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3. 9. 19. 10:14

그리고 그분이 부르셨다

(레위기 1:1-2, 8:1-13)

 

1. 기독교 신앙의 특징이 있다. 기독교 신학은 인간의 존엄성을 상향 평준화한다. 성경에는 인간을 아주 존귀한 자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 반대도 있지만). 대표적인 구절은 다음과 같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벧전 2:9). 기독교 신앙은 ‘신화’(Theosis/하나님처럼 되는 것)의 특징이 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당신은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기독교 신앙에 이러한 특징이 있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 스스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인간은 품위 있게, 서로를 함부로 대하지 말고, 존귀하게 여기며, 존귀한 삶을 살아야 한다.

 

2. 레위기 8장은 제사장의 임직식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임직식 거행은 7일간 지속되었다. 왜 7일간 거행되었을까?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와 연관 속에서 제사장의 임직식을 생각해 보면, 제사장 되는 일은 창조의 역사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한다는 것은 그냥 보통의 일이 아니다. 새로운 창조가 필요하다. 제사장의 직분을 수여받고 그것을 감당하는 일은 창조의 역사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7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신 것처럼(6일 동안 창조하고, 7일에 쉰 것을 포함한 과정), 하나님은 7일 동안 제사장을 ‘창조’한다.

 

3. 창조는 만듦이 아니라 부르심이다. 우리 인간의 피조성은 내가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졌다, 또는 지음받았다는 의미를 넘어서 내가 주님께 부름받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창조는 내가 단순히 피조물로 존재하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연관 속에서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는 뜻이다. 창조는 부르심이다. 7일 간 창조의 역사를 통해서 제사장 직분을 부여하시는 것은 제사장을 창조하신 일이고, 제사장을 부르신 일이다. 그리고 이것이 7일 간 거행되었다는 것은, 7의 숫자가 ‘완전함’을 의미하는 것처럼 제사장의 완전함, 즉 거룩함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7일 간 창조의 역사를 통해서 세우신 제사장은 거룩하다.

 

4. 우리가 사는 사회는 ‘행복을 추구하는 사회’이다.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행복해지고 싶다’는 소망을 표출한다. 랍비 조너선 색스는 행복와 의미를 구분한다. 그에 의하면, 행복은 주로 욕구와 필요를 충족시키는 문제와 관련된다. 이에 반하여 의미는 삶의 목적에 대한 인식으로서 특히 다른 사람의 인생에 적극적으로 기여하는 것에 관한 문제와 관련된다. 짧게 표현하면, 행복은 소유과 관련되고, 의미는 기부하는 것(희생)과 관련된다.

 

5. 요구와 필요가 충족되면 누구든 행복하다. 개도 고양이도 사람처럼 요구와 필요가 충족되면 행복해한다. 그러나 의미는 인간만이 가진 독특한 현상이다. 인간은 행복하지 않은 순간에도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살면서 긴장하거나, 불안하거나, 염려되거나, 고난과 고통 가운데 처하면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인간은 그러한 가운데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조너선 색스는 의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의미는 우리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에 관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벌어지는 일을 우리가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관한 것이다”(매주 오경읽기 영성 강론, 178쪽).

 

6. 행복만 추구하면 인간은 삶이 천박해지거나, 자기에게만 열중하다 결국 이기적인 삶이 되기 십상이다. 행복만 추구하다 보니, 요즘 우리들은 아주 쉽게 이렇게 생각하거나 말한다. ‘이거 하면 내가 행복하지 않은데, 이걸 내가 왜 해야 해?’ 인생을 행복의 차원에서 더 끌어 올리면 의미의 차원으로 간다. 의미의 차원에서 인생을 생각하면 행복하지 않더라도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일들은 우리에게 행복을 주기보다 고통을 줄 때가 많기 때문이다. 행복의 차원에서만 인생을 생각하면 우리는 아주 쉽게 절망에 빠질 수 있다. 자신의 행복하지 않은 인생을 바라보면서 말이다.

