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3. 7. 28. 23:05

뻔뻔한 기도 (Shameless Prayer)

(누가복음 11:1-13)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숙제입니다. 기도가 가능한 것은 우리 인간의 간절한 마음 때문이 아니고, 기도를 들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살아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허공에 대고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아니고, 대상이 정확한 기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하는 데도 형식이 중요합니다. 기도는 단순한 말이 아니고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대상과 관계를 맺을 때에는 그에 따른 예법이 필요한 법입니다. 남편과 아내 간의 예법이 있고, 부모와 자식 간에 예법이 있고, 친구들 간에도 예법이 있습니다. 목사와 성도들 간에도 예법이 있고, 성도들 간에도 예법이 있습니다. 그 예법에서 벗어나면 관계가 어긋납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기도에 관한 중요한 예법을 일러주십니다. 여기서 예법이란 윤리, 도덕적으로 갖추어야 할 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방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기도가 그 열매를 맺을 것인지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기도할 때 우리의 최고 관심사는 기도의 응답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기도해야 기도의 응답을 가장 잘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는 꼭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그것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선 주기도문에 대한 가르침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가 매일 외우는 주기도문은 여기 누가복음에 나온 것을 근거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태복음에 나오는 것을 근거로 합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주기도문은 우리가 늘 외우는 주기도문보다 짧습니다. 빠진 부분이 많습니다. 기도는 관계라는 것을 생각할 때, 주기도문은 매우 중요한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도 그렇고, 아버지의 이름을 존귀하게 생각하는 것도 그렇고,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기도하며 평화를 간구하는 것도 그렇고, 욕심내지 않고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도 그렇고, 화해를 간구하는 것도 그렇고, 시험에 들지 않기를 구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주기도문의 핵심은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관계를 생각하지 않는 기도는 이방인의 기도입니다. 관계를 생각하지 않고, ‘나 자신의 이익만을 구하는 기도는 관계의 중심인 사랑이 없는 기도이기 때문에 무익한 기도에 그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는 성서의 진술을 기억할 때, 사랑이 중심이 된 관계적인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지금 내가 드리는 기도가 사랑에 바탕을 둔 관계적 기도인지 아닌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벗어난 기도는 예법에서 어긋난 기도이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듣지 않으십니다.

 

주기도문으로 기도를 가르치기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기도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가르치십니다. 이 비유는 친구 간에 벌어진 일을 바탕으로 합니다. 어떤 사람이 한 밤중에 친구를 찾아갑니다. 이유는 손대접 때문입니다. 10장에서도 손대접의 문제가 거론되었는데, 11장에서도 손대접의 상황이 등장합니다. 여행 중에 있던 어떤 사람의 친구가 한 밤 중에 방문을 했는데, 마침 그 친구를 대접할 양식이 없어, 그 사람은 한 동네에 사는 친구에게 양식을 구하러 한 밤 중에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 갑니다.

 

이미 한 밤 중이기 때문에 친구와 친구의 가족은 잠자리에 누웠습니다. 그런데 난감하게도 그 와중에 문을 두드립니다. 양식을 구하는 친구에게 잠 자리에서 일어난 친구는 말합니다.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7). 좀 짜증나는 상황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짜증나는 상황을 만든, 한 밤 중에 남의 집을 찾아간 사람에게 비난의 손가락질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예수님 당시의 문화적 상황에서는 손가락질을 받아야 할 사람은 양식 주기를 거절하는 친구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8). 양식을 좀 꾸어 달라는 요구를 들어주긴 하는데, 들어주는 이유가 그 사람이 친구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간청함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부분을 이해하려면 좀 더 설명이 필요합니다. ‘간청함은 대개 영어로 ‘persistence’로 번역됩니다. 이는 고집, 집요함, 인내력, 불굴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영어 성경에서는 간청함‘boldness’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대담함, 무모함, 버릇없음, 뻔뻔스러움, 철면피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찾아낸 간청함의 정확한 뜻은 ‘shamelessness’가 가장 잘 담고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제목도 뻔뻔한 기도라고 정한 것입니다. ‘shameless’부끄러움을 모르는, 즉 뻔뻔한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수련회 가는 길, 알고 보니, 예전에 이의재 집사님과 함께 포사이드 법정에 가기 위해 갔던 길이었다. 그래서 일정에 없었지만, 포사이드 법원 앞 버거킹에서 이의재 집사님과 예전에 함께 점심 먹었던 것을 기억하면서 점심 식사를 했다. 그러면서 기도했다. 집사님은 하늘 나라에 잘 계신지 여쭙고, 유가족들의 평강을 위해서 기도 드렸다. 이의재 집사님에게 전화 받은 것이 작년 이 맘 때다. 그런데, 두 달 후, 소천하셨다는 소식을 부인 집사님에게서 들었다. 참 마음이 아팠다. 영주권 받는다고 좋아하셨는데, 영주권 받으면 우리 건유 찬유 줄 뻥튀기 사들고 한 번 오신다고 했는데. 여기 계시는 동안, 오늘 등장하는 친구처럼 나를 얼마나 괴롭혔는지 모른다. 미운 정, 고운 정 다 든 분이다. 그래서 더 마음이 짠하다. 술병만 났다하면, 나에게 전화해서 개새끼 소새끼 욕을 해대고, 직장에 무단 결근한 것 처리하느라 매니저와 엄청 통화했고, DUI 걸리셔서 그 문제 해결하느라, 변호사 대신(변호사가 돈 안 줘서 안 간다고 하루 전날 손 놓아 버리는 바람에) 내가 법정에 서서 증언해 주고, 통역해 주었다. 이 때 정말로 힘들었지만, 내가 이의재 집사님의 요구를 하나도 빠짐 없이 잘 들어주었던 이유는 이의재 집사님의 간청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도 내가 가지고 있는 목사라는 위치 때문이었다. 목사인 나에게는 그러한 의무가 필연적으로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매우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은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9-10). 이것은 위에서 말한 뻔뻔한 기도가 어떤 기도인지를 말해주는 말씀입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 왜 이렇게 해야 하는가는 손대접의 사회적 풍습을 이해하면 알 수 있습니다.

 

고대 유대인 사회에서 손대접은 매우 중요한 사회적 약속이었습니다. 낮에 찾아왔건, 한 밤 중에 찾아왔건, 손대접을 잘 해야 그 공동체가 칭송을 받습니다. 손대접을 얼마나 잘 했느냐에 따라서 공동체의 운명이 갈렸습니다. 손대접을 잘 했다면 그 공동체는 명예롭게 존속할 것이고, 손대접을 잘 못했다면 그 공동체는 부끄러움 가운데 소멸될 것입니다. 요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손대접의 사회적 의미가 완전히 달랐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한 중차대한 문제 앞에서, ‘뻔뻔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 내가 죽고 사는 문제 앞에서 체면 차릴 여유가 없습니다. 이런 문제를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당장 죽게 생겼는데도, 지금 나에게 일어난 문제들 때문에 부끄러움을 당하고 있는데도, 그것이 부끄러움인줄 모르고 태연하게 있습니다. 오히려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하면서 어긋난 겸손함을 보이며 하나님 앞에 나아와 뻔뻔한 기도를 드리지 못합니다. 참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기도에 대한 응답을 해주시는 지에 대한 지혜를 얻을 수 있는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생명)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11-13).

 

잠 자던 친구는 한 밤 중에 찾아와 양식을 꾸어 달라는 것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친구로서가 아니라, 사회적 파장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그 친구에게 양식을 내어주지 않으면, ‘손대접의 도리를 지키지 않은 것 때문에 사회적으로 손가락질을 받을 것이 확실 했기 때문에, 자신을 보호하고, 공동체를 보호하는 차원에서도라도 양식을 내어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제가 이의재 집사님을 성심껏 도와준 원리와 비슷한 겁니다. 목사가 성도의 어려움을 모른 채 하면, 목사로서의 사회적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이 되고, 공동체에 누를 끼치는 경우가 되기 때문에, 도리 때문이라도 이의재 집사님을 도와주지 않을 수 없는 것이죠.

 

우리의 상황이 이럴진대, 하물며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어떠시겠느냐는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기 원하시고, 성령(생명의 영, 생명)을 주기 원하십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이 거룩한 것을 유지하시는 겁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지 않고, 생명을 주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그러한 분을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입니다. ‘악마라고 부르겠죠. 악마는 우리에게 나쁜 것, 죽음을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것, 생명을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언제든지 뻔뻔한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는 우선 사랑이 바탕되어야 합니다. 오늘 등장하는 어떤 사람도 손대접의 의무를 지키기 위해서, 즉 사랑을 바탕으로 간청한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기도가 사랑에 바탕되어 있다면, 우리는 뻔뻔한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뻔뻔해야만 합니다. 지금 인정사정 볼 겨를이 없습니다. 지금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는데, 인정사정 볼 겨를이 어디 있습니까? 담대하게 나와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기 원하시고, 생명을 주기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뻔뻔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신다는 겁니다.

