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4. 1. 26. 23:10

예수를 따르라

(마태복음 4:12-25)

 

예수님의 사역은 광야에서의 시험이 끝난 후, 세례 요한이 잡혔다는 소식과 함께 시작됩니다. 개구리가 크게 도약하기 위해서 몸을 움츠리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우선 고향인 갈릴리 나사렛으로 물러나셨다가,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하시는데,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서 사역을 시작하십니다. 그곳으로 아예 이사를 가십니다.

 

 

문학 용어에 복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나중에 터질 사건에 대해 암시하는 부분을 말합니다. 세례 요한이 잡혔다는 이야기는 복선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예수님도 잡히게 될 거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하신 곳인 가버나움은 인구 1000명 정도 되는 마을이었습니다. 그곳은 갈릴리 바다 북서쪽에 위치해 있었는데, 그곳의 주민들은 농사를 짓거나 고기잡이를 통해서 생계를 이어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받으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권력이 있거나 부자들과 함께 살지 않으시고, 그냥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서 사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예수님 당신의 사역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가버나움은 역사적으로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에 속한 마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그곳은 이방인들의 갈릴리라고 불렸는데, 로마에 의해서 점령 당했을 뿐만 아니라, 그곳을 통치하는 유대 지도자도 로마의 꼭두각시에 불과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 당시에 그곳을 다스리던 유대 지도자는 헤롯 안티파스라는 분봉왕이었는데, 그는 잔인하기로 유명했고 자신이 가진 권력을 이용하여 폭정을 일삼았습니다. 그러니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그곳에서 고통 받으며 사는 사람들에게 해방과 빛과 생명을 선포하기 위해서 그곳으로 들어가셨던 것입니다.

 

억압과 폭정이 난무하는 곳에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은 이것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17). 이는 앞서 32절에서 세례 요한이 선포한 말씀과 같습니다. 그런데 내용적으로는 같지만 상황은 매우 다릅니다. 요한은 길을 예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가 예비한 길로 온 바로 그이였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통치를 예비한 사람이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한 분이십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의 개념은 장소의 개념이 아닙니다. ‘통치의 개념입니다. 이점을 유념해야 합니다. 천국이 장소의 개념이면 천국을 죽어서 가는 어떤 곳이라고 생각하며 죽는 것이 낫다는 허무주의에 빠지겠지만, 천국이 통치의 개념이라는 것을 유념한다면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있으면, 바로 지금 이곳이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오해되는 개념 하나가 또 있습니다. 바로 회개하라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회개를 단순히 사과하는 것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쓰이고 있는 회개(metanoea, 메타노이아)’의 의미는 돌아서라(turn around)’입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단순히 후회하고 사과하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바꾸는 것이고 행동과 삶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첫 번째 장면은 예수님께서 시몬(베드로)과 그 형제 안드레를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해변을 거니시다가 시몬과 안드레 형제를 만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나를 따라오라라고 부르십니다. 그러한 부르심에 시몬과 안드레는 어떠한 질문도 제기하지 않고, “곧 그물을 버려 두고예수님을 따릅니다.

 

두 번째 장면도 마찬가지 입니다. 해변을 더 거니시다가 이번에는 야고보와 요한 형제를 만납니다. 그들에게도 동일한 일이 벌어집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그들은 지체하지 않고 즉시 아버지를 버려두고예수님을 따라 나섭니다.

 

첫 번째 장면은 새로운 삶으로의 부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새로운 삶은 고기를 낚는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의 삶입니다. 두 번째 장면은 새로운 공동체로의 부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의 문화 풍습으로 봤을 때 이것은 혁명적인 일입니다. 가족 공동체를 떠나, 예수의 공동체가 된다는 것은 그야말로 부르심에 대한 철저한 순종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있는 새로운 삶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제자도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나서는 것인데, 예수님께서 어디를 가시든 그의 뒤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시 응답하여 그 길을 따라나선 이들은 그 길을 걸으면서 쉽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에게 조명을 비추면서 마태복음을 읽어보면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 걸으면서 예수님을 이해하고 예수님께 순종하는데 수도 없이 실패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통 가운데 기도하실 때에도 저만치 떨어져서 잠자고 있었고, 예수님이 체포 당하셨을 때 도망쳤고, 심지어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중간에 가는 길이야 어쨌든 끝이 중요한 것인데, 마태복음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 보면 좌충우돌 하던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 부르심의 뜻에 합당한 삶으로 변화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참 은혜 되는 것은 제자들의 삶이 드라마틱 하게 변하게 되는 상황이 예수님을 처음 만난 갈릴리에서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287절을 보면 예수님의 무덤에 갔던 마리아 일행이 천사를 만나 메시지를 듣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메시지가 놀랍게도 이런 메시지였습니다.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제자들은 도망쳤지만, 예수님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도망친 제자들에게 다시 말씀하시는 겁니다. “회개하라!” , “방향을 돌려라, 방향을 돌려 처음 시작했던 곳으로 되돌아 오라!” 그곳이 어디입니까? 바로 갈릴리였습니다. 그들은 실패했지만, 다시 한 번 갈릴리에서, 실패한 바로 그곳에서, 다시 한 번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시고, 하나님의 통치가 어떤 것인지, 하나님의 통치에 의해서 형성될 새로운 삶, 그리고 새로운 공동체가 어떤 것인지를 몸소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르침 가운데, 복음 선포 가운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쳐 주시는 가운데,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추었다는 말씀을 실현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오늘,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회개하라 그리고 나를 따르라예수님께서는 삶의 방향을 틀어서 당신을 따르라고 우리를 부르시고 초청하십니다. 바로 여기가 갈릴리입니다. 혹시 본인이 지금 갈릴리에 있지 않다고 생각되시는 분은 먼저 갈릴리로 가신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부지런히 갈릴리로 가십시오.

 

마음이 어두우십니까? 빛으로 오신 예수님께 나아오십시오. 그 어두움이 물러갈 것입니다.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 때문에 삶이 고달프십니까? 하나님의 통치, 즉 천국을 실현하신 예수님께로 오십시오. 오늘 말씀 24절을 보십시오.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리고 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새로운 삶, 새로운 공동체로 방향을 트셨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처럼 세상에 나아가 하나님의 통치를 보이십시오. 억울한 자, 눌린 자, 가난한 자, 슬픈 자, 외로운 자, 병든 자 등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자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십시오.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셔서 그들을 자유케하시고 빛을 주시고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십시오. 우리 모두 예수님을 따라갑시다. 예수님을 따라 가면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선포합시다. “회개하라 천국이 임하였느니라!”

 

억울한 자, 눌린 자, 가난한 자, 슬픈 자, 외로운 자, 병든 자들

그들 모두 우리를 기다리고 있네 우리의 사랑 애타게 기다리고 있네

우린 그들 사랑한다 말하면서도 그들에 대해 아무 관심도 없네

우리 그들 사랑할 때 주님 기뻐하시네 그들 우리의 형제니

 

어린이, 노인들, 청소년, 약한 자, 강한 자, 있는 자, 없는 자

자신의 고통 속에 모두 울고 있네 주님의 구원 애타게 기다리고 있네

주님 바로 그들 위해 죽으셨건만 아직도 그들 모르고 있네

우리 주의 사랑으로 사랑할 때에 그들도 그 사랑 알겠네

 

주님 다시 오실 때에 우릴 심판하시리 우리의 믿음 우리의 사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행한 것으로 우리에게 갚아 주시리

 

~ 사랑하세 주의 사랑으로 사랑하세 주의 사랑

주님 우리를 통해 그들을 구원하시리

주님 우리를 통해 이 땅을 고쳐 주시리

/ 사랑하세, 최덕신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1. 19. 23:16

내가 만난 예수

(요 1:29-42)

 

오늘 말씀에서 요한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 양 (the Lamb of God)’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왜 그 많은 표현을 놓아두고, ‘어린 양을 들어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을까요? 도대체 하나님의 어린양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우리는 흔히 어린 양하면 이스라엘의 제사를 떠올립니다. 레위기서에 보면 제사법이 잘 나와 있는데,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어김 없이 등장하는 동물이 입니다. 그리고 성경 곳곳에서 은 수도 없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을 들어 예수님을 설명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친숙함을 느낍니다.

