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2012. 11. 7. 05:48

한 사람을 위한 고독

 

밤이라서 좋다기보다, 겨울 밤이라서 좋았을 거다.

숨을 쉬면, 목을 타고 들어오는 밤 공기가

가슴 속에 담아둔 오래된 이야기를 생각나게 해서 좋았을 거다.

코끝이 찡한 이유는 그 이야기 때문이지,

밤 공기가 차가워서 그렇지는 않았을 거다.

입김이 서리는 이유는 차가운 공기 때문이 아니라,

뜨거운 가슴 때문이었을 거다.

눈물이 핑 도는 이유는 입김에 묻어 하늘로 날아 오르다 흩어지는

그리움 때문이었을 거다.

두 손을 모으는 이유는 그 눈물을 감추기 위해서였을 거다.

한 숨이 깊은 건 밤이 깊어서가 아니라

그리움이 깊어서 그랬을 거다.

한 숨도 못 잔 건 밤이 좋아서, 그것도 겨울 밤이어서가 아니라

가로등 밑에서 서성일지 모르는 그 사람 때문이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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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2012. 11. 7. 05:46

노란 과자와 빨간 과자

 

노란 과자를 달라는 아이에게

기어코 빨간 과자를 먹인다

아이는 노란 눈물을 흘리고

어미는 빨간 심술을 부린다

노란 과자 먹는다고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닌데

어미는 왜 기어코 빨간 과자를 먹이는 것일까

노란 눈물을 흘리며 빨간 과자를 먹는 아이는

빨간 물감이 뇌에 번져가고

눈물로 쏟아내는 노란 물감은

상처가 되어 고름처럼 심장에 고여간다

이제 아이는 노란 과자를 먹고 싶어도

그래서 심장이 뛰어도

빨간 과자를 먹어야 한다는 뇌의 심술에

눈물을 머금고 복종한다

그렇게 아이는 커간다

그렇게 아이는 어른이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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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2012. 11. 7. 05:45

병신처럼 살아도 괜찮어

 

병신자식이 효도한다는 옛말이 있어

 

내가 오늘 신문을 봤는디

한국이 급속하게 고령사회로 접어드는 바람에

노인문제가 가장 큰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는 내용이여

 

요즘엔 그렇게 부모를 내다 버리는 사람이 많은가벼

특별히 치매노인이 많이 버려진다나벼

요양원에 버려진 어느 노인네는

딸자식이 자신을 여기에 버리고 갔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하루 종일 딸이 쥐어준 핸드폰만 부여잡고 산다는 기사를 봤어

 

병신자식이 효도한다는 옛말이 있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어?

 

잘난 자식은

지 잘난 거 자랑질 하러 다니느라 부모님 돌아볼 시간이 없는겨

잘난 자식은

너무 바빠서 부모님과 놀아드릴 시간이 없는겨

잘난 자식은

지가 혼자 큰 줄 아는겨

지가 아장아장 걸을 때 부모님이 손잡아 준거를 기억 못하는겨

지가 커갈 때 부모님이 함께 놀아준 것을 모르는겨

지는 지가 혼자 걷게 된 줄 아는겨

지는 지가 혼자 큰 줄 아는겨

 

병신자식이 효도한다는 옛말이 있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어?

 

병신자식은 자랑질 할 거리가 없어서 어디 돌아다닐 데도 마땅치 않은겨

병신자식은 세상이 무서워서 부모님 곁을 떠날 엄두도 못내는겨

세상은 이런 사람을 병신 쪼다라고 하지만

그거 알어?

그래도 부모님 아플 때 손잡아 주는 것은 병신자식인겨

부모님 돌아가실 때 임종 지키는 것은 병신자식인겨

돌아가시고 나서 부모님 그리워하며 눈물 흘리는 것도 병신자식인겨

 

잘난 자식은 잠깐 왔다 잠깐 보고 가지만

병신자식은 늙으신 부모님 그림자처럼 늘 곁에 있는겨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 못한다는 말처럼

늙으면 죽어야 한다는 못된 말 하면 못쓰는겨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 내가 끝까지 책임지는거 당연하거 아녀?

