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문2019. 10. 31. 07:13

좋은 사람이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

(시편 142:1-7)

 

주님,

기도할 때

주님 앞에 전제를 붓듯 토로하며 기도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기도가 예배로 승화될 줄로 믿습니다.

오른쪽을 자꾸만 쳐다보게 되는

우리의 연약한 인생을 기억하옵소서.

우리의 인생은 외롭고 쓸쓸하고 힘듭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오른쪽에서 분깃이 되어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마음이 상하여 죽을 지 모릅니다.

주님, 우리의 분깃이 되어 주소서.

절망에 빠진 우리에게 힘이 되어 주시고

피난처가 되어 주셔서

구원 받은 거룩한 자가 되어

우리를 둘러싼 의인들과

주님께 감사의 찬양을 드리게 하소서.

주님께서 우리의 분깃이 되어 우리를 구원해 주심을 믿고

말씀이 육신이 된 성육신의 삶을 살게 하시어

상한 영혼들에게 힘이 되어주는

좋은 사람이 되게 하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10. 31. 07:12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

(시편 142:1-7)

 

한국교회가 실패하고 사회의 골칫거리로 전락한 이유는 만 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은 근본적으로 성육신이다. 말씀이 육신이 된 신앙이다. 그런데, 어느덧 한국교회의 신앙은 (말씀)’말 있고 육신이 없어졌다. 형체가 없는 말은 유령일 뿐이다. 형체가 없으니, 거룩한 것 같고 신령한 것 같으나, 결국 그 실체가 없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실체를 만들어 퍼뜨린다. 말만 난립하고 있다.

 

복음은 성육신을 말하는데, 실제 기독교인의 삶은 탈육신을 지향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복음은 일상의 언어를 요구하는데, 실제 기독교인은 자신들만의 은어를 사용한다. 은어를 아는 사람들끼리는 좋고, 은어를 알아들으니까 자신들은 특별한 존재인 것처럼 느껴지는 지는 몰라도, 결국 이것은 성육신이 되지 못하고 탈육신이 된 유령의 복음을 생산하고 만다.

 

본문은 마스길이다. 잘 구성된 지혜의 시라는 뜻이다. 이 시는 기도이다. 전형적인 탄식의 기도이다. 다윗을 내세워, 기도를 구체화시킨다. 다윗이 사울의 칼날을 피해 엔게디 동굴에 숨어 있을 때,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라고 구체화시킨다. 이렇게 구체화시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사람들의 상상력을 더 자극시켜 줄 뿐 아니라, 자신의 삶에도 이 기도를 구체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도자는 소리 내어기도한다. 2절에서 토로라는 단어를 쓰는데영어로는 ‘pour out’이라는 단어를 쓰고, 구약성경적 의미는 전제를 말한다. 기도자는 소리 내어 기도를 하는데, 마치 전제를 붓듯이 하나님께 쏟아 놓는 것이다. 기도자의 기도는 그냥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아니라, 예배의 의미를 담은 기도인 것이다. 우리가 기도를 이렇게 전제를 붓듯이 하나님께 쏟아 놓을 때, 기도는 단순한 기도가 아니라 예배가 된다는 것을 알면 좋다.

 

기도자의 절망은 매우 깊다. 3절에 내 영이 내 속에서 상했다는 말은 히브리어의 아타프를 번역한 것인데, ‘아타프약해지다, 사라지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기도자는 그의 영, 즉 그의 삶을 지탱해주는 용기, 열정 등이 약해져서 사라졌다는 뜻이다. 이것만큼 절망이 없다. 사람은 몸이 힘들어서 죽지 않는다. 마음이 힘들어서 죽는다. 용기와 열정이 사라지면, 사람은 급격하게 약해진다.

 

기도자는 이렇게 부르짖는다. “오른쪽을 살펴보소서!” 유대인들에게 오른쪽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기도자는 자신의 절망적인 상황을 돌보아 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한다. 오른쪽은 법정에서 하나님이 가난한 사람을 변론하시기 위해서 서시는 자리이다. 가난한 자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스스로 도울 힘도 없고, 도움을 청할 여력도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그냥 억울하게 죽고 만다. 우리가 가난한 자 되기를 싫어해서 그렇지, 사실은 그래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도와주시니까!

 

기도자는 구체적으로 자신에게 세 가지의 도움의 손길이 없다고 호소한다. 첫째, 아무도 기도자를 아는 사람이 없다. 여기서 안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나카르관심을 가지고 지켜본다의 뜻이다. 기도자는 하나님께 호소한다.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 주셨으면 하고 간구한다.

 

둘째, 기도자에게는 아무런 피난처가 없다. 아무도 피난처를 제공해 주지 않는다. 적들이 죽이려고 쫓아오는데, 아무도 숨겨주는 이가 없다면, 죽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셋째, 기도자에게는 아무런 돌봄이 없다. 누구 하나 돌봐주는 사람이 없다. 매우 적막한 인생이다. 외로움에 죽을 것 같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기도자가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은 오직 하나님 때문이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하나님께서 기도자의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분깃이 되어 주시기 때문이다. ‘분깃은 여호수아서에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각 지파에게 땅 분배를 할 때 사용된 단어이다. 분깃은 분배받은 땅이라는 뜻이다. 분배받은 땅이 없다는 것은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는 뜻과 같다. 얼마나 절망적인 상황인지 모른다. 그러나, 기도자는 하나님이 자신의 분깃이라고 고백한다.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 될 수는 없을까? 우리는 하나님께 분깃을 달라고 요구하지, 하나님 자체가 분깃이라고 고백하지 못한다.

 

이 세상의 삶은 마치, ‘분깃을 차지하려고 혈안인 전쟁터 같다. 우리의 일상이 그렇다. 분깃을 차지하여, 생명을 보존하려고, 우리가 얼마나 힘들고 어렵게 살아가는가. 그러한 모습을 스스로 돌아볼 때, 자신이 괴물 같기도 하고, 초라하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이 나의 분깃이시라는 고백을 할 수만 있다면, 우리가 정말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될 수 있다면, 우리의 인생은 선하고 아름다울 것이다.

 

기도자는 탄식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분깃이 되어 주셔서, 생명을 보존해 주실 것을 믿는다. 기도자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욕망의 표출로 보면 안 된다. 하나님 잘 믿으면,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벌이는 분깃 전쟁에서 우리를 승리하게 하셔서,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잘 살게 해 주실 것이라는 욕망의 표출로 보면 안 된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이 나의 분깃이 되어 주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을 확신하고 믿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눈을 구체적인 삶의 현실로 돌려야 한다. 기도자가 탄식하고 있듯이, 이 세상에는 외롭고 쓸쓸하고 힘든 삶을 사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오클랜드 주유소 정차 중 만난 흑인 아저씨 이야기 다짜고짜 차를 닦아준 이야기 무슨 대가를 바라면서 한 건 아니지만, 끼니를 얻어보고자 한 최선의 행위 그래서 돈을 약간 건네 주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육신의 말씀이다. 우리가 그 말씀이 임한 성육신의 몸이 되어야 한다. 교회 공동체는 구성원들끼리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고 서로 지켜보아야 한다. 피난처가 되어 주어야 한다. 서로 돌봐 주어야 한다.

 

기도자가 고백하는 마지막 기도가 마음에 다가온다. “주께서 나에게 갚아 주시리니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7절). 의인들이 누구인가? 관심 가지고 지켜봐 주고 돌봐 주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내 주변에 전혀 없었는데, 그런 사람이 내 주변에 생긴 것 자체가 구원 아니겠는가. 의인은 쉬운 말로 하면, 좋은 사람들이다. 좋은 사람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다는 것, 좋은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는 것, 그것만큼 삶을 살아가는 데 든든한 언덕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의 삶에, 나를 둘러주는 좋은 사람이 많기를 바란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이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 든든한 언덕이 되기를 바란다.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 줄 때, 우리의 삶은 감사와 찬양이 넘치는 복된 삶이 되지 않겠는가. 말만 하지 말고, 말씀이 육신이 된 성육신의 삶,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주고 좋은 사람이 되어 주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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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Halloween is just around the corner

[할로윈]

 

할로윈 때가 되면 참 재밌는 현상이 벌어진다. 할로윈을 지키면 안 된다는 일부 기독교인들의 저항이 인터넷을 떠돈다. 마치 그들은 할로윈 때 나타나는 '유령/귀신'들 같다.

 

할로윈을 제대로 알자며, 그들이 내세우는 논리는 매우 조악하다. 켈트족의 문화를 운운하며, 할로윈이 마치 '인신제사'를 조장하는 양, 그래서 할로윈을 지키면 참된 기독교인이 아닌 양, 할로윈을 지키지 않는 것을 통해서 기독교의 정체성을 지켜내야 하는 양 떠든다.

