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를 부탁해]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자란 아이가 건강한 어른이 되듯이, 민주주의를 충분히 받고 자란 국가가 건강한 국가가 된다. 사실 국가란 가상의 세계이다. 실체가 없다. 국가라는 게 따로 있고, 그 국가에 사람들이 모여 사는 게 아니다. 사람이 모여 살면 그게 곧 국가가 된다. 사람이 국가다. 그 거꾸로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바로 이것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이념체계이다. 국가라는 허구에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 국가가 봉사하는 체계이다. 대한민국은 바로 이러한 이념체제 위에서 출발한 '민주공화국'이다.

 

'민주공화국'은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이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래 민주주의는 대한민국의 가장 중요한, 가장 근본적인 토대가 되는 시대정신이었다. 대한민국의 모든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활동은 민주주의를 세우기 위한 투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0년에 일어난 4월 혁명, 1987년 6월에 일어난 민주항쟁, 2016년에 일어난 촛불혁명 등, 대한민국의 역사는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의 역사였고 민주주의 세상을 열어보려는 의지의 역사였다. 그 누구도 이 시대정신을 거스를 수 없다.

 

우리는 그런 의미에서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을 반면교사 삼아야 한다. 이승만은 독립운동가로 이름을 알렸다. 구한말 여러 역사적 사건에 엮이게 되고, 도미하여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일제시대 독립운동 당시 안창호와 더불어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독립운동 당시의 상황을 들여다보면, 안창호는 어떻게 해서든 독립운동이 원활하게 진행되기 위하여 각 진영 간의 화합을 위해 양보하고 평화를 도모한 인물이었지만, 이승만은 자기 자신을 최고 정점으로 한 정치운동(독립운동)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자기가 중심이 되지 않으면 그 어떤 국가 건설 대안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러한 이승만의 기질 탓에 안창호는 주변 동료들의 권면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임시정부의 대통령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그 자리를 이승만에게 양보한다.

 

민주공화국 건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때부터 견지해온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이다. 그 이념을 바탕으로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도 이승만이었다. 다른 말로 해서, 이승만은 민주공화국을 설계한 자 중 한명이요 그 이념을 지켜내겠다고 자부하며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그러나,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출발하고 초대 정식 대통령이 된 이승만의 행보는 민주공화국의 이념과 사뭇 달랐다. 한국전쟁을 치를 때 보인 행보며, 전쟁이 끝난 뒤 반공과 독재를 통해 민주주의를 오히려 후퇴시킨 행보며, 장기집권을 노리며 벌인 3.15부정선거로 인하여 결국 4월혁명을 불러왔고 권좌에서 쫓겨나 하와이로 망명을 떠난 행보가 그렇다.

 

이승만에 대하여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역사가도 있지만, 대개 이승만에 대한 역사가들의 시선은 그리 곱지 않다. 역사가들이 이승만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반공 프레임과 독재를 통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후퇴시켰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에서 붉어지고 있는 '대통령 집무실 논란'을 보면서, 그것은 민주주의를 증진시키는 정책인가, 아니면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정책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공약을 지키는 일도 중요하고, 이전 정부와 차별화를 두는 것도 중요하지만, 민주주의 국가에서 집권세력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들의 삶이다. 민주국가의 정권은 국민들의 삶을 가장 효율적으로 돌보기 위한 봉사(ministry)의 힘일 뿐이다.

 

누가 봐도 더 긴급한, 산적한 문제가 많다. 코로나 장기화 사태로 인하여 국민들은 지쳐 있고, 비즈니스가 어려워져 폐업하는 업주들이 날마다 늘어나고 있고, 역대급 산불피해로 삶의 터전을 몽땅 잃어버려 신음하고 있는 국민들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역대급 비호감과 초박빙 대선으로 인하여 국민들의 마음이 둘로 나눠져 있다.  

 

이러한 시기에 대통령직에 당선되자 마자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가는 대통령실 이전 문제를 가장 우선적으로 실행하는 정치행태는 매우 비민주적으로 보인다. 사는 게 어려운 국민을 먼저 돌보는 게 아니라 자신의 집권을 먼저 생각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말로 대통령 집무실을 옮기려 한다면, 그것이 시대적 요청이라면 무리해서 지금 당장 그 일을 시행하려 드는 것보다 임기 내에 필요에 따라 차츰차츰 진행해도 될 일이다. 갑작스러운 대통령 집무실 이전에 따른 혼란과 비용을 최소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  

 

말 만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일하는 대통령, 국민을 섬기는 대통령이 되려면 청와대 같은 권력형 청사에서 나와 좀 더 시민들과 가까운 거리에서 소통하며 집무를 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대통령 당선자의 신념과 고집 보다는 국민적 공감과 합의가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대통령은 국민을 섬기는 자이지 국민 위에 군림하는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이다. 민주공화국은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고 더불어 잘 살고자 하는 국민의 염원을 담은 실체이다.

 

국민이나 정권이나 행하는 모든 일은 민주주의를 증진시키는 일이 되어야 한다. 특별히 정권을 잡은 자가 민주주의 증진을 위해서 자신의 봉사적 힘을 국민을 위해 쓰지 않고 자신의 사욕을 채우기 위해 쓰고 만다면 그는 대한민국 역사에 곱지 않게 기록될 것이다. 얼마나 치욕인가. 역사에 치욕적으로 기록되는 것은 생각보다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대한민국은 아직도 민주주의가 많이 필요하다. 아직 자유가 충분하지 않고, 평등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유와 평등이 충분해서 서로가 서로를 환대하며 사랑하게 될 때까지 민주주의를 밀고 나가야 한다.

