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당신앙과 성전신앙

 

구약 성경에는 각각 신명기사관(신명기의 관점에서 이스라엘 역사를 기록한 것)과 역대기사관(역대기의 관점에서 이스라엘 역사를 기록한 것)에 의해서 기록된 책들이 있습니다. 신명기사관에 의해서 기록된 책들은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입니다. 역대기사관에 의해서 기록된 책들은 역대기 상·하, 에스라, 느헤미야입니다. 이 두 사관이 어떻게 다른지는 열왕기서와 역대기서를 비교해 보면 확연히 드러납니다. 동일하게 이스라엘의 왕들에 대한 기록을 하고 있으나 왕들에 대한 기술 방식이나 평가에서 큰 차이를 보입니다. 일례로, 열왕기에 그리고 있는 므낫세 왕에 대한 기록을 보면 그가 어떻게 아버지 히스기야의 산당 폐쇄 정책을 뒤집어 산당을 통해 악을 꿰했는지를 보여주고 그를 악한 왕으로 평가하는 반면에, 역대기에 그리고 있는 므낫세 왕의 기록은 그가 악을 저지른 후에 앗수르를 잡혀 간 뒤 회개 기도하여 다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즉, 열왕기에서 므낫세 왕은 악한 왕이지만, 역대기에서 므낫세 왕은 악했지만 회개하여 구원 받은 착한 왕으로 묘사됩니다.

 

신명기사관은 ‘범죄-징계-회개-구원’의 도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그 구조가 명백히 드러나는 곳은 사사기입니다. 이스라엘이 범죄하면 하나님은 징계하고, 그 징계가 너무 고달파 하나님께 회개하면, 하나님은 사사를 보내 그들을 구원해 주십니다. 이것이 사사기의 전형적인 이야기 구조인데, 그 이유는 사사기가 신명기사관에 의해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사관의 역사 관점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면 복을 받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면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명기사관은 단순히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를 하시고, 그 역사가 예언자를 통해서 예언되고 성취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신명기사관은 예언자적 전통에 서 있는 역사 관점입니다. 예언자 그룹이 쓴 성경이라는 뜻입니다.

 

역대기사관은 바벨론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복귀한 후 이스라엘 공동체를 다시 재건하는 것에 큰 관심을 둡니다. 70여년 동안 바벨론 포로로 지내면서 이스라엘 공동체는 그 정체성이 많이 모호해지고 약해진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니, 예루살렘으로 다시 복귀한 이스라엘은 다윗 왕조의 정체성을 다시 살려, 다윗 왕조의 정통성을 이어 그와 같은 영광스러운 나라를 재건하는 데 목적을 둡니다. 그렇다 보니, 역대기사관은 다윗 왕과 그 왕조를 이상적으로 그립니다. 그래서 역대기에는 우리가 잘 아는(신명기사관에서 밝히 드러낸) 다윗이 밧세바를 불의하게 취한 사건도 소개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역대기사관은 성전신앙을 아주 중요하게 다룹니다. 다윗 왕조와 성전신앙의 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고자 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역대기사관은 제사장적 전통에 서 있는 역사 관점입니다. 제사장 그룹이 쓴 성경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두 사관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동일하게 지적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산당에 대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왜 멸망하고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게 되었는지를 고민할 때, 그 이유 중 하나가 ‘산당 제거 실패’입니다. 산당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그것 때문에 한 나라가 망했을까요? 그렇기 때문에 산당이라는 것을 그냥 가볍게 보고 넘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산당은 히브리어로 ‘바마’(단수), ‘바모트’(복수)라 불립니다. 이것은 어떤 장소의 높은 곳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그래서 산당은 영어로 ‘high place’로 불립니다. 높은 곳은 신과 가까운 자리라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그 높은 곳에 지어진 산당은 신과 소통하는 장소로 쓰였습니다. 산당은 신에게 제사 드리는 장소입니다. 가나안 땅에는 이미 토착세력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농사의 풍요를 기원하기 위하여 산당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 입성 이후 그 토착세력의 전통을 이어받아 산당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산당신앙에 물든 것이죠. 그런데, 이게 왜 악한 것으로 평가받는 것일까요? 산당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게 무엇이 잘못일까요?

 

산당은 단순히 제사의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산당은 기득세력의 본거지 역할을 했습니다. 가나안 도시국가들은 지방의 산당들과 연합하여 통치체제를 형성했습니다. 산당은 예루살렘 중심의 성전신앙에 대한 걸림돌로 작용했습니다. 이것은 다윗 왕조에게 굉장히 큰 정치적 부담을 안겼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솔로몬 이후에 분열된 이스라엘은 다윗 왕조를 중심으로 남유다가 형성되고, 다윗 왕조에 반기를 든 지파를 중심으로 북이스라엘이 형성됩니다. 북이스라엘을 세운 여로보암은 북쪽 지파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내려가서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것을 막기 위해 벧엘과 단에 산당을 세워 그곳에 금송아지를 둡니다. 산당은 이렇게 정치적 역할을 하는 곳이었습니다.

 

문제는 산당이 추구하는 가치에 있습니다. 산당은 가나안 농민들의 신전으로 풍요를 기원하는 기복신앙을 추구하는 곳이었습니다. 사람들과 눈과 귀, 그리고 마음을 오직 자기 자신과, 자기 자신의 가까운 가족에게만 쏟게 만들었습니다. 권력을 추앙하게 하고, 성공과 물질 축복 기원만 바라게 했습니다. 공공성, 정의, 윤리와 같은 보편적 인류애를 찾아볼 수 없는 게 산당신앙입니다. 이러한 산당신앙의 가치는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여호와 하나님 신앙의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생명, 평화, 정의를 추구하여 보편적 인류애를 완성하는 우주적 샬롬을 이루기 원하십니다. 그 일에 부름 받은 백성이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산당신앙은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 나라’를 가로 막는 방해물이었습니다.

