.

 

무서워 떨고 있는 제자들을 일으켜 세워 주시고, 제자들과 함께 산을 내려오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무서워 떨고 있는 제자들을 일으켜 세우신 것은 부활을 연상시킵니다. 그것이 곧 구원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그 부활 사건이 바로 구원 사건입니다. 그것이 일어나기 전까지, 아무에게도 변모사건을 말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인지 완전하게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빛에서 보지 않으면, 변모 사건도 그 빛이 온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있은 뒤, 베드로가 어떻게 이 변모사건을 증거하고 다녔는지, 그리고 이 변모사건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는 베드로후서 1 16절 이하에 잘 나와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벧후 1:16-18).

 

사랑하는 여러분! 그들은 분명히 이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이 음성이 오늘 이 자리에서 예배 드리며 하나님의 귀한 말씀을 듣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들려야 합니다. 이 음성을 들은 여러분!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들려진 이 음성을 지금 이 자리에서 그들과 똑같이 들은 분은 베드로후서에서 베드로가 증거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를 그리스도로, 예수를 메시야로, 예수를 구원자로, 예수를 주님으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예수를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고백하게 될 겁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사실, 예수님이 누구인지 확실하게 깨달은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내 안에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고백합니다. 성찬을 통해서 눈에 보이게끔 확실하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성찬식 때 단순히 떡과 포도주를 먹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습니다. 내 살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이요, 내 피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라는 고백입니다. 내 살과 내 피가, 내 살이 아니고 내 피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살이고 그리스도의 피인데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부활을 통해서, 오늘 우리가 살펴본 변모사건을 통해서, 예수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깨달은 사람은 이제 내 몸과 내 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과 그리스도의 피로 삽니다. 그게 나에게 의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이제 이번 주 수요일에 있는 참회의 수요일을 시작으로 사순절기가 시작됩니다. 충만한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 세상을 사는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시간을 사는 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시간을 사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눈 앞에 다가온 사순절 동안 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요즘 텐트 치며 야영하는 레저 산업이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텐트는 장막인데, 장막절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살 때,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가장 가까이 체험한 것을 기념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간구하는 의식입니다. 모든 것이 너무 풍요로운 요즘, 우리는 광야와 같은 삶의 조건을 일부러 조성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스로 만족한다는 조건을 다 갖추어 놓고 살면, 하나님이 끼어들 자리가 없습니다. 사실, 하나님을 끼어들지 못하게 하기 위해만족을 조장합니다. 참된 만족이 없으면서도 우리는 만족을 조장합니다. 특별히 세상에서 말하는 풍요로움을 통해서 그렇게 합니다. 우리는 마치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처럼 이렇게 만족을 조장합니다. “내가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두리라영혼아 여러 해 쓸 문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12:18-19).

 

우리는 재물의 풍족함에 취해, 영혼의 빈곤함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며 삽니다. 이와 같았던 어리석은 부자에게 다음과 같은 선언이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12:20-21).

 

재물에 집착할수록 영혼이 빈곤하다는 증거가 됩니다. 사람의 속성 중 하나가 바로 만족이 없을 때 어딘가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말고, 있는 모습 그대로, 우리의 부족한 모습을 하나님께 노출(올려드림)시켜 드리십시오. 밥도 좀 굶어보고, 잠도 좀 안 자보고, 가난한 자에게 가진 것을 일부러 나누어 주고 좀 빈털터리로 살아 보기도 하고, 자발적인가난에 한 번 처해 보십시오. 만족이 없으면서 애써 만족하는 것처럼 재물로서 만족을 조장하지 말고, 있는 모습 그대로, 만족이 없는 모습 그대로 우리의 삶을 주님께 노출(올려드림)시켜 보자는 겁니다. 즉 우리의 삶을 광야와 같은 삶으로 한 번 만들어 보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인도하시고, 풍요롭게 하시는지, 즉 우리의 삶을 어떻게 만족시키시는지 한 번 체험해 보자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사순절기를 맞는 것은 예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시험 받으실 때의 심정으로, 이스라엘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하나님께 인도하심을 받을 때의 심정으로, 하나님만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몸소 체험하겠다는 영적인 갈급함에서 비롯된 것이어야 합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사순절기 동안 여러분이 각자 치시게 될 텐트는 다르겠지만, 여러분이 만나게 될 하나님은 동일한 하나님이십니다. 사순절기가 눈 앞에 왔습니다. 텐트 치고 사순절기를 맞읍시다.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께 나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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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2. 27. 06:22

