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문2020. 1. 31. 04:16

신비로운 주의 사역에 동참하기를 간구하는 기도

(1:25-2:5)

 

주님,

우리가 주님의 그 신비를 알고

완전히 주님께 종속된 존재가 되어

주님의 일꾼으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고난을 기뻐하고

주님의 고난과 주님의 충만함으로 우리의 육체를 채우고

헌신하기를 결단하게 하옵소서.

건강한 공동체를 세우고 감추어져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화를 찾는데

우리의 인생을 거룩하게 주님께 드리기를 원합니다.

그 신비로운 사역에 교회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동참할 수 있도록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내려주소서.

비밀스럽고 신비로운 방법으로 한사람 한사람의 마음에

역사하여 주시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0. 1. 31. 04:12

디아코노스(일꾼)가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

(1:25-2:5)

 

주님,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진 지혜와 지식의 모든 신비를

알고 깨달은 자가 되어,

우리의 생명을 구원의 신비요 영광의 소망이신

그리스도에게 맡기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의 육체에 채우기를 원합니다.

사역은 결코 혼자서 할 수 없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님께 의지하며

서로가 서로를 귀하게 생각하며 동역하게 하옵소서.

우리는 주님의 일꾼(디아코노스)입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맡은 바 책임을 충성되이 감당하게 하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1. 31. 04:10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디아코노스(일꾼)

(골로새서 1:24-2:5)

 

교회를 세워 나가는 일은 참 쉽지 않다. 초대교회, 바울이 활동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신약성경 전반에 흐르는, 교회를 세워 나가는 데 있어, 어려움이 곳곳에 배어 있다. 본문도 그러한 정황을 담고 있다. 이 문장이다. “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교묘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2:4).

 

골로새 교회, 그리고 라오디게아 교회에 교묘한 말로 너희를 속이는거짓 교사가 활동했다는 뜻이다. 그게 무엇인지는 다음 말씀이 담고 있다.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2:3). 그 무엇인가가 지혜와 지식을 담고 있다고 주장을 했고, 그에 대하여 바울은 그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지혜와 지식을 담고 있다고 반박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싸움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이후에 지난 2천년 간 계속되고 있는 싸움이다. 무엇이 지혜와 지식을 담고 있을까? 여기서 말하는 지혜와 지식은 물론 구원을 가져다 주는, 구원으로 인도하는 지혜와 지식일 것이다. ‘무엇이 구원인가에 대한 싸움이기도 하고,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까에 대한 싸움이기도 하다.

 

결국 이 세상의 모든 아우성은 구원에 대한 아우성이다. 구원 받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에 대하여 존재하는 모든 것이 자신이 구원이라고 외치는 형국이다. 존재하는 모든 지식과 지혜, 그리고 서비스는 모두 자신이 구원을 줄 수 있으니, 자신을 선택하라고 손짓한다. 사람들은 구원을 주겠다고 손짓하는 것들에 마음을 준다. 얼마간 성공하는 것 같지만, 그것이 궁극적 구원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절망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이시다!”를 알아보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마음을 주고, 그분으로 인하여 구원에 이른 사람들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라고 믿는다. 그리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구원자들과 경쟁한다. 우리는 그 일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잘 하고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이라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분이라면,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는 것이 맞다. 그것을 비밀(미스테리온)’이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이것은 비밀이라기보다는 신비라고 번역하는 게 맞다.

 

비밀과 신비는 명백하게 다르다. 비밀은 알고 나면 싱겁지만, 신비는 알면 알수록 놀랍고 신비롭다. 비밀은 감추어져 있다 드러나면 그만이지만, 신비는 감추어져 있는 것이 드러날 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신비 안으로 계속 이끌려 들어가며, 그 안에서 놀라운 생명의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런 분이다.

 

바울은 말한다. “그 신비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져 있었지만, 이제 성도들에게 드러났다”(1:26). 비밀은 사람들에게 드러나면 가십(gossip)거리가 되거나 싱거운 일이 되어버리지만, 신비는 그 모습을 드러내도 사람들이 모두 알게 되거나, 알아보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신비는 성도들’, 즉 믿는 자들에게만 그 모습을 드러낸다. 믿음이 없이는 신비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혜와 지식을 알아볼 수 없다. 바로 이것 때문에 많은 이들이 실족하여 넘어지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냥 비밀(secret)’이었다면, 사역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베일을 벗겨서 보여주면 그만이니까.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신비(mystery)’이기 때문에 사역이 어려운 것이다. “그를 전파하고,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쳐야하기 때문이다(1:28). 그래야 그리스도의 신비를 조금씩 알아보고, 그리스도 안에서 세워져 갈 수 있다. 이게 참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은 나 혼자서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협업(working together)이 필요하다. 바울은 말한다.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1:29). 교회 사역은 혼자서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못된다. 적어도, ‘내 속에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 즉 성령과 협업이 필요하다. 사역(ministry)은 태생적으로 공동체적이다.


성령이 혼자서 하실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성령은 사역(그리스도를 전하는 일, 감추어져 있었지만 이제 드러난 신비를 알리는 일)을 위해 일꾼을 필요로 하신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1:25).

 

여기서, 일꾼이라고 번역한 헬라어는 디아코노스이다. 바울은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와 연관하여 표현할 때, 두 개의 단어를 사용하는데, 하나는 둘로스()’이라는 말과 다른 하나는 디아코노스(일꾼)’이라는 말이다. ‘둘로스()’은 주인에게 완전히 종속된 존재를 말한다. 매우 강력한 표현이다. 그 무엇의 종(노예)이 아니라, 바울은 자기 자신을 예수의 노예라고 표현한다. 노예제도가 편만했던 로마제국 시대에 예수의 노예라는 표현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아주 보편적인 언어로, 강력하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디아코노스(일꾼)’둘로스()’와 매우 다른 표현이다. ‘디아코노스(일꾼)’라는 말은 책임을 맡아 자원하는 심정으로 봉사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향한 바울의 강렬한 마음이 담긴 표현이다. 바울은 자기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는 둘로스, (노예)’이고, 주님의 몸 된 교회에 대하여는 디아코노스(일꾼)’이라고 말한다.

 

노예라고 하는 말이 이제는 보편적이지 않고,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바울의 언어를 이해하기 힘들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다라는 말이 마음에 잘 와 닿지 않는다는 뜻이다. 노예제도가 폐지된 지 오래고, 노예로 살아보지 않아서 그렇다. 그리고, 그 어감이 부정적이라, 현대인들에게는 별로 좋은 표현이 아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표현했을 때, 부정적인 의미를 풍기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은 결코 아니다. 바울은 자신의 생명이 그리스도에게 맡겨져 있음을 표현하고 싶은 것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대단한 신앙고백이고, 여전히 우리가 동일하게 고백해야 하는 것이다. 나의 생명은 도대체 무엇에 맡겨져 있는가? Insurance?

 

바울의 이 고백은 가슴 뛰는 고백이다. 감정적인 고백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비를 깨달은,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진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하는 고백이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1:24).

 

여기서 채우노라채우다라는 뜻의 동사 플레로오와 접두사 안타나가 연결된 단어이다. 접두사를 안티로 쓰면 대신하여라는 뜻이 되고, ‘아나로 쓰면 다시 한 번/재차의 뜻이 된다. 그러므로, ‘채우노라는 고난을 대신 감당하겠다는 의지와,

고난을 여러 번이라도(몇 번이라도) 감당하겠다는 각오를 드러내는 동사이다.

 

이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노예(둘로스)’, 그리스도의 일꾼(디아코노스)’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 당시 노예는 주인을 대신하여 고난을 당하거나 죽었다. 그리고, 일꾼은 누가 시켜서 억지로 하는 삶이 아니라, ‘책임을 맡아 자원하는 심정으로어떠한 일을 하는 사람이다.