 

새로운 정부에게, 민주주의를 부탁한다.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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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문2022. 3. 15. 23:49

우리를 통한 구원을 간구하는 기도

(출애굽기 15:1-21)

 

주님,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들의 입술에서만 노래가 울려 퍼지게 하지 마시고

구원받은 우리를 통하여

누군가의 입에서도 노래가 울려 퍼지게 하옵소서.

그 일을 위해 우리를 부르신 줄 믿사오니,

주여, 우리를 통하여 주의 구원을 이루어 주시옵소서.

우리의 구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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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2. 3. 15. 23:43

누군가의 노래

(출애굽기 15:19-21)

 

1. 구원은 좋은 것이다. 구원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구원의 경험을 하고 나면 저절로 찬송이 나온다. 출애굽기 15장은 홍해를 건넌 후 구원을 경험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영광과 승리의 찬송을 드리는 노래들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모세의 노래, 다른 하나는 미리암의 노래이다. 모세의 노래는 ‘바다의 노래(the Song at the Sea)’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2. 2017년에 <옷소매 붉은 끝동>이라는 소설이 나왔는데, 얼마 전 TV에서 드라마로 제작되어 방영된 적이 있다. 알라딘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서 보면, 이 소설에 대한 평가가 대체로 좋다. 한 평가에서는 이 소설이 드라마로 만들어지면 참 좋을 것 같다고, 누가 주인공을 하면 좋을지 기대된다는 것도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드라마로 만들어져 방영되었다.

 

3. <옷소매 붉은 끝동>은 조선의 영,정조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특별히 정조 이산과 그의 후궁 의빈 성덕임 간의 사랑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역사 기록에 보면 후궁 의빈은 정조의 첫사랑인 것 같다. 정조는 첫사랑 성덕임을 후궁으로 맞아들이고 싶어했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성덕임은 정조의 청을 거절한다. 그러다 훗날 우여곡절 끝에 성덕임은 정조의 후궁이 되어 의빈에 책봉된다.

 

4.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소설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갈 때는 현재 우리 삶의 현실이 반영되기 마련이다. 소설에서 성덕임은 왕의 청을 거절할 정도로 주체적인 여인으로 등장한다. 성덕임이 실제로 그랬는지 아닌지는 역사 기록이 별로 없어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작품을 써내려 간 이는 상상력을 발휘해서 성덕임의 주체성을 당당하게 세워 나간다. 왜 그럴까? 우리가 사는 시대에는 여성의 주체성 문제(페미니즘)가 굉장히 중요한 이슈이기 때문이다. 어떤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술은 그 사건을 기록할 당시의 정황이 반영되기 마련이다.

 

5. 전도서를 읽어 나가기 전 서론에서 전도서가 기록된 시기는 헬라문명이 이스라엘을 위협하고 있던 기원전 2,3세기였다는 것을 밝힌 적이 있다. 전도서에 명시적으로 등장하는 저자는 솔로몬이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 전도서가 기록된 시기는 800년 후 헬라문명 시대이다. 전도서는 헬라문명과의 부대낌 속에서 기록된 것이다. 솔로몬 시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실제로는 800년이 지난 기원전 2,3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한 책이라는 뜻이다.

 

6. 구약성경, 특별히 모세 오경은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와 이스라엘의 고대 역사(족장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실제로 기록된 시기는 바벨론 포로기 때이다. 성경을 읽어 나갈 때 이것을 염두에 두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이스라엘 역사 중에 가장 어두운 시기는 바벨론 포로 시대이다. 이것은 한국 역사의 가장 어두운 시기가 일제강점기라는 것과 같은 것이다.

 

7. 일제강점기 때 신채호는 <조선상고사>라는 역사책을 쓴다. 이때는 한국인의 민족주의와 주체성이 중요했기 때문에 신채호는 민족주의와 주체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한국(조선)의 역사를 기술한다. 단군시대부터 백제의 멸망과 그 이후 부흥운동까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으나, 민족주의와 주체성을 가지고 역사를 새롭게 기술한다. 신채호는 사대주의 입장에서 기록된 역사들을 거부하고 한국인의 주체적인 입장에서 역사를 기록하여, 신라 중심이 아닌 고구려 중심의 역사를 기록했을 뿐 아니라 백제의 역사를 자세하게 기록하는데, 그 이유는 백제가 부여·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로서, 고구려와 같이 대외경략에서 뚜렷한 업적을 남겼고, 근구수왕과 동성왕 때 중국의 랴오시·산둥 지방과 일본 전역을 식민지로 삼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8. 출애굽기는 출애굽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지만, 이 역사를 기록한 시기는 바벨론 포로기 때이다. 나라가 망하고, 성전이 파괴되고, 다수의 고관들과 백성들이 포로로 남의 땅에 끌려온 상황이다. 요즘 우크라이나 전쟁 사태를 통해서 보고 있지만, 전쟁이 발생하면 모든 삶과 꿈이 멈춰 버리고 일상이 지옥으로 변한다. 그러한 경험을 하는 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구원이다. 이 지옥 같은 삶에서의 구원.

 

9.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시인 심훈이 1930년 3월 1일에, 3.1독립만세 운동을 기리며 쓴 <그날이 오면>이라는 시를 보면, 정말 절절하다.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며는

삼각산(三角山)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漢江)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치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鍾路)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恨)이 남으오리까.

 

10. 심훈의 <그날이 오면>과 출애굽기 15장에 나오는 모세와 미리암의 노래, 즉 <바다의 노래>는 다르지 않다. 바벨론 포로기를 보내고 있는 이스라엘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구원을 간절히 바랐을 것이다. 홍해를 가르고 이스라엘을 출애굽 하게 도우신 하나님께서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는 고달픈 이 민족을 구원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랐을 것이다. 출애굽기 15장에 나오는 <바다의 노래>는 내용상으로는 홍해를 건넌 뒤 하나님께 영광과 승리의 찬양을 드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구원의 소망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이다.

