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詩論)2019. 12. 28. 08:36

[시론] 허수경의 시우산을 만지작거리며

 

나는 동물의 말을 하는 식물입니다

나는 희망의 말을 하는 신입니다

나는 유곽의 말을 하는 관공서입니다

나는 시계의 말을 하는 시간입니다

나는 개가 꾸는 꿈입니다

등등의 고백도 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허수경의 시 '우산을 만지작거리며' 부분,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수록)

 

심리상담사의 꼬임, 혹은 인턴이 건네주던 하얀 줄이 박힌 푸른 사탕 때문에, 자신의 속마음을 고백해 버린 시인은 후회한다. 우산을 만지작거리는 시인의 행동에서 그의 내면세계를 엿볼 수 있다. 시인은 지금 이미 마음이 유랑하고 있다. 어디로든 가고 싶은데, 아무 데도 가지 못하고, 우산만 만지작거리고 있다.

 

심리상담사는 시인에게 조언을 해준다. “먹는 것보다 자는 것이 중요해요.” 같은 조언이다. 누가 모르나? 그런데 잠이 안 오는 것을 어떻게 하나. 잠 드는 것이 힘들고, 잠이라도 들면 꿈 속에서 심리상담사를 죽이는 꿈을 꾸는데, 시인이 어떻게 잠을 설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 시인을 보고, ‘먹는 것보다 자는 것이 중요하다는 상담을 해주는 심리상담사가 밉다.

 

시인은 심리상담사와 상담을 하면서, 점점 자신의 내면세계를 열어 보여준다. 그 안에는 편지가 가득하다. “죽은 허씨에쓴 편지, “얼어 죽은 국회에게쓴 편지, “맞아 죽은 은행에게쓴 편지, “우주로 납치된 악몽에게쓴 편지, “달에 있는 나의 거대한 저택에게쓴 편지, 그런데, 정말로 중요한 것은 시인이 자신의 실체를 고백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나는 끊임없이 편지를 쓰는 식물이에요.”

 

시인은 이 고백을 후회한다. 자신이 끊임없이 편지를 쓰는 식물이라는 고백 뒤에, 시인은 계속하여 고백을 쏟아 놓는다. “나는 동물의 말을 하는 식물입니다. 나는 희망의 말을 하는 신입니다. 나는 유곽의 말을 하는 관공서입니다. 나는 시계의 말을 하는 시간입니다. 나는 개가 꾸는 꿈입니다.” 고백하지 말았어야 할 고백들은 시인은 하고 말았다. 그래서 시인은 후회한다. 시인은 이 고백을 강제된 고백이라고 부르고 싶어한다.

 

고백이란 상대방이 알지 못하는 나의 무엇을드러내는 놓는 것이다. 드러나지 않은 그 무엇은 좋은 것일수도 있고, 나쁜 것일수도 있다. 가령 사랑의 고백 같은 경우는 좋은 것이다. 반대로, 죄의 고백 같은 경우는 나쁜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때로, 사랑의 고백은 드러내 놓지 않는 게 좋을 때가 있고, 죄의 경우는 드러내 놓는 게 좋을 때가 있다. 사랑이 때론 죄보다 위험하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고백의 종교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세상을 떠나기 몇 년 전에 쓴 [재고록(Retractationes)]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내 고백록(Confessions) 13권은 나의 악한 행동과 선한 행동을 말함으로 공의롭고 선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으며, 사람들의 이해와 사랑을 자극하여 하나님에게 향하게 하고 있다”(재고록 II, 32).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Confessions)>을 보면, 기독교인의 고백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번역한 선한용 교수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왜 고백록을 썼는지 이렇게 밝히고 있다. 1) 자기 자신이나 많은 사람이 하나님에게(ad Deum) 마음을 향하게 하여 그를 사랑하고 찬양하게 하기 위해서, 2) 교회를 돌보고 양떼를 양육하는 감독으로서 교회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어떻게 기독교인이 되는가?’에 대하여 가르치고 훈련시켜야 할 책임 때문에, 3) 교인들에게 기독교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치기 위하여, 4) 교회에 들어온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내용을 신학적으로 설명해 줄 필요를 느껴서, 5) 고백록을 듣거나 읽게 될 사람들로 하여금 그 깊은 곳을 알게 하기 위하여, 6) 교회 안팎에서 일어나고 있는 오해와 비판에 대하여 정당하게 답변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의 고백이 모두 아우구스티누스가 제시한 이유를 따를 필요는 없겠으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고백은 언제나 자기 자신 뿐 아니라 고백을 듣는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마음을 향하게 하고 그를 더욱더 사랑하고 찬양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위의 시에서 시인이 심리상담사에게 고백한 이유는 자신의 삶을 사랑해서다. 살지 못해서 안달이 났는데,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고백하는 거다. 이처럼 고백은 생명에의 갈망이 없이는 나올 수 없는 인간의 탄식이다.

 

우리는 나의 생명에 대하여, 이 세계에 대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어떤 고백을 가지고 사는가. 남들이 들으면 얼토당토한 고백이라 할지라도, 고백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어떤 고백이 우리 안에 있는가. 고백하면 후회할지 모르지만, 고백 없이 우리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향하여 진심으로고백하는 자에게 은총을 베푸신다.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9. 12. 24. 02:24

‘Dangerous Memory’ 안에서 이야기를 낳기를 간구하는 기도

 

주님,

우리는 무엇을 낳고 있습니까.

성경의 족보는 단순히자손을 낳았다는 뜻이 아니라

내러티브를 낳았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내러티브를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내러티브가 있었기에

그 내러티브를 통하여 우리는 신앙의 세계로 들어올 수 있었으며

그 안에서 계속하여 내러티브를 낳고 있습니다.

주님, 우리가 십자가와 부활의 그위험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한

세상은 우리를 감당할 수 없고,

우리는 세상에 굴복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그위험한 기억을 주신 주님,

날마다 세상을 넉넉히 이기게 하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12. 24. 02:22

Dangerous Memory

(마태복음 1: 1~25)

 

얼마전 슬픈 소식을 들었다. 독일의 신부이자 저명한 신학자, 요한 뱁티스트 메츠(Johann Baptist Metz)가 소천했다는 소식이었다. 여러분들에게는 생경한 신학자일지 모르겠으나, 신학을 좀 깊이 공부한 사람, 특별히 나처럼 정치신학을 전공한 사람들에게는 매우 특별한 신학자이다. ‘정치신학이라는 분야가 바로 이 신학자를 통해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메츠는 몰트만, 그리고 도로테 죌레라는 신학자들과 정치신학분야를 개척한 인물로 유명하다.)

 

요한 뱁티스트 메츠하면 떠오르는 말이 바로 ‘dangerous memory’이다. 한국말로는 위험한 기억이라고 번역하는데, 그렇게 마음에 와 닿는 번역은 아니다. ‘dangerous memory’라는 것이 무슨 존재론적 의미를 담고 있는지 설명하기 위해서 준비한 시가 있다.

 

꽃을 위한 서시

(김춘수)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이 젖어드는 이 무명의 어둠에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 밤 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이 될 것이다

 

......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여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라는 시구절이 지니는 심상을 상상해 보면, 메츠가 ‘dangerous memory’라고 말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마음에 와 닿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손길이 닿으면, 우리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여기서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가 된다는 뜻이다.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에 시방 위험한 짐승인 것이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프랑스의 클래식 작곡가 쥘 마스네(Jules Émile Frédéric Massenet, 1842 5 12 - 1912 8 13)의 오페라 <베르테르 Werther> ‘why do you wake me now’를 보는 듯하다.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바탕으로 제작된 이 오페라에서 베르테르는 로테를 향해 이렇게 노래한다. “why do you wake me now? 왜 나를 깨우셨나요?” 첫 가사가 이렇다. “Why do you wake me now, o sweetest breath of spring? 왜 나를 깨우셨나요? 오 나의 사랑스런 봄의 기운이여!”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위험한 기억(dangerous memory)’에 대한 기록이다. 네 개의 복음서가 각자의 방식에 따라 그 위험한 기억을 풀어놓고 있다. 그 중에서 마태복음은 그 기억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족보를 써내려가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 기억은 이렇게 시작한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1).