 

비록, 모든 기도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응답 받는 것은 아니지만, 응답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 달린 것이니까, 신실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맡겨두고, 우리 쪽에서는 그저 뻔뻔한 기도를 집요하게 드릴 수 있는 특권이 있다는 것만 알아두면 됩니다. 기도할 때 좀 뻔뻔해져도 괜찮습니다. 우리에게 좋은 것과 생명을 주기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꺼이 응답해 주실 겁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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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7. 21. 22:37

마르다의 세상에서 마리아의 세상으로

(눅 10:38-42)

 

오늘 말씀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비 나사로가 죽었다 예수님에 의해 다시 살아나는 일화도 나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가족은 예수님과 깊은 연관이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자주 친교를 가졌습니다. 그 중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일화를 성서 기자가 택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성서 기자는 여러 가지 일화 중에서도 이 일화를 기록에 남겼을까요?

 

일의 형편은 이렇습니다. 늘 그렇듯이 예수님께는 베다니를 지나실 때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가정을 방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방문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손대접의 도리를 다 하기 위하여 집안식구들은 분주하게 움직입니다. 옛날에는 요즘처럼 식료품 가게나 음식 만드는 도구가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손대접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음식 장만하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아직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예수님께서 도착하신 것 같습니다. 손님이 도착했으니 몸과 마음이 더 분주해졌을 겁니다.

 

문제는 바로 그 시점에 발생합니다. 언니 마르다는 손대접의 도리를 잘 완성하기 위해서 몸과 마음이 너무 분주했습니다. ‘손대접의 의미를 요즘식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요즘에는 손대접이 그렇게 사회적 관계에서 절대적인 의미를 차지하고 있지 않지만, 옛날에는 손대접을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서 그 공동체의 운명이 갈릴 정도였습니다. ‘손대접을 잘 못하면 그야말로 공동체의 수치로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돈이 제일 중요한 사회가 되었지만, 옛날에는 명예와 수치가 가장 중요했습니다. 요즘은 돈을 위해 생명을 걸지만, 옛날에는 명예와 수치를 위해서 생명을 걸었습니다.

 

그런면에서 보면 손님을 잘 대접하기 위해서 마르다가 분주한 것은 당연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동생 마리아는 언니를 도와 손대접을 준비하는 일을 그만 두고,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마르다가 발끈합니다. 굉장히 화가 났었나 봅니다. 발끈해도 동생 마리아에게 해야 하는 건데, 손님인 예수님에게 하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40)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적어도 미소를 지으면서 이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인상 쓰면서 감정이 섞인 상태에서 곱지 않게 말이 나갔을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마리아도 뻘쭘하지만, 가장 뻘쭘한 건 손님인 예수님입니다.

 

뻘쭘해서 머리를 긁적였을 만도 한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41,42). 이야기는 그냥 여기서 끝납니다. 이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성서 기자는 말해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상상해 보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어떻게 되었을 것 같습니까? (각 속회별로 이 후의 이야기를 꽁트로 만들어서 발표회 같은 것을 해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분명 여러 가지 재미있는 상상력이 펼쳐지겠지요.)

 

우리는 흔히 이 이야기의 교훈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일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말씀을 듣는 일이다!’ 굳이 따지자면 이 말도 맞습니다. 말씀을 들어야 일도 온전히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성서 기자가 이런 단순한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일화 중 이 일화를 선택해서 기록에 남기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일화에서 무엇을 생각해 보아야 할까요?

 

우선, 마르다가 열심히 일 한 것 때문에 문제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부분에 대해서 언급을 하지 않으시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다른 사람(이웃)을 섬기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겁니다. 열심을 다해서 봉사하는 사람이 없다면 공동체는 절대로 유지될 수 없습니다. 말씀을 듣는 것과 봉사하는 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고, 들숨과 날숨처럼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라는 말씀에 집중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마르다에게서 내 모습을 발견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거울처럼 보여줍니다. 우리는 많은 일로 마음이 분주하여 염려하고 근심하느라, 집중하지 못하고 정신이 산란한 상태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선택해야 할 좋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바쁘게만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마르다의 세상입니다.

 

성서에 나오는 모든 이야기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초점을 맞추라는 초대의 이야기입니다. 지금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는 길과 진리와 생명되신예수님께서 손님으로 와 계십니다. 손님에게 가장 융성한 대접은 무엇입니까? 손님에게 집중하는 겁니다. 아무리 진수성찬을 차려 놓아도, ‘나 지금 바쁘니까 이거 빨리 먹고 집에 가세요!’라는 마음이 들 정도로 손님에게 소홀하면 손대접은 실패하는 겁니다. 그러나 물 한 잔을 놓아두고서도 손님에게 집중하여서 손님이 마음의 평안과 감사를 느낀다면, 그것만큼 융성한 대접이 없는 겁니다.

 

마르다의 염려와 근심은 예수님에게 집중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마르다의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마음이 분주하여, 염려와 근심 때문에 예수님에게 집중하지 못하는 겁니다. 여기서 분주하다라는 단어는 페리에스파도라는 헬라어인데, 이 말의 뜻은 다른 방향으로 질질 끌려가는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질질 끌려가더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끄시는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마리아가 언니 마르다와는 달리 칭찬 받고 있는 이유는 일 하지 않고 말씀 들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자꾸 그러한 이분법적인 사고에 사로 잡혀서 이것 아니면 저것을 생각하는데, 중요한 것은 방향입니다. 마르다가 예수님께 한 소리듣는 이유는 마르다의 섬김 때문이 아니라, 잘못된 방향 때문입니다.

 

마르다를 향한 예수님의 말씀은 마르다를 꾸짖으시는 것이 아니라, 마르다를 새로운 세상을 초대하시는 겁니다.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주시는 겁니다. 마르다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현존(예수님께서 자신과 지금 바로 이 자리에 함께 하시는 것)을 받아 들이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겁니다. 그래서 그녀의 가치가 그녀가 지금 하고 있는 일로 인해서, 그리고 그 일을 얼마나 잘 하는지를 통해서 평가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녀가 누구인지 알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마르다의 세상,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우리의 가치를 우리가 얼마나 바쁘냐,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이루었느냐, 또는 우리가 다른 사람의 기대에 얼마나 부응했느냐에 따라서 매겨지는 세계입니다. 그것을 감당하느라, 우리는 마음이 분주하여 염려하고 근심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교회에 나오는 것, 이렇게 예배 드리는 것도 그냥 분주한 일상의 스케줄 중 하나로 전락하고 맙니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다를 초청하시는 것처럼, 우리를 마리아의 세상으로, 새로운 세상으로 초청하고 계십니다.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해서 염려와 근심에 짓눌려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우리들을 은혜와 진리의 말씀을 듣는 자리로 초대하십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이렇게 나와서 예배 드리는 자리가 분주한 일상의 스케줄 중 하나의 자리가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얼마나 사랑 받고 있는지, 우리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하는 은총의 자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성서 기자는 이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인지 모릅니다. '지금 손님으로 와 계신 예수가 실은 손님이 아니라, 주인이시다!' 그러니 손님으로 와 계신 예수님에게 집중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일이 많아서 마음이 분주하여 염려와 근심에 쌓인 마르다의 세상에서, 한 가지만이라도 족한, 좋은 편을 택한 마리아의 세상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거기엔 우리에게 참된 생명과 풍성한 은총을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손님이자 주인으로 앉아 계십니다. 그 발치에 가서 그분의 말씀을 들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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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7. 14. 23:08

이웃이 되라

(눅 10:25-37)

 

오늘 본문 말씀인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와 함께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게 된 배경은 이렇습니다.

 

어떤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고자질문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율법사는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율법사이기 때문에 율법의 관점에서 질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영생구원의 다른 표현입니다. 구원에 대한 유대인들의 기본적인 관점은 율법에 있습니다. 행위(율법을 지키는 것)를 통해서 받는 구원입니다. 율법사가 이렇게 질문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자신들의 전통적인 가르침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들에게 율법을 잘 지켜라. 그래야 구원이 있다.’라고 가르쳤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텐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유대인들의 가르침과는 달랐습니다.

 

그러면 구원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무엇이었나요? 이것은 신약성경 전반에 흐르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구원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믿음입니다. 행위를 통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믿음을 통해서 구원 받는다는 가르침입니다. 이것을 첨예하게 논한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율법(행위)과 복음(믿음)’의 문제를 명확하게 규명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율법사의 비열한 의도를 알아 차리신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율법사의 질문에 예수님은 이렇게 다시 질문하십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그러자 율법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이 말씀은 신명기 65절 말씀과 레위기 1918절 말씀의 인용입니다. 율법사이기 때문에 율법의 내용과 요구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것을 인정하시며, 그렇게 살면 생명을 얻게 된다고, 구원 받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율법에 의한 구원을 인정하는 발언은 아닙니다. 질문이 여기서 끝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이어지는 질문과 대답이 더 중요합니다. 이 부분이 핵심입니다. 율법사는 예수님께 또 이렇게 질문합니다. 이렇게 질문하는 이유를 성서기자는 이렇게 밝힙니다.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29). 율법사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한 질문은 이런 겁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이니이까?”