 

나는 실로 궁금하다. 그렇게 조악한 논리로 할로윈을 통해 자신들의 기독교 정체성을 드러내고 싶은 '유령'같은 무리들이 누구인지를!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기독교 절기 중에서 가장 지키면 안 되는 절기는 성탄절과 부활절이다. 예수님이 언제 태어나셨는지, 알려진 바 없다. 예수님이 언제 부활하셨는지, 알려진 바 없다. 성경은 그저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와 부활 이야기를 '신앙고백적'으로 전할 뿐이다.

 

성탄절과 부활절은 기독교가 발전하면서 신학화 작업을 통해, 그리고 기독교가 뿌리내리고 있는 곳(로마/유럽)의 문화를 통해 제정되었을 뿐이다.

 

기독교의 복음은 성육신의 복음이지, 탈육신의 복음이 아니다. 기독교의 메시지는 언제나 그 시대와 그 지역의 문화에 성육신 할 수밖에 없다. 기독교의 메시지가 떠도는 유령이 되지 않게 하려면, 기독교의 메시지는 부단히 그 시대와 그 지역의 '일상의 언어'로 전달되어야 한다. 그 일상의 언어가 바로 문화이다.

 

할로윈이라고 하는 말 자체가 Saint Evening이라는 뜻을 이미 담고 있다. 그래서 기독교가 켈트족에게 전파되었을 때, 농사의 풍성한 결실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은 그들의 전통에 복음의 메시지가 담겼다. 그래서 농사의 성공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유령들(우상)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을 그들은 받아들였다.

 

만성절(All Saints Day)은 켈트족의 할로윈 문화를 통해 탄생했다. 켈트족의 할로윈 문화가 없었다면 물론 다른 문화를 통해서 만성절이 탄생할 수도 있었겠지만, 어쨌든 만성절은 켈트족의 문화를 통해 탄생되었다.

 

신화의 세계 속에 살았던 고대 사람들에게 농사를 짓고 그 풍성한 수확을 간절한 마음으로 기대하는 것은 당연한 마음이다. 아이를 임신한 뒤 순산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엄마의 마음과 다를 바 없다. 그러한 간절한 마음이 담긴 풍습이 할로윈이다.

 

21세기에 할로윈이 귀신을 물리치는 주술이라는 것을 믿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할로윈은 그저 자본에 이용당하고 있을 뿐이다. 할로윈 때 팔려나가는 할로윈 물품은 1조원이 넘는다. 실로 어마어마한 시장이다.

 

온갖 탐욕에 물들어 맘몬의 유혹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작금의 기독교가 할로윈을 '귀신의 축제'라며 거부하는 것은 실로 코미디 같은 현상이다. 할로윈의 이교도 풍습에 자신들의 간절한 마음을 담지 않겠다는 것일 뿐, 탐욕에 물든 기독교인들은 십자가를 바라보며 자신의 탐욕을 얼마나 채우려 기도하는가.

 

보수 개신교인들은 할로윈을 더욱더 폄하하기 바쁘다. 시장의 자유를 그토록 수호하기 위하여 사회의 보수세력과 야합을 일삼는 보수 개신교 세력이 할로윈을 거부하는 것은 정신분열적 행동일 뿐이다.

 

10 31일은 개신교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날이다. 만성절 전야제이기도 하지만, 종교개혁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복음을 일상의 언어로 바꾸는 작업이었다. 그래서 그는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까지 했다.

 

할로윈은 기독교인들이 지키면 큰 일 나는 마귀의 행사가 아니라, 기독교의 메시지를 '일상의 언어(문화)'로 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그 기회를 놓치고, 할로윈 문화를 배척만 한다면, 할로윈 문화를 즐기는 일반 대중은 자신들의 일상의 언어로 복음을 들을 기회를 또 상실하고 마는 것이다.

 

할로윈이 기독교 전통에서 기독교의 성인(Saint)을 기리는 날인 것을 안다면, 할로윈에 세상 사람들은 귀신 분장을 하여 '하하호호'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 기독교인들은 성경 속의 인물들(성인들) 복장을 하여 그들과 어울리며 복음을 전할 기회를 삼는 게 더 현명한 전략일 것이다.

 

할로윈(만성절) 11 1일인 이유는 히브리서 11 1~40절에 근거해서 만성절을 제정했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 장'으로 알려져 있으며, 거기에는 '믿음으로 살다간' 기독교의 수많은 '성인들'이 등장한다.

 

할로윈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서구 문명의 영향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은 할로윈의 파도를 피할 수 없다. 파도는 피해서 피해지는 게 아니라 타고 넘어야 피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삶의 자리에서 어떻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가. 일상의 언어를 사용하는가, 아니면 기독교인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은어를 사용하는가. 할로윈이 복음을 일상의 언어로 바꾸는 좋은 기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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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9. 10. 29. 05:42

종교개혁의 원리가 부어지기를 간구하는 기도

(출 1:15-2:10)


주님,

생명을 구원한 자가 누구인지 보게 하소서.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던 바로는 생명을 죽이려 했지만,

아무런 힘이 없던 산파들과 모세의 어머니, 그리고 바로의 딸,

즉 여인들은 생명을 살렸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

하나님의 사랑이

그 여인들에게 나타나

출애굽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종교개혁의 원리인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가

그 여인들의 삶에 구체적으로 나타나

하나님의 위대하신 일이 그들을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우리에게도 그 여인들에게 주셨던 신앙의 가치들을 부어 주셔서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위대하신 일들이 이루지게 하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10. 29. 05:38

여인들의 반란

(출애굽기 1:15-2:10)

 

종교개혁주일이다. 종교개혁주일은 우리 개신교인들에게는 참 특별한 날이다. ‘개혁을 했다는 말은, 살면서 뭔가 잘못된 것을 발견했다는 뜻이고, 뭔가 잘못된 것을 바로 잡기 위해서 노력했다는 뜻이고, 그 노력이 성공을 거두었다는 뜻이다. 서양사에서는 종교개혁Reformation’이라는 말이 굉장히 넓은 의미에서 쓰인다. 종교개혁은 단순히종교하나 만의 문제를 발견해서 개혁한 사건이 아니다. 중세의 삶에 전반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와 신앙의 문제만을 중심으로 종교개혁의 의미를 다루고자 한다.

 

종교개혁의 3대 원리는 오직 성경 sola scriptura”, “오직 믿음 sola fide”, 그리고 오직 은혜 sola gratia”이다.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에게는 이러한 개혁의 원리를 말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 맥락이 있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아주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었던 역사적 맥락은 없어지고, 우리에겐 위의 세 개의 개혁의 구호만 남았다. 다시 말해, 우리는 구호만 외칠 뿐, 그 구호가 담고 있는 개혁의 의미를 묻지 않고, 그 구호가 신앙을 규정해 주는 배타적 기준으로만 자리잡았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오직 성경을 외치지만, 살면서 삶에 어떠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우리의 삶을 가꾸어 나갈 때, 우리는 무엇을 통해서 삶의 문제를 해결할 지혜를 얻으며, 무엇을 삶을 가꾸어 나갈 자양분으로 삼는가? 직접적인 형태로 질문하면, 성경이 우리에게 어떠한 가치를 지니는가? 종이쪼가리에 불과한가, 아니면 우리의 생명을 살리는 생명책인가? 무엇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게 하는가?

 

또한, ‘오직 믿음을 외치면서, 우리는 정말 믿음 있는 자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가? 히브리서에 이르기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11:1-2)라고 말하고 있지만, 우리는 정말 우리의 삶의 원리를 믿음으로 삼고 있는가? 눈에 보이는 것에 일희일비하면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개혁은 구호가 아니라 현실이다. 개혁은 현실을 바꾸겠다는 의지이다. 개혁은 구호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이건 아닌 것 같아!’라고 하는 현실인식과 (생명)의 가치를 지켜내고자 하는 의지와 사명에서 비롯된 것이어야 한다. 그럴 때, 개혁은 성공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떠한 삶의 가치를 지니고 살아가는가? 다른 말로 표현해서, ‘왜 사는가?’ 우리는 삶의 가치를 모르고 방황하는 사람, 즉 왜 사는지 모르는 사람을 만나면, 한심한 표정으로 이렇게 묻는다. ‘왜 사니?’ 스티브 잡스 이야기를 해야겠다. 잡스는 굉장히 특이한 이력을 지닌 사람이다. 그는 자기가 세운 회사에서 해고를 경험했다. 그러다 다시 그 회사에 취직한다. 11년 만에 애플로 다시 돌아온 잡스는 직원들 앞에서 연설을 하며 자신의 핵심 가치, 회사의 핵심 가치에 대하여 이런 말을 한다. 애플의 핵심 가치는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내가 다니는 Fitness 센터(24hous Fitness)의 사명이 이렇다. 러닝머신 위에 있는 TV에 매일 같이 뜬다. “We are passionate to help people change their lives through fitness.” 나는 이 문구를 볼 때마다 많은 생각을 한다. 그들의 사명이 정말 맞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 내가 이렇게 열심히 운동하는 이유도 삶을 바꾸어 보려고 하는 것이니까. 그리고 목회자로서의 나의 사명, 교회의 사명에 대해서도 묵상한다. 뛰면서 묵상한다.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내려놓을 수 없는 엄청난 신앙의 가치가 있다. “신앙을 가지면 자기의 인생과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