 

아브라함과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억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인물들이고,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하며 살아왔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과 다윗에게 주신 언약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민족적 정체성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너를 통해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 약속을 주셨고, 다윗을 통해 너의 씨앗을 통해 왕위가 영원할 것이다라는 약속을 주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러한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서 오신 분이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족보의 형태로, 누가 누구를 낳았다는 형태로 되어 있지만, 그것을 읽어 내려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족보에서 단순히 이름을 보지 않았다. 이 족보에 적힌 이름만을 불러가며 읽는 것은 1분 정도 밖에는 안 걸리지만, 그 이름이 간직하고 있는 내러티브(이야기)’를 풀어놓으면, 평생이 걸려도 그 이야기를 다 풀어놓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내러티브(이야기)' 공동체이다. 성경에는 족보가 많다.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고...' 그러나, 이 족보는 그냥 족보가 아니라 '내러티브'의 족보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누가 내러티브를 낳고, 누가 내러티브를 낳고..'하는 식이다. 마태복음의 족보도 마찬가지다. ‘누가 누구를 낳았다라는 족보가 아니라, ‘누가 어떠한 내러티브(이야기)’를 낳았는지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이렇게 끝난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16). 요셉과 마리아는 내러티브를 낳는데, 그 이름은 예수다. 그리고 예수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의 이야기는 범상치 않게 시작한다. 우리가 많이 들어서 아는 것처럼, 예수의 탄생은 여느 사람과 같지 않다. 요셉과 마리아는 약혼한 사이였으나, 아직 결혼한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동침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가 아이를 가지게 된다. 그런데, 마태는 아주 신비한 방식으로 마리아의 임신을 풀어낸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18).

 

이것 자체가 아주 위험한 기억이다. 예수는 태어나면서 스스로 이렇게 외치는 것 같다.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하나님의 손길이 그에게 닿았고, 그는 지금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 태어났다. 마태는 그것을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예수는 태어나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이렇게 외치는 것 같다. “why do you wake me now? 왜 나를 깨우셨나요?”


마태는 예수의 무한한 가능성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21~23).

 

예수의 가능성은 가히 폭발적이다. 이렇게 방금 태어난 아기 예수는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이다. “why do you wake me now? 왜 나를 깨우셨나요?” 하나님이 예수를 봄의 기운(생명을 잉태하는 기운/성령)을 통해 깨우신 이유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계시다는 것을 확증하시기 위하여이다.

 

이렇게 방금 태어난, 그러나 아직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는 아기, 너무도 연약하여 어떻게 될지 모르는 아기, 그렇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이 아기 예수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무엇보다 마음이 조마조마 할 것이다. 과연, “성령으로 잉태된이 아기는 자신이 지닌 이 무한한 가능성을 잃어버리거나 빼앗기거나 꺾이지 않고 발현할 것인가, 아니면 도중에 그 무한한 가능성을 잃어버리거나 빼앗기거나 꺾이고 말 것인가.

 

다시 말해, 예수의 이야기, 즉 그가 지닌 무한한 가능성을 통해 천사의 예언대로자기 백성의 구원은 탄생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어떠한 방식으로 예수의 가능성이 펼쳐지며, 어떠한 방식으로 구원을 이루게 될지도 미지수이다. 이제부터, 예수의 이야기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펼쳐질 것이다. 싱거울 수도 있고, 대단할 수도 있다. 그러한 걱정과 기대를 품고 읽어 내려가는 예수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dangerous memory’이다.

 

내러티브가 더 이상 생산되는지 않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죽은 거나 마찬가지다. 만약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태어난 예수의 이야기가 더 이상 진전되지 않고 멈췄다면, 우리는 지금 이렇게 예수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 않을 것이고, 예수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이야기는 멈추지 않았고, 그의 이야기는 그 당시 사람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전개가 됐으며, 그들의 지혜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운 방식으로 구원이 탄생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의 구원에 참여한 사람들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의 이야기에서처럼 성령을 통하여’,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 예수 이야기 안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뜻이다. 예수의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 우리도 하나님을 향하여 이렇게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why do you wake me now? 왜 나를 깨우셨나요?” 그리고 이제, 우리는 예수 안에서, 우리들의 이야기를 낳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하는 모든 행동은 '내러티브'를 낳아야 한다. 거기서 다른 것이 탄생하면 안 된다. 내러티브가 탄생하지 않고 다른 것이 탄생한다면 그것은 '믿음'으로 한 행동이 아니라, 다른 '의도'로 한 행동이 될 뿐이다. 내러티브로 시작된 공동체(또는 신앙인의 삶)에 내러티브가 없다면, 정육점에 고기가 없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 보자. 나는 지금 어떤 내러티브를 낳고 있는가. 우리 교회 공동체는 지금 어떤 내러티브를 낳고 있는가. 내러티브는 하루 아침에 낳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아이가 열 달 엄마 뱃속에서 잘 양육 받다가 산고의 고통과 함께 탄생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교 내러티브도 믿음에 의한 양육과 고통 가운데서 탄생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뱃속에서 어떠한 내러티브를 잉태시키고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봄의 기운)’ 무한한 가능성을 지는 존재로 새롭게 태어난 자신의 그 ‘dangerous memory’를 절대로 잃어버리거나 빼앗기지 말라. “우리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채워져 있다. 예수가 연약하게 태어났으나, 그 무한한 가능성을 잃어버리거나 빼앗기지 않고, 인류의 역사 속에서 그 누구도 한 번도 탄생시키지 못한 부활을 탄생시킨 것처럼, 우리도 예수 안에서 그 누구도 한 번도 탄생시키지 못한 부활과 같은 역사를 이루게 될 것이다. 예수의 그 ‘dangerous memory’ 안에서 우리들의 삶에도 떡두꺼비 같은 내러티브가 탄생하길 소망한다.

Posted by 장준식
시론(詩論)2019. 12. 18. 08:16

[시론] 허수경의 시 '나의 가버린 헌 창문에게'

 

잘 있으면 좋겠다. 그 사람들

춥겠다 덥겠다 아프겠다 배고프겠다

그들은 없는 이들 보이지 않는 자연의 천사

나뭇잎이 떨어진다

눈썹 없이 의지 없이 기억 없이


(허수경의 시 '나의 가버린 헌 창문에게' 부분,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수록)

 

시를 읽는다는 것은 발걸음을 재촉하는 일이 아니라 발걸음을 멈춰 세우는 일이다. 보이지 않는 세상의 슬픔을 가득 안 고 있는 문장을 만나면, 그 문장은 꽃보다 아름다워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어느 가을의 코스모스가 이처럼 아름다울 수 있을까. 심지어 라일락도 아픔을 안고 있는 문장에 비하면 초라해질 뿐이다.

 

"잘 있니?" 시인은 안부를 묻는다. 안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시인이 안부를 묻지 않으면 아무도 그들의 안부를 묻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 시에는 그러한 심상이 외부적으로 거의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아픈 역사, 홀로코스트를 말하고 있는 것 같다. 하나만 꼽자면, '나치 할아버지'라는 단어만이 어렴풋이 그 심상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그 사건은 인류의 어느 한 부류만이 경험한 사건이 아니라, '인류'라는 모든 부류의 사람이 경험한 사건이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환각의 리사이클장에서 폐기되던 전생과 이생의 우리." 그곳에서 '우리'는 이생 뿐 아니라 전생의 삶까지도 모두 짓밟혔다. 그래서 우리의 희망은 "미래의 오염된 희망"이다. 전생과 이생이 모두 폐기됐는데, '우리'에게는 어떠한 미래의 희망이 있다는 말인가.