 

11.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그가 바로의 병거와 그의 군대를 바다에 던지시니 최고의 지휘관들이 홍해에 잠겼고 깊은 물이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돌처럼 깊음 속에 가라앉았도다”(출 15:3-5). 이 구절은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깊은 신앙과 바람이 간절히 담긴 곳이다. 이 구절에 나오는 ‘깊음’이라는 용어는 바벨론 창조 신화에 등장하는 바다 괴물 티아맛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하나님께서 그 ‘깊음’을 사용하셔서 애굽 왕의 병거와 그 지휘관들을 홍해의 깊은 물로 덮으셔서 그들을 돌처럼 가라앉게 하셨다는 선포는 바벨론의 신은 아무 것도 아니며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 아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12. 일제강점기에서 숨도 못 쉬며 살던 한국인들(조선인들)이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를 읽는다면 어떤 마음을 가지게 될까. 한반도뿐 아니라 대륙 중국 땅 깊은 곳까지 호령했던 조상 고구려의 기상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움츠렸던 마음을 펼 것이며, 일본까지 식민지를 삼았던 백제의 기상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일본 까이거~’하면서 일제강점기를 끝내고 고구려와 백제의 기상을 이어 나가, 독립을 이루고 자랑스러운 조국을 세울 수 있을 거라는 소망을 품었을 것이다. 그와 같이 바벨론 포로기를 살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기에 기록된 <바다의 노래>를 들었다면, 비록 지금 처지는 포로 신세이지만, 곧 용사이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할 것이요, 바벨론의 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며, 선민으로서의 민족적 자부심을 잃지 않았을 것이다.

 

13. 이러한 주님의 말씀이 어려움에 처해 있는 우리들에게 큰 힘이 되기를 소망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다. 하나님의 구원은 참 좋은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니, 소망을 잃지 말고, 마음을 굳건히 가지면 좋겠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참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는 우리가 구원받은 것에 대해서만 집중을 하고, 구원받을 것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요즘처럼 살기 힘든 세상, 무엇보다 경쟁이 삶의 원리로 작동하는 세상에서는 거룩한 구원이 타락하기 십상이다.

 

14. 우리가 사는 사회, 자본주의 사회, 특별히 신자유주의 사회의 악마성은 다른 데 있지 않고, 사람들끼리 무한 경쟁을 하게끔 조종하여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미워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얼마 전 전세계를 강타한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그것을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이러한 무한 경쟁 체제 내에서의 구원은 구원 자체가 악마성을 띠게 된다. 모든 사람들이 죽고, 자기 자신만 살아남는 것을 구원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나는 오징어 게임의 감독이 후속 편에서 이 문제를 다루어 주기를 바란다.  

 

15. 우리는 구원을 바란다. 그런데, 무의식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구원은 경쟁 상대를 물리치는 구원일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그러한 사회 구조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우리는 우리의 자녀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를 바라며 기도한다. 자녀가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면 그것은 우리에게 명백한 구원이다. 그러나, 대학 입시는 원천적으로 경쟁이다. 대학에 합격한 이들이 있으면, 대학에 불합격한 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합격한 이들은 구원받았다고 기뻐하겠지만, 불합격한 이들은 구원받지 못해서 절망한다. 절망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나의 구원은 완전한 구원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늘 마음이 불편하다.

 

16. 나는 이러한 경쟁 구도가 너무도 마음에 들지 않아서 저항하는 때가 많다. 경쟁해서 이기는 방식으로 원하는 것을 얻는 게 정말 불편하다. 나에게 이런 일화가 있다. 에모리에서 M.Div.(목회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개척을 나갔는데, 개척한 후 일 년 뒤에 Th.M.(신학 석사과정)에 입학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 내가 아끼는 후배가 나와 같은 시기에 Th.M.과정에 입학하고 싶어했다. 그 친구는 그 과정에 입학하지 않으면 비자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야 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나는 교회를 개척해서 교회를 통해 비자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에 그 친구보다는 상황이 괜찮았다. 그런데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그 과정에 후배랑 함께 지원을 하면, 왠지 후배가 그 과정에 입학하지 못하고 떨어질 것 같았다. 나 때문에. 대개 미국 대학원 입학원서 내는 시기는 2월 중순이 마감이다. 그 과정에 지원했다는 후배의 말을 듣고, 나는 지원을 포기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후배가 그 과정에 합격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감사했다. 그 친구가 합격을 한 후, 나는 마음이 좋았다. 그리고 혹시나 해서 Admission Office에 5월쯤 연락을 해서, 혹시 지금 지원해도 되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내 신분이 더 이상 국제학생이 아니기 때문에 지원해도 된다는 대답을 들었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지원을 했고 합격을 했다. 그리고 더 좋은 소식은 학교에서 장학금을 주겠다고 해서 돈 한 푼 안들이고 공부할 수 있었다. 경쟁을 포기하고, 후배에게 양보하니,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살게 해주셨구나, 하면서 감사드렸다.

 

17. 아마도, 우리의 삶 속에서 이렇게 살아가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체제 자체가 경쟁을 부추기고, 경쟁을 통해서 원하는 것을 성취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체제를 거부하는 일은 많은 희생이 따르고, 엄청 피곤한 일이다. 그러나, 다만, 우리가 구원이라는 것의 거룩성을 알고 실천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나의 구원이 소중하듯, 상대방의 구원도 소중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어떻게해서든지 ‘너도 구원받고 나도 구원받는’, 거룩한 구원을 이루도록 기도하며 노력해야 할 것이다. 또한, 내 입에서만 구원의 노래가 울려 퍼지게만 하면 안 되고, 누군가의 입에서도 구원의 노래가 나오도록 곤경에 처한 이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주어야 할 것이다.