 

본문은 신앙을 가진 이들의 믿음이 어떻게 세상을 바꾸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그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본문은 신앙이 있는 자, 다시 말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두려워한 자들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의 대결이 그려지고 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 자는 애굽의 지존 바로()였고, 하나님을 아는 자,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자는 힘 없는 여인들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힘 센 애굽의 왕(바로는 이름이 아니라, 애굽 왕의 칭호이다.)의 이름은 기록하지 않지만, 힘이 없던 여인들의 이름은 기록하고 있다. 우선 등장하는 여인들의 이름은 십브라와 부아(Shiphrah and Puah)’이다. 애굽 왕은 힘 없는 히브리 여인들이었던 산파 십브라와 부아에게 이렇게 명령한다. “너희는 히브리 여인이 아이 낳는 것을 도와줄 때에, 잘 살펴서, 낳은 아이가 아들이거든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 두어라!”(16).

 

한 나라의 왕에게서 이러한 명령을 받으면, 보통 사람 같으면 왕의 말을 두려워 하여 왕의 말을 따랐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기록하지 않는다. “그러나 산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으므로, 애굽 왕이 그들에게 명령한 대로 하지 않고, 남자 아이들을 살려 두었다”(17).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다른 누가 아닌 하나님이 쥐고 계신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 만을 두려워 하는 것! 애굽 왕은 자신이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고 생각하며, 갓 태어난 남자 아이들을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생명의 출산을 돕는 산파들은 생각이 달랐다.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것은 애굽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나는 남성이지만, 나는 자주 여성은 참 위대하다는 생각을 한다. 여성 산파들이 애굽 왕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 한 이유는 그들의 생명에 대한 원초적 경험 때문일 것이다. 아이를 열 달 동안 뱃속에서 키워 산고와 함께 생명을 잉태하는 여성이 갖는 생명의 경험과 그러한 경험을 전혀 하지 못하는 남자가 갖는 생명의 경험은 절대 같을 수 없다. 남자가 철이 없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물론 여성이 사회성이 부족한 이유는 군대를 안 갔다 와서 그렇다’,는 속설도 있다.) 여성들은 남자들보다 생명에 대한 책임 의식이 훨씬 높다. 그래서 생명을 돌보는 일에 대한 여성의 책임은 위대하다.


애굽 왕은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산파들을 불러 위협한다. “왜 내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려 주었느냐?”(18). 왕의 위협 앞에서도 여인들의 기지가 대단하다. “히브리 여인들은 이집트 여인들과 같지 않습니다. 그들은 기운이 좋아서,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도 전에 아기를 낳아 버립니다”(19). 자신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왕 앞에서도 이렇게 담대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그 산파들이 가졌던,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Fear of God)’ 때문이었다.


여기서 누가 생명을 보듬고 살리고 있는가? 스스로 힘이 있다고 생각한 애굽 왕이 생명을 보듬고 살리고 있는가? 아니다. 그는 오히려 생명을 헤치고 죽이려 했다. 생명을 보듬고 살리는 존재는 하나님을 두려워 한여인들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아주 중요한 사실을 발견한다. 이 이야기는 출애굽 역사에서 처음 등장하는 이야기이다. 출애굽의 위대한 역사, 구원의 위대한 역사는 어디에서부터 시작하는가? 하나님의 위대한 일은 어디에서부터 시작하는가? 여인들의 믿음,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그 신앙에서부터 시작한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애굽 왕에 대한 여인들의 반란을 이끌어낸다.

 

애굽 왕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여, 생명을 보듬고 지켜낸 산파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떠한 은혜를 내리시는지 보라.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니라 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번성하게 하신지라”(20-21). 여기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번성하게 하셨다고 할 때, ‘그들의 집안은 영어로 ‘the house of the mother’이다. 우리는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이상한 속담이 있는 문화를 가지고 있지만, 성경은 완전히 다른 말을 한다. 그들의 집안이 잘 된 것은, 그들의 어머니 때문이었다! 아버지 때문이 아니었다. 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어머니 때문에 잘 되는 집안, 여성들 때문에 잘 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우리는 본문에서 또다른 여인을 본다. 그의 이름은 요게벳이다. 히브리 여인들이 가진 믿음은 요게벳에게서 절정을 이룬다. 산파들은 아이를 낳은 경험이 있는 중년의 여성들이었겠지만, 임신한 요게벳의 나이가 얼마나 되었겠는가. 산파들에게는 삶의, 그리고 신앙의 연륜이 있었겠지만, 요게벳은 그러한 것이 별로 없는 젊은 여성이었다. 그러나, 요게벳 또한 산파들과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신앙을 가진 히브리 여인이었다.

 

그도 아들을 낳으면 죽이라는 애굽 왕의 명령을 거부한다. 그리고 세 달 동안이나 살려 두고 아기를 감춘다. 그러나 더 이상 아기를 감출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무시무시한 결단을 한다. “아기를 위하여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 가에 떠나 보낸다. 이것은 아기를 죽음에 내모는 행위가 아니다. 이것은 아기의 생명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는 행위다. 본인이 데리고 있으면 아기는 죽게 되겠지만, 하나님께 맡기면 살게 되리라는 믿음에서 온 결단의 행위이다.

 

신앙은 하나님께 맡기는 일이다. 인간의 가장 큰 죄는 하나님께 맡기지 않고, 자기가 자기의 생명을 돌보려는 의지이다. 부모의 가장 큰 죄는 자식을 하나님께 맡기지 않고, 자신이 자식을 좌지우지 해보겠다고 하는 의지다.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보지 못한다.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보지 못하니, 신앙은 점점 수그러들고, 삶의 고민만 늘어가는 것 아닌가.

 

요게벳의 믿음이 어떻게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경험하게 이끄는지 보라. 본문에는 또 한 명의 여인이 등장하는데, 그녀는 바로의 딸(하젭수트 / 성경에는 그녀의 이름이 나오지 않지만 이집트 문헌을 통해 학자들이 밝혀낸 이름이다.)이다. 바로의 딸은 누구보다도 애굽 왕의 명령을 준행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나일강에 발견한 히브리 남자 아기를 죽이지 않고, ‘건져내어살린다. 성경은 그 상황을 이렇게 기록한다. “바로의 딸이 나일 강 가를 거닐 때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열고 그 아기를 보니 아기가 우는지라 그가 그를 불쌍히 여겨 이르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기로다”(5-6).

 

히브리 사람의 아기인 것을 알았다면, 상식적으로 바로의 딸은 그 아기를 죽였어야 한다. 그러나, 그 아기를 보았을 때 바로의 딸의 마음은 강팍해진 것이 아니라, ‘불쌍히 여겼. 이것은 요게벳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요게벳이 어떻게 바로의 딸의 마음을 조절할 수 있나. 바로의 딸의 마음을 강팍하게 하지 않으시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들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일이다!

 

세상을 바꾼 일, 출애굽의 위대한 역사는 이렇게 힘없는 여인들에게서 시작된 것이다. 힘이 세상을 바꾸는 게 아니라, 여인들이 보여주고 있는 신앙이 세상을 바꾼다.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가치이다. 여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다른 무엇을 두려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마음을 가질 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신앙)은 우리에게 용기를 주고 담대함을 주고, 지혜를 주고, 무엇보다, 하나님께 우리의 삶과 생명 자체를 맡길 수 있는 믿음(보이지 않지만, 어떻게 될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을 준다. 바로 그 믿음이 세상을 바꾼다.

 

나는 이 이야기가 종교개혁의 가치인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를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구현한 개혁이라고 생각한다. 1) 산파들은 오직 성경의 가치를 구현했다. 그들은 애굽 왕의 말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했다. 2) 요게벳은 오직 믿음의 가치를 구현했다. 요게벳은 아기를 나일강에 띄우면 어떻게 될지 몰랐지만, 아기를 하나님께 온전히 맡겼다. 3) 바로의 딸은 오직 은혜의 가치를 구현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바로의 딸은 아기를 죽이지 않고 살렸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아기 모세는 물에서 건져냄의 은혜를 입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권했다.