 

골로새서의 말씀은 우리를 다음과 같은 고백으로 이끈다. 나는 이 말씀을 묵상하며 자연스럽게 이러한 고백이 나왔다.

나도 바울의 고백처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기로 결단했다. 그래서 나를 주님의 몸 된 교회에 모두 다 내어주어도 아깝지 않다.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을 의지해서, 힘을 다하여 수고하고 싶다.

 

이렇게 결단한 동역자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들과 함께 사역하며 생명을 주님과 주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내어주다 죽고 싶다.

 

영광의 소망이신 주님,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소서.아멘.”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종(둘로스)로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디아코노스(일꾼)”이 되어, 우리 안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을 의지하여, 우리 모두 서로 합력하여,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잘 세워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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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0. 1. 30. 05:52

매트릭스에서 나오기를 간구하는 기도

(1:45-51)

 

주님,

우리도 나다나엘처럼 무화과 나무 아래서

주님의 나라를 공부하고 갈망하는

‘참된 이스라엘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세상이 만들어 놓은 매트릭스에 갇혀

그 세상이 전부인 양 불쌍한 인생을 사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성경읽기와 공부를 통하여

나를 넘어서게 하시고

매트릭스를 깨치고 나와

참된 자유를 가지고

진짜 현실을 살게 하시며

아직도 매트릭스에 갇혀 사는 불쌍한 인생들을

구원하는 일에 우리를 써 주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1. 30. 05:50

나를 넘어서는 성경읽기

(요한복음 1:45-51)

 

건유가 한창 말을 배울 때 이런 일이 있었다. 한 네 살쯤 됐던 것 같다. 어떤 변신하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 변신을 해야하는데, 잘 안 되자 힘들어 했다. 힘을 아무리 써도 잘 안 되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서 이렇게 조언해 주었다. “건유야, 힘을 쓰지 말고, 머리를 써!” 그랬더니, 건유는 머리를 장난감에 갖다 대었다. 자기 딴에 알아들은 대로 행한 것이다.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그 언어가 지니고 있는 속뜻을 배운다는 뜻이다. 위에서 보았듯이, ‘머리를 써의 속뜻을 알지 못하면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하게 된다. 물론, 똑같이 속뜻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별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속뜻을 아는 사람이 보기에 머리를 써했는데 머리를 갖다 대는 행동을 하면 얼마나 웃기겠나. 언어를 잘 이해한다는 것은 성숙해졌다는 뜻인데, 성숙한 사람은 언어가 말하고 있는 속뜻을 알기 때문에, 그 속뜻을 파악해서 행동하고 말한다.

 

이런 웃지못할 일이 신앙의 세계에서 아주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성경의 언어를 잘못 이해하기 때문에 그렇다. 성경을 이해하는 데 있어, 위에서 본 것처럼 네 살짜리의 언어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 우스꽝스러운 해프닝이 발생한다. 유명한 언어학자인 소쉬르나 비트겐슈타인 등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언어는 어떠한 실체를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언어 능력은 하루 아침에 길러지는 게 아니다. 성숙해진다는 것은 언어 능력의 성숙과 병행하여 일어난다. 언어, 말의 힘은 곧 존재의 힘이다.

 

가령, 이사야서에 이런 말씀이 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11:6-8). 어떤 이는 이 말씀을 듣고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 무슨 사자 풀 뜯어 먹는 소리냐.’ 또 다른 이는 이 말씀을 곧이곧대로 믿고, 자신이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사람이니 독사굴에 손을 넣어도 해를 당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며, 독사굴에 손을 넣을 것이다.

 

실제로 그러한 일이 있었다. 미국의 어떠한 기독교 신자가 믿는 자에게는 말씀대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며, 독사를 가지고 놀았다.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 독사에 물려 죽었다. 2014217일자 연합뉴스에 실린 기사다.

 

미국에서 '뱀 목사'로 불리는 제이미 쿠츠 목사가 독사에 물려 사망하는 변을 당했다.

16(현지시간) CNN AP 통신에 따르면 쿠츠 목사는 전날 오후 830분께 자신이 목회하는 켄터키주 교회에서 뱀에 물린 채 귀가했으며 오후 10시께 결국 집에서 절명했다.

 

지역 경찰은 신고를 받고 출동한 구급대가 쿠츠 목사에게 병원에 가자고 설득했으나 거부당했다고 밝혔다.

 

뱀 다루는 능력을 지닌 그는 일부의 성경 해석을 토대로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믿음만 있으면 독사에 물려도 해를 입지 않는다'는 이른바 뱀 구원설을 신봉해왔다.

 

그는 이를 입증하기 위해 다큐멘터리 전문채널인 내셔널지오그래픽에도 출연해 방울뱀 등 온갖 종류의 독사를 다루는 시범을 보인 바 있다.

 

내셔널지오그래픽은 웹사이트에서 쿠츠 목사에 대해 "뱀에 물려 자기 손가락의 절반을 잃고 다른 사람들이 예배 중에 죽어가는 것을 보더라도 뱀들을 계속 움켜쥐면서 성령의 믿음을 따라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뱀 물림 등 신비주의 현상을 이용한 개신교의 전도 행위는 미국의 대부분 주에서 법으로 금지돼 있으나 이번에 사고가 발생한 켄터키주 등 중부 내륙과 남부 일부 지역에서는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다.

 

쿠츠 목사는 2008년 뱀 74마리를 집에서 보관하고 있다가 체포됐으며 지난해 2월에는 독사를 소지한 채 테네시주에 들어갔다가 체포돼 1년 보호관찰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테네시주는 1947년 교회에서 5명이 뱀에 물려 사망하자 뱀을 이용한 목회활동을 금지했다고 CNN은 전했다.

 

jahn@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14/02/17 06:53 송고

 

언어는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세상의 모든 철학자는 언어의 중요성을 가장 강조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하이데거이다. 그가 한 이 말을 너무도 유명해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Die Sprache ist Das haus des seins. / Language is the house of Being.). 언어는 어떠한 세계를 만들어 낸다. 그러니까, 우리가 언어를 어떻게 사용하느냐, 언어를 어떻게 이해했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다른 세계를 살게 되는 것이다. 그 세계를 매트릭스라고 한다. ‘매트릭스자궁이라는 뜻이다.

 

키아누 리브스가 주연한 <매트릭스 Matrix>라는 영화를 보면 그게 무엇인지 명확히 알 수 있다. 이 영화는 미래에 발생할 수 있는 일을 상상하여 만든 영화다. 배경은 2199년이다. 인공지능(AI)의 발달로 인해 기계가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자 기계는 인간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인간과 전쟁을 벌인다. 누가 셀까? 당연히 인공지능을 탑재한 기계가 세다. 그래서 인간은 점점 삶의 자리를 잃어간다. 기계에게는 단점이 하나 있었다. 그들도 에너지가 필요한데, 그 에너지원은 태양으로부터 왔다. 그래서 인간들은 생각했다. 태양을 차단하면 기계들은 힘을 잃을 것이라고. 인간들은 핵을 터뜨려 핵구름으로 하늘 덮었다. 성공적이었다. 기계들은 당황했다. 그러나 기계들은 똑똑했다. 어떻게 에너지를 얻으면 좋을지 생각했고, 그들은 그 방법을 찾아냈다. 바로 인간에게서 에너지를 얻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기계들은 매트릭스라는 인공자궁을 만든다. 그리고 인간과의 전쟁에서 포로로 잡아온 인간들을 매트릭스에 집어넣는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를 한 번에 쪽 빨아 쓰는 게 아니라, 매트릭스에 집어넣은 뒤, 그 인간이 거기에서 수명이 다할 때까지 살아있도록 만든다. 기계들은 매트릭스에 갇힌 인간이 나는 지금 매트릭스에 갇힌 게 아니라 나의 인생을 살고 있어라고 느낄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한다. 매트릭스에 들어간 인간은 그 프로그램을 뇌에 접속하게 되고, 그 프로그램을 통해서 일상을 사는 것처럼 산다. 태어나고, 성장하고, 친구랑 놀고, 사랑하는 사람도 만나고, 가정도 꾸미고, 아픔도 당하고, 그러다 죽는 인생의 사이클이 매트릭스 안에서 그대로 재현된다.