 

18. 그런 의미에서 내가 최근에 돕고 있는 ooo 어머니를 소개하고자 한다. 약 두 달 전 어느 날 전화 한 통이 왔다. 모르는 번호라 안 받으려다 그냥 받았는데, 백인 미국인이었다. 본인은 선교사 출신이고, 프리몬트 거주자라고 소개했다. 그런데, ooo 학교 앞 공원 주차장에 홈리스가 한 명 살고 있는데, 가서 대화를 나누어 보니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한국인이라는 말을 듣고 구글링해서 한국교회를 찾아 전화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나보고 그 홈리스를 좀 돌봐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 이후 나는 두 달 째 그분을 도와드리고 있다.

 

19. 여든이 넘은 노인네이시다. 여성으로서 노인이 홈리스로 산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그분과 대화를 나누면서 여러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 그 당시 명문대 영문과 출신이고, 미8군에서 비서로 일하다 미국 장교와 결혼해서 미국 땅에 1960년에 왔고, 남편과 이혼한지는 오래됐고, 두 딸이 있는데, 둘째 딸은 다운증후군이라 본인이 계속 돌봐 줘야 하는데, 남편이 법적으로 딸을 빼앗아 가서 딸 주변을 배회하며 딸을 돌보고 있는 중이라 했다. 교통사고가 크게 나서 차가 완전히 망가졌고, 망가진 차를 그곳에 세워 놓고 노숙하는 이유는 다운증후군 딸을 돌보기 위함인데,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전남편과 딸이 사는 집이 있기 때문에 그곳에서 노숙한다는 것이었다.

 

20. 교통사고 문제를 해결해야 보상을 받아 자동차도 새로 구입하고 자신이 홈리스 신세를 면할 수 있는데, 차도 없고, 늙고, 또 자동차 사고로 머리를 다쳐서 예전처럼 말과 행동을 빠르게 할 수 없어, 모든 게 더디기만 하다고 하신다. 여기에서 그분에 관한 모든 것을 다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미국에서 한국인이 한국인을 돕지 않는다면 누가 돕겠는가, 생각이 들고, 무엇보다, 그분이 빨리 홈리스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삶을 살도록 도와주는 것은 그분에게는 분명한 구원의 경험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마음을 모으고 힘을 모아서 우리 지역에서 노숙자로 생활하고 있는 그분을 도와 어서 빨리 정상적인 삶을 찾도록 해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는가, 생각해 본다. (구체적인 도움은 여선교회 회장을 비롯해 관계자 분들과 회의하여 공지를 하겠다. 여러분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부탁한다.)

 

21. 우리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삶의/생명의/인간으로서의 품위(dignity)이다. 이 잘 사는 나라에서 한 사람의 품위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게, 오히려 한 사람의 품위를 손상시킨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그런 면에서, 구원은 힘 있는 자가 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 자가 하는 것 같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궁극적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 자신의 구원만 갈망할 것이 아니라, 그래서 내 입에서만 노래가 나오도록 할 것이 아니라, 생명이 손상되어 품위를 잃고 아파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실제적인 구원의 손길을 뻗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양심일 것이다. 내 구원의 노래와 더불어 누군가의 노래도 함께 소중하게 생각하고, 누군가의 노래에도 귀를 기울이고, 누군가의 노래가 울려 퍼지게 하는, 따뜻한 세상을 만들어 나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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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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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의 한 구절]

 

신영복 선생의 <강의>에 나오는 한 구절을 소개한다.

 

"개혁파가 도덕적 정의만으로 승부하려고 하는 것에 반해서 보수 우파들은 동원하지 않는 전략전술이 없습니다. 엄청난 기만과 정보를 동원합니다. 기묘사화 때도 훈구파들이 잎사귀에다 꿀물로 주초위왕이라고 쓰고 벌레가 파먹게 해서 그걸 임금한테 갖다 보이게 했다고 합니다. 개혁 사림의 가치가 사회적 공감대를 만들어 내자 훈구 척신들은 재빨리 개혁 이미지 속으로 피신합니다. 변신에 능합니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로 노론 세력들이 지금까지 지배 권력으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조선 후기, 일제강점기, 그리고 해방 이후 군사정권에 이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막강한 보수 구조를 완성해 놓고 있습니다. 물론 배후에 외세의 압도적 지원을 업고 있는 것 역시 그때와 다르지 않습니다."

(신영복, <강의>, 329-393쪽)

 

기득권 세력에 저항하며 개혁의 토대를 마련하고 싶은 사람은 <강의>의 22장 '피라미드 해체'를 꼭 읽어보았으면 한다. 그곳에서 신영복 선생이 제시하고 있는 개혁의 토대는 세 가지로 요약된다.

1) 중앙에서 지방으로

2) 정치 투쟁에서 사상 투쟁으로

3) 기동전에서 진지전으로

 

사회개혁은 하루 아침에 혁명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루 아침의 혁명은 또다른 기득권을 낳을 뿐이다. 사회개혁은 교육처럼 백년지대계의 전략으로 가야한다. 무엇보다 정치 투쟁에서 사상 투쟁으로의 전환이 중요하다. "사회 변혁은 사상 투쟁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사상 투쟁은 그 투쟁을 견인해 나갈 주체가 있어야 합니다"(382쪽).

 

정치철학 관점에서 기독교 사상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고 있는 나로서 안타까운 점은 무엇보다 기독교 사상은 사상 투쟁을 견인해 나갈 주체가 충분히 되고도 남는 사상과 조직을 가지고 있음에도 사회 변혁은 커녕 사회 변혁의 걸림돌을 넘어 사회의 웃음거리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시대가 어려울수록 한탄만 하고 있을 수 없다. 사회 변혁의 투쟁은 사상 투쟁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시대가 어려울수록 더 열심히, 더 깊게, 더 치열하게 공부해야 한다. 나부터 그리하려 한다.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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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의 공동체]

 

현대철학은 들여다보면 볼수록 종말론적이다. 데리다의 해체 개념이나 장 뤽 낭시의 무위 개념은 모두 나의 눈에는 기독교의 종말론 개념처럼 보인다.