 

7. 깊은 절망에서 생존한, 아우슈비츠 비극의 생존자 중 한 명인 빅터 프랭클은 <삶의 의미를 찾아서>라는 책에서 인생에서 무엇을 원하는가를 묻지 말고 인생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는가를 물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의미의 심리학을 발전시켰다. 행복을 찾을 수 없는 가장 깊은 절망 가운데서도 의미를 찾아 그 절망을 이겨낸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수감자들의 모습 속에서 그는 삶의 희망을 발견했다. 그러므로, 삶이 행복하지 않더라도 의미를 발견할 수만 있다면, 인생은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8. 우리는 왜 신앙을 가지고 사는가? 신앙을 가지고 살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과 신앙을 가지고 사는 우리들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여기에 빅터 프랭클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종교적 인간이 분명히 비종교적 인간과 다른 것은 오직 자신의 존재를 단순히 과업이 아니라 사명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삶을 과업으로 경험하는 사람과 삶을 사명으로 경험하는 사람은 인생의 깊이에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같은 일을 해도 그것을 그냥 과업으로 생각하는 사람과 그것을 사명으로 생각하는 사람 사이에는 일을 대하는 태도에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일을 과업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한계만큼 일을 하겠지만, 일을 사명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 일을 한다.

 

9. 신앙은 인생의 깊은 곳까지 도달하여 남들이 경험하지 못하는 깊은 것을 경험하게 한다.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 구약성경의 다섯 책(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은 ‘모세오경’이라 불린다. 이곳에서 만나는 모세는 매우 특별한 존재이다. 무엇이 모세를 이렇게 특별한 존재(사람)로 만들었는가? 그 해답은 레위기서의 이름에서 발견된다. 레위기는 히브리어 ‘바이크라’로 시작된다. “그리고 그분이 부르셨다”라는 뜻이다. 모세가 특별한 존재가 된 이유는,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부르심은 깊은 총애의 표현이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깊은 사랑을 보여주셨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특별해진다.

 

10. 레위기는 부르심에 대한 이야기이다. 레위기에서 이 부르심을 보지 못하고, 그저 희생제사나 제사장에 대한 법들, 그리고 정결법 등 만을 보고 말면 손해다. 이러한 것들만 보면 레위기는 정말 재미없는 성경일 뿐이다. 레위기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 흘러내려가는 이야기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깊은 사랑을 보여주셨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제사장을 세워 그들에게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보여준다. 그리고 제사장은 희생제사를 집전하는 일을 통해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보여준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은 모세와 제사장을 통해 백성들에게 흘러내리고 있다.

 

11.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그리고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직분을 받게 된다는 것은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신앙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굉장히 중요한 성찰이다. 임직을 한다는 것, 직분이 생긴다는 것은 교회 일을 부담스럽게 감당하는 것이 아니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떠맡는 게 아니다. (일반 회사에서 직급이 높아지는 것처럼 생각하면 안된다.) 직분을 가진다는 것은 ‘부르심’을 깊이 경험하는 것이다. 삶을 행복의 관점이 아니라 의미의 관점에서 바라볼 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래,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구나! 나에게는 사명이 있구나!” 이런 부르심의 경험 가운데서 삶이 더 깊어지는 것이다.

 

12. 부르심은 깊은 사랑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래서 직분을 받는다는 것은 사랑이 더 깊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타고 흐르도록 나를 내어주는 것이다. 내가 기꺼이 희생제물이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다시 말해, 교회에서 직분을 받는다는 것은 1) 부르심을 경험하는 것이고, 2) 사랑이 더 깊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삶이 더 깊어지는 것이다. 직분을 받을 때, 이러한 신앙의 실존적 기쁨이 있어야 한다.

 

13. 세상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니가 하고 싶은 거 해!” 그러면 삶이 행복해질거라고 한다. 물론 이 말도 틀리지 않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하면서 살려고 한다. 거기에서 행복을 얻으려고 한다. 물론, 그렇게 되지 않아서 행복하지 않거나 절망할 때도 많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않는다. 조금 더 인생의 깊이로 들어간다. 행복만을 추구하지 않고 의미의 세계로 더 나아간다. 그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경험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네! 하나님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실까?” 이렇게 의미를 추구하고, 사명을 발견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고난 가운데서도 즐거워할 수 있는 힘을 가진다.