 

매트릭스 안에서 인간들은 현실의 세계와 똑 같은 아니 그보다 더 현실적인(이것을 하이퍼 현실이라고 한다) 인생을 누린다. 그런데, 여러분에게 묻고 싶다. 매트릭스 안에서 지금 누리고 있는 현실이 인생인가?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살고 싶은가? 매트릭스에 웅크리고 가만히 갇혀 인공지능 기계가 마련해준 프로그램에 의해서 안락하고 평안하게 살고 싶은가? 아니면, 그 매트릭스를 박차고 나와 진짜 현실, 어렵고 힘들지만, 나의 인생을 자유롭게 살고 싶은가?

 

<매트릭스> 영화의 주인공 니오(Neo)’는 매트릭스 안에서 그게 마치 현실이라고 생각하며 살던 사람이다. 그런데 어느날 이상한 꿈을 꾼다. 자신의 인생이 현실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이것은 인공지능 기계들의 입장에서는 일종의 버그. 그때 출동하는 요원이 있다. 그게 그 유명한 스미스 요원이다. 그는 버그가 발생할 때마다 가상현실에 나타나서 그 버그를 바로 잡는다.

 

그러던 어느 날, 니오는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현실에서 매트릭스 안으로 들어온 동지들의 도움으로 매트릭스에서 깨어난다. 그 장면은 너무도 중요해서, 한 번 같이 보는 것이 좋다



성경은 정말 위대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그것이 언어로 되어 있다는 것을 잊는다. 언어는 어떠한 현실을 담아내고 가리키고 있는데, 마치 그 언어 자체가 현실인양 잘못 생각한다. 그렇다 보니, 그 언어에 갇혀, 매트릭스에 들어가는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또한, 어떠한 사악한 무리들은 그 성경의 언어를 이용하여 사람들에게 나쁜 짓을 하기 위하여 매트릭스를 만들어 놓고 사람들을 현혹시켜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매트릭스 안으로 끌어들이기도 한다. 그것을 신앙이라고 생각한 순진무구한 사람들은 어처구니 없게도 그들의 사악함과 폭력의 희생자가 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이 어떠한 폭력의 희생자인지도 모른 체 살아간다.

 

어떤 이들은 성경공부를 통해 사람들을 매트릭스 안에 가두어 버린다. 성경공부하는 이들은 자신이 매트릭스 안에 갇힌 줄도 모르고 즐거워한다. 안타까운 일들이 우리의 신앙생활의 현장에 많이 발생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방법이 없다. 성경공부 해야 한다. 그러나, 매트릭스 안에 가두는 성경공부가 아니라, 매트릭스 밖으로 탈출하는 성경공부를 해야 한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내가 여러분과 함께 하고 싶은 성경공부의 방향이다. 여러분이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모르지만, 나에게 니오가 매트릭스에서 깨어나오는 것과 같은 경험이 있었다. 그렇게 매트릭스에게서 빠져나오고 나니, 다시는 매트릭스 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매트릭스에 갇혀 가상현실/가상신앙을 하고 있는, 노예와 같이 갇혀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 나의 사명이라고 느꼈다. 나랑 같이 성경공부 해 보신 분들은 지금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실 것이다.)

 

본문은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그리스도를 전하는 장면이다. 나다나엘은 빌립의 말을 믿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예수님을 직접 만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는 예수님을 알아보고 이렇게 고백한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49). 이 고백이 있기 전,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 보았노라고 말씀하셨다. 무화과나무 아래는 그당시 성경연구하기 가장 적합한 장소로 꼽혔다. 요즘으로 따지면, 도서관인 것이다.

 

성경공부를 하지 않으면, 메시아가 눈 앞에 나타나도 그를 알아볼 수 없다.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향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임금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열심을 다해 성경공부를 했기 때문이다.

 

매트릭스에서 빠져나오는 성경공부, 나를 넘어서는 성경공부는 무엇인지 살짝 설명해 보겠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구약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는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보는 히브리성경과 우리 기독교인들이 보는 구약성경은 약간 다르다. 내용이 다른 게 아니라, 그 배치가 다르다. 이것을 간과하면 아주 큰 것을 놓치게 된다.

 

유대인들의 성경(Tanak/타나크)은 토라(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예언서, 그리고 성문서(시편, 욥기, 잠언, 룻기, 아가서, 전도서, 예레미야애가, 에스더서, 에스라-느혜미야서, 다니엘서, 그리고 마지막에 역대기)로 되어 있다. 토라로 시작한 성경은 역대기로 끝난다. 성문서의 마지막 역대기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백성들의 이상적인 회복의 모습을 담고 있다(김근주, 나를 넘어서는 성경읽기, 90).

 

그런데, 우리 기독교인들이 읽는 성경은 그 배치가 확연히 다르다. 내용이 다른 게 아니다. 배치가 다르다. 기독교의 구약성경은 오경, 역사서, 시가서, 그리고 마지막에 예언서가 나온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 처음 기독교인들은 구약성경을 읽을 때, 히브리어로 되어 있는 성경을 읽지 않았고, 헬라어로 된 구약성경을 읽었다. 그것이 그 유명한 ‘70인역(septuaginta/셉투아진타)’이다.

 

히브리인들의 구약성경은 그 자체로 안정된 구조를 지닌다. 역대기가 마지막에 오면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백성들의 이상적인 모습으로 성경이 끝난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의 구약성경은 아주 불안정하게 끝난다. 성경의 마지막이 예언서들로 배열되어 있고, “말씀을 떠난 현실에 대한 강력한 심판 선포와 더불어 다가올 새롭고도 참된 회복에 대한 기대를 담고 있다(김근주, 91). 왜 그럴까? 왜 기독교인들은 구약성경의 배열을 이렇게 불완전하게 마치도록 해 놓았을까? 누구 때문에? 바로, 이제 곧 오실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 때문이다. “기독교의 구약성경은 필연적으로 신약성경을 통해 성취되고 실현된다”(김근주, 91).

 

여기서 아주 중요한 것을 깨닫게 된다. 예수는 구약의 성취이시다. 이 사실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구약의 마지막에 놓인 예언서들이 전하는 기대와 소망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고, 다가올 날들에 대한 기대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김근주, 92).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 기독교인들이 가졌던 기대와 소망이 무엇인지를 구약성경을 통해서 알지 못하고, 그저, “예수 믿고 구원 받아 천국 간다는 기독교의 클리쉐(진부한 구호)만 반복하고 만다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무엇인가 굉장히 미흡한 표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여러분에게 묻고 싶다. 매트릭스 안에 갇혀, 프로그램밍된 삶을 살면서 평안하다 하며, 자기를 잃어버린 삶, 노예 같은 삶을 살 것인가? (그들이 주는 고깃국과 밥을 먹으며 노예로 살것인가) 아니면, 매트릭스를 박차고 나와, 노예 같은 삶을 사는 이들에게 자유를 건네주기 위해서 투쟁하는 삶,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삶을 살 것인가? (광야 같은 삶이지만, 주님이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시는 것을 믿고, 바라며, 자유인으로 살 것인가?)