 

신앙이 보편성을 잃어버리면, 언제든지 산당신앙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허물면 내가 삼일만에 다시 짓겠다’하신 말씀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보편적 신앙의 가치를 제대로 실행하고 있지 못했습니다. 대제사장 그룹과 사두개인들, 그리고 서기관들은 로마 정권과 결탁하여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대가로 백성들에게 가해지는 수많은 수탈들에 대해서 눈감고 있었죠. 삭개오 같은 무리가 백성들에게 큰 세금을 징수하여 수탈해도 못 본채 했습니다. 자신들의 자리가 보존되고 자신들은 먹고 사는데 문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성전신앙을 산당신앙으로 전락시키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허물고 다시 짓겠다고 선포하신 것이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산당신앙으로 전락하면, 예수께서 행하신 일을 거꾸로 돌리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기복신앙이 아닙니다. 개인의 영달과 부귀영화를 위한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성전신앙입니다. 다시 말해, 기독교 신앙은 생명과 평화 정의를 통해 공공성을 추구하며 보편적 인류애를 구현하는 우주적 샬롬의 신앙을 갈망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그것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주신 것처럼, 기독교 신앙은 자기 집중의 신앙이 아니라 자기를 넘어서고 자기를 내어놓는 보편적 인류애의 공공신앙을 추구합니다.

 

시대가 혼란스럽고 어렵습니다. 이럴 때 고개를 드는 게 산당신앙입니다. 먹고 살기 힘들다 보니 이웃을 살필 겨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 먹고 살기도 힘든데 남들 돌볼 겨를이 어딨냐고 반문합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은 바로 이때 자기를 내어놓는 신앙입니다. 자기에게 매몰되지 않고, 더 큰 존재에 연결되어 더 큰 세상을 바라보고 꿈을 꿉니다. 오히려 어려울 때 자기 자신을 잃지 않으려고 성전에 나와 자기를 하나님께 연결시키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은혜로 부지런히 주변을 돌보고 자기 자신을 내어줍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어려운 시절을 보내면서도 인간성을 잃지 않고 지키는 방법입니다. 자기 자신 안으로 숨어버리는 산당신앙을 버리고 자기 자신을 넘어서고 내어놓는 성전신앙을 지켜내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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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정치와 종말]

 

사도 바울은 <고린토인들에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15장 24절)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그러고는 종말입니다. 그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권세와 모든 권력과 권능을 파멸시키고 나서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넘겨드릴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권세, 권력, 권능은 '천사들'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즉, 최후의 심판 이후에는 인간적이든 천사적이든 모든 권력이 종말을 고하고 우리는 직접적으로 신 아래 있게 된다. 결국 메시아의 도래와 더불어 신이 직접 군림하기 때문에 더 이상 천사들의 매개에 의한 통치와 행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신은 천사들을 파멸시킨다. 다시 말해서 신은 모든 권력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무위'로 돌리고, '비활성화'시키며, '실업의 상태'로 남겨둔다.

(양창렬 , "조르조 아감벤", <현대 정치철학의 모험>, 244-2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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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은 메시아의 도래를 통해서 온다. 우리는 '아직' 메시아의 도래를 경험하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메시아의 도래를 경험했다. 우리는 이 역설 속에서 산다.  최후의 심판을 아직 경험하지 못한 우리는 '천사들'의 통치 아래 산다. 여기서 천사들이란 권세, 권력, 권능을 말한다. 현실 정치 용어로 말하면, 대통령, 총리, 장관, 국회의원, 시장, 구청장 등이다.

 

모든 권력은 종말을 고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통치하는 '천사들'의 자리에 있는 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겸손이고 두려워하는 마음이다. 어차피, 메시아의 도래를 통해 사라질 권력이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권력을 사라지게 할 능력을 가진 메시아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이미 그들은 자신을 메시아 반열에 올려놓은 메시아 병에 걸린 사람에 불과할 뿐이다.

 

지금 우리는 매개된 통치와 행정의 세상에 살고 있다. 그렇다 보니, 어렵고 혼란스럽다. '천사들'이 잘 해주면 좋은데, 보통 천사들은 잘 하지 못한다. 여기서 교회의 기능은 확연해진다. 천사들이 잘 하도록 채찍질하거나, 천사들이 매개되지 않은 통치와 행정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가 자신의 기능을 상실하면, 천사들과 한통속이 되어, 세상의 고통을 더 가중시킨다.

 

에른스트 블로흐는 다음과 같은 우화를 전한다.

 

하시딤(경건한 유대인들)은 도래할 세계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는 모든 것이 이곳과 꼭 같을 것이라고 한다. 우리의 방은 도래할 세계에서도 지금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 아이는 다음 세상에서도 지금 자고 있는 바로 그곳에서 자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생에서 걸치고 있는 옷들을 저 생애에서도 입고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지금과 같이 남아 있을 것이다. 약간 다르게.

 

위 우화를 전하며 에른스트 블로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약간을 실현하는 것은 너무 어려우며, 이 세상에서 인간이 그 방도를 찾기란 너무 어렵기 때문에 메시아의 도래가 필요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의 세상에 살기를 바란다. 그러나 아직 이 세상은 '천사들'의 매개를 통해서 통치가 이뤄지고 있다. '약간 다르게'만 해도 살만할 텐데, 인간에게는 그 약간 다르게 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듯하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고통 가운데 신음한다. 그 신음은 출애굽기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것과 닮았다. 메시아가 도래할 것이다. 그러나, 그 도래를 막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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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방사능 오염수 방류와 생명정치]

 

1. 주권이 누구에게 있는가?

한덕수 총리가 일본의 방사능 오염수 방류와 관련하여 브리핑을 하면서 "국가와 과학을 믿어달라"고 했다. 대한민국은 국민이 주권을 가진 나라이다. 그런데, 대다수의 국민이 반대하는 일을 정부가 막아서지 못하고 오히려 변호하고 있다. 주권이 누구에게 있는가? 국민인가 정권인가?

 

2. 예외상태

칼 슈미트는 예외상태에서 누가 주권을 갖는가에 대한 논의를 했다. 주권자는 예외상태에서 주권을 가진다. 주권자는 예외상태에서 무엇인가를 결정할 권한을 가진다. 한덕수 국무총리의 말에 의하면, 예외상태에서 주권을 갖는 것은 정부와 과학인 것 같다. 그러므로, 국민들에게는 주권이 없다. 대한민국은 국민이 주권을 가진 나라가 아니거나, 무정부 상태이거나, 아니면 정권이 국민의 주권을 빼앗아간 나라처럼 보인다.

 

3. 호모 사케르

조르조 아감벤은 예외상태에서 발생하는 생명정치를 말하며, 현재 우리가 사는 세계는 계속해서 예외상태를 만들어 생명정치를 하는 중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일본의 방사능 오염수 방류 사건이 그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예외상태가 발생하면 예외상태에서 뭔가를 결정한 주권자가 필요하게 되고, 그러한 상태에서 정권은 국민을 제쳐놓고 주권자로 등극한다. 그리고 예외상태에서 모든 국민은 호모 사케르가 된다. 생명정치가 작동하는 것이다.