 

노장사상이라고 알려진 '무위' 개념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비협조적 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를 고정되고 완성된 것으로 보는 것에 반대하는 태도'이다. 이것은 정확히 기독교의 종말론적 태도와 일치한다.

 

장 뤽 낭시는 <무위의 공동체>에서 이 세계에 갇혀 있지 않은 새로운 공동체의 상상한다. 그것이 무위의 공동체이다. 우리는 어떤 관념적 틀이나 제도적, 또는 사회적, 집단적 틀에 갇혀 있다. 갇혀 있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 틀을 고정되고 완성된 것으로 여기고 거기에 순응하는 태도가 문제이다. 장 뤽 낭시는 이러한 태도를 거부한다.

 

데리다의 해체 개념도 따지고 보면 낭시의 생각과 같은 맥락에 있다. 왜 해체가 필요한가? 현재 우리가 몸담고 있는 관념적, 제도적,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등 모든 틀들은 고정되고 완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잠정의 세상이지 완성의 세상이 아니다.

 

이러한 생각은 근본적으로 기독교 종말론에 담긴 생각이다. 종말론은 이 세상을 잠정적인 것으로, 즉 고정되거나 완성된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래서 낭시의 용어를 빌려 표현하자면, 교회는 무위의 공동체가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교회는 그것을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려야 할 의무를 지닌 것이다.

 

혐오와 배제, 그리고 폭력이 왜 발생하는가?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타자를 자신과 동일시 하려는 욕망이다. 자신의 육체성(자신이 몸담고 있는 현실성)이 절대이고 고정되고 완성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무지는 필연적으로 혐오와 배제, 그리고 폭력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현실성에 묻힌 자는 그 현실에 숨막혀 죽거나 그 현실성이 전부인 양 그 현실을 우상처럼 받들어 모시며 살 것이다. 그리고 그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조롱하며 자기 현실에 그 사람들을 끌어들이려고 온갖 협박과 술수를 쓸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지옥이 될 수밖에 없다.

 

현실을 지옥으로 전락시키지 않으려면 우리는 종말론적 태도를 견지해야만 한다. 이 세상은 잠정적인 세상이지 종결된 세상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우리는 현실에 파묻히지 말아야 하며 언제나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그 세상을 현실에 이루어내기 위해서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 그러한 무위의 인간, 무위의 공동체가 우리에게 숨을 불어넣어주고 우리를 살게 할 것이다.

 

"현실이나 미래에 실현되어야 한다고 가정되는 모든 정치적이거나 경제적 지평을 넘어서는 계획/기획/프로그램의, 관념으로 동일화될 수 있는 모든 구도의 바깥에서 보이지 않는 '우리'의 근거가 드러난다는 것이며, 그 근거와 마주하기 위해서는 이미 결정된 사회나 결정되어야 할 사회로부터 돌아서는, '위험하고도 급진적인' 박탈과 비움의 움직임, 즉 무위의 움직임이 반드시 요청된다는 것이다"(<무위의 공동체>, 263쪽, 옮긴이의 해설 중).

 

무위의 움직임이 많아지고 깊어지는 세상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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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습은 자본주의 사회의 산물]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회세습을 목회자의 윤리적 문제로 분리하여 비난하는 것은 자본주의가 가진 구조적 모순을 은폐하는 데 도움을 줄 뿐이지 교회세습 문제 자체를 해결하지 못한다.

 

자본문맥(모든 것이 성장 발전해야 한다, 증식되어야 한다는 논리)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교회세습은 목회자가 행하는 자본축적의 마지막 단계일 뿐이다. 그러므로 교회세습은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자본문맥에 갇혀버린 교회의 구조적인 문제이다.

 

구조적인 문제는 개인의 윤리에 호소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한국교회가 교회세습 문제를 해결하려면 우선 자본주의에 대한 철저한 비판적 연구가 필요하고, 자본주의가 어떻게 인간성과 신앙을 해치는지를 반성해서 자본문맥에서 자유한 탈자본의 공동체를 구축해야 한다. 이것은 교회의 과제일 뿐만 아니라 후기 근대사회를 살고 있는 모든 인류의 과제이기도 하다. 교회가 이 과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지도자의 위치에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구조적 반성이 없다면 교회세습은 끊임없이 발생할 것이고, 윤리적 비난은 교회를 갈등으로만 밀어넣을 뿐 아무런 해결도 하지 못할 것이다. 참새는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참새한테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라고 다그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라, 참새가 다니는 길에 방앗간을 놓지 않는 것이 올바른 해결책이다.

 

자본주의에 의해 주조된 소비적, 소유적 인간이 어떻게 교회세습의 유혹을 뿌리치겠는가. 교회세습은 소비와 소유 욕망의 절정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절정을 맛보고 싶어한다. 우리는 하나도 자유롭지 못한 노예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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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으로부터]

 

2014년 8월 10일 (일) 흐림 국지적 소나기

 

소설가 유순하 씨의 기사 중 이런 내용이 있었다.

그는 "평생 주변인으로 살아왔다"고 토로했다. 에세이 서언에선 “갈 데 없는 몽상가였지만 그것이 나의 생애였고, 그래서 미치거나 흐려지지 않고, 오히려 자족감마저 느끼며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도 했다. 이 사회의 주류에 속하는 게 부끄러운 시대를 맞아 '주변인'이라는 정체성이 그에게 사명을 일깨우고 이끌고 있는 것인가 싶었다.

 

주류와 주변인. 누구나 주류에 속해 살고 싶어한다. 주변인으로 살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한국에서 주류에 속해 산다는 것은 유순하 씨의 말대로 부끄러운 시대가 되었다.