 

레위기서에 보면 제사에는 번제(the Burnt Offering), 소제(the Grain Offering), 속죄제(the Sin Offering), 그리고 속건제(the Guilt Offering)가 있습니다. 이 중에서 죄를 사하는 제사는 속죄제입니다. 우리가 흔히 가지고 있는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생각은 죄를 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한이 예수님을 어린 양으로 표현한 것은 이와 관련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레위기서에 나와 있는 제사법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속죄제에 쓰이는 어린 양은 수컷이 아니라, 암컷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남자였다는 사실과 잘 맞지 않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여자였다면, 예수님을 어린 양으로 표현한 것이 속죄제의 제물로 쓰인 것을 말하는 것일 텐데, 문제는 예수님께서는 남자였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어디에서 이 문제의 실마리를 풀 수 있는 단서를 찾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것을 창세기 22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22장에는 아브라함이 100세에 어렵게 얻은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확인하고자 고통스러운 명령을 내리신 하나님, 그리고 그 명령에 순종하는 아브라함, 그 가운데서 영문도 모르고 이런 질문을 하는 아들 이삭: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22:7). 아들의 심장을 파는 날카로운 질문에 아버지 아브라함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22:8).

 

여기서 이삭과 아브라함 사이에 오고 간 대화 중에 등장하는 은 번제물로 쓰일 양으로서 성별이 배제된 양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영어 성경은 이 양을 ‘sheep’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번제(the Burnt Offering)는 제물을 온전히 태워서 하나님께 바치는 제사로서,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번제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앙을 표현할 때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아들을 제물 삼아 번제를 드리려 했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야말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었습니다.

 

요한이 예수님을 어린 양으로 표현한 것에 대한 의문이 좀 풀리는 것 같습니다. 요한은 좀 더 큰 틀에서 예수님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죠. 예수님을 단순히 죄사함의 제물로만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연관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앙을 총체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다음 말씀이 이것을 뒷받침 해줍니다.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기를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30).

 

이는 예수님이 단순한 죄사함의 제물 이상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선재성이라고 하는데, 요한이 말하고 있듯이, 그리스도는 모든 만물보다 먼저 계신 이라는 뜻입니다. 누가복음의 기사를 통해서 알고 있듯이, 예수님은 요한 보다 몇 개월 늦게 잉태됩니다. , 요한의 생일이 예수님의 생일보다 빠릅니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나보다 뒤에 오시는 사람이라고 표현한 겁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지 않고 요한은 그 사람이 본인 보다 앞서는데, 그 이유를 나보다 먼저 계시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단순한 사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34절에서 요한이 증거하듯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보는 것입니다.

 

이쯤에서 우리는 한 가지 더 도전적인 문장을 접하게 됩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31).

 

요한이 베푼 세례는 기본적으로 죄사함을 위한 세례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다는 겁니다. 이것은 굉장히 모순된 행동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다면 예수님은 스스로 죄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셨을까요? 그에 대한 대답이 바로 이 문장에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이 받은 세례는 죄사함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고양(lifting up) 또는 드러냄(revelation)’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민수기에 나오는 불뱀사건과 연관됩니다.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예수를 증언하기 위해서 구약성경을 줄기차게 사용합니다. 유대교인이 아닌 기독교인이 구약성경을 경전으로 받아 들고 읽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잘 모르면, 신약성경에서 증거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불뱀 사건은 민수기서 21장에 나옵니다. 가나안 땅으로 행진하고 있는 중, 이스라엘 백성은 길이 험한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여 하나님과 모세에게 원망을 퍼붓습니다. “어찌하여 우리는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21:5). 이런 원망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심판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뱀에 물려 죽어 나가자,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고 모세에게 살려달라고 합니다. 모세는 백성들의 뜻을 하나님께 전하는데, 그 기도에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셔서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라고 하시고, “물린 자마다 그것을 쳐다보면 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세례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에 나타나신다는 요한의 진술은 이 불뱀 이야기를 떠오르게 합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불뱀(놋뱀)을 장대 위에 매달아 높이 올린 것처럼 그래서 그것을 쳐다본 이들이 죄사함을 얻고 구원 받은 것처럼, 십자가에 매달려 높이 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이들(믿는 이들)’이 죄사함을 받고 구원 받는 것을 말해줍니다.

 

요한의 이러한 증언을 통하여 예수님이 누구인지 밝혀집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여 바쳤던 이삭과 같은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하나님께 범죄하여 죽을 위기에 처했던 이스라엘을 구원했던 장대에 높이 달린 불뱀과 같이 십자가에 높이 달린 구원자입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한 것은 하나님의 어린 양인 예수님 당신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 예수님이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구원은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베푸시는 신적 능력입니다. 그 구원의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났다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몸을 입으신 어린 양이심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능력을 베푸시는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튿날, 요한의 제자 두 명이 하나님의 어린 양인 예수님을 만납니다. 요한의 제자 두 명은 예수님을 만난 뒤 요한을 떠나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요한을 떠나 자신을 따르는 요한의 두 제자를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무엇을 구하느냐? (What do you want?)” 그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머물기를 청합니다.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사귐을 갖기 원했던 것이죠. 그리고 그 제자들은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사귐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인지 깨닫고, 그 중 한 명(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이 자신의 형제(베드로)에게 달려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요한이 만난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었습니다. 구원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안드레와 베드로가 만난 예수님은 메시야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메시야(그리스도)’로 고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 말은 예수님은 메시야이시다!”라는 고백의 줄임말입니다.

 

여러분이 만난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요한이 만나고, 안드레가 만나고, 베드로가 만났던 예수님이 여러분에게도 메시야, 그리스도로 고백되십니까? 저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시다!” 이것이 제가 만난 예수님입니다.

 

주님 날 위해지신 십자가

허물 많은 내 삶에 늘 흐르며

죽었던 내 영혼 살리시네

메마른 나의 맘을 적시네

내가 만난 가장 큰 사랑 예수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으니

이제 내가 사는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분이 사는 것

내가 만난 가장 큰 용서 예수

 

세상 모든 어둠 힘을 잃고

우리 가진 모든 일 녹아지리라

어떻게 그분 닮을 수 있을까

어떻게 그길 걸을 수 있나

내가 만난 가장 큰 이름 예수

 

/ 꿈이 있는 자유, 한웅재 곡

 

Posted by 장준식

언어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인간에게 언어가 주어졌다는 것은 언어가 가리키는 달의 세계가 있다는 증거다. 그런데 인간은 언어가 가리키는 달을 보지 못하고, 언어 자체의 유희에 빠져 있을 때가 많다. 아니, 언어의 장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언어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가령, ‘종말이라는 언어를 생각해 보자. 종말이 담고 있는 언어의 뜻은 세상의 마지막 날정도다. 그런데 세상의 마지막 날이 도대체 뭐가 어쨌다는 것인지, ‘종말이라는 언어에만 빠져 있으면 세상의 마지막 날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우리는 언어 종말이 가리키는 달의 세계를 탐구해야만 한다. 그래야 종말이 가리키는 달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신학적으로 종말은 하나님이 온전히 드러나시는 때를 가리킨다. 그렇기 때문에 종말은 심판의 때로도 불린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불러 줄세워 놓고 정죄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빛이신 하나님 앞에 모든 만물이 벌거벗겨진 채 서게 된다는 뜻이다. 그 빛을 감당할 자 누구랴! 종말에 어떠한 일이 있을지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종말론적 인물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종말론적 사건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종말론적 사건이기 때문에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현재의 사건으로 받아 들일 수 있는 길은 믿음밖에 없다고 성경은 증거한다. 히브리서 저자가 밝히고 있듯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오직 믿음만이 종말의 세계를 긍정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하니, 좀 허무하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난 종말론적 사건을 긍정할 수 있는 좀 더 강력한 수단(증거)을 원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허락하신 수단은 믿음이외에는 없다. 그래서 믿는다는 것은 때로는 허공을 치는 것 같이 공허하고 불안하다.