이거 하나만 잘해도 인생은 성공인겨

나라를 구하면 뭘 하고

유명인사가 되어 칭송을 받으면 뭐 할겨

지 낳아주신 부모님 갔다 버리면서

지 낳아주신 부모님 심심해 죽게 만들면서

지 낳아주신 부모님 외로워 죽게 만들면서

 

너무 잘난 놈 되려고 하지 말어

잘난 놈 돼봤자 부모님만 외롭게 만드는겨

그냥 좀 병신처럼 살면 어뗘?

병신처럼 살아도 괜찮은겨

병신자식이 효도하는겨

그러면 인생 성공한거라니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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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2012. 11. 7. 05:44

피로사회

 

내 안에 독수리가 한 마리 살고 있다

그 독수리는 매일 내 간을 쪼아 먹는다

프로메테우스의 고통이 이런 것이었을까?

독수리에게 매일 간을 쪼였던 프로메테우스는

얼마나 피곤했을까?

 

어디 내 안에만 독수리가 살고 있으랴

현대인들은 애완동물로 강아지나 고양이를

가장 많이 키우고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보이는 애완동물일 뿐

그들 마음 속에도 독수리가 있기는 마찬가지다

 

오죽하면 어떤 사람은 이 사회를 일컬어

피로사회라고 했겠는가!

피로하지 않으면 현대인이 아니고

피로하지 않으면 눈총 받는 이 사회

그야 말로 권태를 모르는 사회다

 

아무리 유명인이 TV 광고에 나와서

간 때문이야~’를 외치며 투쟁해 보지만

좀처럼

내 안에 그리고 그들 안에 살고 있는

독수리는 떠날 기미가 없다

 

오 프로메테우스여

그대의 친구 헤라클레스의 도움으로

그 지긋지긋한 코카서스 산중에서 탈출했던 것처럼

우리도 이 지긋지긋한 피로사회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불을 내려주소서 우리를 도와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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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2. 11. 7. 05:41

2012 11 4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에베소서 5:22-33 (에베소서 8번째 시간)

제목: 신비를 체험하라

 

오늘 말씀은 언뜻 보면 가정생활에 대해서 말하는 것 같습니다. 언뜻 보면, 결혼생활이 어떠해야 한다, 부부생활이 어떠해야 한다. 남편과 아내가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가정생활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볼 때 이 성경구절을 들어서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근본적으로 사도 바울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남녀의 결혼생활의 관계를 넘어선다는 것을 파악해야 합니다. 그것을 파악하지 못하면, 이 말씀을 들어서, 남편은 아내에게 성경에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그랬잖아그렇게 윽박지르게 되고, 반대로 아내는 남편에게 당신은 그것만 보여, 여기에 보면 아내는 남편에게 남편은 아내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 그랬잖아’, 하면서 싸우게만 됩니다. 하나님께서 성경구절 들이대면서 서로 싸우라고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아니겠죠.

 

그래서 오늘 말씀 제목을 신비를 체험하라라고 정해 봤는데, 바로 그겁니다. 우리가 신비를 체험하고 깨닫지 못하면 성경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의 전제는, 5 21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이것이 기본 전제입니다. 그리고 오늘 사도 바울이 근본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교회론입니다. 교회가 어떠한 존재인가를 말하고 싶어서 이런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론을 온전히 알면 그리스도인의 결혼생활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습니다. 당연합니다. 신앙과 우리의 일상을 구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과 우리의 일상생활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습니까? 이 둘은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중간의 말씀처럼,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는 말씀처럼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일과 우리의 일상생활을 살아가는 것은 아내와 합하여 육체가 하나가 되는 것처럼 하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분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과 일상생활을 구분하니까 이러한 신비를 체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가 어떠한 것인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결혼 관계,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끌어옵니다. 그러나 사실 조금 위험한 메타포일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부부관계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 생활에서 천국 같은 행복을 경험하시는 분도 계시지만, 그렇지 못하고 가정 생활에서 지옥을 경험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사실, 지옥과 천국을 오르락 내리락 하죠. 그렇기 때문에 만약 이것을 그대로 적용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교회)의 관계는 남편과 아내, 부부의 관계라고 하면 납득하지 못할 수도 있다. ‘예수 관계가 이러한 거라면, 내가 가정 생활에서 지옥을 체험하고 있는데, 그러면 나는 예수 안 믿겠다고’, 나올 수도 있습니다.