 

4. 벌거벗은 생명

‘호모 사케르’를 직역하면 '신성한 생명'(인간)이라는 뜻을 가지지만, 희생물로 바치는 것은 허용되지 않으면서 그를 죽이더라도 살인죄로 처벌받지는 않는 자들을 말한다(아감벤, <호모 사케르>, 156쪽). 호모 사케르는 배제 속에서 작동하는 생명 정치다. 대한민국 정부는 지금 국민을 '호모 사케르'로 만들어 놓고 있다. 생명과 직결되는 방사능 오염수 방류 사건에서 주권자인 국민을 배제하고, 예외상태를 만들어 정부가 주권자의 역할을 감당하며, 국민들을 '벌거벗은 생명'으로 몰아넣고 있다.

 

5.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주권의 문제

지금 일본의 방사능 오염수 방류 문제와 그것에 동조하는 한국 정부의 문제는 단순히 국가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주권의 문제이다. 대한민국은 국민이 주권을 가진 나라이다. 이것을 무시하고, 일개 5년짜리 정권이 주권자 노릇을 하며 예외상태를 만들어 국민들을 호모 사케르로 전락시키고 국민들의 생명을 벌거벗은 상태로 만드는 행위는 헌법에 대한 가장 큰 위법/반역 행위이다.

 

6. 대한민국 국민들이여, 들고 일어나라!

호모 사케르의 생명 정치가 발생하면, 누군가 호모 사케르를 죽여도 그 사람은(그 주체는) 처벌 받지 않는다. 대한민국 정부는 지금 국민을 호모 사케르로 만들었고, 방사능 오염수 방류로 인하여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그리고 이후에 방사능 물질로 인하여 수많은 생명이 죽어 나가는 상황이 오더라도 자신들은 처벌 받지 않게 될 거라는 것을 안다. 즉, 늘 그랬듯이, 사건은 발생하고 희생자는 넘쳐나는 데 책임지는 사람이 없고 처벌 받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대한민국 국민들이여, 호모 사케르의 생명 정치를 통해 벌거벗은 생명으로, 죽음으로 몰아 세우고 있는 정권을 향하여 들고 일어나라. 주권을 빼앗기지 말라.

 

7. 에스겔의 외침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재앙이로다, 비상한 재앙이로다, 끝이 왔도다 끝이 너에게 왔도다 볼지어다 그것이 왔도다. 이 땅 주민아 재앙이 네게 임하도다 때가 이르렀고 날이 가까웠으니 요란한 날이요 산에서 즐거이 부르는 날이 아니로다. 이제 내가 속히 분을 네게 쏟고 내 진노를 네게 이루어서 네 행위대로 너를 심판하여 네 모든 가증한 일을 네게 보응하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히 여기지도 아니하고 네 행위대로 너를 벌하여 너의 가증한 일이 너희 중에 나타나게 하리니 나 여호와가 때리는 이임을 네가 알리라" (겔 7:5-9).

 

8. 한국교회여, 유체이탈 집회는 그만하고, 거리를 예배당 삼아 길거리에서 외치라

모 교단에서는 지금 00 영적 각성 대회가 한창이다. 기사를 보니, 대회에서 낭독된 선포문은  이렇다. "지금 우리 사회는 도덕적 기초가 흔들리고 대립과 갈등으로 양극화되고 있다... 미래 세대들이 교회에서 희망을 찾지 못해 떠나고 있다... 신앙의 기본으로 돌아가는 길은 철저한 회개 밖에는 없다."

미래 세대가 교회에서 희망을 찾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유체이탈 화법을 교회가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국에 잘 지어진 교회 건물안에서 '도덕, 양극화, 영적 각성, 회개, 부흥'을 외칠 것이 아니라, 길거로 나가서 '방사능 오염수 방류 반대'를 외치길 바란다. 그러면, 그렇게 걱정하는, 미래 세대들이 교회에서 희망을 찾고, 교회로 밀려들 것이다. 

 

9. 믿음에 대하여

한덕수 총리가 말했다. "국가와 과학을 믿어달라." 국가는 믿을 만하고, 과학은 믿을 만한가.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믿음은 무엇인가? 한덕수 총리는 믿음이라는 용어를 더럽히지 말라. 그리고, 이 국가적, 지구적 대재난을 앞에 두고, 국민의 신복 대통령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왜 본인이 직접 나서지 못하고, 아랫사람들을 내세워 면피하고 있는가?

 

10. 인류세의 재앙을 끝내야

오펜하이머가 트리니티 작전(맨하튼 프로젝트)을 수행한 날(1945년 7월 26일 새벽 5시 29분)을 인류세로 보는 시각이 있다. 핵폭탄을 만든 날이다. 그 핵폭탄의 실질적 피해국은 일본이었다. 일본은 지금 핵 방사능 오염수를 바다에 버리고 있다. 피폭에 대한 보복인가? 이제 핵물질은 공기, 땅, 그리고 바다까지 모두 오염시켜 인류의 생명을 말살하고 있다. 인류는 스스로의 생명을 빼앗고 있다. 인류세의 재앙은 멈춰야 한다. 스스로 멈출 수 없다면, 모든 것을 잃은 후, 멈춤을 당하고 말 것이다.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 그리고 미국 정부에게 고한다. 야합을 끝내고, 당장 방사능 오염수 방류를 멈추라. 정부와 과학은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정부와 과학은 믿음의 대상이 될 능력이 없다. 겸허히 인정하고, 당장 방사능 오염수 방류를 멈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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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3. 8. 24. 01:29

[그 중에 제일은 겸손]

 

아마샤. 남유다 왕국의 제 9대 왕입니다. ‘여호와는 강하시다’는 뜻입니다. 아마샤는 예루살렘 출신 왕비 여호앗단의 소생입니다. 그에게는 가슴 아픈 과거도 있습니다. 아버지 요아스가 신복들에 의해 살해를 당했죠. 그래서 아마샤는 왕위에 올라 아버지의 원수를 갚습니다. 물론 삼족을 멸해도 시원치 않았지만, 아마샤는 감정대로 일을 처리하지 않고 율법을 따릅니다. 그 당시 율법은 “자녀로 말미암아 아버지를 죽이지 말 것이요 아버지로 말미암아 자녀를 죽이지 말 것이라 오직 사람마다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죽을 것이라”는 조항이 있었습니다(왕하 14:6). 그래서 아마샤는 아버지를 죽인 신복들만 처리할 뿐, 그의 가족들은 살려줍니다.