 

율법을 통해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 잡힌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나의 이웃인가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에 의하면 이웃은 사랑하고, 원수는 미워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누가 나의 이웃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에 사로 잡혀 있는 율법사를 위해,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그의 생각에 파문을 던지십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배경은 이렇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목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거반 죽게 되어 쓰러져 있습니다. 마침 제사장이 그 길을 지나가다 강도 만난 사람을 목격합니다. 그런데 왠 일인지 제사장은 그냥 못 본 체 하고 지나칩니다. 곧 이어 레위인이 그 길목을 지나가다 강도 만난 사람을 목격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도 제사장처럼 그냥 못 본 체 하고 지나칩니다. 세 번째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는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그 사람을 불쌍히 여겨자신의 짐승에 태워 주막에 데리고 가서 치료해 주며 목숨을 구해줍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했던 것 무엇이었을까요? 우선 이런 생각이 듭니다. ‘사마리아 사람처럼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해야 한다.’ 이러한 깨달음을 얻고 실천하는 것도 참 괜찮은 겁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렇게 살아가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길을 가다가 강도 만나서 거반 죽게 된 사람을 어떻게 처리하시겠습니까?

 

현대인들에게 가장 손쉬운, 그리고 정당하다고 느끼는 방법은 경찰에 신고하는 겁니다. 현대인들에게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은 더 이상 나의 일이 아니라, 경찰이나 소방수, 또는 사회복지사(정부)들이나 하는 일 정도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녀들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길 가다 다친 사람이나 어려움에 처한 사람 있으면 니가 어떻게 하려고 들지 말고 경찰에 빨리 신고해.’ 이렇게 조치를 취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전혀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 않고 불쌍한 사람을 도와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과연 이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일까요?

 

오늘 말씀은 율법사의 몇 가지 태도에 대해서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율법사는 구원에 대한 문제를 율법과 관련시킵니다. 또한 율법사는 자신을 옳게 보이게 하는 데관심을 둡니다. 이러한 생각에 사로 잡혀 있는 사람은 절대로 사마리아인처럼 누군가에게 이웃이 되어 주지 못합니다.

 

율법이 구원을 가져다 주지 못하는 이유는 두 가지 입니다. 첫째, 율법을 온전히 다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둘째, 율법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게 만듭니다. 율법사의 질문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우리의 이웃입니까?’ 누가 우리의 이웃이고, 누가 우리의 원수인지 구분할 수 있습니까? 인간 사회에서는 오늘의 이웃이 내일의 원수가 되기도 하고, 오늘의 원수가 내일의 이웃이 되기도 합니다. 그거 구분하려 들려다, 허송 세월 보내고 맙니다. 이웃을 사랑해 볼 겨를도 없이, 누가 나의 이웃인가만 고민하다 인생 다 가고 맙니다.

 

또한 율법에 매인 사람은 자신이 옳게 보이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결국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게 됩니다. 지극히 이기적인 사람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강도 만난 자를 그냥 지나친 제사장과 레위인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이 강도 만난 자를 그냥 지나친 이유는 율법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제사장과 레위인은 피를 만지거나 죽은 사람을 만지면 안 됩니다. 이것이 이 사람들을 부정하게 만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부정해졌다는 것은 이들의 본연의 임무인 성전 일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에게 중요한 건, 사람이 아니라, 율법을 지킴으로 자기 자신을 옳게 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인 것이죠. 그 당시, 제사장과 레위인의 이러한 행위에 돌을 던질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에서 명령하는 대로 자신을 옳게 보이려고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생각에 파문을 던지시는 겁니다. 요즘 말로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루시는 겁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 뒤, 율법사에게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누구죠? 사마리아인입니다. 그냥 이렇게 대답하면 될 것을, 율법사는 사마리아인을 입에 올리기도 싫고, 너무 뻔하게 대답하기도 싫어서인지, 이렇게 세련되게 대답합니다.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결론을 내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무슨 말씀입니까? ‘가서 너도 자비를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누가 나의 이웃이냐를 따지지 말고, 사라미아인처럼 그냥 가서 이웃이 되어 주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참 어려운 겁니다. 패러다임의 전환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늘 주보의 <행복어 사전>에도 실어 놓았습니다만, 딕 티비츠라는 분이 <용서의 기술>이라는 책에서 겸손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합니다. “겸손이란 내가 생각하는 것이 반드시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겸손, 내가 가진 기준이 모든 이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겸손,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은 모든 지식의 극히 일부분이라는 겸손, 내가 상처 입은 상황이 모두 상대방의 잘못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겸손이다.”

 

사람들은 세 가지 착각을 하며 산다고 합니다. “자신이 남보다 잘 생겼다는 착각,자신이 남보다 똑똑하다는 착각, 자신은 항상 옳다고 생각하는 착각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이러한 생각에 사로 잡혀 있기 때문에, 그냥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 주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나보다 못 생긴 사람은 나의 이웃이 될 수 없습니다. 나보다 못 난 사람은 나의 이웃이 될 수 없습니다. 내 생각과 다른 사람은 나의 이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누가 나의 이웃이 될 수 있습니까? 나만큼 잘 생겼거나 나보다 잘 생긴 사람이 나의 이웃이 될 수 있습니다. 나처럼 똑똑하거나 나보다 잘난 사람이 나의 이웃이 될 수 있습니다. 나와 생각이 엇비슷한 사람이 나의 이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사람을 찾아 헤매느라, 누군가의 이웃이 될 겨를이 없습니다.

 

이것을 철학적으로 가장 잘 풀어낸 분은 아마도 마틴 부버라는 분일 겁니다. 오스트리아 출생의 유대인 종교철학자인 마틴 부버의 <나와 너>라는 책을 보면, 인간 관계의 페러다임을 나와 그것에서 나와 너의 관계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을 볼 수 있습니다. 부버의 눈에 세상은 사물의 관계로 되어 있습니다. ‘나와 그것입니다. 그것(it)은 그저 내가 이용할 대상일 뿐입니다. 위에서 율법사가 말한 대로, 그것은 나를 옳게 보이려고하는데 이용할 뿐입니다. 세상은 이렇게 돌아갑니다. 모든 것이 다 이용 대상일 뿐입니다. 기업가는 노동자를 이용해서 자산을 불리고, 반대로 노동자는 기업가를 이용하여 자신의 생계를 꾸려 나갑니다. 교육 사업가는 학생들을 이용하여 교육 사업을 확장해 갑니다. 학생들은 선생님을 이용하여 대학을 잘 가기만 하면 됩니다. 교회는 교인을 이용하고, 교인은 교회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종교적 욕구를 채우기만 하면 됩니다. 심지어 부모 자식 간에도 이런 사물의 관계가 보입니다. 부모가 자신의 출세에게 도움이 되면 부모이고, 걸림돌이 되면 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관계에서 벗어나, 마틴 부버의 용어를 빌려 표현하자면, ‘나와 너의 관계로 들어서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것을 잘 표현해 주는 시가 한 편 있습니다. 여러분이 학창 시절에 열심히 외웠던 시입니다. 김춘수의 <>이라는 시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의미)이 되고 싶다.

 

예화) 조민정 권사님과 그 가게 주인 간의 법적 공방: 만약 가게 주인이 세입자를 -그것의 관계가 아니라, ‘-의 관계로 생각했다면 적어도 치료비를 다 물어주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 $500.00 주고 만다고 한다. 자신의 가족이 그렇게 다쳤어도 이런 식으로 해결했을 것인가? 그 주인도 아마 교회 다니는 사람 일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 보다는 율법사처럼 행하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끊임 없이 누가 나의 이웃인가?’를 고민하고 나의 이웃을 찾습니다. 자비를 베풀 때에도 그가 내 이웃인가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나를 어떻게 옳게 보이게 할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이 내 이웃인지 먼저 살피지 않았습니다. 도덕적으로 괜찮은 사람인지, 신앙이 좋은 사람인지, 유대인인지 이방인인지, 나에게 유익을 끼칠 사람인지 해악을 끼칠 사람인지, 등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냥 강도 만난 자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한 없는 연민의 정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여행 일정에 차질이 생기는 데도 불구하고, 그 불편을 감수하면서 강도 만난 자를 도와주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이웃이 되어 주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그러면 결국 강도 만난 사람, 불쌍한 사람,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만나면 불편을 감수하고서라도 도와주라는 얘기네 라고 생각하시면 오늘 말씀을 잘못 들으신 겁니다. 물론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이웃에 대한 우리의 패러다임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누가 우리의 이웃인가?’ 또는 나를 옳게 보이려고의 율법적인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냥 이웃이 되어 주라는 겁니다. 우리는 이웃이 되어주는 데까지 거쳐야 할 과정이 너무 많은 게 탈입니다. 그냥, 이웃이 되어 주십시오. 정말 그럴 순 없는 겁니까?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7. 12. 13:57

은혜의 눈을 발견하라

창세기 3

(창세기 6:1-12)

 

세상은 가인의 후예와 셋의 후예로 구분됩니다. 가인의 후예는 죄악으로 물들고, 셋의 후예는 은혜로 물듭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셋의 후예 중 에노스에 이르러서 비로서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오고, 사람의 딸들이 나옵니다. 사람의 딸들은 이해가 가는데,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구인지 이해가 안 가서 질문해 오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욥기서에서 천사적 존재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셋의 후예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벨처럼, 에노스처럼 하나님께 온전히 예배 드리는 사람들을 일컬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의 딸들은 어떤 사람들을 지칭하는 지 아시겠죠? 바로 가인의 후예들, 즉 죄악에 물든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결혼하기 시작합니다. 셋의 후예들과 가인의 후예들이 결혼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온전하게 예배 드리는 의인들과 하나님을 모르는 죄인들이 결혼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그냥 상황만 봐도 그 결과가 별로 좋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듭니다.