 

존 도미닉 크로산의 책 <비유의 위력>을 보면, 마가복음의 비유를 분석하면서 그는 이런 결론을 내린다. "마가의 복음을 도전하는 비유로 읽을 때,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하는가? 이름 있는 사람보다 이름 없는 사람을 칭송하는 것은 기독교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라면서 마가복음이 도전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기독교 내에 지도자들의 리더십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주위를 환기시킨다. "기독교 역사에서 이름 있는 지도자들 가운데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대로 권력과 권위와 리더십을 행사한 사람이 도대체 몇이나 되는가!"(263쪽).

 

그렇지 않은가? 교회 밖은 말할 것도 없고, 교회 안에서도 소위 주류에 속해 있다고 생각되는 목회자들의 행태를 보면 부끄러움을 모르는 파렴치처럼 보인다. 교회를 세습하고, 비자금을 조성하고, 스캔들을 일으키고, 복음을 장사치처럼 팔아먹고, 욕망의 노예처럼 사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인다.

 

이 땅에서 주류에 속해 살아간다는 것은 이처럼 부끄러운 일이 되었다. 그러니 차라리 유순하 씨처럼 주변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양심을 지키며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하는 길이 아닐까?

 

'주변인'이란 말, 낯설지만 낯설지 않게 마음에 와 닿는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2014년 8월 10일에 쓴 일기다.

 

요즘 신영복 선생님의 책을 읽으면서 그냥 나의 지난 세월에 대한 기록(일기장)을 들춰 보게 됐다. 그때의 묵상처럼, 요즘은 정말 '주류'의 타락이 너무 심해서 주류에 속해 산다는 것 자체가 타락 그 자체가 되었다. 주변인으로 사는 게 속시원하고 의롭고 이로운 시대다. 주류에 속하는 사람으로 살기 위해 애쓰고 힘쓰는 것은 '나는 타락하고 싶다. 나는 타락하는 것을 욕망한다'라고 외치는 것밖에 되지 않는 것 같다.

 

신영복 선생님의 말씀처럼, 변방이 창조의 공간이므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기 위해서는 변방에 머물러 있는 것이 오히려 잘 사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개념을 통해 서구의 왜곡된 시선을 까발린 에드워드 사이드는 지식인을 '스스로 추방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세상을 보는 안목을 조금 가진 사람(지식인)이라면 사이드의 말처럼 '스스로 추방하는 사람'으로 살아, 변방으로 자기 자신을 위치시키며 기존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히지 말고 세상의 변혁을 위해 창조적인 일을 하는 것이 마땅한 삶 아닐까.

 

실로, 변방의 사람들(주변인)과 연대가 필요한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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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자유롭기 위해서는 떠나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어야 한다... 자유는 도망치기 위해 터널을 파는 것이 아니라, 자유란 자신 안으로 파고들어 가는 것이다."

 

제임스 K. A. 스미스는 어거스틴(아우구스티누스)의 통찰을 따라 현대 실존주의 철학이 제시한 '자유'에 대한 개념을 반박한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자유에 대하여 '자기 결정으로서의 자유(freedom as self-determination)' 밖에는 다른 자유가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다시 말해 현대인들에게 자유란 "선으로 간주되는 것을 본인 스스로 만들어낸다"는 뜻이다.

 

제임스 스미스는 실존주의자들이 주조해낸 이러한 류의 자유에 대하여 강력하게 제동을 건다. 그에 의하면, 어거스틴도 처음에는 그러한 자유를 꿈꾸고, 그러한 자유를 추구하기 위하여 집을 떠나 도시로 갔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그러한 류의 자유는 결국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더 절망스러운 것은 하나님 조차 잃어버리게 하는 거짓 자유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사는 시대의 사람들은 자유를 완전히 오해하고 있다. '자기 결정으로서의 자유'가 자유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들 조차도 이러한 세속 자유를 하나님이 주신 자유라고 착각하며, 거리낌 없이 '자기 결정권으로서의 자유'를 주장하고 실행하며 살아간다. 그 누구도 나 자신의 결정, 나 자신의 자유에 대하여 왈가왈부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완전히 '내 맘대로'이다.

 

제임스 스미스는 현대의 '자기 결정으로서의 자유' 개념은 현대 실존주의 철학, 특별히 하이데거나 사르트르 같은 철학자들의 사상으로부터 발생한 '낙수효과(trickle-down effect)라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자유의 개념을 오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잘못된 자유의 개념을 내면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자유란 무엇인가? 제임스 스미스는 일그러져버린 자유의 개념을 되살리기 위하여 어거스틴의 영적 순례를 면밀히 살피면서, 그리고 ‘실존주의자들 사이의 그리스도인이었던’ 가브리엘 마르셀의 통찰을 빌어 자유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이러한 통찰을 안겨준다. “자유롭기 위해서는 떠나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어야 한다… 자유는 도망치기 위해 터널을 파는 것이 아니라, 자유란 자신 안으로 파고들어 가는 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와 함께 떠나는 여정>, 119쪽).

 

나는 무엇보다 제임스 스미스가 인용한 시몬 베유(Simone Weil)의 친구 귀스타브 티봉(Gustave Thibon)의 지혜가 마음에 와 닿았다. 자유에 대한, 정말 지혜로운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에 함께 귀 기울이기 원하는 마음을 담아 좀 길지만 인용문을 그대로 옮겨 본다.