 

아마샤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좋은 편입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아버지 죽음에 대한 원수를 갚을 때 감정대로 처리하지 않고 율법을 지킨 것도 이러한 좋은 평가에 한몫 했을 겁니다. 하지만 아마샤에 대한 평가에는 2% 부족한 게 있습니다. 선왕인 아버지를 좇아서 열심히 해서 모든 게 좋았는데, 그 당시 왕을 평가하는 절대 기준인 ‘다윗 왕’에는 못 미쳤습니다. 그래서 그럴까요? 아마샤는 다윗 왕처럼 되고 싶은 욕심이 컸던 모양입니다.

 

다윗 왕처럼 되고 싶은 욕심은 아마샤 왕의 업적에서 드러납니다. 아마샤는 다윗처럼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과 전쟁을 벌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을 물리친 것과 똑같이 에돔을 물리치고 에돔의 도시 중 하나인 셀라를 차지합니다. 그런 후에 셀라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새로운 이름을 붙입니다. 옥드엘. ‘하나님에 의해 정복되었다’는 뜻입니다. 에돔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차지한 도시의 이름을 이렇게 바꾼 이유는 분명해 보입니다. 자신의 업적을 다윗 왕의 업적과 대등하게 만들어, 자신을 다윗 왕의 반열에 올려 놓으려는 정치적 계산이 있었던 것이죠.

 

여기까지는 인간적으로, 또는 왕으로 그럴 만합니다. 누구나 자기 자신을 존귀하게 만들고자 하는 욕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마샤의 다음 행보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듭니다. 아마샤는 북이스라엘의 요아스 왕에게 메신저를 보내 시비를 겁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대면하자”(왕하 14:8). 시쳇말로 ‘맞짱 뜨자’는 말입니다. 아마샤는 에돔을 무너뜨린 기세를 몰아 북이스라엘을 굴복시키려는 속셈이었던 것이죠.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다윗의 반열에 올려 놓는 것에 쐐기를 박으려는 듯 보입니다. 이에 대한 북이스라엘의 왕 요아스의 반응이 흥미롭습니다. 레바논 가시나무와 백향목 우화를 들어, 아마샤를 꾸짖습니다. “네가 에돔을 쳐서 파하였으므로 마음이 교만하여졌구나”(왕하 14:10). 요아스 왕은 마사야 왕을 꾸짖으며, 괜히 화를 자초하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전갈을 보냅니다. 그런데, 아마샤 왕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습니다.

 

아마샤는 에돔 격파 후 실제로 마음이 교만해졌습니다. 자신이 다윗처럼 에돔을 격파할 때 하나님이 도우셨던 것처럼 북이스라엘과의 전쟁에도 자신을 도울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마샤는 이렇게 근거 없는 자신감과 지나친 신앙을 마음에 품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남유다는 북이스라엘에 비해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남유다보다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우월했습니다. 아마샤는 자신의 힘을 잘못 판단했던 것이죠. 결국 전쟁은 벌어졌고, 힘의 우위에 있던 북이스라엘은 예루살렘으로 돌진하여 성벽을 부수고, 성전과 궁전에서 보물을 약탈합니다. 아마샤는 자신을 다윗의 반열에 올려 놓으려다가, 도리어 가장 밑바닥으로 추락하고 맙니다. 곱게 죽지 못하고 아버지처럼 반역의 무리에 의해 처참한 죽음을 맞게 됩니다.

 

아마샤 이야기의 교훈은 명백합니다. 사는데 가장 중요한 덕목은 겸손이라는 것이죠. 겸손은 잘 돼도 우쭐대지 않는 것이고, 못 돼도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겸손은 마음을 늘 ‘주님’께 두고 잠잠하게 사는 것입니다. 이거 하나만 잘 해도, 우리 개인의 인생, 교회의 미래, 나라의 운명은 더 풍성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살면서 쌓아야 하는 덕들 중에, 그 중에 제일은 겸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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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병거와 마병이여!

 

최정례 시집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를 읽다가 이런 생각이 들어 다음과 같은 문장을 적어봤습니다.

 

당신을 통해 나의 가난은 드러난다

당신 앞에서 나는 나의 가난을 감출 수 없다

그래서 당신은 나의 구세주다

 

내 머리속을 맴돌던 문장인데, 이 문장이 맴돌던 시간, 또다른 문장을 만났습니다. 열왕기하 13장의 문장입니다. 거기에는 엘리사의 죽음 이야기가 담겨 있었습니다. “엘리사가 죽을 병이 들매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가 그에게로 내려와 자기의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왕하 13:14).

 

한 사람의 죽음을 이토록 애도하는 문장을 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엘리사의 죽음을 앞두고,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는 그를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를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라고 지칭합니다. 한 존재에 대한, 실로 엄청난 존경입니다. 병거와 마병. 한 나라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국방력입니다. 엘리사가 이스라엘에게 그런 존재였습니다. 이러한 존재감, 이러한 존경을 받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죠. 성경에서 한 사람의 죽음을 두고 이렇게 표현한 것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엘리사의 죽음 이야기를 두고 한참 동안 가만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묵상했습니다. 그러면서 그의 죽음에 비추어 나의 인생을 돌아보았습니다. 최정례의 시집을 읽으며 떠올랐던 문장이 스쳐갔습니다. “당신을 통해 나의 가난은 드러난다. 당신 앞에서 나는 나의 가난을 감출 수 없다. 그래서 당신은 나의 구세주다.” 엘리사의 죽음에 비춘 나의 삶은 참 가난합니다. 부끄럽고 보잘것없습니다. 누가 나의 존재를, 나의 삶을 이렇게 애도하며 평가해 줄까, 생각해 보면, 나의 삶은 그저 가난하기만 합니다.

 

엘리사의 죽음을 기록하고 있는 말씀은 그래서 구세주이기도 합니다. 존재의 가난함에서 벗어나, 지향해야 할 존재의 목적을 가리켜주기 때문입니다. “그래, 엘리사처럼 누군가에게 병거와 마병이 되는 삶을 살아야겠다!” 한 사람만이라도 나를 ‘병거와 마병’으로 인식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무지막지한 존재의 가난함에서 벗어나서 약간의 부요함을 맛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요함을 약간이라도 맛보는 일, 이것이 구원이겠죠.