 

2절 말씀을 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이 구절은 매우 흥미로운 구절입니다. 우리 나라 말에는 그 느낌이 잘 드러나 있지 않지만, 이 구절을 히브리어로 보면 그 옛날 아담과 하와 때 하와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 금지된 나무의 열매를 따먹는 상황과 매우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토브)’보고(라아)’ 원하는 이들을 모두 아내로 취합니다’(라카흐). 이것은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아 금지된 나무의 열매가 먹음직(토브)’함을 보고(라아)’ 결국 그것을 (라카흐)’ 먹은 과정과 동일합니다. 동일한 단어들이 사용됩니다. 죄를 짓게 되는 과정이 똑같다는 겁니다.

 

믿음으로 행하지 않고, ‘보는 것에 근거해서 행동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믿음으로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게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2:16-17). 그러나 하와는 뱀의 꼬임에 넘어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했습니다.

 

결국 신앙은 믿음으로 행하는 것과 보는 것에 근거해서 행동하는 것과의 싸움입니다. 우리 신체 감각 중 가장 타락한 곳이 어디인지 아십니까? 바로 눈입니다. 우리 신체 감각 중 가장 중요한 곳도 눈입니다. 다른 신체 감각이 고장 나도 눈 감각만 살아 있다면 그나마 살만합니다.

 

연세대학교 영문과 교수를 지내신 임철규 씨가 쓴 <눈의 역사 눈의 미학>이라는 책을 보면, 인간만이 을 통해서 사유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인들의 언어를 보면 나는 안다오이다라는 동사는 원래 나는 본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보는 것이 곧 아는 것이죠. 그만큼 눈이라는 것, 본다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보는 것에 근거해서 행동하는 것은 많은 엉뚱한 결과를 낳게 됩니다. 인류의 역사를 들여다 보면, 그럴 것도 없이 성경에 나와 있는 스토리를 보더라도 보는 것에 근거해서 행동한 것 때문에 인간에게 얼마나 큰 어려움이 닥치는지 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위에서 살펴본 에덴동산에서의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사건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의 주인공인 노아 때에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 즉 믿음에 근거하지 않고 보이는 것에 근거해서, 날씨가 좋다는 이유 때문에 노아가 방주 짓는 것을 비웃다가 결국 멸망 당하고 맙니다. 이 후, 다윗 왕 때도 그러한 일이 벌어집니다. 한창 전쟁이 일어났을 때 부하 장수들을 전쟁터에 내보내고 왕궁에서 쉬고 있었던 다윗은 왕궁을 거닐다 우연히 밧세바라는 여인이 목욕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됨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짓게 됩니다.

 

이에 반해 보는 것에 근거하지 않고, 믿음으로, 즉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행동함으로써 구원의 역사를 체험하는 믿음의 조상들도 즐비합니다. 그 예가,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보는 것에 근거해서 움직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믿음으로 가나안 땅으로 이주하여서 복의 근원이 된 인물입니다. 훗날, 요셉도 그렇습니다. 형들에게 애굽으로 팔려가 군대장관 보디발의 집에 기거할 때, 눈에 보이는 것에 근거하지 않고, 믿음으로 행동하여 목숨을 건지고 크게 쓰임 받습니다. 군대장관의 아내가 얼마나 아름다웠겠습니까? 그 당시 최고의 미인인 중 한 명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요셉은 눈에 보이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행동합니다.

 

보이는 것은 굉장한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추한 것에는 마음이 끌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유혹을 느낄 때는 보이는 것이 매력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행동하는 것은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보이는 것에 근거해서 행동한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역사를 보십시오.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5). ‘보이는 것에 근거할 때 당장은 쾌락이 있어 좋아 보여도, 결국 그것이 만들어 내는 것은 어려움뿐입니다. 이것은 일일이 예를 들지 않아도, 신앙이 약간이라도 있는 분이라면, 삶 가운데서 많이 경험하셨을 겁니다.

 

이것 때문에 인간의 운명이 달라집니다. 3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것 또한 해석이 필요한, 중요한 말씀입니다.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라는 말씀은 인간의 유한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와 함께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처럼 영원히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이제 죄악에 물든 육체에서 하나님의 영은 떠납니다. 그것으로 인해 우리 인간은 영원히 살지 못하고, 육체가 온전한 동안만 살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는 말씀은 인간의 수명이 120년이라는 뜻이 아니라, 이후 120년 뒤에 있을 홍수에 대한 심판의 말씀입니다. 120년 간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기회를 주시는 겁니다. 120년 동안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는 심판이 있을 겁니다. 120년 동안 만약, 인간이 그들의 죄악 된 삶을 돌이켜 보이는 것에 근거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믿음으로 산다면, 그들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회입니다. ‘보이는 것에 근거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믿음으로 살아 보라고 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보이는 것에 근거해서 살아 만 만들어 내는 사람들을 보면서 하나님은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십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인간적으로 표현한 부분입니다. 우리의 범죄가 하나님을 얼마나 아프고 슬프게 하는가를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보이는 것에 근거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눈에서 은혜를 보지 못하고, 그저 심판만 보게 됩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와중에서도 보이는 것에 근거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믿음으로살아가는 사람을 준비하십니다. 그가 바로 노아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8). 이가 보이는 것에 근거해서 산 사람이 아니라, ‘믿음으로살았다는 표현이 다음 구절에 나옵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9). 이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인 겁니다. ‘보이는 것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사는 사람, 바로 이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인 겁니다.

 

노아는 아들을 셋 낳습니다. 셈과 함 그리고 야벳. 이들을 낳았을 때의 세상이 어떠한지 11절과 12절은 이렇게 전합니다. “그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부패한 세상과 그 부패한 세상에서 의인이라 인정 받는 노아, 그리고 그의 세 아들.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지 너무도 궁금증을 자아내는 대목입니다. 이제 인간의 운명은 노아와 그의 세 아들에게 달려 있는 듯 합니다. 그 옛날, 마징가 Z나 독수리 오형제, 또는 로보트 태권 V를 보는 듯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발견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의 눈을 발견하십니까? 무엇을 발견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은 너무도 달라집니다. 한쪽은 심판, 한쪽은 구원. 심판과 구원은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그 결과가 질적으로 다른 겁니다. ‘보이는 것에 근거한 삶을 살지 마십시오. ‘죄악으로 빠질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믿음에 근거한 삶을 사십시오. 생명이 거기에 있습니다.

 

신앙은 늘 이  둘의 싸움입니다. '보이는 것'에 근거하지 않으려면, 차라리 눈을 감는 것이 좋습니다. 장님이 되라는 뜻이 아니라, 눈을 감는 자리, 기도의 자리에 나의 존재를 부단히 놓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야 '은혜의 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은혜로 살아야 우리가 생명을 얻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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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7. 4. 06:35

당신은 에노스의 후손인가?

창세기 2

(창세기 4:16-26)

 

가인의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개인적으로 가인이란 이름은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한글로 가인은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성경의 가인은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죠. 차라리 그냥 히브리어를 그냥 음역한 카인이라고 불러야 맞는 것 같습니다.)

 

동생을 죽인 살인자로, 그래서 가인은 하나님 앞을 떠나 이라 불리는 땅에 거주합니다. 가인은 동생을 죽인 죄로 인해 하나님께 엄청난 징벌을 받습니다. 가인의 직업이 농부인데,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말씀하시길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않을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4:11-12)고 하십니다. 실로 엄청난 저주입니다. 농부인데 농사를 지어도 소출을 얻지 못하게 될 거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 입니다. 게다가 땅에서 유리하게 된다는 것은 인생을 쓸쓸하고 고독하게 보내게 될 것이라는 저주나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가인은 땅에 거주합니다. 놋은 히브리어의 노드를 말하는데, 이는 방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인의 삶이 얼마나 고달팠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죄의 대가는 이렇게 큽니다. 죄는 그 안에 그 대가를 지니고 있습니다. 누가 특별히 벌 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죄를 지으면 그 죄 속에 있는 대가를 누구든지 치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 대가란 방랑’, 즉 안정적이지 못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죠.

 

안정적이라는 말은 인간에게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우리가 삶을 행복하게 꾸려나갈 수 있는 첫 번째 요소가 안정적인 삶입니다. 우리의 투쟁은 바로 이것을 위한 투쟁일지 모르겠습니다. 모두 안정적인 삶을 위해서 투쟁하는 것이죠. 그런데 근본적으로 안정적으로 살지 못하고, 방랑의 삶을 사는 인생이란 그야말로 불행한 존재죠.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죄가 잉태하는 대가는 우리가 그렇게 쉽게 감당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워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겠죠.

 

오늘 본문은 땅에서 방황하며, 안정적이지 못한 삶을 산 가인의 후손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가인의 6대손인 라멕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라멕은 악하고 음란하며 잔인한 삶을 사는 악한 인간형을 대표합니다. 라멕의 아들들은 문명 창조의 주도자로 그려지고 있는데, 야발은 가축 치는 자의 조상,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잡는 자의 조상, 그리고 두발가인은 무기제작의 창시자로 소개됩니다.