 

우리는 신앙의 가치를 믿는 그리스도인이다. 우리는 신앙이 나와 세상을 변화시킨다고 믿는다. 오직 성경!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을,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 하라! 오직 믿음! 하나님께 맡기라! 오직 은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신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가진 신앙의 가치를 힘써 지켜 나가자. 하나님은 힘을 가진 자들을 통해서 당신의 나라를 세워 가시는 게 아니라, 신앙을 가진 자들을 통해서 당신의 나라를 세워 가신다. 신앙이 세상을 변화시킨다! 포기할 수 없는 우리의 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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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9. 10. 26. 02:55

순례자가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

(시편 121:1-8)

 

주님,

인생의 여정에서 주님이 보내주신 이들로부터

위로와 평안을 받게 하시고,

더 나아가,

나 자신이 누군에게 위로와 평안을 주는,

주의 복된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10. 26. 02:52

순례자를 위한 노래

(시편 121:1-8) 

 

시편 120-134편의 열 다섯개의 시편은 순례 시편이라고 부른다. 한 사람이 순례를 떠나는 이유는 120편에 나오는데, 그는 고달픈 삶에 지쳐 있어, 순례를 떠나 하나님을 만나 삶의 평안을 회복하고 싶어한다. 특별히 120편은 그 사람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는지를 보여준다. 사람들 때문에 마음 속에 큰 생채기 생기고 가시가 생겼다. 평화(샬롬) 가운데 살고 싶었으나,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샬롬을 잃어버린 그 사람은 순례를 통해 잃어버린 평화(샬롬)을 회복하고 싶어한다.

 

우리의 인생이 그렇다. 우리 모두는 고달픈 인생을 살고 있다. 삶이 고달프다고 손쉽게 생명을 놓을 수는 없다.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평화를 갈망하고 이룰 때 우리는 고달픈 인생을 이겨내며 앞으로 전진할 수 있다. 인생을 그냥 흘러가듯이 사는 사람과, 고달픈 인생이지만 인생을 순례라고 보며 인생의 길을 가는 사람의 인생은 같을 수 없다. 우리는 순례를 떠난다. 무엇보다, 하루하루, 하나님을 만나면, 그리고 그 길 가운데서 복 있는 사람을 만나면, 그래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평화를 이루면, 우리의 삶은 복된 삶이 될 것이다.

 

시편 121편은 혼자서 부른 노래가 아니다. 적어도 두 사람 이상이 주고 받는 노래이다. 순례자가 순례를 떠날 때, 어떤 다른 이가 그의 순례의 길을 축복해 주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제 순례자는 여장을 꾸리고 순례를 떠난다. 그는 순례의 여정을 시작하며 눈을 들어 앞에 있는 산을 바라본다. 대개 그 산은 하나님이 계신 시온산’, 예루살렘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가 눈을 들어 산을 바라보는 이유는 순례의 길을 가는 동안, 삶의 여정 가운데 도움(에제르)’를 찾기 위함이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1-2).

 

3절에서 시점이 바뀐다. 도움을 찾는 순례자에게 축복하는 또다른 사람이 등장한다. 순례를 나선 이에게 따뜻한 격려와 축복의 메시지를 건네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축복이다. 120편에서 말했듯이, 이 순례자는 삶의 자리에서 사람들 때문에 평화(샬롬)을 잃어버린 사람이다. 삶의 상처가 많은 사람이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에게 따뜻한 위로와 축복의 메시지를 건네줄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순례자에게 위로와 평안이 되기에 충분하다.

 

사람들 사이에서 받은 상처는 사람들 사이에서 치유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치유가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나 자신이 누군가에게 위로와 축복의 메시지를 건네 줄 수 있는 복 있는 사람이 되는 것도 중요하고, 위로와 평안이 있는 공동체를 세워 나가는 것도 중요하다. 순례의 길 가운데, 인생의 길 가운데 위로와 평안을 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 자신이 그러한 사람이 되는 것은 더 중요하다. 위로와 평안을 받는 자보다, 위로와 평안을 주는 자에게 더 큰 복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좋다. 주님, 인생의 여정에서 주님이 보내주신 이들로부터 위로와 평안을 받게 하시고, 더 나아가, 나 자신이 누군에게 위로와 평안을 주는, 주의 복된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순례자의 기도)

 

5-8절은 순례자를 향한 격려와 축복이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다. 언제나 축복은 구체적이어야 한다. 가장 중심이 되는 구절은 여호와께서 너를 지키신다는 선언이다. 그러면, 무엇으로부터 지켜 주시길 바라는 것일까? ‘무엇7절에 나오는 것처럼, ‘모든 환란’, 온갖 불행(-라아)’이다. 복을 빌어주는 사람은 순례자가 그 여정 가운데 만날 수 있는 온갖 불행으로부터 지켜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의 기도를 드리고 있다.

 

첫째, 하나님의 지키심은 그늘과 같다. 이것은 낮의 해와 상반되는 개념이다. 유대땅은 매우 건조하다. 건조한 기후를 일으키는 낮의 해는 사람의 목숨까지도 앗아갈 수 있다. 그래서 그늘이 매우 중요하다. 엘리야도 이세벨을 피해 도망치다가 로뎀나무 그늘에 앉아서 쉬었다. 로뎀나무는 별로 크지 않다. 아주 작은 그늘을 만들어 제공할 뿐이다. 그러나 건조한 사막 기후에서는 그 그늘이 사람의 생명을 건진다. 크고 시원한 그늘이 아닐지라도, 생명을 건질 수 있는 작은 그늘에도 감사하는 순례자의 모습을 본다.

 

둘째, 하나님의 지키심은 오른쪽에서 동행하시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오른쪽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되, 오른쪽에서 구원하시고, 오른손으로 구원하신다. 여기서 오른쪽에서 동행한다는 뜻은 적을 물리치는 든든한 수호자를 뜻하는 동시에, ‘법정 변호인을 뜻한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우리를 해하려는 수많은 적을 만난다. 그리고 억울한 누명을 쓰기도 한다. 그럴 때, 하나님은 오른쪽에 동행하시며 우리를 구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메타포적으로, 시시때때로 우리의 오른편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동행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 지금 제 오른쪽에 나와 함께 동행하시지요?”

 

셋째, 낮의 해와 반대되는 표현은 밤의 달이다. 그 당시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달 신이 사람들에게 재앙과 열병을 가져다 준다고 생각했다. 재앙이나 병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이 주는 벌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더 이상 재앙과 병을 신이 주는 벌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현듯 찾아오는 재앙과 병을 예측하거나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우리는 재앙과 병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오른편에서 동행하시며, 불현듯 찾아올지 모르는 재앙과 병을 막아달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지키심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너의 출입은 공간적 개념이고, ‘지금부터 영원까지는 시간적 개념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고백하는 신앙 위에서 베푸는 축복의 선언이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지키신다. 지켜주시는 특정한 장소와 특정한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존재하는 모든 공간과 모든 시간에 함께 하시며 우리를 지켜주신다.

 

이러한 축복의 말씀을 들으며 순례를 떠나는 순례자의 마음이 얼마나 든든했겠는가. 그리고 그는 이 축복의 말씀을 얼마나 간절하게 마음에 새겼겠는가. 이 축복은 매우 구체적인 축복이다. 우리도 우리의 삶의 여정 가운데, 구체적으로 필요한 하나님의 지키심이 있다. 그러한 것들을 위해서 서로 구체적으로 축복하며 순례의 길을 가는, 복 있는 순례자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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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감사한 뉴스

 

미국에서는 원래 이번주부터 합법적 거주를 원하지만 국가 재정에 부담을 주는 이민자들에 대한 합법적 거주를 거부할 수 있는 행정령을 시행하려 했다. 그러나 지난 주 미국 법원에서 트럼프 행정부의 그러한 행정령에 제동을 걸었다. 다행히도 합법적 거주를 원하는, 그러나 국가 재정에 부담을 줄 수 있는 이민자들이 강제로 쫓겨나는 일이 없게 되었다.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트럼프 행정부는 합법적 거주를 원하지만 그들이 합법적으로 거주를 할 경우 국가 재정에 부담을 주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는 사람들을 쫓아내기 위한 논리로 다음과 같은 주장을 내세운다. “The Trump administration said expanding the list of services that would disqualify a person would help guarantee that the immigrants granted residency are self-sufficient. 트럼프 행정부는 자격을 박탈할 수 있는 공공 서비스 목록을 늘리는 것은 거주를 허가 받은 이민자들이 자급자족할 수 있음을 보장하는 것을 도와줄 것이라고 전했습니다”(AP News).