 

하나님의 약속은 확실하지만, 인간의 믿음은 불안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기도뿐이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이렇게 기도할 때, 인간의 불안한 믿음이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이 인간의 불안한 믿음을 붙들어 주신다. 그래서 구원은 언제나 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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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1. 13. 10:08

빛이 되라 말씀이 십자가다

(이사야 42:1-9)

 

하나님 말씀은 언제나 급진적이고 파격적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보수적이고 고착화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변화를 싫어하고 어딘가에 안주하고 싶어하고, 자신이 가진 것을 내놓기 싫어하고 집착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야가 좁습니다. 아는 만큼만 알고, 오른 만큼만 보고, 이해한 만큼만 믿습니다. 인간은 우물 안 개구리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인생을 살다 갑니다. 이런 인간에게 하나님은 우물 안을 벗어나, 새로운 세상, 넓은 세상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경험은 매우 역사적입니다. 역사가 깊다는 뜻이 아니라,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경험은 출애굽 사건에서 비롯됩니다. 이스라엘에게 출애굽 사건은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출애굽 한 후,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자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광야를 거쳐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 정착해 삽니다. 거기서 이들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를 이루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을 짓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이들은 주변 나라들과의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척박한 땅에서 기근을 면하며 풍요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다 길을 잃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잊어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언약에 나와 있는 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바벨론이라는 이방 나라에 나라가 망한 것입니다.

 

우리는 합법적인 이민자들이기 때문에 미국 땅에 와서 사는 것이 그런대로 괜찮지만, 불법적인 이민자들만 해도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이 녹록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나라를 잃고 포로의 신세로 이국 땅에 잡혀 와서 산다는 것은 그야말로 지옥 같은 경험입니다. 적들의 손에 넘겨져 치욕을 당하고 삶의 터전이 파괴당하고, 쇠사슬에 묶여 끌려가는 곤욕 속에서 이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돌아보며 질문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까지 이어졌습니다. “하나님은 뭐하시는가? 계시기는 하는가?”

 

이렇게 절박한 상황 속에서 이토록 절박한 질문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사야 선지자는 매우 급진적이고 파격적인 메시지를 전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 그리고 그분이 어떻게 일하시는 지를 상기시킵니다. 이 일은 이스라엘 백성의 시야를 넓혀 주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카메라로 따지면, Zoom Out 기능을 이용하여, 특정 부위만 보다가 더 넓게 앵글을 잡는 것과 같습니다. 우물 안에 있던 개구리를 우물 바깥으로 꺼내주는 것과 같습니다. 나무만 보던 눈을 숲을 보도록 시야를 넓혀 주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내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영을 주시는 분입니다(5). 이것을 창조신앙이라고 합니다. 창조신앙을 가진 자만이 편협한 시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 이스라엘을 포로로 잡아온 바빌론의 하나님도 됩니다. 하나님의 영은 이스라엘만 살아 숨쉬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지으신 모든 만물을 살아 숨쉬게 합니다. 다른 하나님이 아니라, 온 우주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불러 특별한 백성이 되게 하시고, 이들에게 의로운 세상을 열도록 부르셨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의로운 세상을 열도록 부르신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특별한 방법으로 일하십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으로 가득 찬 종을 보내십니다. 이 종은 정복자나 독재자가 아닌, 정의를 베푸는 해방자입니다. 이 종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습니다. , 병들고, 힘 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거나 못살게 굴거나 필요 없다고 무시하고 죽여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 새삶을 열어주고, 그들을 오히려 섬겨줍니다.

 

요즘 2차 대전 당시 일본의 731부대의 죄악이 언론을 전세계에 낱낱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화학무기를 개발하기 위해서 중국인, 조선인, 러시아인들을 잡아 생체실험을 한 기록들이 발견되었고, 그것을 언론에서는 공개했습니다. 정복자나 독재자는 상한 갈대를 꺾고, 꺼져가는 등불을 끕니다. 생명에 대한 경외심이 없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생명을 하찮은 개미처럼 생각합니다. 이런 일이 그때만 벌어진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도 세상 곳곳에서, 심지어 가장 민주주의가 발달됐다고 자부하는 미국에서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내신 당신의 영으로 가득 찬 종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만물을 사랑하고, 오히려 그것들을 위해서 당신의 생명을 내어놓습니다. 그래서 만물을 살리시고 만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정의를 이 땅 위에 가져오시는데, 그 정의는 어느 한 곳에 치중되어 시행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땅 위에(섬들에게까지)서 시행됩니다. 이 정의를 베푸는 하나님의 종은 정의가 온전히 펼쳐질 때까지 인내합니다. 정의를 펼치다 낙담하거나 실망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라는 말을 이사야 선지자가 힘주어 말하는 이유는, 정의를 행하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정의를 행하다 결국 쇠하고 낙담합니다. 인간에게는 의협심이라는 것이 있어서 일시적으로 정의로운 일에 가담하고 정의를 갈망하고 외치지만, 그것을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행하는 일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으로 가득 찬 사람은 정의를 행하면서 당하는 어려움 때문에 쇠하거나 낙담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어떠한 사람이 하나님의 영으로 가득 찬 사람인가 아닌가를 판가름 하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영으로 가득 찬 사람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서 정의를 행하시면서 많은 어려움을 당하셨습니다. 결국 그것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쇠하거나 낙담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자에게 부활이 임합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목표를 주십니다.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6-7).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만이 의로워지시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통하여 모든 나라가 의로워지기를 바랐습니다. 그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일하고 계신다고, 그들 가운데서 일 하고 계신다고 이사야 선지자는 선포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것이 가장 이해하기 힘든 상황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에게 안 좋은 일이 닥치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슬픔 가운데 빠집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바벨론이라는 이방 나라에 의해서 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잡혀와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본인들을 버린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 일하고 계신다는 것은 웬만해선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복의 근원으로, 제사장 나라로 택하신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당신의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원래의 그 역할, 복의 근원과 제사장 나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길을 내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이스라엘을 언약 백성과 빛으로 삼아, 눈먼 자들을 밝히고, 갇힌 자들을 옥에서 이끌어 내고, 흑암에 앉은 자들을 감방에서 나오게 하십니다. 지금 현재의 이스라엘의 처지가 비참해 보여도, 그것은 좁은 눈으로 봤을 때만 그럴 뿐이지, 우주적인 관점에서 시야를 넓혀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상황 가운데서도 당신의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고 그들을 통해 역사하신다는 겁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수세주일이기도 하고, 교회적으로는 임직 예배를 드리는 날이기도 합니다. 교회력은 오늘을 수세주일로 기념하는데,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예수님의 정체성을 세상에 드러내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성육신하여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같이 되셨지만,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세례를 통하여 그 사실이 온 세상에 드러납니다. 그 정황이 오늘 같이 읽도록 되어 있는 마태복음 3장의 말씀에 잘 나와 있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3:16-17).