 

오늘 말씀의 절정은 23절입니다. 23절을 일컬어 라맥의 노래라고 하는데, 그 소재가 살인입니다. 라멕은 이 노래를 통해서 가인과 자신을 비교하여 자신이 어떠한 인물인지 보여줍니다. 이 노래에서 라멕은 가인보다 훨씬 더 포악한 살인을 저지른 인물로 그려집니다. 거기에 라멕은 부끄러움도 없습니다. 가인은 자신의 범죄를 숨겼지만, 라멕은 오히려 이렇게 노래를 만들어 자신의 범죄를 공개적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은 가정에서 시작된 가인의 범죄가 라멕에 이르러서는 사회적으로 확대되었다는 것입니다. 폭력은, 죄는 그래서 무서운 겁니다. 거기서 끝날 것 같지만, 죄는 죄를 낳고, 폭력은 폭력을 낳고 해서,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댐이 무너지는 것은 댐 한 귀퉁이에 생긴 작은 균열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사회가 무너지는 것은 한 가정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가정을 지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가정 폭력은 가정에서만 끝나지 않습니다. 결코. 가정 폭력은 사회적 폭력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결단코. 그러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정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것은 진리 중의 진리입니다.

 

가화만사성이라는 한자성어를 우리는 잘 압니다. “가정이 화목해야 만사가 잘 된다!”라는 뜻입니다. 신문의 사회면을 보면 별의 별 일이 다 있습니다. 살인, 강간, 폭행, 강도 등 별의 별 상황에서 별의 별 수단들이 다 동원되어 온갖 범죄가 저질러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기사를 접하면서 우리는 사회가 썩었다. 세상이 말세다!’하며 혀를 쯧쯧 차지만, 사실 그러한 말을 무관심하게 내뱉기 이전에, 우리의 가정부터 돌아봐야 합니다. 절실하게. 왜냐하면, 그 온갖 끔찍한 범죄의 원인을 파고 들어가다 보면 결국 가정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범죄를 저지른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정에서부터 버림 받고 폭력에 시달리고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밥을 먹고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먹고 성장합니다. 부모로부터 공급 받아야 할 사랑의 정량이 있습니다. 부모가 아니더라도, 성장기에 그 누구로부터 받아야 할 사랑의 정량이 있습니다. 그 정량을 채우지 못하면 인간은 비뚤어집니다. 영양분의 정량을 채우지 못하면 육체가 잘 자라지 않는 것처럼 말이죠. 성경에 밥 많이 먹어라!’라는 말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밥을 좀 덜먹으면 키가 좀 안 자라서 그렇지 그것이 사회적 해악을 낳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라!”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말씀을 굳이 반복해서 성경 전체에 걸쳐 하시겠습니까? 그것은 사랑을 덜 받으면, 한 인간의 영혼은 비뚤어져서 사회적 해악을 낳기 때문입니다.

 

사회에서의 사랑은 많은 것이 왜곡되어 있습니다. 사회에서 베풀어지는 사랑은 대부분 그 뒤에 어떠한 대가를 숨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정에서의 사랑은 다릅니다. 부모님의 사랑, 형제 간의 사랑은 어떠한 대가를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맹목적인 사랑, 그야말로 순수한 사랑이죠. 바로 이 순수한 사랑을 많이 섭취해야 인간은 전인적으로 건강하게 자라는 법입니다.

 

가인의 자손들. 가인의 삶 자체가 방랑의 불안한 삶이었는데, 자손들이 순수한 사랑을 얼마나 섭취할 수 있었겠습니까? 뻔한 결말입니다. 방랑의 삶, 안정적이지 못한 삶 가운데서 자손들이 물려받은 것은 악다귀밖에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사회란 뻔한 것 아니겠습니까? 가정에서 시작된 폭력이 사회로 번지는 것은 당연한 귀결입니다.

 

라멕의 노래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은 라멕의 노래를 들으면서 꽉 막혀버린 우리의 답답한 마음을 속 시원하게 풀어주는 희망의 말씀입니다. 처음 인간, 아담에게로 그 이야기가 다시 거슬러 올라갑니다. 아담은 아벨을 잃고, 하와와 합하여 또 다른 아들을 낳습니다. 그들은 그 세 번째 아들의 이름을 이라고 짓습니다. 세 번째 아들이라 이름이 이 아닙니다. 이는 히브리어 세트를 한국말로 음역한 것입니다. ‘세트의 뜻은 대신이라는 의미입니다. , 아담이 아들 을 낳고, 고백하는 다음 구절에 그 뜻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25).

 

아담은 고백합니다. 셋은 하나님께서 주신 거라고. 그리고 또한 그를 일컬어 다른 씨라고 고백합니다. 물론 다른 씨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한 다른 아들이란 뜻이 들어 있지만,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뭔가 새로운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를 보입니다. , 가인과는 다른 삶을 살 거라는 희망을 보게 합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참 생명의 말씀입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가인의 후손과는 완전히 대조적인 삶을 사는 인간이 소개됩니다. 그가 바로 다른 씨 셋의 아들 에노스입니다. 에노스의 뜻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에노스에 이르러서 인간이 자기 자신의 실존에 대해서 온전히 자각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란 하나님에 기대어 살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신앙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에노스에 이르러 비로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고 오늘 말씀은 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 드리며 희생 제물을 드렸다는 뜻입니다. 이는 즉 예배를 일컫는 말입니다. 에노스 때부터 비로서 하나님께 예배가 온전히 드려졌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당신은 카인의 후손인가? 아니면 에노스의 후손인가?” 당신은 안정적이지 못한 방랑의 삶을 살며 각종 폭력이나 일삼는 카인의 후손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뜻에 따라 부름 받은 예배자로서, 안정적인 삶을 살며 평화를 일구어 내는 에노스의 후손입니까?

 

각종 폭력(전쟁, 살인, 강간, 강도 등)으로 얼룩진 세상을 돌아보면 답답합니다. 희망이 없어 보입니다. 이대로 지구가 종말을 맞이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차라리 죽어버릴까 하는 나쁜 마음도 듭니다. 실제로 수 많은 사람들이 답답한 현실을 피하고자 자살을 택하기도 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어디에서 희망을 찾아야 할까요?

 

바로 에노스의 후손들에게서 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흙으로 지으신 피조물이며,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겸손하게 나아와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에노스의 후손들에게서 우리는 희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에노스를 통해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시며, 에노스가 바로 하나님께서 살인자 가인이 만들어 가는 죄악된 세상의 대안으로서 세우신 다른 씨이기 때문입니다.

 

그 다른 씨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누가복음 338절은 분명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위는 에노스요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라.”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렇게 에노스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당신께 예배 하는 자들 통해서 세상에 희망을 전달하십니다. 우리가 바로 그 일에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배 드리는 것은 단순히 복 받기 위함이 아니요, 이 험악한 세상의 대안으로서의 다른 씨라는 것을 깨닫고 사명감 가운데 예배 드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 서로에게 축복합시다. “당신은 에노스의 후손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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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7. 1. 03:58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도행전 3:11-26)

 

오늘 말씀이 쉬워 보이지만 쉬운 말씀이 아니다. 오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우리가 공부해야 하는 부분이 많다. 그것을 오늘 다 살펴볼 수는 없다. 오늘 포인트를 말씀 제목에 맞게 전하고자 한다.

 

성전미문에 앉아 있던 중증 장애인을 치유하는 사건으로 인해서, 사도들이 복음 전할 기회를 얻게 된다. 솔로몬 행각에 모이게 된다. 좋은 시간과 좋은 공간을 얻게 된다. 기적이든, 선한 일이든, 자선이든 사람들에게 칭송 받는 일이 있다면, 그 때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기회가 된다.

 

왜 그러냐면, 그런 것을 통해 사람들은 나에게 주목을 하게 되어 있다. 칭송 받는 일은 통해서 나의 잘 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때 나에게 귀를 기울인다. 마음 문을 연다. 사람들은 좀처럼 귀를 기울이거나 마음 문을 열지 않는다. 마음을 열지 않은 사람들에게 아무리 좋은 말, 복음, 기쁜 소식을 전해도 그 사람들에게 그것이 그렇게 마음에 다가오지 않는다. 그러나 마음 문이 열렸을 때는 한 마디만 해도 눈물을 뚝뚝 흘린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는 말 한 마디만 해도 눈물을 뚝뚝 흘린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기회를 주시려고 하신다. 사도들은 그런 기회를 얻었다. 중요한 기회를 얻었을 때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복음을 막 전한다. 첫 번째로 이런 말을 한다.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이 말을 하면 사람들이 어떤 마음을 가질까? 와 대단하다, 라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왜 우리에게 주목하느냐?”라는 말을 하면, 그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할 거다. “그러면 우리가 너한테 주목하지 누구한테 주목하냐?”라고 하면서 그러면 누구에게 주목하라는 거야?”라면서 물음표가 생긴다. 바로 그 물음표에 답을 전해주는 것이다.