 

지난 주에 로마문화, 헬라문화의 현상을 설명 드렸듯이, 그 당시는 간통이 일반적인 사회 현상이었고, 매춘을 부추기고, 가정에서 남편이 아내 보기를 우습게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은 그 당시 사회에서는 혁명적인 일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이러한 것을 아예 생각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교회론,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가 부부의 관계고, 부부의 관계가 또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은 서로 지금 회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룩함을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부관계가 원래 이래야 한다!’ 부부관계가 그 당시 깨져 있으니까, 그 관계를 거룩하고 아름답고 성스러운 관계로 회복시키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부부의 관계로 설명하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사람들이 잘 감을 못 잡고 있으니까 우리 일상생활의 부부관계를 들어서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로운 관계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두 가지 효과를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는 교회론, 교회가 어떤 것인가를 실제적인 예를 들어서 보여주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 당시 깨져 있는 부부관계를 성스럽고 아름다운 관계로 끌어올리고 있는 것이다. 이 두 효과를 오늘 말씀을 통해서 보고 있는 겁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25-27절 말씀이 교회론을 전개하는데 있어서 핵심적인 구절이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교회에게 주신 이유를 세 가지 듭니다. 첫 번째, ‘교회를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주셨다고 합니다.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행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교회를 영광스러운 신부의 모습으로 세우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교회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기 위해서 주셨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행위에 강조를 둔 것이고, 세 번째는 그 행위를 통해서 우리 교회가 실제적으로 도덕적으로 모습이 변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성도들을 거룩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하기오스: 거룩한 백성, 거룩하다, 흠이 없다.’ 계속해서 사도 바울이 자신의 교회론과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성도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이기 위해서 계속해서 쓰고 있는 단어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세 가지의 메타포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1) 머리와 몸의 관계, 2) 신랑과 신부의 관계, 3) 사람과 자기 자신의 몸의 관계

 

이 세 가지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는 머리와 몸의 관계이고, 신랑과 신부의 관계이고, 사람과 자기 자신의 몸과 관계입니다. 사람과 자기 자신의 몸과 관계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자기 몸처럼 아끼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 몸을 학대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은 자기 몸을 사랑합니다.

 