 

14. 단순히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추구하는 삶이 더 존귀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존재라를 것을 알고, 그것을 믿고, 그렇게 응답하며 사는 것이 신앙인이다. 이것을 더 깊이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을 더 잘 흘려보내는 신앙인이 직분자이다. 이 기쁨을 누리는 것이 직분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나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내리도록 나를 내어주는 존귀한 자, 존귀한 삶을 사는 자들이다. 직분자들은 그것을 더 큰 기쁨 가운데 누리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새창조의 역사, ‘부르심’을 통해 삶이 더 깊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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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희생제사와 사랑]

 

이름이 주는 선입견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이름은 원래 각 책의 히브리어 첫 글자를 따자 지어졌습니다. 예를 들어, 민수기는 히브리어 ‘베미드마’로 시작합니다. 한국말로 ‘광야에서’라는 뜻입니다. 민수기는 ‘광야에서’ 발생한 일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레위기는 히브리어 ‘바이크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는 뜻입니다. 레위기는 ‘부르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민수기라는 이름은 특정한 사건을 지칭하는 인상을 주지만, ‘광야에서’는 뭔가 기대를 갖게 합니다. 광야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실제로 민수기에서 우리는 광야에서 발생한 다양한 사건을 만납니다. 아주 흥미진진합니다. 레위기는 ‘레위지파의 기록’이라는 인상을 주지만, ‘그리고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온갖 지루한 법으로 채워진 것 같지만, 실은, 레위기는 ‘부르심’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면 호기심이 생깁니다.

 

레위기는 제사를 둘러싼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제사의 종류와 방법, 제사를 집전하는 제사장들에 관한 규칙들, 그리고 제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상태에 대한 이야기들이 레위기를 메우고 있습니다. 창세기부터 성경을 읽어 나가다가 처음으로 막히는 곳이 레위기입니다. 너무 낯선 풍경을 접하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의 삶과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들로 가득 찬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제사의 종류나 방법을 기억하는 사람조차 없습니다. 사실 기억할 필요가 없습니다. 레위기에 나와 있는 것처럼 제사 드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구약의 예언서에 보면 선지자들은 모두 제사를 비판적으로 기술합니다. 아모스, 호세아 같은 선지자들의 제사 비판은 신랄합니다. 그렇다 보니, 우리에게 비춰진 제사는 그렇게 좋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왜 성경은 희생제사에 대한 기록을 이렇게 정성스럽게 해 놓은 것일까요? 희생제사는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새크라멘트. 성례전. 이것은 보이지 않는 사랑을 보이게 끔 하는 거룩한 장치입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숨은 사랑이 아니라 ‘보이는’ 사랑입니다. 요한은 말합니다.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세요!”(요일 3:18). 희생제사는 사랑의 새크라멘트입니다. 희생제사는 사랑이 드러나는 장치입니다. 레위기에 기록된 희생제사에 쓰이는 제물들은 그 당시 농부와 유목민들의 생계였습니다. 가축이나 곡식, 열매는 생명과 직결되는 것들입니다. 그것을 희생제물로 바치는 자들은 자신이 바치는 제물을 사랑했습니다. 희생제물은 사랑입니다. 희생제물을 바치는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제물로 바치면서 하나님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드러내 보이는 겁니다. 곧, 희생제물은 사랑입니다. 여기서 제물을 빼고 다시 진술하면, 희생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희생입니다. 희생은 주는 것, 헌신, 내어줌, 나눔이라는 말로 바꾸어 표현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희생이 있습니다.

