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 너머에 세계가 있다. 그 세계를 어떻게 알아차릴 것이며, 알아차린 그 세계를 어떻게 지금이 언어로 풀어낼 것인가? 이것은 설교자의 과제이다. 나는 텍스트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세계를 확실히 본 것 처럼 자신하며, 텍스트 너머의 희미한 세계를 확실한 언어로 전달하는 설교자가 가장 무섭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텍스트 너머의 세계가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것'같이 확실하게 드러나는 때는 종말의 때이다. 종말이 아직 오지 않았으니, 우리는 그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게'만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텍스트 너머의 희미한 세계를 보고 그 세계를 오늘의 언어로 풀어내야만 하는 설교자의 직무는 참으로 고단하고 미련하고, 어쩌면 불가능하다. 그러나 설교자로 부르신 그분의 뜻 가운데 설교자에게 그 직무가 주어졌다는 것 때문에 설교자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강단에 설 수 밖에 없다. 나는 무서운 설교자가 아닌, 부족해서 겸손할 수 밖에 없는 설교자로, 강단에 겨우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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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12. 22. 23:36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

(이사야 7:1-16)

 

아하스는 남유다 요담 왕의 아들이고 히스기야의 아버지였습니다. 열왕기하 15장에서 20장에 걸쳐 요담, 아하스 그리고 히스기야의 통치에 대한 평가가 내려져 있는데, 아하스의 아버지 요담에 대한 평가는 그렇게 나쁘지 않습니다. “요담이 그의 아버지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왕하 15:34). 그리고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는 매우 유명한 이스라엘의 왕 중 한 명으로서, 그의 기사가 무려 4장에 걸쳐 나옵니다. 그는 많은 치적을 쌓았고, 평가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아하스에 대한 평가는 그렇게 좋지 못합니다.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다만 그 전 이스라엘 여러 왕들과 같이 하지는 아니하였더라”(왕하 17:2).

 

아하스가 통지하던 시대는 국제 정세가 매우 긴박하게 돌아갔고, 남유다 왕국에게 불리하게 돌아갔습니다. 북이스라엘에 비해서 국력이 약했을 뿐만 아니라, 주변 나라와의 관계도 원만치 않았습니다. 심지어 북이스라엘은 남유다 왕국을 치기 위해서 이웃 나라인 아람과 손을 잡고 남유다를 침공합니다. 이 사실에 아하스는 기겁을 합니다. 가뜩이나 국력도 약한데, 두 나라가 협공을 해오니, 이제 꼼짝 없이 나라가 망할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지요. 아시다시피, 고대의 전쟁은 무자비하고 잔인했습니다. 전쟁에서 패한 나라의 왕과 백성들은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도로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전쟁이 나면 죽을 힘을 다해 싸웠던 것이죠. 그런 상황을 맞닥뜨린 아하스 왕과 남유다 백성들의 마음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왕의 마음과 그의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7:2b).

 

인간의 심령을 가장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아하스 왕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종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아하스의 마음을 만져주십니다. 물론 왕이기 때문에 겉으로는 의연한 척 하고 있지만, 사실 저 깊은 심령은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는 아하스에게 가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너는 삼가며 조용하라 르신과 아람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이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7:4).

 

예나 지금이나 우리가 어떠한 일을 당했을 때 두려워 떨고 낙심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서 말씀하십니다.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동맹을 맺어 남유다를 무너뜨리려고 애를 쓸지라도 그 뜻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니,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우두머리()인 르신과 베가의 앞날도 예언해주십니다. 그들이 곧 패망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말씀을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전해 듣고도 아하스 왕이 잘 믿지를 않았던 모양입니다. 이런 구절이 나오는 것을 보면 말이죠.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시니라”(7:9b).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을 주시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하스 왕이 믿지를 않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확신을 더해주는 가시적인 징조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7:11). 사시시대 때 기드온은 자신의 부르심이 확실한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두 번이나 징표를 구합니다. 그 중 유명한 것이 양털 한 뭉치 징표입니다. 하루는 양털 한 뭉치에만 이슬이 떨어지고 주변 땅은 마른 것을 통하여, 하루는 양털 한 뭉치에는 이슬이 떨어지지 않고 주변 땅에만 이슬이 떨어지는 것을 통하여, 기드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인합니다.

 

징표를 구하라고 하시는 말씀에 아하스는 다음과 같이 응답합니다.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17:12). 징표 구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을 시험한 기드온에 비해 아하스의 믿음이 좋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아하스의 그러한 행동은 좋은 뜻에서 기록된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의미에서 기록된 것입니다. 지금 아하스가 징조를 구하지 않는 것은 겸손하기 때문에, 그 말씀을 믿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라, 믿지 못하기 때문에,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 없는 자를 내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배교한 자를 내치긴 하시지만, 믿음이 연약한 자는 보듬어 안으십니다. 아하스는 배교한 자가 아니라, 믿음이 연약한 자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징조조차 구하지 못하는 연약한 믿음을 가진 아하스에게 친히 징조를 주십니다. 그것이 유명한 이 말씀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7:14b).

 

이렇게까지 하나님께서는 친히 징조를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아하스는 믿음이 연약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합니다. 열왕기하 16장에 보면,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동맹을 물리쳐 주실 거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한 아하스는 앗수르에 도움을 청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맙니다. 그러면서 그 대가로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을 내어다가앗수르의 디글랏 빌레셋 왕에게 갔다 바칩니다(왕하 16:8).

 

아하스는 하나님 앞에서 정말 큰 잘못을 범하고 맙니다. 지켜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하나님께 예물을 가져다 드려도 시원치 않을 판에, 성전에 있는 은금을 내어다가, 즉 하나님의 것을 가져다가 이방 나라 왕에게 갔다 바치는 엉뚱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도 무심코 이렇게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마땅히 하나님께 올려져야 할 영광과 예물이 엉뚱한 곳으로 드려지는 것이죠. 믿음이 연약하다는 것은 이렇게 위험하고 어리석은 겁니다. 연약한 믿음을 그대로 놓아두면 오히려 사탄의 노리개가 되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에베소 교회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니리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시라”(4:14-15).

 

하나님께서는 말씀과 징조를 통하여 아하스 왕에게 이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니 두려워하지 말고 떨지 말라!”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만큼 우리에게 힘이 되는 것, 좋은 것이 없습니다. 존 웨슬리 목사님도 숨을 거두시면서 마지막으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뒤를 이어 리더십을 이어받았던 여호수아도 가나안 땅으로의 입성, 즉 가나안 족속들과의 전쟁을 눈앞에 두고 바로 이 말씀을 받았습니다.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1:9).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아느냐는 겁니다. 오늘 말씀은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은 금방 눈에 확 보이듯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을 말해 주고 있는 구절이 오늘 말씀 15절과 16절입니다.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을 알 때가 되면 엉긴 젖과 꿀을 먹을 것이라 대저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네가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황폐하게 되리라.”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을 알아차리게 되는 것은 아이가 자라서 선과 악을 구분하게 되는 것처럼, 성장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겁니다. 아이들은 생명을 입고 태어나긴 했어도 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이것을 분별력이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도 새생명을 입고 다시 태어나긴 했어도 믿음이 어린 아이와 같은 상태에 있으면 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영적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하는 영적 분별력이 없는 자가 됩니다. 아이가 성장하지 못하면 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하는 미숙아가 되는 것처럼, 영적 성장을 이루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을 보지 못하고, 아하스처럼 엉뚱한 선택을 하게 되고, 결국 멸망의 길로 가고 만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성장, 영적 성장, 분별력, 이런 말들이 마음에 잘 와 닿지 않으시는 분들께서도 계실 겁니다. 영적 성장이 우리의 눈을 뜨게 하여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놀라운 사실을 보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는 사건이 열왕기하 6장에 나와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북쪽에 자리 잡고 있던 아람이 오늘 말씀에서는 북이스라엘과 손을 잡고 남유다를 침공하지만, 원래부터 아람이 북이스라엘과 이렇게 사이 좋았던 것은 아닙니다. 정치 세계에서는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되기도 하고, 오늘의 적이 내일의 동지가 되기도 합니다. 선지자 엘리사가 사마리아에서 활동하던 시절, 아람은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침공했습니다. 그 당시 아람의 국력은 막강했습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은 아람의 침공에 꼼짝 없이 당했습니다. 아람은 사마리아성을 포위했고, 북이스라엘은 풍전등화에 놓여 있었습니다.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는 그 모습을 보고 기겁을 합니다.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왕하 6:15b). 아람 군대가 사마리아성을 꽁꽁 포위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놀란 게하시에게 엘리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왕하 6:16). 그리고 엘리사는 하나님께 기도 드려 사환 게하시의 눈을 열어 달라고 합니다. 엘리사의 기도로 영안이 열린 게하시의 눈에 들어온 광경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영적 성장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보았던 엘리야의 믿음과 같은 믿음을 갖게 된 게하시는 사마리아성을 지키고 있는 천군천사를 보았습니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왕하 6:17).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확실한 징표가 있습니다. 그의 이름이 임마누엘이신, 오늘 날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에서 나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징표입니다. 이렇게 보이는 증거를 주셨는데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아하스처럼 믿음 없이 행동하면, 참 안타까운 겁니다.