소통 문제

창세기 17

(창세기 19:1-14)

 

2004년에 만들어진 <Crash>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인종과 계층 간의 차별, 즉 소통의 문제를 다룬 영화인데, 서로에 대한 편견 때문에 겪는 아픔 그리고 화해를 그린 영화입니다. 그 중에서 명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이란인 가게에 문이 고장 나서 그것을 고쳐주러 간 히스페닉 열쇠수리공은 자물쇠는 고쳤지만 문 자체가 문제이니 문을 꼭 고치라고 일러줍니다. 하지만 이란인 가장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돈을 돌려 달라고 고함칩니다. 히스페닉 열쇠수리공은 돈을 돌려 주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란인 가족의 가게는 강도를 맞고, 문을 고치지 않은 것 때문에 보험금 처리도 받지 못하게 됩니다. 가게가 털려 화가 난 이란인 가장은 화풀이를 하기 위해 히스페닉 열쇠수리공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퇴근해서 집에 돌아온 그에게 총을 겨누며 강도 맞은 피해 보상을 하라며 윽박지릅니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던 히스페닉 열쇠수리공의 어린 딸이 아빠를 향해서 뛰어듭니다. 동시에 이란인 가장은 방아쇠를 당깁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비디오) www.youtube.com/watch?v=Tjct4zCo_Qg

 

다행히도 이란인 가장의 총에 들어있던 총알은 공포탄이었고, 열쇠수리공의 딸은 무사했습니다. 가게로 돌아간 이란인 가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소녀는 나의 천사야.”

 

이것 외에도 제 기억에 남는 장면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백인 경찰에게 부당하게 검문을 당하며 치욕을 겪은 방송국 PD 흑인 부부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흑인 부인이 교통 사고를 당해서 구조를 기다리고 있는데, 자동차가 폭발하기 직전 본인을 구하러 온 경찰관이 바로 자신들을 욕보인 그 백인 경찰관이었습니다. 그 경찰관의 얼굴을 알아본 흑인 부인은 “no, not you”하면서 절체절명의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그 경찰관에게 구조받기를 거부합니다. 백인 경찰관은 사력을 다해 흑인 부인을 설득해서 자동차가 폭파되기 일보 직전에 그녀를 구출합니다.

 

모두 소통의 문제 때문에 벌어진 일들입니다. 아무리 사실을 말하고 도와주려고 해도 서로에 대한 신뢰와 이해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오늘 말씀에는 크게 네 부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천사들, , 소돔사람들, 그리고 롯의 사위들입니다. 이들 간에 일어난 소통의 문제를 하나씩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천사들과 롯 사이에는 소통이 잘 되는 듯 합니다.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아있었다는 것은 소돔 사회에서의 롯의 사회적 위치를 말해줍니다. 성문은 장로들과 공직자들이 앉아서 법적인 문제를 논하거나 판결하는 장소였습니다. 롯이 성문에 앉아 있었다는 것은 그가 소돔의 지도자 그룹에 속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성문에 앉아 있던 롯은 소돔으로 들어온 천사들을 영접합니다. 롯이 그들을 어떻게 알아보았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들을 알아본 것과 똑같이 롯도 그들을 알아보고 그들을 극진히 영접했습니다. 뭔가 좀 특별한 기운이 그들에게서 나왔던 것 같습니다.

 

롯이 두 천사를 영접한 소식이 소돔사회에 금방 번져나갔나 봅니다. 날이 어두워지기 무섭게 소돔지역 사방에서 노소를 불문하고 롯의 집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롯에게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합니다.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5). 여기서 상관하다라는 말은 그들과 성관계를 갖겠다는 뜻입니다.

 

이 상황에서 우리는 두 가지의 소통의 문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소돔사람들과 천사들 간의 소통의 문제입니다. 천사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이니까, 결국 소돔사람들과 하나님 간의 소통의 문제 발생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소돔 땅에 천사들을 보내신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을 멸하시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소돔사람들이 하나님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였다면 소돔 땅에 도착한 천사들을 그런 식으로 대해서는 안됩니다. 이들이 롯에게 천사들을 내놓으라고, 그들과 관계하리라고 말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과의 소통을 거부한 처사입니다.