몸이 머리에 복종하듯이, 몸인 교회가 머리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해야 한다, 그리고 신랑신부의 관계, 이것이 핵심적인 것인데, 예수님하고 교회가 부부관계를 맺으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한 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2 24절의 말씀을 끌어와서 사도 바울이 쓰는 것인데,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말씀인데, 이 모습처럼 신랑신부의 모습처럼 예수와 교회가 한 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 몸이 되었으니까, 사람이 자기 자신의 몸을 사랑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9절 말씀에 보면, ‘먹이신다, 자상하게 돌보신다는 표현을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먹습니다. 이것은 본능입니다. 우리는 살기 위해서 먹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몸을 자상하게 돌봅니다. 그런 것처럼 예수님이 우리를 그렇게 먹이시고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신비를 깨달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 신비를 깨닫지 못하면, 오늘 말씀을 잘 깨닫지 못하는 것이고, 이 교회론을 들어서, 일상생활을 들어서 교회론을 설명하고 있는데, 우리 일상생활을 교회론의 신비로움이 가득찬 거룩하고 아름다운 삶으로 끌어올리는 그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이 신비를 꼭 깨달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은 머리고, 아내는 몸이고, 우리가 신랑이고 신부고, 우리가 한 몸이 되었으니까 자기 자신을 사랑하듯이 그렇게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부부의 관계다, 결혼생활의 관계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종합적으로 설명합니다. “너희들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고 표현합니다. 사랑에는 헌신과 돌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자신을 교회를 위해서 내어주셨는데, 그것이 헌신입니다. 그리고 먹이시고 자상히 보호하십니다. 그것이 돌봄입니다. 그리고 존경이라는 말, 아내는 남편을 존경해야 하는데, 우리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섬기는 것처럼 그렇게 섬겨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잘못 생각하면, ‘내가 너에게 헌신하고 너를 돌봐줬으니까 너는 나에게 복종해야 해, 너는 나를 섬겨야 해이렇게 강요합니까? 다시 한 번 말씀 드리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내가 십자가에 달려서 너를 위해서 헌신했어. 그리고 내가 너를 맨날 먹이고 입히고 너를 세심하게 돌봐주고 있는데, 내가 이렇게 하고 있느니까 교회 너희들 나에게 복종하고 나를 섬겨야 해.’ 이렇게 합니까? 예수님을 이렇게 안 합니다. 반대로, 교회가 예수님 제가 당신 말씀에 복종하고 당신을 섬길 테니까 당신 나한테 헌신해 주시고 나를 돌봐주세요이렇게 합니까? 이렇게 하면 계약적인 관계고 인위적인 관계지, 이것은 서로 사랑하는 관계, 자유의 관계가 아닙니다. 이것은 이미 깨진 관계입니다. 굉장히 어색한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남편이 아내에게 헌신하고 아내와 가정을 돌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렇게 교회를 돌보신 것처럼 그냥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비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뜻입니다. 이것이 좀 다가 오십니까?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이게 뭐야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신비를 깨닫고 나면, ‘, 예수님께서 그렇게 헌신하시고 그렇게 돌보셨지. 아 그렇게 내가 가정에게 헌신하라고, 돌보라고 하시는 것이구나!’ 남편들이 이렇게 깨달아야 합니다. 이 신비를 체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나면, 모든 것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열심을 다해서 헌신하고 자상하게 돌보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아내가 이 신비를 체험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 예수님하고 교회와의 관계가 이렇지. 머리와 몸이야. 한 몸을 이루어서 이렇게 하셨지. 그런 것처럼 교회가 예수님의 말씀에 자발적으로 순종하고 섬김의 도를 펼치는 것처럼 가정에서도 그렇게 해야지.’ 이런 모습이 바로 아내가 남편을 존경하고 가정을 사랑하고 섬기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돈많이 벌어다 주는 것, 맛 있는 거 해주는 것이 근거가 아닙니다. 돈 많이 안 벌어다 주면, 깡패처럼 굴것입니까? 요즘 결혼이 이런 형태로 돌아가니까, 가정이 힘들어집니다.) 이것은 누가 강요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헌신했으니까, 내가 돌봤으니까 이렇게 해’, 라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심장, 창자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부터 체험해서 자발적으로 나오는 참 자유, 자유의지, 바로 이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신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결혼생활이라든지, 남편과 아내의 관계, 가정에서 자녀를 돌보고, 자녀가 부모를 섬기고 하는 것이, 이 믿음의 신비를, 하나님의 은총의 신비를 깨닫지 못하면, 남편과 아내, 부모 자식 간에 이 신비로운 상태에서 서로 섬기는 것이 잘 될 수 없습니다. 이것만 잘 된다면 가정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현대인들의 가장 큰 어려움이 바로 가정이 깨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정이 깨지고 있다는 것은 더 깊이 들어가면 신앙의 문제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끝까지 들어가보면 결국 신앙의 문제로 갑니다. 신앙이 회복되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총을 깨닫지 못하니까, 자꾸 가정이 깨지는 것입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제가 지금 가정이 깨진 분들을 정죄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가정을 하나님께서는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런 것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고, 신앙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하나님의 은총, 십자가의 신비,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와 한 몸을 이루셔서 우리를 돌보시고 사랑하시는 그 신비로움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우리의 가정생활이 어떻게 변해야 하고, 아내를 어떻게 대하고, 남편을 어떻게 대하고, 자녀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온전하게 스스로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를 체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로서 성도님들에게 가장 전하고 싶은 말씀은 이러한 것입니다. 말씀의 신비를 체험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를 체험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의 모든 부분이 회복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깨어진 관계, 망가진 나의 육체, 깨어진 가정, 깨어진 나와의 관계, 이 모든 것들이 신앙의 문제로 해결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꾸 그 능력을 믿지 않고, 말씀의 능력을 자꾸 부정하니까, 경건의 모양은 있어도 능력이 나타나지 않아서 그렇지, 모든 것이 다 말씀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자꾸 그런 것을 부인합니다. 요즘 시대 사람들은 자꾸 부인합니다. 말씀의 능력을 부인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꾸 회복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도 제가 말씀 드렸듯이, 겉핥기로 보면 서로 싸움만 하게 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신비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화해하게 하는 것이고, 서로 깊이 사랑하게 하는 것이고, 서로 잘못했다고 하면서 용서하게 하는 것이 말씀이지, 말씀에 근거를 들어서 서로 싸우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늘 그렇습니다. 늘 안타까운 것이, 성경을 좀 안다, 읽었다고 하면, 괜히 성경을 들어서 싸울라 그러고, 성경을 근거 들어서 억지로 복종시키려고 합니다. 여태까지 남자들이 많이 그랬습니다. 성경을 들어서 어디 아내가 남편한테 그래 남편한테 복종해야지’, 하면서 여자들을 억압하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 즉 말씀의 신비를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에 하나님의 신비를 체험하십시오. 신앙생활 하시면,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를 체험하십시오. 그러면 그 안에서 우리 삶의 모든 문제들을 풀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도 남편은 아내에게 이래야 한다, 아내는 남편에게 이래야 한다고 단순하게 지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가 어떤가, 그 신비로움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신비로움을 깨달으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우리의 일상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습니다. 신비를 온전히 깨달으면, 우리의 모든 문제가 거룩하고 아름답게 해결될 것입니다.