 

마침, 미국에 온 지 만 20년 되는 날(2023년 8월 11일)을 맞았습니다. 여러가지 생각이 많이 드는 날, 마침 최정례 시집을 읽으며 떠오른 문장과 성경을 읽으며 맞닥뜨린 엘리사의 죽음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나그네로서의 지난 20년 간의 삶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래도 늘 존재의 가난함 만을 맛 본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족도 일구었고, 바울처럼 교회도 개척해 보았고, 교회 건축도 해 보았고, 새로운 곳에 와서 또다른 교회를 섬겨보았고, 어려운 교회였지만 헌신하면서 신앙의 즐거움을 누렸습니다. 공부도 많이 했습니다. 나를 그리워하는 친구들, 고향 교회도 있습니다. 엘리사의 죽음 이야기를 보며 존재의 가난을 느꼈는데, 다시 돌아보니, 그렇게 가난하게만 산 인생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엘리사의 죽음 이야기를 보면서, 소망이 생겼습니다. 지난 20년의 나그네 삶을 돌아보며, 앞으로 20년의 나그네 삶을 생각해 봅니다. 기독교 (교회)가 어려운 시절이지만, 그것에 굴하지 않고, 바울이 디모데에게 주는 교훈을 나의 교훈으로 삼아 봅니다.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딤후 4:5). 누군가에게, 특별히 교회에 엘리사처럼 ‘병거와 마병 같은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겠구나, 하는 다짐을 해봅니다.

 

이것은 나만의 고백, 다짐으로 그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신앙을 지키는 것이 어려운 이 때에, 모든 그리스도인들, 좁게는 우리교회의 모든 교우들의 고백과 다짐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병거와 마병 같은 존재’가 있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는 교회, 서로가 서로에게 ‘병거와 마병’이 되어 주는 교회, 그래서 든든하게 세워져 가는 교회. 이런 교회를 꿈꾸고 소망합니다.

 

엘리사의 이야기는 우리의 존재가 얼마나 가난한지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묵상하다 보면, 결국 우리에게 힘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나의 부족함을 하나님께 맡기고, 엘리사처럼 ‘병거와 마병 같은 존재’로 성장해 가도록, 나의 존재를 주님께 헌신하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며, 지체에게 내어줄 때, 우리는 오늘보다 더 풍요롭고 행복한 교회를 세우고, 더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병거와 마병 같은 존재’가 되겠습니다. 당신도 나에게 ‘병거와 마병 같은 존재’가 되어 주세요. 이렇게 병거들과 마병들이 모인 교회를 누가 대적하겠습니까? 이게 부흥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병거와 마병 같은’ 당신이 있어 든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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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구원은 바깥에서 온다

 

절망(絶望)

ㅡ 김수영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사악했던 오므리 왕조를 무너뜨린 예후 왕조는 또다른 사악함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게 참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아합 왕으로 대표되는 오므리 왕조를 무너뜨리는 심판의 도구로 쓰임 받은 예후 왕조인데, 그들도 결국 오므리 왕조와 다를 바 없이 ‘여로보암의 길’로 갔습니다. 다윗의 길로 가지 못하고 여로보암의 길로 간 것 때문에 예후 왕조는 오므리 왕조를 무너뜨린 특별한 공훈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이웃 나라인 아람에게 학대를 당했습니다.

 

학대를 당한 예후 왕조의 여호아하스(예후 왕의 아들) 왕은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부르짖습니다. 학대당하는 것을 가슴 아파하는 하나님은 배은망덕한 여호아하스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의 기도를 들어 구원자를 보내주십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은 아람의 학대로부터 구원을 받습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듯이, 우리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는 말씀이 여호아하스에게 이미 이루어진 것을 봅니다. 구원은 바깥에서 옵니다. 시대의 모든 선지자들은 이것을 동일하게 말합니다. 2차대전 당시 독일 나치에 의해 수많은 고통을 받았던 발터 벤야민도 구원을 바깥에서 와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메시아 사상’를 펼칩니다. 우리 나라의 어두운 독재 정권 시절을 살았던 김수영 시인도 동일한 말을 합니다.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우리가 기도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할 이유는 분명합니다. 기도는 구원에 대한 갈망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구원이 바깥에서 온다는 것에 대한 믿음입니다. 우리 스스로 해결하여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온통 바깥의 구원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매순간, 기도하는 일은 우리의 삶이 구원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우리의 소망처럼 구원이 실제로 바깥에서 오도록 길을 여는 것입니다.

 

큰 기도, 시간이 많이 드는 기도, 정성이 많이 들어간 기도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작은 기도, 찰나에 드리는 화살기도, 정성이 별로 들어가지 않은 기도여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가짐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구원을 갈망한다는 것, 구원은 바깥에서 온다는 것, 그리고 구원은 마침내 온다는 것에 대한 고백이며 믿음입니다. 이 마음만 있다면, 우리의 기도는 어떠한 형태의 기도이든지 값어치가 있습니다. 그러니, 매순간,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 안에 있고, 기도로 마치십시오. 기도는 메시아가 시간 안으로 들어오는 구원의 통로이고 열쇠입니다.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3. 8. 8. 08:27

주일을 위한 기도

(출 6:9, 16:23-30)

 

주님,

우리를 자유케 하소서.

주일을 지키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자유를

지키게 하소서.

몸과 마음이 걍퍅해지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날마다 주님께 내어드리길 원합니다.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고,

주일을 잘 지키는 자유인이 되게 하소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에게 영원한 자유를 선물로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3. 8. 8. 08:24

주일과 자유

(출애굽기 6:9, 16:23-30)

 

1. 이코노미스트에 실린 최근 기사를 보면, 미국인의 기대 수명이 최근 2년 사이에 2.7세나 감소했다. (Horrifying numbers of Americans will not make it to old age/7.31.2023) 현재 미국인의 기대수명은 76.1세다. 세계 최고의 암 치료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미국인이 죽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암 때문이다. 굉장히 아니러니컬한 현상인데, 암 때문에 죽는 이유는 의료에 대한 불평등한 접근성 때문이다. 암에 걸려도 돈이 없는 사람은 최고 수준의 암 치료 기술의 혜택을 받을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

 

2. 그리고, 미국인의 기대 수명을 갉아먹는 요인으로 총기사고와 교통사고가 있다. 미국인은 2022년도에만 교통사고로 43,000명 정도가 죽었다. 총기사고로 죽은 사람은 2023년도 현재까지 25,000명 정도 된다. 그리고, 미국인의 기대 수명을 갉아먹는 요인이 또 있다. 약물중독이다. CDC의 발표에 따르면, 2021년에 약물과다복용으로 죽은 사람이 무려 107,000명이나 된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미국인의 기대 수명을 갉아먹는 요인 중의 하나로 젊은 층의 죽음이 지목됐다는 것이다. 2021년도에만 15세에서 24세의 젊은이 38,307명이 죽었다.