 

여러분에게 어떠한 문제가 있든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십자가 붙들고 나아가십시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리십니까? 여러분 앞에 놓인 문제는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 힘을 내십시오. 우리 서로 위로하고 축복합시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 힘을 냅시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12. 19. 03:16

약속이니까 아프다

창세기 14

(창세기 179-14, 23-27절)

 

할례는 대표적인 율법입니다. 할례는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을 구분하는 외적인 표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무던히도 애썼습니다. 바로 오늘 말씀 때문입니다.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배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14).

 

여러분은 이 말씀이 무섭습니까?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할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 없는 사람에게는 별로 무서운 말씀이 아닙니다. ‘백성 중에 끊어지리라는 말씀이 무섭지 않은 이유는 그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그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이 말씀은 정말 무서운 말씀입니다.

 

창조신앙이 없는 사람에게 이 말씀은 별로 무서운 말씀이 아닙니다. 창조신앙이란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그의 피조물이라고 인식하는 신앙입니다. 이 신앙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리고 그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전혀 그렇지 않게 살아가기 때문에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우리의 존재를 근본적으로 인식하게 해 주는 중요한 신앙입니다.

 

창조신앙을 고백하지 않는 사람들은 일단 하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지 않습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의 주인이 되어 살아갑니다. 또한 창조신앙을 고백하지 않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고, 눈에 보이는 현상에 의해서만 살아갑니다.

 

창조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주인은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노예처럼 부리시도록 놓아둔다는 뜻이 아닙니다. 생명을 주인 되신 하나님께 내어드림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또한 보이는 것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유한한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으로, 무한한 존재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이렇듯 창조신앙은 우리를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한계를 뛰어넘게 하고 자유케 합니다. 사람들은 착각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고 살아가는 것이 한계를 벗어나는 것이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이죠. 그런데 이것은 피조물인 인간의 한계를 너무 인식하지 못하는 겁니다. 인간은 누군가에 기대지 않으면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매우 연약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자연에 기대지 않으면 살 수 없고, 다른 인간에 기대지 않으면 살 수 없고,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기대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할 일은 자기 자신이 살기 위해서라도 나의 버팀목인 자연, 인간, 하나님을 잘 섬겨야 합니다. 자연을 착취하고, 인간을 착취하고, 하나님을 착취하면 결국 기댈 곳이 없어 멸망에 이르게 되는 것이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에 기대어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실존을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의 비유, 양무리의 비유, 그리고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 중에서 탕자의 비유는 매우 결정적입니다. 아버지로부터 자신의 분깃을 챙겨 먼나라로 떠난 둘째 아들(탕자)은 하나님을 떠나 사는 인간의 실존을 보여줍니다. 아버지 집 울타리를 벗어난 것은 자신의 한계를 벗어난 것 같고, 자기의 분깃으로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는 것은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된 것 같았지만, 결국 둘째 아들의 신세는 돼지와 한솥밥을 먹는 돼지 같이 천한 존재로 전락하고 맙니다. 지금은 삽겹살이 금겹살이지만, 그 당시 돼지는, 특별히 이스라엘에서는 매우 천한 동물이었습니다. 오죽하면 율법에 돼지고기 먹는 것을 금지했겠습니까.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라는 말씀은 바로 이런 겁니다. 창조신앙을 가지고 사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장 무서운 말씀인 것이죠. 하나님의 백성 울타리 밖으로 벗어나는 일은 살아 있으나 살아 있는 것이 아닌 상태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시고, 언약과 관련해서 아브라함이 이행해야 하는 부분을 말씀하십니다. “[너로 말할 것 같으면] 내 언약을 지켜야 한다”(9).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너는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언약을 받은 아브라함이 이행해야 하는 책임을 드러내십니다. 언약과 관련해서 아브라함이 이행해야 할 명령은 이것입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10). 이것은 아브라함이 지켜야 할 책임입니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것이 아니라, 어느 상황에서든 꼭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책임을 이행하지 않으면, 언약은 깨지는 것이죠. 백성 중에서 끊어지는것입니다.

 

이 원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특별히 은혜의 강조로 인해 책임이 희석된 개신교 신앙은 이 원리를 잘 기억하고, ‘책임의 중요성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루터의 신학사상 중 가장 오해 받는 부분이 바로 오직 은혜로라는 구호입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외쳐진 구호인 오직 믿음으로라는 겁니다.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구호는 자칫 구원을 싸구려로 만들어 버릴 위험성이 있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께서 밥숟갈 떠서 입으로 넣어주신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에베소서 2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구원은 은혜와 믿음의 합작품입니다. 은혜는 하나님 편에서 오는 것이고, 믿음은 인간 편에서 오는 것입니다. 은혜가 없으면 믿음이 소용 없고, 은혜가 있어도 믿음이 없으면 소용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언약은 하나님 편에서 베푸시는 은혜를 말합니다. 그리고 할례는 인간 편에서 이행해야 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우리는 믿음을 마음의 행위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할례가 믿음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믿음은 단순히 마음의 행위가 아니라, 행동을 동반한 총체적인 행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믿음은 갈대처럼 가벼운 마음의 장난이 아니라, 아픔을 동반하는 책임이라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언약을 세운 뒤, 자기 쪽에서 이행해야 하는 명령인 할례를 곧바로 시행합니다. 할례는 남자 성기의 포피를 베어내는 일입니다. 지금이야 마취의학이 발달해서 할례를 행할 때 아픔이 없지만, 아브라함 시대에 할례는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살갗을 조금만 베어도 얼마나 아픕니까? 그런데 포피를 베어내는 일은 그 고통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것이 얼마나 아팠으면 할례를 받은 며칠 동안 남자들은 거동을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창세기 34장에는 훗날 할례의 아픔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동생 디나를 욕보인 세겜 사람들을 도륙한 야곱의 두 아들 시므온과 레위의 유명한 일화도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시행한 나이가 99세입니다. 하갈에게서 얻은 아들 이스마엘의 나이는 13세였습니다. 난 지 8일만에 할례를 받는 것은 은혜로운 처사입니다. 아이는 고통을 잘 못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의학이 발달되지 않은 그 시절에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베풀게 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지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죠. 아무튼, 아브라함과 이스마엘, 그리고 아브라함 집안의 모든 남자들은 할례의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습니다.

 

성경을 한 마디로 줄여 말하면, ‘약속입니다. ‘언약이라고도 하고, ‘계약이라고도 합니다. 구원은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마술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피조물) 간의 약속에서 일어나는 은혜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엘샤다이의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서 모든 것을 아끼지 않으십니다. 그 징표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입니다. , 하나님 자기 자신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믿는다는 의미로 아브라함이 할례를 행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약속을 믿는 우리들의 믿음은 과연 어떠해야 하는지 깨달아지십니까?

 

우리는 너무도 쉽게 믿음을 헌신짝처럼 버립니다. 그 이유는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아프셨는지에 대한 체험이 없기 때문이고, 약속을 지키기 위해 책임적으로 할례를 행한 체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약속이니까 아픈 겁니다. 믿음은 아픈 겁니다. 믿음은 마음에 받는 할례입니다.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아픔이 이 마음에 새겨지는 겁니다. 그러니 이 마음이 통회하는 마음이 되는 것이고, 아픈 마음, 마음의 할례를 통해서 거듭나는 겁니다. 그 과정을 통과해야 믿음의 삶을 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엘샤다이의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서 아낌 없이 자신을 십자가 위에 내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아픔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도 그 은혜의 약속을 붙들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내어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갈대처럼 가벼운 마음의 장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책임 있게 응답하는 영혼(존재)의 울림입니다. 약속이니까 아픈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은 값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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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12. 16. 04:53

길이 참으라

(야고보서 5:7-11)

 

대림절은 기다림을 배우는 절기입니다. 무엇이든 재깍재깍 결과물이 있어야 하는 인스턴트 시대에서 가장 배우기 힘든 덕목이 바로 기다림(인내)입니다. 이런 시대에 기다림을 인생의 가장 큰 틀로 설정하고 살아가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분명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합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수많은 크고 작은 기다림 속에서 살아갑니다. 학생은 성적표, 또는 원하는 대학의 합격 소식을 기다리고, 젊은 숙녀는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고, 젊은 청년은 신데렐라를 기다리고, 결혼한 부부는 자식의 탄생을 기다리고, 아이는 엄마의 젖을 기다리고, 아내는 퇴근해서 돌아올 남편을 기다리고(그 반대로 마찬가지입니다만), 부모는 밤늦게까지 안 돌아오는 자식을 기다립니다.

 

밤늦게까지 안 돌아오는 자식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마음을 담은 시 한편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제목은 <늦은 귀가>입니다. 제가 소시 적에 쓴 시입니다.

 

조심해서 다녀!

일찍 들어와!