 

우리 시대는 희생이 줄어든 사회입니다. 다른 말로, 사랑이 줄어든 사회입니다. 희생제사는 히브리어 ‘코르반’과 ‘레하크리브’가 합쳐 생긴 말인데, ‘가까이 다가오다’, ‘친밀한 관계를 회복한다’는 뜻입니다. 희생은 관계를 굳세게 만드는 가장 좋은 접착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하는 우리 시대는 희생이 희귀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모두 자기 것을 챙기느라 남을 희생시키지, 자기를 내어주어 다른 이들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희생을 찾아보기 힘든 사회입니다. 희생이 없다 보니, 서로의 관계가 가까워지지 못하고 멀기만 합니다. 이런 시대에 레위기의 희생제사를 묵상하는 일은 그 어느 때보다 소중합니다. 희생(헌신, 내어줌, 나눔)을 통해, 사랑받고 사랑하는, 따뜻함에 삶이 스며들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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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23. 9. 15. 04:51

[괴물]

 

사람이 되려면 조금 더 죽어야 하는 괴물

사람이 되려면 조금 더 자라야 하는 괴물*

 

괴물이 괴물을 모은다

사람이 되려면 서로 안부조차 묻지 않아야 하는데

괴물들이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괴물이 모여 하늘로 승천하려고 한다

하늘로 승천하는 괴물을

하느님은 보우하실까

 

하늘이 높고 눈부셔서

만세를 부른다

 

승천하는 괴물들이

서로 흘려대는 침과 피를 먹는다

 

이제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것은

괴물들의 똥뿐이다

 

 

* 이 문장들은 이영주 시, '숙련공'에서 가져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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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3. 9. 14. 05:36

희생제사를 위한 기도

(레 1:1-9)

 

주님,

희생제사의 의미를 밝히 보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희생제사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희생입니다.

헌신하는 것이고, 내어주는 것이고,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사회를 보면,

희생, 헌신, 내어줌, 나눔이 줄었습니다.

곧, 사랑이 메말랐습니다.

그러다 보니, 삶을 살아가면서 ‘행복하다’, 건강하다’, ‘좋다’라는 생각보다는

고통만 늘어갑니다.

주님,

오늘 레위기의 희생제사에 대한 귀한 말씀을 들은 우리부터

마음을 고쳐 돌이키게 하셔서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하는 게 아니라

주님이 몸을 바쳐 우리를 먼저 사랑해 주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몸을 바쳐 희생하며 사랑하게 하시고,

모든 일을 사랑으로 기꺼이 하는 믿음의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 사랑합니다!

이 고백이 입술만의 고백이 되지 말게 하소서.

희생과 헌신과 내어줌과 나눔으로

사랑이 꽃피게 하소서.

십자가 위에서 사랑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시(詩)2023. 9. 14. 05:30

[지옥]

 

신성함이 녹아내리고

신비로움이 녹아내리고

마침내, 생명이 녹아내리고

우리에게 남은 건, 그래,

새하얀 거짓말, 같은,

납작한 현실, 거기에 모두 짓눌려 죽어가는

손가락과 손가락은

점점 멀어지고,

잘려나가고,

결국, 우리는,

결코,

손을 맞잡을 수

없는,

지옥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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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지배질서와 사건]

 

수학, 시, 정치, 사랑.

알랭 바디우가 말하는 '혁명적인 것'이다.

이것은 모두 '지배질서'를 거부하고, 뛰어넘는다.

 

한병철이 <권력이란 무엇인가>에서 밝히고 있듯이,

권력은 '보이지 않는 손'이다. 권력은 사람들에게 저항을 받지 않고 작동한다. 권력이 사람들에게 저항을 받게 되면, 그때 권력은 더 이상 권력이 아니게 된다.

 

지배질서는 법을 통해 체제를 만들어 놓고, 그 바깥에 나가는 것을 '범죄'로 규정하여 죄의식과 죄책감을 심으며 작동한다. 법 바깥의 일들은 모두 '불가', '불허'로 규정한다. 불가능 한 것, 불허된 것은 금지되고 배제된다.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드는 것이 바디우가 말하는 '사건'이다. 사건은 불가능한 것, 불허된 것을 파고든다. 지배질서 바깥에서 발생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사건'이다.

 

바르트는 말씀을 '사건'으로 보았다. 바디우의 사유와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말씀은 인공세계(지배질서)의 바깥에서 발생하는 '사건'이다. 불가능 한 것, 불허된 것, 그래서 금지되고 배제된 것 바깥에서 발생하는 것이 '말씀이다. 말씀은 사건이다.