 

둘째는 소돔사람들과 롯 간의 소통의 문제입니다. 롯은 두 천사를 내놓으라는 소돔사람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습니다. 롯은 두 천사를 보호하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그리고 그들을 윤리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설득하려고 노력합니다.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하지 말라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라”(7-8). 롯은 소돔사람들과 소통을 해보려고 그들을 형제들아라고까지 부르며 적극적으로 대처합니다. 그러나, 롯의 그러한 노력은 수포로 돌아갑니다. 소돔사람들이 롯을 다음과 같이 상대화시켜 버립니다. “너는 물러나라이 자가 들어와서 거류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9a).

 

문제가 발생하니, 평소에는 모르던 것이 드러납니다. 롯은 소돔사람들을 형제라고 불렀는데 반해, 소돔사람들은 롯을 거류민으로 불렀습니다. 롯의 노력과는 달리, 소돔사람들은 롯을 자신들의 공동체 안으로 완전히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죠. 서로 간에 소통이 안 된 겁니다. 지금 소돔사람들은 롯에게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니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야!!”

 

어느 설문 조사에서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마음이 아프다는 조사결과가 나왔습니다. “선생님이 뭔데 그러세요?” 이런 말을 들었을 때, 선생님들은 허무해집니다. 자신이 가르친 학생에게 자신은 아무런 존재가 아닌 것이라는 자괴감 때문입니다. 롯은 평소 소돔사람들과 가깝게 지내며 그들을 형제로 생각했는데, 지금 소돔사람들은 롯을 이방인 취급하는 겁니다.

 

이렇게 소통이 부재하니, 폭력사태가 발생합니다. 소통이 부재하고, 관계가 상대화 되면 거기에는 어김 없이 폭력이 발생합니다. 다른 말로 해서, 폭력을 행사하려면 일단 소통의 부재를 내세워야 하고, 상대방을 상대화시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저명한 유대인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소통이 잘 되는 상태를 나와 너의 관계로, 소통이 잘 안 되는 상태를 나와 그것의 관계로 설명합니다. 소통이 잘 되는 나와 너의 관계에서는 절대로 상대방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서로에게 어떠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러나 소통이 잘 되지 않는 나와 그것의 관계로 서로의 관계가 상대화되면 거기에는 각종 폭력이 난무하게 됩니다.

 

롯과의 관계를 상대화시킨 소돔사람들은 자신들의 욕정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끝내 폭력을 휘두릅니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 하고 롯을 밀치며 가까이 가서 그 문을 부수려고 하는지라”(9b). 이런 상황에서 만약 두 천사의 개입이 없었다면 롯은 큰 화를 당했을 겁니다.

 

상황이 다급해진 두 천사는 자신들이 이곳 소돔 땅에 온 이유를 롯에게 알립니다. “그들에 대한 부르짖음이 여호와 앞에 크므로 여호와께서 이곳을 멸하시려고 우리를 보내셨나니 우리가 멸하리라”(13). 그리고 천사들은 롯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립니다. “네 사위나 자녀나 성중에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성 밖으로 이끌어 내라”(12).

 

이 말을 들은 롯은 다급한 마음에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가서 이 사실을 알리고 빨리 일어나 소돔땅을 떠나라고 일러줍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한 번 소통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사위들이 장인의 말에 순종하여 다급하게 그 자리를 떠났어야 마땅한데도 불구하고, 오늘 말씀은 그와 반대의 행동을 전합니다.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14b). 어째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요?

 

이것은 롯의 이해되지 않는 행동 때문입니다. 롯은 소돔사람들에게서 천사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해할 수 없는 제안을 합니다. 천사들과 상관하리라고 성내며 달려드는 소돔사람들에게 천사들을 대신하여 자신의 두 딸을 내놓으려고 합니다. 롯의 집에 손님으로 들어온 천사들을 보호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결혼을 앞 두고 있는 두 딸에게 험한 꼴을 당하게 하는 처사는 이해하기 힘든 겁니다. 천사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두 딸을 내놓으려고 하는 롯의 모습을 예비 사위들이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도, 장인 롯이 미쳤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위들이 장인 롯의 말을 믿지 않고, 농담으로 여긴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 <Crash>나 오늘 말씀이나, 소통의 문제 때문에 벌어진 참사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픕니다. 소통에 문제가 생기고, 서로를 상대화시키고, 서로에 대한 편견 때문에 차별이 발생하면, 거기에는 생명이 발생하지 못하고, 결국 죽음의 그림자만 드리워집니다.