 

매일 아침,

조심일찍을 강조하시는 어머니

 

나의 늦은 귀가에 어머니는

니가 늦게 들어오니까

간이 오그라 들었다 늘어났다 하잖아라고 꾸짖으신다

정말 그걸 느끼셨단다

  

조심일찍

어머니의 사랑의 열매

 

나는 오늘도

그 열매를 따먹지 못하고

어머니가 토해낸 그 열매의 씨앗을

어머니의 肝에 심어 놓았다

 

그런데 성경은 다른 기다림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오직 이 기다림만을 말합니다. 성경이 오직 이 기다림만을 말하고 있다는 뜻은 이것이 우리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기다림이라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5:7a).

 

야보고는 이것을 형제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형제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말합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지 않는 비그리스도인들은 주께서 강림하신다!”라는 사실을 알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믿고 기다립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거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고자 다짐한다면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무엇을 믿는다는 것은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습니다. 그것을 말해주는 구절이 9절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Don’t grumble against each other.” 원망(grumble)은 불평, 불만, 푸념 등을 말합니다. 우리가 원망(grumble)’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서로 원망하면 주님께 심판 받기 때문입니다.

 

심판의 두려움 때문에 억지로 원망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 때문에 원망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기쁨 때문에 원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기쁨은 두려움보다 강합니다. 물론 믿음이 연약한 자, 주님을 온전히 사랑하지 않는 자는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억지로 억제하겠지만, 무엇이든지 억지로 강제로 하면 거기에서 기쁨을 발견하기 힘든 법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교회 문턱 드나드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믿고 삶의 모습을 완전히 바꾼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 두 가지를 믿어야 그리스도인입니다. 1. 주께서 강림하신다. 2. 주님은 심판주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우리의 삶의 변화가 있어야 하는데, ‘원망하지 않는 삶이 그것입니다.

 

주께서 강림은 하시는데 심판주가 아니시면 그분을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은 심판주이시긴 한데 강림하지 않으시는 분이라면 그분을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심판주가 아니시거나 강림하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정의를 세워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강림하실 뿐만 아니라, 심판주이시기 때문에 정의를 세우시는 분은 우리의 주님이시지 우리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원망한다는 뜻은 우리가 죄를 정한다는 뜻이고, 우리가 정의를 세운다는 뜻입니다. 주님 앞에서 이것만큼 교만한 일도 없는 것입니다.

 

법정에 가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죄를 정하는 일은 판사가 하는 것입니다. 판사를 무시하고, 자기 스스로 자신의 어떠한 행위를 죄다 아니다결정하는 것은 매우 우스꽝스러운 일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판사를 무시한 죄로 법원경찰에게 끌려 나갑니다.

 

오늘 말씀은 무엇이 옳은 일인지 우리가 정하면 안 된다는 것을 욥기를 통해 배울 수 있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욥의 인생을 통해서 이 사실을 배웁니다.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라.” 욥의 인생을 들여다 보면 그에게 닥친 괴로움, 자식이 죽고 재산을 잃고, 아내와 친구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는 그런 일들을 보면 주님께서는 무자비하시고 괴팍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욥이 그러한 괴로움을 당한 이유는 그의 삶이 불의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욥기서의 결론은 그것이 아닙니다. 욥의 삶은 의로웠고, 주님께서는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라는 겁니다. 그 결말을 보게끔 해 준 것이 바로 인내입니다. 기다림입니다. 욥이 하나님의 강림하심을 끝까지 기다리지 못했다면, 욥의 삶은 불의한 삶으로 하나님은 무자비한 분으로 인식되고 말았을 겁니다. 그러나 욥은 기다림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회복했을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 온전히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부당한 일을 당합니다. 그 반대로,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부당한 일을 저지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자신이 당한 일은 잘 기억하는데, 자신이 저지른 일은 잘 기억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누군에게는 피해자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가해자의 신분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신이 피해자라고만 생각하지, 가해자라는 생각은 안 합니다.

 

오늘 말씀은 살면서 부당한 일을 당했더라도 그것 때문에 스스로 정의를 세우려고 상대방을 향해 원망하지 말라고 가르쳐 줍니다. 왜냐하면 심판주이신 주님께서 강림하셔서 그 부당한 일을 바로 잡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오늘 말씀은 내가 부당한 일을 저지르지는 않았나 스스로를 살펴 보라고 가르쳐 줍니다. 왜냐하면 심판주이신 주님께서 강림하셔서 내가 저지른 부당한 일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원망하지 마십시오. 불평, 불만, 푸념을 늘어 놓지 마십시오. 우리가 성인군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윤리도덕적으로 그것이 안 좋은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심판주이신 우리 주님께서 곧 강림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다림(인내)은 주님의 강림에 대한 기다림이요, 그 기다림은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 기다림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길이 참으십시오. 억지로 고통 가운데 참지 마시고, 기쁨으로 참으십시오. 주께서 곧 강림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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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12. 9. 00:37

왜 회개해야 하는가?

(마태복음 3:1-12)

 

요한만큼 사명이 확실한 나실인을 찾아보기도 힘듭니다. 4복음서는 모두 예수님이 세상에 드러나기 전, 세례 요한이 먼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 중에서 누가복음은 요한과 예수님의 첫 만남을 적어 놓았는데, 그것은 어머니의 뱃속에서의 만남입니다. 가브리엘 천사를 통하여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한 소식을 들은 마리아는 사갸랴의 집에 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을 만납니다. 그 만남을 누가복음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1:41).

 

요한과 예수님은 첫 만남부터 범상치 않았습니다. 어머니의 복중에 있던 요한은 이제 겨우 잉태된 예수님을 만나자 어떠한 반응을 했습니다. 시작부터, 아니 태초부터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요한을 준비하셨던 것이죠.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나실인으로 태어난 요한은 자신의 사명을 성실하게 감당합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 나와 있듯이, 세상을 향해 이렇게 외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2).

 

그런데 다음 구절을 보면 조금 이상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면서 천국에 대해서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인물에 대해서 소개를 합니다. 요한의 소개를 직접 들어 봅니다.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3).

 

요한은 천국을 장소적 개념으로 말하지 않고, 오히려 어떠한 인물에 대해서 말하는데, 그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오기로 예언된 자이고, 그를 일컬어 주님이라고까지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은연 중에 천국을 장소의 개념으로만 이해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천국가는 것에만 초점을 둡니다. 천국만 갈 수 있다면, 그것을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부처든 공자든 알라든, 또는 돈이든 상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무엇으로든 천국을 가기만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천국을 장소의 개념으로 생각하는 우리들의 생각에 제동을 겁니다. 요한은 천국을 장소의 개념으로 전달하지 않고, 한 인물에 집중시킵니다.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은 이 사실에만 집중했던 것 같습니다. 4절 말씀을 보면 요한의 행색에 대해서 나오는데, 가히 기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4). 뭔가에 집중한 사람의 인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어디에 집중시켜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 기독교적인 용어로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의 삶은 너저분하고 복잡합니다. 그러나 요한처럼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고 그 사명을 위해서 사는 사람의 삶은 이토록 심플합니다. 받은 사명을 위해서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습니다.

 

나실인으로서, 자신의 사명에 집중하면서 살았던 요한은 모든 에너지를 모아 세상을 향해 이렇게 외칩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7-10).

 

지금 이 말씀을 들으시는 여러분은 요한이 외치고 있는 이 말씀에 아무런 감흥이 없으시겠지만, 만약 이것이 제가 여러분에게 직접적으로 외치는 말씀이라고 생각하면, 지금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가시는 분이 있으시거나 돌을 들고 저한테 던지려고 흥분하신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요한의 이 말이 그렇게 편하게 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굉장히 불편한 말입니다.

 

말라기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니리”(4:5). 복음서는 요한을 말라기서에서 예언한 엘리야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엘리야처럼 유대 광야에서전파합니다. 우리가 열왕기서에 등장하는 엘리야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듯이, 엘리야가 아합 왕조를 향해 불 같은 메시지를 전했을 때, 엘리야는 곧바로 아합 왕의 아내, 왕비 이세벨의 살해 위협을 받고 광야로 도망칩니다. 지금 요한의 선포가 엘리야의 선포와 다르지 않고, 요한 또한 목숨을 내 놓고 이 말씀을 외치고 있는 중인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서 보아야 할 것은 요한의 외침이 한 사람에게 모아진다는 겁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외치면서 한 사람에게 우리의 시선을 주목시키는 요한의 행동이 참으로 특이한 겁니다. 요한은 요단 강에서 물로 세계를 베풀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12).

 

우리는 물로 몸을 씻습니다. 요한이 물로 세례를 베푸는 목적과 이유입니다. 회개란 깨끗해지는 겁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물입니다. 그런데 요한이 말하길 자신은 물로 깨끗하게 하지만, 자신보다 능력이 많으신 는 불로 깨끗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불도 물처럼 깨끗하게 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지만, 불은 물보다 위험합니다. 자신의 몸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물을 사용하는 사람은 있어도, 불을 사용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요한의 세례는 준비의 세례입니다. 오고 있는 천국에 대한 준비의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는 심판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것은 그 천국을 맞을 준비를 한 자들에게는 기쁜 소식이지만, 가까이 온 천국을 맞이할 준비가 안 된 자들에게는 두려운 소식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회개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해를 가질 수 있습니다.