 

소크라테스가 죽은 이유는 젊은이들을 '타락'시켰기 때문이다. 지배질서는 소크라테스를 규정하기를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는 자'라고 했지만, 이것은 지배질서의 언어에 불과하다. 지배질서에 의문을 품게 하고 도전하게 하고 전복시킬 수 있는 '혼'을 불어넣는 것, 지배질서의 입장에서는 '타락'이지만, 이러한 '타락' 없이 어떻게 세상이 바뀌겠는가.

 

지배질서에 봉사하는 것은 경건하고 온건한 것이고, 지배질서에 맞서는 것은 타락하고 불온한 것이라는 '이념'이 이미 우리 안에는 권력처럼 자리잡고 있다. 지배질서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손처럼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한다. 그 질서를 벗어나면 큰 일 날 것 같은 불안감과 죄책감을 심어주면서.

바디우는 철학자이므로, 혁명적인 것의 범주를 수학, 시, 정치, 그리고 사랑으로 제한했다. 신학자는 여기에 혁명적인 것을 하나 덧불일 수 있다. 신앙. 혁명적인 것을 다시 정리하면 이렇다. 수학, 시, 정치, 사랑, 그리고 신앙.

 

좋은 신앙과 그렇지 못한 신앙의 차이는 혁명적이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있다. 다른 말로, 지배질서에 저항하느냐, 아니면 지배질서에 봉사하느냐에 있다. 신앙이 수학보다, 시보다, 정치보다, 사랑보다 못하면 부끄러운 것이다.

 

도덕과 윤리는 지배질서에 봉사하지만, 신앙은 도덕과 윤리를 넘어서면서 지배질서에 도전한다. 그래서 신앙은 그 시대의 바로미터이다. 좋은 신앙은 지배질서에 봉사하지 않는다. 좋은 신앙은 지배질서에 저항한다. 지배질서가 신앙을 우숩게 아는 사회는 질서를 가장한 악이 판을 치고, 지배질서가 신앙을 무섭게 생각하는 사회는 악이 고개를 들지 못한다. 들더라도 눈치를 본다.

 

신앙인이여. 지배질서를 견뎌내는 데만 신앙을 쓰지 말고, 지배질서에 '사건'을 일으키는데 신앙을 쓰십시오. 사건이 없으면 지배질서는 태평성대를 누리며 생명을 마구마구 착취할 것입니다. 사건이 많으면 지배질서는 그것에 대응하느라 바빠서 정신을 못차릴 것입니다. 사건을 일으키는 신앙인이 되십시오. 그 사건이 바로 메시아가 우리 시간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입니다. 지배질서의 전복은 그렇게 발생합니다. 그러니, 힘을 내십시오. 신앙을 버리지 말고, 신앙을 더 굳건히 가지십시오. 신앙은 정말 좋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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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3. 9. 5. 03:06

감사를 간구하는 기도

(출애굽기 20:1-17)

 

주님,

십계명의 의미를 좀 더 깊게 깨달을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냥 놓치기 쉬운 열 번째 계명의 참된 의미를 알고 나니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더 명확하게 보입니다.

세상은 우리의 인생을 동료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정의하도록 부추깁니다.

그렇다 보니, 우리는 순간마다 질투에 휩싸입니다. 남보다 못한 인생을 사는 것 같아 힘들고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완전히 다른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며,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인생을 정의하는 법을 배우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인생을 정의해 보니,

삶의 힘은 질투가 아니라 감사인 것이 드러납니다.

온갖 죄악이 질투 때문에 발생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인생을 정의하며 돌아보면,

우리의 인생은 온통 감사 뿐입니다.

주님, 거기에 참된 생명이 있음을,

거기에 참된 평화가 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질투를 부추기는 세상에 저항하며,

감사로 이끄시는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더욱 사모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감사는 나의 힘!

주여, 우리의 삶을 복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로 우리의 삶을 이끌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3. 9. 5. 03:04

쉐키나(주님의 임재)를 간구하는 기도

(출애굽기 24:1-11)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

우리에게 가까이 오신 주님,

우리도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

주님과 가까이 지내기를 원합니다.

주님과 가까이 지내는 것 같으면서도

문득 돌아보면

우리가 얼마나 주님에게서 멀어졌는지,

부끄럽기만 합니다.