 

“당신은 속박을 당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당신은 탈출을 꿈꿉니다. 하지만 신기루를 경계하십시오.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도망치거나 달아나지 마십시오. 대신 당신에게 주어진 좁은 공간을 파고들어 가십시오. 당신은 거기서 하나님과 모든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지평선에서 떠나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본질(substance) 안에 잠들어 계십니다. 허영은 달아나지만 사랑은 파고들어 갑니다. 당신이 자신에게서 달아난다면 당신의 감옥이 당신과 함께 달릴 것이며 당신이 달아나는 그 바람 때문에 닫힐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자신 안으로 깊이 내려간다면 그것(감옥)은 낙원 안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자유를 찾기 위해서 우리는 있는 자리를 떠나 먼 곳에 갈 필요 없다. 자유는 내 안에 있다. 자유를 원한다면 멀리 달아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 안으로 깊이 파고 들면 된다. 나의 저 깊은 곳 안에 계신 주님을 향하여!

 

(9-20-2021에 쓴 글. 늦은 포스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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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문2022. 3. 12. 07:40

자유를 간구하는 기도

(출 14:15-31)

 

주님,

우리는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예배하고 있습니까?

이 세상을 바라보면

온통 자기를 사랑하라고 자기를 예배하라고 외치는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가 그러한 것들에 정신이 팔리는 사이

우리의 참 사랑과 참 예배는 멀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유를 원하지만

실상 우리는 자유를 빼앗긴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것을 모르고, 마치 자유롭게 사는 것처럼 착각 속에서 삽니다.

주님,

주님께로 나아가 주님을 예배하지 못하게 막고 있는 우리 삶의 홍해들을 갈라 주옵소서.

그곳을 건너 주님께 나아가 예배하는 자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로 살기 원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참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께로 나아와 주님을 예배 하지 못할 때

우리는 자유를 빼앗겼다는 것을 감지하게 하시고

우리의 자유를 빼앗고 있는 것에서부터 벗어나

주님을 예배하는 자리로 와서 참 자유를 누리게 하옵소서.

세상이 아무리 살기 힘들고 어렵더라도

우리가 예배의 자리에 나와 주님을 예배하고 주님께 대한 사랑을 고백하고 있는 한

우리는 자유한 사람이니 두려워하지 말게 하시고 자신감을 가지고 살게 하옵소서.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 예배합니다.

그 누구도 우리의 이 자유를 빼앗지 못하도록

우리의 삶을 보호하시고 구원해 주옵소서.

우리는 주님만을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

십자가 위에서 우리에게 참 자유를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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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22. 3. 12. 07:39

자유

(출애굽기 14:15-31)

 

1. 출애굽기에는 드라마틱한 장면이 많이 나온다. 모세가 나일강에서 건짐을 받는 장면부터 시작하여, 모세가 애굽 사람을 죽이고 광야로 도망가는 장면, 타지 않는 떨기나무 앞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 열 가지의 아주 스펙터클한 재앙,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는 장면, 모세가 부재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든 장면 등 출애굽기에는 드라마틱한 장면이 즐비하다. 그러나 출애굽기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은 뭐니뭐니해도 홍해를 건너는 장면일 것이다.

 

2. 찰턴 헤스턴(Charlton Heston)이 주연으로 출연했던 영화 <십계>는 1956년 작품이다. 아주 어릴 때, 지금은 기억이 희미하지만, 엄마, 아버지와 함께 충무로에 있는 대한극장으로 <십계>를 보러 갔던 적이 있다. 70년대 말이나, 80년대 초였을 것이다. 그때 어린이의 눈에 들어온 두 개의 장면, 지금까지도 머릿속에 남아 있는 장면은 홍해를 가르는 장면과 십계명을 들고 있는 모세의 장면이다. 홍해가 갈라질 때, ‘와~’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지금 다시 보면, 촬영기법이 변변치 않았던 때의 영화라 허술하기 짝이 없다. (찰턴 헤스턴은 또다른 대작 <벤허>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벤허>는 지금 봐도 재밌는 영화다. 얼마 전 <벤허>를 리메이크 했는데, 원작만 못해서 뭇매를 맞은 적이 있다.)

 

3. 우리는 이성과 과학 시대에 살고 있다 보니 홍해가 갈리는 출애굽기의 이야기를 보면 그런 일이 실제로 발생했는지, 아니면 지어낸 이야기인지를 먼저 따지는 경향이 있다. 성경을 그렇게 읽으면 논쟁만 발생하고 성경의 이야기로부터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한다. 이런 저런 방식으로 성경의 이야기를 해석해 왔지만, 현재 성경을 읽은 보편적인 방식은 ‘문학비평(literary criticism)’이다. 문학은 이야기를 만들어 진실을 전하는 예술 양식이다. 이야기에는 체험과 허구가 공존한다. 핵심은 그 이야기가 사실이냐 아니냐에 있지 않고, 그 이야기가 전하고자 하는 진실(진리)이 무엇이냐이다.

 

4. 출애굽기라는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진실(진리)은 무엇일까? 특별히 그 중에서도 홍해가 갈리는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진실은 무엇일까? 이것을 규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출애굽기 전체를 면밀히 살펴야 한다. 하나님은 왜 모세를 부르셨고, 왜 모세를 애굽으로 들여보내셨는가? 모세가 애굽에 들어가서 애굽의 바로(이집트 왕)에게 요구한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출애굽기 3장을 다시 들여다보아야 한다. 거기에는 이러한 이야기가 나온다. “너는 그들의 장로들과 함께 애굽 왕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임하셨은즉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사흘길쯤 광야로 가도록 허락하소서”(출 3:18).

 

5. 출애굽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눈 여겨 보아야 한다. 우리는 대개 출애굽의 목적을 고통받는 히브리 사람들을 그 고통에서 구원해 내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한 목적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부수적인 목적이고 출애굽의 일차 목적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함’이다. 열 가지 재앙을 통해서, 그리고 홍해가 갈리는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한 일은 ‘그들이 나를 여호와 하나님으로 알게 하는 것’이었다.