 

잘 있을 수 없는 존재에게 시인은 계속 묻는다. "잘 있니?" '근본 악'(이것은 아렌트의 용어이다)에 의해 존재가 상실되던 날, '우리'는 아주 신비한 소리를 들었다. "살해당한 아버지에게 살해당한 이들을 고요하게 매장했던 바다의 안개 소리도 들었네". 그런데, 그 소리는 그렇다고 말하기에는 명확하지 않다. 시인은 다르게 상상해본다. "아니, 돌고래가 새벽의 태양을 바라보며 출산과 죽음을 준비하던 순간이었니?"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데, 그 존재를 인정 받지 못한다는 것은 존재의 가장 큰 비극이다. 인식 받지 못하는 존재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폭력이 아니다. 아무런 죄책을 남기지 않는다. 그래서 그러한 행위는 '근본악'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존재에게 안부를 물어야 한다. 인정 받는 존재만이 아니라 인정 받지 못하는 존재에게도 안부를 물어야 한다. 적어도 안부를 묻는다는 것은 존재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인식 받지 못하는 존재들에게 '적극적'으로 안부를 묻는다. "잘 있으면 좋겠다. 그 사람들 / 춥겠다 덥겠다 아프겠다 배고프겠다." 그들은 "없는 이들", "보이지 않는 이들"이 아니라, 분명 존재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근본악'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눈에 보이지 않겠지만, 존재를 인식할 줄 아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시인 같은 사람들에게 그들은 '자연의 천사'.

 

이렇게 아픈 낙엽이 있을까. "눈썹 없이 의지 없이 기억 없이" 떨어지는 낙엽 말이다. 그렇게 아프게 떨어지는 낙엽을 손으로 받아내며, 안부를 물어본다. "잘 있니?" 그러면 낙엽은 분명 눈썹에 힘을 주고 의지를 가지고 기억해 낼 것이다. 자기의 존재를!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9. 12. 16. 15:41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기를 간구하는 기도

(6:1-7)

 

주님,

말씀과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도 사도들처럼 깨닫게 하여 주소서.

말씀과 기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선교(mission dei)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옳다고 여기는 일에 몰두하다

구원을 이루기는커녕 갈등과 실망만 만들어 냅니다.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려면

영적 감수성이 꼭 필요한데,

그것은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길러지는 것임을

기억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이 어디에 가 계신 지,

하나님이 지금 어디서 일하고 계신 지,

무엇을 하고 계신 지 알게 하셔서

하나님의 선교에 부름받아 동참하게 하소서.

그곳에 구원의 역사와 기쁨이 넘치게 될 줄 믿습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12. 16. 15:36

말씀과 기도는 왜 중요한가

(사도행전 6:1-7)

 

우리는 지금 ‘missional church’로 거듭나기 위해서 마음을 모으고 힘을 모으고 있다. 우리가 함께 지혜를 모아 추진하고 있는 “Mission Project Driven 속회‘missional church’를 세워 나가기 위한 핵심 프로젝트 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missional church’, 선교적 교회는 무엇인가?

 

‘Mission’이라는 말은 우리말로 사명이라고 번역한다. Mission은 라틴어 ‘mitto(mittere/missio’에서 왔다. 그 뜻은 보내다, 파견하다이다. 그런데, 이 말은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 기독교인의 경우 보냄을 받았다라고 할 때, 하나님은 하늘에 앉아 계시고(그곳에서 움직이지 않고 집무를 보시며),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기독교인들이 어딘가에 가서 무슨 일을 수행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오랜 세월, mission은 그렇게 이해되어 왔다. 우리도 이런 말을 한다. “주님! 보내 주세요! 제가 가겠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찬송 부르길 좋아한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이러한 신앙도 엄청난 신앙이다. 믿음이 변한 건지, 세상이 변한 건지 알 수 없지만, 사실 요즘 이러한 신앙을 찾아보기도 쉽지 않다. 아무튼, 우리는 미션을 생각할 때, 하나님에 의해 수동적으로 어디론가 보내져서 그곳에 필요한 일을 감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랜 세월 동안 (물론 지금도 그렇다) 선교는 해외선교, 국내선교, 지역선교등으로 어떠한 공간으로 파송받아 가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선교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선교가 가지고 있는 그 뜻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 그렇다면 선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선교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위해서는 ‘missio dei’라는 선교신학 용어를 알아야 한다.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이라는 영국의 신학자이자 선교사가 주창한 개념이다. 이는 그의 선교경험에서 나온 통찰로, 서남아시아에 가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활동하던 그는 그곳에서 이미선교하고 계신, , 이미 일하고 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그 이전까지, 그는 선교란 위에서 언급했듯이, ‘보냄을 받아그곳에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일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에서도 이미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깨달은 후, ‘선교에 대한 개념을 다시 가지게 됐다. 그래서 ‘missio dei’라는 말은 하나님의 선교를 뜻하는데, 이 개념을 통해 그가 주장한 것은 선교란 하나님이 이미 선교하고 계신 그곳에 가서 하나님과 함께 동역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 개념에 따르면, 선교란 보냄을 받는수동적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능동적개념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단순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어떠한 오지에서 일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모든 곳에서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속에서도 일하고 계시고, 우리의 가정에서도, 우리의 교회 뿐 아니라, 우리가 사는 이 나라, 그리고 복음을 전혀 듣지 못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어떤 지역에서도 일하신다. 하나님은 우주적인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모든 곳에 존재하시며 모든 것이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도록 붙잡고 계신다.

 

하나님의 선교란 이러한 뜻을 지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교에 능동적으로 동참하려면 요구되는 것이 영적 감수성(Spiritual Sensibility)’이다. 감수성(Sensibility)이라는 말은뭔가를 감지(sense)할 수 있는 능력(ability)’을 말한다. 여기서 영적 감수성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선교를 감지할 수 있는 능력’,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지금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신 지를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믿음의 선조들은 모두 이 영적 감수성이 뛰어났다. ‘하나님의 선교를 감지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과 함께 그곳에서 동역한다는 뜻이다. 철이 아직 들지 않은 자식은 부모가 하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원하는 것만 부모로부터 받아내려고 한다. 그러나 철 든 자식은 부모가 하는 일이 얼마나 거룩한 일인지를 알고, 어떻게서든 부모님과 함께 가정을 세워 나가고 인생을 꾸려 나가려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일례로, 이런 것이다. 우리 아버지는 평생 목회하시면서 교회를 세 번 건축하셨다. 강화도에서 한 번(강화도에서 목회하실 때 내가 그곳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서울에서 목회하실 두 번 하셨다. 강화도에서 건축하실 때는 내가 한 두 살 밖에 되지 않았을 때라 내 힘으로 교회 건축을 도울 수 없었다. 물론 그때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의 돌반지는 모두 교회 건축하는 데 쓰임을 받았다. (그 전통에 따라, 우리 두 아들의 돌반지도 모두 조지아에서 교회를 건축할 때,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께 드려졌다.)

 

그런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기 전, 마지막 교회 건축을 하실 때, 나는 대학생이었다. 나는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고 싶었고, 아버지의 목회를 돕고 싶었다. 그러나 학생이 무엇으로 건축헌금을 할 수 있을까?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일까? 아르바이트를 할까? 어디 가서 모금을 할까? 하나님은 무엇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고 싶어하실까? 내가 무엇을 하면 아버지가 기뻐하실까? 많은 생각을 했다. 그때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다. “그래, 내가 학생이니까, 공부를 열심히 해서 장학금을 타자!” 그래서 학생신분에 맞게, 나는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래서 장학금을 탔다. 그 당시 장학금은 70만원이었는데, 세 번을 연속해서 탔다. 210만원을 교회 건축하는 데 드릴 수 있었다.

 

본문에서도 하나님의 선교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예루살렘 교회는 날로 부흥했다. 특별히 가난한 자들이 교회 구성원으로 많이 들어왔다. 예루살렘 교회는 multi-cultural church였다. 헬라파 유대인과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섞여 있었다. 헬라파 유대인들의 문화와 히브리파 유대인들의 문화가 같을 수는 없다. 그래서 때론 갈등이 발생하기도 했다. 본문은 그 갈등 상황을 말하고 있다.