 

트럼프 정부의 논리는 완전히 기득권의 논리이다. 그리고 이민자들끼리 서로를 적지게 만드는 화법을 구사한다. 예를 들어, 현재 저소득층에게 부여되고 있는 ‘medi-cal’ 서비스(공공의료서비스)에 대한 지급을 허가 받은 이민자들에게만 제공하면, 그들의 의료서비스가 더 좋아질 거라는 논리이다. 어떻게 보면 솔깃한 제안이지만, 조금 생각해 보면, 법적인 보호 망 안에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은 인간 취급하지 않는 악한 생각이다.

 

미국은 이민자의 나라이다. 미국만큼 이민자에게 문호를 활짝 개방하는 나라도 드물다. 그러나 요즘 미국은 매우 보수적인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국가 재정의 부담 때문이다. 국가 재정의 부담 중 하나는 불법 이민자에 대한 복지와 합법적 거주를 희망하고, 합법적으로 체류하고 있지만 국가 재정에 부담을 주는 방식으로 체류하는 사람들이라고 트럼프 정부는 생각한다.

 

이 논리가 기득권자들에게는 먹히는 전략일 수 있다. 그리고 이민자들의 분열을 획책할 수 있는 논리이기도 하다. 사회적 기반과 재정 기반이 약한 이민자들의 미국에서의 삶은 고단할 수밖에 없다. a민자들에게는 경제적 고통이 늘 따른다. 그러나 트럼프 정부의 그러한 논리와 정책은 기반을 어느 정도 잡은 이민자들과 이제 기반을 잡아가는 저소득층 이민자들 사이에 골이 생기게 하고, 결국 저소득층 이민자들의 삶의 터전을 완전히 빼앗아버리는 잔인한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국가 재정을 축 내는 너희들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더 힘든 거야! 너희들만 없으면 우리의 삶을 좀 더 풍요롭고 행복할 텐데! 그러니 너희들에게는 더 이상 복지 혜택의 기회를 줄 수 없어!’ 이 얼마나 잔인한 말인가.

 

누군가를 희생시켜 내 삶이 좀 더 풍요롭고 행복해진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러한 풍요로움과 행복은 눈 먼 풍요로움과 행복일 수밖에 없다. 남의 고통에 눈감고, 그들을 딛고 올라선 풍요로움과 행복은 불의 그 자체다.

 

우리는 자신의 것을 좀 더 내려놓고, 더불어 풍요롭고 행복할 수 있는 사회를 꿈꿔야 한다. 인간의 야만성의 발효는 처음엔 자기 자신을 살리는 좋은 방편 같지만, 결국 어느 순간에 그 야만성은 자기 자신을 향하는 무서운 발톱이 된다. 조금이라도 더 강한 자가 조금이라도 더 약한 자를 밟고 올라서 쟁취한 풍요와 행복은 아무런 삶의 의미를 주지 못한다. 남의 것을 빼앗아 풍요와 행복을 누리는 것보다 자신의 것을 내어주며 함께 풍요롭고 행복한 삶이 의미 있는 삶이고, 그것도 어렵다면 그냥 함께 굶어 죽는 것이 오히려 아름다운 삶이다.

 

트럼프 정부의 정책에 제동을 건 미국 법원은 이렇게 말했다. “But the judge says the changes would immediately put migrants who followed the law at risk for economic insecurity, health instability, denial of citizenship, and potential deportation. 하지만 판사는 이러한 변화들은 법을 따른 이민자들을 경제적 불안정, 건강상 불안정, 시민권 거부와 잠재적 국외 추방의 위험에 곧바로 처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AP News). 트럼프 정부의 잘못된 정책과 인간의 야만성을 잠재운 미국 사법부에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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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한나 아렌트와 교회론

 

플라톤은 정치철학 분야에 있어 기여한 바가 크다. 그의 책 <국가>는 정치철학 분야에서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이다. 거기에 플라톤은 '철인왕의 통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철인(철학을 하는 사람)이 국가를 통치해야 하는 이유는 철인이야 말로 진리의 원형인 이데아의 세계를 인식한 자이기 때문에, 진리의 정치를 펼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플라톤의 이러한 생각을 비판한다. 그가 정치의 본질을 간과하고 진리의 정치를 주장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렌트가 말하는 정치의 본질은 정치란 진리 실현의 장이 아니라 인간 복수성(아렌트의 용어다)에 기반을 둔 다양한 의견의 각축장이라고 말한다.

 

아렌트가 플라톤의 진리의 정치에 맞서 제시하는 정치 개념은 '의견의 정치'. 아렌트에 의하면 의견이란 자신이 처한 삶의 환경과 고유한 처지를 따라 형성된 것이다. 인간의 복수성에 따라 인간은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존재이고 정치란 각 사람의 의견을 모아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어떤 것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아렌트가 가장 비판하는 내용은 '진리주장의 폭력성'이다. 그녀는 현실 정치에서 진리를 적용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현실 정치에 진리를 적용하면 폭력만이 발생할 뿐이라고 말한다. 현실에서 진리를 완전히 파악하고 알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대개 교회를 '진리 실현의 장'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주로 목회자들에게서 그러한 생각이 만연하다. 마침 그러한 성경구절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14:6)는 말씀과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8:32)는 말씀이 대표적이다. 이런 말씀에 근거해 교회는 자기의 정체성을 '진리 실현의 장'으로 여길 가능성이 크다.

 

아렌트는 철인왕이 진리의 이름으로 국민들을 길들이려고 노력하고, 그러다 보면 거기에 폭력이 나타날 개연성이 높다고 비판한다. 진리의 정치가 작용하면 지도자와 일반 시민들 사이에 지배자와 피지배가 관계가 형성될 뿐 아니라, 수직적 위계질서가 생겨나기 쉽다는 것이다. 이러한 위험성은 자신을 '진리 실현의 장'이라고 인식한 교회에서 발생할 가능성이 너무 높다. 목회자는 스스로를 '철인왕'으로 생각할 여지가 높다.

 

진리의 정치의 이러한 위험성을 안다면, 그리고 인간의 복수성의 중요성을 안다면, 교회는 자신의 정체성을 '진리 실현의 장'으로 두지 말고, '의견 정치의 장'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목회자는 자신을 철인왕(또는 믿음왕)으로 자리매김할 것이 아니라,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산파'로 인식하는 게 좋다. 그래서 목회자는 교회 구성원 모두가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도록 도와 진리를 발견하게 하고, 각자의 의견의 민주적 교환을 통해 가장 진리에 가까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 나가는 '의견의 정치'를 실현하는 게 좋다.

 

그러나 대개 교회와 교회의 지도자(목회자) '의견의 정치'를 꺼려한다. 의견의 정치는 필연적으로 시끄러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가 시끄럽지 않고 질서 있게 조용히 운영되는 것은 교인들의 바람이라기 보다 교회 지도자(목회자)의 바람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침묵이 강요될 때가 많다. 교회를 시끄럽게 하면 사탄의 하수인으로 몰려 어려움을 당할 뿐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의견의 정치'가 좋은 것만은 아니다. 의견의 정치를 실현하려면 덕을 갖춘 시민성을 견지해야 하는 것처럼, 교회에서 의견의 정치가 실현되려면 교회의 구성원 모두가 '그리스도의 덕'을 갖춘 성숙한 교인이 되어야 한다. 그런 성숙함이 없는 상태에서 자신들의 의견만 개진하려 든다면, 오히려 '진리의 정치'를 펼치는 것만 못하게 교회 공동체가 산으로 갈 수 있다.

 

그래서 교회 구성원은 자신의 의견을 민주적으로 개진하며 서로의 의견을 존중할 줄 아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른'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해야 한다. 그렇게 교회 공동체를 성숙하게 세워갈 수 있다면, 그 교회 공동체는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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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9. 10. 22. 02:21

베드로의 증언에 긴박한 마음을 갖게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

(사도행전 2:22~41)

 

주님,

그들은 예수가 누구인지를 몰라보고

그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증언과 같이

예수는 주와 그리스도였습니다.

주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그들은

그 사실을 깨닫고 안절부절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물었습니다. “우리가 어찌할꼬?”

예수가 누구인지 모르는 자는

그들과 똑같이 오늘도 예수를 부인하며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일 것입니다.

마치 왕이 없는 자들과 같이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는 분임을 깨닫고

그의 주 되심과 그리스도 되심을 믿게 된다면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예수의 사건과 함께 임하신 새로운 창조의 세계,

종말을 살아가는 믿음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주여,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 주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10. 22. 02:18

우리가 어찌할꼬

(사도행전 2:22~41)

 

요즘은 카카오톡 안 쓰는 사람이 거의 없다. 문맹률이 낮고, 스마트폰(컴퓨터) 보급률이 높기 때문이다. 문자가 개발되지 않았다면 근본적으로 이러한 활동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문자만큼 소통하기에 편리한 것이 없다. 그런데, 문자는 인간의 생각과 감정을 모두 담아낼 수 있지는 못하다. 그게 문자의 한계다. 가령, 카톡을 할 때 문자로 미묘하고 깊은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다 담아내기 힘들다. 그래서 개발된 것이 이모티콘이다. 이모티콘은 문자의 그러한 한계를 어느 정도 극복하게 끔 도와준다.