 

우리가 성경을 진지하게 봐야 하는 이유와 성경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 실제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매트릭스에 갇혀 노예 같은 삶을 살지 않고, 매트릭스를 깨뜨리고 나와서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한 자유인으로 살기 위하여

 

2) 인생/신앙의 여정 가운데, 만나게 되는 알 수 없는 불행한 일들에 좌절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의 신비로운 은혜를 경험하여,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

 

3) 지금 하나님께서 복 내려 주시고 계신데, 그것을 모르고, 불평하며 눈 앞에 놓인 복을 차버리거나, 하나님의 선교를 가로막는 어리석고 불행한 삶을 살지 않기 위하여

 

지금도 여전히, 주님께서는 나다나엘과 같이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을 찾으신다. 우리 함께 무과화나무 아래로 가자.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공부하자. 그래서 매트릭스 안에 갇히지 말고, 매트릭스 안에서 빠져 나와, 자유를 누리며, 광야 같은 삶일지라도 거기에 임하시는 깊으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그분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참된 이스라엘 사람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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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0. 1. 25. 07:01

[책 읽으며 드리는 기도]

 

주님, 이것을 머리가 기억하지 말게 하시고,

피와 손과 발이 기억하게 해주세요.

그리하여,

무엇보다 피와 손과 발이 선해지게 하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0. 1. 25. 06:58

누가 악인인지를 가르쳐 달라는 간구의 기도

[누가 악인인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악인들에게는 평화가 없다." (이사야 48:22).

 

그러나 주님, 누가 악인입니까?

누가 우리의 이웃입니까, 라고 물었을 때,

선한 사마리아의 비유를 통해 누가 이웃인지,

누가 선한 사람인지를 가르쳐 주신 것처럼,

누가 악인인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옵소서.

모두, 자기는 악인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자기는 잘못이 없다고 말합니다.

주님, 누가 악인입니까?

주님, 제가 악인입니까?

어떤 시인의 고백처럼, 주님,

"간밤에 나는 악인이었는지 모릅"니다.

주님, 우리는 부지불식 간에 악인이 됩니다.

주님, 제가 악인입니다.

제게는 평화가 없습니다.

주님, 나를 구원해 주소서.

간절히 바라오니,

주님, 나를 구원해 주소서.

우리를 구원해 주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0. 1. 23. 09:16

순종을 간구하는 기도

(삼상 15:10-23)

 

주님,

주님께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주님께 순종하는 일은 위계질서를 세우는 일이 아니라

사랑의 역사를 이루는 일임을 믿습니다.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생명의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우리에게

날마다 좋은 것을 주시는 주님의 마음을 알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순종을 통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는 삶을 살아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높이 올림을 받아 주님 곁에 섯듯이,

우리도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삶을 살게 하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1. 23. 09:13

샤마 – 순종

(삼상 15:10-23)

 

하나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신다. 사무엘은 이 말씀을 듣고 밤새껏 기도한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괴로웠다. 사울 왕에 대한 연민과 하나님 말씀에 대한 확신 사이에서 고민했던 것 같다. 근심 되는 일이 있으면 밤새껏 기도하는 것은 중요하다. 기도하고 나면 뭔가 마음에 응답이 오기 때문이다. 밤새껏 기도하고 났을 때, 사무엘은 어떤 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소식을 듣는다.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발길을 돌려 길갈로 내려갔다”(12).

 

이것은 사무엘의 갈등을 해소시키는 소식이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 벌인 사울의 행동은 하나님이 후회하실 만 한 것이었다. 사울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위하여 기념비를 세웠다. 기념비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손의 의미를 갖고 있다. , 자신의 손 또는 능력을 기리기 위한 것이 기념비였다.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세우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웠다. 그의 마음에는 온통 자기 자신만이 있다. 하나님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하나님을 마음의 중심에 모시고 있지 않은 사람을 통해 하나님은 일 하실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사무엘은 사울의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증을 얻었다. 그리고 사무엘은 사울에게 찾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23). 사울 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세웠어야만 한다.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이것은 헤렘법을 말하는데, 헤렘법의 목적은 진멸에 있지 않고, 진멸을 통해서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는 것에 있다. 사무엘의 질문은 이것이다.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하셨거늘, 샤마하지 않았는가?

 

샤먀라는 히브리어는 듣다의 의미를 갖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그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라는 뜻이다. 그래서 단순히 듣는 것이 아니라, ‘청종하다라는 의미이다. 이것이 바로 순종이다. 그러니까, 사무엘이 사울에게 묻는 것은 이것이다. “왜 순종하지 않았는가?”

 

이 질문에 사울은 이렇게 변명한다.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들과 소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15). 사울은 자기 생각에 빠져 있다. 순종이란 하나님의 편에 서서 하나님의 생각을 공유하는 것인데, 사울은 자기 생각에 빠져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했다. 이러한 사태에 대해서 사무엘은 다음과 같은 말로 사울의 잘못된 생각을 질타한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22).

 

번제와 제사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사무엘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함(순종함)이 없이 번제와 제사를 드리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마음이 하나님께 가 있지 않은데, 하나님께 번제와 제사를 드리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면서 사무엘은 이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사신(邪神) 우상이란 사악한 거짓 신을 말한다. 사울이 한 행위는 신앙행위가 아니라, 우상숭배 행위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왜 그런 것일까?

 

우선 순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부터 바르게 가질 필요가 있다. 순종이란 하나님의 마음에 내 마음을 두고 그가 말씀하시는 것에 온 존재를 바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순종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위계질서적인 생각에 갇히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우리는 피조물이니까, 하나님은 주인이시고 우리는 종이니까, 위계질서적인 생각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조선시대에 마님이 돌쇠에게 명령할 때 순종해야 하는 것과 같은 상황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마님이 말씀하신다. “얘 돌쇠야 나무도 좀 해 오고 물도 좀 길어 오고 마당도 좀 쓸어 놓거라!” 그러면 돌쇠는 네 마님~”이라고 대답한다. 왜냐하면, 돌쇠의 입장에서 마님의 말씀은 주인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오직 위계질서에서 나오는 명령과 복종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순종이란 이처럼 위계질서에서 나오는 명령과 복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과 우리 피조물과의 관계는 위계질서적인 관계가 아니라, 사랑의 관계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행위는 사랑의 행위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순종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일 뿐이다.

 

순종을 생각할 때 이점을 놓쳐서는 결코 안 된다. 그렇다면 왜 순종을 해야 하는가? 이것도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이어주는 사랑의 관점에서 살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말씀하신다. 사랑이 담긴 말은 언제나 생명으로 이끈다.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하면, 떡을 달라는데 돌을 주고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주는 사람은 없다. 사랑의 마음에서 나오는 행위는 모두 생명으로 이끌어 주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결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이끌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그곳에서 이끌어 잔잔한 물가로 쉴만한 물가로, 즉 생명으로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왜 순종해야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생명을 이끄는 사랑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순종은 결코 하나님을 위한 일이 아니다. 순종은 하나님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 혼나지 않기 위한 것도 아니다. 순종은 모두 우리 자신을 위한 일이다. 순종은 하나님에 대한 공덕 쌓기가 아니다. 순종은 우리를 위한 일,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리시는 은혜이다. 순종할 때 생명을 얻고 이로운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순종할 수 있는가? 순종은 하나님의 사랑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사랑의 응답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가끔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말씀하신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언제나 사랑하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요한복음은 이렇게 증거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3:16-17).

 

요한복음은 또한 이렇게 증거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1: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끊임 없이 말씀하신다. 그런데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셔서 그 말씀을 육신이 되게 하여우리에게 보내셨다. 그 말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사울의 가장 큰 잘못, 그것으로 인해서 왕위를 박탈당하게 되는 이유는 그가 그의 인생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우지 않고, 자기 자신의 힘으로 기념비를 세웠기 때문이다. 순종이란 인생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우는 것이다. 요한복음이 증거하고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우리가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로 우리의 인생을 세워 나간다는 것을 뜻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세상의 빛이시요,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보여주는 성례전(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보이는 은혜)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 그 자체이시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생명으로 이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빵, 생명의 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생명의 빵이시며 생명의 물이신, 하나님의 사랑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공기 중에 떠돌아 다니는 하나님의 음성(말씀)을 고도의 수련을 통해서 분별하고 잡아낸다는 뜻이 아니다. 잘 들리지도 않고 잘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의 말씀(음성)을 듣느라 시간 낭비 할 필요가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미 우리 가운데 육신으로 오신, 즉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계신,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는 것이 순종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순종이란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는 것을 말한다. 그분의 삶과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집중하여, 그분이 걸어가신 길을 따라 나서는 것이 순종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이끄시기 위해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신다. 그 요구는 강제적이고 위계질서적인 요구가 아니라, 사랑의 요구이다. 사랑의 역사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사랑의 역사에 응답하는 길은 우리 자신을 위한 일이요, 우리가 사는 길이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9:23-24).