 

3. 이렇게 충격적인 사망이 발생하는 원인과 기대수명 감소에 대해서 이코노미스트가 제시하고 있는 분석이 흥미롭다. 이렇게 된 이유는 미국인들이 중시하는 자유 때문이라는 것이다. 미국인들은 자유를 중시하고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는데, 더불어, 정부의 개입을 극도로 싫어한다는 것이다. 일례로 지난 4월, 미국 청년 보수단체 ‘터닝포인트 USA’ 설립자 겸 회장 찰리 커크는 “수정헌법 2조를 지키기 위해서는 매년 총기 사망의 대가를 치를 가치가 있다”고 말할 정도다. 한마디로, 총기 소유에 대한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한 해에 몇 만 명이 총기사고로 목숨을 잃은 것은 감수해야 할 사항이지, 수정해야 할 사항이 아니라는 뜻이다.

 

4. 미국에서는 ‘자유’가 이념으로 작동하여 정치 싸움에 이용된다. 그래서 미국식으로 이해하는 ‘자유’의 개념은 잘 돌아볼 필요가 있다. 무비판적으로 미국식 자유를 받아들이면 바로 그 자유 때문에 소중한 생명을 잃을 수 있다. 자유는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생명을 지켜내려는 의지인데, 그 자유가 오히려 생명을 헤치고 죽인다면, 자유가 무슨 의미가 있나, 그런 생각이 든다. 우리는 이런 정치적이고, 이념적인 자유 말고, 우리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자유를 생각해 보려 한다. 하나님의 자유를 통해서 이 땅에서 왜곡되어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자유를 바로잡는, 좋은 일이 많이 생겨나면 좋겠다.

 

5. 출애굽기는 우리들에게 ‘해방’이라는 개념을 가져다 주었다. 남미신학자들을 통해서 발전된 해방신학은 성경의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발전된 신학이다. 해방신학은 자유에 대한 갈망이다. 출애굽기는 해방과 자유의 이야기다. 해방되었다는 것은 자유를 얻었다는 뜻이다. 해방을 갈망하는 이유는 지금 삶이 어딘가에 억압되어 있다는 뜻이다. 억압되어 있어 자유가 없고, 자유가 없다보니, 삶이 괴롭다는 뜻이다. 행복하고 편안해야 하는데, 무엇인가에 억눌린 사람은 자유가 없어 삶이 괴롭다.

 

6. 400여년 동안 애굽에서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은 처음에는 그곳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갔는데, 어느 순간 상황이 바뀌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왕조가 들어서는 바람에) 노예로 전락하여 괴로운 삶을 살았다. 길지 않은 삶이지만, 우리의 삶이 이런 것 같다.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 같이 행복하다가도, 어느 순간 상황이 바뀌어 지옥을 사는 것처럼 괴롭기도 하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다시 자유를 갈망하게 된다. 나를 괴롭히는 문제들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한다.

 

7. 이스라엘은 애굽의 학대에 너무 괴로워 날마다 울부짖었다. 성경에서 발견하는 하나님의 성품 중 하나는, 하나님께서는 학대를 싫어하신다는 것이다. ‘학대’는 히브리어 ‘라하츠’에 해당된다. 성경에서 ‘라하츠’라는 말이 나오는 곳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구원이 임한다. 라하츠는 ‘괴롭힘’, ‘학대’, ‘압박’이라는 우리말로 옮길 수 있고, 영어로는 ‘oppression’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학대받는 자들의 하나님(God of the oppressed)으로 드러난다. 하나님은 학대를 싫어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엇인가에 학대 받는다고 생각하면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된다. 반대로, 절대로 우리는 누군가를 학대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대적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대적이 되면 인생에 이로운 것이 하나도 없다.

 

8. 학대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행동하는 학대이고, 다른 하나는 행동 안 하는 학대이다. 행동하는 학대는 ‘괴롭힘’이다. 누군가를 어려움 당하게 만드는 것이다. 아주 나쁜 짓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행동하는 학대’만 안 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학대에는 다른 유형이 있는데, 그것은 ‘행동 안 하는 학대’이다. 다른 말로 방치라고 한다. 누군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데 모른 척하는 것이다. 우리는 ‘행동하는 학대’를 안 하고 산다고 자부할지 모르지만, 우리의 행동을 돌아보면, 우리는 ‘행동 안 하는 학대’를 자행하고 살 때가 많다. 내가 직접 도와주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학대 당하고 있는 존재를 위해서 우리는 기도라도 해야 한다. 그러면, 그 기도 안에서 그 학대 당하는 존재는 하나님의 은총을 반드시 입을 것이다.

 

9. 학대 당하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학대를 보시고 가만히 있지 않으시고, 그의 종 모세를 보내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었다. 그런데 출애굽기 6장을 보면 아주 기이한 일이 발생한다. 학대 당하여 괴로운 마음을 표출하던 이스라엘이 정작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 그들을 애굽에서 꺼내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주겠다는 메시지를 전했을 때, 이스라엘은 다음과 같이 반응한다.

 

모세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나 그들이 마음의 상함(discouragement)과 가혹한 노역(cruel bondage)으로 말미암아 모세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더라 (출 6:9).

 

10. 학대가 나쁜 이유, 그리고 하나님께서 특별히 학대를 싫어하시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보이는 반응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학대는 몸과 마음의 자유를 빼앗는다. 그래서 생명의 존엄성을 형편없이 훼손시킨다. 생명의 존엄성이 훼손되니까 어떤 일이 벌어지냐면, 다른 생명과 소통이 안 된다. 특별히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소통이 안 된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해방과 자유를 약속하시고 말씀하시는데, 학대 당하여 존엄성을 훼손 당한 이스라엘은 모세의 말을 듣지 않는다. 이것은 정말 마음 아픈 일이다.

 

11. 이스라엘이 출애굽하는 과정은 널리 알려져 있기에 다시 반복하여 이야기하지는 않겠지만, 출애굽 사건을 가장 발목 잡았던 것은 ‘걍퍅한 마음(discouraged /stubborn/hardened/heart)’이었다. 두 강퍅한 마음이 출애굽을 가로막았다.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의 강퍅한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애굽의 바로 왕이 가졌던 강퍅한 마음이었다. 우리가 강퍅한 마음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생명을 위태롭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는 요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구원은 내 앞에 이미 와 있다. 다만, 내가 강퍅한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 아니면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구원이 임하느냐 구원이 임하지 않느냐의 차이를 낳는다. 마음을 부드럽게 하라. 마음을 풀라.