 

우선 천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장소의 개념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요한이 말하는 천국은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인물의 개념이었습니다. 요한에게서 천국은 내 뒤에 오시는 이와 동일한 개념입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천국을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관 속에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 믿고 천국 간다라고만 생각하지, 예수 그리스도가 곧 천국이라는 생각은 잘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회개해야 하는 이유는 천국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이미 왔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내가 죽어서 가는 어떤 곳이 아니라, 이미 이 세상에 임한 천국인 그리스도와의 사귐 안에 있습니다. 천국을 죽어서 가는 어떤 곳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당장의 회개와 당장의 합당한 열매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천국 가는 것을 어떠한 보상으로 생각을 합니다. 심지어 예수 믿는 사람들도, 천국 가는 것을 예수 믿는 것에 대한 보상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천국은 예수를 잘 믿었기 때문에 주어지는 보상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자꾸 걸려 넘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천국을 보상의 개념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예수님과 거래를 할 뿐입니다. ‘내가 당신한테 잘 보일 테니까,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할 테니까, 나를 꼭 천국 보내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회개해야 하는 이유는 천국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천국으로 이미 이 땅에 임한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사귐이 중요한 것이지, ‘천국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이런 말까지 했습니다. ‘그리스도가 만약 지옥에 계시다면 나는 기꺼이 지옥에 가겠다!’

 

요한이 소개하는 천국, 천국으로 이 땅에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심판주입니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12). 회개한다는 것은 심판주로 오시는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삶을 그리스도에게로 방향을 트는 것입니다. 탕자가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아버지를 기억하고 방향을 틀어 아버지 집으로 돌아갔듯이, 우리의 삶 자체를 그리스도에게로 트는 겁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그리스도와의 사귐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왜 회개해야 하냐면, 그리스도께서는 심판주이시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그리스도와의 사귐 안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사귐을 갖는다는 것은 친구가 된다는 뜻입니다. 누구든지, 친구를 심판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친구를 심판하고 정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미 친구가 아닙니다. 진정으로 사귐을 갖는다면, 친구라면 어떠한 죄를 지었든지, 친구 사이는 정죄하는 사이가 아니라 용서하는 사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심판주이신 그리스도와 사귐을 가지십시오. 회개하십시오. 그래야 물이 아니라 불로 하시는 심판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사귐을 가질 때, 그리스도에게로 우리의 방향을 틀 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친구가 되셔서 우리를 정죄하시는 것이 아니라, 친구인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덮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회개 하십시오. 천국이 가까이 왔습니다. 회개 하십시오. 천국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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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12. 5. 06:41

엘샤다이

창세기 13

(창세기 17:1-14)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철학자 하이데거가 한 말인데,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우리의 삶을 들여다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미국에 살면서 이민자로서 가장 어려움을 겪는 부분이 언어의 문제입니다. 영어가 한국말처럼 편하지 않다 보니 당하는 어려움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단순한 소통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미국 땅에서의 존재 자체가 여러 가지로 힘듭니다. 그 이유는 영어가 우리의 존재를 나타내주는 모국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어떤 언어를 쓰고 있느냐에 따라서 나의 존재는 달라집니다. 만약 우리가 영어를 모국어로 쓰고 있다면 지금 한국어를 모국어로 쓰고 있는 것과 완전히 다른 존재로 살아가겠죠.

 

영어니 한국어니, 이러한 언어뿐만이 아니라, 언어에는 사회적이고 관계적인 언어가 있습니다. 부부 사이에 쓰는 언어가 있고, 부모자식 간에 쓰는 언어가 있고, 친구 간에 쓰는 언어가 있고, 비즈니스 사장과 고객 간에 쓰는 언어가 있습니다. 발음과 발성은 같지만 언어를 통한 관계나 친밀감은 너무도 다릅니다. 또한 법조계에서 쓰는 언어가 있고, 의료계에서 쓰는 언어가 있고, 정치계에서 쓰는 언어가 있고, 언론계에서 쓰는 언어가 있고, 경제계에서 쓰는 언어가 있고, 종교계에서 쓰는 언어가 있습니다. 어느 분야 등 그 분야에 흥미를 느끼고 그 분야의 흐름을 따라가려면 그 분야에서 소통되는 언어를 반드시 익혀야 합니다.

 

이렇듯, 교회에는 교회만의 독특한 언어가 존재합니다. 교회를 다닌다는 뜻은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와 깊은 관계를 맺으려면 그분과 소통할 수 있는 고유한 언어가 필요합니다. 그 언어를 담고 있는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세계는 매우 독특한 세계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만을 따라서 울고 웃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말해줍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라는 세계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이라는 존재가 만들어가는 세계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이 세 존재는 매우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이상, 우리 자신(인간)에 대하여 알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우리의 존재를 지탱해 주는 자연, 그리고 우리의 존재를 가능하게 해주는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 것은 매우 필수적입니다.

 

철학은 인간에 대하여, 과학은 자연에 대하여, 그리고 신학은 하나님()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말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이 세 가지 분야는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들리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서로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과 자연과 하나님은 뗄래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 대하여 말하려면 자연과 하나님에 대해서 말해야 하고, 자연에 대해서 말하려면 인간과 하나님에 대해서 말해야 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면 인간과 자연에 대해서 말해야 합니다. 기독교의 개념인 삼위일체의 개념과 비슷한 양상입니다.

 

종교를 갖는다는 것, 특별히 우리처럼 교회를 다닌다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하여 좀 더 깊은 이해를 가질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를 보이는 것처럼 배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의 키워드는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부분입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1). 여기서 전능한 하나님을 히브리어로 엘샤다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알아야 할 교회의 언어, 예수 그리스도와 소통하기 위하여 배워야 하는 언어는 바로 엘샤다이입니다. 이 언어를 배운다면, 우리는 좀 더 하나님을 잘 이해하게 되고, 소통이 잘 될 것입니다.

 

도대체 전능한(Almighty)’는 무엇을 뜻하는 말일까요? 하나님이 전능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일단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전능한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생각해 보죠. 일반적으로 전능한이라는 의미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형상이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이라는 의미가 떠오르면서 수퍼맨같은 형상이 떠오릅니다. 이것은 인간이나 자연과의 관계에서 한 번 생각해 보면, 전능한 존재는 인간보다 뛰어난 존재이고, 자연법칙과는 상관없는 존재로 여겨집니다. 수퍼맨을 떠올리면 금방 알 수 있죠. 수퍼맨은 연약한 인간과는 질적으로 다르고,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기 때문에 하늘을 마음대로 날아 다닐 수 있습니다. , 자연계에서 말하는 중력의 법칙 같은 거에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수퍼맨과 같은 존재일까요? 만약 수퍼맨과 같은 존재가 이 땅에 있다면 그는 하나님으로 숭배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오늘 말씀도 그러한 것을 말해주는 것처럼 들립니다. 100세 노인에게 자손을 약속하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우리가 아는 자연법칙에 의하면, 100세 노인은 자식을 낳을 수가 없습니다. 남자 노인은 그렇다 치더라도, 여자 노인에게는 정말 불가능한 일입니다. 여자에게는 폐경기라는 것이 있어서,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더 이상 난자를 생각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자연법칙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지금 더 이상 자식을 낳을 수 없는 노인들에게 자식을 낳게 해주겠다고 약속하며, 아브라함과 사라와 언약을 맺습니다.

 