 

이것을 시작으로 소위 말하는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됩니다. 감추어진 것이 드러나면서 본격적인 사역이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세례라는 것은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죄사함과 구원의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지만, 이제부터 신앙생활을 사적이 아니라, ‘공적으로 하겠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공적으로 신앙생활 한다는 것은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가득 찬그리스도인으로서 병들고, 힘 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거나 못살게 굴거나 필요 없다고 무시하고 죽여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 새삶을 열어주고, 그들을 오히려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일을 하면서 쇠하거나 낙망하지 말아야 하고,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며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본인을 포기하신 것이 아니라, 최악의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통해 주변 사람들에게 복을 베풀기 원하시고, 거룩하게 하길 원하신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세례 받는 것을 넘어, 집사로 권사로 세움을 받는다는 것은 그 영성이 한 단계 더 성숙해져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충만한 사람이 되어, 더 섬기고, 더 복의 근원이 되고, 더 거룩하고, 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세례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가 받은 세례를 돌아보고, 임직식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가 받은 직분에 대하여 다시 한 번 돌아봅니다. 주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세상의 빛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빛으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습니까? 마태복음 1624절에서 우리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더 이상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지 않고, 예수님께 그리고 이웃에게 시선을 돌린다는 뜻입니다. 이게 잘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늘,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느라, 시간을 쓰고 물질을 씁니다.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하느라, 상한 갈대를 꺾어 버리고 꺼져가는 등불을 꺼버립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는다는 것, 직분을 받는다는 것은, 이러한 삶을 십자가에 못박고,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부르심입니다.

 

십자가는 나무로 된 저것이 십자가가 아닙니다. 나무로 된 십자가는 누구든지 짊어질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나무로 된 것이 아니라, 말씀이 곧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짊어지고 가는 것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빛이 되라! 이 십자가를 짊어지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인 십자가를 짊어질 때, 새 일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입니다.

 

Posted by 장준식

아침, 그리스도, 부활, 생각

 

안셀름 그륀의 <축복>이라는 책을 읽다가 다음과 같은 문장을 발견했다. “아침이면 그리스도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생각합니다”(8). 아침, 그리스도, 부활, 생각이라는 네 개의 단어로 된 문장이지만, 이 단어들이 가리키고 있는 세계는 참으로 크고 깊다.

 

한국 교회의 독특한 문화는 새벽기도.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해 뜨기 전 교회당에 모여 저마다의 소망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기도한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행동을 신학적으로 살피지 않는다. 그저 신앙인으로서 해야 할 의무 정도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신앙의 깊이에 대한 잣대라고 생각한다.

 

성경은 자주 빛이라는 그림언어를 써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표현한다. 특별히 요한복음은 말씀과 빛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리스도를 성육신한 말씀으로, 어두운 이 땅에 임한 빛으로 소개한다. 기독교는 이 세상의 것으로 세상 너머에 있는 실재를 설명할 수 밖에 없다 보니,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을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와 연관시킨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크리스마스다. 로마인들이 섬기던 태양신의 날, 1225일이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지정된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의 가슴에 그리스도는 빛으로 오셨다는 믿음이 각인되어 있다.

 

떠오르는 태양은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그리스도인이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는 이유는 공적을 쌓거나 복을 빌기 위함이 아니라,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새롭게 주어진 하루를 그분의 제자로서 세상의 빛으로 살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십자가 처형으로 칠흙 같은 어둠에 떨어지셨지만,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서 다시 살아나셨다. 사망이라는 어둠을 이기시고, 빛으로 부활하셨다.

 

아침마다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묵상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의 삶 가운데 임하는 어떠한 어둠도 그들을 덮지 못할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 어둠을 물리쳐 주실 거라는 믿음 가운데 하루를 희망차게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대, 그리스도인인가? 그렇다면, 아침마다 이불 속에서 잠과 씨름하지 말고, 일찍 일어나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하며 그리스도의 부활을 생각하라. 그러면 그대의 삶에 이 비추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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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1. 9. 04:42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냉소에서 희망으로

창세기 15

(창세기 18:1-15)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아브라함이 손님을 잘 대접해서 복 받은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손님을 잘 대접하면 복 받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손대접하기(Hospitality)’가 기독교인들의 윤리이긴 하지만, 오늘 말씀은 단순히 손대접하기의 진수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 진수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왕국을 형성해서 성전을 지어 그곳에서 예배를 드린 것과 요즘 우리들이 이렇게 모여서 예배 드리는 것을 생각하면서 아브라함의 예배를 들여다 보면 아브라함의 예배는 예배 같지 않습니다. 우선, 아브라함의 예배는 공간의 존재가 없습니다(No Building). 아브라함의 예배는 공간의 예배가 아니라, 장소의 예배였습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이 되고 있는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은 이전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던 곳이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제단을 쌓았던 곳입니다.

 

아브라함 시대(족장시대)에는 예배를 드리는 성전같은 것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본인을 나타내신(현현) 곳이 곧 예배의 장소였습니다. 이후에 야곱도 형 에서를 피해 하란 땅으로 가다가 벧엘이라는 곳에서 하나님의 현현을 경험한 후 바로 그곳에 제단을 쌓습니다. 사실, 성전신앙이 자리 잡은 후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좀처럼 피어나지 못했습니다. 형식적이고 의무적인 측면에서 예배를 드리긴 했어도, 삶의 곳곳이 곧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가 될 수 있다는 보편적 임재의 의식이 사라지다 보니, 신앙 자체가 형해화되었습니다.

 

이러한 형해화 된 신앙은 우리도 체험합니다. 예배는 그저 교회당에 와서만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교회당에서는 거룩한 모습으로 거룩한 예배를 드리는데(하나님께 예배당에서만 잘 보이면 된다는 의식), 교회당 밖에만 나서면 전혀 거룩한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는 세상 속의 인간으로 살아가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습니다.

 

요즘 우리들이 회복해야 할 예배의 영성은 성전예배가 아니라, 삶의 예배입니다. 다른 말로 아브라함 예배 또는 족장 예배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족장들)에게 예배는 닫혀 있는 공간에서의 퍼포먼스가 아니라 열려 있는 공간에서의 살아 있는 체험 그 자체였습니다.

 

이것은 예배를 드리는 우리들이 예배를 통해서 기대하게 되는 기대치를 다르게 합니다. 예배가 닫혀 있는 공간에서의 퍼포먼스로 전락하면 예배는 일종의 엔터테인먼트로 변하게 됩니다. 예배 드리는 자는 예배 받는 자를 만족시키면 그만이고, 예배 드리는 자는 자신들의 예배를 통해서 자족하면 그만입니다. 예배 드리는 자와 예배를 받는 자 사이의 인격적인 사귐 같은 것은 필요 없게 됩니다. 의무를 다했다는 생각이 더 이상의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게 합니다. 인격적 사귐이 없는 존재들 사이에는 기대치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저 각자의 일을 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경우에서처럼 예배가 열려 있는 공간에서의 살아 있는 체험으로 다가오면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예배는 하나님의 현현 그 자체였습니다. 하나님의 현현은 계시적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계시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드러내신다는 것을 말하는데, 하나님이 드러나신다는 것(내재적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경륜적 하나님)이 드러나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신 말씀 그리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은 일치를 이룹니다. 존재와 말과 행동이 언제나 다르게 노는 우리 인간이 이해하기 힘든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이렇듯,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현현을 기대하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기대하는 것이 없으니까 예배도 퍼포먼스 형태로 드리고 말지만, 아브라함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현현을 기대했기 때문에 삶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현현, 하나님의 계시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제단을 쌓으면(예배 드리면), 어떠한 징조가 있을 것인데, 그 때 그것을 포착할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제단을 쌓은(예배를 드린 그래서 하나님의 현현을 경험했던) 아브라함은 무더위 가운데서도 어떠한 징조를 놓치지 않기 위해 장막 문 앞에 앉아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 나타난 징조를 놓치지 않습니다.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 편에 서 있는지라”(2a).

 

기대가 없는 사람,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현현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 앞에 서 있는 징조를 포착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현현을 기대하는 믿음의 사람은 절대로 징조를 놓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반응을 보십시오.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 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2b).