 

12. 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강권적 은혜(걍퍅한 마음을 넘어서는)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인도 아래 마침내 홍해를 건너 출애굽 한다. 그리고, 그들이 광야에 들어서면서 그 광야에서 받은 첫 번째 훈련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었다. 안식일을 지키는 훈련은 우리가 잘 아는 만나 사건과 엮여 있다. 만나 사건이 발생한 이유는 안식일 훈련을 위함이다. 안식일은 말 그대로 ‘쉬는 날’이다. 쉼이다. 쉰다는 것은 어딘가에 속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쉰다는 것은 곧 자유를 뜻한다.

 

13. 오랜 세월 동안 애굽에서 학대당하며 마음이 상하고 고된 노역으로 고통당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장 못하는 것, 그들에게 없는 개념은 ‘쉼’(sabbat)이었다. 그들에게 쉼이라는 것이 없었다. 즉, 그들에게는 자유가 없었다. 그래서 쉬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고, 자유가 무엇인지 몰랐다. 그것을 알려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만나 사건을 일으키신다. 만나 사건은 광야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먹이셨다는 단순한 사실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나 사건은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엇을 가르치셨는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만나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쉼’, 즉 ‘자유’를 가르쳐 주신다.

 

14.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그들이 시키는 대로 일하지 않으면 생명을 부지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살기 위하여,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학대를 받으면서도 열심히 일했다. 그런데 만나 사건을 통해서 이들은 더 이상 학대를 받지 않으면서도 생명을 지킬 수 있는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들은 평일에 나가서 만나를 거두어들이기만 하면 됐다. 거기에는 무슨 학대가 있지 않았다. 거두어들이는 노동만 존재할 뿐이었다. 거두어들일 때 그냥 하루치 먹을 양식만 거두어들이면 됐다. 더 많이 거두어들이느라 불필요한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됐다. 그리고 6일에는 두 배를 거두어들이는 노동만 조금 더 하면 됐다. 그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제 일곱 번째 날은 만나를 거두어들이는 일조차 하지 않고, 그냥 쉬면 되었다.

 

15.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만나 사건을 통해 안식일을 지키면서 비로소 ‘자유’를 알게 되었다. 안식일을 통해 자유가 무엇인지를 알았던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절대로 애굽에서와 같은 삶을 살 수 없게 되었다. 이들은 그 이후에 그 어디에도 속박당하지 않는 삶을 살기 원했다. 자유의 삶은 우상숭배를 거부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우상숭배는 인간의 삶에서 자유를 빼앗아가는 상황을 지칭하는 것이다. 우상숭배가 나쁜 이유는 단순히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다른 신을 섬기는 불경을 저질렀다는 뜻이 아니라, 참 자유를 주지 않고 가짜 자유는 주는 악한 것에 몸과 마음이 빼앗겼다는 뜻이다.

 

16. 구약의 안식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 이후 그리스도인에게 ‘주일’(The Lord’s Day)로 계승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은 더 깊은 자유를 경험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유대인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처럼 주일을 지킨다. 유대인은 안식일을 지켰다. 그런데 그들은 이런 고백은 한다. ‘우리가 안식일을 지켰더니, 우리가 안식일을 지킨 것보다 안식일이 우리를 더 많이 지켜주었습니다.’ 유대인의 이러한 고백은 그리스도인 경험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렇게 고백한다. ‘우리가 주일을 지켰더니, 우리가 주일을 지킨 것보다 주일이 우리를 더 많이 지켜주었습니다.’

 

17. 표면상으로는 다종교의 국가이지만, 심층상으로는 기독교 국가인 미국에서 노예제도가 성행했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런데, 결국 그 노예 제도를 뒤집을 수 있었던 이유도 기독교 정신 때문이다. 노예 제도가 존재할 때 미국인들의 종교성은 유난했다. 그들은 노예 제도가 나쁜 것이라는 인식을 아직 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노예 제도를 운영했던 미국인들조차도 ‘주일을 지켰다.’ 그들은 주일을 지키면서 아주 종교적인 마음으로 주일에는 노예를 쉬게 했다. 그들이 무슨 좋은 의도를 가지고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노예에 대한 사랑으로 그러한 행동을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이러니칼 하게도 노예들은 주일에 쉬는 것을 통해서, 그 옛날, 출애굽기에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안식일을 지키면서 ‘자유’를 배웠던 것처럼, 그들은 ‘자유’를 배워 나가기 시작했다.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노예들이 갈망하는 자유를 막을 길이 없었다. 결국, 미국은 노예 제도를 포기하고, 노예들에게 자유를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함석헌이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했던 역사인식 방법)

 

18. 그리스도인은 주일을 지킨다. 우리가 누리는 생명의 자유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일을 지키면, 우리가 주일을 지키는 것보다 주일이 우리를 더 많이 지켜준다. 절대, 절대, 주일을 지키지 못할 정도로 마음을 상하게 하지 말고 몸을 상하게 하지 말라. 주일을 지키느냐 지키지 못하느냐는 내 영혼의 건강에 대한 바로미터다. 주일을 지키지 못하면, 그것은 내가 지금 어딘가에 속박당하여 있다는 뜻이다. 하루 빨리 그 결박에서 풀려나도록 주님께 구원을 간구하라. 참된 자유를 주시고, 우리에게 참된 생명을 주시는 주님 외에, 그 어디에도 속박당하지 말라. 주일을 지킨다는 것은 바로 그렇게 하겠다는 신앙의 결단이다. 주일을 지키라. 그러면 주일이 여러분을 지켜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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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인류세 신학]

 

인류세. 영어로는 Anthropocene(안트로포씬). 2000년, 대기화학자 파울 크뤼천과 생물학자 유진 스토머가 기후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새로 고안한 개념입니다. 지난 7월 27일,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비장한 목소리로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지구 온난화가 끝나고, 끓는 지구의 시대가 왔습니다!” 대개 우리는 더 좋은 시대가 도래했다는 ‘선언’을 듣고 싶어하지만, 그와는 달리, 유엔 사무총장의 선언은 비극적입니다. 지난 1만년 동안 기후는 인간에게 따뜻했습니다. 기후는 인간이 살아가기에 매우 좋은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지난 1만년 동안 인류는 신석기, 청동기, 철기 시대를 거치면서 찬란한 문명을 이루어 왔습니다. 지난 1만년 동안의 지질시대를 일컬어 ‘홀로세’(Holocene)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 기후가 안정적이었던 시대가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epoch), 인류세가 도래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류세’라는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또다른 세금(tax)이 생겨난 줄 알았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평온한 삶을 살아왔다는 뜻입니다. 기후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인류세’가 기후에 대한 용어라는 것을 전혀 상상도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요즘, ‘인류세’는 사람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용어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여기저기서 이 용어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신문 기사를 읽으면서 가장 눈에 띄는 용어는 ‘인류세’와 더불어 ‘전례없는’(unprecedented)이라는 용어입니다. 인류세를 맞아 인류는 전례없는 경험을 합니다. 모두 기후 변화 때문에 겪게 되는 경험입니다.