우리는 그냥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니까 그 정도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행하실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다는 것을 오해한 생각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신앙상식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자연을 창조하셨습니다. 이 말은 이런 뜻이기도 합니다. 인간과 자연이 가지고 있는 어떠한 법칙들은 하나님의 창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죽습니다. 이것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법칙입니다. 인간은 새처럼 날 수 없습니다. 땅을 걸어 다녀야 합니다. 이것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법칙입니다. 인간은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더 이상 자식을 생산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법칙입니다. 과학자들이 자연을 관찰해 알아낸 자연법칙들이 즐비합니다. 그것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조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장난꾸러기 마법사가 아닙니다. 자신의 만든 법칙을 어겨가며, 당신께서 만드신 피조물들(인간과 자연)을 골탕 먹이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리 말했다, 저리 말했다, 요리조리 자기가 유리한대로 말을 바꾸시는 사기꾼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입니다. 당신이 하신 말과 법칙은 꼭 지키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불의를 행하는 자를 틀림없이 징벌하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심판이라는 말이 무서운 것이고, 오늘 말씀처럼, 하나님 앞에서 행하여 완전해지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1절후반부).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다라는 뜻은 자기 마음대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정한 말과 법칙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철저하게 지킨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의 법칙과 하나님께서 정하신 율례를 똑바로 알아 잘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뜨거운 불에 손을 대면 살이 탑니다. 그것이 자연법칙입니다. 그러니 뜨거운 불을 가까지 안 하는 것이 좋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기필코 뜨거운 불에 손을 댄 자의 살을 태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리면 인간은 새처럼 날 수 없기 때문에 떨어져 죽습니다. 그러므로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리거나, 높은 곳을 가야 할 일이 있다면 조심 또 조심해야 합니다. 만약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린 자가 있다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기필코 그 자를 죽이실 것입니다. 운전할 때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질서를 잘 지키며 안전운행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께서 대신 운전해 주실 거라고 생각하며 정신 놓고 신호등을 어겨가며 과속하는 자가 있다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기필코 교통사고 나게 하실 것입니다. 인간은 식사를 불규칙하게 하고, 잠을 충분히 안 자고, 정기적으로 적당한 운동을 해주지 않으면 건강해질 수 없습니다. 아무거나 막 먹고, 잠도 충분히 안 자고, 꼼지락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그가 아무리 교회 열심히 다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기필코 건강을 상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라고 밝히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해가 좀 되시는지요? 이것은 하나님 당신께서 만드신 자연법칙을 깨겠다는 뜻이 아니라, 당신께서 하신 말과 당신이 정하신 법칙은 꼭 이루어진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더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언뜻 보기에 자연법칙이 깨지는 것 같은 역사를 행하실 때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무엇인가 새로운 창조를 행하실 때 그렇게 하십니다. 그러니까, 자식을 더 이상 생산할 수 없는 아브라함과 사라를 불러 언약을 맺으시는 것은 당신이 정하신 자연법칙을 깨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의 역사를 만드시는 거라는 겁니다. 기존에 하나님 당신께서 이미 정하신 법칙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새로운 창조 활동이 일어나는 것이죠.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지금 맺고 있는 언약은 창조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므로 창조를 거스르는 사건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것이 아니라 창조의 사건을 넘어서는 새창조의 사역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창조를 넘어서는 새창조의 사역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서 발견합니다. 십자가 처형으로 죽임을 당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창조 안에서 일어난 역사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일으키신 사건은 창조를 넘어서는 새창조의 사건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부활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그것은 구원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당신께서 하신 말과 당신께서 정하신 법칙을 철저하게 지키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전능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행하여 완전하지 못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 당신께서 정하신 법칙을 철저하게 지켜주시기 때문에 이렇게 숨쉬고 사는 겁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자연계의 혼란으로 어처구니 없는 죽음을 당했을지도 모릅니다.

 

전능하다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이 정한 뜻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이룬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할례언약을 통하여 아브라함과 하신 약속()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지키셨습니다. 언약하신 대로, 아브라함은 만국의 아버지가 되었고, 사라는 만국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삭을 주시고, 야곱을 주시고, 그 후 열 두 명의 아들을 통하여 하늘의 뭇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인 자손을 번창하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모두를 새로운 피조물, 즉 예수 그리스도처럼 부활체로의 새창조를 약속하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이루신 뜻은 꼭 지키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부활체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될 거라는 것은 틀림 없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믿으시는 자는 하나님 앞에 행하여 완전해지시기를 간구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 앞에 행하여 완전해질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아갈 때, 엘샤다이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 배운 언어를 통하여 하나님과 더욱더 가까워지셨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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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12. 2. 11:02

깨어 있으라

(마태복음 24:36-44)

 

우리는 인간으로서는 달력을 살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는 교회력을 삽니다. 세상 달력은 12월을 맞았지만, 교회달력은 대림절을 맞았습니다. 대림절(Advent)는 우리의 생각과 삶의 방식을 바꾸는 절기입니다. 정신 못 차리고 살다가 정신 차리게 하는 절기입니다. 대림절은 기다릴 대()와 임할 임()으로 구성된 말로, ‘임하는 것을 기다리는 절기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영어로 표현되는 Advent의 뜻을 다 담고 있지는 못합니다. Advent의 기본적인 뜻은, ‘뜻하지 않은 시간에 있는 하나님의 개입(역사)’를 말합니다. 오늘 말씀이 그것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44).

 

2천 년 전 유대땅 베들레헴에 생각하지 않은 때에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완전한 자유 가운데 생각하시고 행동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역사를 당신의 때에 이루십니다.

 

생각하지 않은 때에 그리스도께서 오셨기 때문에 2천 년 전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메시아)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다른 것을 참지 못합니다. 자신의 생각대로 세상이 돌아가야 직성이 풀립니다. 자신의 생각과 다르게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자,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과오를 범하지 않고, 생각지 못한 때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본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이라는 것 자체가 얼마나 은총 받은 존재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믿음은 시험대에 올라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처럼 어느 날에 우리 주가 임할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기때문입니다(42).

 

예수 그리스도가 2천 년 전에 유대땅 베들레헴에 오신 것은 약속의 성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메시야의 도래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2천년 전 유대땅 베들레헴에서 아기 예수의 탄생을 통하여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십니다. 구약성경은 그것을 증거합니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모세를 통하여, 다윗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셨고, 그 약속을 이루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것을 일컬어 언약이라고 합니다. 사실 성경 자체의 뜻이 언약입니다. 구약, 신약,이라고 하는 것이 옛언약’, ‘새언약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의 하나님이라는 진술은 매주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시고, 그 약속하신 것을 꼭 이루시는 분인데, 그분의 백성은 그 약속을 믿고 기다립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기다림의 종교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또는 약속의 종교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들이 가장 못하는 것이 기다림입니다. 요즘 한국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응답하라 1994’라는 드라마를 보면, “삐삐(호출기)”가 등장합니다. 요즘에는 쓰지 않는 전자기기인데, 그 당시 삐삐(호출기)”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누군가 호출하면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어 호출한 사람과 연락을 취하는 형태의 전자기기입니다. 그 당시 한국에서는 공중전화가 가장 잘 되던 시절이었는데, 삐삐를 차고 다니다 호출이 들어오면 공중전화에 줄을 서 연락을 취하곤 했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호출기를 지니고 다녔던 시절이라 공중전화는 언제나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앞사람이 너무 오래 통화하면 뒷사람들의 원성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통화를 길게 하는 앞사람과 그것을 기다리던 사람 간에 시비가 붙어 칼부림까지 나서 사람이 죽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그만큼 현대인들은 기다리는 것을 잘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발전된 전자기기가 핸드폰입니다. 핸드폰의 보급으로 삐삐와 공중전화가 사라지고, 그만큼 인간사회가 편리해지긴 했지만, 인간은 더욱더 조급한 존재가 된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인터넷을 보급을 통해 우편물 또한 감소했습니다. 옛날에는 손으로 손수 쓴 편지를 상대방에게 부치고, 상대방에게서 답장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설레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설렘은 없습니다. 전하고 싶은 소식이 있으면 이메일로 전하거나, 간단한 것은 핸드폰의 메시지 기능 또는 카톡 등을 이용하기 때문에, 오히려 상대방에게서 답장이 늦게 오면 짜증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렇듯 지금 시대는 기다림의 미덕이 없어지고, 온통 짜증만 넘쳐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대림절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시대에 뒤쳐진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의 뜻즉시알기 위하여 신접한 사람인 무당을 찾아가거나,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일컬어지는 성경을 쥐 잡듯이 뒤지거나 게임 하듯이 펼치기도 합니다. 이는 모두 자신의 조급한 욕망을 채우려는 종교적 열정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당신의 뜻을 드러내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으시는 분입니다. 언제나 예기치 않은 때에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욕망을 채우시는 분이 아니라, 당신의 역사, 당신의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욕망 가운데 있는 한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의 성취를 볼 수 없습니다. 욕망을 내려놓고,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에 기대는 수밖에 없습니다.

 

대림절을 맞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우리의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특별히 시간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시간은 그냥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흘러갑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시간은 의미 없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향해 나아가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 시간의 끝에 무엇이 있을까 고민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는 시간의 끝은 그저 죽음뿐입니다. 그래서 인생에 대한 인간의 기본적인 생각은 허무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그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이긴 새로운 생명, 즉 부활생명이 시간의 끝이라고 성경은 증거합니다. 대림절은 이것을 더욱 붙드는 절기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시간의 끝은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2천 년 전에 유대땅에서 일어난 부활이 완성되는 시간입니다. 2천 년 전에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부활이 일어났지만,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는 모든 믿는 자에게 부활이 일어납니다. 부활의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모든 이들을 당신처럼 부활의 몸을 입게 하신다는 겁니다.

 

이 시간의 끝,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면서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목적의식이 분명한 사람은 아무렇게나 행동하거나 살지 않습니다. 춘향이가 변사또의 수청을 거절한 이유는 한양에 과거시험 보러 간 이도령이 꼭 다시 돌아올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춘향이에게 이러한 믿음과 기다림이 없었다면, 춘향이는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변사또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나 춘향이는 목적의식이 분명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아무렇게나 행동하지 않고, 꼭 돌아올 이도령을 맞이할 몸과 마음을 유지했던 것이죠.