 

제단을 쌓아(예배를 드려) 참되신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 열정을 지닌 참된 예배자의 자세를 보십시오. 그 어디에서도 교만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몸을 땅에 굽히고, 자신 앞에 선 세 사람에게 주여라는 호칭을 쓰며, 자기 자신은 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있는 분이고, 나는 땅에 있는 존재라는 것을 철저하게 인식한 믿음의 사람은 절대로 자기 자신을 스스로 높이지 않습니다. 땅에 있는 우리는 죽을 때까지 스스로 낮추어야 합니다. 우리는 낮추고, 하나님은 높이십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높일 때 부끄러움을 당하지만,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낮추고 하나님께서 높여 주실 때 우리의 삶은 영광스러워집니다. 우리는 사랑하고 용서하는 일만 해야 합니다. 정죄하는 것은 하나님만 하십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용서하는 일을 그치고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정죄할 때, 거기에는 죄악이 풍기는 썩은 내만 날뿐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낮추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다음 구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현현 앞에서 절대로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함부로 나열하며 자신의 싸구려 욕망을 드러내 보이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손님들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나열합니다. 더운 날씨에 여행 중인 손님들에게 필요한 것은 발을 씻는 것과 나무 그늘 아래에서 쉬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픈 배를 채우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시선이 자기 자신에게 가 있지 않고, 오직 손님들에게 가 있습니다.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데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이 마음이 진심이라는 것은 아브라함이 어떻게 음식을 내오는지를 살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손님들을 나무 그늘 아래 모셔놓고, 아브라함은 급히 장막으로 달려가 음식 준비를 합니다. “고운 가루 세 아스를 가져다가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지금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예배 시간이 아닙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음식을 만들기 위해서 쓰는 재료는 모두 제사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제물로 드릴 때 사용되는 것들입니다. ‘고운 가루와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 아브라함에게 따로 떼어낸 예배 시간과 삶이 구별되고 있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삶 자체가 예배의 모습을 띠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운 가루와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로 만든 음식을 가져다가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 아래에 쉬고 있는 손님들을 대접하는 모습은 영락 없이 예배를 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에게 집중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 집중한 아브라함의 삶은 이제 드라마틱한 변화를 보게 됩니다.

 

식사를 마친 손님들은 아브라함에게 묻습니다.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지금 아브라함 가정의 최대 이슈는 자손의 출산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 가정의 사사로운 소망이 아니라, 아브라함 가정을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겁니다. 신앙은 하나님에게 집중하는 것이지, 나에게 집중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란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루어, 하나님의 뜻이 내 삶에 이루어지는 것을 바라는 것이지, 내 욕망을 채우는 행위가 아닙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여기에서 자꾸 걸려 넘어집니다. 우리는 예배 드릴 때 조차도 우리 자신에게만 집중합니다. 온통 나 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니 귀가 닫히고 눈이 닫힙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말씀하셔도 들리지 않고, 하나님이 아무리 일하셔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의 일치를 통해 하나님에게 집중하게 된다면 비로소 우리 삶에서 이루실 하나님의 뜻이 들리고 보이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집중했던 아브라함에게 들린 음성을 보십시오.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이것이 현현이고, 계시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네 인생이 가장 바라는 것이 이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 놀라운 순간, 하나님의 계시를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숨겨져 있던 것이 드러났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냉소주의입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냉소주의, ‘그게 되겠어?’ 냉소주의는 믿음 없음의 다른 말입니다.

 

사라의 냉소를 보십시오. “사라는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12). 비웃음, 냉소, 불신이 가득 찬 마음은 드러난 하나님의 뜻조차 발로 차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14a). 여호와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 일이라면, 하나님께 어려운 일은 없으며, 하나님께서는 그 입으로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신 적이 없으십니다. 꼭 이루십니다.

 

엘샤다이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냉소를 희망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사라의 웃음은 냉소의 웃음이었으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라고 할 때의 웃음은 희망의 웃음입니다. , ‘네가 지금은 그렇게 냉소적으로 웃고 있으나, 내 뜻이 이루어지는 그 때에는 그 웃음이 기쁨의 웃음으로 변할 것이다!’라는 선포인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삶 가운데, 비웃고 싶은, 냉소적으로 감정을 표현하고 싶은 막막한 일이 있으십니까? 그 문제에 매여 있지 마시고, 우리의 구원자 되신, 엘샤다이의 하나님에게로 시선을 돌려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보여준 절차를 따라, 퍼포먼스의 예배가 아닌 삶의 예배를 정성스럽게 드리면, 여러분의 냉소가 기쁨으로 변할 것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있는 사람이 그분을 불신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냉소를 희망으로 바꾸어 주시는 엘샤다이의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불신을 믿음으로 바꾸십시오. ‘내년 이맘때’, 다시 말해, ‘웃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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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1. 6. 00:01

당신은 하나님의 백성입니까?

(이사야 43:1-21)

 

새해가 밝았습니다. 한국은 올해를 갑오년이라고 부릅니다. ‘갑오년하면 120년전인 1894년에 있었던 갑오개혁이 생각납니다. 특별히 갑오농민혁명을 이끌었던 녹두장군 전봉준이라는 분이 생각납니다. 그 분이 지은 <새야, 새야 파랑새야>라는 시는 매우 유명합니다. 갑오년을 맞아 한 번 낭송하겠습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 꽃이 떨어지면 청포 장수 울고 간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 잎에 앉은 새야

녹두 잎이 깐닥 하면 너 죽을 줄 왜 모르니

 

새야, 새야 파랑새야 너 뭣 하러 나왔느냐

솔잎 댓잎 푸릇푸릇 하절인 줄 알았더니

 

백설이 펄펄 엄동설한이 되었구나.

 

파랑새는 희망을 나타냅니다. 그것도 그냥 희망이 아니라 구슬픈 희망입니다. 마음 속 깊이 묻혀 있는 간절한 소망입니다. 여러분 중에 닛산 자동차를 타고 다니시는 분이 계실 텐데, 일본어 닛산이 바로 파랑새(Bluebird)’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닛산 자동차를 탄다는 것은 파랑새, 즉 희망을 탄다는 뜻이죠. (저는 닛산 자동차 판매원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 희망 가운데, 또는 한 가지 희망 가운데 새로운 해를 시작하셨을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새해에 우리가 가져야 할 희망이 무엇인지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 되기입니다.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백성입니까?” 우리는 말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대답하면서도 실제로 하나님의 백성처럼 살아가지 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잘 모르고 삽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백성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가르침을 주고, 그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을 부를 때, ‘야곱아, 이스라엘아라는 명칭이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의 명칭인데, 신약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부를 때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를 그리스도, 주님, 메시야, 왕으로 고백하고 그를 따르는 무리에게 붙여진 명칭입니다. 구체적으로 사도행전 1126절에 나옵니다. “바나바가 사울(바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야곱으로서, 이스라엘으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 대하여 독특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바로 창조신앙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말씀하시느니라.” 하나님은 그냥 하나님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인데, 그 하나님이 그냥 하나님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것은 매우 절대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택함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택하시는 것은 그가 창조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가리킵니다.