 

예루살렘은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주류를 이뤘던 곳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예루살렘은 유대 땅에 있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유대문화와 언어에 익숙하지 못했던 헬라파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차별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헬라파 유대인들은 불평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이때까지 만해도, 사도들은 가난한 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굶지 않도록 밥을 잘 먹이는 것이 하나님의 선교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가 터지고 보니, 단순히 밥을 잘 먹이는 것만이 하나님의 선교가 아니고, 그들의 마음을 돌보며, 그들이 차별 받는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 행정적으로 조직을 잘 정비하는 것도 하나님의 선교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하나님은 아주 세세한 부분에서까지도 일하신다.

 

그래서 사도들은 모든 제자들을 불러서 지혜를 모은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 쓰리라!”(2-4).

 

사도들은 사역을 하면서 아차싶었다. 위에서 말했듯이, 선교’, 또는 사역이라는 것은 그들이 발명(invent)’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mission)에서, 사역(ministry)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적 감수성이다. , 하나님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계신 지를 감지하는 일이다. 이것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게 아니라, 그냥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우리가 발명해서 해 놓고서,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고 있다고 자기기만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기만의 행태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인물이 사도행전에 등장한다. 그게 누구인가? 나중에 이름이 바울로 불리는 사울이다. 사울의 등장은 스데반의 죽음과 엮여 있다. 바나바의 등장도 심상치 않았듯이, 사울의 등장도 심상치 않다. 일곱 집사 중 가장 촉망받던 스데반이 그 짧은 인생을 순교로 마감하게 될 때, 사도행전은 사울의 등장을 알린다.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7:60; 8:1).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는 사울이 어떻게 초대교회를 박해했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울은 초대교회를 박해는 것이 하나님의 선교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모든 열심을 다해 교회를 박해했다. 그런데, 사울은 어느 순간, 자신이 하는 일이 선교가 아니라, ‘자기기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게 바로 사도행전 9장에 나오는 다메섹 도상의 이야기이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9:4) 사울이 했던 일은 하나님의 선교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박해하는 일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는가? ‘영적 감수성(spiritual sensibility)’이 부족하면 누구에게든지 이러한 일은 발생할 수 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러한 질문을 갖게 된다. “어떻게 하면, 영적 감수성을 가질 수 있을까?” 바로, 본문에서 사도들이 깨닫고 시행한 것이다.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4). 이 말은 사도들이 다른 일에는 손하나 까딱하지 않고, 말씀만 보고 기도만 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밥 퍼주는 일은 느그들이 하고, 우리는 그 일에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말씀만 보고 기도만 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그럼 무엇인가?

 

본인들이 행한 실수를 다시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지이다. 영적 감수성을 잃어버린 채,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기만에 빠져 구원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갈등과 상처를 불러 일으키는 어리석음을 다시는 범하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그래서 그들은 영적 감수성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말씀과 기도 사역에 전념하고자 한 것이다.

 

영적 감수성을 키우는 일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영적 감수성이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기만에 빠지고 만다. 하나님의 선교는 구원을 이루지만, 자기기만은 죄악(추악한 일)’을 드러낼 뿐이다. 하나님의 선교가 우리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지 못하고, 생명을 죽인다면, 그게 무슨 하나님의 선교인가. 하나님의 선교는 반드시 생명을 낳는다(풍성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을 풍성케 하시는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해야지, 우리가 선교를 발명하면 안 된다. 인간의 일은 생명을 풍성케 하지 못한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말씀과 기도는 왜 중요한가? 영적 감수성은 말씀과 기도로 키워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씀과 기도는 하나님과 소통하는 언어이다. 하나님과의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소통이 없는 상태에서 그저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발명해서 그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자기기만에 빠지고 만다.


우리가 실제 삶 속에서 소통이 되지 않는 것때문에 얼마나 어려움을 겪으며 살고 있는가. 부부의 예를 들면, 꽃 사오는 것을 싫어하는 부인과 꽃 사오는 것을 즐기는 남편 사이는 불편할 수밖에 없다. 반대로, 들꽃 하나에도 감동을 느끼는 아내와 그러한 마음을 전혀 모르는 남편 사이는 불편할 수밖에 없다. 아내는 들꽃 하나만 꺾어다 주며 사랑을 속삭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남편은 아내가 돈을 많이 벌어다줘야지 행복할 거라고, 들꽃 따위에게는 전혀 눈길을 주지 않고, 돈을 버느라 생명을 허비한다면, 이 소통의 부재가 그 가정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가.

 

“missional church”는 단순히 선교 많이 하는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기도 가운데 영적 감수성이 예민하여, ‘하나님의 선교’, 즉 하나님이 지금 어디에서 무슨 사역을 하고 계신 지를 감지하여, 부르심을 받아, 능동적이고 주도적으로, 기쁜 마음으로 그곳에 가서,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교회를 말한다.

 

우리는 지금 성경공부와 기도훈련을 통하여 영적 감수성을 키우는 중이고, ‘Mission Project Driven 속회를 통하여 영적 감수성을 통해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려고 하는 것이다. (어떻게 속회의 mission project발견해야 하는지 감이 잡혔으리라 믿는다.) 이 가슴 벅찬 일을 진행하고 있는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영적 감수성을 통해 하나님의 선교에 부르심을 받고, 능동적이고 주도적으로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우리들의 삶에는 아주 실제적이고 생생한 구원의 열매가 팝콘처럼 열릴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파루시아를 살다, “우리는 왜 성경을 읽는가를 진지하게 읽어보시라.)

혹시, 복잡하다 생각하시는 분이 계시면, 딱 한가지만 해달라. 참여! (함께 가자!)

 

‘missional church 선교적 교회’, ‘missio dei 하나님의 선교’, ‘spiritual sensibility 영적 감수성’, 그리고 말씀과 기도 사역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해, ‘good spirit’지닌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여, 세상에 희망을 주고, 세상을 변화시키며, 시대를 이끄는, 아름다운 주님의 자녀가 되기를 소망한다.

Posted by 장준식

우리는 왜 성경을 읽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다른 질문을 먼저 던져보자. "우리는 왜 영어 공부를 하는가?" 한국 학생들에게 영어 공부하는 이유를 물으면, '입시 시험을 위해서'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언어는 일차적으로 '소통'을 위한 것이지 '시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한국 사람들은 영어를 배울 때, '소통'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시험'을 위해서 배운다.

 

이제 "우리는 왜 성경을 읽는가"를 물어보자. 우리는 왜 성경을 읽는가?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아마도 대부분, '구원 받기 위해서'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위에서 언어의 존재 이유를 '시험'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경의 존재 이유를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구원'을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소통'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성경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소통'을 위해서 존재한다. 이것을 간과하면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시험'으로 오해되고 만다.

 

한국에서 영어가 '시험'을 위한 도구로 쓰이니, 한국에서 영어를 잘하는 사람은 '시험'을 잘 보는 사람이지 영어로 '소통'을 잘 하는 사람이 아니다. 영어는 시험이기 때문에, 소통 위주의 영어가 아닌 '시험' 위주의 영어를 배우다 보니, 영어가 어렵게 느껴진다. 실제로, 시험에서 다른 이들보다 좋은 점수를 받으려면, 일단 시험 문제가 어렵게 출제되어야 하고, 그 어려운 문제를 맞혀야 한다.

 

'구원'을 위해서 성경을 읽으면 똑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성경의 언어를 배워 하나님과 소통하게 되는 일은 중요하지 않고, 성경의 지식을 통해서 구원의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과제만 안을 뿐이다.

 

그렇다보니, 성경은 온통 현실을 말하고 있는데, 우리는 성경을 통해 현실을 보지 않고, 오히려 현실을 외면하면서 천국을 보려 한다. 구원이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자꾸 죽음 후에 있는 것으로 현실에서 밀려나기만 한다. 성경읽기가 구원에 대한 '시험'으로 전락할 때 발생하는 일이다.

 

성경은 그 자체가 '언어'. 그리스도인은 언어인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과 '소통'한다. 사실, 소통하는 것 그 자체가 구원이다. 내 삶의 현실에서 성경의 언어, 언어 그 자체인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과 소통하고 있다면, 우리의 현실은 이미 구원에 이른 것이다.