주님과 가까이 지내는 것이 구원인데,

우리의 삶은 구원을 갈망하면서도

구원에서 멀어진 삶을 사는 듯합니다.

주님, 주님과 더 가까워지고 싶습니다.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주님 곁으로 더 가까이 이끌어주소서.

그리고, 주님과 가까이 지내는 은혜로

할 수 있으면, 모든 이들과 가까이 지내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 삶에 구원이 넘쳐나게 하소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하나님 곁으로 이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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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3. 9. 5. 03:01

나의 이름을 돌아보기를 간구하는 기도

(35:30-36:7)

 

주님,

브살렐과 오홀리압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니 감사합니다.

나의 이름을 다시 한 번 돌아봅니다.

주님을 내가 어떻게 경험하고 있고,

내가 주님을 어떻게 신앙고백하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그것이 우리를 붙들어 줄 것입니다.

특별히 인생이 어렵고 힘들 때,

우리를 지명하여 불러주신, 바로 그 이름이 우리를 붙들어 주실 줄 믿습니다.

주여,

감동과 자원하는 마음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보여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하는 모든 일들은

감동과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일 때

기쁘고 행복하고 아름다운 것임을 다시 한 번 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이미 감동과 자원하는 마음으로

우리 가운데, 우리 안에 지어진 성막을 그저 바깥으로 내보이는 것일 뿐입니다.

주여,

날마다 우리 마음에 감동과 자원하는 마음을 주시고

주님이 얼마나 우리와 가까이 계신지 증언하는 쉐키나의 영성을 허락하셔서,

우리가 두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주의 영광이 드러나며,

기쁨과 은혜가 넘치도록 우리와 함께 하옵소서.

십자가 위에서 감동과 자원하는 마음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온몸으로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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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3. 9. 5. 02:58

브살렐과 오홀리압

(출애굽기 35:30-36:7)

 

1. 미국에 유학 와서 수업을 듣는데, 첫 수업에는 언제나 서로 이름을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때 나는 그냥 한국 이름 Junsik Chang을 말했는데, 교수를 포함해 거의 모든 학우들이 내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편했다. 가뜩이나 긴장하고 있는데 누가 내 이름을 부르지 않으니 그냥 속 편했다. 그런데 나는 한 학기가 지나고 나서 마음을 바꿨다. 영어 이름을 하나 지어 교수와 학우들이 내 이름을 잘 기억하도록 하고 싶었다. 그래서 지은 이름이 Jeremy이다(2004년).

 

2. Jeremy는 성경의 예레미야 선지자의 이름에서 온 것이다. Jeremiah는 Jeremy 또는Jerry로 줄여 부른다. 나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좋아했다. 눈물의 선지자라는 별명도 마음에 들었고, 망해가는 조국 이스라엘을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동분서주하며 마음 아파하고, 핍박 받고, 결국 슬픈 마음을 안고 죽어간 모습도, 모두 마음에 남았다. 이것은 내가 한국인으로서 겪은 역사의식 때문에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국문과 대학원에서 현대문학을 전공했는데, 한국의 현대문학은 일제시대 때 꽃피웠다. 한국의 문학 속에는, 그리고 한국의 문인들 마음에는 예레미야의 정서가 담겨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레미야의 이름의 뜻이 참 좋았다. 하나님께서 지명하여 세우신 자!

 

3. 성경을 읽으면서 참 좋은 것은 누군가의 이름을 대할 때이다. 성경의 이름은 대개 신앙고백이다. 한국인들은 이름을 지을 때 그 아이가 자라서 어떠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담지만, 성경의 이름은 모두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다. 최근 들어 한국의 기독교인들도 하나님, 또는 예수님과 연관된 이름 짓는 것이 유행이지만, 그 뜻이 광범위하지는 않다. 그러나 성경의 이름은 하나님 경험이 담긴 것이 대부분이다. 다른 말로, 신앙고백이 담긴 이름이라는 뜻이다.