 

기적은 권능과 경건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뭔가를 잘 하면 기적을 베풀 수 있을 것 같고, 뭔가 스페셜한 능력을 발휘할 것 같은데, 그것을 위해서는 권능을 가져야 하고, 경건생활에 힘써야지 그런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착각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자기 스스로 경건하다. 그러니까 오후 세 시에 기도하러 올라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알았다. 자기들의 경건으로부터 권능이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 그러면 어디서 왔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어떠한 스페셜한 능력을 갖고 싶으신지 모르겠지만, 그럴 때 일수록 경건생활에 힘쓰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으시라. 이것이 무슨 말인지 성경을 통해서 하나하나 깨달아야 한다.

 

우리 자신에게 솔직하게 질문해 보자. 지금 베드로가 전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에 대하여 얼마큼이나 확신하고 있는가?

 

오늘 사도 베드로가 전하는 복음은 복음의 핵심이다.

 

1)    예수 그리스도는 죽으시고 살아나신 생명의 주이시다! 그냥 주님이 아니라 생명의 주님이시다.

2)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예언의 성취 à 우리가 구약성경을 봐야 하는 이유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 그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이 모두 구약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냥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선지자들의 예언에 근거해서 그 예언이 성취된 사건이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생뚱맞은 사건이 아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예언)대로 이루신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구약성경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공부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예언의 성취이다.

3)    만물의 회복과 예수님의 도래

 

여기에 대해서 사람들은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별로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무슨 예언을 하셨는지 관심이 없다. 우리의 인생이 그렇다. 지금 내가 당장 시집 가고 장가 가고 논과 밭에 나가서 할 일 많은 것에만 관심이 있지, 하나님의 말씀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나 조금만 관심을 갖는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세계를 이끌어 가시는지, 어떤 식으로 운행 하시는지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데, 거기에 조금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그것에 근거해서 시집 가고 장가 가고 논과 밭에 나가서 할 일 많은 것을 꾸려 나갈 텐데, 그거랑 전혀 상관 없이 바쁘고 힘들게 살아간다.

 

하나님께 대하여 무관심하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욕심과 자기 자신의 교만 속에서 살아간다는 증거이다. 그렇다 보니, 사도 베드로의 복음이 우리 삶 가운데 잘 들어오지 않는다. 사도 베드로가 전하고 있는 복음,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우리 가슴이 얼마나 받아 들이고 있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새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In the name of Jesus Christ, 이것이 갖고 있는 무한한 능력을 믿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사도들은 이야기 한다. “회개하라!” 여러분 회개하시라. 여기서 회개하라!”라는 말을 들었을 때 여러분은 마음 속에 무슨 생각이 번뜩 드시는가? 죄가 생각이 난다. 마음 속에서 내가 무엇을 잘못했지?’ ‘어제 내가 장사하다가 손님이 한 5불 정도 더 나에게 줬는데, 그거 내 주머니에 넣는데…’ 우리는 이러한 것부터 생각한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면, 회개란 이러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회개그러면, 도덕적으로 깨끗해지는 것을 생각하니까 포인트를 잘못 맞추는 것이다. 이것도 사실은 하나님에 대해서 무관심 한 것이고, 자기 자신의 욕심과 교만에서 비롯된 것이다. 모두 나한테만 관심을 갖는 것이다. ‘회개하라’, 그러니까 뭐 나한테 잘못한 게 없나?’라고 하면서 모두 나한테만 관심을 갖는다.

 

하지만 회개는 도적적으로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었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거기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하는 것이다. 내가 지금 시집가고 장가 가고 논과 밭에 나가서 할 일 많은 것만 생각하며 살았는데, 회개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것에 매몰되어 있던 마음을 돌이켜서 나의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게 집중하는 것, 그것이 회개이다.

 

그럴 때 비로소 도덕적으로도 우리가 서서히 변하면서 깨끗해지는 것이지, 사람이 하루 아침에 변하게 되면 사는 게 아니라, 죽는다. 도덕적으로 깨끗해지는 것은 금방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랜 습관을 통해서 젖어온 우리들의 삶의 방식이기 때문에 금방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결단이기 때문에 바로 거기서 벌어지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점차적으로 gradually 도덕적으로 깨끗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도덕적으로 깨끗해지는 것에만 관심을 갖고, 그것이 회개라고 생각을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심을 전혀 갖지 않는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회개가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 그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그 능력을 믿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시라. 우리가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사는가? 말로는 그렇지만, 진정으로 거기에 나의 삶을 걸고, 예수의 이름이 나의 모든 삶이라고 고백하면서 나의 모든 것을 걸고 살아가는가?

 

우리의 능력, 우리가 살아가는 능력,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여러 가지 기적들, 선한 일들, 우리가 누군가에게 베푸는 일들, 무엇보다 구원은 다른 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서 온다. 이것이 중요하다. 우리의 경건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권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도덕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서 온다는 것이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이 마음을 활짝 열고 받아 들이시길 바란다.

 

그 놀라운 일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믿고, 삶 가운데 승리를 일구어 가시는 믿음의 자녀들 되시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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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6. 24. 05:48

실패는 없다

(갈 3:23-29)

 

의란 무엇입니까? 의는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그러니까, 의로워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일이죠. 그러면 어떻게 의로워질 수 있느냐의 문제가 남습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율법이 그 일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율법대로 살면, 의로워진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의로워지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멋져 보여서요?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인물이 되니까요? 그런 것은 이차적입니다. 의로워지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구원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이란 유대인들에게 의로운 사람의 몫인 셈이죠. 유대인들은 그냥 그렇게 생각하면서 모세에게서 율법을 받은 이래로 율법을 열심히 지키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것에 반기를 드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들은 바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 의하면, 율법을 통해서는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율법은 우리의 죄악만 밝혀줄 뿐, 우리를 의로움으로 이끌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들은 예수라는 분을 소개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참 난감한 일입니다. 그 예수라는 사람은 유대인들에 의해 로마당국의 손에 넘겨져 처형을 당한 인물이었거든요.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예수가 십자가 형에 처해 죽었다는 사실은 그가 의롭지 못하다는 증거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예수를 이들은 그리스도로 소개하면서 예수라는 분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의로워질 수 있을 뿐, 율법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주장을 펴고 있는 겁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그리스도와 주님으로 고백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구원사건, 즉 우리를 의롭게 한 사건으로 규정하는 이유는 부활때문이었습니다. 그들에 의하면, 예수는 유대인들에 의해 로마당국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 처형을 당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무덤에 누워 있는 예수를 다시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험한 꼴 당하고 죽었던 예수가 부활했다는 사실이 믿기 참 힘든 일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부활한 예수를 직접 만났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이 일의 증인으로 자처하고 나선 겁니다.

 

사도들, 그리고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과 예수의 그리스도, 주님 되심을 증거했을 때 그것을 믿었던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믿었던 사람들은 처음에 다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복음이 예루살렘에서부터 전해졌으니까요. 이들은 처음에 복음을 받아 들었을 때, 유대교 내에서 율법을 준수하며 예수를 믿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서부터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복음이 예루살렘을 너머, 사마리아와 땅끝(이방지역)으로 퍼지기 시작하면서부터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방지역으로 복음을 전파하는데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바울입니다. 바울이 쓴 서신서에는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이방 사도로 부르셨다는 고백이 촘촘히 들어 있습니다. 그가 복음을 전한 지역 중 하나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배경이 되는 갈라디아 입니다. 갈라디아서는 갈라디아 지역에 세워진 교회에 보낸 편지인 것이죠. 이들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바울은 이렇게 갈급한 마음으로, 강력한 필체로 편지를 써서 보낸 것일까요?

 

갈라디아는 이방지역입니다. 유대인들이 주축을 이룬 지역이 아닙니다. 그 말은 유대인의 율법이 영향을 미치는 지역이 아닙니다. 문화 자체가 유대인들의 문화와는 관계가 없는 지역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갈라디아 교회에 예수를 믿는 유대인들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율법을 지켜야만 온전히 의를 이룰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들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와 함께 율법의 필요성을 동시에 강조한 것이죠.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즉 구원 받는다는 것을 이들도 인정했지만, 어딘가 좀 부족해 보인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강조하는 이유는 율법의 준수만이 의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것 때문입니다. 율법은 단순히 종교생활만이 아니라 일상에 이르기까지 유대인들의 모든 것을 규정합니다. 예컨대 소가 이웃집 밭에 들어가서 곡식을 망가뜨리는 경우나, 성폭력이 발생한 경우도 율법이 대답을 제시합니다. 율법에 정진해 살면 모든 것이 의로운 상태로 복귀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이것이 어느 정도는 유효합니다. 지금도 우리의 사회를 그나마 정돈시켜 주는 것도 법 때문입니다. 법이 없다면 무법 천지겠죠. 아마도 자동차 타고 다니기도 쉽지 않을 겁니다. 도로교통법 때문에 자동차 운전하고 다니는 것도 질서가 유지되는 것이니까요.

 

이에 대해 바울은 놀랍게도 본문에서 유대인들의 전통을 거부합니다. 율법이 정의롭게 하는 게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는 율법의 한계를 정확하게 뚫어보았습니다. 법은 일시적으로, 또는 표면적으로 정의를 말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정의를 세우지 못합니다. 어려운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은 세계에서 법이 가장 잘 정비된 나라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 미국에서 오랫동안 사신 여러분들이 느끼시기에 이 나가 정의로워 보입니까? 억울하고 답답한 일이 하나도 없으세요?