 

아무리 생명의 말씀을 전해도,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생명의 말씀은 상대방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천사들은 소돔땅을 구원하러 간 것이지 멸하러 간 것이 아닙니다. 결국 소돔땅이 멸하게 된 이유는 소돔사람들이 천사들, 즉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장인 롯이 사위들에게 찾아가 구원 받을 방도에 대해서 말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에 발생한 소통의 부재는 결국 사위들을 구원하지 못하는 비극을 발생시킵니다. 이렇듯, 소통의 부재가 발생하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 않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소통이란 결국 상대방을 신뢰하고 사랑할 때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기능입니다. 구체적인 예로, 만약 여러분이 지금 이렇게 말씀을 전하고 있는 저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저를 신뢰하지 못하고 저를 마음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제가 전하는 말씀이 약장수의 허튼소리로만 들릴 뿐,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여러분이 저와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저를 신뢰하고 저를 마음으로 사랑하신다면, 제가 전하는 말씀에 아멘으로 응답하실 겁니다.

 

소통의 문제를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소통이 잘 되느냐 안 되느냐에 따라서 생명을 보존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하는 결정적인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누구보다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소통이 잘 될 수 있도록 평소에 주님을 가까이 해야 됨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소통은 인격적인 사귐이 있을 때에만 잘 되는 법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사귐을 갖고 계십니까? 2천년 전, 그리스도께서 이땅에 오셨을 때, 그리스도와의 소통에 성공한 자들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을 받았지만, 그리스도와의 소통에 실패한 자들은 오히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소통에 실패하여 멸망 받은 소돔사람들과 같이 되지 말고, 소통에 성공하여 구원 받은 롯과 같은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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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2. 23. 23:56

거룩이란 무엇인가?

(레위기 19:1-2, 9-18)

 

자고 일어나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각종 사건들이 전해져 옵니다. 얼마 전 미국에서는 한인 입양아를 살해한 혐의로 현직 국가정보요원이 구속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양아버지에 의해 살해된 한인 입양아의 나이는 세 살이었고, 부검해 본 결과 뇌의 진액이 신체 곳곳에 스며들 정도로 심한 구타를 당해 죽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끔찍한 일을 보면, 절대로 거룩하다는 생각이 안 듭니다. 한국에서는 13, 15살 먹은 어린 조카를 임신시키고 출산까지 하게 한 삼촌의 범죄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정욕 때문에 소녀들의 소중한 삶을 무참히 짓밟은 이런 인면수심의 인간을 보면 거룩하다는 생각이 안 듭니다. 이런 일도 있습니다. 어떤 중년 여인이 이혼소송을 냈는데, 그 이유가 남편의 종교 강요 때문이랍니다. 남편은 가족들과 한 마디 상의도 없이 교회에 헌금을 바쳤답니다. 그 액수가 처음에는 수 천, 그리고 나중에는 수 억 원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게다가 남편은 교회를 잘 안 나가려고 하는 부인과 자녀들에게 폭언과 폭력을 일삼았다고 합니다. 그것 때문에 가족들 간에 불화가 생기고 급기야 이혼소송까지 갔는데 법원은 남편의 잘못된 종교 강요로 인해 가정이 파탄에 이르렀다는 판단과 함께 부인의 손을 들어 줬습니다. 종교 문제로 이렇게 가정이 파탄 나는 것을 보면 거룩하다는 생각이 안 듭니다.