 

성경 언어를 배우는 과정은 우리가 일반 언어를 배우는 과정과 별반 다르지 않다. 옹알이에서 시작해, 어려운 것을 이해하는 수준에 이르게 되는 것처럼 성경 언어도 그렇게 배운다. 물론 옹알이만으로도 부모와 아이는 '소통'이 이루어지고 부모는 아이가 '생명'을 위해 무엇을 원하는지 안다. 이처럼 성경 언어의 옹알이 만으로도 하나님과의 소통은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이가 장성하며 옹알이 수준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듯, 그리스도인은 장성하며 옹알이 수준에만 머물 수 없다. 성경 언어 능력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소통이 깊어지면, 그 안에서 발생하는 일은 가히 폭발적이다. 하나님의 창조성이 그 '소통'안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구원'이라는 '시험'의 관점에서 성경 읽는 습관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소통'의 관점에서 읽는 연습을 해야 한다. 성경 언어의 능력이 깊어질수록 알지 못하던 하나님의 그 부요한 신비를 알게 될 것이고, 그 신비 안에서 우리는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무수한 '창조성'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과의 소통을 통한 그 창조성의 발현, 그것이 구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Posted by 장준식

구원이란 무엇인가

 

구원은 '초월'이라는 말로 바꿀 수 있다. 구원과 초월을 섞어 말하자면, 구원은 초월하고 싶은 욕구다.

 

우리는 대개 구원을 이렇게 '초월'의 방식으로 이해하는 데 익숙해 있다. 몸이 아픈 것에 대한 초월, 경제적으로 어려운 것에 대한 초월을 구원으로 생각하고, 무엇보다, 죄에 대한 초월을 구원으로 생각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유한성을 못 견뎌 한다. 그래서 어떠한 방법을 통해서든 조금이라도 자신의 유한성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 수단으로 가장 인기가 높은 것이 ''이다. 돈은 사람들에게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데, 돈이 많으면 자신의 유한성을 넘어선 '초월자'가 된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구원을 '초월'로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욕망이 강한 사람이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욕망 덩어리이기 때문에, 구원을 '초월'로 생각하는 데 쉽게 마음이 끌린다. 그러나, 구원을 '초월'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고 파멸에 이르게 한다. 구원인 줄 알았는데, 구원을 가져다 주지 못한 것에 대한 좌절감은 인간을 가장 비참하게 만든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구원을 초월로 이해하며, 결국 비참한 인생을 맛본다.

 

기독교의 구원을 '초월'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기독교 신앙을 정말 오해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구원이 '초월'이었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굳이 '성육신(incarnation)'할 필요 없었을 것이다.

 

기독교는 '초월'을 말하지 않는다. 기독교의 종말론도 이 세상으로부터의 초월이 아니라, 이 세상의 완성을 말한다. 기독교 신앙의 가장 핵심은 '성육신'이라는 것을 놓치면 안 된다. 그리고, 기독교의 신앙의 출발점은 '십자가 사건'이라는 것 또한 놓치면 안 된다. 성육신과 십자가는 '초월'을 바라는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끌어안으려는 의지이다.

 

악이 판을 치는 것 같으나, 결코 이 세상은 그 악에 의해서 멸망당하지 않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 안에서 '아름다움이 회복될 것'이라는 소망이, 기독교의 구원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성육신과 십자가를 깊이 이해한 사람은 초월적 욕망을 꿈꾸지 않는다. 오히려, 생명에 대한 경외를 가지고 자신의 삶과 이웃의 삶을 사랑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과 공간을 힘껏 끌어안는다. 초월에 대한 욕망을 내려놓고,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악과 진실하게 대면하며, 자기의 생명을 긍정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자가 진정 구원 받은 자이다.

Posted by 장준식
시론(詩論)2019. 12. 13. 09:09

[시론] 허수경의 시 아사(餓死)’

 

둘은 진흙으로 만든 좌상이 되어간다

빛의 섬이 되어간다

파리 떼가 몰려온다

파리의 날개들이 빛의 섬 위에서

은철빛 폭풍으로 좌상을 파먹는다

하얗게 남은 인간과 짐승의 뼈가 널리 황무지

자연을 잡아먹는 것은 자연뿐이다


ㅡ 허수경의 시 아사부부,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수록

 

성경은 천국을 보여주기 보다 현실을 보여준다. 성경은 현실을 보여주는데 우리는 성경을 통해 현실을 보지 않고, 오히려 현실을 외면하면서 천국을 보려 한다. 구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이야기 중 하나는 가뭄에 대한 것이다. 야곱의 가족들이 애굽으로 내려가게 된 것도 가뭄 때문이고,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와 한 판 대결을 벌이게 된 것도 가뭄 때문이고, 예레미야는 가뭄을 예언하면서 동시에 가뭄에서 구원해 달라고 탄원한다. 가뭄은 인간에게 극심한 고통을 가져온다. 굶어 죽는 일, 아사(餓死)이다.


           허수경의 시 아사는 굶어 죽는 것에 대한 비참함을 전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오직 비참함 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시의 내용은 이렇다. 가뭄 때문에 모든 생명이 죽었고, 이제 남은 것은 생후 4개월 된 소()밖에 없다. 굶어 죽는 게 일상이 된 세상에서 살아남은 소는 겨우살아남은 소일 것이다. 그런데, 그 소를 데리고 밭을 갈아야 하니, 굶주린 아이나, 그 아이의 손에 이끌려 밭으로 나온 소나 기력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아이와 소, 두 존재는 진력을 다해 밭을 간다. 아사 직전의 두 생명은 사투를 벌이지만 밭을 갈아 씨를 뿌리는 일은 지평선처럼 끝없고 그 뒤에 있는 세계처럼 거짓말 같다. “아이는 겨우 소를 몰았다. 소는 자꾸만 주저 앉았다.” 아이와 소 사이에 전투가 벌어진다. 이미 그들은 전쟁터에 놓여 있다. 소를 일으켜 세워야만 살 수 있는 아이와 일으켜 세워지면 죽고 마는 소의 운명 같은 대결.


           아무도 승리하지 못했다. 주저 앉은 소와 그런 소를 부둥켜안고 일으켜 세우려는 아이는 어느새 한 몸이 되어 진흙으로 만든 좌상"이 되어갔다. 물기가 없어진 지 오래된 하늘은 바싹 마른 햇볕을 떨어뜨렸고 그 빛에 말라버린 뒤엉킨 생명은 섬처럼 굳어갔다.


           그렇게 생명이 소멸되는 듯했으나, 으로 몰려든 것은 파리떼였다. 그리고 그 파리떼들은 저항력을 상실한 생명을 파먹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죽음을 빌미로 잔치가 벌어진 것이다. 폭풍같이 달려든 파리떼가 남긴 것은 하얗게 남은 인간과 짐승의 뼈였다. 그 광경은 잔인하기 그지없으나, 그 잔인함 속에는 죽음과 함께 생명이 넘실댄다.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자연을 잡아먹는 것은 자연뿐이다.”


           우리는 생명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거대한 존재는 굶어 죽었으나, 하찮은 존재는 살아남았다. 무엇이 살아남는 것일까. 결국, 가장 약한 게 살아남는다. 살아남은 것은 모두 약한 것이다. 그러니 살아남으려는 자, 하찮게 살라.

Posted by 장준식

Mission Project Driven 속회

 

20년 전, 미국과 한국을 강타한 책 한권이 있었습니다.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라는 책입니다. 얇은 책이었는데, ‘스니프스커리라 불리는 두 마리의 생쥐와 라고 불리는 두 명의 꼬마 인간이 자신들이 좋아하는 치즈를 찾기 위해 복잡한 미로를 헤매 다니면서 벌어진 이야기를 다룬 책입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던 치즈가 어느 날 사라지자, 그들에게 시련이 닥칩니다. 이에 대해 두 마리 생쥐는 지체하지 않고 치즈를 찾아 나서지만, 두 명의 꼬마 인간은 치즈가 사라진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망연자실하여 외칩니다.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이 책은 치즈가 사라져 버린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과 새로운 치즈를 찾아 떠나는 의 대조되는 모습을 모여주면서, 변화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서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지에 대한 교훈을 줍니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개이나 조직은 쇠퇴할 수밖에 없습니다. 변하는 세상에 발맞춰 변화를 꾀하려면 현실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현실을 부정만 하면서 세상 탓만 하다가 실패한 인생, 또는 실패한 조직이 되기 십상입니다.