 

부모 자식 간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부모는 자식에 대하여 절대적인 주권을 가집니다. 물론 부모가 없을 때 조부모나, 백부(삼촌), 고모, 이모 등이 아이들의 법적인 대리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었다고 생각했던 부모가 살아 돌아오면 부모 앞에서 다른 법적 대리인은 아무런 힘을 갖지 못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그냥 하나님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것은 우리를 부르시는 것, 즉 택함에 대하여 절대적인 주권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냥 백성이 아니라, 택함 받은 백성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매우 특별하게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을 일컬어 선민이라고 했습니다. 영어로 ‘chosen people’이라고 합니다. ‘택함 받은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그 택함 받은 백성에 대해서 오늘 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7)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10)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도조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20)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내가 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해주셔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나를 택해 주시는 하나님이 그냥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택해 당신의 백성 삼아 주신 것은 매우 큰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누리는 복에 대해서 말해 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구속 redemption’의 복입니다. 구속은 어디로부터 해방시켜 주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자유케 하셨다는 뜻입니다. 스티븐 킹(Stephen King)의 소설을 바탕으로 팀 로빈슨(Tim Robbins)과 모건 프리먼(Morgan Freeman)을 주연으로 해서 1994년에 만들어진 <쇼생크 탈출>이라는 영화도 영어로 <Shawshank Redemption>이라고 합니다. 멜 깁슨이 주연한 <브레이브 하트>라는 영화에서 스코틀랜드의 해방을 꿈꾸는 주인공이 마지막에 죽으면서 이 한 마디를 외치며 죽습니다. “Freedom! 자유!” 자유를 향한 인간의 열망은 그 어떤 욕구보다 더 깊은 욕구입니다. 자유는 모든 욕구의 기초입니다. 배고픔으로부터의 자유, 성욕으로부터의 자유, 이런 욕구뿐만이 아니라, 사회, 정치, 경제, 문화적인 모든 면에서 우리 인간은 어딘가에 속박되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하다못해 아이들도 좀 크면 부모들로부터 자유를 얻으려고 갈망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신앙으로 속박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신앙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참 자유를 누린다는 뜻입니다. 혹시 여러분의 삶 가운데 여러분의 자유를 빼앗는 그 무엇이 있거든, 바로 거기로부터 구속해 달라고, 해방시켜 달라고, 자유케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십시오. 당신의 백성을 구속하시는 하나님, 당신의 백성을 해방시키시고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께서, 자유를 갈망하는 여러분에게 참 자유를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자유는 우리의 욕망을 채우는 방식으로 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욕망을 비우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임합니다.

 

이 시대 최고의 영성가 중 한 명인 안셀름 그륀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거룩해진다는 것은 세상의 힘에 굴복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기를 바라는 것을 뜻합니다. 하느님과 일치하면서 그분에 의해 거룩해지기를 바라는 사람은 진정으로, 그리고 온전히 구원받을 것입니다”(치유, 71)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우리의 소망을 이루어 주옵소서.’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주님, 모든 것이 당신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 얼마나 어려운 고백입니까? 겟세마네의 피땀 기도가 없다면 불가능한 고백입니다. 솔직히, 우리는 우리의 소망을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을 기대하지,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내놓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히 보여야 할 거룩한 모습은 언제나 묘연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의 욕망에 사로잡혀 거룩함을 잃고 방황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속박된 그곳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으시거든, 여러분의 욕망을 채우는 방식으로 기도를 드리지 마시고, 거룩한 기도, 즉 우리를 백성으로 택해주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참 자유를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내리시는 복 중, 오늘 말씀을 읽기만 해도 은혜 되는 복이 있습니다. 2절 말씀입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랄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라!” 또한 4절 말씀도 보십시오.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니라!”

 

그리고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은 다음과 같은 복을 누립니다. 19절 말씀입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라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라!”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새 일의 혜택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이루신 새 일(a new thing)’이 무엇인지 압니다.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라!” 우리는 그 길을 걸어가고, 그 물을 마십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예수는 진리의 길이다! 예수는 생명의 물이다!’ 예수님은 당신을 걸으라고 우리를 초대하고, 자신을 마시라고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 놓으셨습니다. 바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렇게 만복을 누린 하나님의 백성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오늘 말씀은 이렇게 가르쳐 줍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21).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나이 많은 어느 목수가 은퇴할 때가 되었다 생각하고 고용주를 찾아가나이가 많아 더 이상 일을 하지 않고 자신의 가족과 함께 편히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고용주는 가족들의 생계가 걱정되지 않느냐면서 더 일하라고 극구 말렸지만 그 목수는 자기의 주장을 꺾지 않고일을 그만 두겠다일을 그만 두더라도 앞으로도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고용주는훌륭한 일꾼을 잃게 되어 무척 유감이라고 말하면서마지막으로 손수 집을 한 채만 더 지어 줄 수 없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목수는 그 고용주의 부탁을 뿌리칠 수 없어그렇게 하겠다고 대답은 했지만 그의 마음은 벌써 고용주를 떠나 있었고 집 짓는 것도 내키지 않는 일로 치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목수는 임금을 적게 주어도 될 형편 없는 인부들을 고용하였고 건축자재 또한 무성의하게 조잡한 것을 구입하여 집을 지었습니다.

 

집이 완성 되자 고용주가 집을 보러 왔습니다. 엉성하게 지었기 때문에 자세히 살피면 그 집이 잘못 지어진 것임을 눈치 챌 수 있었지만 그 고용주는 집을 자세히 둘러 보지도 않았습니다. 그 목수는 마음이 조마조마 했지만 집을 자세히 검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말 운이 좋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기뻐했습니다.

 

고용주가 목수에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당신의 집입니다. 당신이 나를 위해 여러 해 일을 해 주었기 때문에 고마운 마음으로 보답하는 의미에서 이 집을 드립니다.“하고는 현관 열쇠를 그에게 쥐어주었습니다.

 

목수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주인의 통 큰 보답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받은 더 큰 충격은 집을 한 채 선물로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아무렇게 집을 지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마도 몇 년이 채 지나지도 않아서 대폭 수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란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어리석은 목수가 전에 했던 것처럼 자신의 경험을 살리고 정성을 다해 집을 지었다면 100년이 더 갈 튼튼한 집을 지었을 것입니다. 그 목수는 마지막 순간에 그런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갑오년을 맞아, 처음에 갑오개혁을 생각하며 녹두장군의 파랑새를 읽었듯이, 갑오년 새해를 시작하면서 신앙인으로,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개혁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를 한 번 돌아보면, 우리는 위에 등장하는 마음 떠난 목수처럼’, '마음 내키지 않는 목수처럼'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을 얼마나 엉성하게 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 남을 위한 일이라고만 생각하지, 결국 나 자신을 위한 일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만,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예배 드린다고만 생각하지, 결국 이 예배를 통해서 혜택을 받는 것은 우리 자신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합니다. 집을 정성스럽게 지은 만큼 그 혜택을 목수가 보게 되는 것처럼, 예배를 정성스럽게 드린 만큼 그 혜택을 우리 자신이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그렇습니다. 좋은 것 먹고, 운동 열심히 하는 것만이 나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새로운 계명을 주셨듯이,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하신 계명에 입각한, 하나님을 위하고 이웃을 위한 모든 일이, 결국 나 자신을 위한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는 목수처럼 하루를 짓고 한 달을 짓고 한 해를 지으며 살아나가고 있습니다. 성의 없이 지은 모든 세월들이 원망과 한탄으로 얼룩지지 않도록 오늘 이 하루를 성실과 감사로 지어나가야겠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당신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텍스트 너머에 세계가 있다. 그 세계를 어떻게 알아차릴 것이며, 알아차린 그 세계를 어떻게 지금이 언어로 풀어낼 것인가? 이것은 설교자의 과제이다. 나는 텍스트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세계를 확실히 본 것 처럼 자신하며, 텍스트 너머의 희미한 세계를 확실한 언어로 전달하는 설교자가 가장 무섭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텍스트 너머의 세계가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것'같이 확실하게 드러나는 때는 종말의 때이다. 종말이 아직 오지 않았으니, 우리는 그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게'만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텍스트 너머의 희미한 세계를 보고 그 세계를 오늘의 언어로 풀어내야만 하는 설교자의 직무는 참으로 고단하고 미련하고, 어쩌면 불가능하다. 그러나 설교자로 부르신 그분의 뜻 가운데 설교자에게 그 직무가 주어졌다는 것 때문에 설교자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강단에 설 수 밖에 없다. 나는 무서운 설교자가 아닌, 부족해서 겸손할 수 밖에 없는 설교자로, 강단에 겨우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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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12. 22. 23:36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

(이사야 7:1-16)

 

아하스는 남유다 요담 왕의 아들이고 히스기야의 아버지였습니다. 열왕기하 15장에서 20장에 걸쳐 요담, 아하스 그리고 히스기야의 통치에 대한 평가가 내려져 있는데, 아하스의 아버지 요담에 대한 평가는 그렇게 나쁘지 않습니다. “요담이 그의 아버지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왕하 15:34). 그리고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는 매우 유명한 이스라엘의 왕 중 한 명으로서, 그의 기사가 무려 4장에 걸쳐 나옵니다. 그는 많은 치적을 쌓았고, 평가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아하스에 대한 평가는 그렇게 좋지 못합니다.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다만 그 전 이스라엘 여러 왕들과 같이 하지는 아니하였더라”(왕하 17:2).