 

우리 삶에 문제가 있을 때, 가정에 문제가 있을 때, 내가 지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주신 그 신비로운 은혜를 떠나 있는 것이 아닌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를 자신의 몸처럼 돌보시고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신비를 체험하셔서, 삶의 모든 것이 거룩하고 아름답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설교를 음성으로 듣고 싶으시면 아래를 클릭하세요!

http://columbus.onm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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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죽으면 별이 된다는 말을 믿고 싶다

이 땅 위에서 별처럼 살았던 사람도 별이 되고

이 땅 위에서 별 볼 일 없이 살았던 사람도 별이 되고

죽어서 모두 별이 되어 만난다면

그 잘난 교만도

그 못난 마음도

반짝반짝 허물어지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별처럼 살아도 상관 없고

별 볼일 없이 살아도 상관 없다

죽으면 모두 별이 되어 만날 텐데

뭐 그리 아등바등 살아갈 필요 있겠는가

교만을 탓할 것 없고

못난 마음도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

그저 빛나는 대로 살면 될 뿐

 

사람은 죽으면 별이 된다는 말을 믿고 싶다

반짝반짝 허물어질 내 마지막 날

두 눈을 꼬옥 감으면

어느새 저 높은 곳에 별이 되어 걸리는 인생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

너도 나도 다 한결같이 하늘에 걸리어 반짝반짝 빛나는 인생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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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5

 

아버지,

제가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게 된 것은

교회 봉고차에서

아버지가 돌아오시기를 기다리면서부터입니다.

계절은 기억 나지 않지만

중학교 때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말죽거리 도로변에 봉고차를 주차해 놓고

아버지는 잠시 일을 보러 가셨죠.

할 일이 없었던 저는

라디오를 돌리다가 클래식 채널에서 멈춰서

현악기의 선율에 매료되었습니다.

무슨 곡이었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때 그 느낌만은 기억합니다.

클래식 선율이

잔잔한 마음에 파동을 일으킨 것이죠.

가슴이 뛰었습니다.

마구 뛰었습니다.

멜로디와 화음,

그리고 소리.

마음이 그것을 기억합니다.

그때부터 내 마음은

곱지 않은 것

조화롭지 않은 것

아름답지 않은 것에는

눈과 귀를 두지 않게 되었습니다.

홀수보다는 짝수를 좋아하게 됐고

네모보다는 동그라미를 좋아하게 됐고

독창보다는 합창이 좋아졌습니다.

아버지,

저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베토벤 교향곡 9 5악장 합창이

마음 속에서 연주됩니다.

아버지는 저를 외롭지 않게 하셨던 또 제 옆에 계셨던 짝수요

세상을 둥글게 바라보게 하셨던 동그라미요

사람들과 더불어 조화롭게 살게 하셨던 합창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제게

환희입니다.

아버지,

오늘도 아버지 생각에

마음이 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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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2012. 10. 31. 07:00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4

 

아버지,

저는 이제서야 서른 일곱 살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이 날이 오기를 기다렸는지요!

사실 기다렸다기 보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왔습니다.

그리고 둘째 아들도

약속이나 한 것처럼

정확하게

서른 일곱 살 먹은 나에게

왔습니다.

 

남들은 서른 일곱이 무슨 대수냐,

생각할지 모르지만

아버지는 알고 계시죠?

제가 왜 이렇게

서른 일곱에 설레 하는지.

아버지도 서른 일곱 살 된 해에

둘째인 저를 낳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는 둘째인 저를 낳으셨지만,

저는 둘째 아들을 만났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되어

아들은 제가 되어,

약속한 것처럼 만났습니다.