21세기의 기독교를 연구하는 모든 학자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합니다. “복음에 대해 호의적인 시대는 끝났다!” 미국의 유명한 두 신학자인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와 윌리엄 윌리몬(William H. Willimon)은 이러한 상황을 일컬어 교회를 위한 무료입장권, 무임승차권은 사라져 버렸다라고 표현합니다. 영원할 것 같았던 교회의 시대가 끝나고, 세속화가 빠르게 진행되어, 교회가 죽음에 이를 지경에 처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기독교회와 그리스도인은 그 정체성을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부름 받았는가!”에 대한 정체성 말입니다. 그러면서 교회를 걱정하는 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교회에는 과연 새 시대에 적합한 새로운 모델의 교회들이 일어나고 있는가? 기존 교회에 실망감을 피력하며 교회를 떠나고 있는 세대들에게 다시금 신앙의 용기와 헌신을 유도할 수 있는 창조적 시도가 일어나고 있는가? 교회에 대한 분신과 조롱으로 가득 차 있는 세대들을 향해 참된 신앙이란 이런 것이라고 설득력 있게 보여줄 수 있는 진정한 신앙의 통로가 만들어지고 있는가?”(이상훈, ReThinkChurch, 57).

그동안 우리 교회 공동체가 함께 말씀을 나누고 성경공부를 하고 회의를 하면서 나눈 교회의 가치는 세상에 희망을 주는 교회”,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를 세워 나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시대를 따라가기 급급한 교회가 아니라, 시대를 선도하는 교회가 되려면, 성경에서 말하는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를 새롭게 깨닫고, 말씀에 근거하여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문제의식입니다. <종교 없는 삶>이라는 책에서 주장하고 있듯이, 종교 없이도 삶을 의미 있게 살수 있다고 외치는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인으로서 어떠한 삶의 가치와 의미를 세상에 외치고 있는지 고민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Mission Project Driven 속회라는 것을 구상해 보았습니다. 현대인들은 자기 주도적 인생을 살기 원하며, ‘워라벨(Work+Life Balance)’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다른 말로 해서, 현대인들은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욕구가 매우 강합니다. 일만 하면서 사는 인생이 아니라, 삶을 가꾸어 가며 인생의 의미와 공동체의 가치를 찾으려는 움직임이 강합니다. Mission Project Driven 속회는 그러한 현대인들의 바람과 새로운 시대에 맞는 교회 공동체의 만들기 위해서 고안된 소그룹 모임입니다.

Mission Project Driven 속회는 궁극적으로 영적인 성장(spiritual growing)을 위한 통합적 소그룹 모임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지닌 ‘good spirit’의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간절한 바람을 가집니다. ‘Mission’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께 세상을 향하여 부여 받은 사명을 말합니다. 그 사명은 소그룹 구성원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며 의논해서 정한 ‘Project’를 통해서 구체화됩니다.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삶의 흥미와 신앙의 흥미를 가지게 되고, 우리가 진행하는 프로젝트를 통해서 우리의 삶과 신앙이 성장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삶과 신앙이 별개가 아니라 하나라는 인식의 변화를 가져오고, 자기주도적인 신앙을 형성하며, 자립적인 생각과 판단력을 향상시키며, 실제의 삶과 밀착된 신앙생활을 하며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결국 Mission Project Driven 속회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는 교회 공동체는 요엘서에서 예언한 성령의 임재가 사도행전에서 성취된 것을 보는 것처럼, 성령의 역동성이 살아 숨쉬는 교회,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온 몸의 세포가 살아 숨쉬는 교회, 사람 냄새 나는 교회 공동체를 세워 나가고자 합니다.

Mission Project Driven 속회에 대한 개념을 우리 교회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잘 이해했으면 좋겠습니다. 313, 로마의 콘스탄티노플 황제에 의해서 기독교의 박해가 그치고, 그 이후 로마의 공식 종교로 기독교가 채택된 후 세월을 거듭하며 기독교는 이 세상의 왕좌의 자리를 누려왔지만, 21세기에 접어들어서 기독교는 초대교회의 상황처럼 소수자와 거류자의 위치로 다시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시대를 지나고 있는 기독교가 이 세상에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지닌 그 엄청난 사회변혁의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전하려면 제도적인 교회의 모습을 벗어 던지고, 선교적 상상력을 지닌 역동적인 성령 공동체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 역사를 이루는 데, Mission Project Driven 속회가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9. 12. 10. 07:11

증인으로서의 삶을 간구하는 기도

(사도행전 5:27-42)

 

주님,

사도들이 보여주는 예루살렘에서의 행보를 보면서

성령의 역동성을 실감합니다.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증언하시듯이

성령을 받은 초대교회의 모든 제자들이 성령과 더불어

‘증인으로서의 삶을 거침없이 살아가는 것을 봅니다.

실제적인 권력이었던 공의회도 그들의 증언을 막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가말리엘이 공의회에서 연설하고 있듯이,

사람에게서 난운동(movement)’이면 사라지겠으나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면 그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

우리도 그 일에 증인이 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 믿습니다.

우리도 성령이 충만하여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성령과 더불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상관하지 않고

‘예수는 그리스도다라고 외치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12. 10. 07:08

복음은 무너지지 않는다

(사도행전 5:27-42)

 

200611월에 시작하여 2007년도 7월에 막을 내린, MBC<거침없이 하이킥>이라는 시트콤이 있다. <순풍산부인과> 이래 최고의 인고를 끈 시트콤으로 기억되는 TV 프로그램이다. <순풍산부인과>를 통해서 송혜교가 스타의 반열에 올라섰다면, <거침없이 하이킥>을 통해 박민영, 정일우, 김범 등이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특별히 정준하와 박해미의 부부역할, 그리고 야동순재로 이름을 날린 이순재의 연기가 돋보인 드라마다. <거침없이 하이킥>이라는 제목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지만, 이 시트콤은 한마디로 유쾌하고 통쾌하고 상쾌한이야기를 들려준다. 많은 이들이 <거침없이 하이킥>을 통해서 함께 웃고 울며 즐거워했다.

 

사도행전의 이야기는 <거침없이 하이킥>을 연상케 한다. ‘유쾌통쾌상쾌의 코드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활동에 중점을 둔 성경이고, 바울서신은 본인이 개척한 교회를 잘 세워 나가려는 복음과 교훈에 중점을 둔 성경이다. 그런데, 사도행전은 신약성서 내에서도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예수의 승천(부재) 이후에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어떻게 성령과 더불어 역동적으로 복음을 전했는지에 대한, 활동이 담겨 있다.

 

사도행전을 보고 있으면, ‘이게 뭐지?’라는 질문이 저절로 생긴다. ‘복음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성령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이들은 이렇게 세상을 향하여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리지?’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세상은 여전히 답답하고 악이 판을 치지만, 복음을 전하는 이들의 모습은 유쾌통쾌상쾌하기 그지없다. 아무도 그들을 말리지 못하며,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을 통해서 유쾌통괘상쾌한 하나님 나라가 드러나고 있다.

 

본문은 사도들(제자들)의 예루살렘 사역의 절정을 다루고 있다. 유대인 공의회는 사도들을 협박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아무 일도 하지 마라고 했지만, 사도들은 그들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계속하여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린다. 사도들의 행동을 통하여 많은 표적과 기사가 나타났으며, 교회는 내적으로, 외적으로 성장했다.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고, 들어가고 결심한 백성들이 줄을 섰다. 그러한 모습을 보며, 유대 지도자들은 시기(젤로스)’에 가득 찼다. 그래서 그들은 사도들을 또 잡아다가 공의회 감옥에 가두었다. 그런데, 주의 천사가 그들이 있어야 할 곳은 감옥이 아니라 성전이라는 것을 말해주며, 사도들을 감옥에서 놓이게 한다.