 

성경에도 보면 거룩하지 못한 일들이 즐비합니다. 대표적으로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하나인 유다의 부정과 다윗 왕의 간음이 있습니다. 유다는 두 아들 엘과 오난이 죽자 셋째 아들 셀라를 보호하기 위해서 계대결혼법을 어기며 며느리 다말을 시집으로 돌려 보냅니다. 이에 앙심을 품은 며느리 다말은 창녀로 변장해 시아버지 유다와 동침을 합니다.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동침 사건을 보면서 거룩한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성경은 이 이야기를 당당하게 싣고 있고, 하나님께서는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동침을 통해서 난 베레스와 쎄라에게 복을 내리십니다. 좀 이해할 수 없는 대목입니다. 또한 다윗 왕의 간음 사건은 매우 잘 알려진 사건입니다. 자신의 음욕을 채우기 위해서 충직한 부하 장수의 부인인 밧세바를 왕궁으로 범하고,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서 충직한 부하 장수 우리아를 최전방으로 보내 전사하게 만듭니다. 물론 나단 선지자의 폭로를 통해 다윗 왕이 회개하긴 했지만, 이스라엘 최고의 성군이라고 하는 다윗이 이러한 일을 벌였다는 것 자체가 거룩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도대체 거룩이란 무엇일까요?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2). 하나님 당신께서 거룩하시니, 우리도 거룩해야 한다고 합니다. 우선 거룩이란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임에 틀림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인 거룩을 우리 인간 존재에 담아낼 수 있느냐입니다.

 

우리가 특별히 레위기서의 이 말씀을 살펴 보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에서 오늘 말씀과 관련된 것을 토대로 가르침을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인 이웃사랑법이 레위기서에서 비롯됩니다. 레위기 18절 후반부 말씀입니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이런 것을 보면, 거룩이란 이웃과의 관계를 통해서 우리 인간 존재에 담아낼 수 있는 하나님의 속성인 것 같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라라는 말씀 뒤에 이어지는 레위기의 규례들은 하나님 자신의 어떠한 모습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이웃과의 관계법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넓게 말해서, 레위기 19장에 등장하는 규례들은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어떻게 배려하고(respect) 공경해야(honor)하는지에 대한 윤리적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이웃)과 어떻게 적절한 관계를 맺는 것이 좋은 것인가에 대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 이웃이란 이런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자(the poor), 거류민(the stranger), 이웃(fellow), 품꾼(laborer), 귀먹은 자(deaf), 맹인(blind), 부자(the rich), 친족(kinsman), 동포(countryman).

 

가난한 자와 거류민과의 올바른 관계는 이것입니다.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9-10). 거룩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가난한 자와 거류민에게 자비를 베풀고 그들의 최저 생계를 보장해 주는 것. ‘이것도 내 꺼, 저것도 내 꺼, 다 내 꺼야라면서 혼자서 다 먹는 것이 아니라, 나눔의 삶을 사는 것이 거룩이라는 겁니다.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는 이것입니다. 여기서 이웃이란 지리적 위치에서 내 옆집에 사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라기보다 삶 가운데서 만나서 삶을 나누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너는 네 이웃을 억압하지 말며 착취하지 말며”(13a). 거룩이란 바로 이런 겁니다. 내가 내 삶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태도. 만나는 사람들을 억압하거나 착취하면 그것은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내 삶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세워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들의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들의 삶에 생명력이 넘치게 할 수 있을까, 하면서 그들을 오히려 섬기는 것이 거룩입니다.

 

품꾼과의 올바른 관계는 이것입니다. “품꾼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 말며”(13b). 품꾼들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도 참 대견하고 성실한 사람들이죠. 남에게 빌어먹는 게 아니라, 스스로 어떻게 해서든 삶을 꾸려가려고 몸부림 치는 사람들입니다. 품꾼은 그날 벌은 돈으로 그날 먹거리를 사가지고 들어가지 않으면 자신 뿐만 아니라 가족들이 굶주리게 됩니다. 그래서 품꾼의 삯은 일이 끝나는 대로 바로 주어야 합니다. 주지 않고 그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붙들고 있으면, 품꾼은 꼼짝없이 굶어야만 합니다. 거룩이란 이런 것입니다. 일 한 것에 대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 자신의 배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배고픈 사람의 배까지도 생각하는 것.