 

저는 비로소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었습니다.

저를 안을 때 어떤 느낌이셨을지,

저를 보고 있을 때 어떤 미소를 지으셨을지,

이른 새벽 어둠을 가르고 일터로 나설 때

자고 있는 아들들의 모습을 보고

어떤 마음이셨을지.

저는 비로서 헤아리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둘째 아들이 태어난

제 나이 서른 일곱.

이제부터는 더 아버지가 되는 듯합니다.

저는 아버지로 삽니다.

아버지가 아버지로 살았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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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12. 10. 31. 06:57

어떤 크리스마스 이브

 

 

배고픔 때문에 일어났다.

냉장고 문을 열어 들어있는 음식을 꺼내

상함의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코를 들이대는 것도 이젠 일상이다.

상하지 않은 것이 확인 된 음식들을 프라이팬에 모아 볶는다.

이름도 없는 볶음밥,

후딱 먹어치웠지만,

속이 편하지 않은 것이 어째 소화제를 먹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도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나름대로 낭만을 생각했는데,

마음 속에 들어 있는 건 볶음밥처럼 이름 모를

한숨 덩어리들뿐이다.

담배처럼 한 숨만 피우다,

집안이 좀 시끄러우면 괜찮아 질까 하고

보지도 않을 TV를 켰다.

집안을 채우고 있는 한 숨 소리와 TV 소리를 헤치며

이리저리 집안을 서성이면서 할 일을 찾아보았다.

어질러져 있는 방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손을 대기 싫었다.

이런 날은 사람 냄새가 나야 하는데,

방을 깔끔하게 치우고 나면,

어쩐지 사람 냄새가 가실 것 같아서였다.

햇살만이 창문을 통해 나를 찾아왔을 뿐,

아무도 오지 않았다.

아기 예수를 맞으러 온 세상이 해를 넘어가고 있을 때쯤,

하루 종일 울리지 않은 전화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전화를 들어 내가 누른 건,

전화 번호가 아니라

볶음밥처럼 이름 모를

그리움이었다.

 

사람들은 잘 있는 것 같다.

소화제나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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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2012. 10. 31. 06:52

유전에 대하여

 

부자지간에는 닮은 구석이 있게 마련이다

아무리 닮은 데가 없어서도

발가락이라도 닮기 마련이다

나도 아버지를 닮은 구석이 많다

 

남들은 보이는 부분만 보면서

나를 보고 아버지를 닮았다고 말하지만

그 중에서도 아버지를 닮아

쥐 젖 같은 조그만 혹이 몇 개 있다

 

나는 매일 아들과 함께 샤워를 한다

어느덧 사물을 인식할 만큼 커 버린 아들이

함께 샤워를 하다가

마침내 내 몸에서 혹을 발견했다

 

아들은 신기한 듯 물었다

아버지 이게 뭐야?’

나는 대답했다.

, 이건 혹이라고 해

 

? 이건 어떻게 해서 생긴 거야?’

, 아버지의 아버지, 그러니까 너한테는

할아버지도 이런 혹이 있으셨는데,

아버지가 아들이라 이렇게 생기게 된 거야!’

 

유전이라는 두 글자로 설명하면 될 것이지만

아직 유전이 무엇인지 모르는 어린 아들에게

혹이 생기게 된 경위를 설명하는 일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오늘따라 잠 못 이루는 아들과 누워

이야기도 들려주고 노래도 부른다

문득 아들은 아버지의 혹이 생각났는지

손을 더듬어 아버지의 혹을 찾는다

 

아무렇지도 않게 혹을 만지작거리는 아들에게

다시 유전에 대하여 설명한다

너도 아버지의 아들이기 때문에

네가 아버지 나이쯤 되면 이렇게 혹이 나게 될 거야.’

 

혹을 만지작거리던 아들은 어느새 스르르 잠이 들었다

그러는 사이 나는 유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됐다

내 몸에 이렇게 혹이 생기게 된 것은

나도 아들처럼 어린 시절 아버지의 혹을 만졌기 때문이 아닐까

 

아들이 아버지 몸에 난 혹을 만지작거리며 잠들지 않았더라면

아들은 이 다음에 커서 아버지처럼 혹이 안 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 밤 아들은 아버지의 혹을 이렇게 만지작거리며 잠들었으므로

아버지처럼 혹이 날 것이다

틀림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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