 

왜 ‘인류세’라는 용어가 중요하고, 왜 인류는 ‘인류세’에 관심을 가져야 할까요? 그동안 지질시대를 구분하는 용어들은 모두 인간의 활동과 관계없는, 자연적인 활동에 근거한 용어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빙하기’(Ice Age)’가 끝나고 홀로세로 들어서게 된 것은 그냥 자연의 원리였지, 거기에 인류가 어떠한 개입도 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활동이 지질시대가 바뀌는 데 1도 관여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인류세는 완전히 다릅니다. 인간의 활동이 지질시대를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인류보다 몇 배나 더 강력한 생명체였던 공룡조차도 그들의 활동을 통해 지질시대를 바꾸어 놓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구생명체 중 유일하게 인류(인간)만 지질시대를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이것은 ‘인류는 정말 대단해!’라고 칭찬할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류는 지금 자신들의 활동 때문에 스스로 죽을 위기에 처해졌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인류는 어떻게 활동을 했길래, 생명을 풍성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의 멸종을 가져왔는가?’ 이렇게 우리는 아주 깊은 반성의 시간이 필요한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제가 마음에 늘 품고 있는 문장 하나가 있습니다. 미국의 저명한 신학자 스탠리 하우어워즈의 말입니다. “If you want to change your way of life, acquiring the right image is far more important than diligently exercising willpower. 삶(의 방식)을 바꾸고 싶다면 꾸준히 의지력을 기르는 것보다 올바른 개념을 확립하는 일이 훨씬 중요하다.” 이 말 때문에 저는 어느 순간부터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인간은 머리속에 올바른 개념을 확립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머리속에서 올바른 개념이 확립되지 않으면 인간은 의지력으로 자신의 삶을 바꾸거나, 자신의 행동을 바꿀 수 없습니다. 인간은 생각에 따라 행동합니다. 생각(사고)이 중요합니다.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아무리 노력을 해도 행동은 바뀌지 않습니다. 우리가 마음먹고 하는 행동이나 또는 무심코 하는 행동 모두는 우리의 생각에 대한 반영입니다. 이것을 기후 변화 문제에 적용해 보면, 우리의 행동이 기후 변화의 원인이 되었다는 뜻은, 우리가 기후 변화를 일으킬 수밖에 없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경험하다시피, 생각을 바꾸는 일은 인간이 다시 태어나는 일만큼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이 바뀌면 ‘다시 태어났다’라는 말로 묘사할 정도로, 어떤 이의 생각이 바뀐 것을 보면서, ‘저 사람 다시 태어난 것 같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 ‘다시 태어난다’라는 말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매우 익숙한 말입니다. ‘중생, 거듭남’을 뜻하는 신학적 용어로 인식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어 구원받은 사람을 일컬어서 ‘거듭났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인류세를 맞아 이 ‘거듭남’이라는 용어를 조금 다르게 사용할 필요가 생긴 듯합니다. 예수 믿고 거듭났는데, 그 거듭난 신앙인의 행동이 기후 변화를 불러왔다면, 그것은 진정 거듭난 것일까요? 거듭났다는 것은 생명이 풍성해졌다, 생명이 온전해졌다는 뜻인데, 실상, 인류세를 맞은 인류는 생명이 쪼그라들어, 생명의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아주 큰 모순이 발생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태를 어떻게 바라보고, 해결해야 할까요?

 

1990년을 전후로 서구권 나라에서는 ‘지구’에 대한 인문학적 논의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논의를 일컬어 ‘지구인문학’이라고 합니다. 그동안 인문학의 주제는 인간이나 국가(정치)였는데, 인문학 주제에 ‘지구’가 대두된 것이죠. 그동안 인문학의 주어는 인간 또는 국가였습니다. 그런데, 지구인문학에 대한 논의가 일면서, 인문학의 주어가 인간 또는 국가에서 지구로 바뀐 것입니다.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만의” 인문학에서, 이제는 지구가 주어로 등장하여, 모든 논의에서 지구를 빼면 안 되는 상황에 이른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규정하는 ‘신학’도 마찬가지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그동안 기독교 신학은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만의” 신학이었습니다. 신학의 주어는 하나님과 인간이었습니다. 신학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규정하고, 더 나은 인간의 삶의 조건을 ‘신적인 삶(신에게 잇대어 있는 삶)’에서 찾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지구를 주어에서 뺀 신학이 결국 인간의 삶을 위태롭게 만들었다면,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죠. 우리는 이러한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잘못됐을까?’ 우리는 인류세를 맞아, 아주 깊은 신학적인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이것을 일컬어 저는 ‘인류세 신학’이라고 명명합니다. 인류세 신학은 하나님과 인간만 주어로 삼아 생각을 전개시키는 게 아니라 ‘지구’도 주어를 삼아 인간의 조건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강력히 주장합니다. 그러면 지난 2천년 동안 전개된 기독교 신학은 매우 다르게 재구성될 것입니다.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3. 8. 1. 04:14

영성을 간구하는 기도
(출 3:1-12)

 

우리를 우리보다 더 큰 존재에 연결시켜

우리의 존재를 보듬어 주시는 주님,

우리가 살아가다 보니,

나도 모르게 내 안에 갇혀

나보다 더 큰 존재에로 나아가지 못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삽니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영성이 사라진 시대에 살다 보니,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지 못하고

서로가 서로에 대하여 두려움과 떨림의 마음을 갖지 못해

폭력과 고통이 난무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나그네로 살아가던 모세를 더 큰 존재에 연결시켜

삶의 의미를 회복하게 하시고

그를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펼치신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눈으로 봅니다.

주여, 우리도 영성을 갈망하게 하시고

매일매일 나보다 더 큰 존재에게 나를 열어 성장하게 하시며

바깥의 모든 존재가 나보다 더 큰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하셔서

두려움과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어가는,

주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믿음의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가장 큰 존재인

하나님에게로 연결시켜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을 선물로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