 

3. 브살렐은 ‘하나님의 그늘 안에서’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이름을 지어준 부모들이 하나님을 그렇게 경험했다는 뜻이겠고, 또는 자녀가 그렇게 하나님의 그늘 안에서 살아가면 좋겠다는 소망을 담은 것이겠다. 브살렐은 아주 유명한 가문 출신이다. 그에게 붙은 수식어를 보면, 브살렐은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이다. 훌이 누군가? 시내산 도착 전 르비딤에 머물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이 불시에 쳐들어온 아말렉 족속과 전투를 벌일 때 모세와 함께 산 꼭대기에 올라 아론과 더불어 모세의 피곤한 팔을 붙들어 올린 인물이다. 모세와 아주 가까이서 동행했고, 하나님을 깊이 경험했던 인물이다. 브살렐은 바로 그 유명한 ‘아론과 훌의,’ 그 훌의 손자이다.

 

4. 오홀리압은 ‘아버지는 나의 장막이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이 이름을 지어준 부모들이 하나님을 그렇게 경험했다는 뜻이겠고, 또는 자녀가 그렇게 하나님의 장막 안에서 살아가면 좋겠다는 소망을 담은 것이겠다. 오홀리압은 단 지파 아히사막의 아들이다. 그의 집안 내력에 대해서는 그렇게 알려진 바가 없다. 하지만, 그의 이름을 미루어 짐작해 보건데, 오홀리압의 부모님들도 하나님 경험이 특별했던 것 같다. 장막은 보호해주고 안식을 주는 곳인데, 오홀리압의 부모님들은 하나님을 그렇게 경험했다. 그러니, 오홀리압이 성막(하나님의 장막)을 만드는 일에 부름 받았을 때 얼마나 기뻤겠는가.

 

5. (구약) 성경을 읽으면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름을 대할 때, 그 이름이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이름은 그들만의 독특한 하나님 경험과 신앙고백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야곱의 이름을 보면, 야곱의 뜻은 ‘발 뒤꿈치를 붙잡은 자’이다. 쌍둥이 형제로 태어났는데, 얼마나 장자가 되고 싶었으면 형의 발 뒤꿈치를 붙들고 태어났겠는가. 야곱이라는 이름에는 그 인생의 애환이 그대로 들어가 있고, 펼쳐질 삶의 파노라마가 들어가 있다. 그리고 나중에 얍복강에서 천사와 겨루어 이긴 뒤, 야곱의 이름은 더 이상 야곱으로 불리지 않고 ‘이스라엘’이라고 불린다.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긴 자’라는 뜻이다. 결국, 야곱은 그가 그토록 원하던 장자의 축복을 받는다.

 

5.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의 뜻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나는 하나님을 어떻게 경험하고 있는가?’ ‘나는 어떠한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가?’ 이것은 내가 얼마나 하나님과 가까이 지내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지표이고, 내가 얼마나 인생을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잘 살아가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인생의 일기예보와 같다. 이름은 그냥 그 사람을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다. 이름은 내가 살아가야 할 삶의 방향이고, 무엇보다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폭풍우를 만났을 때 나를 붙들어 주는 닻과 같다.

 

6. 요나를 보라. 요나의 뜻은 ‘비둘기’이다. 비둘기는 예전에 소식을 전하는 전령사로 쓰였다. 요나는 가드헤멜 아밋대의 아들로 소개되고 있는데, 열왕기하 14장에서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의 이야기 가운데서도 등장한다. 예후 왕조의 전성기를 이룬 왕으로서 여로보암 2세는 친 앗수르 정책을 펼쳐서 나라의 부흥을 이룬 인물이다. 요나는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가서 전령사 역할을 감당하도록 하나님께 부름을 받는다. 그런데 어떤가? 요나는 니느웨로 가고 싶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전령사의 역할을 한다. 요나의 삶이 흔들릴 때 요나를 붙들어 준 것은 무엇이겠는가? 그의 이름이다. 자신은 ‘비둘기’로 부름을 받았다. 그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고, 하나님을 경험하는 통로이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었다. 신앙고백의 이름을 가진 자는 그 이름이 붙들어 준다.