 

목적의식을 대림절의 용어로 바꾸면, ‘희망라고 합니다. 춘향이에게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힘들고 어려운 시절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이죠. 우리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입니다. 좀 더 넓은 개념에서 말하자면, 우리의 희망은 ‘Advent’입니다. 뜻하지 않은 때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은혜가 곧 우리의 희망입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이지만, 우리는 그 날을 기다리면서 절망의 순간 순간에 뜻하지 않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체험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깨어 있으라고 정신이 번쩍 나는 말씀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날에 우리 주가 임할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노아의 방주 사건을 예로 듭니다. 그때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하지 않은 임재를 깨닫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노아만은 하나님의 뜻하지 않은 임재를 준비하면서 살았습니다. 그 결과 노아는 구원 받았지만, 노아와 그의 가족 외 모든 사람은 갑작스럽게 임한 홍수에 휩쓸려 죽고 말았습니다. 그 정황을 오늘 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40-41).

 

이것은 누구는 구원 받고 누구는 구원 받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또한 이것은 우리를 겁주는 말씀도 아닙니다. 약속의 하나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꼭 이루실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노아의 홍수 때처럼 뜻하지 않은 때에 하나님이 역사하셨던 것처럼, 뜻하지 않은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거라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모순되어 보이는 이 두 가지 사실을 잘 구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꼭 다시 오십니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 즉 진리입니다. 그런데, 그 날은 우리가 알지 못합니다. 즉 뜻하지 않은 때에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두 사실은 긴장 관계에 있습니다. 믿음과 인내 없이는 이 두 가지 사실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 질문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거라는 약속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여러분께서는 인내를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시겠습니까?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셨을 때, 그분의 얼굴을 기쁜 낯으로 바라 볼 수 있게끔 성결하게 사시겠습니까?

 

우리의 주님이 다시 오십니다. 그러니 사시는 동안 너무 걱정 근심 가운데 살지 마십시오. 희망 가운데 용서하고 내려놓고, 화평 가운데 서로 사랑하며 사십시오. 그것이 바로 깨어 있으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11. 25. 15:12

우리가 정말 감사해야 하는 이유

(골로새서 1:15-20)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이기도 하지만, 교회력에 의하면 오늘은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입니다. 또한 교회력의 마지막 주일이기도 합니다. 다음 주부터는 대림절(대강절)로 시작되는 새로운 교회력이 시작됩니다. 교회에서 교회력을 지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교회력은 온통 삼위일체 하나님께만 집중하도록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오늘은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로서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도록 우리를 이끕니다.

 

여러분은 왜 감사하십니까? 무엇이 여러분의 입술에서 감사의 언어가 흘러나오게 합니까? 우리가 감사하는 이유를 가만히 들여다 보면, 우리는 쉽게 우리가 부자인 것(잘 먹고 잘 사는 것), 우리가 건강한 것, 우리의 어떠한 모습이 잘 된 것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그러한 것들을 가능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린다고 고백합니다. 물론 그러한 감사의 고백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정말 감사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이 세상에 그리스도가 우리의 으로 존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왕 또는 왕권은 다스림을 말합니다. 왕권은 다스리는 권세를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왕이라는 고백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다스리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의 삶에 실제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왕이 가지고 있는 세속적 의미 때문이고, 두 번째 이유는 그리스도의 왕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왕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대부분 권력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러면서 권력이란 자기 마음대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게 해주는 능력으로 생각합니다. 역사에서 패권을 차지하려고 했던 모든 영웅들은 권력을 손에 거머쥐고 천하를 호령하는 꿈을 꾸며 이 세상의 왕이 되려고 했습니다. 지금도 왕권을 차지하려고 하는 경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민주적이라는 단어로 조금 세련되게 포장되어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에 대한 세속적 이미지가 그리스도의 왕권을 흐리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왕권도 세속적인 왕권처럼 그 아래 있는 모든 것을 굴복시키는 패권 정도로 생각하게 끔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왕권은 세상에서 말하는 왕권과는 근본적으로, 질적으로 다릅니다. 이 세상에서의 왕권은 우리의 삶을 피폐시키고 멸망시키고 종속시킬 뿐이지만, 그리스도의 왕권은 우리는 구원하는 왕권이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스스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오르는 섬김의 왕권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세상의 왕권은 우리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왕권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줍니다.

 

이 세상에서 왕권을 주장하는 것들을 짚어 보면, 정치인들, , 죽음 정도로 추려낼 수 있을 겁니다. 이에 대해서 깊게 설명하지 않아도, 이러한 것들이 왜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지 못하는지 우리는 압니다.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서 백성을 기만하기 일쑤입니다. 그들이 하는 정치적 공약은 모두 장밋빛 거짓말에 불과합니다. 유권자들의 관심을 끌어 표를 모아 권력을 쟁취하려는 술수에 불과합니다. 일단 당선되고 나면 정치적 공약은 휴지통에 버려지기 일쑤입니다. 공약을 지키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 변명을 늘어놓기에 바쁩니다.

 

이 시대에 왕권을 가진 것 중 가장 강력한 것은 돈입니다.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팽배한 사회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물론 돈이 있으면 좀 편하게 살 수 있는 것은 맞지만, 돈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는 못합니다. 이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돈으로 할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특별히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가치들은 절대로 돈 주고 살 수 없습니다. 물론 돈이 있으면 값비싼 건강보험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건강 자체는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물론 돈이 있으면 으리으리한 집과 최신형 좋은 차를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물론 돈이 있으면 의료서비스를 그때그때 잘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생명을 연장시킬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돈이 죽음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인간이 풀 수 없는 죽음의 문제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인류가 이 땅에서 살아온 이래로 가장 치열하게 싸워온 문제는 죽음의 문제입니다. 이것을 둘러 싸고 철학이 발달되어 왔고, 이것을 둘러 싸고 의학과 과학기술이 발달되어 왔습니다. 죽음이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적 고찰과 죽음을 막아보려고 하는 인간의 노력은 눈물 겹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인간이 가장 작고 초라해지는 순간은 죽음 앞에 섰을 때입니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죽음이 밀려올 때 그저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는 것 외에는 어떠한 방도를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이 세상의 왕권과는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왕권을 만납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왕권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왜 그리스도가 왕이신지에 대한 이해를 충분히 가질 수 있습니다.

 

첫째, 오늘 말씀은 그리스도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말해 줍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알고 만날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은 그에 대한 답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그리스도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15).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지만, 그리스도는 보이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 그리스도를 보면 하나님을 보는 것이라 합니다. 성경은 일관되게 주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가장 분명하고 정확하게 만날 수 있다고 말이죠.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왕권은 하나님 그 자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오늘 말씀은 그리스도와 이 세상과의 관계에 대해서 말해 줍니다. “그는(그리스도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15b-16a). 초대 교회 성도들(사도들)이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이유는 예수의 부활체험 때문입니다. 예수의 부활체험을 통해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창조의 중재자로 인식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단순히 구원을 가져다 주는 존재 일뿐만 아니라, 모든 만물의 창조자로 인식된 것이죠.

 

셋째, 그리스도가 세상을 창조한 분이기 때문에, 그는 세상의 주권자로 받아들여 집니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16). 보이는 것들은 우리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을 말하나, 보이지 않는 것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들을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생명은 보이지 않는 것인데,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생명현상만 볼 뿐이지, 생명 자체를 보지는 못합니다.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죽음현상만 볼 뿐이지, 죽음 자체를 보지 못합니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았다는 것은 생명의 근원(또는 죽음의 근원)이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고 창조주이시고 이 세상 모든 것(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의 주권자시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고 하시는 일에 대해서 오늘 말씀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19-20).

 

이 세상의 왕권은 우리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배만 불리고 우리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 뿐이지만, 그리스도의 왕권은 화평을 이루는 왕권,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왕권, 즉 우리를 구원하는 왕권입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은 진정한 섬김의 왕권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사도들)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그리스도의 왕권과 같은 것을 만나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살고 있던 시대의 패권은 로마 황제가 쥐고 있었는데, 로마 황제는 자기 자신을 신이라고 말하며 자기 자신을 숭배할 것을 명령합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 성도들은 부활의 예수를 만난 뒤, 스스로를 신이라 하며 자신을 숭배할 것을 강요하는 로마 황제를 왕으로 모실 수 없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통하여 그들은 어떤 왕이 참된 왕인지, 뼈 속 깊이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우리는 여러 가지 감사의 이유는 놓고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올려드리는 감사의 이유를 면밀히 살펴보면 참으로 세속적입니다. 우리는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것 때문에, 건강한 것 때문에, 자식이 잘 된 것 때문에, 또는 하늘이 맑은 것 때문에 감사합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즉 가난해지거나 건강을 잃거나 자식이 속 썩이거나 또는 하늘이 흐리면 감사할 이유가 없어져 하나님을 섬길 이유가 없는 것처럼 감사의 이유를 세상적인 것에서 찾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추수감사주일과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을 맞아, 우리가 정말 감사해야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왕이신 것에 감사하십시오. 이 세상의 그 어떤 무엇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선포하고, 그분의 다스리심만을 받으며 사십시오. 왜냐하면 바로 거기에, 바로 그리스도께만 하나님과 화해하고 화평을 이루는 참된 구원의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하나님이시요 창조주이시요 모든 만물의 주권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왕이신 것을 감사합시다. 이것이 우리가 정말 감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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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11. 18. 05:12

네 사명이 너와 네 이웃을 살리리라!