 

그리고 더 중요하고 현실적인 문제는 이것입니다. 법이 우리를 보호해 줍니까? 가령 누군가를 살인하거나 강간하면 그 일을 행한 가해자는 무기징역 또는 사형에 처해질 수 있는 것이 법입니다. 이러한 법이 있다고 한들, 살인이나 강간 사건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이러한 법이 있는 것 때문에 우리가 마음 편하게 살 수 있습니까? 법은 법이고, 사건은 사건입니다. 아무리 법이 있어도, 살인이나 강간 사건이 일어나고 나면, 피해자나 그 가족은 그 사건으로 인해서 인생을 망치게 됩니다. 가해자가 아무리 무기징역이나 사형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망가진 인생은 회복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법이 모든 것을 의롭게 규정해 주지 못한다는 증거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율법의 요구가 이 세상의 성공과 다르지 않다는 겁니다. 우리는 늘 불안합니다. 남들과 비교해서 뒤떨어진 삶을 살 가봐. 그래서 대도시에 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남보다 좋은 학교를 나와야 하고, 남보다 큰 비즈니스를 해야 하고, 좋은 옷, 좋은 차, 좋은 집 등등이런 것의 성취가 곧 구원이라고 생각합니다.

 

현대인들이 삶의 완성을 어떻게 추구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일반적으로는 존경받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또는 행복한 조건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돈도 좀 잘 벌고, 이름도 내고, 착한 일도 하고, 취미활동도 잘 하고, 스펙도 잘 쌓고, 등등 ... 할 일이 많습니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습니다. 목사의 경우에는 교회를 크게 키우는 것인지 모르겠군요. 이런 노력들은 다 필요합니다. 모두 좋은 율법들입니다. 모두 열심히 자기 몫을 감당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것들은 우리를 의롭게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 인생을 걸면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무의미해집니다.

 

의로움은 삶의 완성이나 성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는 데서, 즉 그리스도로 옷 입는 데서 옵니다. 바울은 3 2절에서 갈리디아 교회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의로움을 이루고 구원을 가져다 주시는 성령, 즉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은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대한 증언을 듣고 믿는 데서 온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성령 받는 것은 40일 금식기도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통해서 일어나는 신비로운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너무 허무한가요?

 

복음을 듣고 믿는 데서가 아니라, 율법의 요구를 이룸으로 의를 이루고 구원을 성취하려는 갈라디아 교회 사람들에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3:3).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다, 라는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그러한 구별은 헛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내가 조금 부자로 살았던 가난하게 살았던, 도시에 살았던 시골에 살았던, 많이 배웠던 많이 배우지 못했던, 몸에 장애가 있던 없던, 그것들은 모두 율법의 요구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 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율법의 요구를 이루지 못하면 실패한 삶이라고 자책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부자로 살지 못하면 실패한 삶이다. 시골에 살면 실패한 삶이다. 많이 배우지 못하면 실패한 삶이다. 몸에 장애가 있으면 실패한 삶이다. 끊임없이 남과 비교해서 그들보다 뭐 하나라도 우위에 있지 않으면 불안해 하면서 실패한 삶이라고 규정하고 비탄에 잠기는 것이 우리들의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자꾸 '성공'하게 해달라는 부르짖음으로 치닫습니다. 율법의 요구, 이 세상의 성공의 기준을 이루기 위해서 '이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라는 기도를 합니다.

 

그렇게 따지면 예수님의 삶은 실패 중의 실패였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처형 당한 사람의 삶이 뭐가 승리의 삶입니까? 그런데, 바로 거기에서 부활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을 놓치면, 우리는 복음을 통한 의를 믿지 못하고,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삶을 사느라 허우적댈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 본다면, 우리가 남들보다 좀 우월하게 살았다고 교만할 것도 없고, 남들보다 좀 못한 삶을 살았다고 부끄러워할 것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그리스도로 옷 입고 있느냐입니다. 그리스도로 옷을 입기만 한다면, 우리 삶에 실패란 없습니다. 그러니 주어진 환경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 붙들고 불꽃처럼 사십시오.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있으면, 여러분은 이미 하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사는 자들에게는 실패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순교해도 괜찮은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사명 감당하면서 한평생 살아도 괜찮은 겁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불안해 하지 말고, 평안 가운데 사십시오. 다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난 구원 사건에 집중하면서, 즉 그리스도로 옷 입고 사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을 의롭게 할 것이며, 구원으로 이끌 것입니다. 아멘.

 

 

* 이 설교의 몇몇 부분은 정용섭 목사님의 설교에서 가져왔습니다. 바울 서신을 갖고 설교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스토리로 구성되어 있지 않고, 편지문 형태로 '교리'를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울 서신은 율법과 복음의 문제를 놓아두고 첨예하고 대립하고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을 정확하게, 그것도 좀 재미있게 설명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또한 바울 서신은 오직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절대성을 주장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에 관심이 없는 요즘 기독교인들에게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한다는 것이 정말로 힘듭니다. 그래서 바울 서신을 갖고 말씀을 전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정말이지 '복음'이 먹히질 않습니다. 교인들의 표정과 반응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목사가 지금 무슨 말을 하나...' 아.. 정말이지, 복음을 전하는 일은 정말 도전이 되고 절망적입니다. 제가 지금 교회에서 복음을 전하는데도 말이죠. 이게 참 아이러니입니다.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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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2013. 6. 22. 04:29

세상에서 가장 짧은 인생론

 

 

누가 그러더군. 세계는 두 번 진행된다고.

한 번은 우리가 그것을 보이는 그대로 보는 순간.

두 번째는 그것이 존재하는 그대로 전설로 새겨지는 순간.”

 

인생은 좋은 책을 만나야 하는 거야.

어떤 책이 좋은 책이냐고?

그것은 두 번째 세계를 보여주는 책이지.

 

인생은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하는 거야.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이냐고?

그것은 두 번째 세계를 사는 사람이지.

 

그런데 이것 또한 명심할 것.

좋은 책, 좋은 사람을 만나려면

첫 번째 세계에 대해서는 환멸을 가질 것.

두 번째 세계에 대해서는 동경을 품을 것.

그렇게 환멸과 동경 속에서 방황할 것.

그래서 때로는 만남이 어긋난다는 것.

 

건투를 빌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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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13. 6. 20. 12:59

 

살아 남은 자의 슬픔

창세기 1

(창세기 4:1-15)

 

쉼보르스카의 시 <우화>입니다.

 

옛날 아주 먼 옛날에 어부들이 바다 깊은 곳에서 유리병을 낚아 올렸어요. 그 병에는 종이 쪽지가 들어 있었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써 있었답니다:

사람들이여, 나 좀 구해주세요! 나 여기 있어요. 대양이 나를 파도에 싣고서 무인도에 갖다 버렸답니다. 모래사장에 나와 도움을 기다리고 있어요. 서둘러주세요. 나 여기 있을게요.”

 

이 쪽지에는 날짜가 누락되어 있군. 틀림없이 이미 늦었을 거야. 유리 병이 얼마나 오랫동안 바다를 떠나녔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첫 번째 어부가 말했습니다.

 

게다가 장소도 적혀 있질 않군. 대양이 한둘도 아니고, 어디를 말하는지 통 알 수가 없잖아.”

두 번째 어부가 말했습니다.

 

늦은 것도 아니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니야. ‘여기라는 섬은 언제, 어디에나 존재하는 법이니까.”

세 번째 어부가 말했습니다.

불현듯 어색한 분위기와 함께 침묵이 흘렀습니다. 보편적인 진실이란 원래 다 그런 법, 생각하기 나름이니까요.

 

여기 생각하기 나름인 사건이 하나 더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 사건입니다. 왜 가인은 아벨을 죽였을까요? 우리는 흔히,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유가 제사 행위에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아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아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여기서 의문은 한 가지 더 늘어 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아벨의 제사는 받아주시고, 가인의 제사는 안 받아 주셨을까요?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가인의 마음 속에 들어가 볼 수 없고, 하나님의 마음은 더더군다나 들어가 볼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요.

 

가인의 엄마 하와는 가인을 낳았을 때 가인에게 매우 기대를 걸었던 모양입니다. 하와는 가인을 낳은 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1). 이를 풀어서 다시 옮기면 이런 뜻이랍니다. “내가 여호와와 함께 한 사람(남자)을 얻었다.” 하와는 자신의 힘으로 아들을 낳았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도움으로 얻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낳은 아들이라면, 분명 자신의 앞날에 이 아들을 통해 영광이 있을 거라는 기대가 있었을 겁니다. 하와는 이 사람에게 어떤 희망을 품었던 것이죠.

 

그런데, 세월이 지난 후, 엄마의 기대와는 달리 기대주가인은 엉뚱하게도 살인자가 됩니다. 그것도 인류 최초의 살인자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게 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쉼보르스카의 다른 시 <베트남>입니다.