 

귀먹은 자와 맹인과의 올바른 관계는 이것입니다. “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맹인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라”(14). 저 사람이 안 들린다고 저주하면 안됩니다. 저 사람이 안 보인다고 그 앞에 장애물을 놓으면 안 됩니다. 안 들리기 때문에 더 조심해서 말해야 하고, 안 보이기 때문에 그의 앞에 장애물이 있다면 치워주어야 합니다. 거룩이란 이런 것입니다. 저 사람은 안 들릴지 몰라도 하나님은 듣고 계시며, 저 사람은 안 보일지 몰라도 하나님은 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라는 말이 뒤에 붙는 겁니다. 더 나아가, 지금 내 눈 앞에 그 사람이 없다고, 그 사람에 대해서 험담하고 없는 말을 지어내 그 사람의 인격에 흠집을 내는 것 또한 거룩하지 못한 겁니다. 지금 내 앞에 없어서 그 사람에 대해서 험담하고 흠집을 내도 괜찮다고 생각하며 그런 일을 하면서 낄낄거리며 웃을지 모르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 듣고 보고 계신다는 것을 안다면, 그럴 수 없습니다.

 

가난한 자와 부자와의 올바른 관계는 이것입니다.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둔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15). 재판을 한다는 것은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뜻입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나면 그 사람의 속마음을 알 수 있는데, 특별히 가난한 자와 부자에 대한 태도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공의라는 개념을 들어 거룩을 표현합니다. 재판을 할 때, 올바르게 재판하기 위해서 동정도 아첨도 피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가난한 자는 동정표를 얻기 십상입니다. 부자는 아첨표를 얻기 십상입니다. 이렇게 하면 공의가 제대로 서지 않게 되고, 관계가 어긋나게 되며 결국 이것은 거룩과 멀어지는 상황을 낳게 됩니다.

 

친족과 동포와의 올바른 관계는 이것입니다.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네 이웃을 반드시 견책하라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17-18). 살다 보면 가족 간에도 미워하고 원망할 일들이 많이 생깁니다. 마음으로 미워하면 서로 간에 큰 상처를 남깁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서운한 마음이 생길 수는 있어도 그것으로 인해 마음으로 미워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적인 개념에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내주하시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내주하시는 마음은 하나님의 형상, 곧 사랑이 가득해야 하는데, 그곳에 사랑 대신 미움이 자리한다면 그것은 이미 거룩한 모습이 아닙니다. 미움을 마음에까지 남기지 마십시오. 그것이 형제와 이웃과의 관계를 어긋나게 할 뿐만 아니라, 내 삶까지도 망가뜨리는 가장 큰 원인이 됩니다. 마음에 미움을 안고 사는 것만큼 불행한 일도 없습니다.

 

우리가 오늘은 주어진 본문 내에서만 거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살펴 보았습니다만, 혼자 있는 고요한 시간에 레위기서를 찬찬히 들여다 보십시오.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라는 말씀 아래, 거룩이 무엇인지 제시되는 것은 모두 이웃과의 관계에 관한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거룩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속성이지만, 그것을 우리 인간 존재에 가져오는 방법은 다름 아닌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를 통해서입니다. 성경은 예배 잘 드리고, 교회에서 봉사 잘 한다고 그 사람을 거룩한 사람이라고 칭하지 않습니다. 거룩한 사람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한 사람에게 붙는 수식어 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23절 이하에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5:23-24).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를 배제한 거룩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과의 관계만 올바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법을 거룩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시는데, 그것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자의 예배를 받으십니다. 거룩한 예배란 우리가 얼마나 이웃과의 관계를 올바로 맺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렇게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행위가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거룩한 예배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우리의 예배가 얼마나 부족한 예배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부족한 예배나마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길은 이웃과의 관계를 다시 한 번 돌아보고,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올바른 이웃관계를 맺기 위해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거룩이란 무엇인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respect & honor).” 이것이 거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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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2. 17. 05:03

교회의 성장통

(행 2:42-47)

 

우리 큰 아들이 이제 7살이 되는데, 자주 다리가 아프다고 한다. 키가 클 때 그런다. 육체적인 성장통이다. 이제 조금 있으면 사춘기가 되어, 정신적인 성장통을 겪게 될 것이다. 그 성장통이 얼마나 힘들면, 괴테 같은 사람은 그 성장통을 일컬어 질풍 노도의 시기라고 했겠는가? 성장통을 겪을 때, 잘 겪어야지 성장을 잘 할 수 있다. 성장할 때 제대로 영양분이 공급되어야 한다. 육체적으로 성장할 때는 영양분이 충분이 섭취되도록 해줘야 하고, 정신적으로 성장할 때는 사랑이 많이 필요하다. 영양분을 충분히 섭취하지 못하면 키가 안 크거나 성장이 멈추고, 사랑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으면 인간성이 비뚤어진다.