(27:13-26)

 

예루살렘과 가이사랴에서의 재판을 모두 바친 사도 바울은 지금 가이사에게 상소한 까닭에 로마로 호송되고 있는 중입니다. 베스도 총독이나 아그립바 왕은 재판을 통해서 바울에게 아무런 혐의가 없음을 확인하고 그를 풀어주려고 했으나, 사도 바울이 자신의 억울함을 가이사(황제)에게 상소한 까닭에 어쩔 수 없이 로마로 가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사도 바울의 선교에 대한 열정이 숨어 있습니다. 바울은 예전부터 로마서에서 밝히고 있듯이 로마에 꼭 한 번 가 보고 싶다는 마음을 피력해 왔습니다. 시골 촌놈이 그 당시 세계 최고, 최대의 도시 로마에 한 번 구경 가고 싶다는 순진한 마음이 아니라, 로마를 발판 삼아 그 당시 땅끝이라고 여겨졌던 사바나(스페인)까지 선교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선교에 대한 열정은 누구도 말리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유대 땅 가이사랴에서 로마로 가는 길은 배를 타고 가는 것이 가장 빠릅니다. 요즘 지중해라고 불리는 바다를 건너 가는 것이지요. 그런데 배를 타고 아무 때나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중해에는 유로굴라라는 광풍이 때때로 부는 데, 그 광풍을 만나면 살아남기 힘들었습니다. 유대인의 절기로 대속죄일이 끝난 뒤에는 지중해에 유로굴라가 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바울 일행이 지중해를 건너야 하는 시점에 대속죄일이 끝난 모양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호송을 담당한 로마 황제 부대의 백부장에게 조언을 합니다.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10).

 

그런데 백부장과 선장은 바울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지금 정박하고 있는 항구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했기 때문입니다. 좀 더 편하게 겨울을 나고자 하는 인간의 얄팍한 심리가 앞에 놓여 있는 위험을 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불편한 것보다, 생명을 보존하는 일이 훨씬 중요합니다. 생명이 붙어 있으면 불편한 것을 견딜 수 있지만, 생명을 잃어 버리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은 때로 무엇이 중요한지 모르고 이렇게 어리석은 판단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초점이 생명에 맞춰져 있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에 대한 답은 분명합니다. 도로교통광고에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5분 먼저 가려다 50년 먼저 간다!” 몇 분 빨리 가려는 급한 마음에 과속하다가 사고 나기 일쑤입니다. 생명의 주님을 믿고 사는 그리스도인은 언제든지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삶의 습관이 베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죄수의 신분으로 호송 당하고 있는 입장이라 어떤 권위를 지니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선장과 백부장의 뜻대로 항해를 합니다. 물론 출발할 때 날씨가 안 좋았으면 달랐겠지만, 공교롭게도 출발 당시 남풍이 순하게 불어 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못 가 바울의 예상과 우려대로 광풍을 만납니다. 아찔한 순간입니다. 바다 한 가운데서 풍랑을 만난다는 것은 공포 그 자체입니다. 유로굴라 광풍 때문에 배는 표류하기 시작합니다. 상황이 악화되어 최후의 수단까지 진행해야 하는 순간이 옵니다. 즉 배에 있는 짐과 기구 모두를 바다에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안전, 생명을 위해 취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입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배가 풍랑을 견디지 못하면, 모두 물에 수장되는 것이지요.

 

인간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는 살아남기 위해 마지막 수단을 강구하게 됩니다. 1972년 럭비 선수들과 그의 가족들을 실은 비행기 한 한대가 우루과이를 출발하여 안데스 산맥을 넘다가 추락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추락의 여파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그 중에서 16명이 살아 남았습니다. 이들은 추위와 배고픔 가운데서 사투를 벌이게 됩니다. 그러다 72일만에 구출되는데, 구출된 후 그들의 증언은 전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살기 위해서 행한 마지막 수단은 먼저 죽은 친구와 가족의 인육을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이들은 살아남을 수 있었고, 두 명의 청년이 안데스 산맥을 걸어서 넘어가 구조 요청하는 일에 성공했기 때문에 이들은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바울 일행이 탄 배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까지 모두 강구했는데도 불구하고, 풍랑이 멈추지 않고 계속 표류하자 점점 삶에 대한 희망이 없어졌습니다.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20). 설상가상으로 사람들은 지칠 대로 지쳤습니다. 모든 물건을 바다 속으로 던져 넣는 바람에 먹을 것조차 없었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흔들리는 배 안에서 멀미가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정말 최악의 상황입니다.

 

그런 가운데, 바울이 일어나 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우선 아쉬운 마음을 전합니다.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21). 이것은 바울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은 사람들에게 핀잔을 주고 나무라는 말이 아닙니다. 희망이 없는 이들에게 희망을 심어주기 위한 노력입니다. , 지난 번에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았지만, 이번에 자신이 하는 말은 꼭 들으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이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는 이것이었습니다.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에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라”(22).

 

아무런 희망도 없이 구원의 여망마저희미해져 가던 풍랑을 만난 배 안에 있던 사람들에게 바울의 이 메시지가 얼마나 위로됐겠습니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 그들은 바울의 말에 희망을 걸었을 겁니다. 게다가 바울이 그렇게 말하는 근거는 참으로 희망적입니다.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들을 다 네게 주셨다”(23-24).

 

풍랑 속에서 구원의 여망마저희미해져 가는 상황에서 바울도 두려웠을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는 음성을 들려주시는 것이겠죠. 바울도 아마 이렇게 죽는구나라면서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다시 한 번 환기시키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바울이 붙들어야 할 사명이었습니다.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그렇습니다. 바울이 지금 이렇게 배를 타게 된 이유는 가이사 앞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바울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부여하신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사명을 받는다는 것은 그것 때문에 죽을 수도 있지만, 그것 때문에 살아남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일찍이 로마서에서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14:8). 이 말은 이것을 뜻합니다. 사명자의 생명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겁니다. 사명자의 생명은 하나님께 드려진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하나님께서 사명자의 생명을 우리 자신보다 귀하게 여기시고 아무렇게나 생명을 거두어가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보십시오. 바울의 사명은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는 것인데, 그 중 지금 현재 주어진 사명은 가이사 앞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만약 바울에게 그러한 사명이 없었다면 바울은 풍랑 속에서 허무하게 죽을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사명을 주신 분께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폭풍까지도 다스리시는 주님께서 당신이 바울에게 주신 사명을 완수하게 하시기 위해서라도, 바울을 살려 주시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바울과 한 배를 탄 사람들의 입장에서 우리는 이 문제를 돌아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명자와 한 배를 탄 것만으로도 구원 받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명자란 자신의 생명뿐만이 아니라, 자신을 둘러 싼 이웃들의 생명까지도 구원하는 놀라운 일을 행하게 됩니다.

 

바울의 희망의 메시지대로 풍랑 속에서 표류하던 그들의 배는 어느 한 섬에 걸리게 됩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그들, 이후의 삶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물론 성경은 그들의 삶을 조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상상력을 발휘해서 그들의 삶을 추적해 보면, 그들 중 상당수는 사도 바울의 희망의 메시지로 인하여서 복음을 받아 들이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었을 겁니다.

 

우리 자신에게 한 번 물어 봅시다. 나는 사명자인가? 하나님께서 불러 세우신 사명자인가? 하나님께 생명이 드려진 사명자인가? 나의 생명은 누가 주관하고 있는가? 나인가? 아니면 하나님인가? 나는 사람을 살리는 사명자인가? 아니면 사람을 죽이는 사명자인가? 물론 사람을 죽이는 사람을 일컬어 사명자라고 부르지 않습니다만, 사명자(使命者)와 사명자(死命者)는 완전히 다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사명이 너와 네 이웃을 살리리라!” 죽을 위기에 처해져 있었는데, 살아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맡긴 사명이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깨닫습니다. 또한 죽음 자체도 우리에게 많은 깨달음을 줍니다. 일례로 호주 선교사 데이비스가 있습니다. 1889 10 2, 호주 빅토리아장로회 소속 데이비스 목사가 선교를 지원하기 위해 누이인 메리와 함께 한국 땅을 밟습니다. 데이비스는 다섯 달 동안 서울에서 한국말을 익힌 후 육로로 20일 만에 부산에 도착했으나, 여행 도중 천연두에 걸려 도착 하루 만인 1890 4 5일에 게일 선교사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참 허무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데이비스의 허무한 죽음의 소식을 접한 호주 빅토리아장로교회 교인들은 한국 선교를 더욱 적극적으로 후원하기로 결정하고 메케이(J.D. Mackay)목사 부부와 멘지스(B. Menzies), 페리(J. Perry), 포셋(M. Fawcett) 등을 부산에 파송합니다. 그리고 189110, 수정산 자락 좌천동에 선교부를 세우고 부산을 중심으로 경남지역 선교를 시작합니다. 이렇게 죽음은 살아 있는 자들에게 사명에 대한 일깨움을 줍니다.