 

여인이여, 그대 이름은 무엇이냐? – 몰라요

어디서 태어났으며 어디 출신인가? – 몰라요

왜 땅굴을 팠느냐 몰라요

언제부터 여기 숨어 있었느냐? – 몰라요

왜 내 약지를 물어뜯었느냐? – 몰라요

우리가 당신에게 절대로 해로운 짓을 하지 않으리라는 걸 아는가? – 몰라요

당신은 누구 편이지? – 몰라요

지금 전쟁 중이므로 어느 편인지 선택해야만 한다 몰라요

당신의 마을은 존재하는가? – 몰라요

이 아이들이 당신 아이들인가? – 맞아요

 

이 시는 쉼보르스카가 베트남 전쟁 때 구찌 땅굴에 살았던 베트공 여인을 생각하며 쓴 시입니다. 수많은 질문에 도리도리 고갯짓을 하며 몰라요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이러한 상황을 우리는 도처에서 만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가인과 아벨> 이야기에서도 발견됩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 몰라요!

 

이 대답 속에는 자신도 왜 아벨을 죽였는지 모르겠다는 대답이 들어 있는 것일 겁니다.

 

여러 해 전, 한국에서는 매우 안타까운 일이 있었습니다. 호찌민에 살았던 베트남 여성 후인마이가 대한민국 천안시 문화동의 한 방에서 전과 6범의 남편에게 구타당해 늑골 18개가 부러져 죽은 채 발견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후인마이는 죽기 전날 남편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물론 이렇게 죽게 될지 몰랐지만, 그것이 그녀의 유언장이 된 셈입니다.

 

나는 당신에게 무슨 음식 먹어? 물 먹어?라고 물으며 식모처럼 잘해주고 싶었어. 나는 결혼하기 전에 호찌민에서 일했어. 우리 가족에게 어려움 있었어. 가족을 위해 고생스러운 일 많이 했지만 월급은 적었어. 어느 해는 냉동식품 회사에서 일하고 어느 때는 가구 공장에서 일하고 어느 때는 고무 농장에서 일했어. 일 없으면 남의 논밭에서 일했어. 나는 힘든 일과 고생스러운 일을 잘 알아. 나는 한국에 와서 당신에게 이야기 많이 하고 싶었지만 잘 안 되었다. 하나님은 나에게 장난치고 있다.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무슨 말을 하는지 당신은 잘 모를거다(베트남어로 썼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에게 장난치고 있다.” 이 여인은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의 장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밖에는 자신의 인생을 설명하고, 위로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겠죠.

 

<가인과 아벨>의 사건도 하나님의 장난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것 밖에는 그 사건을 이해할 길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심리학자가 이 사건을 심리학적으로 분석한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런 진단을 내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단서는 5절 이하에 나오는 가인의 심리상태에 대한 묘사입니다.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분노를 잘 느끼는 사람의 특징은 어려서부터 통제를 잘 받지 못한 탓일 가능성이 큽니다. 위에서 말했듯이, 가인은 엄마의 기대주였기 때문에, 엄마의 사랑은 많이 받았어도, 엄마에게 통제를 잘 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귀하고 곱게 자란 아이는 자신의 생각과 다른 상황을 맞닥뜨리면 분노를 쉽게 표출합니다.

 

분노를 노출하고 있는 가인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분노를 잘 다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분노는 존재를 죄의 지뢰밭으로 이끕니다. 터트리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이릅니다.

 

가인은 안색이 변할 정도로 몹시 분한 마음을 품습니다. 그리고 그 분노를 아우 아벨에게 풉니다. 분노를 터트립니다. 터진 분노에, 아우 아벨이 죽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상황입니다. 분노를 풀고 나면, 정신이 드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우가 죽었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상황입니다. 자신은 분노를 풀어내서, 살아 났지만, 그 분노의 폭발 때문에 아우가 죽었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 – 몰라요!” 가인은 자신이 저지른 일에 당황합니다. 후회합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아우 아벨은 이미 죽은 상태입니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들은 세상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고아원 동기인 젊은 부부는 애를 낳자마자 족족 고아원에 넘깁니다. 만삭의 아내는 변기에 앉아 힘을 주다 그만 변기 속에 풍덩 아이를 낳게 됩니다. 그런데 그 아이를 꺼내서 닦아놓고 보니 눈과 코가 없었습니다.

 

평생 가정을 가져본 적 없이 무료 급식으로 연명하는 폐품팔이 할아버지는 어느 날 가출 소녀를 만나게 됩니다. 노인은 마냥 좋아 10대의 가출 소녀를 아가라 부르며 집 안에 받아들이고 그것을 가족이라 생각하며 가출 소녀를 매일 기다립니다.

 

이것은 우리가 매일 만나고 있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입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어처구니 없는 일들을 만나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일까요? 어쩌면 처음 인간이었던, 아담과 하와에게서 시작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처구니 없게, 아담과 하와는 기대주가인이 아우 아벨을 돌로 쳐 죽이는 일을 겪게 됩니다. 아벨은 어처구니 없게 다른 사람도 아닌 형 가인에게 돌에 맞아 죽는 일을 겪게 됩니다. 가인은 어처구니 없게 자신의 분노를 아우 아벨에게 풀어내는 일을 겪게 됩니다. 이것은 모두, 에덴동산에서 살아 남은 자들이 겪은 슬픔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처구니 없는 일은 하나님의 아들이 죽은 사건입니다. 사람이 죽는 거야 최초의 인간 때부터 있어왔던 일이라 익숙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죽는 일은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입니다. 에덴동산을 떠나 이 땅에 온 존재는 누구나 죽음을 맞이하는 어처구니 없는 인생을 살아야만 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죽인 자들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나의 아들이 어디 있느냐?” 그에 대한 인간들의 대답은 무엇이었을까요? 당연히 몰라요!”입니다.

 

커트 보네거트의 <레퀴엠>이라는 시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지구가

목소리를 갖게 되고

아이러니가 무언지 알게 된다면

우리가 저지른 학대에 대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우리 스스로가 잘 알고 있다는 게 바로 아이러니다

 

이것이 살아 남은 자의 가장 큰 슬픔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네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몰라요!”라고 대답하긴 했지만, 사실 가인은 자신의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다는 그 아이러니!

 

가인은 그러한 아이러니를, 그러한 슬픔을 가슴에 지니고 살게 됩니다.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15). 가인이 하나님께 받은 표는 자신의 죄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죄를 면하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십자가가 바로 그러한 표가 아니겠습니까? 십자가는 내 죄를 들춰내는 거울이기도 하지만, 내 죄를 감춰주는 가죽 옷이기도 한 것이죠. 비록 우리의 인생이 어처구니 없고, 아이러니하고, 슬픈 일로 가득 차 있다 할지라도,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극복될 수 있다는 희망, 그것은 정말이지 눈물 나도록 감사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가인과 아벨> 이야기에서 어처구니 없는 하나님의 장난을 보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봅니다.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인생은 충분히 희망적입니다. 그러니 눈물을 닦고 힘을 냅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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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13. 6. 17. 14:10

나그네와 나룻배

 

구름에 달 가듯이 가던 나그네가

강 마루에서 나룻배를 만났다.

 

나를 좀 저기 강 건너편까지 데려다 다오.

 

이 강은 왜 건너려고 하시나요?

 

글쎄, 나를 잊기 위해서

 

지금까지 당신은 자신을 찾기 위해 나그네로 살지 않았나요?

 

그랬지그런데 저 강 건너편에서 또 다른 나를 찾기 위해서는

나를 먼저 잊어야 하지 않을까 싶네만.

 

그렇군요. 그러나 우선 해야 할 일이 있어요.

이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저랑 친해지셔야 해요.

 

어떻게 해야 자네와 친해질 수 있나?

 

그건 당신에게 달렸지요.

 

그날부터 나그네는 나룻배와 친해지기 위해서

나룻배와 시간을 많이 보냈다.

 

, 여름, 가을, 겨울,

관계를 만들어 내는 의미 없는 시간들을 보내고,

관계에 의미가 생길 때쯤

나룻배는 나그네에게 등을 내밀었다

 

출렁이는 강물을 가로지르며

나룻배와 나그네는 서로 머뭇거렸다.

 

나룻배는 강물에 눈물을 씻어내며 나그네에게 물었다.

 

당신은 나를 버릴 작정이신가요?

 

그게 무슨 소리지?

 

강을 건너고 난 뒤 당신은 당신의 길을 갈 테니까.

강을 건넜는데, 더 이상 내가 필요하진 않겠죠.

 

……

 

어쩌실 셈인가요?

 

나그네는 강을 건너는 동안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나룻배는 반대편 강 마루에 도착했다.

 

강물은 출렁였다. 나룻배의 마음도 출렁였다.

나룻배의 출렁임은 강물의 출렁임 때문인지

마음의 출렁임 때문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 출렁임 가운데 아무 말 없이 한 참 서있던 나그네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괴나리 봇짐을 메고

뭍을 향해 두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나룻배를 향해 말했다.

 

고맙네. 나를 잊으시게나.

나도 저 강을 건너오면서 나를 잊었다네.

나도 잊은 나의 모습을 자네가 간직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다만 나는 자네의 그 출렁임만은 간직해 두겠네.

 

나그네는 떠나고

나룻배는 홀로 남아 강물의 흔들림에 몸을 맡겼다.

기억한들 소용 없으므로.

나그네와 나룻배를 이어주는 것은 출렁임 밖에는 없으므로.

 

그렇게 나그네는 자신을 찾기 위해 출렁였고

그렇게 나룻배는 간직하기 위해 출렁였다.

 

강 마루에 가 보라.

그러면 나룻배가 왜 출렁이는지

이제는 알게 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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