 

교회도 유기체이기 때문에 성장통을 겪는다. 교회가 생겨났을 때도 성장통을 겪고, 서서히 성장해 가면서 성장통을 겪는다. 어느 교회든지 성장할 때는 성장통을 겪는데, 그것을 영적인 눈으로 잘 파악하고 적절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

 

오늘 말씀에서 본 대로 초대교회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탄생하여 잘 성장해 갔다. 47절 말씀이 그것을 증거해 준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그러나 초대교회에 이렇게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도 성장통을 심하게 겪었다. 첫째, 교회는 복음 자체 때문에 성장통을 겪는다. 복음을 못 받아 들이는 대적자들이 교회를 핍박한다. 4장에 보면 복음을 전하다 체포된 베드로와 요한의 이야기가 나온다. 4 1절과 2절을 보면 이렇다.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예수 안에 죽은 자들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매..”라고 나온다. 그리고 그 복음을 전한 베드로와 요한을 체포해서 가둔다.

 

교회가 복음 자체 때문에 받는 성장통은 교회가 겪어야 할 필연이기도 하고, 그것이 오히려 교회가 살아 있다는 것을 반증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빛을 싫어한다. 자신의 어둠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 벌인 악한 일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은 이 상황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빛이 어둠에 비취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1:5).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11-12).

 

복음 자체 때문에 교회가 성장통을 겪는다면 그것은 교회가 올바로 성장해 간다는 증거이다. 아이가 올바르게 성장하면 성장통을 겪는 것과 같은 이치다. 아이가 성장통을 겪을 때 부모의 마음은 안쓰럽지만 한편으로는 아이가 정상적으로 잘 성장하고 있다는 안도감에 기쁘고 즐거운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5:11-12).

 

둘째로, 교회 지도자의 신변에 문제가 생길 때 교회는 성장통을 겪는다. 4장에 보면 복음을 전하던 교회 지도자, 특별히 베드로와 요한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이 체포되어 감옥에 갇힌 것이다. 이러한 신변의 위기를 초대교회가 어떻게 극복했는지 보라. 423절과 24절을 보면,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료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니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그리고 31절을 보면,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지도자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을 때 이들은 교회 지도자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다. 교회는 지도자의 신변이 늘 안전하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래야 교회의 성장통이 잘 지나가고 교회가 잘 성장할 수 있다. 목회자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교회의 성장에 큰 걸림돌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라. 목회자의 주변(건강, 가족 등)이 편안하도록 늘 기도하시라. 교회가 잘 성장하다 성장통을 심하게 앓는 경우,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목회자의 신변의 문제이다. 돈문제, 여자문제, 건강문제, 가족 간의 불화, 자녀문제 등 일반 사람들에게도 일어나는 불미스러운 일들을 통해 목회자를 넘어뜨려 교회를 힘들게 하려는 사탄이 호시탐탐 교회의 지도자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세 번째 성장통은 5장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범죄 때문에 벌어진다. 오늘 말씀에서 봤듯이, 초대교회 성도들은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었다.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욕심 때문에 하나님께 내놓아야 할 것을 숨겼다.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5:2).

 

베드로가 아나니야를 이렇게 꾸짖는다.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교회의 성장통은, 이렇게 성령의 충만한 마음이 밀리고, 그 안에 사탄이의 마음이 들어올 때 온다. 마음에 성령이 충만한지, 사탄이의 마음이 가득한지 평소에는 잘 모른다. 사람의 눈을 속일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이 알고, 성령님께서 아신다. 사람을 속이는 것은 나쁜 일이지만, 사람이 나를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것은 무서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성령을 속이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길, 육신을 멸할 수 있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너의 영혼까지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하셨는데, 성령을 실족하게 하는 죄는 참으로 두려운 거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같은 날 초상을 치르게 된 것은 사람을 속였기 때문이 아니라, 성령을 속였기 때문이다.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부지런히 살펴서, 성령이 가득한 마음을 잘 지켜야 한다. 그래서 범죄치 말아야 한다. 마귀는 교회 지도자만 노리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구성원 모두를 노린다. 베드로 사도는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하면서, 믿음을 굳건하게 하고 그를 대적하라고 말한다. 마귀에게 몸과 마음을 내어주지 말라.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 주님께서 도우신다.