 

7. 브살렐과 오홀리압의 이야기를 보면 두 가지 가슴 벅찬 단어가 등장한다. 하나는 ‘감동’(나탄)이고, 다른 하나는 ‘자원하는 마음’(나사)이다. 브살렐과 오홀리압의 이름이 처음 거론되는 곳은 출애굽기 31장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성막을 만들 것을 명령하시며 그 일을 행하는데 있어,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지명하여 세우라고 하신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지명하여 부르신 브살렐과 오홀리압에게 ‘하나님의 영’을 그들에게 충만이 부어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브살렐과 오홀리압의 마음에 무엇인가를 부어주셨다. 우리는 흔히 이것을 ‘성령’이라고 말지만, 좀 더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용어를 쓰자면, ‘감동’이다.

 

8. 감동은 막혔던 담이 허물어지면서 가까이 다가서는, 남들이 경험할 수 없는 영역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같은 것을 경험해도 누구는 감동이 있고 누구는 감동이 없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아주 신비한 것이다. 감동은 그 대상을 한없이 가까운 것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브살렐과 오홀리압에게 한없이 가까이 다가서신 것이고, 브살렐과 오홀리압도 하나님을 한없이 가깝게 느낀 것이다. 이런 것이 쉐키나이다. 하나님을 가까이 경험하는 것. 성막을 실제로 제작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단순히 성막을 제작하는 기술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실제로 하나님을 가까이 경험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단순히 성막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성막 그 자체였다.

 

9. 또 한 가지, 브살렐과 오홀리압의 이야기를 보면 가슴 벅찬 용어가 등장을 하는데, 그것은 바로 ‘자원하는 마음’(나사)이다. 성막을 만들기 위해서는 재료가 필요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모세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 풍경을 직접 보면 이렇다. “백성이 아침마다 자원하는 예물을 연하여 가지고 왔다”(출 36:3b). 성소의 일을 맡은 자들이 사역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아침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원하는 예물을 너무나 많이 가져왔다. 그래서 모세가 이런 명령을 내릴 정도였다. “남녀를 막론하고 성소에 드릴 예물을 다시 만들지 말라”(출 36:6). 그만 가져오라!

 

10. 어떻게 이런 놀라운 일이 발생할 수 있었을까요? 애굽에 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어느새 하나님과 멀어졌다. 그런데, 고통 가운데서 신음하며 하나님을 다시 찾던 이스라엘 벡성들은 모세의 인도로 출애굽하여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비로소 하나님과 다시 가까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율법과 성막은 쉐키나이다. 하나님의 임재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얼마나 가까이 계신지를 눈으로 보여주는 것(세크라멘트)이다.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가까워지셨다. 그런데, 정말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자신들과 가까이 계신 것을 경험했다. 그 경험은 성막을 지을 때 쓸 재료들을 자원하는 마음으로 넘칠 정도로 가지고 온 것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11. 우리의 신앙이 성장했다는 것이 무엇일까? 부흥이란 무엇일까? 바로 브살렐과 오홀리압 이야기가 보여주는 이 장면 아니겠는가! 나탄과 나사. 감동과 자원하는 마음. 하나님과 한없이 가까워지는 것. 성막은 이미 브살렐과 오홀리압 안에,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 지어진 것이다. 눈에 보이는 성막은 이미 그들 가운데, 그들 안에 지어진 성막을 꺼내 보이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들 가운데, 그들 안에 성막이 없는데, 즉, 그들 가운데, 그들 안에 하나님이 없는데, 바깥으로, 눈으로 보이는 성막을 억지로, 의무적으로, 마지못해 만든다고 해서 그들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는가.

 

12. 브살렐과 오홀리압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면서, 주님은 우리에게 묻고 있으시다. 너의 이름을 무엇이냐? 너는 나를 어떻게 경험하고 있느냐? 나에 대한 너의 신앙고백은 무엇이냐? 너에게는 감동과 자원하는 마음이 있느냐? 네 가운데, 네 안에 성막이 지어져 있느냐? 그런 것 없이, 그냥 바깥으로 보이는 성막에 나와 앉아 있는 것 아니냐? 나는 너와 가까워지기를 원한다. 너에게 나의 은총과 복을 충만이 부어주고 싶다. 그러니 브살렐과 오홀리압처럼, 감동과 자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네 가운데, 네 안에 성막을 만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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