 

사울은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고, 말씀으로 인생을 세우지 못하고,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자신을 위하여 기념비를 세웠다. 그래서 그는 버림 받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자기를 부인하고, 말씀으로 인생을 세우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숨을 잃으면, 즉 그리스도께 삶을 드리면 생명을 얻지 아니 하겠는가? 이렇게 그리스도에게 온 존재를 집중하여 생명을 얻는 것, 바로 이것이 순종이다.

Posted by 장준식
풍경과 이야기2020. 1. 18. 05:16

바다낚시 멀미 경험

 

지난 연말, 교회 집사님들과 바다낚시를 갔다. 처음 가는 바다낚시라 긴장도 되었고, 주변에서 바다낚시 가서 겪을 수 있는 '멀미'에 대한 조언을 많이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름 잘 대비한다고 했는데, 그만 출항 후 1시간 30분 되는 시간부터 멀미가 시작되었다.

 

금문교 밑을 지나 들어간 태평양의 파도는 거칠었다. 처음에는 파도에 몸을 실어 놀이기구 타는 것처럼 출렁였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멀미가 왔다. 마인드 콘트롤을 하려고 노력했다. '이건 놀이기구야. 그냥 즐기면 돼.' 그런데, 그게 잘 되지 않았다. 마인드 컨트롤의 임계점을 넘어선 것 같았다. 그때부터 그냥 바닥에 눕고만 싶었다.

 

선실 안 의자에는 사람들이 자리를 이미 잡고 있어 자리 양보 부탁을 할 수 없었다. 한국 사람들도 아니었고, 대개 영어를 쓰는 사람들이었지만, 러시아 사람들과 국적을 알 수 없는 사람들도 섞여 있었다. 나는 선실 안에 눕는 것을 포기하고, 그나마 한적한 선수에 누웠다. 그런데, 파도가 거칠어지며 배 안으로 들이친 바닷물이 누운 나를 덮쳐 왔다. 손 하나만 까딱여도 어지럽고 토할 것 같아 덮쳐 오는 파도를 온 몸으로 받으며 견뎠다. 그렇게 1시간 30분을 더 갔다.

 

세 시간 항해 후, 배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오전 9. 더 큰 문제가 발생했다. 배가 서니 파도에 배는 더 출렁이기 시작했다. 죽을 것 같았다. 때마침 목적지에 도착하여 사람들이 바다낚시를 시작한 덕에, 선실 안의 의자가 비었다. 나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선실 안 의자에 몸을 눕혔다. 차가운 뱃바닥에 눕는 것보다 나았다. 그런데 문제는 추위였다. 이미 바닷물을 온 몸에 뒤집어 쓴 뒤라 바닷바람이 솔솔 불면서 몸을 춥게 만들었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핸드폰 차저(charger)겸 손난로(hand warmer)를 부여 잡고 추위를 참았다.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오는 그 작은 물건이 나의 유일한 생명 보존 장치였다. 나는 그 자그마한 물건이 뿜어내주는 온기를 필사적으로 붙들고 잠이 들려고 노력했다. 다행히 그 손난로가 마중물이 되어 잠이 들 수 있었다.

 

얼마를 잔 것일까. 잠에서 깨어 보니 아직도 사람들은 고기를 낚느라 분주했다. 그런데 몸은 따뜻해져 있었다. 몸이라는 것은 정말 대단했다. 몸은 체온의 항상성을 유지하게 위해서 잠이 들었을 때 저절로 몸의 체온을 높였다. 깨어 있을 때 몸의 체온을 높이려고 노력해도 아무 소용 없더니, 잠이 들어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 데 몸은 스스로를 보호했다.

 

때로 우리는 자신의 의지를 통해 무엇을 성취하려 들기 보다, 자기 자신을 그냥 놓아버릴 때가 있어야 한다. 그러면, 생명은 자기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가장 적절한 삶의 체온을 선물로 주는 것 같다. 이것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라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다.

 

배멀미를 하며 꼬박 8시간을 배 안에 누워 있었다. 8시간 동안 배멀미 하며 신음 가운데 있었던 나를 돌봐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너무 춥다고, 혹시 난로 있냐고 선장에게 물었을 때, 그런 거 없다고, 그냥 투박한 우비 하나 건네 받은 게 전부였다. 그리고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낚시를 하는 동안, 그리고 뭍으로 돌아오는 동안, 8시간 동안 아무 움직임 없이 누워만 있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날 나를 돌봐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사실 배 안의 모든 사람이 나를 돌봐준 것이었다. 배멀미에 고통 당하고 있는 나를 보며 그들은 아무 것도 해 줄 게 없다는 것을 알았던 것같다. 차라리 아무런 시선을 주지 않는 것, 아무 말을 붙이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도움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 같다.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었고, 입을 열 힘조차 없었던 나에게 시선을 주고 말을 붙였다면, 나는 정말로 더 괴로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날 나는 선실 안의 한 의자(4, 5명이 앉을만한)를 차지하고 꼼짝 못하고 누워 있었지만, 그 누구도 누워 있는 나한테 일어나라고, 조금 비켜달라고 말을 하거나 불쾌한 시선을 보내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무언으로 나에게 자리를 양보한 것이고, 돌봐준 적 없었으나, 정성을 다해 돌봐주었던 것이다.

 

8시간의 멀미는 배가 다시 금문교 밑을 지나 항구로 들어 왔을 때 점차 사라졌다. 그리고, 두 다리가 뭍을 밟자 언제 그랬나 싶을 정도로 멀쩡해졌다. 형편 없이 젖었던 옷은 모두 말라 있었고, 잠을 많이 자서 그런지, 몸은 오히려 상쾌했다.

 

인생이란 참 알 수 없는 것이다. 누군가를 돌본다는 것도 참 신비스러운 것이다. 아무도 나를 돌봐준 이 없으나, 모든 이가 나를 돌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삶의 무한한 신비에 휩싸였다. 그리고, 문득, 먼 바다를 아득히 쳐다보며 삶에 대하여, 사람에 대하여 깊은 묵상에 잠기게 되었다. 삶은, 사람은 참 신비로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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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0. 1. 17. 03:44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을 간구하는 기도

(골로새서 1:1-14)

 

주님,

골로새 교회를 향해 드린 기도가

우리 교회의 기도가 되게 하소서.