 

네 번째 교회의 성장통을 6장에서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교회의 지체끼리 서로 배려해 주는 일에 실수가 있을 때 그렇다. 61절을 보면,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초대교회(예루살렘교회)는 크게 헬라파 교인들과 히브리파 교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고린도교회는 더 심했다. 아볼로파, 바울파, 게바파, 그리스도파가 그것이었는데, 누구한테서 세례를 받았느냐에 따라서 나눠진 것이었다. 이것은 무슨 파당을 지은 것은 아니고, 그냥 태생이 그렇게 된 거다. 서로 그냥 다른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다르듯, 그리고 경상도 출신과 전라도 출신, 또는 충청도 출신이 다르듯이 말이다. 성향이나, 태생이 다른 것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6장에서도, 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라파 유대인들이 다르다. 유대인이라는 것은 같지만, 한쪽은 이민자들이고, 한쪽은 유대땅에서 자란 사람들이다. 우리로 따지면, 미국에 사는 한인 이민자들과 한국에 사는 한인들인 것이다.

 

이런 것은 어쩔 수 없는 거다. 그런데, 문제는 히브리파 사람들이 배식을 맡아서 할 때 같은 히브리파 사람들에게는 생선을 나누어줘도 몸통, 살이 통통한 것을 주고, 헬라파 사람들에게는 꼬리나 삐쩍 마른 것을 주는 등, 이렇게 차별을 한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누구든지 차별 당하면 싫은 법이다. 배척당하면 싫은 법이다.  교회가 이렇게 헬라파냐 히브리파냐, 남자냐 여자냐, 종이냐 주인이냐, 뭐 이런 것 때문에 차별하거나 배척하면 안 된다. 만약 이렇게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배려하지 못하면,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교회는 살아온 배경이 다르고, 하나님 체험에 대한 경험이 다른 사람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에, 그 다름에서 오는 어쩔 수 없는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는 곳이다. 우리는 서로 다른 것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을 잘 알고 있었던 사도 바울도, 서신서에서 계속 강조하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일치다. 십자가를 중심으로 서로의 다른 것은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서로 협력하여 선을 이루라는 것이다. 다른 것은 그냥 다른 것이지, 틀린 것이 아니다. 이것이 잘 되면 교회는 성장한다. 그런데 이것이 잘 안 되면 교회는 어려워진다.

 

여러분에게 여쭙고 싶다. 교회를 사랑하시는가? 에베소서 5장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신다. 교회는 우리의 신랑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신랑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고, 우리가 교회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부다. 다 비유인데, 그만큼 교회는 소중하고 사랑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성숙이란, 나와 다른 것을 받아들이고 그것과 잘 지내는 능력을 말한다. 성숙한 사람, 성숙한 시민, 성숙한 사회, 우리는 성숙이라는 말을 통해 그 사람이, 그 사회가 얼마나 좋은 사람, 좋은 사회인가를 표현한다.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나와 다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기적인 모습으로 주변을 어렵게 한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은 성장통을 잘 이겨내고, 나와 다른 것을 잘 받아드리고 그것과 잘 지내며 화평을 이룬다.

 

위의 네 가지가 형통하면 교회는 성장통을 잘 이겨내고 잘 성장하게 된다. 복음 자체의 능력이 그대로 나타나길 기도하시라. 교회의 지도자인 목회자의 신변을 위해서 기도하시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할 마음에 사탄의 마음이 들어가지 않도록 부지런히 자기 자신을 살피시라.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 배려하고, 십자가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시라. 그러면, 교회는 건강하게 성장할 것이다. 교회가 성장통을 잘 이겨내고 잘 성장할 수 있도록, 두 팔을 넓게 벌려 기지개 한 번 켜시라.

 

* 실제 설교에서는 좀 더 보충해 가면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좀 더 확장된 설교를 들으시려면 아래를 클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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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