 

공의회 감옥에 갇혀 있는 줄 알았던 사도들이 감옥에 있지 않고 성전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보고 당황한 유대인 지도자들은 그들을 잡아 다시 공의회 앞에 세운다. 대제사장이 묻는다.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주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희는 온 예루살렘을 너희 가르침으로 가득 채우고 이 사람에 대한 피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뒤집어씌우려고 하는구나!”(28/우리말성경).

 

이에 대해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은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린다. “사람에게 순종하기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29/우리말성경). 그리고 그 앞에서 유쾌통쾌상쾌한 모습으로 그들이 가르치지 말라고 한 복음을 다시 전한다. “당신들이 나무에 달아 죽인 그 예수를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께서 살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회개와 죄 용서를 주시려고 예수를 그분 오른편에 높이셔서 왕과 구세주가 되게 하셨습니다.”(30-31/우리말성경).

 

사도들은 왜 이렇게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리는 것일까? 이어지는 말씀이다. “우리는 이 모든 일들의 증인이고 하나님께서 그분께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 또한 그 일들의 증인이십니다”(32/우리말성경). 사도들이 이렇게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릴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성령을 주셨기 때문이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일들(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증언하시는 분이기에, 성령을 받은 사람들 또한 성령과 더불어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증인이 되려고 마음 먹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성령이 그들 안에 내주하시기 때문에 증인의 삶을 사는 것이다. 세상을 향하여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리는 것은 그렇게 하려고 마음먹어서 되는 게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수동성이 아니라 역동성이다. 성령이 믿는 자들에게 내주하여 일어나게 되는 구원사건에 대한 반응이다.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리는 사도들에게 한 방 맞은 공의회의 유대인 지도자들은 회개대신에 크게 노를 발한다. 사도들의 거침없은 하이킥이 그들의 죄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곧 무죄한 피를 흘린 죄이다. 지도자들의 불감증이 얼마나 심한 지, 자신들이 한 말에 대해서 책임지려는 모습이 전혀 없다. 우리가 알다시피, 마태복음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을 때, 그들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 피를 우리와 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27:25).

 

이 구절은 굉장히 논쟁적인 구절이라 조심해서 해석해야 한다. 그 구절을 근거로 2차대전 당시 나치에 의해서 유대인들이 대학살을 당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무리들이 있다. 굉장히 사악한 해석이다. 성경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면, 성경은 복음이 아니라 사람 잡는 살인병기가 된다. 이 구절은 유대인들의 무지를 보여줄 뿐이다.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는 그들의 무지함은 죄에 대한 불감증의 증세도 보인다.

 

자신의 죄를 들추려 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죄가 드러나면 사람들은 보통 회개하기 보다는 자신의 죄를 인식하지 못하고 마치 자신이 죄 없는 사람인 양 변명하고, 오히려 자신의 죄를 드러내는 사람을 공격한다. 죄는 이래저래 미움과 다툼과 분열을 낳는다. 죄를 짓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만,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이게 은혜다. 그 기회를 회개라 한다. 회개는 대단한 창조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한나 아렌트는 이러한 상황을 탄생성(natality)’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표현하기도 한다.

 

사도들의 거침없는 하이킥에 한 방 맞은 공의회의 유대인 지도자들은 반격에 나선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이용하여 사도들을 죽이려 한다. 그때, 바리새인 율법교사인 가말리엘이 공의회 회원들에게 신중하게 행동할 것을 주문한다. 가말리엘은 덕망 있는 율법학자로서, 우리에게는 사도 바울의 스승으로 알려진 사람이다. 그가 행한 연설은 매우 설득력 있었다.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이스라엘 사람들이여, 여러분이 지금 저 사람들에게 하려는 일에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언젠가 드다가 나타나서 자신이 대단한 사람인 양 공포하고 다니자 400명가량의 사람들이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임을 당했고 그를 추종하던 사람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 일은 아무것도 아닌 일로 끝났습니다.

그 사람 뒤에도 갈릴리 사람 유다가 인구 조사를 할 때 나타나서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반란을 도모했지만 역시 죽임을 당했고 그를 추종하던 사람들도 모두 흩어졌습니다. 그러니 지금의 경우에 대해서도 내가 한마디 하자면 저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둡시다. 만일 그 목적이나 행동이 사람에게 비롯된 것이라면 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이 사람들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행여나 여러분이 하나님을 대적해 싸우는 사람이 될까 두렵습니다”(35-39/우리말성경).

 

우리 나라 말에는 그 헬라어의 표현 문법이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가말리엘의 연설에서 쓰인 첫 번째 문장은 개연조건문(eventualis)이 쓰인다. ‘만일 그 목적이나 행동이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라면은 미래에 있을 가능성을 가정하는 문장이다. 그러나, 두 번째 문장에서는 사실 조건문(realis)이 쓰인다. ‘만약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면은 사실을 나타내는 문장이다. 물론, 이것은 가말리엘 자신의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사도행전을 쓴 누가의 의도된 문장이다. 누가는 가말리엘의 연설을 통해서 이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 났으므로(사실이다!), 너희는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고, 이들을 박해하므로 하나님의 대적자가 된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증거가 이어진다. 가말리엘의 설득력 있는 연설에 의해 공의회는 사도들을 죽이지 않고 채찍질 몇 번을 한 뒤 그들을 놓아준다. 그런데, 사도들은 그것을 기분 나빠 하거나 불쾌해하지 않고, 다시 한 번 유쾌통쾌상쾌하게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린다. “사도들은 예수 이름을 위해 모욕당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하고는 기뻐하며 공의회를 떠났습니다”(41/우리말성경).

 

복음은 무너지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복음은 사람이 증언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성령 하나님이 증언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과 더불어 전하는 복음의 증언은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죽어도,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성령 또한 영원하시니, 세상이 아무리 흉흉하고 힘들어도, 이 세상이 아무리 세속에 물들어 교회가 힘을 잃는 것 같고 무너지고 있는 것 같아도, 복음은 무너지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여 성령을 받는 한, 성령과 더불어 행하는 우리의 증언이 그지치 않는 한, 교회는 죽지 않는다. 그러니, 성령을 날마다 간구하며, 힘을 내자. 세상을 향해 복음을 들고, 유쾌통쾌상쾌하게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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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19. 12. 4. 11:39

바이러스

 

한 사내가 들어왔다

밀쳐 내지 못해 얼굴이 빨개지고

받아들이지 못해 온몸에 두드러기가 난다

한 입 베어 먹은 병균의 세상엔

아직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촌락이 많다

탐험가라면 마땅히 그곳을 동경하겠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존재가 그곳에 대하여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현상은 사회적이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다는 것은

우리는 우리만의 세상에 갇혀 산다는 선언이다

내 안에 들어온 한 사내를 끝끝내 밀쳐내지 못하면

차라리 생명을 내려놓는 게 좋다는 현명함과

끝끝내 받아들이지 못하면

차라리 깊은 잠이나 자는 게 낫다고 투덜거리는 미련함이

교차한다

우리는 내가 누구인가를 확신할 수 없다

살갗 뒤에 숨겨진 또다른 세상이

무수한 별들처럼 솟아날 때

온 몸은 열기를 내뿜으며 전율하게 되기 때문이다

내 안에 들어온 한 사내를 끌어안는다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는 것처럼

그는 어디로 가는지 모르게 사라질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몸을 진찰하도록 허락받은 의사의

최고의 낭만적인 진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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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19. 12. 3. 07:00

멈추지 않기를 간구하는 기도

( 5:1-11)

 

주님,

초대교회에 닥친 첫번째 위기를 기억합니다.

더불어 출애굽 세대가 가나안 땅 진입을 앞두고 겪었던

첫번째 위기도 기억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온 이들이

옛 시대의 질서와 논리를 따르느라 탐욕에 갇혀

새 하늘과 새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속이고

‘온전히 헌신하지 못한 일 때문에

행진을 멈추어 선 일을 기억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행진을

멈추게 하는 일이 지금도 우리 삶 가운데 발생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주님,

쟁기를 잡은 자가 뒤를 돌아보면 안 되듯,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자로서

행진하는 일을 멈추지 않도록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 주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12. 3. 07:00

하나님 나라는 멈추지 않는다

(사도행전 5:1-11)

 

사도행전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다.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해서 촉발되었고, 성령 강림을 통해서 발생한 일들이다. 사도행전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성령 강림을 통해서 탄생하게 된 교회 공동체는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공동체임에 틀림없다.