우리도 그 기도처럼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이 충만해져서

아침에 하나님의 뜻을 알았으니, 저녁에 순교해도 좋다는 믿음으로

신실한 일꾼이 되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며

개척하고

복음을 전하게 하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1. 17. 03:36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

(골로새서 1:1-14)

 

골로새서는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다.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세운 교회가 아니다. 에바브라(Epaphras)가 세운 교회다. 에바브라는 바울이 에베소에 있는 두란노 서원에서 사역할 때 문하생으로 있었던 인물이다. 참 대단한 거다. 복음을 듣고, 그 복음을 위해서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교회를 세우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나는 조지아에서 교회를 개척한 경험이 있다. 교회를 개척한 뒤, 우리 교회에서 사역한 수련목들도 대개 다 개척을 했다. 한 수련목이 우리 교회에서 사역을 마치고 교회를 개척할 당시, 여러 교회에 후원을 요청하기 위하여 써준 추천서에 나는 개척의 필요성을 절절히 서술한 일이 있다. 개척하는 일은 연못에 계속하여 맑은 물을 공급하는 것과 같다는 논지였다. 물은 고이면 썩는다. 교회 개척은 교회라는 물이 썩지 않도록 계속하여 맑은 물을 공급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지난 연말에 교회의 역사를 정리하며, 우리 교회의 창립일을 2017 430일로 정한 것도 사실 그런 원리다. 고인 물이 되지 않고, 연못에 맑은 물을 공급하기 위하여, 새로운 교회는 늘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나와 함께 사역을 한 후배 목회자들이나, 주변의 후배 목회자들에게 늘 개척을 권면한다. 개척하여 연못과 같은 교회의 맑은 물이 되라고 말한다. 물론, 대개 맑은 물 되는 것을 두려워 한다. 개척하는 것을 두려워 하는 후배들을 내가 나무랄 자격은 없지만, 안타까운 마음은 든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성장하면 나는 교회 개척하는 것을 돕고 싶다. (물론 내가 또 개척을 나가게 되는 경우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원래 아쉬운 사람이 우물을 파는 법이니까. 이런 일이 없으면 좋겠다.^^ 나도 때론 힘들다.)


복음을 듣고, 에바브라와 같은 열정이 생겨나는 그리스도인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바울이 에바브라에 대하여 칭찬하면서 말한 것처럼, 성령 안에서 신실한 일꾼이 되어 전도하고 선교하며 교회를 개척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믿음을 갖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복된 일인가. 우리 모두 그러한 믿음이 더욱 성장하도록 간구하고 기도하면 좋겠다.

 

골로새서의 주제는 그리스도의 우월성이다. 복음주의적인 주석서들은 대개 이렇게 소개한다. ‘그리스도의 우월성’. 그러면서 골로새서는 잘못된 가르침들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주장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잘못된 가르침은 이성주의, 율법주의, 금욕주의이다. 이게 아주 조심스러운 이야기다. 잘못 이해하면, 우리에게 이성, 율법, 금욕은 다 필요 없고, 그리스도의 우월성만 중요하다고 하는 이야기로 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마치 기독교는 반이성주의, 반율법주의, 반금욕주의인 것처럼 주장하는 것 같다.

 

이러한 생각은 필연적으로 반과학주의와 탈윤리주의를 불러온다. 예수 그리스도만 중요하고, 다른 것을 다 필요없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은혜로운 것 같지만, 굉장히 위험한 생각이다. 반과학주의와 탈윤리주의는 세상을 등지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반과학주의와 탈윤리주의에 사로 잡히면, 세상과의 소통이 멀어지고, 세상의 고통에 관심을 두지 않게 되며, 자기 신앙 안에 갇혀 고립되기 십상이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믿음이 좋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정말 답 없는 신앙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우월성은 그리스도 외에 다른 아무 것도 필요 없다는, 극단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스도는 이성의 완성이시고, 율법의 완성이시고, 금욕의 완성이시다. , 이성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의미 있는 것이고, 율법도 마찬가지고, 금욕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이성과 율법과 금욕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 그러한 측면에서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만물 안에 있고, 만물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다. , 그리스도는 모든 것의 근원이고 근본이시기 때문이다.

 

본문은 아주 중요한 기도를 담고 있다. 9절부터 12절이 기도이다. 바울과 디모데는 골로새 교회의 지체들이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이 충만하게 되기를 간구한다. 9절에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에서 아는 것에피그노신이라는 헬라어를 쓴다. 이것은 의도적인 표현이다. 골로새 교회가 맞닥뜨린 도전은 영지주의(그노시스즘)’에 대한 것이었다. 영지주의자들은 구원을 받으려면 자신들이 주창하는 지식(그노시스)’를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대단히 매력적인 말이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을 자신만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우쭐해진다. 그런 측면에서 요즘은 그 누구도 우쭐해질 수 없다. 모든 지식이 인터넷을 통해 공유되고 있고, 누구든지 어떤 지식에라도 접속할 수 있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자신들이 어떠한 지식을 독점하고 있는 듯 말하는 집단은사이비. 대개 이단이나 저급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이 푸는 성경의 내용이 대단히 비밀스러운 것인데 그 비밀을 특별히 노출하고 있는 양 말한다. 지식의 독점을 주장하는 사람은 건전하지 못한 사람이다. 진리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다만 진리는 감추어져 있을 뿐이다. 자신만이 진리를 독점하고 있고 안다고 말하는 바로 그 사람에게 진리는 자신을 숨긴다. 그러나, 진리를 어린 아이와 같이 사모하고 누구와도 나누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진리를 모습을 드러낸다.

 

바울은 기도한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며!”(9, 10). “아는 지식”, (knowledge)”는 매우 중요하다. 모든 것의 시작은 에서 시작된다. “조문도석사가의(朝聞道夕死可矣)”라는 말이 있다. 공자의 <논어> ‘이인편에 나오는 말이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뜻으로, 참된 이치를 깨달았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이다.

 

나는 이것이 이렇게 들리다. “아침에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면, 저녁에 순교해도 좋다!” 바울에게서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뜻 알게 된바울의 동역자들 중에, 위에서 이야기 한 에바브라 이외, 에바브로디도와 디도가 있다. 에바브라, 에바브로디도, 디도는 한결같이 바울처럼 순교하기를 결심하고 복음 전하는 일에 뛰어 들었다. 에바브로디도는 옥에 갇힌 바울을 돌보며 빌립보 교회와 가교 역할을 했다. 그가 왜 그런 수고로운 일을 했을까?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디도는 그당시 목회하기 가장 힘들다는 크레타 섬에 가서 목회를 했다. 크레타 섬 사람들은 디도서에 나오듯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했고, 마음이 사악했고, 행동이 게을렀다. “그레데인 중의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 하니 이 증언이 참되도다”( 1:12-13). 그런데, 디도는 왜 그런 곳에 가서 기꺼이 교회를 세우고 목회를 했을까?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에바브라도 마찬가지다. 그가 에베소에 있는 두란노 서원에서 복음을 듣고, 고향인 골로새로 돌아가 교회를 세우고, 그것도 모자라 주변 도시인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에 교회를 개척한 이유가 무엇인가? 누구는 교회 하나를 세우기도 힘든데, 세 군데나 교회를 개척한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아침에 하나님의 뜻을 알면, 저녁에 순교해도 좋다.”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두려워 하는가? 우리는 왜 이렇게 게으른 종으로 사는가? 바울이 골로새 교회의 지체들을 위해 드린 기도가 우리 교회를 향해 드리는 기도로 들리면 좋겠다. 그래서 우리도 그 기도처럼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이 충만해져서, ‘아침에 하나님의 뜻을 알았으니, 저녁에 순교해도 좋다는 믿음을 가지고, 세상에 희망을 주는 교회,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를 세워 나가는,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들이 모인, 주님의 몸된 교회가 되면 좋겠다. 우리 얼른 부흥해서, 교회 개척 많이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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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0. 1. 14. 08:29

예언과 환상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을 간구하는 기도

(잠언 1:20-33)

 

주님,

주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예언)과 환상을 주셨는데

우리는 지혜롭지 못하여 그 지혜의 말씀과 환상을

놓쳐 버리곤 합니다.

예언과 환상을 가벼이 여기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예언과 환상을 소중하게 여길 때

우리의 인생과 공동체는 주변여건환경에 의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예언과 환상 안에서 평안을 얻게 될 줄 믿나이다.