 

문자를 통해 의사소통을 할 때, 이모티콘을 적극 활용하는 게 좋다. 왜냐하면, 문자는 보낸 이의 감정보다는 받는 이의 감정이 더 쉽게 개입되기 때문이다. 문자 소통 방법은 문자를 보낸 이의 감정과 상관없이, 받는 이의 감정에 따라 문자가 해석될 여지가 너무 높다. 그래서 보내는 이는 자신의 감정을 좀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이모티콘을 활용하면 좋다. 그래야 문자 소통이 가진 한계를 극복하며 소통에서 생기는 불필요한 오해를 피할 수 있다.

 

성경은 문자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다고 성경 문자에 이모티콘이 들어가 있어서 그 문장이 담고 있는 감정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일례로, 본문에서 베드로의 설교가 끝난 직후 그의 설교를 들은 예루살렘의 거류민들(유대인들)이 한 말을 적은 우리가 어찌할꼬의 문자에서 우리는 어떠한 감정이 느껴지는가? ‘뭐 어쩌라고?’의 감정이 느껴지는가? 아니면,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의 질문처럼 느껴지는가? 아니면, 급박함이 느껴지는가? 문자 소통은 화자보다는 청자의 입장에서 해석될 여지가 너무 많다.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상상력은 매우 중요하다. 상상력은 완전히 다른 세상을 구성한다. 인간이 지금 이렇게 동물과 차원이 다른 문명 세계를 이룰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상상력때문이다. 그 가장 큰 두 가지의 예가 국가와 돈에 대한 상상력이다. 상상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 때문에 국가의 개념이 탄생한 것이다. 국가와 돈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들은 개념적인, 상상적인 존재들이다. 그러나 인간은 국가를 실재처럼 상상하고, 돈을 실재처럼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국가를 이루고, 돈을 모으기 위해서 생명을 바친다. 굉장히 기이한 현상이다.

 

이러한 인간의 놀라운 상상력을 발휘하여 본인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것을 동의한 유대인들이라고 상상하며 말씀을 들어보라. 만약 여러분이 그러한 상상을 적극적으로 할 수 있다면, 베드로의 증언(설교)을 듣고 나면 어떤 마음이 들까?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도, 입에서 우리가 어찌할꼬라는 질문이 동일하게 나올 것이다. 왜 그런가?

 

본문은 성령강림 사건 이후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을 상대로 행한 증언(설교)이다. (설교는 태생적으로 증언이다.) 예루살렘의 주민 뿐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온 사람들은 예수를 따르던 자들(그리스도인)’에게 발생한 이상한 현상을 목격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 현상을 보면서 이렇게 물었다. “이 어찌된 일이냐?”(2:12). 이에 대해 베드로는 열한 사도와 서서 이 일이 어찌된 일인지, 무엇을 의미하는지 사람들 앞에서 증언(설교)을 한다.

 

베드로가 증언(설교)을 위하여 인용하는 성경은 요엘서이다. 요엘서는 말세(종말)’에 대한 예언을 다루는 선지서이다. 요엘 선지자는 종말에 벌어질 일들에 대하여 말한다. 종말에는 하나님의 영(성령)이 모든 육체에 부어지고, 하늘과 땅에 어떠한 기사와 징조들이 나타나고, 사람들이 참된 구원을 경험하게 된다. 베드로의 증언의 핵심은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 승천을 종말론적 현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의 사건은 종말의 시간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 안으로 침투해 들어온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깨달음이고 생각의 전환이다.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도는 줄 알았는데 거꾸로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사고의 전환을 코페르니쿠스적 사고의 전환(혁명)’이라고 부른다. 베드로는 지금 그보다 더 충격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다. 예수의 사건은 시간의 질의 근본적인 변화이다. 종말이 이 시간으로 침투해 들어왔다. 우리는 더 이상 그냥 시간을 살지 않고, 종말의 시간을 산다.

 

종말의 시간이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새롭게 한 새 창조의 시간이다. (종말은 멸망의 시간이 아니다. 심판은 존재를 새롭게 하기 위한 과정이지, 존재를 괴롭히는 멸망의 시간이 아니다.) 그 시간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더 이상 사망이 왕 노릇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부활은 하나님이 전 우주에 통치권을 행사하고 있는 사망을 무력화시킨 사건이다. 더불어 예수가 누구인지 드러나는 사건이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는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다!

 

베드로는 이 일을 다윗이 예언자로서 증언했다고 논증한다. 그 논증을 위해 쓰인 말씀은 시편 16편의 말씀이다. 베드로가 인용하고 있는 시편 16편의 말씀을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면, 다윗은 고백하기를,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하게 살리니,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9-10)라고 한다. 베드로는 이 부분이 다윗의 예언이라고 말한다.

 

다윗이 이렇게 고백했지만, 그의 고백대로 이 말씀이 이루어진 게 아니다. 이 말씀대로라면 다윗은 죽지 않아야 한다. 다윗은 죽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 말씀이 다윗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의 거룩한 자에 대한 예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 거룩한 자당신으로부터 은총을 받은 자(하씨드카)’라는 뜻이다. 또한 여기서 은총은 문맥상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몸과 영혼을 분리해 두지 않는 것을 말한다. 베드로는 지금 증언한다. 하나님께 그 은총을 받은 자, 주의 거룩한 자가 바로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증언(설교)를 통해서 예수의 부활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밝힌다. 첫째, 부활은 그리스도의 주 되심이 드러난 사건이라고 말한다. 둘째, 부활을 통해 성령이 오셨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이 오셨다는 것, 지금 오순절 아침에 여러분이 본 사건(광경),은 하나님이 여러분이 십자가에 위에서 죽인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셔서 자신의 우편에 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는 하나님에게서 성령을 받아, 모든 육체, 모든 만민에게 부어주셨다!” 이게 바로 요엘서와 시편에 예언된 것이 이루어진 하나님의 큰 일이라는 것이다. 성령이 오신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 및 그의 주 되심의 사건에 대한 증거이다.

 

,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처음 시작할 때, 주문했다. 자신을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는 것을 동의한 유대인이라고 상상해 보라고. 그러므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 때 동의했던, 또는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았던 청중들이 깨달아야 하는 사실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제 하나님의 대적자가 되었다! 그들이 주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으니, 그들은 큰 일 난 것이다.

 

이것은 복음서에서 말하는 포도원 농부의 비유(마태복음 21:33-40)와 같다.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포도원 품꾼의 비유(마태복음 20:1-16)과 헷갈려서는 안된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는 천국이 무엇인지를 비유를 설명하신 것이고, 포도원 농부의 비유는 유대 지도자들과의 권위 논쟁을 할 때 하신 비유다. 유대 지도자들은 자신의 권위를 우선시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다. 그런데,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통해서 그들이 행한 일이 어떤 일인지 낱낱이 드러난다.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그것들을 농부들에게 주고 떠났다. 시간이 지나 주인은 농부들에게 포도 열매를 얻으려고 사람을 보냈다. 처음에는 종을 보냈다. 그런데 그들은 종을 잡아 죽였다. 그렇게 몇 번을 주인은 종들을 보내 포도 열매를 얻으려 하지만, 농부들은 그 종들을 다 죽인다. 그러자 주인은 마음을 바꾸어 자신의 아들을 농부들에게 보낸다. 그런데 농부들은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라고 말한 뒤, 주인의 아들도 포도원 밖으로 내쫓아 죽여버린다. 이 이야기를 마치며 이런 질문이 뒤따른다.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은 어떻게 하겠느냐?” 여러분이 주인의 아들을 죽인 농부들이고, 마침내 주인이 포도원을 찾았을 때, 여러분은 어떠한 반응을 보이겠는가?