 

성령 강림을 통해 탄생한 새로운 공동체, 교회의 특징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교회는 성령이 통치하시는 공동체이다(2:3). 둘째,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이 활동하시는 공동체이다(3:16). 셋째, 교회는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공동체이다(4:28). 다시 말해,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오롯이 드러나는 공동체이다.

 

교회는 성령이 통치하시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때처럼 교회 공동체는 언제나 성령을 사모하며 성령이 각 사람에 임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우리는 얼마나 성령의 임재에 대하여 간구하고 생각하며 살아가는가? 우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주여, 성령을 부어 주소서.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살아가게 하소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이 활동하시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서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자을 일으키면서 한 것처럼, 무슨 일을 하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해야 한다. 우리가 하는 일은 누구의 이름으로 하는 일인가? 무슨 일을 하든지, 우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주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합니다. 그 이름이 이 일을 이루실 줄 믿나이다!”

 

교회는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사도들이 공의회에서 놓임을 받은 후 기도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권능과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해야 한다. 우리는 누구의 뜻을 구하는가? 무엇을 하든, 우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주여, 하나님의 권능과 뜻이 이루어지게 하시고, 예정하신 그 일들을 이루소서!”


성령 임재를 통해 새롭게 세워진 공동체, 교회에 위기가 닥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 위기가 전해진다. 이 이야기는 매우 당혹스러운 내용을 전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촉발되고, 성령 강림을 통해서 전개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행진이 갑자기 멈춰 설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전통적으로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는 여호수아 7장의 이야기와 더불어 해석되어 왔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종교이고, 그래서 기독교인은 유대교 경전인 구약성경을 볼 필요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이단이라기 보다는 무식한 이라고 부르는 게 낫다. 아이러니컬하게 들릴 수도 있겠으나, 기독교를 깊이 이해하려면 신약보다 구약에 대한 지식을 깊게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신약은 하늘에 뚝 떨어진 문서가 아니라 철저하게 구약의 재현이기 때문이다.

 

1세기와 2세기의 기독교가 헬라문화권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헬라철학을 염두에 둔 것은 사실이나 신약성경에 사용되고 있는 개념과 용어, 그리고 상징들은 모두 구약성경에서 기인한 것들이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이 말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깨달을 수 있다. 신약에 등장하는 상징은 모두 구약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구약에 대한 상당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

 

사도행전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를 여호수아 7장에 나오는 아간의 이야기와 병렬적으로 배치했을 거라고 말한다. 출애굽에 성공한 이스라엘은 광야에서의 40년 세월을 드디어 끝내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드디어 입성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고, 그 무엇도 그 행진을 막을 수 없었다. 가나안 입성 전에도 주변 나라들과 수많은 전투를 벌였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전투에서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안겨주셨다. 그리고 드디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을 밟게 되었을 때, 처음 치른 여리고성 전투에서도 하나님은 그 성을 이스라엘에게 주셨다.

 

그런데, 그 승리의 기쁨도 잠시, 여리고 성과 비교도 되지 않을 작은 성, 그래서 이름도 아이성인 바로 그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일이 발생한다. 행진을 멈추어야 했던 것이다. 당연히 승리할 줄 알았던 아이성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36명의 전사자가 발생하며 퇴각했고, 무엇보다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 같이됐다. 36명의 전사자가 발생한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아이성 전투를 통해, 백성의 마음에 담대함이 사라지고, 절망이 싹 튼 게 문제였다. 절망은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멈추지 않을 줄 알았던 이스라엘 백성의 행진이 아이성 전투에서 멈추어 섰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입성하여 겪은 첫 번째 위기였다. 이 위기를 해결하기 위하여 여호수아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쓰고 저물도록 있다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넘겨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쪽을 만족하게 여겨 거주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나이다, 주여 이스라엘이 그의 원수들 앞에서 돌아섰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가나안 사람과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듣고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서 끊으리니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하나이까”(수 7:6-9).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응답하신다. 여기서 중요한 용어가 등장하는데, 그게 바로 헤렘법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헤렘법을 어긴 것은 이스라엘이라고 말하며, 그 헤렘법을 어긴 당사자를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물건과 함께 멸절하지 않으면 이스라엘과 함께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신다.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진 자로 뽑힌 자를 불사르되 그와 그의 모든 소유를 그리하라”(7:15).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으로 향하면서 만난 원수들을 모두 무찌를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의 군대가 강성해서가 아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것은 죽음과 다르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여호수아는 모든 이스라엘이 그 앞으로 나오게 한 뒤, 제비를 뽑아 헤렘법을 어긴 자가 누구인지를 색출해 낸다. 그가 바로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이요 삽디의 손자요 갈미의 아들인 아간이었다. ‘헤렘법을 어긴 것은 단순히 물질의 문제가 아니다. ‘헤렘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것을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문제이고, 믿음의 문제이다. 이스라엘의 행진의 원동력은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지, 그들이 가진 군사력이나 경제력에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와 헌신이었다. 헤렘법에는 그 마음과 정신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학자들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바로 여호수아서의 아간의 이야기와 연결한다. 누가가 사도행전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를 통해서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단순한 물질 문제가 아니라 헤렘 개념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와 헌신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와 헌신이 없으면, 교회 공동체는 아무 것도 아니다. 죽은 거와 다르지 않다.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와 헌신이 없으면, 성령 강림으로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행진은 멈춰 설 수밖에 없다.

 

탐욕을 버려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더니 탐욕이 더 이상 필요 없어진 것이다. 이 세상의 질서와 논리는 탐욕의 원리로 돌아가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이 세상의 질서와 논리가 작동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탐욕만큼 필요 없는 것도 없다.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고자 했던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것을 흉내만 냈을 뿐, 실제로는 아직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교회 공동체가 사람(사도들)에 의해 세워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사도들 앞에서 거짓말을 한다. 그 땅 판 값 중 얼마를 자신을 위해 떼어두고(노스피조마이)’서도, 사도들의 발 앞에 둔 것이 전부인 양 속인다.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와 헌신을 두지 않는, 아간이 보였던 헤렘범의 위반과 같은 행위인 것이다. 그래서 아간이 죽었듯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또한 죽게 된다.

 

남편 아나니아가 죽고 나서, 세 시간쯤 뒤에 영문도 모르고 사도들 앞에 선 삽비라는 남편과 함께 지식을 공유(쉰오이다)’했기에 남편과 동일한 대답을 늘어 놓는다. 그때 베드로는 이렇게 삽비라를 꾸짖는다.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9). 여기서 함께 꾀하다서로 같은 목소리를 내다’, ‘함께 일치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아내 삽비라는 남편 아나니아와 같은 운명을 맞닥뜨리게 될 수밖에 없다. 그녀도 남편처럼 죽게 된다.


아나이아와 삽비라 이야기는 개인에게 주는 교훈이 아니다. 재산을 팔아 교회에 바치라는 이야기도 아니고, 속이면 죽게 된다는 협박도 아니다. 아간의 이야기가 아간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고,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주는 교훈이었듯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 또한 교회 공동체에 주는 교훈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교회는 성령이 통치하시는 공동체이고, 예수의 이름이 활동하시는 공동체이고,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공동체이다. 교회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곧 죽음과 같다. 교회 공동체는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와 헌신을 두지 않는다면, 한걸음도 행진할 수 없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해서 보았듯이, 그 무엇도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을 멈출 수 없다. 하나님 나라는 멈추지 않는다. 이것을 안다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 안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를 거부하거나 막을 힘이 우리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대림절(Advent), 하나님 나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이 절기에, 우리는 어떠한 마음으로 살아가는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와 헌신이다. 이것은 강요가 아니다. 이것은 생명에 대한 최고의 갈망이고, 구원에 대한 최선의 대응이다. 멈추지 않고 기어이 오시는 하나님 나라를 온 몸과 온 마음을 다해 기다리고 맞이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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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