주여,

예언과 환상을 가벼이 어리석은 자 되지 말게 하시고

그것들을 단단히 마음에 품는 지혜로운 자 되게 하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1. 14. 08:15

You’re in good hands

(잠언 1:20-33)

 

세상에는 참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그 많은 일들에 우리가 다 적절하게 대처하기도 쉽지 않다. 우리가 신앙을 갖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도 이런 것들 때문이다.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일, 우리가 컨트롤 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하여 우리 보다 큰 존재인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맡겨, 우리의 삶을 평안케 하고자 함이다.

 

기복신앙이라는 것이 매우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긴 하지만, 모든 종교에는 기복(복을 간구함)’적인 요소가 들어 있다. 거기에만 매달리는 것이 문제지, 만약 우리의 신앙에 기복의 요소가 없으면, 누가 종교에 매력을 느끼겠는가. 한 마디로, 우리 인간은 유한하지만, 무한하다고 생각하는 존재, 하나님에게 우리의 삶을 맡기며,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안에서 평안하기를 바라는 것이, 신앙의 기본적인 욕구 중 하나이다.

 

우리는 살면서 우리의 연약함을 의식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한다. 우리에게 지혜를 주셔서 우리에게 발생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그야말로 지혜롭게대처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간구한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그러한 지혜를 얻기에 충분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잘 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육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모든 성경이 그렇지만, 특별히 잠언은 우리에게 삶의 지혜를 깊이 가르쳐 준다. 나는 잠언서 읽는 것을 참 좋아한다. 마침 잠언서는 31장으로 구성되어 있어, 하루에 한 장씩 읽으면, 한 달에 한 번씩 통독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성문서/지혜서’(시편, 잠언, 전도서)는 삶의 방향을 잃은 것 같았을 때, 어디로 가야할 지, 무엇을 해야 할지 잘 모를 때 묵상하면 신비스럽게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는 말씀이다.

 

본문을 보라. 우리를 부르는 것이 있다. 우리가 평소 그것을 잘 인식하고 있지 못해서 그렇지, 우리가 시집 가야하고 장가가야 하고 소도 사야 하고 논과 밭에 나가서 할 일이 많아서’, 그냥 지나쳐서 그렇지 우리를 매일 부르는 것이 있다. 그게 바로 지혜이다. 지혜는 우리를 부른다.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시끄러운 길목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그 소리를 발하여 이르되!”(20).

 

이렇게 불러 대는 데도, 우리는 지혜가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산다. 지혜는 우리를 불러서, 어리석은 사람과 지혜로운 사람이 어떻게 다른 지를 이야기한다. 기본적으로 어리석은 사람은 지혜를 멸시한다. 귀를 닫고 듣지 않는다. 그러다, 재앙을 만나면 울고, 슬퍼한다. 그러나, 반대로 지혜로운 자는 지혜가 부르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환란의 때에 구원을 받는다.

 

이게, 당연한 이야기 같고, 쉬운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어리석은 자의 가장 큰 특징은 자신이 지혜로운 줄 안다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는 심리학적 용어로 메타인지가 부족하다.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자신이 무엇이 부족한지 알지 못하고, 자신을 객관적으로 이야기 해주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성경은 어리석은 사람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메타인지가 부족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대저 너희가(어리석은 사람)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 나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나의 모든 책망을 업신여겼음이니라”(30).

 

내가 이런 말을 강조해서 하는 이유가 있다. 하나님은 우리 교회에 예언과 환상을 주셨고, 그 말씀을 굳게 붙들고 두려움 없이교회를 세워 나가게 하셨다. 그런데, 문제는 그 예언과 환상을 우리가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느냐이다. 우리 교회에 주신 예언과 환상의 말씀은 어디에서 왔는가? 몇 번을 말씀드렸는데 기억하고 계신가? 에스겔서 16장과 47장의 말씀이다.

 

에스겔서 16장은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고 말씀하신 주님께서, 피투성이 같은 연약한 이스라엘을 씻기시고 입히셔서, 왕후의 지위에 올리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다. 에스겔서 47장은 성전에서 물이 나와 강을 이루고 그 강 좌우편에 심긴 나무들이 다음 말씀처럼 되는 환상이다.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47:12).

 

지난 2019128일을 일컬어 코스피 굴욕의 날이라고 부른다. 그날 애플(사과주식회사/우리동네기업)의 주식 시가총액은 1,402조가 되었고, 그 총액은 코스피 전체의 주가 시가총액 1,384조를 넘어섰다. 애플이 주식의 시가총액이 높은 이유가 뭔가? 미래에 대한 성장 기대치가 높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주식 투자를 할 때, 이렇게 미래에 대한 성장 기대치를 말해주는 시가총액을 보고 투자를 한다.

 

그런데, 교회는 무엇을 보고 미래 대한 성장 기대치를 가질 수 있을까? BTS의 팬덤 Army1억명이 넘는다. 여기 1억명은 BTS를 위해서 뭔가 하나라도 구매를 통해서 기여한 사람을 말한다. 그들이 BTS투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미래 성장에 대한 기대치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보고 교회를 정해서 다니며 그 교회의 성장을 위해서 투자하는가? 규모나 시설 등 이런 겉으로 드러나는 시가 총액이 아니라, 그 교회에 주어진 하나님의 예언과 환상(비전)’의 말씀이다.

 

여러분은 내가 바보 같은가? 어떤 바보가 망해가는 교회에 오는가? 여러분은 바보인가? 어떤 바보가 망해가는 교회를 지키는가? 내가 우리교회에 오게 된 것, ‘아 이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 나의 인생을 헌신해야겠구나!’라고 결심한 결정적인 이유는 외적인 것이 전혀 아니다. 바로, 하나님의 예언과 환상의 말씀 때문이다. 미래 성장에 대한 기대치가 없는 곳에 자신의 돈도 아니고, 인생을 투자할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다. 내가 바보처럼 보이는가?

 

3대째 목회자로서, 그리고 진지하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 일에 인생을 건 목회자로서 내가 평소에, 그리고 평생 연마하는 기술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기술이다. 나는 신비주의자가 아니다. 그러나, ‘신비를 믿는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본문에서 지혜가 길거리에서 광장에서, 시끄러운 길목에서, 성문 어귀에서 부르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훈련 받아야 한다. 결국 우리가 하는 신앙생활의 모든 것은 이것을 목적으로 한다. “하나님의 음성 듣기!”

 

<두 교황>이라는 영화가 최근 Netflix에서 상영되어 많은 인기를 끌었다. (꼭 보시라! 정말 좋은 영화다!) 이 영화는 가톨릭의 전현직 교황 두명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이다. 내가 보기에 이 영화의 핵심은 고해성사이다. 두 교황이 서로 고해성사 하는 가운데, 서로의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전직 교황(베네딕투스 16/조세프 라칭거/265)은 교황직을 내려 놓는 자리로, 사직하고 싶었던 추기경(프란치스코/호르헤 베르고글리오/266)은 교황직에 오르는 자리로, 서로의 자리를 찾아간다.

 

그 과정은 서로의 고해성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었다. 전직 교황 베네딕투스 16세는 자신이 교황직을 내려 놓으려는 가장 큰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요즘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다!” 그는 평생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살았다. 아니,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그토록 열심히 공부하며 살았다. 요세프 라칭거는 원래 엄청 유명한 신학자이다. 여성신학자로 유명한 하버드대학의 엘리자베스 피오렌자라는 분이 있다. 사실 이분 보다 더 유명한 분이 그의 남편 프란시스 피오렌자이다. 프란시스 피오렌자가 하버드 대학의 부름을 받았을 때, 본인의 부인을 함께 임용하지 않으면 안 가겠다고 했다. 물론 엘리자베스 피오렌자도 엄청 뛰어난 학자였기에 하버드에서 프란시스 피오렌자의 요구를 승락했지만, 프란시스 피오렌자는 그만큼 뛰어난 학자다. 프란시스 피오렌자의 스승이 누구냐면, 철학자 하버마스와 요세프 라칭거이다교황 베네딕투스 16세는 결국 베르고글리오 추기경과 대화하며 고해성사하는 가운데, 그동안 들리지 않았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내려온다.