 

베드로의 증언(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은 이렇게 반응했다. “우리가 어찌할꼬?” 이 말이 어떻게 다가오는가? ‘뭐 어쩌라고고 다가오는가? 정말 어떻게 해야 하는 지모르는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의 질문처럼 다가오는가? 아니면, ‘아 큰 일 났구나. 우리는 이제 죽었구나. 망했구나.’라는 탄식이 섞인 급박함으로 다가오는가? 이러한 급박함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예수의 사건이 여전히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사건이 자신의 생명을 구원하는 차원이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급박하여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묻는 이들에게 베드로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38). 이것은 대단한 역전이다. 무지 가운데서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께 이렇게 기도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23:34)), 자신들이 죽인 바로 그 예수가 자신의 구원자라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성경이 쓰여진 이유는 바로 예수의 사건을 소상히 보면서 우리에게도 무지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그들이 사도들의 증언을 듣고 우리가 어찌할꼬?”의 급박한 질문을 던졌던 것과 동일한 질문을 던지게 끔 하기 위해서이다. 성경의 증언을 통하여, 또는 그 증언을 동일하게 전하는 설교자의 증언을 통하여 우리가 어찌할꼬?”의 긴박한 마음을 가지게 된 분들에게 구원의 길을 알려주려 한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그리고 사망 권세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 받은 자 답게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라. 죽음이 두려워 불의와 타협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죽음이 우리를 어쩌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불의와 맞서 싸우는 삶을 살라. 그러다 죽어도 괜찮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하게 성령의 능력 안에서 부활하게 될 테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은 정말 세상이 감당할 수 없다. 난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너무도 기쁘고 감사하다. 이렇게 멋진 삶을 살게 해 주신 주님께 영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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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실리콘밸리의 철학

 

나는 실리콘밸리의 주민이다. 실리콘밸리는 전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를 몰고다니는 지역이다. 최첨단 과학이 발생하고 적용되는 지역이다. 그렇다 보니, 실리콘밸리 지역에 와 보지 않은 사람들은 이곳이 뉴욕의 맨하튼처럼 화려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이곳은 전혀 그렇지 않다. 조금 발달된 시골일 뿐이다. 게다가 풍경이 삭막하기까지 하다. 민둥산과 개발되지 않은 해변(샌프란시스코만)에 둘려쌓여 있다. 곳곳에 말과 소들이 풀을 뜯고 있다. 그래서 이곳에 처음 온 사람은 묻는다. '실리콘밸리가 어디에요?'

 

이곳은 전세계의 모든 자본과 인재가 집약적으로 모여 있는 곳이다. 전세계에서 창업하기 가장 좋은 도시로 꼽힌다. 인구 10만명 당 박사학위 소지자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이다. 자연스럽게 이곳은 교육열이 매우 높다. 경쟁이 극심하다. 한국은 한국인들끼리 경쟁하고 있지만, 이곳의 한국인 2세들은 중국, 인도, 타이완, 베트남 등 아시아와 유럽, 남미의 전세계에서 온 수재들의 2세와 경쟁을 한다. 일례로, 우리 아이가 다니는 학교의 한 한급에는 대략 30명 정도의 학생이 있는데, 다국적 학급일 뿐 아니라, 30명 중에 10명이 ' A'를 받는다. B 하나만 있어도 10등 밖으로 밀려난다.

 

이곳의 아이들은 초등학생 때부터 경쟁에 치인다. 큰 아이 초등학교 졸업식 때 대표 연설한 중국 아이는 자기의 꿈을 당당하게 말하며, 아이비리그에 들어가서 공부한 뒤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 아이의 나이는 이제 12살 밖에 안 됐는데, 그런 말을 한다. 우리 아이도 가장 닮고 싶은 인물이 '앨런 머스크'라고 말한다. 테슬라 자동차 본사는 우리 교회 바로 옆에 있다.

 

이곳은 젊은 인재들이 몰려 있다. 그래서 도시가 활기차다. 사람들이 너무 몰려들어 집값이 매우 높고(대략 방 두개 짜리 아파트 렌트비가 3000~4000불 한다), 교통체증이 심하다. 도로에서는 매일 같이 사고가 난다. 트래픽이 심한 시간에는 돌아다닐 엄두가 안 난다.

 

이러한 실리콘밸리에는 어떠한 철학이 있을까? 바로 ''이다. 돈이 곧 철학이다. 실리콘밸리는 자본주의의 핵심지역이다. 이 지역만 따로 떼서 보면, 세계 경제 11위이다. 이 작은 지역만으로도 세계 경제의 11위에 오른다니, 이곳에 얼마나 많은 돈(자본)이 몰려 있는지 알 수 있다.

 

요즘 실리콘밸리의 뜨거운 이슈는 'AI 인공지능'이다. 실리콘밸리에서 인공지능을 개발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이 되기 때문이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좀 더 들여다 보면 굉장히 무서운 이야기이다.

 

자본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장'이다. 신자유주의는 '인간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의 자유'를 말한다. 신자유주의의 모든 법과 규제는 시장의 무한한 확장을 보장하는 법과 규제이다. 옛날에는 무역장벽이 있어 시장 확대가 어려웠지만, 지금은 무역장벽이 모두 허물어져서 기업들은 자신들의 시장을 개척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

 

AI의 개발은 시장의 영역을 공간을 넘어 인간의 정신 영역으로 확장한다. 일례로, 누군가 어떤 특정 물건을 구매하기 위해 구글이나 아마존에서 검색을 했다면, 그 이후 며칠 동안 그 물건에 대한 구매가 이루어질 때까지 인터넷 공간에 그 물건에 대한 구매 정보가 뜬다. AI가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소비자의 소비패턴(이것은 인간의 정신영역이다)을 분석하여 소비자의 소비를 최대한 이끌어 내는 것이다. 좀 거칠게 말해서, AI를 이용한 기업들은 소비자의 정신 영역까지 탈탈 털어, 그의 호주머니를 쪽쪽 빨아 먹는 것이다.

 

실리콘밸리 주민으로서 이러한 현상을 보면, 무서운 마음도 든다. 시장을 개척하고자 하는 자본주의 사회 기업들의 의지가 무섭고, 그 영역을 인간의 정신영역에까지 뻗치고 있다는 게 무섭다. 우리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주머니를 '합법적으로' 털리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어떠한 철학을 견지하며 실리콘밸리의 철학(맘몬철학)에 맞서 생명을 아름답고 풍성하게 지켜내야 할지 고민이다. 기술발전 뒤에 감춰져 있는 맘몬신을 폭로하고 거기에 저항하는 일을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느덧 두 주인(하나님과 맘몬) 중 하나님을 버리고 맘몬을 숭배하는 배교자로 전락할 지 모른다. 내가 이미 맘몬 숭배자가 아닌지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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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대형교회는 왜 위험한가

 

"전체주의나 독재국가는 주관적 관계를 소멸시키고 객관적 관계로만 사회가 유지되도록 획책한다."

 

이것은 한나 아렌트의 말이다. 아렌트는 사회를 존재케 하는 객관적 관계를 말하면서 동시에 인간적 유대관계인 주관적 관계에 대해서도 말한다. 객관적 관계란 상인과 구매자, 교수와 학생, 부모와 자녀 같은 관계를 말한다. 주관적 관계는 이러한 객관적 관계 사이에 있는 유대관계를 말한다. 객관적 관계는 맺어졌으나, 그들 사이에 유대관계가 없을 수 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주관적관계, 즉 유대관계는 소멸될 수 있으나, 객관적 관계는 소멸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모 자식 간에 아무리 사이가 나빠도 그들의 관계가 객관적 관계인 부모 자식 관계를 벗어날 수 없는 것과 같다.

 

우리는 여기에서 대형교회의 위험성을 본다. 대형교회는 그 규모와 구조로 인해 교인들 간의 유대관계, 즉 주관적 관계가 소멸될 수 있다. 그렇게 될 때 대형교회는 자연스럽게 전체주의나 독재국가 형태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그리고 대형교회는 객관적 관계만이 존재하는 삭막한 조직이 되고 만다. 그러한 단점을 보완하려고 대형교회에서는 소그룹 모임 같은 것을 활성화시키지만 역부족인 이유는 그것이 교회의 지도자들, 특별히 담임목사와의 소통을 원활하게 만들어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절대 대다수의 교인들은 담임목사와 어떠한 유대관계도 가질 수 없다.

 

주관적 관계가 소멸되고 객관적 관계만 존재하는 조직이 왜 문제일까? 그것은 아렌트의 저작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잘 드러나 있다. 2차대전 당시 유대인 대학살 프로그램을 주도했던 아이히만은 아르헨티나에서 도피 생활을 하던 중 이스라엘의 전범 추적자들에게 발각되어 예루살렘으로 압송된 뒤 재판을 받는다. 그 재판에 뉴요커 잡지의 특파원 자격으로 참관했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재판을 통해서 악의 평범성 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구상한다.

 

우리는 흔히 악한 일을 저지른 사람은 악마의 모습과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아렌트가 관찰한 전범 아이히만은 매우 평범한 가장이었다. 그래서 아렌트는 악이란 악한 사람에게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평범한 사람에게서도 발생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녀는 그러한 상황을 소크라테스의 철학에 대입한다. 소크라테스는 자기 검토가 없는 삶은 가치가 없다고 말했는데, 아이히만이 바로 그러한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객관적 관계만이 존재하는 전체주의 조직 내에서 반성적 사유(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능력)’를 하지 못하고, 생각하기를 포기한 채 조직의 명령에만 충실하게 복종했던 것이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자그마치 600만명이라는 무고한 생명이 희생된 것이다.