 

아하스가 통지하던 시대는 국제 정세가 매우 긴박하게 돌아갔고, 남유다 왕국에게 불리하게 돌아갔습니다. 북이스라엘에 비해서 국력이 약했을 뿐만 아니라, 주변 나라와의 관계도 원만치 않았습니다. 심지어 북이스라엘은 남유다 왕국을 치기 위해서 이웃 나라인 아람과 손을 잡고 남유다를 침공합니다. 이 사실에 아하스는 기겁을 합니다. 가뜩이나 국력도 약한데, 두 나라가 협공을 해오니, 이제 꼼짝 없이 나라가 망할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지요. 아시다시피, 고대의 전쟁은 무자비하고 잔인했습니다. 전쟁에서 패한 나라의 왕과 백성들은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도로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전쟁이 나면 죽을 힘을 다해 싸웠던 것이죠. 그런 상황을 맞닥뜨린 아하스 왕과 남유다 백성들의 마음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왕의 마음과 그의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7:2b).

 

인간의 심령을 가장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아하스 왕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종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아하스의 마음을 만져주십니다. 물론 왕이기 때문에 겉으로는 의연한 척 하고 있지만, 사실 저 깊은 심령은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는 아하스에게 가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너는 삼가며 조용하라 르신과 아람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이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7:4).

 

예나 지금이나 우리가 어떠한 일을 당했을 때 두려워 떨고 낙심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서 말씀하십니다.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동맹을 맺어 남유다를 무너뜨리려고 애를 쓸지라도 그 뜻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니,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우두머리()인 르신과 베가의 앞날도 예언해주십니다. 그들이 곧 패망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말씀을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전해 듣고도 아하스 왕이 잘 믿지를 않았던 모양입니다. 이런 구절이 나오는 것을 보면 말이죠.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시니라”(7:9b).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을 주시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하스 왕이 믿지를 않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확신을 더해주는 가시적인 징조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7:11). 사시시대 때 기드온은 자신의 부르심이 확실한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두 번이나 징표를 구합니다. 그 중 유명한 것이 양털 한 뭉치 징표입니다. 하루는 양털 한 뭉치에만 이슬이 떨어지고 주변 땅은 마른 것을 통하여, 하루는 양털 한 뭉치에는 이슬이 떨어지지 않고 주변 땅에만 이슬이 떨어지는 것을 통하여, 기드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인합니다.

 

징표를 구하라고 하시는 말씀에 아하스는 다음과 같이 응답합니다.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17:12). 징표 구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을 시험한 기드온에 비해 아하스의 믿음이 좋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아하스의 그러한 행동은 좋은 뜻에서 기록된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의미에서 기록된 것입니다. 지금 아하스가 징조를 구하지 않는 것은 겸손하기 때문에, 그 말씀을 믿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라, 믿지 못하기 때문에,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 없는 자를 내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배교한 자를 내치긴 하시지만, 믿음이 연약한 자는 보듬어 안으십니다. 아하스는 배교한 자가 아니라, 믿음이 연약한 자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징조조차 구하지 못하는 연약한 믿음을 가진 아하스에게 친히 징조를 주십니다. 그것이 유명한 이 말씀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7:14b).

 

이렇게까지 하나님께서는 친히 징조를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아하스는 믿음이 연약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합니다. 열왕기하 16장에 보면,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동맹을 물리쳐 주실 거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한 아하스는 앗수르에 도움을 청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맙니다. 그러면서 그 대가로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을 내어다가앗수르의 디글랏 빌레셋 왕에게 갔다 바칩니다(왕하 16:8).

 

아하스는 하나님 앞에서 정말 큰 잘못을 범하고 맙니다. 지켜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하나님께 예물을 가져다 드려도 시원치 않을 판에, 성전에 있는 은금을 내어다가, 즉 하나님의 것을 가져다가 이방 나라 왕에게 갔다 바치는 엉뚱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도 무심코 이렇게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마땅히 하나님께 올려져야 할 영광과 예물이 엉뚱한 곳으로 드려지는 것이죠. 믿음이 연약하다는 것은 이렇게 위험하고 어리석은 겁니다. 연약한 믿음을 그대로 놓아두면 오히려 사탄의 노리개가 되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에베소 교회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니리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시라”(4:14-15).

 

하나님께서는 말씀과 징조를 통하여 아하스 왕에게 이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니 두려워하지 말고 떨지 말라!”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만큼 우리에게 힘이 되는 것, 좋은 것이 없습니다. 존 웨슬리 목사님도 숨을 거두시면서 마지막으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뒤를 이어 리더십을 이어받았던 여호수아도 가나안 땅으로의 입성, 즉 가나안 족속들과의 전쟁을 눈앞에 두고 바로 이 말씀을 받았습니다.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1:9).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아느냐는 겁니다. 오늘 말씀은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은 금방 눈에 확 보이듯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을 말해 주고 있는 구절이 오늘 말씀 15절과 16절입니다.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을 알 때가 되면 엉긴 젖과 꿀을 먹을 것이라 대저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네가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황폐하게 되리라.”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을 알아차리게 되는 것은 아이가 자라서 선과 악을 구분하게 되는 것처럼, 성장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겁니다. 아이들은 생명을 입고 태어나긴 했어도 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이것을 분별력이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도 새생명을 입고 다시 태어나긴 했어도 믿음이 어린 아이와 같은 상태에 있으면 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영적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하는 영적 분별력이 없는 자가 됩니다. 아이가 성장하지 못하면 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하는 미숙아가 되는 것처럼, 영적 성장을 이루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을 보지 못하고, 아하스처럼 엉뚱한 선택을 하게 되고, 결국 멸망의 길로 가고 만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성장, 영적 성장, 분별력, 이런 말들이 마음에 잘 와 닿지 않으시는 분들께서도 계실 겁니다. 영적 성장이 우리의 눈을 뜨게 하여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놀라운 사실을 보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는 사건이 열왕기하 6장에 나와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북쪽에 자리 잡고 있던 아람이 오늘 말씀에서는 북이스라엘과 손을 잡고 남유다를 침공하지만, 원래부터 아람이 북이스라엘과 이렇게 사이 좋았던 것은 아닙니다. 정치 세계에서는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되기도 하고, 오늘의 적이 내일의 동지가 되기도 합니다. 선지자 엘리사가 사마리아에서 활동하던 시절, 아람은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침공했습니다. 그 당시 아람의 국력은 막강했습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은 아람의 침공에 꼼짝 없이 당했습니다. 아람은 사마리아성을 포위했고, 북이스라엘은 풍전등화에 놓여 있었습니다.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는 그 모습을 보고 기겁을 합니다.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왕하 6:15b). 아람 군대가 사마리아성을 꽁꽁 포위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놀란 게하시에게 엘리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왕하 6:16). 그리고 엘리사는 하나님께 기도 드려 사환 게하시의 눈을 열어 달라고 합니다. 엘리사의 기도로 영안이 열린 게하시의 눈에 들어온 광경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영적 성장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보았던 엘리야의 믿음과 같은 믿음을 갖게 된 게하시는 사마리아성을 지키고 있는 천군천사를 보았습니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왕하 6:17).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확실한 징표가 있습니다. 그의 이름이 임마누엘이신, 오늘 날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에서 나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징표입니다. 이렇게 보이는 증거를 주셨는데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아하스처럼 믿음 없이 행동하면, 참 안타까운 겁니다.