 

하나님의 예언과 환상(비전)의 말씀이 없는 곳에 인생을 투자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그리스도인이다. 정말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은 주변여건사정을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언과 환상의 말씀을 고려한다. 그게 없으면 발을 들여 놓지 않고, 그게 있으면 지옥이라도 간다! 루터도 이런 말을 했다. “지옥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다면, 나는 지옥에 가겠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예언과 환상의 말씀, 에스겔서 16장과 47장의 말씀을 소홀히 여기지 마시라. 진지하게, 그리고 아주 소중하게, 여기시라. 마리아가 어린 예수의 말과 행동을 마음에 둔것처럼, 그렇게 내가 간곡하게 드리는 말씀을 마음에 두시라.

 

요즘에 부모들은 스마트폰 때문에 골머리를 썩는다. 아이들하고 매일 같이 스마트폰 때문에 전쟁을 벌인다. 그런데, 그 문제를 진지하게 풀고 있는 책 <포노 사피엔스 Phono Sapiens>의 저자 최재붕 교수는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한다. 지금 시대의 아이들은 스마트폰이 자신의 장기organ’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스마트폰을 무작정 못하게 할 것이 아니라, 스마트폰을 통해서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왜 부모들은 아이들이 스마트폰 하는 것을 못 마땅하게 생각할까? 최재붕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부모들이 스마트폰을 통해서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연 경험이 없고, 그저 스마트폰을 통해서 게임이나 하고 유튜브나 보며 시간을 낭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부모들 자신이 스마트폰을 통해서 그런 비효율적 경험 밖에 못하니, 아이들과 전쟁을 벌이는 것이라고 한다.

 

이 말을 들으며, 목회자로서 이런 생각을 했다. 왜 부모 세대는 아이들에게 교회에 대하여, 신앙에 대하여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여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진지하게 본을 보이지 못할까? 교회에서 싸움 박질하고, 교회가 갈라지고 깨지고, 시대에 뒤처진 복음 이야기만 듣고, 뭔가 혁신적이고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어주는 경험을 하지 못해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다른 말로 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가 신앙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을 통하여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어가는 신비로운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여러분이하나님의 예언과 환상의 말씀을 통하여,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어가는 신비로운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고 싶다. 그러한 경험은 어떻게 하면 가능한가? 하나님의 예언과 환상이 주어진 우리 교회에 그냥 여러분의 인생을 투자하면 된다. 그것을 교회 용어로 교제(fellowship)’라고 한다. 아주 쉽게 말해, ‘참여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 교회에는 에스겔서 47장의 말씀처럼, 생수가 강단으로부터 흘러 나가고 있다. 이것은 내가 우리 교회 와서 드린 첫 새벽기도회 때 본 것이다. 나는 그런 환상 보는 것을 추구하거나 갈망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을 어떻게 하는가. 본 것을 봤다고 말하는 것뿐이다. 증언할 뿐이다. 그것이 강을 이루고 있다. 그 강가에 심기운 나무가 되는 것이 에스겔서의 말씀처럼, 우리의 삶에 잎사귀가 풍성하고 열매가 끊이지 않으며 그 잎사귀가 약재로 쓰임을 받는 놀라운 축복의 삶을 사는 길이다.

 

이삭이 브엘세바에 살며 우물을 팠는데, 팔 때마다 물이 나왔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총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사막에서 우물을 판다고 물이 나오나? 그런데, 이삭은 우물을 팔 때마다 하나님이 물을 주셨다. 성경에서 물은 하나님의 축복을 의미한다. 이삭은 그렇게 하나님께 축복받은 인생을 살았다. 우리교회도 하나님께서 에스겔서 16장과 47장의 말씀을 통해서 복을 내리셨다. 강단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물이 보여야 한다. 지금 여러분의 눈으로 그게 안 보일지라도, 말씀을 믿는 자는 그것을 보는 자와 같다.

 

교회 공동체의 삶에 참여하라. 여러분을 심으라. 여러분을 귀찮게 만들려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복을 주고 싶어서 그렇다. 이 절절한 심정을 보여줄 수 있다며 좋겠다. 나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지혜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다. 이렇게까지 간절하게 이야기했는데도 안 들리는 것은 나의 능력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여러분들의 삶이 지금 어떠한 상태인지를 깨달아,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드릴 것이다. You’re in good hands! You’re in God’s hands and his servant’s hands. God bless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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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나를 넘어서는 성경읽기>

 

김근주 교수가 쓴 책이다. 저자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모든 성경읽기의 목적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이 얼마나 중요한 행위인지를 서술한다. 인간의 삶의 근본적인 변화는 바로 ''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감정적인 변화'가 아니라 '지적 영역에서의 변화'가 일어나야, 마음과 태도와 사고방식이 변하게 되어, 결국 삶 자체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말한다.

 

아주 중요한 통찰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스탠리 하우어워즈의 말이 있다. "If you want to change your way of life, acquiring the right image is far more important than diligently exercising willpower. 삶의 방식을 바꾸고 싶다면 꾸준히 의지력을 기르는 것보다 올바른 개념을 확립하는 일이 훨씬 중요하다."

 

삶의 방식을 바꾸려면 의지력을 기르는 것은 별 소용이 없다. 마음과 태도와 사고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 ''이 마음에 들어와야 삶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읽기는 자기계발이 아니다. 저자는 이것을 계속하여 주장한다. 성경을 자기계발 하듯 읽으면, 분주한 세상에 발맞춘 성경읽기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자기계발 하듯 성경을 읽으면 말씀의 행간에 숨어 계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다.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니, 그분과 교제 나눌 수도 없다. 발견하지도 못했고, 교제 나누지도 못했는데, 성경을 읽었다고 말하는 것은 자기를 속이는 것이다.

 

현대인의 최대 적은 '분주함'이다. 저자는 말한다. "그런 점에서 이 세상을 지배하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사탄의 최고 수단은 쉬지 않고 분주하게 만들기라 할 수 있다"(25). 분주함 가운데 짬을 내서 성경을 읽으며 잠시나마 마음의 평안을 누리고, 잠시나마 '영적인, '은혜로운' 분위를 맛보고 만다면, 그것은 성경을 격언집이나 좋은 말 모임집으로 만드는 일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아주 통렬한 지적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성경읽기를 수행해야 할까? 저자는 말한다. "정신 없이 달리고 잠시도 쉬지 않고 노력해야 지 겨우 버텨낼 수 있는 세상에서, 온몸과 마음을 다해 어떻게든 멈추어 서서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고민하고 궁리하는 것이야 말로 오늘날 사탄을 대적하는 방법이다"(26).

 

'멈추어 서다'는 시편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이다. 시편에 보면 '셀라'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충분히 멈추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야 그 말씀 안에 숨어 계신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분과 교제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분주함'은 이 시대에 사탄이 우리의 삶을 무너뜨리기 위해 쓰는 가장 강력한 전략 무기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멈추어야 하건만, 우리는 반대로 최선을 다해 '분주함' 가운데 머물려 한다. 분주함 가운데 자기를 밀어 넣어 놓고, 거기서 자신을 꺼내면 가만히 안 둘 태세로, 그 분주함에서 나오려 하지 않는다. 분주함 가운데 들어가면, 아무것도 안 들리고 아무것도 안 보인다.

 

그래서 저자는 성경을 읽고 묵상하기 위해서,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분주함에서 벗어나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일에 "목숨을 건 싸움"을 해야 한다고 도전한다. "이 분주한 시대에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은 그야말로 목숨을 건 싸움이다"(26).

 

우리는 무엇을 위해 분주한가? 우리는 무슨 싸움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어디에 목숨을 걸고 있는가?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일,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일을 위해서 목숨을 건 싸움을 하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아멘.

Posted by 장준식