 

6. 인간은 왜 존재하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아주 근본적인 질문이다. 성경은 매순간 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대답을 주고 있다. 출애굽기도 다르지 않다. 출애굽기가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는 인간 존재의 본질은 이것이다. “인간은 예배하는 존재다!” 예배의 다른 말은 사랑이다. 이것은 이렇게 바꾸어 부를 수 있다. “인간은 사랑하는 존재다!” 그래서 인간을 일컬어 ‘예전적 동물’이라 부른다.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뜻이며 궁극적인 무언가를 사랑한다는 뜻이다”(<습관이 영성이다> 33쪽).

 

7. 인간에게 사랑은 중력과도 같다.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인간은 그 사랑하는 것 쪽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 사랑이라는 것이 습관을 통해 형성된다는 것이다. 실천과 연습이 필요하다. 올바른 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연습이 필요하다. 다른 말로 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은 실천과 연습이 필요하다. 애굽에서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에게 부족했던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대한 실천과 연습이었다. 그들에게는 그 실천과 연습을 행할 수 있는 마음과 시간과 에너지가 없었다. 그들은 애굽 사람들에 의해서 마땅히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지 못하도록 통제 받고 있었다.

 

8. 홍해가 왜 갈라져야 했을까? 하나님께서 애굽 왕에게 요구한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예배하도록 허락하라’였다. 그런데, 애굽 왕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을 못하도록 막아 서고 있었다. 그러나 그 무엇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막아 설 수 없다. 홍해의 갈라짐은 바로 그것을 보여준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이 사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9).

 

9.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노예로 살았다. 노예란 무엇인가? 남이 시키는 걸 하는 사람이다. 남이 시키는 걸 하다 보면 인간은 그것이 자신이 원해서 하는 것처럼 자신이 사랑해서 하는 것처럼 착각을 하게 된다. 스톡홀름 증후군이라는 병리현상이 있다. 인질(피해자)이 납치범(가해자)에게 동조하고 감화되어 납치범(가해자)의 행위에 동조하거나 납치범(가해자)을 변호하는 비이성적인 심리 현상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온통 우리를 노예로 만들려는 기획들로 가득 차 있다. 내가 원하고 사랑하는 것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남이 원하고 시키는 것을 좋아하고 사랑하도록 속이는 것이다.

 

10. 자유인은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는 사람이다. 자유인은 자기가 사랑하고 싶은 걸 사랑하는 사람이다. 자유인은 마땅히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로 자유인으로 살고 있는가? 우리는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고, 내가 사랑하고 싶은 걸 사랑하고, 내가 마땅히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는가? 우리는 우리가 ‘자유하다’는 착각 속에서 산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불쌍하고 애처롭다.

 

11. 홍해의 갈라짐은 무엇보다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에게 자유를 안겨주었다. 그 자유는 단순히 고된 노동으로부터의 해방, 억압된 삶으로부터의 해방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이 자유를 얻게 된 것은 이제 그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실천하고 연습할 수 있게 되었다는 데 있다.

 

12. 이스라엘에게 출애굽기의 여정, 홍해를 건넌 뒤 광야에서의 삶은 예배하는 인간으로서의 삶, 사랑하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실천하고 연습하는 시간이었다. 사랑은 하루 아침에 되는 게 아니다. 예배는 하루 아침에 되는 게 아니다. 사랑과 예배는 습관이기 때문이다. ‘사랑해’라는 말을 평소에 안 하던 부부는 어느 순간에 누군가에 의해서 ‘사랑해라는 말을 서로 해보세요’라는 요청을 받는다고 해서 ‘사랑해’라는 말을 서슴없이 할 수 없다. 예배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에게 어려서부터 예배의 자리에 나오게끔 잘 인도해야 하는 이유도 예배의 자리에 나오지 않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예배의 자리에 나오게 되는 일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13. 인간에게 자유의 바로미터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랑하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가 아닌가 이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고 예배하지 못하게 하는 홍해가 수만 가지 있다. 예배의 자리에 나아오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라. 작게는 피곤해서부터 크게는 미움 때문에 못 나온다. 반대로 예배의 자리에 나온 우리들은 크게 기뻐해야 한다. 내가 참 자유를 누리고 있구나! 나는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자유한 사람이구나!

 

14. 인간이란 예배하는 존재이다. 인간이란 사랑하는 존재이다. 우리는 무엇을 사랑하고 있으며, 무엇을 예배하고 있는가. 어거스틴은 고백록을 기록하며 맨 처음 하나님을 찬양한 뒤, 곧바로 이런 고백을 한다. “당신은 우리 인간의 마음을 움직여 당신을 찬양하고 즐기게 하십니다.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해서 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안식할 때까지는 편안하지 않습니다.”

 

15. 돈을 많이 벌었기 때문에 자유한 게 아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자유한 게 아니다. 좋은 집에서 두 다리 뻗고 편안하게 잘 수 있어서 자유한 게 아니다.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너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살 때 돈도 없었고, 맛있는 음식도 못 먹었고, 좋은 집에서 두 다리 뻗고 편안하게 하지도 못했다. 그들은 천막에서 잤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끼니를 때웠고, 물이 없어 고생했고, 가진 게 별로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유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 만을 예배했기 때문이다.

 

16. 예배의 자리에 나온 우리들, 이것 하나만은 꼭 알고 기뻐했으면 좋겠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는 자유를 얻은 자이다. 자유만큼 좋은 게 어디 있나. 우리의 몸과 마음을 헛된 것에 빼앗기지 않고, 우리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시는 하나님 품에 안겨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인생은 충분히 행복한 것이다. 그 자유를 나만 누리지 말고, 내 사랑하는 가족들, 형제자매, 친구들, 그리고 자유가 없어 늘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힘껏 나누어 주자. 그 마음을 가지고 우리가 두 손을 높이 든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의 자유를 막고 있는 홍해를 갈라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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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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