 

마틴 부버는 그의 책 <나와 너 Ich und Du>에서 인간의 관계가 나와 그것(I-it)’의 관계에서 나와 당신(I-Thou)’의 관계로 진행되어야 함의 중요성을 말한 바 있다. 아렌트의 용어로 다시 표현하자면, 관계는 객관적 관계에서 주관적 관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관계에서는 어떠한 생명력 있는 아름다움을 찾아볼 수 없게 된다.

 

하버마스가 그의 책 <의사소통행위이론>에서 말하고 있듯이, 인간관계 사이에 소통적 행위가 이루어지지 않고 전략적 행위만 이루어진다면 한 조직의 구성원은 그 조직의 이익에 희생당할 위험성을 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전체주의적 구조를 지닌 집단에서는 상호 이해를 지향하는소통적 행위보다는 의도한 목적을 이루려는전략적 행위가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본다. 이게 바로 대형교회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구조의 문제이다.

 

우리는 한국의 대표적인 두 대형교회인 명성교회와 사랑의 교회의 사태를 바라보면서 의아해한다. 그렇게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는 교회이고 그렇게 많은 비판을 받으면서도 왜 그 교회의 교인들은 그 교회의 지도자를 추종할까? 그 이유는 그 집단 내에서 상호 이해를 지향하는소통적 행위보다는 의도한 목적을 이루려는전략적 행위가 지배적으로 일어나고 있으며, 주관적 관계를 소멸시키고 객관적 관계 속에서 반성적 사유를 하지 못하고 객관적 관계에서 오는 책임만을 강요하는 전체주의적 구조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교회는 객관적 관계에서 주관적 관계로 그 관계가 발전해 나가야 하며, ‘상호 이해를 지향하는소통적 행위 위에 의도한 목적을 이루려는전략적 행위, 즉 선교행위가 이루어져야 하는 민주적 공동체이다. 그러나 대형교회는 그 구조상 주관적 관계와 소통적 행위가 적극적으로 실현되기 어려운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형교회의 운명이 달렸다. 그러나 대형교회의 습성상 이 한계를 극복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구조적 악에 희생당하지 않기 위하여 그리스도인들의 지혜가 더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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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욕심

 

나는 물욕심(物慾心)이 별로 없다. 목회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부분이다. 물욕심이 많은데, 그것을 참으면서 목회하는 게 얼마나 힘들겠는가. 그런데 나는 물욕심이 없어서 그것을 참느라 에너지를 쓰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나는 무용한 것들을 좋아한다. , , 바람, 웃음, 농담, 이런 것말이다. 그렇다 보니, 좋은 집을 봐도 별 감흥이 없고, 좋은 차를 보아도 타고 싶은 욕심이 없다. 다행히 아내도 나와 비슷한 성품을 지녀(물론 아내는 나처럼 무용한 것들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꽃 사다주면 핀잔만 듣는다.), 우리 가정은 물욕 때문에 고통 당하지 않는다.

 

나는 돈을 거의 쓰지 않는다. 별로 사고 싶은 것도 없고, 쓸 데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넉넉치 않은 생활비로도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다. 다만 아이들이 커 가니, 아이들의 교육비 정도는 부족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유일하게 돈을 쓰는 때는 책을 살 때다. 학창시절, 엄마가 주는 용돈을 아껴, 매주 시집을 한 권 샀다. 내가 대학교를 다닐 당시 시집은 한 권에 5천원 정도 했다. 엄마가 하루에 용돈을 5천원 주셨는데, 하루에 4천원 정도 쓰고, 천원을 남겨 5일 모아 매주 시집 한 권을 샀다. 그렇게 소중하게 구입한 시집이라서 그런지, 지하철을 타고 등교와 하교를 하며 읽는 시는 왠지 모르게 꿀맛이었다.

 

나는 지금도 사고 싶은 책이 너무 많다. 그동안 수천권의 책을 샀고, 수천권의 책을 읽었지만, 아직까지 사서 읽고 싶은 책이 수천권이다. 나는 책을 살 때 알라딘US를 이용하는데, 그 사이트의 보관함에는 사고 싶은 책 수천권의 리스트가 보관되어 있다.

 

나는 돈이 생기면 가장 먼저 책을 산다. 사서 읽고 싶었던 책을 주문하여 그 책이 오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마치 애인을 기다리는 시간처럼 기쁘다. 그리고 마침내 책이 도착하면, 포장을 뜯을 때의 기쁨이란 연애편지를 뜯을 때의 기쁨과 같다. 당장 그 책들을 다 읽지 못해도, 두 손으로 받아보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듯하다.

 

그리고 내가 돈이 생기면 책을 사는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문화'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 위해서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책을 사는 것만큼 훌륭한 공생이 어디에 있겠는가.

 

옛날에는 '도서상품권'이라는 것이 있어서, 누군가 그것을 선물해 주면 너무 좋았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도서상품권이 없어 약간 서운하다. 나는 '스폰서'를 가지고 싶은데, 마음껏 책 사보라고 스폰해주는 사람(또는 기업)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한다.

 

요즘은 스마트 폰이 발달하여 동영상이나 전자책으로 정보를 습득하고 독서를 하는 이들이 많아졌지만, 나는 아직도 마른 책장을 넘겨가며, 연필을 들고 글쓴이의 생각을 따라가며, 때로는 사색에 잠기기도 하고, 때로는 나의 생각을 적어가며, 천천히 글쓴이와 대화하듯 독서하는 것을 좋아한다.

 

독서 경력이 쌓이고, 독서를 많이 하다 보니, 독서의 노하우도 꽤나 생겼다. 좋은 책은 마지막 장까지 독자를 이끄는 힘이 있고, 별로인 책은 책장이 넘어가지 않는다. 같은 짚신이지만 매끄러운 짚신과 껄끄러운 짚신의 차이와 같다.

 

나는 독서를 할 때, 한 권의 책만 읽지 않는다. 대개 한 번에 5-6권을 동시에 읽는다. 독서 경력이 쌓이고, 독서의 노하우가 쌓이면 이렇게 된다. 나처럼 독서 경력이 많은 분들은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갈 것이다. 그리고 그 대여섯권의 책은 대개 장르가 모두 다르다. 시집, 소설, 철학서적, 전공서적, 대중서적, 이런 식이다.

 

나는 독서를 하고 나면, 반드시 그 독서를 바탕으로 글을 쓴다. 이게 독서의 백미다. 독서를 하면 영감이 솟는데, 솟아나는 영감은 나의 영혼 속에 찰나의 시간만 머물기 때문에, 부지런히 받아 적어야 한다. 게으른 자는 창조자가 될 수 없다. 그렇게 영감을 통해 받아 적은 글들은 정신 차리고 보면 도저히 ''가 썼다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하고 아름답다. 그것을 바라볼 때의 환희란 이루 말할 수 없다. (나는 블로그를 두 개 운영한다. <바이블 오디세이> <손으로 읽은 낙서판>이다. 거기에 올라간 글이 합해서 1,350개 정도 된다. 아직 안 올린 글을 합치면, 2천개 된다.)

 

독서를 할 때 '문학책(, 소설)'을 많이 읽는 게 중요하다. 나는 어떠한 책을 읽을 때 문학을 인용하지 않은 작가의 책은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문학을 인용하지 않으며 써내려 간 작가의 사유를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문학을 인용하지 않는 작가의 사유는 유연하지 않고 독선적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쓸 때가 가장 행복하다. 수많은 욕심 중에 '책 욕심'이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며칠 전, 아내가 나에게 물었다. "무슨 행복으로 살아?" 나의 삶에는 여러가지 행복이 있지만, 무엇보다, '책 욕심'의 행복을 말하고 싶다. 그래서 그 행복을 여기에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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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9. 10. 17. 09:05

잃은 양의 마음으로 노래하기를 간구하는 기도

(시편 119:105-112)

 

주님,

잃은 양의 마음으로 노래합니다.

구원을 간절히 바라며

주의 말씀을 붙듭니다.

우리는 잃은 양이지만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합니다.

우리가 간절히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주님은 우리를 간절히 찾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의 말씀을 붙잡고 길을 걷는 우리에게

등이 되시고 빛이 되시는 주님,

노인의 지혜와 비교할 수 없고

순금보다 귀한 주의 말씀을 기억하고 또 기억하오니,

인생의 굽이굽이 마다

말씀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며 그 말씀에 기대어 기도하는

잃은 양 같은 우리들을

의인이라 불러 주시며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