 

여러분에게 어떠한 문제가 있든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십자가 붙들고 나아가십시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리십니까? 여러분 앞에 놓인 문제는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 힘을 내십시오. 우리 서로 위로하고 축복합시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 힘을 냅시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12. 19. 03:16

약속이니까 아프다

창세기 14

(창세기 179-14, 23-27절)

 

할례는 대표적인 율법입니다. 할례는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을 구분하는 외적인 표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무던히도 애썼습니다. 바로 오늘 말씀 때문입니다.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배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14).

 

여러분은 이 말씀이 무섭습니까?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할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 없는 사람에게는 별로 무서운 말씀이 아닙니다. ‘백성 중에 끊어지리라는 말씀이 무섭지 않은 이유는 그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그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이 말씀은 정말 무서운 말씀입니다.

 

창조신앙이 없는 사람에게 이 말씀은 별로 무서운 말씀이 아닙니다. 창조신앙이란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그의 피조물이라고 인식하는 신앙입니다. 이 신앙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리고 그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전혀 그렇지 않게 살아가기 때문에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우리의 존재를 근본적으로 인식하게 해 주는 중요한 신앙입니다.

 

창조신앙을 고백하지 않는 사람들은 일단 하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지 않습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의 주인이 되어 살아갑니다. 또한 창조신앙을 고백하지 않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고, 눈에 보이는 현상에 의해서만 살아갑니다.

 

창조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주인은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노예처럼 부리시도록 놓아둔다는 뜻이 아닙니다. 생명을 주인 되신 하나님께 내어드림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또한 보이는 것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유한한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으로, 무한한 존재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이렇듯 창조신앙은 우리를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한계를 뛰어넘게 하고 자유케 합니다. 사람들은 착각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고 살아가는 것이 한계를 벗어나는 것이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이죠. 그런데 이것은 피조물인 인간의 한계를 너무 인식하지 못하는 겁니다. 인간은 누군가에 기대지 않으면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매우 연약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자연에 기대지 않으면 살 수 없고, 다른 인간에 기대지 않으면 살 수 없고,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기대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할 일은 자기 자신이 살기 위해서라도 나의 버팀목인 자연, 인간, 하나님을 잘 섬겨야 합니다. 자연을 착취하고, 인간을 착취하고, 하나님을 착취하면 결국 기댈 곳이 없어 멸망에 이르게 되는 것이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에 기대어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실존을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의 비유, 양무리의 비유, 그리고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 중에서 탕자의 비유는 매우 결정적입니다. 아버지로부터 자신의 분깃을 챙겨 먼나라로 떠난 둘째 아들(탕자)은 하나님을 떠나 사는 인간의 실존을 보여줍니다. 아버지 집 울타리를 벗어난 것은 자신의 한계를 벗어난 것 같고, 자기의 분깃으로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는 것은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된 것 같았지만, 결국 둘째 아들의 신세는 돼지와 한솥밥을 먹는 돼지 같이 천한 존재로 전락하고 맙니다. 지금은 삽겹살이 금겹살이지만, 그 당시 돼지는, 특별히 이스라엘에서는 매우 천한 동물이었습니다. 오죽하면 율법에 돼지고기 먹는 것을 금지했겠습니까.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라는 말씀은 바로 이런 겁니다. 창조신앙을 가지고 사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장 무서운 말씀인 것이죠. 하나님의 백성 울타리 밖으로 벗어나는 일은 살아 있으나 살아 있는 것이 아닌 상태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시고, 언약과 관련해서 아브라함이 이행해야 하는 부분을 말씀하십니다. “[너로 말할 것 같으면] 내 언약을 지켜야 한다”(9).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너는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언약을 받은 아브라함이 이행해야 하는 책임을 드러내십니다. 언약과 관련해서 아브라함이 이행해야 할 명령은 이것입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10). 이것은 아브라함이 지켜야 할 책임입니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것이 아니라, 어느 상황에서든 꼭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책임을 이행하지 않으면, 언약은 깨지는 것이죠. 백성 중에서 끊어지는것입니다.

 

이 원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특별히 은혜의 강조로 인해 책임이 희석된 개신교 신앙은 이 원리를 잘 기억하고, ‘책임의 중요성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루터의 신학사상 중 가장 오해 받는 부분이 바로 오직 은혜로라는 구호입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외쳐진 구호인 오직 믿음으로라는 겁니다.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구호는 자칫 구원을 싸구려로 만들어 버릴 위험성이 있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께서 밥숟갈 떠서 입으로 넣어주신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에베소서 2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구원은 은혜와 믿음의 합작품입니다. 은혜는 하나님 편에서 오는 것이고, 믿음은 인간 편에서 오는 것입니다. 은혜가 없으면 믿음이 소용 없고, 은혜가 있어도 믿음이 없으면 소용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언약은 하나님 편에서 베푸시는 은혜를 말합니다. 그리고 할례는 인간 편에서 이행해야 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우리는 믿음을 마음의 행위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할례가 믿음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믿음은 단순히 마음의 행위가 아니라, 행동을 동반한 총체적인 행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믿음은 갈대처럼 가벼운 마음의 장난이 아니라, 아픔을 동반하는 책임이라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언약을 세운 뒤, 자기 쪽에서 이행해야 하는 명령인 할례를 곧바로 시행합니다. 할례는 남자 성기의 포피를 베어내는 일입니다. 지금이야 마취의학이 발달해서 할례를 행할 때 아픔이 없지만, 아브라함 시대에 할례는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살갗을 조금만 베어도 얼마나 아픕니까? 그런데 포피를 베어내는 일은 그 고통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것이 얼마나 아팠으면 할례를 받은 며칠 동안 남자들은 거동을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창세기 34장에는 훗날 할례의 아픔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동생 디나를 욕보인 세겜 사람들을 도륙한 야곱의 두 아들 시므온과 레위의 유명한 일화도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시행한 나이가 99세입니다. 하갈에게서 얻은 아들 이스마엘의 나이는 13세였습니다. 난 지 8일만에 할례를 받는 것은 은혜로운 처사입니다. 아이는 고통을 잘 못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의학이 발달되지 않은 그 시절에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베풀게 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지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죠. 아무튼, 아브라함과 이스마엘, 그리고 아브라함 집안의 모든 남자들은 할례의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습니다.

 

성경을 한 마디로 줄여 말하면, ‘약속입니다. ‘언약이라고도 하고, ‘계약이라고도 합니다. 구원은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마술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피조물) 간의 약속에서 일어나는 은혜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엘샤다이의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서 모든 것을 아끼지 않으십니다. 그 징표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입니다. , 하나님 자기 자신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믿는다는 의미로 아브라함이 할례를 행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약속을 믿는 우리들의 믿음은 과연 어떠해야 하는지 깨달아지십니까?

 

우리는 너무도 쉽게 믿음을 헌신짝처럼 버립니다. 그 이유는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아프셨는지에 대한 체험이 없기 때문이고, 약속을 지키기 위해 책임적으로 할례를 행한 체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약속이니까 아픈 겁니다. 믿음은 아픈 겁니다. 믿음은 마음에 받는 할례입니다.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아픔이 이 마음에 새겨지는 겁니다. 그러니 이 마음이 통회하는 마음이 되는 것이고, 아픈 마음, 마음의 할례를 통해서 거듭나는 겁니다. 그 과정을 통과해야 믿음의 삶을 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엘샤다이의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서 아낌 없이 자신을 십자가 위에 내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아픔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도 그 은혜의 약속을 붙들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내어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갈대처럼 가벼운 마음의 장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책임 있게 응답하는 영혼(존재)의 울림입니다. 약속이니까 아픈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은 값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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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