 

네 사명이 너와 네 이웃을 살리리라!”라는 말씀, 이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해의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명을 십자가에서 완수하셨을 때, 그것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킴을 받는 역사가 있었으며, 그것을 통하여 모든 인류의 구주가 되셨으며, 그것을 통하여 우리가 이제 새로운 생명,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명을 받는다는 것, 사명자로 산다는 것은 내가 속한 모든 곳을 생명력 넘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생명을 드린 사명자로 사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사명을 통하여 여러분과 여러분의 이웃들에게 생명이 넘치게 하실 것입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11. 10. 23:34

어디에 관심을 두고 사십니까?

(살후 2:1-5, 13-17)

 

 

최근 뉴스 중 제 마음을 아프게 한 기사가 있습니다. <기러기 아빠의 유언>이라는 제목의 기사였습니다. 53살 먹은 아빠가 자신의 삶을 비관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 이유는 아내와 아들을 미국 유학 보내 놓고 한국에서 혼자 살면서 몸과 마음이 모두 망가져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랍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그 기러기 아빠는 아들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습니다. “모든 분들한테 짐을 덜고자 이 길을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00아 끝까지 책임 못 져서 미안하다. 아빠처럼 살지 말고 열심히 살아라. 정말로 숨 막히는 세상이다. 아빠는 몸 건강, 정신 건강 모두 다 잃었다. 아무쪼록 모든 분께 죄송합니다.”

 

더 가슴 아픈 것은 기러기 아빠의 장례식에 아내와 아들이 참석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비행기 삯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네요. 그래서 장례는 형제와 친척만 참석했다고 합니다. 참 가슴 아픈 일입니다.

 

기러기 아빠가 아내와 아들을 유학 보낸 이유는 더 행복한 삶을 준비하기 위함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참 비참합니다. 행복은 온데 간데 없고, 가슴 아픈 사연만 남았습니다. 아내 또한 아들의 행복을 위해서 아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왔지만, 미국에서 아들 뒷바라지 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아빠를 이렇게 허무하게 보낸 아들은 어떠한 정신적 외상을 입었을까요? 정신 차리고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 되면 좋겠지만, 그렇게 한들 아빠가 다시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무슨 소용이 있나 싶기도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렇게 각박합니다. 어디에 마음을 두고 살아야 할지 모르는 세상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주인공들인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도 비슷한 상황에 처해있던 것 같습니다. 어디에 마음을 두고 살아야 할지 몰랐던 것이죠. 그래서 그들은 마음이 흔들리고, 두려워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격려의 편지를 써서 그들의 마음을 달래주었습니다. 그런데 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그렇게 마음이 흔들리고 두려워했을까요?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오해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은 무엇인가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갖게 되면 마음이 흔들립니다. 삶에 대한, 행복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갖게 되면, 위의 기러기 아빠를 통해서 보았듯이, 마음이 흔들리고 두려운 마음에 돌이킬 수 없는 가슴 아픈 선택을 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소망하는 바에 대한 잘못된 생각은 그릇된 행동을 낳아,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오히려 삶의 질을 망가뜨립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재림에 대한 오해입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를 써서 보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이전 편지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부활에 대해서 논하는 글을 써서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데살로니가 교회에 부작용을 낳고 말았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 몇몇이 사도 바울의 첫 번째 편지를 보고 예수님의 재림 시기를 오해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오로지 다시 오실 예수님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렇게 행동했던 그들의 마음도 이해할 만 합니다. 그들의 삶이 너무도 고단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인생살이의 고단함 만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것에서 오는 고단함이 컸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그 당시 예수를 믿는 잃은 크나큰 위험을 떠안아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세상이 예수 믿는 것을 좋은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을 통해서 볼 수 있듯이, 어디를 가든 예수 믿는 것을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단순히 방해하는 것을 넘어, 종교적 또는 정치적인 탄압을 받았습니다. 종교적 또는 정치적 탄압을 받은 경험이 별로 없는 우리들에게 그러한 삶이 얼마나 고단한지 아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나, 목숨에 위협을 날마다 느끼며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고단한 일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삶이 고단한 사람일수록 그 고단함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득한 법입니다. 병이 깊은 사람일수록 지푸라기라도 하나 잡고 싶은 심정에 그 병을 낫게 하는 약이 있다고 하면 그것이 아무리 혐오스러운 음식이라고 할지라도 먹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처럼 예수 믿는 것이 고단하다 보니, 하루 빨리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그들을 구원하시고, 그들의 삶을 고단하게 하는 불의한 세력들을 물리쳐 주길 바랐던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이 재림이 지연되었다는 겁니다. 이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기독교가 안고 있는 크나큰 딜레마입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24:34)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한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9:1)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증언과는 달리 예수님의 재림이 지연됐습니다. 그들은 진실로 자신들이 죽기 전에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 소망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종교적, 정치적 탄압 속에서도 신앙을 버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세월이 지나갈수록 이 세대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죽어나갔을 뿐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재림 징조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더 광신적으로 예수님의 재림에 매달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생각을 포기하고 그냥 생활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2천 년 전,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만 닥친 딜레마가 아닙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닥치는 딜레마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가고 계십니까?

 

사실, 지금은 교회에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말씀을 전하기 쉽지 않은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 다시 오시겠다는 예수님은 2천 년이 지나도 다시 오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교회에서 종말, 재림등의 단어를 써가며 복음을 전하는 일은 사기를 치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오늘 말씀을 붙들어야 하는 이유는, 성경의 증언을 우리 마음대로, 우리의 취향대로 골라 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종말, 재림등의 언어는 사기꾼들의 언어가 아니라, 우리 기독교의 언어입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은 묵상이 필요한, 하나님께서 만들어가시는 미래를 알려주는 중요한 언어입니다. 그 언어가 담고 있는 세계가 너무 깊기 때문에 우리가 잘 알지 못해서 그런 것이지, 그 언어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우리의 관심입니다. 우리가 가장 관심을 두어야 할 부분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복음입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가장 관심이 없는 부분이 예수님의 재림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저 예수 잘 믿어 지금 여기에서 잘 먹고 잘 살게 되는 것에만 관심을 둡니다. 예수의 재림이고 뭐고, 지금 먹고 살기 힘들어 죽겠는데, 예수가 다시 오든 말든 그것은 내 알 바 아니고, 그냥 이 숨막히는 세상에서 숨통이나 좀 텄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숨통 트이는 데는 이 최고이니까, 돈이나 좀 잘 벌 수 있게 해주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 더 이하도 바라지 않습니다. 그렇게,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복음인 예수님의 재림은 묻혀 버린 시대입니다.

 

사도 바울은 재림의 문제로 마음이 흔들리고 두려움을 갖고 살아가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크게 두 가지 교훈을 줍니다. 첫째, 재림에 대한 징후에 대해서 미혹되지 말라고 합니다. 예수의 재림이 있기 전에 배교하는 일이 있고 멸망의 아들이 먼저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것들을 파악할만한 지혜가 부족하다는 겁니다. 무엇이 배교이고, 누가 멸망의 아들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기독교내 교파들끼리 서로 치고 박고 싸우는 모습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모두들 자기들은 정통이고, 다른 이들은 이단이라고 합니다. 자기들만 옳고 다른 사람들은 틀렸다고 하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얼마나 지혜가 없는지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둘째, “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지키라고 합니다. 흔들리고 두려워하는 이유는 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지키지 못하고, 자꾸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사막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나침반을 따라 가는 겁니다. 그런데 사막에서는 나침반이 틀렸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나타납니다. 그렇다 보니, 나침반을 믿지 못하고 자기의 판단을 의지하여 길을 나서게 됩니다. 물론 자기의 판단을 의지하면 속은 편할지 몰라도, 사막에서 자신의 판단을 의지하다가는 결국 죽음을 면치 못합니다. 이처럼, 사막처럼 숨막히는 세상에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나침반, 즉 사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진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을 따라서 이 세상을 사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숨막히는 세상, 여러분은 어디에 관심을 두고 사십니까? 사실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관심이 있는지 조차 모르고,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정신 없이 살아갑니다. 개미 집단의 80%가 그냥 앞의 개미가 가는 대로 별생각 없이 그냥 따라 다니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개미보다 나은 존재라고 생각하며, 개미를 보면 우습게 생각하고 침 바른 손가락 끝으로 하찮게 죽여 버리지만, 생각해 보면 개미나 우리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왜요? 별 생각 없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우리의 나침반이 무엇인지, 우리가 이 숨막히는 세상에서 어디에 관심을 두고 살아가야 하는지 성경의 가르침을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이것을 놓쳐 버리면 우리의 인생이 개미처럼 하찮은 인생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재림)’에 관심을 두고 살아가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성경의 증언을 그대로 따라간다면, 이 세상은 숨막히는 세상이 아니라, 위로와 소망의 세상이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삶은 몸과 마음의 건강을 잃는 안타까운 삶이 아니라, 생명력 넘치는 귀한 삶이 될 것입니다.

 

저도 사도 바울의 말을 인용하여, 여러분께 복을 빌어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6-17). 아멘.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